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문학

표구된 휴지 - 이범선 -

하얀모자 1 2024. 8. 29. 01:45

 

 

                                      표구된 휴지
 
                                                                      - 이범선 -

 니무슨주변에고기묵건나.
 콩나물무거라.
 참기름이나마니처서무그라.
 
누렇게 뜬 창호지에다 먹으로 쓴 편지의 일절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피곤할 때면 화실 안쪽 벽에 걸린
그 조그만 액자의 편지를 읽는 버릇이 생겼다.
그건 매우 서투른 글씨의 편지다.
앞 부분과 끝 부분은 없고 중간의 일부분만인 그 편지는
누가 누구에게 보낸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다만 그 내용으로 미루어 시골에 있는 늙은 아버지 
( 어쩌면 할아버지일지도 모른다.)가 서울에 돈 벌러 올라온
아들에게 쓴 것으로 생각되는 까닭은
그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그보다더 더 그 편지의
종이나 글씨에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 어느 가을에 문을 바르고 반 장쯤 남았던 창호지를 용케 생각해 내서
벽장 속을 뒤져 먼지를 떨고 손바닥으로 몇 번이나 쓸어 펴서
적당히 두루마리 모양이 나게 오린 것이리라.
누렇게 뜬 종이 가장자리가 삐뚤삐뚤하다.
거기에 사연을 먹으로 썼다. 순 한글(아니 이 편지에서만은 언문이라는
 말이 좀더 어울릴까)로 쓴 그편지가 재미있다.
붓으로 썼다기보다 무슨 꼬챙이에다 먹을 찍어서 그린 것 같은 글자는
단 한 자도 그 획의 먹 농도가 고른 것이 없다.
뿐 아니라 글자의 획들이 모두 사개가 물러나서 이상스레 헐렁한데
그런 글자들이 또 제각기 제멋대로 방향을 잡고 아무렇게나 눕고 서고 했다.
그러니 글줄이 바를 리는 만무고.
 
 니떠나고메칠안이서송아지낫다.
 그너석눈도큰게잘자란다.
 애비보다제에미를더달맛다고덜한다.
 
이 대문에서는 송아지 석 자가 딴 글자보다 좀 크고 먹색깔도 진하다.
나는 언제나 이 액자를 보면 그 사연보다 그 글씨로 하여
먼저 미소짓게 된다.
 
베적삼 고름은 헐렁하니 풀어 헤쳤고 잠방이 허리는 흘러내려
배꼽이 다 드러난 촌로들이 마을 어귀 느티나무 그늘에 모여,
더러는 마주하고 장기를 두고, 옆의 한 노인은 부채질을 하다 졸고,
또 어쩐 노인은 장죽을 쑤시는가 하면,
때가 새까만 목침을 베고 누운 흰머리는 서툰 가락의 시조를 읊고.
 
그 크고 작고,
진하고 연하고,
삐뚤배뚤한 글자들.
나는 거기서 노인들의 구수한 농지거리를 들을수 있다.
 
 압논벼는전에만하다.
 뒷밧콩은전해만못하다.
 병정갓던덕이돌아왔다.
 니서울돈벌레갓다니까 ,
 소우숨하더라.
 
이 편지 액자는 사실은 내 것이 아니다.
3년 전 가을이었다. 저녁 무렵 친구가 찾아왔다.
어느 은행지점장인가 지검장 대리인가 하는 그친구는
퇴근길에 잠깐 들렀다는 것이었다.
 
 "부탁이 있는데."
 
 "부탁? 설마 은행가가 가난한 화가더러 돈을 꾸잔 건 아닐게고."
 
나는 농담으로 그를 맞아들였다.
 
 "그런 건 아니고 ……이거 좀 보게."
 
그는 신문지로 돌돌 만 것을 불쑥 내밀었다.
 
 "뭔데. 그림인가 ?"
 
 "글세 펴 보게. 그림이라면 그림이고 들이라면 글인데
   그게…… 국보급이야."
 
친구는 장난기 어린 눈으로 안경 속에서 웃고 있었다.
나는 조심조심 신문지를 폈다.
그건 아무렇게나 구겨져 던졌던 휴지를 다시 편 것이었다.
 
 "뭔가, 이건 ?"
 
 "한번 읽어 보게나."
 
친구는 눈으로 내가 들고 있는 휴지를 가리켰다.
나는 그 구겨 졌던 종이 위에 먹으로 쓴 글자를 한 자 한 자 읽으면서
속으로 철자법을 교정해야 했다.
 
 "무슨 편지 같군."
 
 "그래."
 
 "무슨 편진가 ?"
 
 "나도 모르지."
 
 "그런데 !"
 
 "어쨌든 재미있지 않나. 뭔가뭉클하는 게 있단 말야."
 
 "바가지에 담아 내놓은 옥수수 냄새 같은, 뭐 그런 게 있잖아."
 
 "흠, 자넨 역시 길을 잘못 들었어."
 
나는 웃었다. 그는 나와 중학교 동창이다.
그 시절 그는 문학 서저거에 취해 있는 문학 소년이었다.
선생님들도 그의 소질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결국 상과 대학엘 갔다.
고등학교에서의 배치에 의해서 였다.
 
 "그거 표구할 수 있겠지 ?"
 
 "표구 ?"
 
 "그야 할 수 있겠지. 창호지니까."
 
 "난 그런 걸 잘모르지 않나. 그래 화가인 자네 생각을 했지 뭔가.
  자네가 어디 적당한 표구사에 맡겨서 좀 해 주지 않겠나 ?"
 
 "그야 어렵지 않지만 ……자네도 어지간히 호사가군.
  이걸 표구해서 뭘하나. 도대체 어디서 주워 온건가. 이 휴지는 ?"
 
 "아닌게 아니라 정말 휴지통에서 주운 거지."
 
그 친구 은행 창구에 저녁때면 날마다 빼지 않고 들르는 지게꾼이 있단다.
은행 문 앞에 지게를 벗어 세워 놓고는 매우 죄송스러운 태도로
조용히 은행 안으로 들어서는 스물 댓 나 보이는
그 꺼먼 얼굴의 청년을 처음엔 안내원이 막았다.
 
 "뭐지요?"
 
 "예, 예, 저어 ……" 
 
 "여긴 은행이요, 은행 !"
 
 "예, 그러니까 저 돈을 ……"
 
청년은 어리둥절해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글세, 은행이라니까!"
 
 "예, 그런데 그 조금도 할 수 있습니까?"
 
 "조금이라니 뭘 말이요?"
 
 "저금을 조금두 할 수 있습니까?"
 
 "저금요?"
 
은행 안의 모든 시선들이 그 지게꾼에게로 쏠렸다.
청년은 점점 더 당황하였다.
얼굴이 붉어져서 돌아서 나가려는 그를 불러 세운 것이
예금 창구의 여직원이었다.
청년은 손에 말아 쥐고 있던 라면 봉다리에 꼬깃꼬깃한
백원짜리 지폐 다섯 장과 새로 새긴 목도장을 꺼내어
떨리는 손으로 여직원에게 바쳤다.
청년은 저만큼 한구석으로 가 서서
불안스러운 눈으로 멀리 여직원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참만에 그는 흠칫 놀랐다.
생전 처음 그는 씨자가 붙은 자기 이름을 들었던 것이다.
그는 여직원 앞으로 달려와 빳빳한 통장을 받았다.
청년은 여직원과 안내원에게 굽신굽신 절을 하고는
한 손에 통장을 받쳐든 채 들어올 때처럼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갔다.
통장을 확인할 경황도 없이.
 
다음날부터 그 청년은 매일 저녁 무렵이면 꼭꼭 들렀다.
하루에 2백 원 혹은 3백 원 또 어떤 날은 5백 원,
그의 통장에는 입금만 있고 출금란은 비어 있었다.
이제는 제법 안내원과는 익숙해졌으나 여직원 앞에서는
여전히 얼굴을 붉히며 수고를 끼쳐서 대단히 죄송하다는 표정 그대로였다.
 
그런던 어떤 날이었다.
그 날은 여느 날보다 조금 일찍 청년이 은행엘 들렀다.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얼마 넣으시겠어요?"
 
여직원이 미소로 물었다.
 
 "예, 기게 오늘은 좀 ……"
 
청년은 무언가 종이 뭉텅이를 들고 머뭇거렸다.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이거 얼마 되지 않는 걸 동전으로 ……
  그동안 저금통에 넣었던 걸 오늘 깨었죠. 기래 여기 이렇게 ……"
 
청년은 종이에 싼 것을 내밀었다..
 
 "아이, 많이 모셨네요."
 
 "죄송합니다. 정말 이거 ……"
 
청년은 뒤총수를 긁적거리며 언제나 그가 서서 기다리던 구석으로 갔다.
 
 "이게 바로 그 지게꾼 청년이 동전을 싸 가지고 온 종이지."
 
친구는 내 손의 편지를 가르켰다.
 
 "그래. 그럼 그의 집에서 그 친구에게 보낸 편지란 말인가..?"
 
 "글세.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겠지,
  동전을 세는 여직원을 거들어 주다가 우연히 발견하고
  재미있다고 생각돼서 가지고 온 것뿐이니까."
 
 우물집할머니하루알고갔다.
 모두잘갓다한다.
 장손이장가삭다.
 색씨는너머마을곰보영감딸이다.
 구장네탄실이 시집간다.
 신랑은읍의서기라더라.
 앞집순이가어제저녁감자살마치마에가려들고왔더라.
 순이는시집안갈끼라하더라.
 니는빨리장가안들어야건나.
 
나는 비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편지 내용도 그렇고 친구의 장난기도 그랬다.
 
어쨌든 나는 그 창호지를 아는 표구사에 맡겼다.
그게 어떤 편지냐고 묻는 표구사 주인한테는,
 
 "굉장한 겁니다. 이건 정말 국보급입니다."
 
하고 얼버무렸다. 표구사 주인은 머리를 기웃거렸다.
그 후 나는 그 창호지 편지를 감감히 잊어 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은행 친구가 어느 외국 지점으로 전근이 되었다.
비행기가 떠날 때 나는 문득 그 편지 생각이 났다.
 
 니떠나고메칠안이서송아지낫다.
 
그 길로 나는 표구사로 갔다.
구겨진 휴지였던 그 편지는 깨끗이 펴져서 액자 속에 들어 있었다.
그렇게 치장하고 보니 그게 정말 무슨 국보나 되는 것 같았다.
 
 돈조타.
 그러나너거엄마는돈보다도너가더조타한다.
 밥묵고배아프면소금한줌무그라하더라.
 
그날부터 그 액자는 내 화실에 그냥 걸어 두었다.
그저 걸어둔 거다.
그런데 그게 이상하게도 차츰 내 화실의 중심점이 되어 갔다.
그건 그림 같기도 하고 글 같기도 하다.
아니 그건 분명 그 둘이 합쳐진 것이었다.
 
나는 친구가 외국으로 떠나고
이태 동안 그 액자를 간간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차츰 그 친구의 심정을 느껴 알 것 같아졌다.
 
 니무슨주변에고기묵건나.
 코나물무거라.
 참기름이나마니처서무그라.
 
 순이는시집안갈끼라하더라.
 니는빨리장가안들어야건나.
 
 돈조타.
 그러나너거엄마는돈보다도너가더조타한다.
 
그리고 채 이어지지 못하고 끊어진
맨 끝 줄.
 
 밤에는솟적다속적다하며새는운다마는
 

'한국단편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왕치와 소새와 개미와 - 채만식 -  (1) 2024.09.11
해산 바가지 - 박완서 -  (4) 2024.09.05
산 - 이효석 -  (0) 2024.08.23
역마(驛馬) - 김동리 -  (0) 2024.08.10
별 - 황순원 -  (0) 2024.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