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문학 58

꺼삐딴 리- 전광용 -

사진을 클릭해서 크고 선명하게 보세요.                            꺼삐딴 리                                                               - 전 광 용 - 수술실에서 나온 이인국(李仁國) 박사는 응접실 소파에 파묻히듯이 깊숙이 기대어 앉았다. 그는 백금 무테 안경을 벗어 들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등골에 축축이 밴 땀이 잦아 들어감에 따라 피로가 스며 왔다. 두 시간 이십 분의 집도. 위장 속의 균종(菌腫) 적출. 환자는 아직 혼수 상태에서 깨지 못하고 있다. 수술을 끝낸 찰나 스쳐 가는 육감 그것은 성공 여부의 적중률을 암시하는 계시 같은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웬일인지 뒷맛이 꺼림칙하다. 그는 항생질 의약품이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

한국단편문학 2024.05.23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조세희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조세희 -  1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옳게 보았다. 아버지는 난장이였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아버지를 보는 것 하나만 옳았다. 그 밖의 것들은 하나도 옳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어머니·영호·영희, 그리고 나를 포함한 다섯 식구의 모든 것을 걸고 그들이 옳지 않다는 것을 언제나 말할 수 있다. 나의  모든 것 이라는 표현에는 다섯 식구의 목숨 이 포함되어 있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라도 천국을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

한국단편문학 2024.05.15

할머니의 죽음- 현진건 -

할머니의 죽음                                                                               - 현진건 -   '조모주 병환 위독'   3월 그믐날 나는 이런 전보를 받았다. 이는 xx에 있는 생가(生家)에서 놓은 것이니 물론 생가 할머니의 병환이 위독하단 말이다. 병환이 위독은 하다 해도 기실 모나게 무슨 병이 있는 게 아니다. 벌써 여든 둘이나 넘은 그 할머니는 작년 봄부터 시름시름 기운이 쇠진해서 가끔 가물가물하기 때문에 그 동안 자손들로 하여금 한두 번 아니게 바쁜 걸음을 치게 하였다.   그 할머니의 오 년 맏이인 양조모(養祖母)는 갑자기 울기 시작하였다.   "아이고--- 이승에서는 다시 못 보겠다. 동서라도 의로 말하면 친형제나 다..

한국단편문학 2024.05.07

자유종- 이해조 -

자유종 (自由鐘)                                                                                - 이해조 - 천지간 만물 중에 동물 되기 희한하고, 천만 가지 동물 중에 사람 되기 극난하다. 그같이 희한하고 그같이 극난한 동물 중 사람이 되어 압제를 받아 자유를 잃게 되면 하늘이 주신 사람의 직분을 지키지 못함이어늘, 하물며 사람 사이에 여자 되어 남자의 압제를 받아 자유를 빼앗기면 어찌 희한코 극난한 동물 중 사람의 권리를 스스로 버림이 아니라 하리요.   여보, 여러분, 나는 옛날 태평시대에 숙부인(淑夫人)까지 바쳤더니 지금은 가련한 민족 중의 한 몸이 된 신설헌이올시다. 오늘 이매경 씨 생신에 청첩을 인하여 왔더니 마침 홍국란 씨와 강..

한국단편문학 2024.05.01

독짓는 늙은이- 황순원 -

사진을 클릭해서 크고 선명하게 보세요.                       독짓는 늙은이                                                                   - 황순원 - 이년! 이 백 번 쥑에두 쌀 년! 앓는 남편두 남편이디만, 어린 자식을 놔두구 그래 도망을 가?  것두 아들놈 같은 조수놈하구서----- 그래 지금 한창 나이란 말이디? 그렇다구 이년, 내가 아무리 늙구 병들었기루서니 거랑질이야 할 줄 아니? 이녀언! 하는데, 옆에 누웠던 어린 아들이, 아 바지, 아바지이! 하였으나 송 영감은 꿈 속에서 자기 품에 안은 아들이 아바지, 아바지이! 하고 부르는 것으로 알며. 오냐 데건 네 에미가 아니다! 하고 꼭 품에 껴안는 것을, 옆에 누운 어린 아..

한국단편문학 2024.04.26

금수회의록 - 안국선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 - 안국선 - 목 차 1. 서언(序言) 2. 개회 취지(開會趣旨) 3. 제1석, 반포의 효(反哺之孝 : 까마귀) 4. 제2석, 호가호위(狐假虎威 : 여우) 5. 제3석, 정와어해(井蛙語海 : 개구리) 6. 제4석, 구밀복검(口蜜腹劒 : 벌) 7. 제5석, 무장공자(無腸公子 : 게) 8. 제6석, 영영지극(營營之極 : 파리) 9. 제7석,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 호랑이) 10. 제8석, 쌍거쌍래(雙去雙來 : 원앙) 11. 폐 회 1. 서언(序言) 머리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니 일월과 성신이 천추의 빛을 잃지 아니하고, 눈을 떠서 땅을 굽어보니 강해와 산악이 만고의 형상을 변치 아니하도다. 어느 봄에 꽃이 피지 아니하며, 어느 가을에 잎이 떨어지지 아니..

한국단편문학 2024.04.16

금당벽화 - 정한숙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금 당 벽 화 - 정한숙 - 목탁(木鐸)소리가 비늘진 금빛 낙조(落照) 속에 여운(餘韻)을 끌며 울창한 수림을 헤치고 기복(起伏)진 구릉(丘陵) 밑으로 흐르고 있다. 무성한 숲과 숲 사이에 스며드는 습기에 오늘도 돌바위의 이끼는 어제련 듯 푸르고, 암과 수가 짝지어 어르는 사슴의 울음은, 남국적인 정서로 이국의 향수를 돕는 듯하다. 담징(曇徵)은 바위에 앉은 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서녘 하늘은 젖빛 구름 속에 붉은 빛을 금긋는가 하면, 자줏빛 구름이 솟구쳐 흐르고, 그것이 퍼져, 다시 푸른 바탕으로 변하면 하늘은 자기 재주에 겨워 회색 빛으로 아련히 어두워 간다. 돌바위에 기대앉은 담징은, 한순간도 쉬지 않고 서녘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그의 동광(瞳光)은 하늘빛을 닮은 ..

한국단편문학 2024.04.09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 박완서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 박완서 - 가끔 별난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손뼉을 치고 싶은 충동 같은 것 말이다. 마음속 깊이 잠재한 환호에의 갈망 같은 게 이런 충동을 느끼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요샌 좀처럼 이런 갈망을 풀 기회가 없다. 환호가 아니라도 좋으니 속이 후련하게 박장 대소라도 할 기회나마 거의 없다. 의례적인 미소 아니면 조소·냉소·고소가 고작이다. 이러다가 얼굴 모양까지 얄궂게 일그러질 것 같아 겁이 난다. 환호하고픈 갈망을 가장 속 시원하게 풀 수 있는 기회는 뭐니뭐니 해도 잘 싸우는 운동 경기를 볼 때가 아닌가 싶다. 특히 국제 경기에서 우리편이 이기는 걸 텔레비전을 통해서나마 볼 때면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다. 그러나 곰곰이..

한국단편문학 2024.04.03

사냥 - 이효석 -

사진을 클릭하여 큰사진으로 보세요. 사 냥 - 이효석 - 연해 두어 번 총소리가 산속에 울렸다. 몰이꾼의 행렬은 산등을 넘고 골짝을 향하여 차차 옴츠러들었다. 발밑에 요란히 울리는 떡갈잎 가랑잎의 어지러운 소리에 산을 싸고 도는 동무들의 고함도 귀 밖에 멀다. 상기된 눈앞에 민출한 자작나무의 허리가 유난스럽게도 희끔희끔 거린다. 수백 명 학생들이 외줄로 늘어서 멀리 산을 둘러싸고 골짝으로 노루를 모조리 내리모는 것이다. 골짝 어귀에는 오륙 명의 포수가 등대하고 섰다. 노루를 빼울 위험은 포수 편에 보다 늘 포위선에 있다. 시끄러운 책임을 모면하기 위하여 몰이꾼들은 빽빽한 주의와 담력으로 포위선을 한결같이 경계하여야 된다. 적어도 눈앞에서 짐승을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학년 사이의 연락은 긴밀히! ×학..

한국단편문학 2024.03.27

홍염(紅焰)- 최서해 -

사진을 클릭하여 큰사진으로 보세요. 홍염(紅焰) - 최서해 - 1 겨울은 이 가난한---백두산 서북편 서간도 한귀퉁이에 있는 이 가난한 촌락 빼허[白河]에도 찾아들었다. 겨울이 찾아들면 조그만 강을 앞에 끼고 큰 산을 등진 빼허는 쓸쓸히 눈 속에 묻히어서 차디찬 좁은 하늘을 치어다보게 된다. 눈보라는 북국의 특색이다. 빼허의 겨울에도 그러한 특색이 있다. 이것이 빼허의 생령들을 괴롭게 하는 것이다. 오늘도 눈보라가 친다. 북극의 얼음 세계나 거쳐오는 듯한 차디찬 바람이 우하고 몰려오는 때면 산봉우리와 엉성한 가지 끝에 쌓였던 눈들이 한꺼번에 휘날려서 이 좁은 산골은 뿌연 눈안개 속에 들게 된다. 어떤 때는 강골 바람에 빙판에 덮였던 눈이 산봉우리로 불리게 된다. 이렇게 교대적으로 산봉우리의 눈이 들로 내..

한국단편문학 2024.03.19

탈출기(脫出記)- 최서해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탈출기(脫出記) - 최서해 - 1 김군! 수삼차 편지는 반갑게 받았다. 그러나 한번도 회답치 못하였다. 물론 군의 충정에는 나도 감사를 드리지만 그 충정을 나는 받을 수 없다. ―박군! 나는 군의 탈가(脫家)를 찬성할 수 없다. 음험한 이역에 늙은 어머니와 어린 처자를 버리고 나선 군의 행동을 나는 찬성할 수 없다. 박군! 돌아가라.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 군의 보모와 처자가 이역 노두에서 방황하는 것을 나는 눈앞에 보는 듯싶다. 그네들의 의지할 곳은 오직 군의 품밖에 없다. 군은 그네들을 구하여야 할 것이다. 군은 군의 가정에서 동량(棟梁)이다. 동량이 없는 집이 어디 있으랴? 조그마한 고통으로 집을 버리고 나선다는 것이 의지가 굳다는 박군으로서는 너무도 박약한 소위이다...

한국단편문학 2024.03.12

화수분- 전영택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화수분 - 전영택 - 1925년 1. 1 첫겨울 추운 밤은 고요히 깊어 간다. 뒤뜰 창 바깥에 지나가는 사람 소리도 끊어지고, 이따금 찬바람 부는 소리가 ‘휙― 우수수’ 하고 바깥의 춥고 쓸쓸한 것을 알리면서 사람을 위협하는 듯하다. “만주노 호야 호오야.” 길게 그리고도 힘없이 외치는 소리가 보지 않아도 추워서 수그리고 웅크리고 가는 듯한 사람이 몹시 처량하고 가엾어 보인다. 어린애들은 모두 잠들고 학교 다니는 아이들은 눈에 졸음이 잔뜩 몰려서 입으로만 소리를 내어 글을 읽는다. 나는 누워서 손만 내놓아 신문을 들고 소설을 보고, 아내는 이불을 들쓰고 어린애 저고리를 짓고 있다. “누가 우나?” 일하던 아내가 말하였다. “아니야요. 그 절름발이가 지나가며 무슨 소리를 지껄..

한국단편문학 2024.03.05

오발탄 - 이범선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오발탄 - 이범선 - 계리사(計理士) 사무실 서기 송철호(宋哲浩)는 여섯 시가 넘도록 사무실 한구석 자기 자리에 멍청하니 앉아 있었다. 무슨 미진한 사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장부는 벌써 집어치운지 오래고 그야말로 멍청하니 그저 앉아 있는 것이었다. 딴 친구들은 눈으로 시계바늘을 밀어 올리다시피 다섯 시를 기다려 후다닥 나가 버렸다. 그런데 점심도 못 먹은 철호는 허기가 나서만이 아니라 갈 데도 없었다. "송 선생은 안 나가세요?" 이제 청소를 해야 할테니 그만 나가달라는 투의 사환애의 말에, 철호는 다 낡아빠진 해군 작업복 저고리 호주머니에 깊숙이 찌르고 있던 두 손을 빼내어서 무겁게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나가야지." 하품 같은 대답이었다. 사환애는 저쪽 구석에서부터..

한국단편문학 2024.02.27

어떤 醫師의 手記(붉은산)- 김동인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어떤 醫師의 手記(붉은산) - 김동인 - 그것은 여(余)가 만주를 여행할 때 일이었다. 만주의 풍속도 좀 살필 겸 아직껏 문명의 세례를 받지 못한 그들의 사이에 퍼져 있는 병(病)을 조사할 겸해서 일년의 기한을 예산하여 가지고 만주를 시시콜콜이 다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에 ××촌이라 하는 조그만 촌에서 본 일을 여기에 적고자 한다. ××촌은 조선사람 소작인만 사는 한 이십여 호 되는 작은 촌이었다. 사면을 둘러보아도 한개의 산도 볼 수가 없는 광막한 만주의 벌판 가운데 놓여 있는 이름도 없는 작은 촌이었다. 몽고사람 종자(從者)를 하나 데리고 노새를 타고 만주의 촌촌을 돌아다니던 여가 그 ××촌에 이른 때는 가을도 다 가고 어느덧 광포한 북극의 겨울이 만주를 찾아온 때였..

한국단편문학 2024.02.19

소낙비 - 김유정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소낙비 - 김유정 - 음산한 검은 구름이 하늘에 뭉게뭉게 모여드는 것이 금시라도 비 한줄기 할 듯하면서도 여전히 짓궂은 햇발은 겹겹 산속에 묻힌 외진 마을을 통째로 자실 듯이 달구고 있었다. 이따금 생각나는 듯 살매들린 바람은 논밭간의 나무들을 뒤흔들며 미쳐 날뛰었다. 뫼 밖으로 농꾼들을 멀리 품앗이로 내보낸 안말의 공기는 쓸쓸하였다. 다만 맷맷한 미루나무숲에서 거칠어가는 농촌을 읊는 듯 매미의 애끓는 노래…. 매움! 매애움! 춘호는 자기 집 - 올봄에 오 원을 주고 사서 들은 묵삭은 오막살이집 - 방문턱에 걸터앉아서 바른 주먹으로 턱을 고이고는 봉당에서 저녁으로 때울 감자를 씻고 있는 아내를 묵묵히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사날 밤이나 눈을 안 붙이고 성화를 하는 바람에 농..

한국단편문학 2024.02.05

뫼비우스의 띠 - 조세희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뫼비우스의 띠 - 조세희 - 수학 담당 교사가 교실로 들어갔다. 학생들은 그의 손에 책이 들려 있지 않은 것을 보았다. 학생들은 교사를 신뢰했다. 이 학교에서 학생들이 신뢰하는 유일한 교사였다. 그가 입을 열었다. 제군, 지난 1년 동안 고생 많았다. 정말 모두 열심히들 공부해주었다. 그래서 이 마지막 시간만은 입학 시험과 상관이 없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는 몇 권의 책을 뒤적여보다가 제군과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은 것을 발견했다. 일단 내가 묻는 형식을 취하겠다.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했다. 한 아이는 얼굴이 새까맣게 되어 내려왔고, 또 한 아이는 그을음을 전혀 묻히지 않은 깨끗한 얼굴로 내려왔다. 제군은 어느 쪽의 아이가 얼굴을 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학생들은 ..

한국단편문학 2024.01.29

별 - 현경준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별 - 현경준 - 1. 1 달마다 한 번씩은 꼭 어김없이 오고야마는 수업료 납부기. 벌써 완납 기일을 사흘이나 넘은 교실 안은 처처에 빈 자리가 생겨서 횡뎅그레한데 아무 표정도 없이 눈알만 말똥거리는 중대가리들의 멍하니 벌린 괴지지한 입들, 훌쩍거리는 코들. 찌는 듯이 무더운 속에서 파리들이 앵앵거리며 햇볕을 좇아 날아다니고 가담가담 물쿤하고 콧구멍을 쿡쿡 찌르는 땀 냄새 방귀 냄새. 6월의 교실 안 공기는 웅덩이 속에 갇혀 있는 무겁고도 어지러운 흙탕물과도 같아 당장에 질식이라도 할 것 같다. 그러한 속에서 명우는 땀을 발발 흘려가며 거의 싸우다시피 악을 쓰는 것이었다. “이놈들아. 정신을 좀 차려서 선생님 설명을 들어라.” 그래도 아이들은 얼빠진 것처럼 멍하니 입만 벌리..

한국단편문학 2024.01.22

봄과 따라지 - 김유정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봄과 따라지 - 김유정 - 지루한 한 겨울동안 꼭 옴츠러졌던 몸뚱이가 이제야 좀 녹고 보니 여기가 근질근질 저기가 근질근질. 등어리는 대구 군실거린다. 행길에 삐쭉 섰는 전봇대에다 비스듬히 등을 비겨대고 쓰적쓰적 비벼도 좋고. 왼팔에 걸친 밥통을 땅에 내려놓은 다음 그 팔을 뒤로 젖혀올리고 또 바른팔로 다는 그 팔꿈치를 들어올리고 그리고 긁죽긁죽 긁어도 좋다. 본디는 이래야 원 격식은 격식이로되 그러나 하고 보자면 손톱 하나 놀리기가 성가신 노릇. 누가 일일이 그러고만 있는가.\ 장삼인지 저고린지 알 수 없는 앞자락이 척 나간 학생복 저고리. 허나 삼 년간을 내리 입은 덕택에 속껍데기가 꺼칠하도록 때에 절었다. 그대로 선 채 어깨만 한번 으쓱 올렸다. 툭 내려치면 그뿐. 옷..

한국단편문학 2024.01.15

술 권하는 사회 - 현진건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술 권하는 사회 - 현진건 - "아이그, 아야” 홀로 바느질을 하고 있던 아내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 가늘고 날카로운 소리로 부르짖었다. 바늘 끝이 왼손 엄지손가락 손톱 밑을 찔렀음이다. 그 손가락은 가늘게 떨고 하얀 손톱 밑으로 앵두빛 같은 피가 비친다. 그것을 볼 사이도 없이 아내는 얼른 바늘을 빼고 다른 손 엄지손가락으로 그 상처를 누르고 있다. 그러면서 하던 일가지를 팔꿈치로 고이고이 밀어 내려놓았다. 이윽고 눌렀던 손을 떼어보았다. 그 언저리는 인제 다시 피가 아니 나려는 것처럼 혈색이 없다 하더니, 그 희던 꺼풀 밑에 다시금 꽃물이 차츰차츰 밀려온다. 보일 듯 말 듯한 그 상처로부터 좁쌀 낟 같은 핏방울이 송송 솟는다. 또 아니 누를 수 없다. 이만하면 그 구멍이..

한국단편문학 2024.01.08

미스터 방 - 채만식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미스터 방 - 채만식 - 주인과 나그네가 한가지로 술이 거나하니 취하였다. 주인은 미스터 방(方), 나그네는 주인의 고향 사람 백(白)주사. 주인 미스터 방은 술이 거나하여 감을 따라, 그러지 않아도 이즈음 의기 자못 양양한 참인데 거기다 술까지 들어간 판이고 보니, 가뜩이나 기운이 불끈불끈 솟고 하늘이 바로 돈짝만한 것 같은 모양이었다. "내 참, 뭐, 흰말이 아니라 참, 거칠 것 없어, 거칠 것. 흥, 어느 눔이 아, 어느 눔이 날 뭐라구 허며, 날 괄시헐 눔이 어딨어, 지끔 이 천지에. 흥 참, 어림없지, 어림없어." 누가 옆에서 저를 무어라고를 하며 괄시를 한단 말인지, 공연히 연방 그 툭 나온 눈방울을 부리부리, 왼편으로 삼십도는 넉넉 삐뚤어진 코를 벌씸벌씸 해가면..

한국단편문학 2023.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