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 9

해바라기 - 이효석 -

해바라기                                                       - 이효석 -  언제인가 싸우고 그날 밤 조용한 좌석에서 음악을 듣게 되었을 때, 즉시 싸움을 뉘우치고 녀석을 도리어 측은히 여긴 적이 있었다. 나날의 생활의 불행은 센티멘탈리즘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사회의 공기라는 것이 깔깔하고 사박스러워서 교만한 마음에 계책만을 감추고들 있다. 직원실의 풍습으로만 하더라도 그런 상스러울 데는 없는 것이 모두가 꼬불꼬불한 옹생원이어서 두터운 껍질 속에 움츠러들어서는 부질없이 방패만은 추켜든다. 각각 한줌의 센티멘탈리즘을 잃지 않는다면 적어도 이 거칠고 야만스런 기풍은 얼마간 조화되지 않을까.   ─아닌 곳에서 나는 센티멘탈리즘의 필요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모..

한국단편문학 2024.10.28

사평역 - 임철우 -

사평역                                                       - 임철우 -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별로 복잡한 내용이랄 것도 없는 장부를 마저 꼼꼼히 확인해 보고 나서야 늙은 역장은 돋보기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놓고 일어선다.    "벌써 삼십 분이나 지났군."    출입문 위쪽에 붙은 낡은 벽시계가 여덟시 십오분을 가리키고 있다. 하긴 뭐 벌써라는 말을 쓰는 것도 새삼스럽다고 그는 고쳐 생각한다. 이렇게 작은 산골 간이역에서 제시간에 정확히 도착하는 완행 열차를 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님을 익히 알고 있는 탓이다. 더구나 오늘은 눈까지 내리고 있지 않는가.   역장은 손바닥을 비비며 창가로 다가가더니 유리창 너머로 무심히 시선을 던진다. 건널목 옆 외..

한국단편문학 2024.10.21

노벨문학상수상 소설가 한강 시(詩) 12편

1. 편지    그동안 아픈데 없이 잘 지내셨는지 궁금했습니다 꽃 피고 지는 길 그 길을 떠나 겨울 한번 보내기가 이리 힘들어 때 아닌 삼월 봄눈 퍼붓습니다 겨우내내 지나온 열 끓는 세월 얼어붙은 밤과 낮을 지나며 한 평 아랫목의 눈물겨움 잊지 못할 겁니다     누가 감히 말하는 거야 무슨 근거로  이 눈이 멈춘다고 멈추고 만다고··· 천지에,  퍼붓는 이··· 폭설이, 보이지 않아?  휘어져 부러지는 솔가지들,···  퇴색한 저 암록빛이, 이, 이, 바람가운데,  기댈 벽 하나 없는 가운데,  아아··· 나아갈 길조차 묻혀버린 곳, 이곳 말이야···   그래 지낼 만하신지 아직도 삶은 또아리튼 협곡인지 당신의 노래는 아직도 허물리는 곤두박질인지 당신을 보고난 밤이면 새도록 등이 시려워 가슴 타는 꿈 ..

한국단편문학 2024.10.19

한강 첫 글 '깃털' 노벨문학상 이후

깃털 / 한강   문득 외할머니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다. 사랑이 담긴 눈으로 지그시 내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손을 뻗어 등을 토닥이는 순간. 그 사랑이 사실은 당신의 외동딸을 향한 것이란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등을 토닥인 다음엔 언제나 반복해 말씀하셨으니까. 엄마를 정말 닮았구나. 눈이 영락없이 똑같다.   외갓집의 부엌 안쪽에는 널찍하고 어둑한 창고 방이 있었는데, 어린 내가 방학 때 내려가면 외할머니는 내 손을 붙잡고 제일 먼저 그 방으로 가셨다. 찬장 서랍을 열고 유과나 약과를 꺼내 쥐어주며 말씀하셨다. 어서 먹어라. 내가 한입 베어무는 즉시 할머니의 얼굴이 환해졌다. 내 기쁨과 할머니의 웃음 사이에 무슨 전선이 연결돼 불이 켜지는 것처럼.   외할머니에..

한국단편문학 2024.10.17

노벨문학상수상 소설가 한강 / 서시

서시     /    한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

한국단편문학 2024.10.16

2024년 노벨문학상수상 소설가 한강 시(詩) 4편

서울의 겨울  12 / 시 한강 어느 날 어느 날이 와서 그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 내 가슴 온통 물빛이겠네, 네사랑 내 가슴에 잠겨 차마 숨 못쉬겠네 내가 네 호흡이 되어주지, 네 먹장 입술에 벅찬 숨결이 되어 주지, 네가 온다면 사랑아 올 수만 있다면 살얼음 흐른 내 빰에 너 좋아하던 강물소리 들려주겠네     얼음꽃/ 시 한강 오래 내리어 뻗어간 그들 뿌리의 몫이리라 하여 뿌리 여윈 나는 단 한 시절의 묏등도 오르지 못하였고 허깨비, 허깨비로 뒹굴다 지친 고갯마루에 무분별한 출분의 꿈만 움터놓았다 모든 미어지는 가슴들이 그들 몫의 미어지는 가슴들이 그들 몫의 미어지는 꽃이라면  꽃이라면 아아 세상의 끝까지 가리라 했던 죽어, 죽어서라도 보리라 했던 저 숲 너머의 하늘 무엇이 꿈이냐 무엇이 시간이냐 ..

한국단편문학 2024.10.15

소음 공해 - 오정희 -

소음 공해                                                           - 오정희 -    집에 돌아오자마자,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실내복으로 갈아입었다. 목요일, 심신 장애인 시설에서 자원 봉사자로 일하는 날은 몸이 젖은 솜처럼 무겁고 피곤하다. 그래도 뇌성마비나 선천적 기능 장애로 사지가 뒤틀리고 정신마저 온전치 못한 아이들을 씻기고 함께 놀이를 하고 휠체어를 밀어 산책을 시키는 등 시중을 들다 보면, 나를 요구하는 곳에서 시간과 힘을 내어 일한다는 뿌듯함이 있다. 고등학생인 두 아들은 아침에 도시락을 두 개씩 싸 들고 갔으니 밤 11시나 되어야 올 것이고, 남편은 3박4일의 출장 중이니 날이 저물어도 서두를 일이 없다. 더욱이 나는 한나절 심신이 지치게..

한국단편문학 2024.10.13

노새 두 마리 - 최일남 -

노새 두 마리                                                               - 최일남 - 그 골목은 몹시도 가팔랐다. 아버지는 그 골목에 들어서기만 하면 미리 저만치 앞에서부터 마차를 세게 몰아가지고는 그 힘으로 하여 단숨에 올라가곤 했다. 그러나 이 작전이 매번 성공하는 것은 아니고, 더러는 마차가 언덕의 중간쯤에서 더 올라가지를 못하고 주춤거릴 때도 있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이마에 심줄을 잔뜩 돋우며, “이랴 이랴!” 하면서 노새의 잔등을 손에 휘감고 있는 긴 고삐줄로 세 번 네 번 후려쳤다. 노새는 그럴 때마다 뒷다리를 바득바득 바둥거리며 안간힘을 쓰는 듯했으나 그쯤 되면 마차가 슬슬 아래쪽으로 미끄러내리기는 할망정 조금씩이라도 올라가는 일은 드물었..

한국단편문학 2024.10.08

젊은 느티나무 - 강신재 -

젊은 느티나무                                                         - 강신재 -  1그에게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아니, 그렇지는 않다. 언제나라고는 할 수 없다. 그가 학교에서 돌아와 욕실로 뛰어가서 물을 뒤집어쓰고 나오는 때면 비누 냄새가 난다. 나는 책상 앞에 돌아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더라도 그가 가까이 오는 것을―그의 표정이나 기분까지라도 넉넉히 미리 알아차릴 수 있다. 티이샤쓰로 갈아입은 그는 성큼성큼 내 방으로 걸어 들어와 아무렇게나 안락의자에 주저앉든가, 창가에 팔꿈치를 집고 서면서 나에게 빙긋 웃어 보인다.  "무얼 해?" 대개 이런 소리를 던진다. 그런 때에 그에게서 비누 냄새가 난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가장 슬프고 괴로운 시간..

한국단편문학 2024.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