한국단편문학

며 느 리 - 이무영 -

하얀모자 1 2022. 10. 21.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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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며 느 리 "

                                                                 - 이 무 영 -
 
   1
 
“얘들아, 오늘은 좀 어떨 것 같으냐?”
부엌에서 인기척이 나기만 하면 박 과부는 자리 속에서 이렇게 허공을
대고 물어보는 것이 이 봄 이래로 버릇처럼 되어 있다.
어떨 것 같으냐는 것은 물론 날이 좀 끄무레해졌느냐는 뜻이다.
다른 날도 아닌 바로 한식날 시작을 한 객적은 비가 이틀이나 줄기차게
쏟아진 이후로는 복이 내일 모레라는데 소나기 한 줄기 않던 것이다.
이러다가는 못자리판에서 이삭이 날 지경이다.
 
여느 해 같으면 지금 한창 이듬매기다, 피사리다, 매미충이 생겼느니
어쩌니 할 판인데 중답들도 아직 모를 내어볼 염량도 못하고 있다.
밭도 그대로 퍽 묵어 자빠졌다. 오이다, 열무다, 목화다, 제철 찾아
심기는 했으나 워낙 내리쪼이기만 하니까 싹이 트다 말고
 모두 시들어버린다.
 
“하늘은 방귀두 안 뀌구 오줌두 안 눌라구?
   설마 망종까지야 한 보지락 하겠지.”
 
이 설마가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망종이 지나고 하지가 되어도
거짓말처럼 비 한방울 하지 않는다.
설마를 믿고 호미모를 냈던 사람들도 물을 대다 대다 지쳐서
 나자빠지고 말았다.
 
“아니 그래, 이런 놈의 하늘이 있단 말인가? 7년 가뭄에 비 안 오는 날
  없다더구먼서두 이건 그런 빗방울 한번두 하질 않으니.”
 
농군들은 어처구니가 없어했다.
 
“그눔의 원자탄인가 뭔가 때문에 천지 조화가 생겼다더니 아마 그게
  정말 인 모양이지? 그렇잖구서야 요렇게 흐려보지도 못할 수가 있담!"
 
단오도 휙 지나갔다.
그래도 죽네사네 하면서도 단오절이면 인조견 나부랭이라도 떨치는
아이들이 보이고, 누가 서둘러서던지 동구 밖 느티나무에 그네라도
매었으련만 아이들이 끙게도 없는 새끼줄 그네를 버드나무 가지에 매고
싸움박질을 할 뿐이다. 그네고 자시고 할 경황이 없는 모양이다.
 
달걀 노른자위처럼 삼배출짜리로만 속 뽑아 차지한 구장네 빼어놓고는
논 묵히지 않은 사람이 없다. 한식 때 한번 젖어본 채로 가랑비 한번
오지 않았고 보니 논바닥이 아니라 그대로 타작 마당처럼 굳었다.
하불하 네댓 보지락은 와야만 모라고 내어볼 형편이다.
 
“다들 굶어죽었군! 굶어죽었어! 아마 인제 우리 나라에 떼정승이
  날려나부다!”
 
굶어죽기란 정승 하기보다도 어렵다는 말을 빌려 하는 소리다.
물길만 믿고 모를 냈던 논들도 요새는 물 퍼대기에 온 집안이
 논두렁잠을 자지 않으면 안 되었다.
누가 내 배 다치랴 싶게 거드름을 피우던 구장까지가 요새는
 아들이 갖다 준 군대 우장을 뒤집어쓰고 저녁이면 논으로 나간다.
 
이런 판국이니 온 동리 사람들이 다 고르고 난 찌꺽지만 얻어 차지한
 박과부네야 더 할 것도 없다. 순조로워야 마석이나 얻어먹는
 너 마지기가 그대로 쩍 갈라진 채 나자빠져 있던 것이다.
작년 일년내 박 과부는, 두 며느리에 지금은 무남독녀처럼 되어버린
 복녀까지를 끌고 다니며 극성을 부려서 퇴비를 천 관 가까이나
 장만했었다.
그래서 장려상까지 탔지마는 박 과부의 욕심은 금년에는 아랫배미
 두 마지기에서는 양석을 한번 내어보자던 뱃심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양석은커녕 꽂아보지도 못하게 되었고 보니 기가 찰밖에는 없다.
하는 수 없이 메밀이라도 뿌려둔다고 군대에 가서 있는 둘째아들 창수가
지난 정월 달에 벗어던지고 간 군대 잠바에다 돈도 삼백환이나 얹어주고서
메밀씨를 구해다 놓기는 했으나 아직도 초복 전인지라 미련이 있어서
심지를 않고 아침이면 이렇게 며느리들보고 그날 일기를 물어보는 것이다.
 
 
 
   2
 
그러나 박 과부가 새벽마다 며느리들한테 그날 일기를 묻는 데는
 또한 딴 이유가 있다.
그날의 날씨도 날씨지만 며느리들의 대답으로, 그날 며느리들의 마음속을

 점쳐 보기 위해서다. 박 과부는 아직도 쉰을 둘 넘었을 뿐이요,
 자리잡아 드러누워 있는 병자도 아니다.
해가 뜨도록 질펀하니 드러누워 있는 그런 성미도 못 된다.
 
그러고 보니 눈이 뜨이는 길로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하늘을
치어다 볼 수도 있건만 반드시 두 며느리한테 그날 일기를 묻는 것은,
며느리들의 대답소리로 그날 며느리의 기분을 살피자는 수단인 것이다.
 
“얘들아, 오늘은 좀 어떨 것 같으냐?”
 
하는 소리는 비가 옴직하냐는 소리도 되거니와,
 
“얘들아, 너희들 기분이 어떠냐?”
 
하는 질문과도 같다.
 
“안개만 자옥해요!”
 
라든가 또,
 
“틀렸나봐요!”
 
또는,
 
“빈커녕 눈두 안 오겠어요!”
 
이런 대답 내용으로도 며느리들의 그날 일기가 짐작이 되었지만
말소리로도 며느리들이 부어 있는지, 신푸녕해하는지,
 기분이 가라앉았는지가 짐작이 간다.
먼저 부엌에 나온 것이 어떤 며느리인가를 알기 위한 방법도 된다.
원래 따지자면 작은며느리가 먼저 일어나 나와야 한다.
그러나 매양 먼저 대답하는 것은 큰며느리다.
작은며느리가 먼저 일어나와야 할 계제인데 그것이 나중 나오면,
 
‘아니, 저것이 또 딴생각을 하는 것이나 아닌가?’
 
이런 걱정이 앞서고, 큰며느리가 먼저 나오는 것을 보면 박 과부는 한편,
 
‘그래두 낫살 더 먹은 것이 낫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 큰며느리가 의젓해 보이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아니, 큰것이 먼저 나온 걸 보면 간밤 또 잠을 못 잔 게 아닌가?
  쓸쓸한 자리 속에 질펀히 들어 있기가 싫으니까 뛰쳐나오는지도
  모르리 ─’
 
이런 불안이 또 머리를 들고 일어선다.
그렇다고 박 과부가 수다스러운 사람이래서만도 아니다.
남편이 왜정 때 징용으로 일본 야하다 제철소에 끌려갔다가

 기계에 치여 죽은 지 십 년이다.
이 십 년간의 중년 과부 생활이 자연 박 과부를 거세게 만들었고,
다심하게만 했지만 두 며느리한테 신경을 쓰는 것은 반드시 그의
 성격 때문만은 아닌 것이,
두 며느리가 다 요새 와서 마음이 들뜬 것처럼 보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큰며느리는 시어머니와 같은 신세였고,
 둘째는 남편이 있기는 하지만 생과부다. 작은아들 창수는 결혼한 지
 석 달 만에 군대에 끌려가서 벌써 삼 년째나 되는 것이다.
 이 달에는 풀린다, 새달에는 풀린다, 편지만 오다 또 꿩 구워 먹은
 수작이었고, 부양 책임이 있는 집 자식은 곧 제대를 시킨다는
 구장 말만 듣고 면소에도 몇 번이나 쫓아갔었다.
아버지도 없는 두 자식 중에 큰아들 창선이는 휴전이 되기 바로 직전에
 전사를 했고, 둘째아들 창수가 군대에 갔고 보니 그런 법이 생겼다면
 응당 창수만은 돌아와야 하느니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말뿐이지 또 흐지부지하고 말았다.
진정서를 내면 된다는 바람에 삼백환이나 들여서 대서를 시켰더니 반장,
구장, 면장의 증명이 없다 해서 무효가 되었다던 것이다.
그래서 또 몇 달째 미적미적 밀려오고 있다.
큰며느리라야 이제 겨우 스물여섯이고 보니 그야말로 청상과부다.
창선이가 전사했다는 소문이 돌자 동리 사람들은,
 
“글쎄, 창선이 댁이 붙어 있을까? 자식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깐 계집애 하나 ─”
 
이렇게 은근히 걱정을 했었다.
동리 사람뿐만 아니라 박 과부도 그랬다. 아이가 삽삽하고 붙임성도 있고,
워낙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고생을 하고 자란 터라 속도 틔었다지만
나이 이십에 뭣이 미진해서 이런 집에 붙어 있으랴 했다.
 
‘저것이 머슴애이기나 했더라면 ─’
 
박 과부는 손녀를 바라보면서 몇 번이나 이렇게 한탄을 했었다.
아들이었더라면 혹시 그것한테나 마음을 붙이고 붙어 있을지도 모른다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장사랍시고 지낸 지 한 두어 달쯤 되어서던가 한번 박 과부가
 선손을 써본 적도 있다.
 
“얘, 애 어미야, 너 기나긴 청춘을 어떻게 저것만 바라구 살 수
  있겠느냐. 나야 네가 저것한테라두 맘을 붙이고 있기를 바라지만
  어디 너한테야─”
 
이렇게 며느리의 마음을 떠보려니까 며느리는 펄쩍뛰었었다.
 
“아니 어머니두, 망측한 말씀을 하시네요!
  아마 어머니가 제가 싫어지셨나봐.
 암만 싫다셔두 이 집에서 단 한 발자국두 나가질 않을 테니
 그런 줄 아셔요, 어머니.”
 
이렇게 나글나글 웃기까지 했었다.
그런 큰며느리였다.
그래도 말은 그랬지만 어디 그러랴 했다. 그러나 한결같은 며느리였다.
 아니 제 남편이 살았을 때보다도 더 자상했다.
 
“이것 어머니나 잡수셔요. 전 많이 먹구 왔어요.”
 
유가족 위안회에 초대를 받고 여주 읍내에 갔다 온 며느리는,
거기서 주더라는 도시락을 고스란히 싸들고 왔었다.
 박 과부는 정말인 줄 알고 그 도시락을 둘째며느리하고
나누어 먹고 말았더니, 후에 밖에서 듣고 나니 그것 하나 주고 말았다던 것이다. 

그런 며느리였다.
그렇던 며느리가 작년 가을부터 확실히 눈치가 좀 달라진 것이다.
박 과부는 자기가 보낸 십 년 동안을 생각해보고는,
 
‘젊디젊은 것이 사내 생각도 나겠지 ─’
 
이렇게 너그러이 보아주기로 했었지만 올 봄 접어들면서부터는 전에 없던 

퉁명도 생겼고, 어떤 때는 팩하고 맞서려고도 든다.
 한식철만 지나면 농가에서는 눈이 핑핑 돌아간다.
볍씨도 담가야 했고, 못자리판도 마련해야 했고, 온갖 밭곡식도 파종을
 해야 했다. 보리밭도 매고 거름도 주어야 했다.
이렇게 한창 달구치는 판에 떡 친정에를 다녀온다고 나서는
 며느리기도 했다. 박 과부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얘야, 네가 정신이 있는 사람이냐?
 그래 봄에 온 사둔은 꼴두 보기 싫다는데
  이 바쁜 철에 사둔집엘 간다구 나서?
  네가 맘이 변해두 이만저만 변한게 아니로구나!”
 
그 말을 듣고 나니 방순이는 찔리는 데가 있다.
어려서부터 농가에서 자랐기도 하지만
하루하루 곡식 커가는 데 여간 재미를 붙이던 방순이가 아니다.
시집을 오던 해다. 창선이가 철도 아닌 봄 학질을 앓았었다.
 골이 쪼개지는 것 같다고 하며 머리에 물수건을 대어달라던 것이다.
방순이는 물동이를 이고, 한데 우물로 찬물을 길러 간 것이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얼마 만에야 들어온 며느리를 보고 박 과부가,
 
“넌 우물을 팠느냐?”
 
하고 물으니까,
 
“밭에 좀 들러 왔어요.”
 
“병자 위해서 물 길러 간 사람이 밭엔 웬 밭?”
 
“외가 싹이 났나 해서요, 간밤 꿈엔 안 났겠지요?”
 
“그래 싹이 났던?”
 
박 과부도 대견해서 웃었었다.
 농갓집 맏며느리는 저래야 하느니라 했던것이다.
 
“요만콤 뽀쪽이 나왔어요, 어머님! 어떻게나 귀엽던지
  똑 따주고 싶겠지요!”
 
“너 그러다가 네 남편한테 외싹이 더 중하냐구 쫓겨날라.”
 
고마워서 한 소리였다.
 
“쫓아내면 쫓겨가지요 뭐, 어디 가면 외싹 없을라구요.”
 
“저런 망할 것, 그래 남편보다두 외싹이 더 대단하다는 거야?”
 
하고 창선이가 방에서 소리를 쳤을 때도,
 
“남편 없이는 살겠어두 곡식 기르는 맛 없인 못 살아요!”
 
이런 방순이었었다.
이렇던 며느리가 이 바쁜 봄철에 친정에를 가겠노라는 것이다.
 
“오냐, 네 맘 내키는 대루 해라만서두 ─”
 
하고 박 과부는 앵동그라졌다.
 
“아마 봄철에 친정 간다는 사람은 세상을 발칵 뒤집어두 너밖엔
  없을 거다! 네가 다 날 업수이 여기구 하는 수작인 줄 나두 안다.
  할 대로 해!”
 
아들이 아직 살아 있었을 때의 박 과부는 며느리를 들볶아대는 시어미는
아니었지만 아직 젊은 과부였더니만큼 그렇게 녹록한 시어머니도
아니었었다. 자식이 며느리 방에 들어간다고 트집을 잡아 죽네사네
나대기까지는 않았어도, 며느리 방에서 나오는 아들을 보는 눈은
 어느 때 한번 모질지 않은 때가 없었다.
 
그러나 자식이 덜컥 죽고 난 다음부터는 자기도 모르게 큰며느리를
바라다 보는 눈은 달라졌었고, 말소리에도 가시가 돋지는 않았었다.
 
“그래, 정말 가겠다는 거냐? 어서 가봐라. 가서 아주 올 것 없다!
  지금이 어느 철인데 사둔집엘 간다는 거야!”
 
아들이 죽은 후로 이렇게 며느리한테 모진 소리를 하기도 처음이었거니와
며느리 또한 시어머니의 뜻을 무시하기도 그것이 처음이었다.
 
“어디 사둔집인가요? 친정집이지요! 누가 오래나 있겠답니까?
  하두 꿈자리가 뒤숭숭하니까 잠깐 다녀만 오겠다구 그러지 않아요!”
 
“오냐, 맘대루 해! 말리잖을 테니 맘대루 하란 말야.
  언젠 네가 어른을 어른으루 알았더냐? 시어미 대접을 했구?”
 
이런 말다툼을 하고서도 며느리는 기어코 어린것을 끌고 저의 집에를
 갔다왔던 것이다. 생각더니보다는 일찍 돌아왔었다.
그러나 날짜가 문제가 아니다. 가지 말라는 데 갔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고부간 사이에 틈이 벌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며느리가 시어미 말을 거역했다는 이 엄연한 사실이 박 과부의 의혹을
 샀었고, 그렇게 보고 나면 그럴 만한 일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올 정월달에도 집에를 갔다 왔는데 또 간다는 것도 우습거니와,
 요 한 보름 전에는 육촌오라버니인가 뭔가 된다는 젊은 아이가 다녀갔고

  편지도 두 번이나 왔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박 과부는 그 육촌오라비라는 사나이가 심상치 않으니라 한 것이다.
 치마에 바람이 나게 나대어도 미처 손이 안 돌아갈 봄철에
 일손을 쥔 채 맥놓고서 섰기가 일쑤다.
밭을 매다가도 그랬다. 절구질을 하다가도 그랬었다.
 그럴 때마다 박 과부는,
 
“얘야! 넌 절구질을 하다 말구서 뭘 그리 섰는 거야!”
 
하고 쏘아붙일라치면 제라서 질겁을 해서 다시 일손을 잡지만
 그때뿐이었다.
 
“넌 아무래두 탈이 난 사람인가부다. 일하던 사람이 일엔 정신이 없구
  뭔 생각에 팔리는 거냐?”
 
“……”
 
“그럴 마련이면 아주 요정을 내자, 너 갈 데 있건 가구.”
 
“……”
 
어느 뉘 집 개가 짖느냐는 투다.
그러면 박 과부는 속이 왈칵 뒤집혀지고 말던 것이다.
 
“복녀야, 너 네 큰형이 혹 보따리를 싸는가 잘 보살펴라.”
 
장터에 나가지 않으면 안 될 때는 박 과부는 딸한테 슬며시 귀띔도 한다.
여인네만 살고 있는 터고 보니 사내처럼 나돌아야 할 일도 많던 것이다.
 
“왜, 어머니?”
 
“글쎄, 잘 챙겨보란 말이다. 너 두구봐라. 네 큰형은 맘이 변했어,
  인제 제 집으루 간다구 내댈 께니 두구봐.”
 
“설마!”
 
하고 아직 열다섯밖에 안 된 복녀한테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설마가 뭐야, 잘 살펴봐?”
 
박과부는 이렇게 장담도 했지마는 역시 나이를 먹으니만큼 짐작도 빨랐다.
큰며느리 방순이는 첫정월에 친정에를 다녀온 뒤부터 시집을 떠날 

궁리만 해오고 있던 것이다.
이 이상 혼자는 견디기가 어려웠었다.
 
 
 
   3
 
방순이가 기어코 이 집을 나가리라는 결심을 마지막으로 한 것은 단오날 저녁이었다.

 방순이는 저번에 육촌오라버니라고 시어머니한테
거짓말을 한 춘근이와 그런 약속까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단오에는 친정에 다녀서 오마하고 그 길로 곧장 영등포로 오라던 것이다.
방순이도 그러마 했었다.
춘근이와는 어려서부터 잘 알던 사이다.
방순이가 국민학교를 졸업했을 때는 춘근이는 서울 상업학교 고등과
1학년이었다. 어려서는 서로 욕지거리도 하던 사이였지만 커갈수록에
길에서 마주치면 외면도 했고, 방순이가 이성이라는 것에 눈을 뜨기
시작했을 무렵 춘근이는 서울 여학생과 결혼을 하고말았다.
 
물론 춘근이와 그런 약속을 한 적도 없고, 서로 손 한번 만져본 일도
없기는 했지만 방순이는 꼭 속아넘어간 것만 같았다.
 말하자면 방순이가 짝사랑을 한 셈이었다.
방순이가 열여덟 살 때 일이다.
 
그뒤 방순이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창선이와 결혼을 했고,
 춘근이의 이름조차도 잊고 살아왔었다.
그 춘근이를 지난 정월 집에 갔다가 우연히도 만났던 것이다.
춘근이는 아내한테 아이가 없어서 늘 불만이란 이야기는
전에도 들었었지만, 지난 겨울에 아주 헤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영등포에서는 자동차 부속품 장사를 조그맣게 차려가지고 먹을 것은
 걱정이 없다고도 했다. 바로 보름날 밤이었다. 춘근 누이동생 춘자도
 친정에 와 있어서 방순이는 오래간만에 코를 같이 흘리던 동무와 함께
 동리 처녀애들과 팔뚝 맞기 화투장난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춘근이가 들어오면서,
 
“나두 한몫 끼자꾸나.”
 
이렇게 달려들었었다.
 
“아니 오빠두, 남 여자들 노는데 남자 양반이 왜 뛰어들까?”
 
하고 춘자는 나무라면서도 자리를 마련해준다.
 방순이도 맞았고 춘근이가 맞기도 했다. 세번째인가 방순이가 졌을 때다. 

춘근이는 방순이의 손을 쥐는 것이 아니라 사뭇 잡던 것이다.
 은근한 이야기를 하듯 손에다 힘을 자그시 주면서,
 
“울면 안 돼요! 지금까진 사정을 봤지만 아까 방순이가 날 몹시
 때렸으니까 나두 사정을 안 볼 테야, 골 내지 않지요?”
 
춘근이는 이런 소리를 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방순이의 손가락이
아플 만큼 춘근의 손아귀에는 힘이 주어진다.
방순이의 손을 잡는 기쁨을 연장하기 위해서였던지도 모른다.
방순이도 어쩐 일인지 그것이 싫지가 않았다.
아니 싫기는 고사하고 호젓한 행복에 잠겨지는 것 같은
 기쁨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걱정 마세요!”
 
“정말?”
 
“그럼요, 춘자 오빠쯤한테 맞아선 아프지 않아요!”
 
방순이도 이 행복된 ─ 남편이 출정한 뒤로 그리우고 살아온 남자의
살결에서 풍기는 황홀한 체취에 잠기는 기쁨을 연장시키고 싶어졌었다.
춘근이한테 맞는 매도 행복일 것만 같다. 살짝보다도 호되게 맞고 싶다.
이것이 인연이 되었다.
 남편을 잃은 후로 막은 물처럼 괴었던 남성에게 대한 정열이
터진 물처럼 춘근이를 향하여 쏟아져갔다. 둘은 살짝 두 번이나 만났다.
춘근이는 방순이한테 모든 것을 요구도 했다. 방순이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러고 싶기도 했었다.
 다만 갈 데까지 못 간 것은 그럴 기회와 장소가 없었을 따름이었다.
 
“방순이, 내 얘기 들었지?”
 
“들었어요.”
 
“그럼 나하구 서울로 가자구. 서루 모를 사이두 아니구.”
 
“춘자 오빠야 얼마든지 색시 장갈 갈 수 있을 텐데 뭘 그래요?”
 
“색시 장가? 그런 것 비린내나는 것들보다 난 방순이가 좋아,
 다 인연이야. 원랜 방순이와 혼인을 했었어야 했을 겐데 사주가
 바뀌었던가봐. 그래노니까 방순인 그렇게 됐구, 난 또 이렇게 된 거야.

  사람이란 다 연때가 맞아야 하는 게지.”
 
“아인?”
 
“떼두고 와요!”
 
그 짓만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처음뿐이었다.
정도 들었지만 춘근이한테까지 남의 씨를 끌고 다닐 수는
 없다 싶었던 것이다.
 
“지금서 얘기지만 나 방순이하구 결혼하구 싶었다오.
  결혼을 하구서두 방순일 늘 생각했었어.
  정말 방순인 이런 구석에서 썩기가 아까운 사람야.”
 
“괜시리 그러지 뭐.”
 
“괜시리가 다 뭐야, 방순이가 화장이나 하구 옷이나 쪽 빼보라구.
  서울 장안에서두 방순이 인물 당할 여자라군 몇 안 돼요!”
 
춘근이는 이런 소리도 했었다.
친정어머니는 그런 속도 모르고 걸핏하면 춘근이 욕을 한다.
펑펑댄다는 것이다. 거짓말도 곧잘 하는 눈치라기도 했었다.
 
“그 사람 말은 콩으루 메줄 쑨대두 도시 곧이들리지 않더라.
  그저 저 혼자 잘났다지!”
 
어머니의 이런 험담까지도 귀에 거슬리게쯤 된 방순이었다.
그래도 친정에서 시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방순이의 머리도 좀 식었었다.
 
‘안 될 말이지! 말이 되나!’
 
이렇게 저 자신의 허벅다리를 꼬집기도 했고,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어린딸을 품안에다 바짝 끌어다가 얼굴을 비벼대기도 했었다.
 
‘안 되구말구! 우리 불쌍한 애길 두구서 어떻게! 내가 환장을 했나봐!’
 
그러나 이러한 뉘우침도 사나이에게서 풍기던 살내가 한번 코로 스며들기
시작만하면 걷잡을 수가 없이 되는 방순이었다.
 오랫동안 주리며 살아온 살내였다.
한 복중이었건만 가슴 한구석에서 찬바람이 일기 시작만 하면
내장을 그대로 휩쓸어가는 것 같다. 몸이 비비 뒤틀리며 목 안이 타온다.
그럴때면 아이고 뭣이고 다 내어 던져버릴 수 있을 것 같아지는 것이다.
 
‘그까짓 계집애. 제 자식의 씬데 어련히 잘 기를라구!’
 
방순이를 이런 애욕의 함정 속에다 잡아넣은 데는
 또한 작은며느리 분녀가 한몫을 보아준 것은 사실이다.
작은며느리는 나이 스물셋이었다.
 얼굴이 동그스름한 것이 이쁘다기보다는 귀여운 얼굴이다.
 이 분녀는 그래도 일년에 한두 번씩은 사내가 다녀가건만
 작년 초가을부터 살짝이 자리에서 빠져나가고는 한다.
똑똑히는 몰라도 짐작건대 구장 집 작은아들인 성싶었다.
서울 가서 대학을 다닌다고 논 팔아라, 밭 팔아라 하더니만
 구장도 더 댈 수가 없던지 불러내렸다.
 하는 일도 없이 빈들거리면서 구장 일을 대신 보기도 한다.
 그런 위인이었다.
분녀가 빠져나갔다가 돌아온 이튿날 아침에 볼라치면
 얼굴이 밤 사이에 불콰해진 것도 같다. 생기까지 돌았다.
 
“자네 오늘 아침엔 아주 얼굴에 화기가 도네나.
  뭐 좋은 일이 있을려나 보지?”
 
차마 간밤에 좋은 일이 있었느냐고 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말할라치면
동서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면서도,
 
“행!”
 
역시 기쁜 모양이었다. 얄미운 생각도 없지 않았다.
아직도 나이 어린 것이 착살맞게도 사내한테 바치는 꼴이 곧 쥐어박고도 싶다.

 그렇다고 그런 이야기를 시어머니한테 토설할 수도 없다.
 
“자네 어딜 갔다 오나?”
 
한번은 참다못해서 들어오는 동서를 나무란 일도 있다.
 
“설사병 땜에 큰일났어요!”
 
‘요 앙큼한 것!’
 
곧 이런 소리가 나가는 것을 꾹 참았다.
 디딤돌 뒷간이고 보니 그런 앙큼한 거짓말도 못하련만
 사내에 눈이 어두워지면 그런 분간도 안 가는지 모른다 싶다.
이 동서가 구장 집 작은아들을 만나고 오는 동안이란 방순이한테는
 정말견딜 수 없는 시간이었다. 괘씸한 생각, 얄밉고 착살맞은 생각 ─
 이런 증오의 감정도 감정이려니와 젊은 사나이의 품안에 안기어
 숨을 할딱일 동서를 상상할 때,
방순이는 일종 회오리바람 속에 휘갑을 당하던 것이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순간이었다. 참기 어려운 격정이기도 했었다.
 
‘동세년이 저쫀데 나꺼정 가버려?’
 
이런 생각을 할 때는 방순이도 제정신으로 돌아간 때다.
그러나 그런 반성이란 역시 의지였다. 생리는 아니다.
 
 

   4
 
초복을 지난 지 사흘째 되는 날 밤 방순이는 드디어 결심을 했다.
그 전전날 춘근이 한테서 편지가 왔던 것이다.
시어머니란 까막눈인지라 편지를 본대도 무슨 그림인지도 모르겠지만,
시누이는 그래도 국민학교 3학년까지는 다닌 터라 그럭저럭 뜯어볼 줄은 알아

 은근히 마음을 졸이었지만,
그날은 마침 들깨밭을 매고 있는데 학교에 갔다 오던 동네 아이가
우체부가 주더라면서 편지 한 장을 주던 것이다.
마침 시어머니는 둑 너머 고추밭에 내려가고 없었다.
6월 유두날 새벽 장수리 버스 정거장으로 나오라는 것이다.
 
“… 오라비 유두날 여주 올라간다.
  한번 만나고 싶다마는 만날 길이 없구나. 기별 할 것이 있거든
  네가 그리로 나오든지 사람을 내어보내든지 해라…”
 
이런 사연이 무슨 뜻인지 방순이는 잘 알고 있다. 나올 때는 아무것도 생
각 말고 입은 채로 살짝 나오라는 말은 전부터 해오던 부탁이다.
사실 또 헌 털벵이를 들고 나갔자 서울 바닥에 가서 걸칠 만한 것도
못 된다. 저녁을 먹고 동서가 복녀와 목말을 하러 간다고 나간 틈에
 인조견 치마 두 개와 적삼 한 개를 뚜르르 말아서 장 뒤에다 숨겨놓고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다.
 
장수리라면 친정 가는 길과 정반대 길인지라 들킨다 해도 잡힐염려는
 없다. 춘근이가 그런 데까지 머리를 쓴 것이 고마웠다.
이제 남은 일이란 과부 시어머니에 어린 자식까지 내어던지고
 도망을 하는 자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는 일뿐이다.
 
‘그런 시어머니하구 ─’
 
방순이는 이렇게 트집을 잡아본다. 전에는 흉이 아니었지만,
사실 남편이 있을 때는 뭐니뭐니 트집을 잡아서 들볶기도 한
시어머니라 했다. 과부치고서는 심한 시어머니도 아니었지만,
 지금 방순이는 지난날 남편이 살았을 동안 가끔 가다가 
 들거울러 넘기던 심한 시어머니만을 기억에 살려보는 것이다.
아들이 좀 일찌감치 아내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 심통이 나서
 뭐다뭐다 자꾸만 불러내던 것이다. 아들도 그런 어머니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던지라 곧잘 말을 듣다가도 어떤 때는,
 
“머리가 아파서 그래요! 좀 내버려둬 줘요!”
 
하고 퉁명을 부리기도 했다.
 
그러면 과부 어머니는 봉당에 털썩 주저앉아서는 푸념을 해대던 것이다.
한번은,
 
“너 이놈, 네 계집만 아느냐!”
 
하고 여편네 역성을 한다고
머리를 끄어들고 주먹으로 아들의 등을 펑펑 팬 일도 있다.
 
‘그런 시어머니 밑에서 어떻게…’
 
방순이는 이렇게 자기를 합리화시켜간다.
 
‘시뉘년이란 것도 그렇지! 여우처럼 눈치만 살살 보구,
  있는 말 없는 말 고자질이나…’
 
하다가 방순이는 멈칫 했다.
몸이 달아서 시누이까지 끌고 들어가보려 했지만,
아무리 따져보아도 시누이는 그런 시누이가 아니다. 아직 나이 어려도
오라범 댁을 불쌍하게 여기었고, 조카도 귀여워했고 먹을 것이 생겨도,
 
“언니 좀 먹어요. 먹어야 젖이 나지!”
 
이런 시누이였다.
 
‘죄로 가지! 그 시뉠 모함하다니 ─’
 
정말 궁했다. 아무리 시어머니를 몹쓸 시어미로 몰아보아도 그랬고,
시뉘를 끌고 들어가보아도 어린 자식에 과부 시어머니를 두고,
사내 꽁무니를 따라가는 자기를 떳떳하게 만들어줄 구실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궁지에 빠진 방순이를 건져준 구실이 나섰다.
방순이는 눈이 버언했다.
가난이었다! 거기다가 삼십 년째 처음 볼 가뭄이라는 것이다.
 
‘뭘 먹구 살아?’
 
사실 작년은 흉년도 아니었건만 겨우내 죽으로 살다시피 했었다.
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질경이죽이 끽이었다.
 
‘지겨워! 난 그런 배 곯군 못 살아! 내가 나가면 나 한 입이라두
  덜어주는 셈이지!
  사람 한 입이 얼마라구. 나 하나 없어두 그깐 농사 질 게구…’
 
정말 살 길을 찾기나 한 것처럼 눈앞이 훤해 온다.
 
‘그래야지! 내가 한 입이라두 덜어주어야지,
  서울 가서 돈푼이라두 만지면 얼마씩이라두 보내주지.
  그게 더 잘하는 일이지. 진순이년한테만 해두 그렇지,
  죽두 못 얻어먹는데 어미가 나가면 그래두 한 입이 주는 셈이구,
  거기다 또 돈푼이나 보태준다면 ─’
 
사실 방순이는 자기 행동을 싸고 돌려서가 아니라
호미모도 못 꽂은 채 나자빠져 있는 논바닥들이 눈앞에 서언했다.
 밭곡도 새들새들 말라가고 있었고,
오늘만 해도 땡볕만 내리쪼이어 나뭇잎까지도 후줄근했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곡식과 함께 살아온 방순이다.
어른들한테서 듣고 보고 해서이기도 하지만,
 가뭄에 타죽어가는 곡식을 보는 것은 정말
자기 자신이 말라들어가는 것 같은 고통이기도 했다.
사실 비가 푸근히 와서 곡식들이 거무데데하게 부쩍부쩍 자란다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싶다.
그러고 또 곡식들이 그렇게 자라기 시작하면 그런 잡념이
 생길 틈이 없었을 것이다.
 
들에 나가보면 논은 묵어자빠졌고, 수수다, 조다, 심지어 그것도 입에
 넣는 곡식이라고 옥수수까지 잎이 새들거린다.
 날로날로 말라 비틀어지는 곡식 잎을 보니 사람도 그대로
시드는 것만 같았다. 아니 곡식 시들고 농군이 살찐 일도 없다.
 
“옛날 같았으면 만주 이민으루나 나선다지, 인제 다 굶어죽었다. 하늘도
  인종이 너무 많으니까 좀 인종을 줄이자는 거야.”
 
노인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하던 소리들이다.
 방순이는 잘 생각했으니까,
 하면서도 역시 한편으로는 달아난 뒤에 동리여편네들이 주고받을
 욕지거리를 생각만 해도 진땀이 솟는다. 무섭기까지하다.
 
“그런 화냥년, 아무리 사내가 그립기루니 늙은 과부 시어미에
  어린 자식까지 내던지구 ─”
 
이런 소리가 곧 귓전에서 난다.
그러면 방순이는 또 흉년을 내세운다.
 이 흉년에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 했다.
방순이는 또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진순한테두 그래 어미가 있어 굶기기보다는 하다못해서
  옷 한 가지씩을 해 보낸대두 ─’
 
벌써 구실이 아니었다. 그것이 도리일 것만 같다.
 
‘시어머니두 그러길 바랄지두 모르지 않나.
  한 달에 단돈 몇 푼씩만이라두 보태주면…’
 
이런 결심이 선 것은 첫닭이 호들갑을 떨며 울어댈 무렵이었다.
 간밤에두 살짝 빠져나갔다가 들어온 동서는,
 
“내가 무슨 걱정, 내 팔자를 봐요!”
 
하는 듯이 네활개를 펴고 잠이 들어 있었다.
 
방순이는 죽은 듯이 자리에 들어 있었다.
 닭이 두 홰만 울면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시간이 가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조바심까지 난다.
 장차 저지르려는 일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진땀이 자꾸만 흐른다. 마치 무더운 날씨같다.
 
그러다가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잠시라도 눈을 붙이잔 것이다.
꿈이었다. 벼락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번개도 났다.
 대낮처럼 밝아지더니만
또 ‘꽈르르 꽈르르’ 어디를 내려조진다. 무서운 비였다.
 아니 비가 아니라 사뭇 폭포다.
 
“에이구, 잘 쏟아진다. 며칠이든지 나려 퍼부어라.”
 
꿈속에서도 방순이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와지끈와지끈 벼락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세상을 다 깨어 두드려 부수어도 좋으니라 했다.
세상이 반쪽이 되더라도 비만 오라 했다.
 그러다가 방순이는 눈이 번쩍 뜨였다.
꿈속에서 들은 벼락소리와 빗소리는 아직도 그의 귀에 남아 있었다.
아니 아직도 와지끈거리고 비가 폭포처럼 내리 퍼붓고 있다.
 
‘빨리 달아나자!’
 
꿈이건 생시이건 지금의 방순이한테는 큰 문제가 아니다.
 그저 빠져나갈궁리밖에 없었다.
방순은 눈을 뜨면서 벌떡 일어나서 장 밑을 더듬었다.
 손에 잡히는 것은 보퉁이다.
보퉁이를 잡은 방순은 정신이 얼떨떨해졌다.
 꿈인지 생시인지도 구별이 나지 않는다.
 아직도 비가 퍼붓고 있었다.
 벼락소리도 마찬가지다. 번개도 치고 있었다.
 
‘꿈이다!’ 하고 방순은 멍청했다.
 
‘아니다! 생시다!’
 
꿈도 같았고 생시도 같았다.
 
‘꿈인가?’
 
‘생신가?’
 
또 한번 어리둥절하고 나서야 방순이는 그것이 꿈이 아닌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생시였다. 빗소리가 우레 같다.
 추녀 물이 아니라 물을 쏟는 소리다.
역시 생시였다. 무서운 비였다. 그것이 꿈이 아니고 생시요,
 쏟아지는 것이 비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방순이는 저도 모르게 ─
 정말 자기 자신도 모를 동안에 문을 활짝 열어젖히었다.
 역시 비였다. 번갯불이 확 일며 또‘꽈르르’ 한다.
 
“비가 온다!”
 
문을 열어젖힌 순간 방순의 입에서는 이런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무서운 환희였다.
 그리고 같은 순간에 그는 보퉁이를 내동댕이치면서
  봉당으로 뛰어 내렸었다.
 
“어머님, 비가 와요! 비가!”
 
“어!”
 
하고 박 과부가 고쟁이 바람으로 뛰어나오기까지에 방순이는 아직도
 세상모르고 잠을 자는 동서를 대고 같은 소리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여보게, 비가 오네, 어서 일나!”
 
박 과부도 고쟁이바람으로 어쩔 줄을 모른다.
 
“어머님, 웃다랭이 물길을 타야 하잖아요!”
 
“암 타야지! 타야말구, 젠장, 사람이 있나!”
 
“우리 네 식구 다 달라붙음 안 돼요? 자네두 어서 챙기게.”
 
방순이는 버스 정거장도 잊고 방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마침 쏟아지는 빗줄기를 헤치고 먼동도 터오고 있다.


<195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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