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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 (猶豫) - 오상원 -

유예 (猶豫)                                                      - 오상원 -  몸을 웅크리고 가마니 속에 쓰러져 있었다. 한 시간 후면 모든 것은 끝나는 것이다. 손과 발이 돌덩어리처럼 차다. 허옇게 흙벽마다 서리가 앉은 깊은 움 속, 서너 길 높이에 통나무로 막은 문 틈 사이로 차가이 하늘이 엿보인다.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냄새로 짐작하여 그리 오래 된 것 같지는 않다. 누가 며칠 전까지 있었던 모양이군. 그놈이나 매한가지지, 하고 사닥다리를 내려서자마자 조그만 구멍으로 다시 끌어올리며 서로 주고받던 그자들의 대화가 아직도 귀에 익다. 그놈이라고 불린 사람이 바로 총살 직전에 내가 목격하고 필사적으로 놈들의 사수(射手)를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던 그 ..

한국단편문학 2024.11.05

노벨문학상수상 소설가 한강 시(詩) 14편

한강 작가(시인)의 시 모음 14편     1. 저녁 잎사귀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찾아온 것은 아침이었다 한 백 년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내 몸이 커다란 항아리같이 깊어졌는데 혀와 입술을 기억해내고 나는 후회했다 알 것 같다 일어서면 다시 백 년쯤 볕 속을 걸어야 한다 거기 저녁 잎사귀 다른 빛으로 몸 뒤집는다 캄캄히 잠긴다     2. 거울 저편의 겨울 8 흰 지팡이를 짚은 백발의 눈먼 남자 둘이서 앞뒤로 나란히 구두와 지팡이의 리듬에 맞춰 걷고 있었다 앞의 남자가 더듬더듬 상점 문을 열고 들어가자 뒤의 남자는 앞의 남자의 등을 보호하듯 팔로 감싸며 따라 들어갔다 미소 띤 얼굴로 유리문을 닫았다     3. 저녁의 대화 / 한강 죽음은 뒤돌아서 인사..

한국단편문학 2024.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