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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딸 (하)
- 강경애 -
4. 세 친구
재일은 늦게 일어났다. 하여 세수도 하기 전에 원선의 하숙을 찾았다.
그는 새로 깐 다다미 위에 비스듬히 책상켠을 의지하여 책을 보고
있었다. 아침 산뜻한 햇빛에 그의 얼굴은 한층 더 윤택해 보였다.
“여보게, 벌써 책인가?”
그는 빙긋이 웃으며 아까보다도 줄을 빨리 타내려갔다.
“그만두게, 밤낮 책만 들고……”
책을 뺏으려 하였다. 그는 책 든 손을 물리며,
“마자 보아야겠네. 잠깐만 기다리게.”
재일은 후다닥 일어났다.
“가겠네.”
그제야 책을 놓고 눈을 부비치고 바라보았다.
“놀다 가게나.”
“아니, 나 밥 안 먹었어. 봉준 군과 놀러오게나.
재미있는 일이 있어.”
어차피 잘되었다 하고 책을 들었다.
예정한 페이지까지 보고 난 그는 책을 덮고 기지개를 하였다.
그리고 어젯밤 봉준에게서 들은 말을 다시금 되풀이하여 보았다.
따라 자기의 막연한 장래가 새삼스럽게 걱정이 되었다.
“난처한 노릇이지!”
그는 천장을 쳐다보며 이렇게 외쳤다. 봉준의 처지에 있어서는
딱히 이혼 하라고도 못하겠고 하지 말라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스스로 해결짓기 전에는 제 삼자로서는 어림도
해보지 못할 것 같았다.
신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누구인지 뻔히 알고 이때껏 하던 생각은 치워버렸다.
“칩지 않은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문을 닫았다.
“앉게.”
그는 맥없이 주저앉았다.
“편지가 또 왔네그려.”
팡팡한 누런 편지를 원선에게로 내쳤다. 그는 받아들었다.
“보았나?”
묻고 나서 편지를 꺼내어 읽기 시작하였다.
다 보고 난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불쌍하지?
원선을 쳐다보았다. 그는 한참이나 묵묵히 있었다.
“난처하지, 세상 일이 왜 그런가?”
봉준이는 머리를 숙이며 눈물을 글썽글썽해졌다.
이런 편지를 받아쥘 때마다 동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차라리 옥이가 먼발로 친족관계가 된다든지 하면 얼마나 다정할
사이일는지 몰랐다.
그러나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못할 일이었다.
“내 누님이라면 얼마나 좋겠나?”
외로운 것만큼 누님이라는 명사에 눈물이 날 만큼 감격되었다.
원선이는 봉준의 안타까워하는 모양을 바라보면서도 무엇이라고
위로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숙희, 오, 숙희씨! 나는 숙희씨가 없이는 못살 것만 같애!”
봉준의 눈은 불이 붙었다.
“너무 감상적으로 나가지 말고 이왕이면 좀더 자네 마음을 기다려보게.
행여 나중에 사이 좋은 부부가 될는지 누가 아나?”
그는 머리를 흔들어 보았다.
“그리 된다면 나는 좋겠네마는…… 어림도 없는 소리.”
봉준이는 문켠을 향하여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자네 숙희씨와 친한 사이라지?”
“친하다는 것보담두 그저 아는 사이지.”
원선은 편지를 도로 돌렸다.
“불쌍하네, 옥씨가.”
그저 아는 사이지. 이렇게 쓸어치는 원선이가 능글능글해 보였다.
차라리 솔직히 말하여 주었으면 어떨는지 몰랐다.
“그렇게 진심으로 불쌍히 생각하나? 다만 한 마디를 하더라도
참으로 하여주게, 참으로!”
원선이는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나가지 않았다.
“여러 소리 말고 재일군한테나 가보세.”
“흥! 혼자 가게나!”
그는 벌떡 일어났다. 원선이도 따라 일어났다.
“왜 또 그러나?”
봉준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였다.
“자네 요새 바짝 더해졌네그려. 병원에라도 가보아야 하겠네.”
근심스러운 듯이 들여다보았다.
“자네 가고 싶은 곳으로 가세구만. 그리 역정낼 것이 무언가?”
봉준이도 실은 재일이를 찾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나 치밀리는 감정으로
인하여 이렇게 말하였던 것이다. 하나 그의 따뜻한 손맛으로부터
절반 너머 골이 풀렸던데다가 이렇게 다정스러이 말하는 것을 듣고
홱 풀리고 말았다.
“가세, 재일 군한테.”
눈물 고인 눈에 웃음이 돌았다. 원선이도 따라 웃고 밖으로 나섰다.
골목을 돌아서는 봉준은,
“여보게! 저기 오는 것이 숙희 아닌가?”
손짓을 통하여 바라보았다. 조선 여학생 둘이서 가지런히 걸어갔다.
“아닐세, 원……”
숙희면서도 자기에게는 숨기는 것 같았다.
그는 분주히 앞서가서 알아보고야 안심이 되어 돌아왔다.
“아니데.”
번번이 그를 의심하다가도
곧 돌리어 난처한 자기를 도리어 불쌍하게 보았다.
그들이 재일의 하숙 문을 열었을 때 첫눈에 책상 위에 놓인
파란 꽃봉투가 보였다.
그들이 앉자마자,
“편지 보게. 우리 숙희한테서 자네한테 한 것일세.”
원선에게로 편지를 던졌다.
번연히 봉준이를 놀리려고 하는 줄 알면서도 다소 가슴이 울렁거렸다.
“쓸데없는 소리 말아!”
정색을 하여 보였다.
재일은 슬쩍 웃으며 봉투 속으로부터 사진을 꺼냈다.
“편지 보기 싫으면 사진이나 보게.”
원선에게로 내어주었다. 그는 사진을 받아 들고 한참이나 보더니,
“올해는 더 부해졌네그려.”
봉준에게로 돌렸다. 그는 사진을 받아들자 얼굴이 빨개졌다.
“아내 있는 사람은 처녀의 사진이 필요치 않을걸?”
봉준은 못 들은 체하고 언제까지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숙희를 사모한 지 근 몇 해 동안에
사진이나마 이렇게 보게 되기도 처음이었던 것이다.
숙희에게 보내는 편지마다
‘사진이라도 한 장 보내주시오’
하고 애걸하다시피한 구절이 생각키우며 눈물이 핑 돌았다.
“허, 남의 처녀 사진을 보고 울면 쓰나, 이리 내게!”
봉준의 손에서 사진을 빼앗았다. 원선이는 재일에게로 달려들었다,
“그까짓 사진이 무엇하는 건가, 자네도 그만해 두게!”
그는 사진을 빼앗아서 봉준에게로 던졌다.
“옛네! 실물은 마음대로 못 보나 그래 사진이나 못 가져 보겠나.”
성이 날 줄 알았던 재일은 허허 웃었다.
“매우들 잘 논다. 상당한 극일세그려. 응 자네들도
배우 노릇 상당히 하겠네.”
눈을 슴벅슴벅하였다. 그들도 따라 웃었다.
재일은 눈을 실쭉하니 뜨고,
“자네, 그 사진 가지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어.
중매를 해달라는 말이야. 중매하겠나, 못 하겠나? 말하게.”
“나 같은 것이 중매자의 자격이 있는가?”
“어, 없다면 사진 도루 내게. 소용이 무어람.
자네가 총각이니 연애할 생각을 감히 먹어 보겠나, 어떤 이유하에서
가지느냐 말이야? 단단히 대답하게. 그렇지 않으면 사진 내놔!”
그는 눈을 딱 부릅뜨고 대들었다.
봉준이도 처음에는 웃는 소리거니 하고 사진 있는 것만 기뻐하였으나
그가 이유를 붙여 가며 대어드는 것을 보니 가슴이 멍청해졌다.
이 꼴을 본 원선이는,
“자네 누이가 그렇게 시집 가고 싶어 등이 달았다면 내 중매하지.”
그의 말문을 막으려고 이런 말을 하였다.
“응 자네가 중매하겠어?”
봉준에게서 사진을 빼앗았다.
“옛네. 자네가 중매하겠다지? 이 사진 가지겠다는 말이야?
응, 옳지. 자네는 총각이니 만치 아조 가지고 말게나. 총각이 처녀의
사진 가지는 것만큼 떳떳한 일이지. 거리에 나가서 지나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게. 내말을 믿지 않으면 말이야.
봉준 군도 잘 생각해 보게. 원선 군한테 온 사진을 왜 자네가
어림없이 가지겠다는 말이야? 그렇지 않아? 응?”
그는 돌아앉았다.
“살아가면 별꼴들 다 보겠네.
언제는 사진 청해 달라고 매일 조르다시피 하더니 막상 부쳐오니
시치미를 떼어! 이거 뭐 누구를 놀리는 셈인가, 어쩐일이야!”
원선이를 노려보았다. 그는 웃으며,
“쓸데없는 소리 말아, 자네는 너무 허튼소리 해서 재미없데.”
봉준이는 더 참을 수 없었다.
“가겠네.”
벌컥 일어났다. 그의 가슴은 무섭게 떨렸다.
그리하여 벼락같이 문을 열었다.
“제 이막! 어때?”
원선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그 왜 그 모양이야. 가뜩이나 요새는 신경병으로 고민하는 판에
위로는 못하나 그렇게 지나치게 놀린담. 아주 재미없어!
후일에는 그런 일 말게, 여보게!”
“아침에 내가 무어라든가? 재미나는 일이 있다고 했지?
그 좀 재미있나? 그래 심심한데 더러 농삼아 그리면 어떻다는 말인가?”
“아 글쎄. 성한 사람 같은면야 무슨 일 있겠나마는
봉준 군은 병자니만큼 삼가 달라는 말일세.”
원선은 일어났다. 재일도 그의 뒤를 따라 일어섰다.
한참이나 말없이 섰던 원선이는 돌아보았다.
“봉준 군이 아모래도 이혼은 해놓을 것이니까 숙희 씨에게 권고하여
보게. 자네도 보는 바라 어디 되겠나? 점점 더하여 가니.”
“글쎄 딱하기는 하지만 그 애가 말을 들어주어야지.’
“물어는 보았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말도 해볼 것 같이 않았다. 그러나 이미 낸 것이라,
“응, 한 번 붙여보았네.”
재일은 어느덧 앞섰다. 그의 다리 마디는 길쭉길쭉하여 언제나
겅중겅중거려서 남보다 훨씬 앞서 걸었다.
“장래성 있는 청년일세, 봉준 군이. 두고 보면 자연 알 것이니까
어쨌든 힘써 보게.”
“참말인가?”
“여보게, 자네처럼 극이나 꾸밀 줄은 모르네.”
“응, 좋은 친구야, 봉준 군이.”
아까 문 차고 나가던 꼴을 생각하고 빙글빙글 웃었다.
앞으로 지나가는 여학생을 보고,
“스타일 좋다!”
하고 웃었다.
5. 짝사랑
모 여학교 이년급 시험을 치르고 난 옥이는 낙제냐 급제냐의
두 의문으로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주인집 학생이 나왔다.
“어제 같이 오셨던 이가 누구야요?”
옥의 곁으로 앉았다. 입 속으로,
“남편이야요.”
“네.”
“그 학교서 낙제가 된다면 다른 학교에 가서
시험쳐 볼 수도 있겠지요?”
근심스러운 듯이 물었다.
“붙으시겠지요. 염려 마세요.”
“저 같은 것이 어찌 붙기를 바라겠습니까?”
문편을 향하여 바라보았다.
“왜 일학년 시험을 치루어보시지요, 아무래도 좀……”
이 말을 듣자 더욱 안타까왔다. 차라리 이 학생의 말과 같이
일년급 시험을 보았더면 하는 후회가 났다.
“글쎄요.”
만일 낙제가 되면 무엇보다도 남편 보기가 난처하였다.
‘어쩔까?’
낙제만 되었다면 두말없이 고향으로 내려가서
한 해 더 배워 가지고 오지!’
겨우 이렇게 가라앉혔다. 그러나 가슴이 울울하였다.
“일본 가서 공부하신다지요?”
“네.”
“무슨 학교야요?”
그는 한참 생각하였다.
“와세다라든지요?”
옥의 얼굴은 빨개졌다.
얼마나 똑똑하면 남편 다니는 학교 이름도 자세히 모르나 할 것 같았다.
“네”
대답하는 소리를 듣자 안심되었다. 어쩐지 자기 입으로 학교명을 부르고
나니 별로 서투르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의 친구들도 많두먼요.”
“글쎄요.”
“이 방에 들어왔을 때 세 분인가 네 분인가 욱욱 밀려왔더군요.”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 중에 내 동무 숙희 오빠도 오구요.”
그는 가슴이 찌끈하였다.
벌써 우리 그가 숙희를 따라다니는 줄 이곳서도 아는가?
그리하여 내 속을 떠보느라고 저렇게 말하지 않는가? 그는 다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지마는 이 말 끝에 쑥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숙희 아셔요?”
“몰라요.”
“연희는 아시겠지요? 같은 고향이라지요?”
“네. 말은 못해 봤어도 낯만은 여러 번 보았지요.”
“숙희도 늘 놀러가던데요, 방학 때면.”
“글쎄요,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요리조리 묻는 것이 귀찮았다.
구둣소리가 나자 방문이 열렸다. 영실은 얼른 일어났다.
그리하여 안방으로 들어갔다.
봉준이는 마루 구석에 피하여 섰다가 방으로 들어섰다.
옥이는 잠잠히 일어섰다.
“평안히 주무셨소?”
이렇게 묻고 나서 신문지 속에 들어 있는 노랑 구두를 꺼냈다.
“신어 보시오.”
그는 가슴이 두근두근하였다. 그리고 발 내놓을 것이
무엇보다도 난처하였다. 그는 포켓에서 살색 양말을 꺼냈다.
“이것 신고 신어 보시오.”
그의 얼굴은 빨개졌다.
“어서 신어 봐요.”
“후일 신지요.”
“공연한 소리만 하는구려.”
봉준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속으로
‘시골 여자는 할 수 없어’하였다.
그는 남편의 좋지 못한 기색을 보고는 그만 아무 말 없이 돌아앉아서
양말을 신었다. 봉준은 양말 대님을 내어주었다.
“다 신었소? 자.”
구두를 들어 옥의 발에다 신겨주었다.
“일어나 보시오”
그는 아찔해지며 방안이 휭 돌아 겨우 바람벽을 의지하여 일어났다.
한참이나 들여다본 그는 웃음을 띠우고,
“됐소이다. 제법 여학생이구려.”
“그러고 학교에 갈 때에나 안 갈 때에나 저 분(粉) 발라요
크림도 베니도네, 그래야 합니다.”
책상 위에 벌여 놓아 준 분병들을 가리켰다.
처음으로 남편의 다정한 말을 듣는 그는
너무 지나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고 저녁에 우리 친구 몇몇을 데리고 올 테야요.
우물쭈물하지 말고 묻는 대답도 얼른얼른 해요, 네?
오늘 분 안 발랐구려. 저녁 먹고 세수하고 분 바르시오, 네.”
얼굴을 말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옥은 확확 다는 그의 얼굴을 푹 숙이고 말았다.
“내 말대로 하시오.”
이렇게 재삼 다지고 나서 일어섰다.
그는 따라 일어서서 그의 뒷맵시를 바라보며
‘나도 남편이 있구나!’
이렇게 부르짖었다.
뒤이어 영실이가 웃음을 띠우고 들어왔다.
“무얼 다 사오셌어요?”
책상 아래 놓인 구두를 들고 들여다보았다.
“구두 사오셌소, 벌써부터……”
요리조리 굽어보더니,
“꼭 맞아요?”
“네.”
옥의 기뻐하는 것을 한 번 더 쳐다보았다.
영실 어머니도 웃으며 들어왔다.
“아이구머니, 곱구먼요.”
딸이 주는 구두를 받아들고 보았다.
“얼마 주었대요?”
“글쎄요, 자세히 묻지 못했어요.”
그들의 부러워하는 모양을 바라보며 앞에 놓인 구두를 볼 때
눈물이 날 만큼 감격되었다.
그는 속으로
‘어머니도 기뻐해 주세요!’ 이렇게 중얼거렸다.
남편의 말을 외우고 있던 그는 저녁 먹기 전에 새로 사온
향내 나는 비누로 말끔히 얼굴을 씻은 후 곱게곱게 단장을 하고
저녁상을 받았다. 밥상을 들고 나온 영실이는 피어오르는 듯한
그의 맑고 웃는 듯한 얼굴에 도취되어 몇 번이나 그를 쳐다보고
마음속 깊이 부러워하였다. 과연 남편의 사랑을 받은 만하다 하는 것을
당장 깨달았다. 그리하여 이 부부의 짝은 기울지 않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부럽게 생각하였다.
“같이 잡숩시다.”
밥깨를 여는 그는 영실이를 쳐다보았다.
“어서 먼저 자셔요.”
밥상으로부터 가는 김이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밥상을 물린 그는 어떤 불안에 잠긴 사람 모양으로 긴장되어 있었다.
불이 반짝 커졌다. 그는 가슴이 울렁울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가만히 일어나서 마루로 나왔다.
변소간으로 나오는 영실은,
“우리 방으로 들어가십시다.”
옥이는 방문턱에서 기웃기웃하여 아무 거리낌없을 것을 알고 들어섰다.
향하여 바른편 쪽으로 책상이 놓이고 왼편으로 고리짝 두 개가
겹놓였을 뿐 별다른 가구를 발견치 못하였다.
“앉으세요.”
주인 마누라는 웃음으로 대하여 주었다.
대문소리가 나자 구둣소리가 거푸 들렸다.
옥이는 숨을 죽이고 두 귀밑이 화끈 달았다.
무엇보다도 그들과 서로 인사할 것이 난처하였다. 가만히 듣던 영실은,
“여러 사람이 오나 봐요.”
방문 여는 소리가 나자 이쪽으로 향하여 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여기 안 들어왔나요?”
영실 어머니는 문을 열었다.
“여기 있습니다. 들어오세요.”
“아니요, 좋습니다. 여보, 어서 나오시오.”
옥이는 난처하였다. 봉준은 전등불 아래 부끄러움을 먹고 앉았는 그를
바라볼 때 알지 못하는 사이에 기쁨이 흘렀다.
무엇보다도 어서 빨리 그들 앞에 보이어 자랑하고 싶었다.
언제나 아내인 옥이를 대할 때에는
친구나같은 그런 느낌으로 대하게 되는 것이었다.
“어서 나와요!”
그는 마지못하여 일어는 섰지만 건넌방까지 갈 것이
여간 난처한 것이 아니었다.
가슴에서 맞방망이를 치고 다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하였다.
“학생도 같이 가면……”
영실을 내려다보았다. 영실 어머니는,
“그럼, 너도 동무해서 잠깐 갔다오너라.”
말이 끝나자 영실은,
“그럼 먼저 나가세요.”
옥이를 쳐다보았다. 그는 도로 앉았다.
“같이 가요.”
이 꼴을 본 봉준이는,
“그럼, 같이 나오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건너방으로 갔다. 영실은 책상을 마주 안고 화장을 시작하였다
“부끄럽지요?”
옥이를 바라보며 영실 어머니는 웃었다.
“처음이니까요.”
머리를 숙였다.
화장을 마친 영실은 새 옷을 갈아입고 앞장섰다.
옥이는 죽으러 가는 소 모양으로 안타깝게 떨렸다.
영실은 조심성스럽게 문을 열었다. 봉준은 벌컥 일어났다.
“들어오십시오.”
“오셨습니까.”
재일을 향하여 머리 숙여 보였다. 그들의 눈은 일시에 옥에게로 쏠렸다.
옥이는 가만히 영실 옆에 앉았다.
봉준이는 차례로 소개하였다. 옥이는 머리 숙여 그들에게 보였다.
“자네들, 왜 이리 점잖은가?”
이 방안의 인기가 옥에게로 쏠림을 알자 그는 견딜 수 없이 기뻤다.
그는 빙글빙글 웃었다.
“집 주인부터 점잖으니……”
재일은 봉준이를 보았다.
원선이는 벽에 기대어 앉아 재일의 어깨로 한쪽 눈을 가리고
옥이를 뜯어 보았다. 눈, 코, 입술, 살빛, 몸집 어느 것 하나
흠잡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양미간을 약간 찡긴 것을 보아
그의 쓰라린 과거를 알리웠다.
몇 해를 두고 의문의 주인공인 옥이는 이름과 같은
옥(玉) 같은 여자였다.
그는 스르르 눈을 감고 옥이 쓴 편지 일절을 생각해 보았다.
따라서 봉준이가 곧장 부러워졌다.
“숙희도 데리고 오시지요, 왜?”
봉준이와 옥이는 일시에 가슴이 찌르르하였다.
“왜 모시고 오지?”
봉준이는 동을 달았다.
“잊었습니다. 후일에는 같이 오지요. 옥씨도 사랑해 주십시오.”
어느 좌석에서나 빈정대는 그가 갑자기 여기서만은 점잔을 빼었다.
“당신, 집에 온 손님들을 대접할 줄도 모르시오?”
봉준은 웃는 눈으로 옥이를 보았다.
“그런 소리 말게. 우리가 경성 사는 것만큼 주인은 우리들이 아닌가,
여보게.”
원선이를 돌아보았다.
“이 사람은 벌써 조으네. 그럼 어디로든지 가십시다.”
휘 둘러보았다.
봉준은 속으로
‘이놈이 벌써 미쳤나’ 하면 일종의 승리의 쾌감을 느꼈다.
“나가십시다. 처음이니만큼 구경도 하시구요.”
재일은 옥이를 보았다.
재일의 꼴을 본 영실은 더 앉았기가 퍽 괴로웠다.
그리하여 살짝 일어났다. 옥이는 그의 치마 귀를 맘껏 잡았다.
“놓으세요.”
그들은 영실을 보았다.
“앉으셔요.”
뒤를 이어 이런 말이 거푸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뿌리치고 나갔다. 혼자 된 옥이는 아까보다
더 안타깝고 머리를 들 수가 없었다. 원선은 재일을 꾹 찔렀다.
“가세.”
옥의 모양을 보고 더 앉았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재일은 밑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옥의 수줍어하는 것을 볼수록 더한층 아리따웠다.
“어디로 갈까.”
재일은 일어나는 원선이를 쳐다보았다.
“일어나게나, 어디로 가든지.”
그는 문밖으로 나섰다. 재일과 봉준이도 하는 수 없이 따라 일어났다.
“어디 가든지 밑자리는 제일 무거웠는데 오늘은 웬일이야?”
봉준이는 문밖을 나서자 원선이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글쎄.”
재일이는 방문을 배움히 열고,
“안녕히 주무십시오.”
옥이는 머리를 숙인 채 일어섰다.
대문 밖을 나서자 재일은 봉준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과연 드문 미인인걸!”
“그럴까? 하지만 숙희씨만은 못하지 않어.”
“허, 미친 말이야. 못한 게 무언가?
그렇게 미치더람 한 번 말해 볼까, 숙희에게?”
봉준은 앞이 캄캄하도록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이때가 그의 다만 한 때인 기회같이 생각되었다.
“참말인가?”
“이 사람, 또 귀가 바짝 당기는 모양이지?”
웃음으로 쓸어쳤다. 자기로서도 오늘에 한하여만
갑자기 전과 달리 말하기가 좀 점직했던 것이다.
봉준도 이 눈치를 알고 더 채치고 싶지만
원선이가 꺼리어서 잠잠하고 말았다.
“어째서 이야기가 중단이 되나? 마자 마치지?”
봉준이는 슬쩍 화제를 돌렸다.
“자네 전부터 영실이를 알았던가?”
“응, 숙희와 동무라네. 그래서 몇 번 우리집에 놀러 왔어.
그 통에 나도 알게 되었지.”
“누이 있는 사람들은 수 나겠네.”
“그럴지도 몰라.”
둘이는 웃었다. 원선이는 멍하니 앞길만 바라보고
수굿수굿 그들의 뒤를 따랐다.
“여보게, 옥씨가 과연 미인이지! 자네는 어떻게 보았나?”
재일이는 뒤를 돌아보며 멈칫 섰다. 봉준이도 돌아보았다.
“글쎄.”
“똑똑한 대답을 해 버릇하게. 밤낮 글쎄가 무어야!”
봉준이는 안타까움에 이런 말을 하였다.
쌀쌀한 바람이 그들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어디로들 또 가겠나?”
둘이는 씩 돌아보았다.
“무어 좀 먹고 헤지세. 어디로 갈까?”
언제나 먹는 말은 재일이가 먼저 꺼내었다.
“그만두지, 갈려면 자네들끼리나 가보게.”
“얼른 같이 갔다 가세나.”
“곤해서 못 견디겠네.”
봉준이를 보았다.
“늙으니까 다르다니까.”
전차가 앞으로 지나간다. 그들은 한참 동안이나 잠잠하였다.
“자, 난 가겠네.”
원선이는 청진동 골목으로 빠졌다.
전신이 오싹해지며 따뜻한 방이 그리워졌던 것이다.
“잘 가게.”
둘이는 말없이 걸었다. 어쩐지 적적함을 느꼈다.
재일은 옥의 얼굴을 머리에 그려보았다.
따라서 이때까지의 그의 눈으로 본 많은 여자들을 되풀이하여 보았다.
숙희 때문에 여학생들도 퍽이나 알았고 화류계 여자들은
그 수를 헤일 수 없으리 만큼이었다. 그러나 자기로서 흡족히 생각한
여자는 없었다. 그저 그렇고그렇고 하였다.
하나 오늘 저녁 옥이를 보자 세상에 저런 여자도 있는가 하고
놀랄 만큼이었다. 그럴수록 숙희를 미끼삼아 반드시 옥이는
자기 것으로 만들리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처녀, 부인을 가릴 사이 없이 얼굴만 고우면 그만으로 생각되었다.
“이혼은 집어치우게.”
그의 심중을 떠보려 하였다.
봉준이 역시 옥이를 미끼삼아 숙희를 놓치지 않으려 하였다.
“숙희씨 같은 여자는 없으니까 어쩌겠나.
내 스스로도 이상히 아는 적이 많았네마는…… 물론 옥에게 대하여
동정하지 않는 배는 아니야. 그러나 사랑이 안 가는 데야
어쩌란 말인가?”
“음, 그렇지. 사랑이 없는 데야 동정한들 어쩌겠나?
나도 전부터 자네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고,
따라 숙희를 연모하는 것까지도 대강은 짐작하였네.
그래서 그 애를 만나면 자네 말을 늘 하다시피 하였네.
어찌했든 이혼만 하게나.”
“고맙네.”
봉준이는 눈물이 쑥 비어졌다. 그리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였다.
한참 후에 그는,
“자네만 믿네!”
재일은 담배를 피워 물었다.
“옥씨가 불쌍하지 않아? 그렇게 된다면……”
봉준이를 보았다.
옥이는 아침을 먹고 머리를 풀어놓았다. 얼빗으로 슬슬 가리며
면경 속으로 비치는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고 쫑긋 웃었다.
어젯밤 남편의 좋아하던 꼴이 눈에 보이는 듯하였다.
‘어떻게 붙었을까?’그 많은 사람이 시험쳤는데 아무래도 선생들이
내 이름을 잘못 불렀지!’
이런 생각을 할 때 가슴이 선뜻하였다.
영실이가 들어왔다.
“머리도 숱하기는 해요.”
그는 얼빗을 빼앗아 가지고 몇 번 가리운 후에 두 갈래로 꽁꽁
땋아가지고 곱슬하게 틀어놨다.
“고운데요, 어쩌면 그리 고울까.”
앞으로 와서 말똥히 들여다본다.
그는 가쁜함을 느끼며 두 귀밑이 빨개졌다.
“그런 소리 말아요.”
얼굴을 돌리며 웃었다.
“웃으니까 더 곱네. 여자로 태어날 바에는 저렇게 고와야지, 무얼!”
며칠 전날 밤 재일의 꼴이 나타났다.
“학생도 그만큼 고왔으면 됐지요, 나 같은 것이 무엇이기.”
그는 머리칼을 일삼아 주워 뭉쳐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영실 어머니도 부엌에서 고개를 갸웃하고 내다본다.
“꽃송이 같애요.”
옥이는 이런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리고 내가 참으로 붙었는지?
이런 의문으로 가슴이 꽉 채웠다, 그는 손을 씻고 방으로 들어왔다.
“참으로 붙었을까요?”
영실은 면경 속으로 자기 얼굴을 비춰보다가 살짝 비켜 앉았다.
“그럼 학교서 거짓말할까요?”
너무 좋아하는 꼴이 밉살스러웠다.
“거짓말보담도 혹시 이름이 나와 비슷한 사람이 또 있는가 해서
하는 말이지요.
“글쎄요, 그것까지는 모르지요.”
영실은 일어났다.
“어서 학교나 가십시다. 잔 걱정 말고요.”
옥이는 검정치마 흰 저고리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책상 아래 놓인 구두를 꺼내어 놓고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신었다.
안방문 소리가 나자 영실은 나왔다.
“어서 나와요.”
이러고 나가기가 퍽이나 부끄러웠다.
어쩐지 옛날 자기와는 딴판이 된 듯한 느낌이 생겼다.
그때에 떠오르는 것은 숙희와 연희였다.
그는 남빛 책보를 들고 영실의 뒤를 따랐다.
다리가 휘청휘청하는 것이 좀 폐로웠다.
“재미나요, 이렇게 언니와 내가 함께 다니면 오작이나 좋아요.”
쫑긋 웃어 보였다. 그는 숨이 차도록 답답함을 느꼈다.
지나는 사람들은 자기만 보는 듯싶었다.
“오늘 저녁, 원선인가 그이는 떠나신댔지요?”
“네.”
가까워오는 학교는 빨간 벽돌집으로 점점 높아가고 있었다.
개학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그들은 집으로 오자
옷을 벗고 낡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옥이는 이때껏 지리쳐 두었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교장선생의 말이 다시금 그의 귀를 울려 주었다.
그리고 뒤를 따라 나타나는 얼굴 흰 여선생들은 하늘같이 높아 보였다.
점심상을 들고 영실은 들어왔다. 그는 얼른 일어나 받아놓았다.
“어서 먹읍시다.”
영실은 저를 들고 마주 앉았다. 권하는 바람에, 더구나 다정스러이
마주 앉는 김에 숟갈을 들었으나 밥은 먹고 싶지 않았다.
그저 가슴이 울울하여서 좋은 것도 언짢은 것도 판단할 여지없이
어림터분하였다. 상을 물린 옥이는 책상 곁으로 다가앉아
‘나도 이제부터는 여학생인가? 숙희와 연희와 같은……’
맘에 떠오르는 것은 영철 선생이었다.
‘그가 이 소식을 알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물 먹고 싶듯이 그리워졌다.
같이 있을 때는 그만그만하여 무던한 줄만 알았더니 이렇게 뚝
떠나고 보니 돌아가신 어머님이나 못지않게 보고 싶었다.
보다도 자기의 달라진 옷 맵시, 시험 쳐서 입격된 것을 그에게
자랑 겸 친히 눈에 보이고 싶었다.
그는 붓을 들었다. 영철 선생에게 장문의 편지를 쓰기 시작하였다.
저녁이 되자 옥이는 화장을 하고 새 옷을 갈아입은 후
책상 앞에 마주 앉아 갓 사온 책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느 사이에 모든 잡생각은 잊고 책 속으로 정신이 폭 잦아 들어갔다.
“여보, 옥씨!”
깜짝 놀라 휘휘 돌아보며 뒤미쳐 일어났다.
“나와요.”
뒤창문 곁에서 남편의 소리가 났다.
그는 몸 돌아볼 여지없이 밖으로 나갔다.
큰 대문을 나선 옥이는 창문 곁으로 돌아갔다.
희미한 달빛에 그의 시커먼 윤곽만이 보였다.
“저 새 옷 갈아입고 구두 신고 나오시우, 벌써 자우?”
“아니오.”
그럼 얼른 들어가서 펄쩍 갈아입고 나와요.”
“왜요?”
황황히 날치는 남편이 이상해 보였다.
“글쎄 여러 말 말고 바삐 그리 해요.”
남편의 말이니 할 수 없이 돌아서서 들어오면서도 마음으로는
불쾌하였다.
무엇보다도 남자들과 마주 앉기가 거북스럽고 싫었던 것이었다.
방으로 들어온 옥이는 또다시 나갈 것이 거북하였다.
남편과 가지런히 서서 다니는 것은 기쁘게 생각이 되나
그러나 남편의 친구들과 섭쓸리기는 안타깝게 싫었던 것이다.
“안방 학생 데리고 갑시다.”
“잔소리 말고 어서 나와요!”
소리치는 바람에 두말도 못하고 그는 밖으로 나갔다.
“어디 가요?”
안방 밀장문 사이로 영실의 외짝 눈이 보였다.
“저기.”
옥이가 큰 대문 밖으로 나서자 봉준이는 허방지방 뛰었다.
남편의 황급히 날치는 꼴을 보는 옥이는 무슨 일인가 하여
어리둥절하였다.
골목쟁이를 돌아서자 눈이 시큼해지도록 빛나는 가스불 앞에
남편은 우뚝섰다.
“어서 오르십시오.”
몇 사람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소리와 함께 휘발유 냄새가
옥의 코를 벗튀었다.
“이렇게 만나 보니 반갑습니다.”
옥이는 얼결에 머리를 돌려 바라보니 연희와 숙희였다.
순간에 그의 가슴은 선뜻하였다.
택시는 달음질쳤다.
문득 자기와 남편이 그리운 고향 떠나던 때가 눈앞이 보이는 듯하였다.
옥의 바른편 무릎 사이로 옮아오는 연희의 따뜻한 체온은
같은 고향 사람임을 더욱 느끼게 하였다.
숙희는 연희와 무슨 귀엣말을 건네고 있었다.
“얼마나 기쁘십니까, 옥씨.”
원선이는 자기 앞에 똑바로 앉은 옥의 목덜미를 보았다.
옥이는 머리를 숙이는 외에 잠잠할 뿐이었다.
“축하 올립니다, 옥씨.”
이번에는 재일의 목소리였다.
이마 위에 땀이 나도록 옥이는 부끄러웠다.
암만 대답을 하려고 하였다가도 목소리가 밖에까지
나가 주지를 않았다.
‘어쩐 일일까, 내가 벙어리 되려나?
하기까지 의문이 들어갔다.
“선생님, 이제 가시면 언제쯤 나오시게 되나요?”
원선이는 무슨 생각을 하다가 얼른 숙희를 보았다.
“글쎄요, 여름방학 때나 오게 되겠지요.”
곁에서 듣는 옥이는 한층 떠 부끄러웠다.
자기는 묻는 말도 대답 못하는데 숙희는 말을 건넨다.
‘언제나 나도 저만큼 되어 보려나!’
하고 생각할 때
이 세상에서는 자기와 같이 못난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따라서 남편이 배척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라 하였다.
경성역에서 내린 그들은 대합실로 밀려들어갔다.
옥이는 어쩌다 넘어질세라 겁이 나서
미처 그들의 뒤를 따르지 못하였다.
그는 한편 구석에 가만히 서서 머리를 숙였다.
낮같이 밝은 불빛 아래 흔들리는 그 사람의 동작을 따라 까만 눈만이
반들거렸다.
그들은 의자에 척척 걸어앉아 돌아보니 옥이가 없었다.
“여보게, 옥씨 어디 가셨나?”
휘휘 둘러본 재일은 이편으로 뛰어왔다.
“저리로 가십시다.”
불빛에 빛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뇨”
옆에 의자에 가만히 걸어앉았다. 자칫하면 푹 고꾸라질 것 같았다.
옥의 이마 끝에 땀이 방울방울 맺혔다.
재일은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옥의 옆에 앉았다.
이 꼴을 본 옥이는 시재 걷다가 엎으러져서 망신을 톡톡히 할지언정
같이 앉고 있기는 싫었다. 그는 살짝 일어나서 앞으로
걷기 시작하였다. 걸어가니 심상하였다.
눈결에 남편을 보니 그는 자기편으로 외면을 하여 돌아앉고는
얼빠진 놈처럼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에 그의 눈에서는
있는 불이란 다 기어나오는 것 같았다.
원선이는 차표를 타 가지고 옥이 섰는 편으로 왔다.
“이 사람 때문에 고생 많이 하십니다.”
머리를 숙여 보였다. 그는 발부리를 굽어보았다.
“천만의 말씀을 하십니다.”
며칠 동안에 처음으로 듣는 음성이었다.
약간 들리는 듯한 가는 말씨가 원선의 귀에다 귀엣말을 하는 듯이
장그럽게 들렸다.
“공부 잘하십시오. 그저 배워야 합니다.”
요란한 소리를 따라 차는 들어왔다. 역부의 고함소리에 놀란 옥이는
입 속으로
‘게이죠’ 하고 되뇌어 보았다.
원선이는 숙희 앉은 편으로 뛰어갔다.
서로 손을 잡고 이편으로 뛰어오자,
“어서들 들어가세요.”
꾸리 묶어선 듯한 사이로 들어섰다.
“이번에는 나 혼자 지낼 생각이 난처하네.
이 학기 다 지나기 전에 곧 들어들 오게. 공연히 놀면 뭣하겠나?”
연희가 옥의 곁으로 왔다.
“고향서 편지 왔어요?”
“아직 아니 왔어요?”
연희를 쳐다보았다.
맞은편에 선 숙희는 새침히 머리를 숙이는 것이었다.
“안녕히들 계셔요.”
바라보니 원선이는 사람들 틈에 섞여 잘 보이지 않았다.
플랫포옴에서 차에 올라선 원선이는 이편을 향하여 모자를 높이 들어
보이고 차안으로 들어가자, 창문을 열고 머리를 내어밀었다.
이편에서도 모자로 손수건으로 내어흔들기 시작하였다.
원선이는 그들 틈으로 언제까지나 고요히 섰는 옥이를 보았다.
학교로부터 돌아온 옥이는 옷을 벗고 잠옷 비슷이 만든 통옷을 입은 후
밖으로 나와서 세수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창문까지 열어 젖히고 방을 쓸어내었다.
그리고 책보를 책상 위에 풀어헤쳐서 책보는 문밖에 활활 떨어다
네모 반듯이 개어 한편 옆으로 착 놓았다.
그리고 우선 공부할 책만 따로 놓고는 모두 착착 겹놓았다.
그는 책상 위를 이렇게 정돈해 놓고는 오늘 온 신문을 들었다.
제 일면으로부터 시작하여 차례차례 보기 시작하였다.
영실 어머니는 건넌방으로 건너왔다.
자다 나온 모양인지 얼굴이 푸석푸석하고 눈이 빨갛다.
“영실이는 아직 시간이 남았나?……”
이렇게 혼자하는 말처럼 하고 나서 되뚝한 파란 곽과
편지를 내어밀었다.
“옛네. 아까 웬 심부름꾼 애가 가져왔기에
누가 보내더냐고 물어도 대지 않고 가데.”
그는 달갑지 않게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우선 편지부터 보리라 하고 겉 피봉을 보았다.
주소도 성명도 아무것도 써 있지 않았다. 그는 문득 일어나서
의심과 함께 봉투를 뜯고 보았다.
영실 어머니는 말똥말똥 눈치만 따기 졸음도
어디로 달아난 모양이었다.
“무어랬나?”
다 보고 난 옥은 억지로 웃음을 띠었다.
“장난감 보낸다는 말입니다.”
“응.”
옥이는 곽과 편지를 책상 아래로 밀고 여전히 신문을 들었다.
영실 어머니는 펴보았으면 하고 바라보다가
보지 못하게 되매 허수하였다.
“에, 덥다.”
얼굴에 붙는 파리를 쫓고 나서 밖으로 나갔다.
발자취 소리가 멀어지자 그는 신문지에서 눈을 떼어
문밖을 내다보았다.
신문지도 맥없이 날아 떨어지고 말았다.
장독에 붙었던 왕파리는 왱, 하고
쨍쨍히 들여 쬐는 볕을 따라 문턱까지 날아왔다.
자기는 이곳에 오직 남편 하나를 믿고 따라온 것이다.
하지만 남편은 차츰차츰 자기를 찾아오기도 싫어하는 듯하였다.
어쩌다 오게 된다면 반드시 재일과 함께 왔다가 가곤 하였다.
다소 의논하고 싶은 일이 생겨도 가슴에 뭉치고 또 뭉쳐 두었다가
시간이 지나면 저 혼자 삭아지고 말았다.
이런 것을 생각하고 나니 바람벽을 마주 앉은 것처럼 답답함을 느꼈다.
그는 다시 편지를 끌어내어 자세히 몇 번이든지 읽어보았다.
글자 한자 어그러지지 않고 분명히 쓴 글씨였다. 이것이 참일까?
남편이 일부러 시험해 보누라고 이런 일을 않았나?
그렇다면 반면에 남편이 자기에게 대한 애정이 확실히 있는 것이다.
얼마나 기쁜 일이랴! 고마운 일이랴! 하지만 어디까지든지
참인듯 싶은 편이 세었다.
남편의 둘도 없는 친구가 이런 일을 내게 감히 할 수 있을까?
이것은 필연 남편과 재일이가 함께 공모해 가지고 어떠한 계책을
내어서라도 자기와 이혼될 조건을 만들어 가지고자 하는
수단같이 보였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설움이
가슴을 올올이 찢는듯 하였다.
그는 책상 위에 폭 엎드려서 흑흑 느껴 울었다.
문앞으로 지나치던 영실이는 우뚝 섰다.
“언니 왜 울어?”
된 햇빛이 내리쬐어 영실의 머리는 시재 타지는 듯하였다.
그는 마루로 올라앉자 책보를 방으로 던지고 달려왔다.
“왜 울어?”
옥의 어깨를 흔들었다.
“공연히 울지 뭐.”
“언니 공부 준비하지 않우?”
“해야지.”
그는 눈물을 이리저리 씻고 나서 책을 펼쳐 들었다.
하나 샘솟듯 나오던 눈물은 뒤를 이어 떨어졌다.
“에 덥다, 지독히 덥네.”
영실은 후닥닥 뛰어나갔다.
옥이는 도로 책을 놓고
‘어머니! 나는 어찌라우!’이렇게 부르짖을 때‘믿지 마라!
남자를 믿지 말아라!’
번개같이 옥의 가슴을 두드려주었다.
그의시어머니께서 임종시에 턱을 가불가불 채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부르짖음 이었다.
어린 옥이는 무슨 말인고 하고도, 너무도 또랑또랑한 힘있는 말이매
그의 머리에 꽉 찔려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항상 그는 입 속으로 외우고 있었다.
‘믿지 마라! 남자를 믿지 말아라!’다시 한번 불러보았다.
‘얼마나 잘 아시고 하신 말씀이랴!’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든든한 의지가 생긴 듯싶었다.
따라서 북받쳤던 설움이 가라앉고 거뜬해짐을 느꼈다.
이 말 한 마디가 오늘날 옥에 있어서는
얼마나 귀한 보배였는지 몰랐다.
‘오, 어머니! 당신께서 남기고 가신 그 귀한 말씀은 내 가슴에,
내 가슴에 품었나이다.’그는 눈을 스르르 감았다.
한참 후에 그는 다시 눈을 떠서 앞에 놓인 곽과 편지를 노려보았다.
‘흥!
몰랐다! 너희들이 짐작한 그런 어리석은 여자는 아닌 것이다!
시계와 반지로 인하여 일생을 버릴 그런 못난 계집은 아니다.
오! 아니다!’ 그는 벌컥 일어났다.
봉준이는 저녁을 먹고 문밖으로 뛰어나왔다.
시원한 바람은 그의 머리를 다소 거뜬히 해주는 듯싶었다.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 있던 그는 물먹고 싶듯이 숙희가 그리워졌다.
어젯밤 오래도록 숙희 방에서 놀았건마는 불과 몇 시간이 지나지 못한
지금에 생각해본다면 몇삼년이나 된 듯이 멀어 보이고
다시는 숙희와 마주 앉아 볼것 같이 않았다.
그는 슬금슬금 걷기 시작하여 어느덧 숙희집 문앞에 발길을 멈추었다.
마침 안으로부터 숙희가 길을 굽어보며 나왔다.
“재일 군 집에 있나요?”
숙희는 머리를 들고 봉준이를 바라보았다.
“오빠는 금방 나갔는데요…… 아마 봉준씨한테 가셨을 것 같애요.”
숙희는 앞으로 걸었다. 봉준이도 따라섰다. 이 여자가 어디를 갈까?
이런 생각을 하며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남몰래 달았다.
“숙희씨!”
그는 발길을 멈추고 섰다.
“조용히 저를 만나줄 수가 없습니까?”
무슨 볼일이 있세요?”
“네, 있습니다.”
봉준은 앞장을 섰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오늘은 제가 바쁜데요.”
봉준은 모처럼 얻은 기회를 놓쳐 버릴까 하여 쩔쩔매었다.
“숙희씨! 잠깐만 와주십시오, 잠깐만!”
그의 음성은 떨렸다. 숙희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겨우 참고
잠잠히 그의 뒤를 따랐다.
무엇보다도 그의 하는 꼴을 보자는 호기심이었다.
봉준이는 숙희가 따르는 것을 알자 발길이 허공에 뜬 듯이 날아가는지
걸어가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따라서‘이것이 꿈인가?’하는 의심도 몇 번이든지 들었다.
그들은 남산 솔밭 사이로 들었다. 노송나무를 사이로 둘이는 마주섰다.
“앉으셔요.”
봉준이는 자기 양복 웃저고리를 벗어 깔아놓았다.
“앉으셔요, 네?”
거의 애걸하다시피 하였다.
“좋습니다.”
숙희는 여전히 소나무를 기대어 섰다.
아까 거리에서보다는 훨씬 울울함을 느꼈다.
그러나 숙희는 속으로 ‘제가 어떻게 할 테냐! 제까짓 것이!’
이렇게 스스로 위로받으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셀 수 없이 들어선 소나무들은 마치 비밀회의로 모인 듯이
무거운 침묵 속에서 머리와 머리를 맞대고 긴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군데군데 떨어진 파란 달빛은 봄바람에 떨어진
꽃송이 꽃송이 같았다.
“숙희씨! 제가 올린 편지는 받아보셨겠지요?”
“네.”
“어째서 회답을 주시지 않았나요?”
자리가 자리인 만큼 숙희로서도 주저치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한참이나 무엇을 깊이 생각하다가
“회답을 기다리셨습니까?”
모처럼 고대한 대답은 반문으로 되돌아왔다.
이렇게 반문하는 뜻도 봉준이로서도 대강 짐작하였다.
그렇지만 이리저리 따져 묻자면 공연한 시간을 허비할 뿐더러
새삼스럽게 과거 일을 탄해 가지고 말썽부리잘 필요가 없는 것 같았다.
“네, 기다렸습니다. 여러 말씀 할 필요 없구요. 이미 숙희 씨가 편지를
통하여 저의 마음을 다 아셨을 테니까요……”
여기까지 말한 그는 숨이 꼭 막혔다.
한참이나 머리를 숙이고 잠잠하던 봉준이는 머리를 번쩍 들었다.
“한 마디에 달린 것이올시다. 저의 사랑을 받으시겠습니까?”
봉준의 씨근거리는 숨소리가 빤히 들렸다.
숙희의 전신은 오싹하였다. 따라서 이 솔밭이 무시무시한 생각이 들자
그는 소나무를 맘껏 껴안고,
“봉준씨는 부인이 있지 않습니까.”
“네, 형식상으로는 있다고 볼는지 모르오나 실은 저는 총각입니다!”
이 말에 그는 악이 치받쳤다.
“총각이라구요? 차라리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숙희씨! 당신 앞에 거짓말이 손톱만치나 있다면
당장 벼락이라도 맞겠습니다. 차라리 하느님을 속일지언정!”
그는 눈물이 쑥 비어졌다.
“숙희씨! 나는 생전 처음으로 내 가슴속에 여자의 흔적이 있다면
당신의환영(幻影)이겠지요.
밤낮으로 당신을 그리워 애쓴 죄밖에는 없습니다.”
숙희는 속으로 걱정이 되었다. 언제까지나 끝날 줄 모르는 이야기만을
듣고 우두커니 서 있을 수 없는 터, 그렇다고 발길을 돌리려 하니
애걸애걸하는 꼴이 불쌍하다 못해 곧 난처하였다.
“봉준씨, 이 부족한 사람을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신다는 것은
제 몸에 지나치는 영광으로 압니다만, 아직 철없는 저라서
사랑에 대하여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내려가십시다.”
그는 발길을 옮겼다.
봉준이는 아찔하여 얼핏 소나무를 쓸어안고 정신을 가다듬은 후
비실비실 따랐다.
멀리 사라지려는 숙희의 치마폭 사이로 은은한 달빛이 품겨 있었다.
정신없이 하숙으로 돌아온 봉준이는 방바닥에 콱 쓰러져 앓는 소리를
꿍꿍하였다.
주인 마누라는 어쩐 일인지 몰라 궁금하였다.
금방까지도 저녁 잘 먹고 이야기를 시끄럽게 하던 사람이
무섭게 앓는 소리를 하니 아마도 체했나 보다 하고 건너갔다.
“어쩐 일이세요? 어디 편치 않으세요?”
“네, 물 좀 주시구려.”
봉준이는 시뻘건 눈으로 쳐다보았다.
“효주야! 물 떠오나라!”
뒤이어 얼굴 나부죽한 어린 처녀가 두 손으로 시첩을 받들고 나온다.
“선생님 아프시다.”
효주는 어머니 뒤에 붙어 앉아 이따금씩 그를 엿보았다.
“옥이도 오랄까요?”
“그만두셔요.”
보기 좋게 꿀꺽꿀꺽 물을 들여마신 봉준이는 바람벽을 향하여
돌아누웠다. 바람벽에 진 자기 그림자를 보고 외로운 설움이
가슴을 메어지게 하였다. 하여 모르는 사이에 베개 밑이 척척해졌다.
멍하니 바라보던 주인 마누라는,
“물수건 해서 대드릴까요?”
“수고시럽게…… 요.”
그는 안으로 들어가자 대야에 물을 떠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벽에 걸린 수건을 적시어 머리에 번갈아 대주었다.
훨씬 시원한 맛이 있었다. 신발소리가 나자 재일이가 성큼 들어섰다.
“어쩐 일인가?”
“갑자기 아프시답니다.”
“어디?”
봉준의 곁으로 다가앉았다. 그는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떠서
재일을 보자 그의 손을 꽉 잡고 흑흑 느껴 울었다.
“어디 아픈가? 응?…… 울기는…… 왜.”
재일은 그의 머리를 짚었다.
“과다하는데, 옥씨 오셨댔나?”
“웬걸요, 아프신지 알지도 못할 터인데요.”
“오라지, 밤에 적적하지 않어?”
친구를 생각함보다도 자기가 그리웠던 것이다.
매번같이 이 집을 찾게 되면‘행여나 옥이를 만날까?’하는 생각이었다.
“그만두시라니까요.”
“오라게 원.”
봉준이는 잠잠히 눈을 감아버렸다.
요 며칠 동안 재일은 옥이로부터 무슨 회보가 있을까 하여
지나다니는 체부만 조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가 가물해져도
따라 감감해지고 자기의 예측한 바와는 지나치게 어긋났다.
처음 짐작은 며칠 동안이면 옥의 마음을 움직여
놓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 방향으로 몇 개월이 된 오늘까지도
꿀먹은 벙어리 모양이었다.
“어쩐 일일까? 내 수단 방법이 틀린 것인가?”
이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답답함을 느꼈다.
황금이면 만사에 거칠 것이 없다고 굳게 믿었던 그의 신념도
다소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최후의 실낱 같은 그의 희망은 옥의 뒤를 따르다
직접 행동을 취하는 외에 별도리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므로 밤이 되면 으레 옥의 하숙집을 몇번이든지 돌았다.
그러나 웬일인지 한 번도 기회가 마땅히 없었다.
방금 옥의 집을 들러 오는 길이었다.
“곤하신데 나가십시오.”
눈이 거적해진 주인 마누라를 쳐다보았다.
“에그 참 졸립니다. 미안하나마 저는 먼저 나갑니다.
앉았다 가십시오.”
무릎에서 잠든 효주를 깨워 가지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여보게, 오늘 숙희씨를 만나지 않었나.”
“응, 그래, 말좀 해보았나?”
봉준은 한숨을 푹 쉬었다.
“말하면 소용이 무언가?”
“그래, 거절받았다는 말이지?”
“그럼.”
“직접 행동을 하여야하지 말만을 누가 무서워 하나.
그래 손 한 번 걸쳐보지 못한 모양이네 그려.”
그는 씩 웃었다.
“그런 일은 난 못하겠데. 바루 성공을 못하면 말았지.”
“흥! 아직 멀었네. 그렇게 약해 가지고야 일이 되나.”
“여보게, 자네 힘써 주게나!”
“물론 힘써 주지.
한데 여자 암팡진 것은 실은 여간 지독한 것이 아닌 모양이데.”
옥이를 두고 이런 말함임을 봉준이도 짐작해보았다.
“아무렴 자네 전에는 나더러 비웃댔지. 그리 단단히 지내보게.”
“자네 옥씨랑 꼭 이혼할 생각이지?”
“새삼스럽게 그건 왜 묻나?”
어지간히 몸이 단 것을 알았다.
“글쎄……”
빙긋이 웃었다.
“아무렴 숙희씨를 생각하는 나인 것을 잘 알지, 자네도?”
“오래.”
“그러면 묻는 자네가 그른 것 아닌가?”
재일은 멍하니 전등불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엇을 깊이 생각하는 듯하였다.
봉준은 재일을 사귄 후로 이러한 태도를 처음 보았다.
언제나 쾌활하던 재일이가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고통을 당하였으랴
하고 생각하니 그가 불쌍히 보였다.
“자네도 사랑의 쓴맛을 이제야 보네 그려.”
재일은 자리 속에서 눈을 뜨자 엊저녁에 날치던 봉준의 꼴이
마치 활동사진으로 보는 듯하였다.
자기 경험으로 미루어 며칠이나 몇 달이나 갈 줄 알았던
봉준의 상사병은, 자기에게 알려진 후부터도 준 이태가 지나서
올해는 공부까지 전폐하고 봄부터 가을철까지 온전히 전문으로 종사를
하다가도 결국은 무서운 신경쇠약병까지 얻어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사이에 지나간 이태는 몰라도 올 봄부터는 재일이도
봉준을 동정하여 숙희를 대할 때만은 다만 한 마디씩이라도
봉준의 이야기를 건네고 따라 숙희를 권면하였다.
그러나 언제든지 숙희는 그만그만하였다.
엊저녁에는 재일도 겁이 났다. 자기의 친구로서 누이동생을 위하여
생사를 분간치 못하기쯤 된 형편이니 어쨌든 난처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옥의 안타까워하는 것이란 사람으로선 못 볼 것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컥 일어났다.
그는 옷을 입은 후 숙희 방으로 건너갔다.
숙희는 산뜻이 화장을 하고 앞문 앞에 앉아 수를 놓았다.
방문소리가 나자 숙희는 힐끔 쳐다보았다.
“숙희야.”
그는 바늘을 든 채 재일을 보았다. 아직 이마에는 베갯자리가 있었다.
재일은 얼결에 이렇게 부르고 나서도
갑자기 어느 말부터 꺼내야 좋을지 몰랐다.
“왜요?”
\왔다갔다하는 재일은,
“너 어째서 그렇게 사모하는 김 군을 싫어하니? 무엇 때문이냐?”
숙희는 눈꼬리가 샐쭉해졌다. 아무 말 없이 바늘 꽂았다 빼는 소리만
잦아질 뿐이다. 숙희의 꼴을 보니 오늘도 틀릴 모양이었다.
재일은 음성을 낮추었다.
“숙희야! 너의 오빠도 생각지 않니? 오늘만 부대 가자.
가서 잠깐만 앉았다 오자꾸나.
그것이야 무엇이 힘들 것이 있니? 응, 대답해라.”
재일은 애걸하다시피 하였다.
숙희는 언제까지나 말이 없었다. 재일은 마음대로 하면 달려들어 실컷
쥐어박아 반쯤 용신을 못하게 만들어 주면 좋을 상으로 생각되었다.
싯재 펄펄 뛰는 생떼 같은 청년이 자기 하나 때문에 죽겠다 살겠다 하는
판에도 말똥말똥히 무엇을 생각만 하고 앉았는 것이 재일로 하여금
눈에 불 나도록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러나 꾹 참고,
“어찌겠니?”
숙희는 바늘을 저고리 섶에 꽂고 재일을 뚫어지도록 바라보았다.
“오빠! 제발 그런 말씀 말아 주세요.
세상에는 봉준씨 한 분만이 그런 고통을 당하는 것뿐 아니겠어요?
그런 것을 어떻게 일일이 동정합니까? 심하게 말하면 죽는대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네, 오빠, 그렇지 않습니까?”
숙희의 얼굴은 슬픈 빛이 돌았다
“숙희야! 그러면 너는 봉준 군을 죽이려느냐! 응?”
그의 눈에는 봉준이가 보였다. 따라 어여쁜 옥이가 보였다.
“죽는 사람은 약자지요. 못난이지요. 어찌해서 귀한 일생을
일개 미미한 계집 때문에 희생을 버리겠습니까……”
재일은 분이 왈카닥 치밀었다.
“야! 사설만 지껄이지 마라. 너도 무슨 사람값에 가니! 에잇,
저런 매몰스런 계집애하고 말하다가는 아주 기막혀 죽겠어!
어데 얼마나 버티나보자.”
그는 휙 나가버렸다.
숙희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가지고 돌부처 모양으로
앉아서 꼼짝하지 않았다.
눈물 흘린다는 것은 몇 분 후에 한 방울씩 떨어질 뿐이었다.
연희가 밖으로부터 황당히 들어왔다.
“어째 그러니? 또 그 일 때문이냐?”
연희의 까만 눈에서는 벌써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하여 마치 낙숫물 지듯이 흐르는 것이었다.
숙희는 말똥히 연희의 들먹이는 어깨 위를 바라보며 저렇게 속 시원히
울어봤으면 하고 오히려 눈물 많은 것이 부럽게 생각되었다.
따라 봉준의 일이 난처하였다. 그러나 어여쁜 아내를 가진 봉준이가
또 자기를 생각하여 죽네 사네 한다는 것은 어쩐지 자기로서는
색마와 같이 생각 되었다. 어쨌든 순결치 못한 것이 미웠던 것이다.
돌이켜 한 번도 장가 가보지 못한,
이름만이라도 총각이 그 지경이 되었다면 장래는 어찌 되었든
우선 그의 순정에 자기의 마음도 어찌 움직여 나갈는지 모를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옥에 티가 있을지언정 이십여 년 꼭 봉해 두었던
자기의 흠도 티도 없는 정조를 아내 있는 사람에게 바치기는
암만 눈 감고 생각하여도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봉준의 꼴을 본다면 자기도 사람인지라 어떻게 될는지
몰라서 아예 가기가 싫다는 것보다는 두려운 마음이 앞섰던 것이다.
그러므로 몇 달 째 눈 딱 감고 모른 체하여 왔다.
한참이 지나도 연희는 울었다. 숙희는 이상한 생각으로,
“언니, 일어나라우.”
그의 어깨를 흔들 때
그의 무릎 아래로 샛노란 들국화꽃 한 송이가 보였다.
요새 며칠 동안 옥이는 학교도 결석하고 밤낮으로 봉준의 병간호
하기 눈코 뜰 짬이 없었다. 그러나 애쓴 보람이 없이
병세는 점점 더 깊이 들어갔다.
아침도 먹는지 마는지 한 옥이는 영실을 데리고 숨차게 달음질쳤다.
방안으로 들어서자 봉준의 곁으로 갔다.
두 눈이 푹 꺼진 그는 눈을 들어 옥이를 보다가 영실을 보자
갑자기 눈을 둥그렇게 떴다.
“숙희씨!”
벌컥 일어났다. 하여 뚫어질 듯이 그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아냐요, 우리 주인집 학생 영실이야요.”
영실은 겁이 나서 방구석으로 쫓겨가 앉는다.
봉준은 도루 자리에 푹 꺼꾸러졌다. 그는 눈물이 쑥 비어졌다.
“숙희씨! 나는 총각이야요. 당신에게 무슨 거짓말이 있겠습니까?”
정신없이 이런 소리를 연거푸하며 돌아누웠다.
주인 마누라는 미음 그릇을 가지고 들어온다.
옥이는 일어나 받아 가지고 남편 곁으로 갔다.
“여보셔요. 미음 좀 잡숴 봅시다. 네. 이리 돌리세요.”
봉준의 머리를 이편으로 돌리려 하였다. 그는 옥의 손을 탁 갈기며,
“너희들은 다 가라! 보기 싫다!”
미음 그릇은 쏟아졌다.
“에크!”
주인 마누라는 안방에서 걸레를 갖다 옥이에게 주었다.
그는 거룩한 미음을 다 훔쳐서 가지고 밖으로 나가자
주인 마누라가 받아 가지고 자기가 나갔다.
곁에서 보는 영실은 어리둥절하였다.
따라 숙희가 한편으로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감정 가진 사람 같지 않아 보였다.
옥이는 끝없이 남편의 살 빠진 돌아누운 편 볼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보 옥이, 숙희 좀 오라소 그려.
한 번만 봐도…… 네. 숙희 좀 제발 데려다주.”
옥이는 성큼 일어났다.
“영실아, 너 숙희네 집 알지?”
“응.”
“그럼, 대문까지만 데려다 주렴.”
“갑시다.”
둘은 밖으로 나왔다.
고래잔등 같은 세마루 기와집 앞에서 영실은 발길을 멈추었다.
“이 집이냐?”
어쩐지 옥의 가슴은 선뜻하였다.
“어찌겠니? 여기 서서 기다리겠니, 가겠니?”
한참이나 생각하던 영실이는,
“어떡합니까? 같이 들어갑시다그려.”
옥이는 다행히 생각되었다.
“안되었다, 영실아.”
“언니도 별 말씀 다 하십니다.”
영실은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뚱뚱한 살빛 좋은 부인에게 향하여
가볍게 머리를 숙여보였다.
“오, 영실이 오니?”
부인의 눈매를 보아 즉석에서 옥이는 숙희 어머니로 알았다.
부인은 뒤에 섰는 옥이를 유심히 보고 나서 머리를 돌렸다.
“숙희야, 너의 동무들 왔다.
건넌방 문이 열리면서 숙희의 반신이 나타났다.
옥이는 못 볼 것을 보는 것처럼 끔찍하였다.
“영실이, 옥씨! 어서 들어오세요.”
숙희는 일어섰다. 연희도 내다보았다.
그들은 방안으로 들어앉았다.
갑자기 맴돌려다 놓은 것처럼 옥이는 어리둥절하였다.
앞에도 번쩍 뒤에도 번쩍, 모두가 어른어른하였다.
그는 가만히 정신을 가다듬어 차례차례로 둘러보았다.
첫눈에 띈 것은 책상 위에 치쌓인 책들이었다.
그리고 대문짝 같은 체경이 죽 둘러놓인 것이 농궤였다.
“용하십니다, 옥씨.”
“이렇게 와야 다 반가이 보지요.”
숙희를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
숙희는 그를 마주 바라보며 전날 옥이와는 딴판으로 생각되었다.
수양이란 사람을 다시 만들어 놓는 것이다 하였다.
숙희는 살짝 눈을 돌려,
“어째서 영실이가 우리집에 놀러 안 왔니?
아마 공부만 열심으로 하지?”
“공부가 다 무어냐.”
숙희는 밖으로 나갔다.
연희는 옥이를 쇠쇠 들여다보며,
“어떠신가요, 요새는?”
“글쎄요, 말이 안 나옵니다.”
한숨을 푸 쉬었다.
“에그 딱해라! 오작이나 안타까우시겠어요.”
“무섭던데요.”
영실은 동달았다.
숙희는 과일 그릇을 가지고 들어왔다.
오목오목한 손으로 배 한 알을 들어 벗겼다.
“이제 곧 밥 먹고 왔는데요.”
옥이는 숙희의 손을 보았다.
“이것이 배부를 것이야요?
일부러 밥 먹은 후에는 배 한쪽씩 먹는 것이 좋대요.”
상긋 웃었다. 하얀 이가 보였다.
이렇게 천연스레 이야기는 하면서도 가슴은 조급하였다.
숙희는 주는 배 쪽을 받아 입에 넣은즉 꽤 시었다.
옥이는 억지로 깨무는 척하면서 어떻게 말하여 숙희를 데려갈까,
이번 자기 말에 따라 자기 남편의 운명은 결정되는 듯이 생각되자
온몸에 소름이 쪽 끼치는 것이었다.
한참이나 이렇게 생각한 그는 얼굴을 번쩍 들고 숙희를 똑똑히 보았다.
“숙희씨! 이런 말 하는 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옥의 입술은 푸르르 떨렸다. 그리고 두 볼이 화끈 달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미리 예측한 것인만큼 새삼스럽게 더 놀라지는 않았다.
“네, 무슨 말씀이든지 하십시오.”
숙희는 심상스레 말하였다.
“숙희씨, 잠깐만 우리집에 놀러 가십시다. 긴급히 볼일이 있는데요.”
“네. 무슨 볼일인지 대강 이야기하십시오. 그래서……”
말이 채 마치지 못하여
“숙희씨 당신은 참으로 모르십니까? 한때를 돌아봐 주시지오.
그러면, 그러면 얼마나 고마울는지요……”
숙희는 잠잠히 있었다. 연희는 왈칵 일어나 숙희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숙희야, 옥씨가 오신 생각을 해서라도 이번만은 가야 한다. 응?
숙희야!”
연희의 눈에는 눈물이 괴었다.
“언니는 미쳤나 봐요 왜 이러셔요.”
연희를 흘겨보고 나서,
“옥씨, 나는 당신이 불쌍해서 못 가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없었다면 벌써 가보았을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남편을 사랑하여 저한테 오신 것만큼 저 역시 당신을 생각하여
죽기로써 못 가겠습니다!”
숙희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렀다. 이 말 한 마디에 옥이는 절망하였다.
따라 머리끝까지 치밀리는 분함을 따라 그의 앞은
점점 암흑으로 변해지는 것이었다.
“숙희야! 너 나를 사랑하지. 내가 만일 죽게 된다더래도 네 힘으로
구원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버려둘 터이냐?”
숙희는 연해 덤비는 꼴을 바라보았다.
“언니! 왜 그런 말까지 하여요?”
“숙희야! 제발 가다오. 가다오. 오작이나 불쌍한 사람이냐.”
숙희를 잡아 일으켰다.
“흥! 가기는 어데를 가요.”
영실은 옥의 손을 잡아끌었다.
“언니, 가자오.”
“그래, 못 가시겠다는 말이요?”
“무엇하러 가요!”
딱 떼어 버렸다. 어물어물하다가는 이때껏 고집해온 것이
무효로 돌아가고 말 것 같았다.
방문이 열리자 숙희 어머니가 들어왔다.
“무슨 일들이냐?”
영실은 손을 슬며시 놓고 앉았다.
“어머니, 아무것도 아니야요.”
숙희는 이렇게 말하고 배 쪽을 들었다.
그는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서 여러 사람을 휘뚜루 살펴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뒤이어 담뱃대 떠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옥이는 더 앉았을 수 없었다. 하여 일어났다.
“숙희씨, 실례 많이 했습니다. 다 용서해 주시구려.”
주인은 잠잠히 따라 일어났다. 그들은 정신없이 걸었다.
“언니, 속 태우지 말라우. 곧 낫겠지, 무얼 그래.”
옥의 애쓰는 꼴이란 그의 눈으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한참이나 뛰어오던 옥이는 거리바닥에서 공중 넘어졌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한 번씩 돌아보고 씩 웃었다.
아이들이 이리로 달려왔다.
영실의 두 귀밑이 화끈화끈 달았다.
“언니 천천히 가요”
그를 잡아 일으켰다. 옥이는 앞이 아득해지며 재차 넘어갔다.
영실이는 너무 안타까와서 슬그머니 골이 났다.
아이들은 바짝 대들어 숨 답답하리만큼 쳐다보았다.
그는 겨우 옥이를 일으켜 가지고 그의 손을 꼭 붙들었다.
“언니! 정신 차려요.”
옥이를 쳐다보았다.
그의 이맛가에서는 땀이 방울방울 맺혀 귀밑으로 흐르는 것이었다.
바라보니 붉은 옷 입은 죄수들이 간수들에게 호위되어 지나갔다.
영실은 발길을 멈추고 섰다.
“오빠!”
얼굴 긴 사나이가 이편으로 힐끗 돌아보고 말없이 지나치는 것이었다.
영실의 무섭게 뛰는 가슴은 옥이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웬일이냐? 누구냐?”
“저기 가는 세째로 선 사람이 우리 오빠야요.”
그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오빠? 어머니가 말씀하시던 오빠…… 그 오빠냐?”
영실의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아 떨어졌다.
옥이는 그들의 가는 뒷맵시를 바라보았다.
따라서 영실 어머니의 눈물 섞어 이야기하던 마디마디가 그의 가슴을
울리게 하였다. 몇백 명의 노동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희생해 바친
영실 오빠.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정신이 바짝 들었다.
“오빠! 내 오빠도 되는 것이다!”
영실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그들이 밟고 간 넓은 길을 끝없이 바라보았다.
영실이는 눈을 부비치며,
“언니, 가자우.”
옥이의 손을 잡았다.
“봐라!”
옥이는 우뚝 서서 무엇을 깊이 생각하더니,
“오빠가 밟고 간 이 길로 우리도 가야 한다! 영실아!”
그의 음성은 떨려나왔다. 영실이는 멀거니 바라보며,
“언니 미쳤나 봐, 어서 가자우요!”
6. 옥이
중로에서 영실을 보낸 옥이는 자기의 과거를 곰곰이 생각하며 걸었다.
‘나는 어떠한 길을 걸었나?’ 아니, 나도 사람인가?
밥을 먹고 옷을 입을 줄 아니 사람이랄까, 울고 웃을 줄 아니
사람이랄까? 응! 아니다! 울었다면 나를 위하여 울었더냐?
웃었다면 진정한 나의 웃음이었더냐? 모두가 봉준을 위하였음이었다.
두루뭉수리 삶이었다! 이러한 삶을 계속시키려고 안타깝게
울었던 것이었다.
불쌍한 인간! 그는 이렇게 부르짖고 대문으로 들어섰다.
방으로 들어온 그는 묵묵히 봉준을 보았다.
봉준이는 벌컥 일어나려다 도로 팍 고꾸라졌다.
다시 머리를 돌려 눈이 찢어지도록 바라다본 그는
“또 못 데려왔구려! 숙희! 숙희야! 네가 나를 죽이려느냐.
한 번만 뵈어다오, 한 번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시름없이 바라본 옥이는 속으로 ‘불쌍한 인간! 차라리 울 바에는
너를 위하여 울어라. 좀더 나아가 여러 사람을 위하여 울어라!
한낱 계집애를 생각하여 운다는 것은 너무나 값없는 울음이 아니냐!’
이렇게 부르짖을때 아까본 영실이의 오빠가 머리에 똑똑히
나타나는 것이었다. 하여 자기 가슴속에
깊이깊이 들어앉았던 남편인 봉준이는 차츰차츰 희미하게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봉준을 물끄러미 보았다. 핏기 없는 그의 아웅한 얼굴,
진그락지 같은 그의 흰 손은 마치 죽은 송장을 보는 듯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때처럼 아무 미련없이 봉준을 불쌍하게 본 적은 없었다.
옥이는 골치가 지끈해지며 두 귀가 울었다. 따라 메슥메슥해지며
맑은 침이 휙 도는 것이었다. 방안으로 빽빽이 들어찬 무거운 공기가
그로 하여금 그렇게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벽을 향하여 누웠던 봉준이는 이켠으로 돌아누웠다.
“여보, 이혼해 주겠소, 못해 주겠소?
당신 말 한 마디에 달린 것이니까.”
숙희가 이때가지 자기를 냉대하는 것은 오직 옥이 때문이라
생각되었던 것이다. 옥이는 눈을 똑바로 떴다.
“네 해드리지요. 이때까지 온 것도 그만큼 제가 어리석었던 것입니다.
아니 못난 탓이었습니다!”
봉준이는 너무나 뜻밖의 대답에 오히려 서먹하게 되었다.
하여 이상한 눈치로 그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참말입니까?”
“네, 참말이지요.”
이렇게 대답하는 순간에 답답한 토굴속에서 벗어나는 듯하였다.
그들은 한참이나 말없이 있었다. 옥이는 더 앉을 수 없이
코밑이 달아왔다. 더구나 바라보기부터 뜨거워 보이는 전등불은
안타깝게 고요하였다. 그는 벌컥 일어났다.
“가겠습니다.”
말 한 마디를 남기고 미련없이 시원스럽게 뛰어나왔다.
대문을 나서자 선들선들 부는 바람이 그의 전신을 날 듯이 가볍게
하여주었다. 따라서 그의 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새것과 새것으로
그의 눈을 둥그렇게 하였다. 왜 이럴까? 자신을 향하여 물어보았으나
일정한 대답이 없이 머리에 떠오른 것은, 아까 그들이 밟고 간
아득해 보이는 훤한 길이었다.
깜짝 놀랐다. 어둠 속으로 따뜻한 손길이 자기 손을 꼭 잡았다.
그는 탁 뿌리쳤다.
“옥씨!”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나오는 것을 보아 여자임을 알았다.
“누구세요?”
“저예요.”
순간에 그는 누구일까! 숙희가 얼핏 생각키웠다.
“숙희씨세요?”
“아뇨, 연희입니다.”
“네, 들어가 보시지요. 저는 너무 곤한 끝에 머리가 아파서
돌아가는 길입니다.”
전 같으면 이렇게 돌아가지도 않겠지마는,
더구나 이런 말은 못하였으련마는 심상히 내쳐 버렸다.
“옥씨! 잠깐만 같이 들어가 주세요.”
옥이는 난처하였다.
모처럼 생각하고 온 손님의 말을 거절할 수 없는 터,
더구나 전 같으면 으레 자기로서는 안내하여야 될 처지인 줄을
번연히 아는 그만큼, 그렇다 하여 다시 그 방으로 들어가기는
죽기보다도 싫은 생각이 났다.
“연희씨, 용서하십시오. 제가 극도로 몸이 괴롭습니다.”
안타깝게 거절하는 옥의 말에 그는 이상히 생각되었다.
그러나 요리조리 따져 생각하기는 뒤범벅이 된 그의 머리가
허락치를 않았다.
“네! 곤하시겠지요.”
이렇게 대답을 하면서, 안타깝게 오라는 숙희가 아니 오고
기다리지 않는 자기가 온 만큼 당연한 일이다 생각될 때, 이 자리에서
금방 죽는다더래도 봉준의 방까지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럼 실례합니다.”
옥이는 앞으로 달음질쳤다.
숨이 차서 달려온 옥이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 밥 주어요.”
며칠 동안에 처음으로 듣는 생기 있는 말이었다.
“응, 주지. 어찌 되었나?”
옥의 손을 잡고 근심스러운 듯이 영실 어머니는 들여다보았다.
“그저 그렇지요. 어서 밥 주어요, 밥!”
옥이는 빙그레 웃었다.
연희는 매일 밤 가서 봉준의 병간호를 하였다.
그의 열성으로 간호한 보람 인지는 몰라도 차츰차츰 회복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가슴속에 깊이깊이 들어앉았던 숙희도 저절로
흔적을 감춰 버렸다.
반면에 봉준이는 연희에게다 마음을 붙이고 다시 하늘을 보게 되었다.
그만큼 연희의 순정에 눈물 날 만큼 감복되었던 것이다.
그는 완전히 자기 병이 회복되자 옥이가 원망스러웠다.
누구나 자기 한 생각은 못하는 것처럼, 봉준이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날 밤 뛰쳐나간 후로는 그는 발길을 끊었던 것이었다.
따라 새록새록히 옥의 신변을 조사하는 반면에 이상하게도
자기의 마음이 옥에게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학교 안에서는 우등생으로
선생이나 학생들 간에 온갖 사랑을 혼자 받는다는 것,
더구나 재일이가 미쳐서 덤비는 꼴을 보고는 야릇한 복수심으로부터
이렇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성화치듯 재촉하는 이혼 일체도 그만해 두고
도리어 옥의 눈치만 슬금슬금 보는 것이었다.
어떤 날 밤 그는 하도 궁금증에 못 견디어 종로 네거리로
휘뚜루 쏘다니다가 그만 새로 한시나 되어 옥의 하숙집을 찾았다.
대문은 걸렸다. 그는 뒤창문 켠으로 갔다. 하여 가만히 동정을 살피니
자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깨울까 그만 갈까 한참이나 망설이던 끝에,
“옥씨!”
하고 불렀다. 잠잠하였다. 이미 찾은 김이다. 내쳐 불렀다.
“여보 자우? 옥씨 여보!”
창문을 지긋지긋 잡아당겼다. 첫잠 들었던 옥이는 문 잡아당기는 결에
놀라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여보 옥씨!”
익히 듣던 목소린데도 얼핏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가만히 일어나서 창문 곁으로 갔다.
순간에 ‘봉준이다’하였다.‘무엇하러 그가 이 밤에 우리집을
찾아왔을까? 무슨 볼일이 있나? 무슨 일일까?’ 이렇게 의심을 하고,
“누구세요?”
“봉준입니다.”
“네! 무슨 볼일이 있어요?”
이 말에 봉준이는 부쩍 의심이 났다. 누가 방에 있지나 않나?
그렇지 않으면 저로써……?
“네, 볼일 있습니다. 문 좀 열어주시오.”
옥이는 옷을 더듬더듬 주워 입고 밖으로 나가서 대문을 열었다.
봉준은 대문 켠으로 왔다.
“그새 평안하셨소?”
첫잠에 무르익은 그의 토실토실한 두 볼은
달빛에 한층 아담스럽게 보였다.
봉준이는 손목이라도 컥 붙잡고 싶게 그리 반가웠다.
“어떻게 이 밤에 오셔요.”
“당신 오지 않으니까 보고 싶어 왔지요.”
별로 능청맞게 그의 귀에 들렸다.
방으로 들어온 그들은 깊은 침묵에 잡혔다.
“무슨 볼일이세요?”
봉준을 바라보았다.
“볼일은 무슨 볼일이야, 당신 보고 싶어서 왔다니까.”
“갑자기 그렇게 보고 싶더이까?”
“그런 수도 있지요?”
“왜? 요새 신부인 생겼다는데 나 같은 것이 보고 싶어요?”
옥이는 입을 꼭 다물고 책상 위를 보았다.
봉준이는 옥을 뚫어져라 하고 보더니,
“여보, 당신 마음이 요즈음 달라진 것 같구려.”
“네? 달라졌다고요? 어떤 점으로 보아 하는 말씀이니까?”
“어떤 점으로 보다니?”
그의 눈은 분함과 노여움으로 뒤집혔다.
“물론 당신의 자유를 누가 말릴 수는 없지만 너무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함인지 옥이는 번연히 알았다.
하여 그는 그의 뒤집힌 눈을 피하려고도 하지 않고 맞 쏘아보았다.
“네, 나도 이제부터는 나로서의 삶을 계속하여 보렵니다.
그러니까 과거와는 달라진 삶이겠지요!”
봉준이는 그의 어딘가 모르게 굳세게 나가는 말에
다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애착심은 점점 더하여지는 것이었다.
“여보, 당신도 좀 배웠다는 텃세구려. 이를테면…… 흥.”
봉준은 아니꼽다는 듯이 머리를 외어꼬았다. 한참 후에 봉준은,
“여보 그러지 마우. 어머니 생각을 한들 당신으로서야 차마 버티겠소.
나는 아직 셈이 없어 그러든지, 천성이 그래 그러든지,
막 치워놓구라두 당신만은 꾸준히 우리집을 위하여 살아야 하지
않겠소. 당신은 어머님의 유언을 잊었구려.”
자기의 말에 감격이 되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찌하시는 말인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밤낮으로 이혼해 달라고 졸랐지요?
한데 새삼스럽게 오늘 와서 이렇게 말씀하는 뜻은?”
“그래, 내가 그런다고 당신은 다른 데로 시집 가려는구려.”
하고 옥을 껴안았다.
하여 번개같이 옥의 볼 위에 볼을 마주 대는 것이었다.
옥이는 있는 힘을 다하여 그를 뿌리치고 휙 일어났다.
“여보! 나는 당신의 아내가 아닙니다.
이런 무례한 짓을 어따가 합니까? 가요!”
그의 소리는 날카로웠다.
봉준이는 어젯밤, 지난 일을 생각하면 담박이라도 달려가서
옥이를 쳐 죽이고 자기마저 그 자리에서 세상을 꿈벅 잊고 싶었다.
어머님께서 코, 침, 졸졸 흐르는 옥이를 데려다가 자식 못지않게
사랑하여 옴상곰상히 키워서 자기의 세대를 전부 밀어 맡긴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니어쩌니 하는 것이 죽도록 미웠던 것이다.
첫새벽에 그는 영철 선생에게 가는 편지를 써서 부쳤다.
몇 달지간에 처음으로 하는 것이었다.
편지한 지 이틀 만에 영철 선생은 담박 경성으로 올라왔다.
이렇게 속히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가 뜻밖에 만나 놓으니
말문이 콱 막혔다.
“편지 보셨습니까?”
“보았네. 그래 무슨 소린지 몰라 왔네마는……”
봉준이를 자세히 보았다. 그리하여 그의 속까지 꿰뚫어보려는 듯하였다.
전부터 그를 못마땅히 앎으로 인하여
그의 말로만은 신임할 수가 없었다.
“이제 옥이한테도 갔었네만은 학교 가고 없데그리.”
“가셨댔나요…… 뭐, 아무래도 이혼은 되는가 싶습니다.”
“지껄이지 말아, 하면 말인 줄 알고 자네는 떠드네마는……
옥이가 그럴리가 있나?”
봉준이는 웃었다.
“예, 물론 선생님까지도 저를 의심할 줄은 번연히 알았으니까요.
믿던 남게 곰핀다든지…… 그렇게들 예수 믿듯 믿으시더니
아주 잘 되었습니다.”
그는 천장을 쳐다보았다.
문이 열리자 재일이가 들어왔다.
그는 아랫목으로 가서 펄썩 주저앉아 비스듬히 바람벽을 기대앉았다.
“여보게, 옥씨 오셨댔나?”
“밤낮 옥이, 그렇게 보고 싶으면 가서 보게나.”
봉준이는 슬그머니 싫증이 나면서도 겉으로는 웃음으로 쓸어쳤다.
선생은 위질비뜩한 난봉 사나이 입에서 옥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머리를 외어꼬고 괴로운 낯빛으로 잠잠하였다.
재일은 봉준을 향하여 눈을 껌뻑하며 선생의 아래위를 살펴보았다.
봉준은 씩 웃었다.
“여보게, 나도 장가가야 되지 않겠나?”
“중매할까?”
봉준의 눈치를 보아 이 사람이 누군지를 대강 짐작하였다.
전부터 영철 선생의 이야기는 봉준으로부터 몇 번 들었던 것이다.
“하게, 연희씨로 하게.”
이 말을 듣자 선생은 괘씸한 생각이 들어 그들이 몹시 아니꼽게 보였다.
그러나 모든 일은 옥이를 만나봐야 알겠으므로
어서 바삐 옥이 오기를 조마조마히 기다리었다.
안방 시계라 다섯시를 쳤다.
신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방문이 가만히 열렸다.
“선생님!”
옥이는 어린애처럼 뛰어 선생의 곁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따라 아득히 멀어 보이는 고향에서 온 것이 꿈을 꾸는 듯이 생각되었다.
“공부 잘했나?”
선생의 둥글둥글한 웃는 맵시를 보며 어머니나 아버지를 대한 듯하였다.
“에그 선생님! 어떻게 오셨어요.”
생각할수록 신통하여 선생을 쇠쇠 들여다보았다.
“옥씨, 그새 공부 잘하셨습니까?”
옥이는 재일을 바라보았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우리 선생님 오신 것이 하도 반가워서요.”
“자네 얼굴이 전보다 좋았네.”
선생은 옥이를 쇠쇠 들여다보았다.
옥이는 잠깐 동안 봉준이의 기색을 보았다.
그는 잠잠히 딴 곳만 바라보고 가볍게 한숨만 쉴 뿐이었다.
그는 눈을 돌려 선생을 두루두루 살폈다.
그의 풍스러운 옷맵시, 땅 파다 온 갈라진 손, 그리고 꾸밈없는 질박한
말씨가 농촌의 진경을 연상시키게 하였다.
“선생님, 농사는 어찌 되었습니까? 조도 잘 되고 벼도 잘 되었나요?”
“되기는 다 쑬쑬히 되었네마는……… 어찌 된 모양인지 전보다는
더 어려워 지내는 모양이니 난처하지. 그리고 자네네 앞집 쇠돌네는
작년 가을에 북만주로 가고 올 봄에도 십여 가구가 만주로 떠났네.”
옥이는 눈이 둥그래졌다.
“쇠돌 할머니도 가셨겠지요?”
시어머님 돌아가신 후로는 집안에서 답답한 일이 나든지 혹은
아직 서툰 것이 있든지 하면, 쇠돌 할머니가 찾아오든지
자기가 일감을 떠들고 갔다. 하여 저고리부터 시작하여 속옷 암질러,
더구나 음식에는 겨우 밥이나 끓일 줄 알던 그가 두부, 무, 떡막붙이,
비지 같은 것에 이르기까지 그 할머니의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쪼글쪼글한 그의 얼굴, 꼬부라진 허리, 무슨 일 할 때에는
쇠눈 같은 안경 쓰던 것이 시재 보는 듯하였다.
“그들이 만주로는 무엇하러 갔나요?”
눈물이 핑 돌았다.
신문을 통하여 농촌 형편을 대강 짐작은 했지만 막상 낯익은
자기 고향 사람들이 못 살고 떠났다는 소리를 들으며
마치 자기 일이나 당한 듯하였다.
“만주에서는 누가 이마에 손 얹고 기다린답더이까?”
봉준, 재일까지도 멍하니 그들의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곳에는 땅이 흔하다대. 그래서 농사 지으러들 가지.
우리 근처서 몇몇 들어간 사람들은 아조 넉넉히 지낸다는데.”
옥의 흘리는 눈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당연할 것이다 하였다.
“땅이 흔하면 거저 준다나요! 내 땅을 떠나서 가면 무얼해요.
이제도 떠나겠다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거들랑 선생님께서 제발
말려 주세요. 앞길을 막고 사정없이 때려 주세요.
아니 반쯤 죽여 주세요! 굶어 죽어도 내 땅에서 죽고 빌어먹어도
내 고향에서 먹어야지요!”
선생은 어리둥절하여 옥이를 보았다.
‘아마도 제 마음이 시끄러운 데 빙자하여 가지고 저러나 부다’
하고 생각하니 더욱 가엾게 보였다. 하여 마음을 풀어줄 양으로
“말이지 걱정 말게. 세상은 다 그런 것 아닌가.
고생으로 된 세상이니까.”
이 말에 옥이는 예수교 말이 나온다 하고 생각되었다.
봉준이는 옥이가 떠드는 것이 밉광스러웠다.
“옥이, 선생님 앞에서 똑똑히 말하오.
선생님께서는 내 말은 믿지 않으시니까.
당신은 내 아내가 아니라지요?”
선생은 옥이를 똑똑히 보았다.
“언제 우리가 부부 되었던 일은 있어요?
당신도 늘 하신 말씀과 같이……”
봉준이는 선생을 쳐다보았다.
“자, 어떠합니까? 이제도 제 말을 곧이듣지 않겠습니까?”
선생은 멍멍하니 아무 대답도 못하고 한참이나 옥이를 보다가,
“여보게, 자네가 아무래도 미친 모양이네.
사람의 정신을 가지지 못하였어, 자네가 참말로 옥인가?”
“네, 옥이는 옥입니다마는 옛날 같은 어리석은 옥이는 아니올시다.”
“어리석은 옥이! 그것은 또 무슨 말인가? 흥! 서울이 사람을
못 쓰게 만든다고 하데마는 겨우 일년이 지나지 못해서 그렇게 된단
말인가? 자네만은 내가 믿었네마는……”
순간에 선생의 눈에 떠오른 것은 봉준 어머니의 새하얀 얼굴이었다.
그리고
“저 어린것들을 선생님에게 맡깁니다. 부대 잘 길러 주시오!”
하고 재삼 부탁하던 그의 말이 귀에 들리는 듯하였다.
근 십년 동안을 그들의 선생 겸 엄하신 아버지 겸 자상스러운 어머니가
되어 키운 보람없이 글쪼박이나 속에 들었다고 제멋대로 구는 것이
무엇보다도 난처했다.
선생은 한숨을 푸 쉬고 나서
“내려가! 배우라고 서울 보냈지, 그런 수작하라고 보낸 것은 아니야!”
소리를 냅다 질렀다. 봉준이는 가슴이 시원하도록 통쾌하였다.
옥이는 가슴이 송구해졌다. 선생의 꾸준한 애호심은 자나깨나
잊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의 눈은 빨개졌다.
“어서 준비들 하게!”
봉준이를 쳐다보았다.
“내가 무슨 권리로 자네들을 관리하겠나마는…… 알다시피 돌아가신
자네들의 어머님의 피나는 유언을 잊지 않음일세.”
선생은 주먹으로 눈을 씻는 것이었다. 옥의 가슴은 찌르르 울리었다.
그러나 그는 속으로 이렇게 위로받았다.
‘어머님의 딸은 나다! 어머님께서 생전에 실행치 못한 것을
나는 실행할 것이다!’
그는 적이 안심되었다.
“어서 가세. 짐들 다 싸게.”
“선생님, 저는 못 가겠습니다.”
선생은 와락 성이 치받쳤다. 그리하여 눈을 벌컥 뒤집고,
“뭐라구! 한 마디만 더 해보게! 그래, 자네 입으로 나오는 말인가?
저 하늘이 무서워서 어찌 그런 말을 하나? 아무리 마음이 변했다 해두
죽은 사람은 죽었다 하더래두 자네들을 위해서 애쓴
이놈만은 알아볼 터이지. 이놈만은!”
자기의 가슴 복판을 가리켰다. 옥이는 전신이 오싹해지며 그 넓다란
가슴을 보았다. 확실히 자기네들의 둘도 없는 은인이었다.
하나, 둘, 셋, 넷을 그에게 배우고 이때까지 무사히 자란 것이
그의 애쓴 보람이었다.
그러나 한두 사람을 돌아보아 자기의 젊음을 무단히 썩어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보다도 자기의 젊음을 무가치하게 희생당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옥이는 눈을 착 내려감고,
“선생님! 잊지 못합니다. 결단코 잊지 못하겠습니다.
그럴수록 좀 더한 용기를 얻어 앞으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생님을 잊지 못하는 증거입니다!”
“듣기 싫어! 자네 수작은 하나 들어볼 건더기가 없네.
소위 배웠다는 것들에게서 나오는 말이 그 뽄센가? 내려가!”
그는 옥의 손을 잡아끌었다.
“자네는 짐 다 싸 가지고 뒤로 오게!”
이 꼴을 본 봉준이는 선생의 두 손을 꼭 잡았다.
토라진 옥의 마음은 다시 돌리지 못할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내버려두시오.”
“어서 가우! 축복합니다.”
옥이는 새하얗게 질렸다.
“선생님! 저는 가겠습니다.
겨우 내치고 발길을 옮겼다.
선생은 봉준이를 밀치렸으나 힘이 달리었다.
“옥아! 옥아!”
눈물 섞어 나오는 인자한 목소리였다.
옥이는 어려부터 귀에 젖은 그 음성에 발길이 무거워졌다.
( 강경애 - 19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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