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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어리 삼룡이 - 나도향 -

클릭. 산복숭아 " 벙어리 삼룡이 " -- 나도향 -- 1 내가 열 살이 될락말락한 때이니까 지금으로부터 십사오 년 전 일이다. 지금은 그곳을 청엽정(靑葉町)이라 부르지마는 그때는 연화봉(蓮花蜂) 이라고 이름하였다. 즉 남대문에서 바로 내려다보면은 오정포(午正砲) 가 놓여 있는 산등성이가 있으니, 그 산등성이 이쪽이 연화봉이요, 그 새에 있는 동네가 역시 연화봉이다. 지금은 그곳에 빈민굴이라고 할 수밖에 없이 지저분한 촌락이 생기고 노동자들밖에 살지 않는 곳이 되어버렸으나 그때에는 자기네 딴은 행세한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집이라고는 십여 호밖에 있지 않았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 과목밭을 하고 또는 채소를 심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콩나물을 길러서 생활을 하여 갔었다. 여기에 그중 큰 과목밭을 갖고 그..

한국단편문학 2022.11.29

삼포 가는 길 - 황석영 -

삼포 가는 길 -- 황석영 -- 영달은 어디로 갈 것인가 궁리해 보면서 잠깐 서 있었다. 새벽의 겨울 바람이 매섭게 불어왔다. 밝아 오는 아침 햇볕 아래 헐벗은 들판이 드러났고, 곳곳에 얼어붙은 시냇물이나 웅덩이가 반사되어 빛을 냈다. 바람 소리가 먼데서부터 몰아쳐서 그가 섰는 창공을 베면서 지나갔다.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수십여 그루씩 들판가에서 바람에 흔들렸다. 그가 넉달 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에는 한참 추수기에 이르러 있었고 이미 공사는 막판이었다. 곧 겨울이 오게 되면 공사가 새 봄으로 연기될 테고 오래 머물 수 없으리라는 것을 그는 진작부터 예상했던 터였다. 아니나다를까. 현장 사무소가 사흘 전에 문을 닫았고, 영달이는 밥집에서 달아날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밭고랑을 지나 걸어오고..

한국단편문학 2022.11.24 (1)

등신불 - 김동리 -

등신불 -- 김동리 -- 등신불(等身佛)은 양자강(揚子江) 북쪽에 있는 정원사(淨願寺)의 금불각(金佛閣)속에 안치되어 있는 불상의 이름이다. 등신금불(等身金佛)또는 그냥 금불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니까 나는 이 등신불, 등신금불로 불리워지는 불상에 대해 보고 듣고 한 그대로를 여기다 적으려 하거니와, 그보다 먼저, 내가 어떻게 해서 그 정원사라는 먼 이역의 고찰(古刹)을 찾게 되었었는지 그것부터 이야기 해야겠다. 내가 일본의 대정대학 재학 중에, 학병(태평양 전쟁)으로 끌려 나간 것은 일구사심(1934)년 이른 여름, 내 나이 스물 세 살 나던 때였다. 내가 소속된 부대는 북경(北京)서 서주(徐州)를 거쳐 남경(南京)에 도착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부대가 당도할 때까지 거기서 머무르게 되었다. 처음에..

한국단편문학 2022.11.19 (1)

어 둠 - 강경애 -

" 어 둠 " - 강경애 - 툭 솟은 광대뼈 위에 검은빛이 돌도록 움쑥 패인 눈이 슬그머니 외과실을 살피다가 환자가 없음을 알았던지 얼굴을 푹 숙이고 지팡이에 힘을 주어 붕대한 다리를 철철 끌고 문안으로 들어선다. 오래 깎지 못한 머리카락은 남바위나 쓴 듯이 이마를 덮어 꺼칠꺼칠하게 귀밑까지 흘러내렸으며 땀에 어룽진 옷은 유지같이 싯누래서 몸에 착 달라붙어 뼈마디를 환히 드러내이고 있다. 소매로 나타난 수숫대 같은 팔에 갑자기 뭉퉁하게 달린 손이 지팡이를 힘껏 다궈쥐었다. 금방 뼈마디가 허옇게 나올 것 같다. 의사는 회전의자에 앉아 의서를 보다가 흘끔 돌아보았으나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얼른 머리를 돌리고 검실검실한 긴 눈썹에 싫은 빛을 푸르르 깃들이고서 여전히 책에 열중한 체한다. 저편 침대 곁에서 소..

한국단편문학 2022.11.14

이상한 선생님 - 채만식 -

" 이상한 선생님 " - 채 만 식 - 1 우리 박선생님은 참 이상한 선생님이었다. 박선생님은 생긴 것부터가 무척 이상하게 생긴 선생님이었다. 키가 한 뼘밖에 안 되는 박선생님이라서, 뼘생 또는 뼘박이라는 별명이 있는 것처럼, 박선생님의 키는, 키 작은 사람 가운데서도 유난히 작은 키였다. 일본 정치 때, 혈서로 지원병을 지원했다 체격검사에, 키가 제 척수에 차지 못해 낙방이 되었다면, 그래서 땅을 치고 울었다면, 얼마나 작은 키인것은 알 일이다. 그런 작은 키에, 몸집은 그저 한 줌만 하고. 이 한 줌만한 몸집의, 한 뼘만한 키 위에 가서, 그런데, 이건 깜짝놀랄 만큼 큰 머리통이, 보매 위태위태하게 올라앉아 있다. 그래서 박선생님의 또 하나의 변명을 대갈장군이라고도 하였다. 머리통이 그렇게 큰 박선생..

한국단편문학 2022.11.10

배따라기 - 김 동 인 -

" 배따라기 " - 김 동 인 - 좋은 일기이다. 좋은 일기라도,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 우리 '사람'으로서는 감히 접근 못 할 위엄을 가지고, 높이서 우리 조고만 '사람' 을 비웃는 듯이 내려다 보는, 그런 교만한 하늘은 아니고, 가장 우리 '사람'의 이해자인 듯이 낮게 몽글몽글 엉기는 분홍빛 구름으로서 우리와 서로 손목을 잡자는 - 그런 하늘이다. 사랑의 하늘이다. 나는, 잠시도 멎지 않고 푸른 물을 황해로 부어내리는 대동강을 향한, 모란봉 기슭 새파랗게 돋아나는 풀 위에 뒹굴고 있었다. 이날은 삼월 삼질(음력 삼월 초사흗날.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는 따뜻한 날), 대동강에 첫 뱃놀이하는 날이다. 까맣게 내려다보이는 물 위에는, 결결이 반짝이는 물결을 푸른 놀잇배 들이 타고 넘으며, 거기서는..

한국단편문학 2022.11.07

죄(罪)와 벌(罰) - 이무영 -

" 죄(罪)와 벌(罰) " - 이무영 - 1 경관이 쏜 피스톨에 범인인 교회지기가 쓰러지자 관중석에서는 벌써 의자 젖혀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러나 화면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신부로 분장한 몽고메리 크리프트가 천천히 걸어가서 쓰러진 범인을 받쳐들고 관중의 시야 속으로 부쩍부쩍 다가올 때는 관중석에서는 어시장 그대로의 혼잡이 벌어지고 있다. 아직 이회 관중들이 반도 빠져나가지 못했는데 삼회권 가진 사람들이 출입구를 막은 것이다. 빨리 나가라는 듯이 벨이 요란스럽게 울어대고 있다. 십분간이라는 휴식시간도 있고 하니 길을 텄으면 순조로우련만 출입구를 막고는 서로 입심만 세우고들 있다. “나갈 사람이 다 나가거든 들어오너라!” “길을 틔워라! 바보 같은 자식들아!” “내밀어라, 내밀어!” 「나는 고백한다」라..

한국단편문학 2022.11.02 (2)

그리운 흘긴 눈 - 현진건 -

" 그리운 흘긴 눈 " - 현진건 - 그이와 살림을 하기는, 내가 열 아홉 살 먹던 봄이었습니다. 시방은 이래로 ─ 삼십도 못 된 년이 이런 소리를 한다고 웃지 말아요. 기생이란 스무살이 환갑이라니, 삼십이면 이를테면 백세 상수한 할미쟁이가 아니야요? ─ 그 때는 괜찮았답니다. 이 푸르족족한 입술도 발그스름하였고 토실한 뺨볼이라든지, 시방은 촉루(髑髏)란 별명조차 듣지마는 오동통한 몸피라든지, 살성도 희고, 옷을 입으면 맵시도 나고, 걸음걸이도 멋이 있었답니다. 소리도 그만저만히 하고 춤도 남의 흉내는 내었답니다. 화류계에서는 그래도 누구 하고 이름이 있었는지라, 호강도 우연만히 해 보고 귀염도 남불잖이 받았습네다. 망할 것, 우스워 죽겠네. 하자는 이야기는 아니 하고 제 칭찬만 하고 앉았구먼. 어쨌든 ..

한국단편문학 2022.10.29

마약(痲藥) - 강경애 -

" 마약(痲藥) " -- 강경애 -- 불이 번쩍 난다. 대뜸 지게막대기를 메고 달려들어 점순네 닭을 후려칠까 하다가 “나는 등록 하였수!” 보득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무슨 딴 수작야 계집을 죽인 놈이. 가자 너 같은 놈은 법이 용서를 못해.” 순사는 달려들어 보득 아버지의 멱살을 쥐어 내몰았다. “네? 계집을 계집을……” 보득 아버지는 정신이 버쩍 들어 순사를 쳐다보았으나, 나는 듯이 달려드는 매손에 머리를 푹 숙여 버렸다. 불을 움켜 쥔 그는 기막히게 순사의 입술을 바라볼 때, 불이 붙는 듯 우는 보득이가 눈에 콱 부딪친다. “엄마 엄마.” 어디선가 아내가 꼭 뛰어들 듯한 저 음성, 널쩍한 미간 좌우에 근심에 젖은 꺼무스름한 아내의 눈이 툭 튀어 오른다. 여보, 보득일 울지 않게 허우. 가..

한국단편문학 2022.10.26

운수 좋은 날 - 현진건 -

" 운수 좋은 날 " - 현 진 건 - 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었다. 이날이야말로 동소문 안에서 인력거꾼 노릇을 하는 김첨지에게는 오래간만에도 닥친 운수 좋은 날이었다. 문 안에(거기도 문밖은 아니지만) 들어간답시는 앞집 마나님을 전찻길까지 모셔다 드린 것을 비롯하여, 행여나 손님이 있을까 하고 정류장에서 어정어정하며 내리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거의 비는 듯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가, 마침내 교원인 듯한 양복장이를 동광학교(東光學校))까지 태워다 주기로 되었다. 첫 번에 삼십 전, 둘째 번에 오십 전 --- 아침 댓바람에 그리 흉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야말로 재수가 옴붙어서 근 열흘 동안 돈 구경도 못한 김첨지는 십 전짜리 백통화 서 푼, 또는 다..

한국단편문학 2022.10.23

며 느 리 - 이무영 -

" 며 느 리 " - 이 무 영 - 1 “얘들아, 오늘은 좀 어떨 것 같으냐?” 부엌에서 인기척이 나기만 하면 박 과부는 자리 속에서 이렇게 허공을 대고 물어보는 것이 이 봄 이래로 버릇처럼 되어 있다. 어떨 것 같으냐는 것은 물론 날이 좀 끄무레해졌느냐는 뜻이다. 다른 날도 아닌 바로 한식날 시작을 한 객적은 비가 이틀이나 줄기차게 쏟아진 이후로는 복이 내일 모레라는데 소나기 한 줄기 않던 것이다. 이러다가는 못자리판에서 이삭이 날 지경이다. 여느 해 같으면 지금 한창 이듬매기다, 피사리다, 매미충이 생겼느니 어쩌니 할 판인데 중답들도 아직 모를 내어볼 염량도 못하고 있다. 밭도 그대로 퍽 묵어 자빠졌다. 오이다, 열무다, 목화다, 제철 찾아 심기는 했으나 워낙 내리쪼이기만 하니까 싹이 트다 말고 모두..

한국단편문학 2022.10.21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 주요섭 -

"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 --- 주요섭 --- 나는 금년 여섯 살 난 처녀애입니다. 내 이름은 박옥희이고요. 우리 집 식구라고는 세상에서 제일 이쁜 우리 어머니와 단 두 식구뿐이랍니다. 아차, 큰일났군, 외삼촌을 빼놓을 뻔했으니……. 지금 중학교에 다니는 외삼촌은 어디를 그렇게 싸돌아다니는지, 집에는 끼니 때 외에는 별로 붙어 있지 않아, 어떤 때는 한 주일씩 가도 외삼촌 코빼기도 못 보는 때가 많으니까요. 깜박 잊어버리기도 예사지요, 무얼. 우리 어머니는, 그야말로 세상에서 둘도 없이 곱게 생긴 우리 어머니는, 금년 나이 스물네살인데 과부랍니다. 과부가 무엇인지 나는 잘 몰라도, 하여튼 동리 사람들이 날더러 ‘과부딸’이라고들 부르니까, 우리 어머니가 과부인 줄을 알지요. 남들은 다 아버지가 있는데, ..

한국단편문학 2022.10.18

허생전 - 許生傳. 채만식 -

" 허생전(許生傳) " - 채 만 식 - 1 허생(許生)은 오늘도 아침부터 그 초라한 의관을 단정히 갖추고 단정히 서안 앞에 앉아 일심으로 글을 읽고 있다. 어제 아침을 멀건 죽 한 보시기로 때우고, 점심은 늘 없어왔거니와 저녁과 오늘 아침을 끓이지 못하였으니, 하루낫 하룻밤이요 꼬바기 세 끼를 굶은 참이었다. 그러니, 시장하긴들 조옴 시장하련마는, 굶기에 단련이 되어 그런지 글에 정신이 쏠리어 그런지, 혹은 참으며 내색을 아니하여 그러는지, 아뭏든 허생은 별로 시장하여 하는 빛이 없고, 글 읽는 소리도 한결같이 낭랑하다. 서울 남산 밑 묵적골이라고 하면, 가난하고 명색 없는 양반 나부랑이와 궁하고 불우한 선비와 이런 사람들만 모여 살기로 예로부터 이름난 동네였다. 집이라는 것은 열이면 열 다 쓰러져가는..

한국단편문학 2022.10.12

발가락이 닮았다 - 김동인 -

발가락이 닮았다 --- 김동인 --- 노총각 M이 혼약을 하였다. 우리들은 이 소식을 들을 때에 뜻하지 않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습니다. M은 서른두 살이었습니다. 세태가 갑자기 변하면서 혹은 경제문제 때문에, 혹은 적당한 배우자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혹은 단지 조혼(早婚)이라 하는 데 대한 반항심 때문에, 늦도록 총각으로 지내는 사람이 많아 가기는 하지만, 서른두 살의 총각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좀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은 아직껏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에게 채근 비슷이, 결혼에 대한 주의를 하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M은 언제나 그런 의론을 받을 때마다 (속으로는 매우 흥미를 가진 것이 분명한데) 겉으로는 고소로써 친구들의 말을 거절하고 하였습니다. 그러던 M이 우리의 ..

한국단편문학 2022.10.09

동 백 꽃 - 김유정 -

생강나무꽃 (강원도에서는 생강나무꽃을 사투리로 "동백꽃"이라 부릅니다.) " 동 백 꽃 " - 김 유 정 - 오늘도 또 우리 수탉이 막 쫓기었다. 내가 점심을 먹고 나무를 하러 갈 양으로 나올 때이었다. 산으로 올라서려니까 등 뒤에서 푸드득 푸드득 하고 닭의 횃소리가 야단이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 보니 아니나 다르랴 두 놈이 또 얼리었다(서로 얽히다). 점순네 수탉(대강이가 크고 똑 오소리같이 실팍하게 생긴 놈)이 덩저리('몸집' 을 속되게 이르는 말) 작은 우리 수탉을 함부로 해내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해내는 것이 아니라 푸드득하고 면두(볏의 방언. 경기,강원)를 쪼고 물러섰다가 좀 사이를 두고 푸드득하고 모가지를 쪼았다. 이렇게 멋을 부려 가며 여지없이 닦아(혼을 내어) 놓는다. 그러면 이 못..

한국단편문학 2022.10.05

백치 아다다 - 계용묵 -

" 백치 아다다 " - 계 용 묵 - 질그릇이 땅에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고 들렸는데, 마당엔 아무도 없다. 부엌에 쥐가 들었나? 샛문을 열어 보려니까, [아 아아 아이 아아 아야------.] 하는 소리가 뒤란 곁으로 들려 온다. 샛문을 열려던 박 씨는 뒷문을 밀었다. 장독대 밑 비스듬한 켠 아래, 아다다가 입을 헤 벌리고 납작하니 엎뎌져, 두 다리만을 힘없이 버지럭거리고 있다. 그리고, 머리 편으로 한 발쯤 나가선 깨어진 동이 조각이 질서 없이 너저분하게 된장 속에 묻혀 있다. [아이구테나! 무슨 소린가 했더니! 이년이 동애를 또 잡았구나! 이년아, 너더러 된장 푸래든! 푸래?] 어머니는 딸이 어딘가 다쳤는지 일어나지도 못하고 아파하는 데 , 가는 동정심보다 깨어진 동이만이 아깝게 눈에 보였던 것이다...

한국단편문학 2022.10.03

" 봄 봄 " - 김유정 -

" 봄 봄 " - 김 유 정 - "장인님! 인제 저……." 내가 이렇게 뒤통수를 긁고, 나이가 찼으니 성례를 시켜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 대답이 늘, "이 자식아! 성례구 뭐구 미처 자라야지!" 하고 만다. 이 자라야 한다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아내가 될 점순이의 키 말이다. 내가 여기에 와서 돈 한 푼 안 받고 일하기를 삼 년 하고 꼬바기 일곱 달 동안을 했다. 그런데도 미처 못 자랐다니까 이 키는 언제야 자라는 겐지 짜장 영문 모른다. 일을 좀 더 잘해야 한다든지, 혹은 밥을 (많이 먹는다고 노상 걱정이니까) 좀 덜 먹어야 한다든지 하면 나도 얼마든지 할 말이 많다. 허지만 점순이가 아직 어리니까 더 자라야 한다는 여기에는 어째 볼 수 없이 고만 벙벙하고 만다. 이래서 나는 애최 계약이 잘못된 걸..

한국단편문학 2022.10.02

B 사감과 러브레터 - 현진건 -

B 사감과 러브레터 -- 현 진 건 -- C 여학교에서 교원 겸 기숙사 사감 노릇을 하는 B 여사라면 딱장대요 독신주의자요, 찰진 야소꾼으로 유명하다. 사십에 가까운 노처녀인 그는 주근깨 투성이 얼굴이, 처녀다운 맛이란 약에 쓰려도 찾을 수 없을 뿐인가, 시들고 거칠고 마르고 누렇게 뜬 품이 곰팡 슬은 굴비를 생각나게 한다. 여러 겹 주름이 잡힌 훨렁 벗겨진 이마라든지 숱이 적어서 법대로 쪽 찌거나 틀어 올리지를 못하고 엉성하게 그냥 빗겨 넘긴 머리, 꼬리가 뒤통수에 염소 똥만하게 붙은 것이라든지, 벌써 늙어 가는 자최를 감출 길이 없었다. 뾰족한 입을 앙다물고 돋보기 너머로 쌀쌀한 눈이 노릴 때엔 기숙생들이 오싹하고 몸서리를 치리만큼 그는 엄격하고 매서웠다. 이 B 여사가 질겁을 하다시피 싫어하고 미워..

한국단편문학 2022.09.30

감자 - 김동인 -

감 자 ( 김동인 ) " 감 자 " --- 김동인 --- 싸움, 간통, 살인, 도적, 구걸, 징역 이 세상의 모든 비극과 활극의 근원지인, 칠성문 밖 빈민굴로 오기 전까지는, 복녀의 부처는 (사농공상의 제2위에 드는) 농민이었었다. 복녀는, 원래 가난은 하나마 정직한 농가에서 규칙 있게 자라난 처녀였었다. 이전 선비의 엄한 규율은 농민으로 떨어지자부터 없어졌다 하나, 그러나 어딘지는 모르지만 딴 농민보다는 좀 똑똑하고 엄한 가율이 그의 집에 그냥 남아 있었다. 그 가운데서 자라난 복녀는 물론 다른 집 처녀들과 같이 여름에는 벌거벗고 개울에서 멱감고, 바짓바람으로 동리를 돌아 다니는 것을 예사로 알기는 알았지만,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막연하나마 도덕이라는 것에 대한 저픔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열다섯 살..

한국단편문학 2022.09.27

소나기 - 황순원 -

" 소 나 기 " - 황 순 원 - 소년은 개울가에서 소녀를 보자 곧 윤 초시네 증손녀(曾孫女)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녀는 개울에다 손을 담그고 물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서는 이런 개울물을 보지 못하기나 한 듯이. 벌써 며칠째 소녀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물장난이었다. 그런데, 어제까지 개울 기슭에서 하더니, 오늘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서 하고 있다. 소년은 개울둑에 앉아 버렸다. 소녀가 비키기를 기다리자는 것이다. 요행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소녀가 길을 비켜 주었다. 다음 날은 좀 늦게 개울가로 나왔다. 이날은 소녀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 세수를 하고 있었다. 분홍 스웨터 소매를 걷어 올린 목덜미가 마냥 희었다. 한참 세수를 하고 나더니, 이번에는 물속을 빤히 들여다 본다. 얼굴..

한국단편문학 2022.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