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시인)의 시 모음 14편 1. 저녁 잎사귀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찾아온 것은 아침이었다 한 백 년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내 몸이 커다란 항아리같이 깊어졌는데 혀와 입술을 기억해내고 나는 후회했다 알 것 같다 일어서면 다시 백 년쯤 볕 속을 걸어야 한다 거기 저녁 잎사귀 다른 빛으로 몸 뒤집는다 캄캄히 잠긴다 2. 거울 저편의 겨울 8 흰 지팡이를 짚은 백발의 눈먼 남자 둘이서 앞뒤로 나란히 구두와 지팡이의 리듬에 맞춰 걷고 있었다 앞의 남자가 더듬더듬 상점 문을 열고 들어가자 뒤의 남자는 앞의 남자의 등을 보호하듯 팔로 감싸며 따라 들어갔다 미소 띤 얼굴로 유리문을 닫았다 3. 저녁의 대화 / 한강 죽음은 뒤돌아서 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