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문학 115

모범경작생- 박영준 -

모범경작생                                                    - 박영준 -  "얘--- 나 한 마디 하마."    "얘--- 얘 기억(記憶)이 보구 한 마디 하래라.     아까부터 하겠다구 그러던데---."    "기억이 성내겠다. 자--- 한 마디 해 보게."   한참 소리를 하는데 이런 말이 나와 일하던 손들이 쥐었던 벼 포기를 놓았고, 모든 눈이 기억의 얼굴로 모이었다. 목청이 남보다 곱지 못하다고 해서 한 차례도 소리를 시키지 않은 것이 화가 났던지 기억이는 권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있는 목소리를 다 빼어 소리를 꺼냈다.     온갖 물은 흘러 나려두  오장 썩은 물 솟아만 오른다.   같은 논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기억의 미나리곡에 합세하여 다시 노래..

한국단편문학 2024.07.16

모래톱이야기- 김정한 -

모래톱이야기                                                                            - 김정한 -  이십 년이 넘도록 내처 붓을 꺾어 오던 내가 새삼 이런 글을 끼적거리게 된 건 별안간 무슨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서가 아니다. 오랫동안 교원 노릇을 해 오던 탓으로 우연히 알게 된 한 소년과, 그의 젊은 홀어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그들이 살아오던 낙동강 하류의 어떤 외진 모래톱―이들에 관한 그 기막힌 사연들조차, 마치 지나가는 남의 땅 이야기나, 아득한 옛날 이야기처럼 세상에서 버려져 있는 데 대해서까지는 차마 묵묵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건우란 소년은 내가 직접 담임했던 제자다. 당시 나는 K라는 소위 일류 중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한국단편문학 2024.07.09

까마귀 -이태준-

까마귀                                                                          - 이 태 준 -  "호―" 새로 사온 것이라 등피에서는 아직 석유내도 나지 않는다. 닦을 것도 별로 없지만 전에 하던 버릇으로 그렇게 입김부터 불어 가지고 어스레해진 하늘에 비춰 보았다. 등피는 과민하게도 대뜸 뽀―얗게 흐려지고 만다.    "날이 꽤 차졌군……."   그는 등피를 닦으면서 아직 눈에 익지 않은 정원을 둘러보았다. 이끼 앉은 돌층계 밑에는 발이 묻히게 낙엽이 쌓여 있고 상나무, 전나무 같은 상록수를 빼어놓고는 단풍나무까지 이미 반나마 이울어 어떤 나무는 잎이라고 하나도 없이 설―멍하게 서 있다.    '무장해제를 당한 포로들처럼' 하는 생각을 하면서 ..

한국단편문학 2024.07.02

무녀도 -김동리-

무녀도                                                                                   - 김동리 -  1 뒤에 물러 누운 어둑어둑한 산, 앞으로 폭이 널따랗게 흐르는 검은 강물, 산마루로 들판으로 검은 강물 위로 모두 쏟아져 내릴 듯한 파아란 별들, 바야흐로 숨이 고비에 찬 이슥한 밤중이다. 강가 모랫벌엔 큰 차일을 치고, 차일 속엔 마을 여인들이 자욱이 앉아 무당의 시나위 가락에 취해있다. 그녀들의 얼굴 얼굴들은 분명히 슬픈 흥분과 새벽이 가까워 온 듯한 피곤에 젖어 있다. 무당 은 바야흐로 청승에 자지러져 뼈도 살도 없는 혼령으로 화한 듯 가벼이 쾌자자락을 날리며 돌아간다.   .. 이 그림이 그려진 것은 아버지가 장가를 들던 해라 ..

한국단편문학 2024.06.25

김강사와 T교수 - 유진오 -

사진을 클릭해서 크고 선명하게 보세요.                                    김강사와 T교수                                                                                     - 유진오 - 1 김만필(金萬弼)을 태운 택시는 웃고 떠들고 하며 기운좋게 교문을 들어가는 학생들 옆을 지나 교정(校庭)을 가로질러 기운차게 큰 커브를 그려 육중한 본관 현관 앞에 우뚝 섰다. 그의 가슴은 벌써 아까부터 두근거리기 시작하였다. 오늘은 그가 일년 반 동안의 룸펜생활을 겨우 벗어나서 이 S전문학교의 독일어교사로 득의의 취임식에 나가는 날인 것이다. 어른이 다된 학생들의 모양을 보기만 해도 젊은 김강사의 가슴은 두근두근한다. 저렇..

한국단편문학 2024.06.17

불신시대 - 박경리 -

사진을 클릭해서 크고 선명하게 보세요.                          '불신시대'                                                                     - 박경리 -  9․28 수복 전야에 진영(塵纓)의 남편은 폭사했다. 남편은 죽기 전에 경인 도로(京仁 道路)에서 본 괴뢰군의 임종(臨終) 이야기를 했다. 아직 나이 어린 소년이었다는 것이다. 그 소년병은 가로수 밑에 쓰러져 있었는데 폭풍으로 터져 나온 내장에 피비린내를 맡은 파리 떼들이 아귀처럼 덤벼들고 있더라는 것이다. 소년 병은 물 한 모금 달라고 애걸을 하면서도 꿈결처럼 어머니를 부르더라는 것이다. 그것을 본 행인(行人) 한 사람이 노상에 굴러있는 수박 한 덩이를 돌로 짜개서 그 소..

한국단편문학 2024.06.08

돈(豚)- 이효석 -

사진을 클릭해서 크고 선명하게 보세요.                               돈 (豚)                                                                         - 이 효 석 -    옛성 모퉁이 버드나무 까치 둥우리 위에 푸르둥한 하늘이 얕게 드리웠다. 토끼우리에서 하이얀 양토끼가 고슴도치 모양으로 까칠하게 웅크리고 있다. 능금나무 가지를 간들간들 흔들면서 벌판을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채 녹지 않은 눈 속에 덮인 종묘장(種苗場) 보리밭에 휩쓸려 돼지우리에 모질게 부딪친다. 우리 밖 네 귀의 말뚝 안에 얽어매인 암퇘지는 바람을 맞으면서 유난히 소리를 친다. 말뚝을 싸고도는 종묘장(種苗場) 씨돝(씨돼지’의 방언. 충청)은 시뻘건 입에 거..

한국단편문학 2024.05.31

꺼삐딴 리- 전광용 -

사진을 클릭해서 크고 선명하게 보세요.                            꺼삐딴 리                                                               - 전 광 용 - 수술실에서 나온 이인국(李仁國) 박사는 응접실 소파에 파묻히듯이 깊숙이 기대어 앉았다. 그는 백금 무테 안경을 벗어 들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등골에 축축이 밴 땀이 잦아 들어감에 따라 피로가 스며 왔다. 두 시간 이십 분의 집도. 위장 속의 균종(菌腫) 적출. 환자는 아직 혼수 상태에서 깨지 못하고 있다. 수술을 끝낸 찰나 스쳐 가는 육감 그것은 성공 여부의 적중률을 암시하는 계시 같은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웬일인지 뒷맛이 꺼림칙하다. 그는 항생질 의약품이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

한국단편문학 2024.05.23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조세희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조세희 -  1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옳게 보았다. 아버지는 난장이였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아버지를 보는 것 하나만 옳았다. 그 밖의 것들은 하나도 옳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어머니·영호·영희, 그리고 나를 포함한 다섯 식구의 모든 것을 걸고 그들이 옳지 않다는 것을 언제나 말할 수 있다. 나의  모든 것 이라는 표현에는 다섯 식구의 목숨 이 포함되어 있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라도 천국을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

한국단편문학 2024.05.15

할머니의 죽음- 현진건 -

할머니의 죽음                                                                               - 현진건 -   '조모주 병환 위독'   3월 그믐날 나는 이런 전보를 받았다. 이는 xx에 있는 생가(生家)에서 놓은 것이니 물론 생가 할머니의 병환이 위독하단 말이다. 병환이 위독은 하다 해도 기실 모나게 무슨 병이 있는 게 아니다. 벌써 여든 둘이나 넘은 그 할머니는 작년 봄부터 시름시름 기운이 쇠진해서 가끔 가물가물하기 때문에 그 동안 자손들로 하여금 한두 번 아니게 바쁜 걸음을 치게 하였다.   그 할머니의 오 년 맏이인 양조모(養祖母)는 갑자기 울기 시작하였다.   "아이고--- 이승에서는 다시 못 보겠다. 동서라도 의로 말하면 친형제나 다..

한국단편문학 2024.05.07

자유종- 이해조 -

자유종 (自由鐘)                                                                                - 이해조 - 천지간 만물 중에 동물 되기 희한하고, 천만 가지 동물 중에 사람 되기 극난하다. 그같이 희한하고 그같이 극난한 동물 중 사람이 되어 압제를 받아 자유를 잃게 되면 하늘이 주신 사람의 직분을 지키지 못함이어늘, 하물며 사람 사이에 여자 되어 남자의 압제를 받아 자유를 빼앗기면 어찌 희한코 극난한 동물 중 사람의 권리를 스스로 버림이 아니라 하리요.   여보, 여러분, 나는 옛날 태평시대에 숙부인(淑夫人)까지 바쳤더니 지금은 가련한 민족 중의 한 몸이 된 신설헌이올시다. 오늘 이매경 씨 생신에 청첩을 인하여 왔더니 마침 홍국란 씨와 강..

한국단편문학 2024.05.01

독짓는 늙은이- 황순원 -

사진을 클릭해서 크고 선명하게 보세요.                       독짓는 늙은이                                                                   - 황순원 - 이년! 이 백 번 쥑에두 쌀 년! 앓는 남편두 남편이디만, 어린 자식을 놔두구 그래 도망을 가?  것두 아들놈 같은 조수놈하구서----- 그래 지금 한창 나이란 말이디? 그렇다구 이년, 내가 아무리 늙구 병들었기루서니 거랑질이야 할 줄 아니? 이녀언! 하는데, 옆에 누웠던 어린 아들이, 아 바지, 아바지이! 하였으나 송 영감은 꿈 속에서 자기 품에 안은 아들이 아바지, 아바지이! 하고 부르는 것으로 알며. 오냐 데건 네 에미가 아니다! 하고 꼭 품에 껴안는 것을, 옆에 누운 어린 아..

한국단편문학 2024.04.26

금수회의록 - 안국선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 - 안국선 - 목 차 1. 서언(序言) 2. 개회 취지(開會趣旨) 3. 제1석, 반포의 효(反哺之孝 : 까마귀) 4. 제2석, 호가호위(狐假虎威 : 여우) 5. 제3석, 정와어해(井蛙語海 : 개구리) 6. 제4석, 구밀복검(口蜜腹劒 : 벌) 7. 제5석, 무장공자(無腸公子 : 게) 8. 제6석, 영영지극(營營之極 : 파리) 9. 제7석,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 호랑이) 10. 제8석, 쌍거쌍래(雙去雙來 : 원앙) 11. 폐 회 1. 서언(序言) 머리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니 일월과 성신이 천추의 빛을 잃지 아니하고, 눈을 떠서 땅을 굽어보니 강해와 산악이 만고의 형상을 변치 아니하도다. 어느 봄에 꽃이 피지 아니하며, 어느 가을에 잎이 떨어지지 아니..

한국단편문학 2024.04.16

금당벽화 - 정한숙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금 당 벽 화 - 정한숙 - 목탁(木鐸)소리가 비늘진 금빛 낙조(落照) 속에 여운(餘韻)을 끌며 울창한 수림을 헤치고 기복(起伏)진 구릉(丘陵) 밑으로 흐르고 있다. 무성한 숲과 숲 사이에 스며드는 습기에 오늘도 돌바위의 이끼는 어제련 듯 푸르고, 암과 수가 짝지어 어르는 사슴의 울음은, 남국적인 정서로 이국의 향수를 돕는 듯하다. 담징(曇徵)은 바위에 앉은 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서녘 하늘은 젖빛 구름 속에 붉은 빛을 금긋는가 하면, 자줏빛 구름이 솟구쳐 흐르고, 그것이 퍼져, 다시 푸른 바탕으로 변하면 하늘은 자기 재주에 겨워 회색 빛으로 아련히 어두워 간다. 돌바위에 기대앉은 담징은, 한순간도 쉬지 않고 서녘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그의 동광(瞳光)은 하늘빛을 닮은 ..

한국단편문학 2024.04.09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 박완서 -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 박완서 - 가끔 별난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손뼉을 치고 싶은 충동 같은 것 말이다. 마음속 깊이 잠재한 환호에의 갈망 같은 게 이런 충동을 느끼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요샌 좀처럼 이런 갈망을 풀 기회가 없다. 환호가 아니라도 좋으니 속이 후련하게 박장 대소라도 할 기회나마 거의 없다. 의례적인 미소 아니면 조소·냉소·고소가 고작이다. 이러다가 얼굴 모양까지 얄궂게 일그러질 것 같아 겁이 난다.   환호하고픈 갈망을 가장 속 시원하게 풀 수 있는 기회는 뭐니뭐니 해도 잘 싸우는 운동 경기를 볼 때가 아닌..

한국단편문학 2024.04.03

사냥 - 이효석 -

사 냥                                                               - 이효석 -  연해 두어 번 총소리가 산속에 울렸다. 몰이꾼의 행렬은 산등을 넘고 골짝을 향하여 차차 옴츠러들었다. 발밑에 요란히 울리는 떡갈잎 가랑잎의 어지러운 소리에 산을 싸고 도는 동무들의 고함도 귀 밖에 멀다. 상기된 눈앞에 민출한 자작나무의 허리가 유난스럽게도 희끔희끔 거린다.   수백 명 학생들이 외줄로 늘어서 멀리 산을 둘러싸고 골짝으로 노루를 모조리 내리모는 것이다. 골짝 어귀에는 오륙 명의 포수가 등대하고 섰다. 노루를 빼울 위험은 포수 편에 보다 늘 포위선에 있다. 시끄러운 책임을 모면하기 위하여 몰이꾼들은 빽빽한 주의와 담력으로 포위선을 한결같이 경계하여야 된다. 적..

한국단편문학 2024.03.27

홍염(紅焰)- 최서해 -

홍염(紅焰)                                                                           - 최서해 -  1겨울은 이 가난한---백두산 서북편 서간도 한귀퉁이에 있는 이 가난한 촌락 빼허[白河]에도 찾아들었다. 겨울이 찾아들면 조그만 강을 앞에 끼고 큰 산을 등진 빼허는 쓸쓸히 눈 속에 묻히어서 차디찬 좁은 하늘을 치어다보게 된다. 눈보라는 북국의 특색이다. 빼허의 겨울에도 그러한 특색이 있다. 이것이 빼허의 생령들을 괴롭게 하는 것이다. 오늘도 눈보라가 친다.   북극의 얼음 세계나 거쳐오는 듯한 차디찬 바람이 우하고 몰려오는 때면 산봉우리와 엉성한 가지 끝에 쌓였던 눈들이 한꺼번에 휘날려서 이 좁은 산골은 뿌연 눈안개 속에 들게 된다. 어떤 때는..

한국단편문학 2024.03.19

탈출기(脫出記)- 최서해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탈출기(脫出記) - 최서해 - 1 김군! 수삼차 편지는 반갑게 받았다. 그러나 한번도 회답치 못하였다. 물론 군의 충정에는 나도 감사를 드리지만 그 충정을 나는 받을 수 없다. ―박군! 나는 군의 탈가(脫家)를 찬성할 수 없다. 음험한 이역에 늙은 어머니와 어린 처자를 버리고 나선 군의 행동을 나는 찬성할 수 없다. 박군! 돌아가라.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 군의 보모와 처자가 이역 노두에서 방황하는 것을 나는 눈앞에 보는 듯싶다. 그네들의 의지할 곳은 오직 군의 품밖에 없다. 군은 그네들을 구하여야 할 것이다. 군은 군의 가정에서 동량(棟梁)이다. 동량이 없는 집이 어디 있으랴? 조그마한 고통으로 집을 버리고 나선다는 것이 의지가 굳다는 박군으로서는 너무도 박약한 소위이다...

한국단편문학 2024.03.12

화수분- 전영택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화수분 - 전영택 - 1925년 1. 1 첫겨울 추운 밤은 고요히 깊어 간다. 뒤뜰 창 바깥에 지나가는 사람 소리도 끊어지고, 이따금 찬바람 부는 소리가 ‘휙― 우수수’ 하고 바깥의 춥고 쓸쓸한 것을 알리면서 사람을 위협하는 듯하다. “만주노 호야 호오야.” 길게 그리고도 힘없이 외치는 소리가 보지 않아도 추워서 수그리고 웅크리고 가는 듯한 사람이 몹시 처량하고 가엾어 보인다. 어린애들은 모두 잠들고 학교 다니는 아이들은 눈에 졸음이 잔뜩 몰려서 입으로만 소리를 내어 글을 읽는다. 나는 누워서 손만 내놓아 신문을 들고 소설을 보고, 아내는 이불을 들쓰고 어린애 저고리를 짓고 있다. “누가 우나?” 일하던 아내가 말하였다. “아니야요. 그 절름발이가 지나가며 무슨 소리를 지껄..

한국단편문학 2024.03.05

오발탄 - 이범선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오발탄 - 이범선 - 계리사(計理士) 사무실 서기 송철호(宋哲浩)는 여섯 시가 넘도록 사무실 한구석 자기 자리에 멍청하니 앉아 있었다. 무슨 미진한 사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장부는 벌써 집어치운지 오래고 그야말로 멍청하니 그저 앉아 있는 것이었다. 딴 친구들은 눈으로 시계바늘을 밀어 올리다시피 다섯 시를 기다려 후다닥 나가 버렸다. 그런데 점심도 못 먹은 철호는 허기가 나서만이 아니라 갈 데도 없었다. "송 선생은 안 나가세요?" 이제 청소를 해야 할테니 그만 나가달라는 투의 사환애의 말에, 철호는 다 낡아빠진 해군 작업복 저고리 호주머니에 깊숙이 찌르고 있던 두 손을 빼내어서 무겁게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나가야지." 하품 같은 대답이었다. 사환애는 저쪽 구석에서부터..

한국단편문학 2024.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