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산 바가지
- 박완서 -
서로 깊이 좋아하면서도 일부러 만날 기회를 만들 필요 없이
생각만으로도 푸근해지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며칠만 목소리를 못 들어도 궁금증이 나서
전화질이라도 해야 배기는 친구도 있다.
오늘 아침 설거지를 하다 말고 나중 경우에 속하는 친구 목소리를
못 들은 지가 일주일은 된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불현듯 좀이 쑤셔서 일손을 놓고 허겁지겁 전화통에 매달렸다.
용건 같은 건 따로 없었다.
애써 용건을 꾸며 대자면 나의 고질적이고 주기적인 우울증이
듣기만 해도 절로 세상만사가 별거 아닌 것으로 여겨질 만큼
낙천적인 그녀의 목소리에 의해 무산될 수 있길 은근히 바랐다고나 할까.
하마터면 전화 잘못 건 줄 알고 끊을 뻔하게 친구의 목소리는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느이 파산했구나?”
나는 그 친구와의 평소의 버릇대로 이렇게 농지거리부터 해보았다.
생판 농지거리만은 아닌 것이 씀씀이가 헤프고,
해놓고 사는 게 친구들 사이에선 가장 화려해서 우리가 샘을 낼라치면
언제 파산할지도 모르는 신세라고 엄살을 떨곤 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남편은 중소기업 정도의 사업체를 갖고 있는 유능한 사업가지만
대기업도 하루 아침에 물거품처럼 꺼지는 세상이니
그 정도의 엄살은 부릴 만도 했다.
“아냐, 차라리 파산이라도 했으면 좋게…….”
“뭐라구, 그럼 더 나쁜 일이 생겼단 말이니?”
“글쎄 더 나쁜 일이라면 좀 이상하지만,
파산을 했다고 해도 이렇게 서운하진 않을 것 같아.
그까짓 돈이야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거 아니니?”
“난 또 뭐라고. 조사장이 바람을 피웠나 보구나? 맞지?”
“얘는, 생각하는 것 하고……
바람은커녕 어제부터 맥이 빠져 회사에도 못 나가고
지금도 내 옆에 쓰고 드러누워 있단다.”
“무슨 일이야? 그럼.”
“내가 또 손녀를 봤단다. 또 딸을 낳을 게 뭐니.”
“이번이 참 둘째지? 약간은 섭섭허겠지만 곧 나아져.
낳을 때 섭섭한 거 벌충하고도 남을 만큼 예쁘게 구는 게 딸 아니니?”
“남의 일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게지.
당해보면 심각하다, 너. 우리 영감은 숫제 쓰고 드러누웠다니까.
맥이 풀려 사업이고 돈이고 다 귀찮대.”
“알만 해, 네 목소리만 들어도. 그렇지만 어쩌겠니?
임의로 할 수 있는 노릇이 아니니 며느리한테도 행여 그런 내색 하지마.”
“왜 임의로 못하니? 양수검사니 초음파검사니
아들 딸 미리 알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는데
제가 뭐 잘났다고 그런 것도 안해보고
겁 없이 딸년을 덜컥 낳아 놓느냐 말야.
시집을 우습게 봐도 분수가 있지!”
“아들 딸을 만들지는 못해도 딸인 줄 알면 안 낳을 수는
얼마든지 있잖느냐 말야.
다들 그러려고 양수검사하지 미리 궁금증이나 풀어보려고 하는 사람이
어딨니? 요새 애 떼는게 무슨 큰일이라고.”
“얘, 우리 피차 살 날이 창창한 것도 아닌 늘그막에
그런 무서운 소린 안 하도록 하자.”
“넌 왜 꼭 나만 나무라려고 그러니?
우리 며늘애 걔가 보통애 아닌건 너도 알지.”
“그럼 소문난 재원이지. 외며느리 그만큼 보기 어렵다고
다들 얼마나 부러워했니.”
“얘 얘, 듣기 싫다, 그건 다 옛날 고릿적 얘기고,
걔 콧대 세고, 시집 어려운 줄 모르는 고약한 성깔 말야.”
“여지껏 잘 지내고서 지금 와서 그게 무슨 소리니?
성깔 때문에 딸을 낳은 것도 아니것다.”
“걔가 딸만 내리 둘 낳은 것 때문에만 내 속이 이렇게 상하겠니?
나도 말이다, 딸 낳으면 아들 낳는 날도 있겠지
마음 눙쳐먹고 기다릴 아량도 있는 시에미다,
너. 근데 적반하장도 분수가 있지,
이번 애 뱄을 적부터 시부모 앞에서 고개 꼿꼿이 세우고 한다는 소리가
‘아들이고 딸이고 둘까지만 낳아보고 그만 낳을테니 그런 줄 아세요’
글쎄 이러지 뭐니? 제가 남의 집 외아들에 외며느리로 들어와서
그게 글쎄 할 소리니?
그래도 그때만 해도 속으로 필시 쟤가 양수검사라도 해서 아들 밴 것을
미리 알고 저렇게 큰소리치려니 하는 한가닥 희망이 있었기에
나무라고 싶은 것을 꾹 참을 수가 있었는데,
딸년을 배고 시부모 앞에서 감히 그런 발칙한 소리를 한 생각을 하면
괘씸하고 분해서 미칠 지경이지 뭐니.
앞으로 그 고집을 어떻게 꺾어 또 아이를 갖게 할 것이며
억지로 하나 갖게 한들 그게 아들이란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글쎄 이런 법도 있니? 외며느리 입에서 딸이라도 둘만 낳겠다는
소리가 감히 어떻게 나올 수가 있느냐 말야.”
“얘야, 좀 진정을 해. 세상이 그런 걸 어떡허니.
아들 딸 가리지 말고 둘만 낳자가 둘도 많다로 변한 것도 몰라?
꼭 그대로 해야 된다는 법적 제약이 있는 건 아니지만
요즈음 젊은 부부라면 의당 인구 문제를 모른척할 순 없는 거 아니니?
내버려둬.
그 애들 자녀의 수는 그 애들 스스로 알아서 결정하게 내버려둬야지
우리네 부모가 섣불리 나설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는 꽤 조심스럽게 내 생각을 말했는데도
기가 팍 죽었던 친구의 목소리가 별안간 귀청이 째지게 날카로워졌다.
“넌, 넌 아들 하나 낳으려고 딸을 넷씩이나 낳았기에
내 이 속타는 걸 알어줄줄 알았더니
어쩜 그렇게 남 복장 찧을 소리만 골라서 하니.
나는 지금 우리 집안의 손이 끊길지도 모르는 중대한 고비를 맞아 가지고
미치고 환장할 지경인데 인구 문제가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지는 아들 하나 낳으려고 딸을 넷씩이나 내리 낳은 주제에
누구한테 인구 문제를 뒤집어 씌우려고……”
이렇게 마구 지껄이더니 분에 못 이겨 전화를 끊고 마는 게 아닌가.
나의 오남매는 주시는 대로 낳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오남매일 뿐인데,
그 중 딸 넷을 마치 막내로 아들 하나를 얻기 위한
네 번의 시행착오에 불과한 것으로 단정하는 친구의 말투가 어이없었지만
변명할 겨를도 없었고, 또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 데나 마구 싸움을 걸고 싶게 착란돼 있는 친구의 상태가
측은하기도 했지만 남자 여자 문제라면 더욱 갈피를 못 잡는
이 시대의 우리 의식의 갈등과 혼란이 한동안 나를 우울하게 했다.
다음날 그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늘 나한테 시간 좀 내주지 않을래?”
“왜? 아들 딸 푸념 더 하고 싶어서? 미안하지만 사양하겠다.”
“오늘 퇴원한다니까 한번 가봐야지 않겠니?”
“가보긴 가봐야 한다니, 누구 말야?”
“누군 누구야. 우리 잘난 며느리 말이지?”
“그럼 여지껏 한 번도 안 가봤단 말이니?
그리고 퇴원한다니까 가봐야겠다니, 집으로 퇴원하는 거 아냐?”
“그 동안 가볼 기운이 어딨니? 밥해 먹을 기운도 없어서
정 배고프면 아무거나 한 그릇 시켜 먹으면서 산걸.
우리 영감도 오늘 겨우 출근했다.
그것도 나갈래 나간 게 아니라 사장님 아니면 안 되는 일이 있다고
야단법석을 해서 마지못해 나간걸.
퇴원은 즈이 친정으로 하지 왜 우리집으로 하니?
그건 딸을 낳았대서가 아니야.
아들을 낳았어도 마찬가진데 다만 사돈집에서
면목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있겠지.”
“딸이 딸을 낳으면 친정에서까지 면목이 없어야 하니?”
“그래, 그걸 몰라서 묻니? 그러니까 딸은 애물이고
어떡하든 아들은 있어야 한다는밖에.”
“몰랐어. 모를 수밖에. 딸이 넷씩 되지만 다 아직 출가 전이잖니?”
“그러니까 네가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만 탕탕 해서
남의 기통을 터뜨려 놓아도 내가 봐주는 거야.
하나만 출가를 시켜 보렴. 어떤 맛인가.
딸 아들이 똑같단 생각이 하루아침에 헤까닥 뒤집힐 테고,
내 섭섭한 심정도 이해가 될걸. 정말이야.
네가 놀라서 그러지 나 조금도 심한 시에미 아니다, 너.”
“알았어. 알았으니 용건이나 말해.”
“병원에 같이 가보자구. 시간 있으면 말야.”
“시간은 있지만 좀 우습다.”
“뭐가?”
“축하가 될지 문병이 될지 모르지만
그런 걸 네 쪽에서 요청한다는 게 말야.”
“혼자 가기가 암만해도 어색해서 그래.
친정어머니도 와 있고 할텐데 좋지 않은 기색 드러내기도 그렇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할 자신도 없고
네가 중간에서 이쪽 저쪽 위로도 좀 해주고 분위기를 좀 잡아 주라.
친구 좋다는 게 뭐니?”
나는 내키지가 않았지만 승낙을 하고 말았다.
그쪽에서 청하지 않아도 가서 축하해 줄 만한 사이였지만
축하가 아닌 심심한 위로를 해야 할 판이고 보니
우선 자신의 감정 처리가 문제였다. 한편 호기심도 없지 않아 있었다.
친구 며느리가 얼마나 당당한 여자라는 걸 잘 알고 있는 나는
그녀가 시어머니의 부당한 죄인 취급으로부터 어떻게 자신을 지키나,
또 사돈끼리는 그런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나,
좀 안된 얘기지만 구경해보고 싶었다.
우리는 k대학 부속병원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피차 어찌나 시간을 잘 지켰던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거의 동시에
닿은 택시에서 나란히 내렸다.
친구는 생각보다 더 초췌하고 늙어 보였다.
“화장이라도 좀 하지 않구…….”
자기가 얼마나 속상하다는 걸 한껏 과장하려는 친구의 속셈을
은근히 경멸하면서 나는 이렇게 핀잔을 주었다.
그리고 조금 웃었다.
화장 타령은 친구가 나를 만날 때마다 하던 소리였기 때문이다.
친구는 웃지도 않고 대꾸도 안하고 앞장섰다.
면회 시간 중의 신생아실 유리창엔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미키마우스 그림이 붙은 쇼윈도 너머론 신생아실이 훤히 들여다보였지만
아기를 보여주는 간호원은 한 명밖에 없어서
차례로 잠깐씩만 보여주는 것 같았다.
자연히 감질이 난 가족들이 유리창에 잔뜩 얼굴을 갖다대고
저만치 소쿠리 같은 침대에서 새근새근 잠든 아기들 중에서
자기네 아기를 찾아내려고,
또는 방금 유리창 앞에서 선을 보이고 있는 남의 아기와 자기의 아기를
비교하려고 눈을 빛내고 있었다.
아기 아버지인 듯 싶은 젊은 남자는
어찌나 유리창에 얼굴을 바싹 갖다 댔는지 코가 짜부라져
바보같이 보였지만 눈빛만은 진지하고 심각했다.
“어쩜, 무슨 애가 저렇게 클까. 신생아 같지도 않네.”
“글쎄 3.5킬로래. 저 눈뜨고 두리번대는 것을 좀 보게나.”
“3.5킬로나요. 조그만 엄마가 어쩌면 저렇게 크게 낳았을까.
그것도 첫아들을.
형님, 앞으로 며느리한테 더 쩔쩔맬테니 눈꼴시어서 어찌 보지.”
“왜 샘나나?”
나는 친구의 손녀는 어디쯤 누워 있나 찾는 것도 아니면서
그 큰 유리창 앞에서 멈칫대며 빙글대고 있었다.
참으로 즐거운 쇼윈도였다.
나는 새롭고 이상한 행복감이 스멀대며 전신에 퍼지는 걸 느꼈다.
“우리도 아기 먼저 보고 나서 산모 보러 가자.”
나는 응석 부리듯이 친구에게 동의를 구했다.
“안 돼. 싫어.”
친구가 단호하게 신생아실을 외면하고 입원실 쪽으로 앞장섰다.
나는 그 이상한 행복감에서 갑자기 깨어난 것도 아까웠지만
신생아실에 전혀 매혹당하지 않는 친구의 미욱스러움이
혐오스러워 거기까지 따라온 것을 후회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곧 목격해야할 지긋지긋하고도 잔혹한 대결이 두려워서
잠시라도 유예의 시간을 얻고 싶었던 것이다.
병실은 예상과는 달리 시끌시끌하고 명랑하게 들떠 있었다.
젊고 교양 있어 보이는 한 떼의 남녀가 산모의 침대를 에워싸고
주스 깡통으로 막 축배를 들려는 찰나였다.
“득남을 축하하네.”
“첫아들이라니 짜아식 홈런 깠잖아.”
“정말 장하십니다.”
“득남 턱은 언제 낼 건가.”
그런 소리들이 어울려 축제 분위기가 한껏 고조돼 있었다.
“방을 잘못 알았나봐.”
친구가 씹어뱉듯이 말하며 내 소매를 잡아끌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멈칫 돌아서려는데 초췌한 노부인이
울상을 하면서 친구를 가로막았다.
“사부인 나오셨습니까? 뵐 면목이 없습니다.”
그 병실은 이인실이었던 것이다.
사태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나빠질 게 뻔했다.
남이야 어찌 됐건 깡통을 서로 요란하게 부딪치고 난 득남 축하객들은
계속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그 녀석 장군감이던데. 백날 아기만해. 몇 킬로나 되나?”
“3.8킬로야. 아마 그 신생아실에선 우리 아들이 일등일걸.”
“이 친구 벌써부터 일등 밝히는 것 좀 보게.”
“내가 뭐라던, 배가 두루뭉실한 게 아들 낳겠다고 안 하던?”
“그래도 우리 시어머니는 자꾸만 딸이라고 그러시잖니.
뭐 태점에 딸이라고 나왔다나.”
“그게 시어머니 곤조라는 거야.”
“그래도 제일 기뻐하시는 게 시어머니더라.”
“친정 어머니가 더 기뻐하시는 거 아니니?”
“그건 기뻐하는 것하곤 다르지.
큰 근심 하나 덜어서 개운하신 것뿐이지.”
“하긴 우리 어머니도 내가 첫딸 낳고 두 번째 아기 가졌을 때
어찌나 조바심을 하시는지 정말 못봐주겠더라.”
“딸이 시집가서 아기 낳을 때까지 그렇게 속을 태워야 하니
딸이 애물일 수밖에.”
“정말 딸 낳을 건 아냐.
헛수고 중에서도 그렇게 고약한 헛수고는 없을 걸.”
“헛수고면 좋게. 헛수고는 아무것도 안 남는거지,
딸이 왜 아무것도 안 남니? 딸이 또 딸 낳을까 봐 까지
전전긍긍할 생각을 하면 악순환이야.”
“얘, 그만 해둬라. 남자들 좋아할라.”
“우린 똑똑히 들어 두었습니다. 김선생님의 중대한 실언을.”
“제가 무슨 실언을 했다고 그러세요?”
“김선생님처럼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남녀평등주의자가
그런 보수적인 발언을 하시다니.”
그들은 서로 잘 아는 사이인 듯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지껄이다가 이번엔 남녀가 공방전을 펼 낌새였다.
나도 김선생이라고 불리는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남녀평등주의자라는
여자를 눈여겨보았다.
그럴싸해서 그런지 신문이나 잡지 같은 데서 많이 본 듯싶은 얼굴이었다.
소위 명사가 하나 끼여 있다고 생각하니
그 명사와 흉허물없이 지껄이는 그들이 모조리 어딘지 명사다운 데가
있어 보였다. 젊은 나이에 교양과 옹졸함이
너무 드러나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말했을 뿐이에요.
현실을 외면하고 어떻게 주의나 운동이 있을 수가 있겠어요.”
“그렇지만 주의나 운동의 본뜻이 현실 개조에 있는 거라면
주의자가 앞장서서 그릇된 현실을 바로잡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 면으론 이름난 여권운동자보다 간호원이 한 수 위더군.
아들은 아드님이에요 하고 딸은 공주님이에요 하니 말야.”
“자넨 모를 걸세, 그 공주님이에요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아버지가 된 남자의 속이 얼마나 철썩 내려앉나를.
그 아찔한 실망을 모르면 가히 복받은 남자라 할지어다.”
“어머머, 저 남자들 말하는 것 좀 봐.”
“남자들보다 김선생, 당신을 성토해야 할까 봐.
당신 여권운동 거꾸로 하는 거 아냐.
우리 때만 해도 첫딸은 세간 밑천이라고 해서 그래도 대우를 해주었는데
요샌 어떻게 된 세상이 첫애 때부터 아들 아들만 밝히니.”
“어떡허든 남보다 앞서가고 이겨야 된다는 경쟁사회적인 심리 아닐까?”
“결국 아들은 이기는 거고 딸은 지는 거라는 남성 우위이구먼.”
“남성 우위라기보다는 경제성 우위 아닐까.
딸이 얼마나 손해라는 것은 길러 본 사람 아니라도 다 아는 사실 아냐?
시집보낼 때 봐. 기둥 하나씩 빼가던 건 옛날 얘기고
네 기둥을 다 빼가니 말야. 집 한 채 값은 우습게 든다지, 아마.”
“설마.”
“설마가 뭐야. 그야 집도 집 나름이긴 하지만 아무튼 호화주택에
살 만한 사람이면 호화주택값이, 오막살이에 살면 오막살이값이,
셋집에 살면 전세값만치는 들어야 딸 하나를 치우는 모양이나
경제제일주의 사회에서 손해가 내다보이는게
환영 못 받는 건 당연하잖아.”
“아무렴, 인간의 가치라는 게 별거야,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느냐는 경제적 가치를 빼면 뭐 남을 게 있다구.”
“어머머, 그건 너무 했잖아요, 윤선생님.”
“뭐가 너무 합니까.
딱 까놓고 말해서 우리가 일생 공부하고 노력해서 추구하는게 뭡니까.
이상? 학문적 완성? 자기 성취?
그건 다 그럴듯한 속임수고
실상은 자신의 경제적 가치를 높이는 일 아닙니까?
난 미국 가서 전공까지 바꾸었습니다. 왠 줄 아시죠?
처음 전공 가지고 학위 따봤댔자 돌아와서
취직하기도 어려울 것 같아서였죠.”
“남의 경사에 와서 왜 언성들을 높이고 야단일까.”
“놔둬 그것도 축하야.
절대로 취직이 보장 안된 딸을 안 낳아 얼마나 다행이냐고
득남의 기쁨을 새삼스럽게 할 수 있잖아?”
“정말 아들 낳기 잘했어.”
“공주면 어쩔 뻔했니?”
“아들이란 소리 들으니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다신 그 무서운 고생 안 해도 되겠다는 해방감이더라.”
산모가 응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너도 딸이면 더 낳을 작정이었구나? 아들 딸 가리지 않고
하나 이상 절대로 안 낳는다고 큰소리 땅땅 치더니.”
“마냥 낳겠다는 것보다 더 지독한 각오지,
아들 낳을 때까지는 낳아야겠다고 생각했으니.”
“어쩜 남편이 외아들도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니?”
“아들을 갖고 싶다는 건 본능 같은 거지 누가 시켜서 되는 거 아니잖아.”
“본능이자 남편에 대한 의무 아닙니까.
아들이 이렇게 좋은 건줄은 나도 애 아버지가 되기 전엔 미처 몰랐댔죠.
최상의 기쁨이에요.
아들이 소중한 나머지 내 몸 소중한 걸 알겠더라니까요.
습관적으로 차를 마구 몰다가도 아서라,
우리 아들을 위해 오래 살아야지,
이러면서 살살 몰면서 느끼는 벅찬 기쁨,
아내는 남편에게 그 정도의 기쁨은 선사할 의무가 있는 거 아닙니까?”
“그만해두게. 징그럽네 징그러워, 젊은 사람이.”
“왜 샘나나?”
새로 아버지가 된 남자와 그의 친구가 여자들끼리처럼
서로 옆구리를 간질이며 킬킬댔다.
그제서야 비로소 내가 정작 문병 온 산모도 잊고 팔려 있던 그들의 화제에
구역질 같은 혐오감을 느꼈다.
친구의 며느리는 모포를 끝까지 뒤집어쓰고 누워 있었다.
늘 당당하고 쾌활한 태도에 어울리게 늘씬하고 볼륨 있는
그녀의 몸매를 알고 있는 나는 반쯤 침대 속으로 잦아든 것처럼
얄팍하게 위축된 모습에 가슴이 찡한 연민을 느꼈다.
“안녕하세요. 어머니께서 애 많이 쓰십니다.
산모는 어떻습니까? 미역국이나 잘 먹는지요.”
나는 겨우 이렇게 뒤늦은 인사치레를 사돈한테 했다.
내 친구는 아직도 저쪽 이야기에 깊이 빠져
며느리는 아는 척도 안하고 있었다.
친구의 표정이 폭풍 전야처럼 암울하고 험악했다.
산모를 보러 오기까지 가까스로 억제했던 분통이 그들의 철딱서니없는
화제 때문에 다시 지글지글 끓어오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들이 다시 한번 왁자지껄 목청 높고 과장된 축하인사를 남기고
한꺼번에 병실을 나갔다.
남자가 네 명, 여자가 세 명 도합 일곱 명의 축하객은
서로 나이뿐 아니라 풍기는 것도 엇비슷해서
동창이나 직장동료쯤 되는 관계로 보였다.
“뭐 저렇게 무식한 사람들이 다 있어요?”
나는 그동안 안쓰럽도록 몸둘 바를 모르고 쩔쩔매고 있는
사돈마나님한테 위로 겸 이렇게 흉을 봤다.
한방 산모가 두 번 째 딸을 낳고 누워 있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첫아들 축하를 너무도 거침없이 대대적으로 하는
그들의 몰인정과 잔혹성을 나로서는 그렇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무식하긴요. 다 이 대학 교수들인데요.
아기 아빠가 이 대학 공대 교수라니까요.
온종일 겪음내기로 저렇게들 드나든다니까요.
쟤나 나나 못 할 노릇이죠 뭐.”
사돈마나님이 쓰고 누운 딸한테 눈물이 그렁한 눈길을 보내며
한숨처럼 말했다.
“천하에 무식한 것들 같으니라구.”
사돈마나님은 극구 부정했지만
나는 계속해서 입속으로 그들의 무식을 강조했다.
전엔 그렇게 생각한 바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선 왠지 무식함과 잔혹함이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동일한 것으로 여겨졌다.
산모의 어깻죽지가 세차게 흔들리는 게 모포 밖으로 여실히 드러났다.
그녀의 자존심이 죽자구나 억제하고 있으련만,
미미하지만 처절한 흐느낌도 밖으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친구의 눈길이 잠깐 이런 며느리의 모습을 스치고 나서
사돈마나님을 똑바로 봤다. 험악하다 못해 살기가 등등한 눈빛이었다.
나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지레 겁을 내며 원망스럽게
옆의 침대를 건너다보았다.
앞으로 일어날 일의 책임의 반 이상은 그쪽에 있다 싶었다.
그러나 방금 축하객을 전송하고 난 그쪽 산모는 나른하게 포만한 표정으로
머리맡의 가습기의 방향을 조절하고 나서 창 쪽으로 모로 누웠다.
이웃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때문에 그 여자는 일자무식보다
훨씬 더 답답해보였다.
“쟤가 시에미 대접을 어찌 이리 할 수가 있습니까?
한번쯤 쳐다봐도
제가 시에미 같은 건 안중에 없다는 걸 모를 내가 아닌데.”
친구가 착 가라앉은 그러나 떨리는 소리로 사돈마나님한테
이렇게 쓰고 드러누운 며느리를 나무랐다.
“저도 면목이 없어서 안 그럽니까.
잘 먹지도 않고 시시때때로 저렇게 울고 속을 끓이니
저 애 꼴이 말이 아닙니다.”
“아니. 쟤가 시에미 알기를 워낙 개떡같이 아는 앱니다.
벼르고 별러서 한마디 해도 어느 바람이 부나 하는 식이죠.
그러니 말해 뭘 하겠습니까.
그래도 이번 일만은 어른 된 입장에서
한마디 다짐을 받고 넘어가야겠다 싶어 이렇게 왔더니만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아까 그 사람들이 다 해주지 뭡니까?
저도 귀가 있으니까 들었겠죠.
더 보태지도 덜지도 않을테니 그 사람들한테서 들은 소리를
고스란히 명심하고 있으라 이르세요.
나 절대로 심한 시에미 아닙니다.
이번에 또 딸 낳은 것 가지고 뭐라지 않아요.
이 친구는 딸을 넷 낳고 기어이 아들을 낳았답니다.
딸 둘이 흉 될 것 하나 없어요.
그렇지만 남의 집 대를 끊어 놓겠다는 걸
어떻게 가만히 보고만 있습니까. 그건 안될 말이죠.
부처님 가운데 토막도 눈을 부라릴 일입니다.
알아들으셨죠, 사돈마님. 더 긴 말은 안 하겠어요.
아까 그 사람들처럼 젊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으니
이 시에미 생각을 덮어놓고 구닥다리 낡은 생각으로
치지도외(마음에 두지 아니함)하지는 못하겠죠. 이만 가보겠습니다.
지가 시에미 꼴 안 보려고 흉물을 떨고 있는데
시에미라고 제 꼴 보고 싶겠습니까? 얘, 가자.”
친구가 서슬이 퍼렇게 말하고 나서 내 소매를 잡아끌었다.
“이대로 가면 어떡하니? 안 오니만도 못하게.”
나는 친구 눈치를 봐가며 모포 위로 슬며시 산모의 어깨를 잡았다.
격렬한 떨림이 손아귀에 닿자마자 나는 미리 준비한
축하와 위로를 겸힌 인사말을 까먹고 말았다.
“가자니까, 시에미 우습게 아는 게 시에미 친군들 안중에 있을라구.”
친구는내 등을 떠다밀다시피 해서 먼저 문 밖으로 내쫓고 따라나왔다.
뒤쫓아 나온 사돈마나님은 참회하는 죄인보다 더 기운 없이 고개를 떨구고
파리한 입술을 간신히 들먹여 면목없다는 소리만 되풀이했다.
면회시간이 끝나 갈 무렵의 부속병원 택시 정류장은
들어오는 차는 드물고 기다리는 손님은 밀려 끝이 보이지 않게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k대학 본부로 넘어가는 고갯길가엔 앵도꽃인지,
키 작은 나무에 흰 꽃이 만발해 먼먼 한적하고 평화로운 마을로
이어진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그 환상적인 길을 뒤통수가 준수한 청년이
환자복을 입은 소녀가 탄 휠체어를 천천히 밀면서 거닐고 있었다.
소녀 적에 가졌던 병이니 입원이니 하는 것에 대한 감미로운 동경이
아련하게 되살아났다.
그들이 고개를 넘어 보이지 않자 아름다운 환각에서 깨어난 것처럼
정신이 아뜩하면서 속이 메슥거렸다.
친구의 희끗희끗하고 부스스한 파마머리와의 간격을 바싹바싹 좁혀가며
택시를 기다리는 일이 별안간 참을 수 없이 고역스럽게 여겨졌다.
정문까지의 비스듬 하고 드넓은 잔디밭은 아직은 군데군데만 파릇했다.
유난히 파란 부분은 곧 구박받고 제거당할 토끼풀 무더기인지도 몰랐다.
거기 삼삼오오 모여 앉은 흰 가운의 젊은이들의 머리카락이
미풍에 나부끼는 게 참으로 보기 좋았다.
“저기서 좀 쉬었다 가지 않을래?”
나는 미풍처럼 친구의 귓전에 속삭였다. 딴 뜻은 없었다.
그냥 쉬고 싶었고 바람이 허락한다면 희끗희끗한 머리나마
나부껴 보고 싶었다. 나는 친구의 동의를 기다릴 것도 없이
그 지루한 기다림의 행렬에서 이탈했다.
친구도 순순히 뒤따라나왔다.
우리는 누가 야단칠까 봐 감히 잔디밭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할 말을 다 한 친구도 그닥 유쾌해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점점 사나워 보였다.
요즈음 아이들은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모르거든.
점점 미워져가는 요즈음 아이들을 보면서 한탄하던 상투어가
밑도끝도없이 문득 생각났다.
“무슨 말이든지 좀 해봐.”
친구가 사나움이 많이 가신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나의 말없음을 자신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무슨 말이든지?
나는 친구의 말을 속으로 되뇌면서 불쑥 하고 싶은 얘기가 생각났다.
그 이야기는 내가 살아온 이야기 중의 한 토막이어서
당연히 시시할 수밖에 없었고 친구도 대강은 다 아는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시시한 이야기 속에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허구한 날 맺는 온당한 인연,
온당치 못한 인연이 훗날 무엇이 되어 돌아오나를
풀 수 있는 암시 같은 게 들어 있는 것처럼 느꼈다.
아니 그렇게 복잡한 까닭이 아닌지도 몰랐다.
나는 친구에게 그저 겁을 주고 싶었다.
친구가 이 세상에 두려운 거라곤 없는 것처럼 구는 게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마치 아이에게 겁을 주기 위해 손가락으로 제 입을 찢고
제 눈을 까뒤집어 도깨비 형상을 만들 듯 과장법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해봤댔자 이 겁 없는 친구가 무서움을 타게 되리란 보장은
물론 없었다. 그러나 생각만으로 미리 즐거웠다.
내가 시집갈 때, 신랑이 하필 과부의 외아들이라고 해서
친정에선 참 걱정들을 많이 했다.
그러나 나는 그 과부 시어머니를 처음 뵈었을 때부터 싫지가 않았다.
친정어머니는 신식 학력은 없었지만 아는 것이 많으셨다.
한글은 물론 한학에도 조예가 깊으셨고 어쩌다 하루 신문이 안 오면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호통을 치실 만큼 세상 돌아가는 일에도
관심이 많으셨다. 지식욕이 강한 사람이 흔히 그렇듯이
어머니도 꼬치꼬치 따지길 좋아했고,
꼬치꼬치 따질 대상이 집안일과 자식들 일밖에 없는지라
당하는 자식들은 피곤할밖에 없었다.
그래 그런지 친정어머니가 지닌 일종의 지적인 분위기가 빠진 어수룩한
시어머니에게 나는 단박 호감을 느꼈다.
편하게 시집살이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왔다.
이모나 고모들이 예로부터 전해내려오는 해괴망측한 외아들의
홀시어머니 노릇을 수집해다가 나를 위협했지만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워낙 똑똑한 분이라 말려봤댔자 소용 없다는 걸
미리 알고 계셨는지 그것도 네 팔자지 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어머니는 그런 분이셨다.
나는 어려서 등잔불을 만지고 싶어 안달을 했다고 한다.
식구들은 다 그런 나를 등잔불로부터 멀리 떼어놓으려고 조심했지만
어머니는 어린 내가 등잔불을 만져볼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불이 얼마나 뜨겁다는 걸 체험하게 해 그 버릇을 고쳤다는 걸
자랑스럽게 말씀하시곤 했다.
시어머님은 내 관상이 적중해 나는 마음 편히 시집살이를 할 수가 있었다.
실상 시집살이랄 것도 없었다.
나는 두 살 터울로 아이를 다섯씩이나 낳았지만 젖만 먹였다뿐
기른 건 시어머님이셨다. 그때만 해도 식모가 흔할 때여서
우리도 식모를 두고 살았지만 그분은 식모에게 절대로 기저귀를 빨리거나
아이를 업히는 일이 없었다.
왜 내 천금같은 손자 똥을 남이 더러워하고 찡그리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업히는 것도 질색이었다.
업고 갈 데 안 갈 데 가는 것도 싫지만
혹시 아기를 떨어뜨리거나 부딪혀도
안 그랬던 척 속일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젖만 떨어지면 데리고 자는 것도 그분의 일이었다.
아이가 에미 애비하고 한방 쓰면 아이에게도 부모에게도
이로울 게 하나도 없다는 게 그분의 생각이었다.
그분은 한글도 제대로 해독을 못했다. 한때 언문은 깨쳤었지만
써먹을 데가 없다 보니 거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깨친 글도 써먹을 바를 모를 만치 지적인 호기심이 결여된 분이었지만
자기 나름의 확고한 사랑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분은 안방을 쓰고 우리는 건넌방을 썼었는데
작은 집이라 귀를 기울이면 그분이 칭얼대는 손자를 잠재우려고
토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직하고 그윽한 자장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자장 자장 우리 아기, 잘도 잔다 우리 아기. 금자동아 은자동아,
금을 주면 너를 사랴, 은을 주면 너를 사랴.
자장 자장 우리 아기, 잘도 잔다 우리 아기.
멍멍 개야 짖지 마라, 꼬꼬닭아 우지 마라, 우리 아기 잠을 잔다.
그분의 자장가를 듣고 있노라면 나도 착하고 무구한 아기가 되어
너그럽고 큰 손에 안겨 온갖 세상 시름과 악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듯한
편안함에 잠기곤 했다.
고모나 이모한테서 들은 해괴한 홀시어머니 노릇이란
거의가 아들의 침실을 엿본다든가 아들을 데리고 자고 싶어한다든가
하는 다분히 성적인 거여서
신혼 초엔 내 쪽에서 문득 침실 밖을 살피기도 했었다.
강박관념에서라기보다는 일종의 호기심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 일어날 가망도 없었다. 그렇게 구순하고 편안하게,
서로 사랑한달 순 없어도 자꾸만 늘어나는 새 식구를
더불어 사랑하고 예뻐 어쩔 줄을 모르면서
어느새 그분은 일흔 고개의 정상에,
나는 마흔 고개의 정상에 다다랐으니 말이다.
일흔 다섯까지도 그분은 정정해서 손자들 도시락 찬을 챙기고 싶어했고,
입시가 있을 때마다 절에 가서 천 번이나 절을 하고
그 생색을 내고 싶어했고, 증손자 볼 때까지 살고 싶다는 생의 의욕에
충만해 있었다.
좀 지나치리만치 건강하시어 고혈압으로 쓰러지실 때까지도
우리는 그분의 혈압이 높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빈신불수가 될 것 같다는 우려와는 달리 그분은 얼굴이 약간 비뚤어졌을 뿐
신속하게 건강을 회복했다. 식욕은 더욱 왕성해졌고,
목소리는 어둑 쨍쨍해졌고 아침잠은 더욱 엷어졌다.
나는 일흔다섯살의 이런 정력적인 재기를 경탄해 마지 않았지만
때때로 배은망덕하게도 부담스러워하기도 했던 것 같다.
우리 시어머님은 아마 백 살은 사실 거예요,
이러면서 입술을 삐쭉댔으니 말이다.
그분의 망가진 부분이 육신보다는 정신이었다는 걸 알아차린 건 그 후였다.
우리는 서서히 그걸 알아차리게 됐다.
처음엔 아이들 이름을 헷갈려 부르는 정도였다.
노인들이 흔히 그러는 걸 봐온지라 대수롭지 않게 알았다.
그러나 바로 가르쳐 드려도 믿지를 않고 한사코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건
묘하게 신경에 거슬렸다.
숫제 치지도외하기로 했다.
어쩌면 나는 그럴 기화로 그때까지만 해도
그분이 한사코 움켜쥐고 있던 살림 권리를 빼앗을 수 있어서
은근히 기뻤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분의 노망을 근심하는 소리는
집 안에서보다 집 밖에서 먼저 났다.
오래간만에 고모님을 뵈러 온 당신 조카한테 당신 누구요?
하며 낯선 얼굴을 해서 조카를 당황케 하더니
어찌어찌해서 그가 조카라는 걸 알아보고 나서 아이가 몇이냐고 물었다.
아들이 둘이라고 하자 아이구 대견해라 일찌거니 농사 잘 지었구나라고
정상적인 대답을 했다.
그러나 곧 똑같은 질문을 하고 똑같은 덕담을 했다.
똑같은 질문은 한없이 되풀이댔다.
그는 내가 애써 차려준 점심을 뜨는 둥 마는 둥 진저리를 치며
달아나 버렸다.
그렇게 해서 그분이 노망났다는 소문은
그분의 친정 쪽으로부터 먼저 퍼졌다.
집에서도 같은 말의 되풀이가 점점 심해졌다.
그 대신 그분이 주된 관심사에서 제외된 어휘는
급속도로 잊혀지는 것 같았다. 쌀 씻어 놓았냐? 빨래 걷었냐?
장독 덮었냐? 빗장 걸었냐? 등 주로 의식주에 관한
기본적인 관심이 온종일 되풀이되는 대화 내용이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허구한 날 같은 말에 같은 대꾸를 해야 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그 빈도가 하루하루 잦아지고 있었다.
“쌀 씻어 놓았냐?” “네” “쌀 씻어 놓아라. 저녁 때 다 됐다.”
“네, 씻어 놓았다니까요.” “쌀 씻어 놓았냐?” “씻어 놓았대두요.”
“쌀 씻어 놓았냐?”
“쌀 안 씻어 놓으면 밥 못할까봐 그러세요.
진지 안 굶길테니 제발 조용히 좀 계세요.”
이렇게 짜증이 나기 마련이었다.
그렇다고 그 줄기찬 바보 같은 질문이 조금이라도 뜸해지거나
위축되는 것도 아니었다.
남들은 몇 년씩 똥오줌 싸는 노인도 있는데
그만하면 곱게 난 망령이라고 나를 위로했지만
나는 온종일 달달 볶이고 있는 것처럼 신경이 피로했다.
차라리 똥오줌 치는게 온종일 말대꾸하는 것보다 덜 지겨울 것 같았다.
사태는 점점 더 나빠졌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방 문 창호지에 숟가락에 침 묻혀 뚫은 것 같은 구멍이
하나 둘 생겨났다.
어느 날 밤, 인기척도 같고 야기와도 같은 섬뜩한 느낌에 잠을 깬 나는
그 구멍에서 음험하게 반짝이는 눈빛을 보았다.
시집오기 전 고모와 이모한테서 들은 해괴망측한
외아들의 홀시어머니 노릇을 이 나이에 당할 줄이야.
억압된 성이 얼마나 무서운 화근이라는 걸
어설프게 얻어들은 프로이트까지 떠올리며 재확인한 것처럼 느꼈다.
그렇다고 그분의 소싯적의 불행과 고독을 손톱만큼이라도
동정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직 소름이 끼치게 혐오스러울 뿐이었다.
우리 부부는 이미 누가 침실을 엿본다고 해서 우리 자신의 성적 불만이
축적될 만큼 젊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이 징그럽고 혐오스러운 것은
성적 불만보다 더 참기가 힘들었다.
때때로 혐오감이 고조될 땐 살의를 방불케 해 섬찟한 전율을 느끼곤 했다.
이런 정서적인 불균형을 은폐하고,
아이들 앞에서나 이웃이나 친척 보기에 여전히 좋은 며느리처럼 보이려니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나는 점점 못쓰게 돼갔고 때로는 자신의 몸과 마음이 망가져 가는 걸
즐기기도 했다.
저 늙은이가 저렇게 며느리를 못살게 굴다가 필시 며느리를 앞세우고 말걸.
두고 보라지. 이렇게 악담을 함으로써 복수의 쾌감 같은 걸 느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 비밀스러운 속마음일 뿐
겉으론 음전한 효부 노릇을 해야 했으므로
나는 어느 틈에 신경안정제를 상습적으로 복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음험하고 초롱초롱한 눈동자는
문 밖에만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았다.
언제고 문 안에 들어오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밤, 화장실에 가려고 미닫이를 열던 남편이
억 소리를 지르며 주춤했다.
그때까지도 우리의 침실을 지키고 있는 밤눈이 있다는 걸
모르고 있던 남편이 흰머리를 산발하고 내복 바람으로 문 밖에서 떨고 있는
귀신 같은 노인을 보고 비명을 지른 건 당연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놀란 건 오히려 나였다.
시어머님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밤눈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놋요강을 남편한테 내밀면서 말했다.
“내 이럴 줄 알고 요강을 닦아 놓았느니라.
요강을 놓아두고 뭣하러 그 먼 뒷간에 가냐, 가길. 감기 들려고.”
남편이 반짝거리는 놋요강에 소피 보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오래도록 진저리를 쳤다.
화장실이 시골집처럼 멀달순 없어도 구옥이라 마루를 지나 댓돌을 내려서
대문간까지 나가야 있었다.
그러나 나는 요강은 야만적이라고 시집올 때 해온 놋요강을
마루 밑에 처박아두고 쓰지 않았다.
남편이나 나나 밤중에 화장실에 가는 일은 어쩌다나 있었으므로
조금도 불편한 줄 몰랐다.
아마 이사를 한 대도 그 요강이 거기 있는 걸 잊버버렸을테고
생각났다고 해도 버리고 떠났을 것이다.
그런 요강을 언제 어떻게 꺼내서 무슨 생각과 무슨 기운으로
그렇게 반짝반짝 광을 냈을까?
나는 진저리를 치다가 기어코 몸부림을 치면서 울기 시작했다.
뭔가 견딜 수가 없어서 미칠 것 같았다.
자신이 미쳐 가고 있다는 것을 ,
정신에도 미친 세포가 있어 정상적인 세포를 마구 잡아먹고
마침내 그 질서를 증오와 광란의 도가니로 만들어 가고 있음을
역력히 감지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오밤중에 그런 일이 있은 다음날부터 시어머님은 큰 구실이 하나
생긴 셈이었다.
아침 일찍 우리 방으로 건너와 요강을 내가고 밤이 이슥해
어리어리 잠이 들만하면 요강을 받쳐들고 와서 머리맡에 놓고 나갔다.
우리 부부는 이상하게도 그날부터 밤오줌을 누기 시작했다.
나도 남편이 잠들었건 말건 궁둥이를 허옇게 까고
놋요강에 사뭇 요란스럽게 방뇨를 했다.
행여 그 일을 누구한테 빼앗길세라 첫새벽에 요강을 비우러 들어올 때나
이슥한 밤에 요강을 들고 들어올 때의 그분의 표정은
아무도 흉내낼 수 없을 만치 특이했다.
가장 신령스러운 일에 영혼이 부림을 당하고 있는 무당처럼
요괴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자기 아니면 안 되는 일에 헌신한다고
생각하는 독재자처럼 고집스럽고 당당해 보이기도 했다.
나는 내가 숨쉬기 위해 매일 밤 그분을 죽였다.
밝은 날엔 간밤의 잔인한 소망을 부끄러워했지만
내 잔인한 소망은 매일 밤 살쪄 갔다.
그 기운을 조금이라도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신경안정제밖에 없었다.
은밀히 먹던 그 약을 남편 앞에서 당당히 입에 털어 넣었고 분량도
여봐란 듯이 늘려갔다.
그가 약을 빼앗으려는 시늉을 하면 마귀처럼 무섭게 이를 갈며 덤볐다.
“괜히 그러지 말아요.
이 약 없으면 내가 당신 어머니를 죽일 거예요. 그래도 좋아요?
그것보다는 당신 어머니가 나를 죽이는 게 나을 걸요.
그게 낫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이 약을 먹는단 말예요.
이래도 당신 말릴 수 있어요?”
요강을 계기로 시작된 시어머님의 우리 방 밤출입은
그 빈도가 점점 잦아졌다.
문창호지 구멍으로 엿보다가 미풍처럼 가볍게 문을 열고 들어와
머리맡에서 속삭였다.
“아범, 대문 빗장 걸었나?”
“어멈아, 아범 자리끼 떠다 놨냐?”
이렇게 하찮은 걸 물어 보기도 하고 방이 차서 발을 녹이러 왔다고
요 밑에다 하얀 맨발을 넣으며 부르르 진저리를 치기도 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안방이 제일 외풍이 없는 방이고 연탄불이 괄하던데요.”
참다못해 이렇게 말하면 내가 거짓말시켰나 가보자고
굳이 우리 두 사람을 다 끌어내어 당신 방 요 밑을 만져보게 했다.
절절 끓어도 소용 없었다.
“아범 봤지? 냉골이지? 내가 얼마나 서러운 세상을 산다는 걸
아범도 이제 알았지? 세상에 이런 법은 없는 게야.
젊으나젊은 것들은 절절 끓는 방에서 자고 외로운 홀시에민
냉골로 혼자 내치다니.”
이러면서 앙상한 몸을 돌돌 말아 일으켜 세운 양무릎 사이에
산발한 머리를 파묻고 훌쩍훌쩍 울었다.
그런 그분의 모습은 늙었다기보다는 열서너살 먹은 소녀처럼 미숙해보여
남편의 얼굴엔 비통한 연민이 서렸다.
“왜 이러세요? 어머니. 절 봐서라도 망령 좀 그만 부리세요. 네 어머니.”
그러나 내 눈엔 그분의 그런 짓이 평범한 망령으로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프로이트 때문인지 성적인 연상을 하고
내 속에 또 하나의 지옥을 만들었다.
그분은 점점 더 자주 우리 방으로 야행을 하였고,
당신 방으로 아들을 불러냈다.
“아범 추워 죽겠어, 정말이야 냉골이라니까.
늙은이 얼어죽는 꼴 안보려면 한번만 와서 만져봐.”
“아범, 나 배고파 죽겠어. 어멈이 나를 굶겨. 정말이야.
배가 등가죽에 붙었어. 와서 한 번만 만져 보라니까.”
이렇게 새록새록 구실을 만들어냈다.
구실만 새로워지는 게 아니라 망령 노릇도 새록새록 새로워졌다.
겨울에서 봄이 되어도 엷은 옷으로 갈아입기를 한사코 마다했고,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어도 두터운 옷으로 갈아입히기가
며칠은 걸릴 만큼 힘든 일이 되었다.
그런 증세가 점점 심해져 옷 자체를 안 갈아입으려 들어
어쩔수없이 강제로 내복을 갈아입히려면
동네가 떠나가게 비명을 지를 만큼 망령은 날로 심해졌다.
갈아입기를 싫어하고부터는 씻지도 않았다.
목욕을 시키기는 갈아입히기보다 더 힘이 들었다.
순순히 몸을 맡겨도 애정이 없는 분의 속살을 만진다는 건
극기를 요하는 일인데 길길이 뛰며 마다는 걸 씻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분이 정성과 힘을 다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닦아주는 건
오로지 아들의 놋요강밖에 없었다.
이렇게 나는 구원의 가망이 조금도 안보이는 지옥을 살면서도
아이들이나 친척과 이웃들에겐 여전히 무던하고 참을성 있는 효부로
보이길 바랐다.
내가 양다리를 걸친 두 세계 사이의 심한 격차로
미구에 자신이 분열되고 말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나는 나의 이중성에 악착같이 집착했다.
어쩌면 나는 내가 처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자신의 분열밖에 없다는 자포자기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무렵 집에 드나들던 파출부가 어느 날 나한테 이런 소리를 했다.
“세상 사람들이 눈이 멀어도 분수가 있지.
왜 사모님 같은 분을 효부 표창에서 빠뜨리냐 말예요.
별거 아닌 사람들이 다 효자 효녀 효부라고 신문에 나고 상금도 타던데.”
그 여자가 순진하게 분개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나의 완벽한 위선에 절망했다.
나는 막다른 골목에 쫓긴 도둑이 살의를 품고 돌아서듯이
그 여자에게 돌아서서 무서운 얼굴로 말했다.
“오늘 우리 어머님 목욕을 좀 시키고 싶은데
아줌마가 좀 도와 줘야겠어요.”
“그러문요, 도와 드리고말고요.”
“목욕탕에 물 받으세요.”
나는 벌써부터 내 속에서 증오와 절망적인 쾌감이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걸 느끼고 있었다.
아줌마 보는 앞에서 시어머님의 옷부터 벗기기 시작했다.
조금도 인정사정 두지 않고 거칠게 함부로 다루었다.
목욕 한번 시키려면 아이들까지 온 집안 식구가 총동원해
좋은 말로 어르고 달래 가며 아무리 참을성 있고 부드럽게 다루다가도
종당엔 다소 폭력적으로 굴어야 겨우 그게 가능했다.
그러나 이번엔 처음부터 폭력적으로 다루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그분도 내 살기등등한 태도에 뭔가 심상치 않은 걸 느끼고
그 어느 때보다도 심한 반항을 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한 힘으로 저항했지만 나 역시 거침없이
증오를 드러내니까 힘이 무럭무럭 솟았다.
옷 한 가지를 벗겨 낼 때마다
살갗을 벗겨내는 것처럼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보다못한 아줌마가 제발 그만 두라고 애걸했다.
알지 못하면 가만 있어요. 이 늙은이는 이렇게 해야 돼요.
나는 씨근대며 말했다.
그리고 아줌마도 내 일을 도울 것을 명령했다.
노인은 겁에 질려 목쉰 소리로 갓난아기처럼 울었다.
발가벗긴 노인을 반짝 들어다 탕 속에 집어넣고
다짜고짜 때를 밀기 시작했다.
나 죽는다, 나 죽어.
저 ○년이 나 죽인다. 노인이 온 동네가 떠나가게 비명을 질렀다.
나는 그러면 그럴수록 더 모질게 때를 밀었다.
“너무 하세요. 그렇게 아프게 밀 게 뭐 있어요?”
아줌마가 노인 편을 들었다. 그녀는 이제 아무 도움이 안 됐다.
혼비백산한 얼굴로 구경만 했다.
“알지 못하면 가만히나 있으라니까요.
아무리 살살 밀어도 죽는 시늉 할 게 뻔해요.”
골치가 빠개질 듯이 띵하고 귀에서 잉잉 소리가 났다.
나는 남의 일처럼 내가 미쳐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골속에 아니 온몸에 가득 찬 건 증오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자꾸자꾸 증오를 불어넣고 있었다.
마치 터뜨릴 작정 하고 고무풍선을 불듯이,
자신이 고무풍선이 된 것처럼 파멸 직전의 고통과 절정의 쾌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별안간 아찔하면서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그런 중에도 나는 냉혹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이래도 나를 효부라고 할테냐고 묻고 싶었다.
그날 이후 나는 몸져 누웠다. 파출부도 다시는 우리집에 오지 않았다.
몸살에 신경안정제의 후유증까지 겹쳐 정신과 치료까지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집안꼴이 엉망이 되었다. 정신과 의사도 그런 귀띔을 했지만,
시어머님을 한동안 어디로 보낼 수 있었으면 하는 논의가 본격화된 것은
그분의 친정 조카들로부터였다.
그런 분을 잠시라도 맡아줄만한 아들이나 딸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입원을 일단 생각해보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의료보험제도는 없을 때고 쉬 나을 병도 아니고
아직도 몇 년을 더 사실지 모르게 몸은 정정하시니,
우리가 부자가 아니란 걸 아는 그들이 비용 문제를
안 생각할 수가 없었으리라.
달리 여기저기 수소문해 본 끝에 양로원과 정신치료를 겸한 수용기관이
꽤 있다는 걸 알아내서 우리에게 권했다.
물론 유료였고 그게 그닥 싸달 수 없는 상당한 액수인 게
되레 우리를 솔깃하게 했다.
경치 좋고 공기 좋은 한적한 시골 정갈한 거처에서 비슷한 처지끼리
가벼운 운동과 이런저런 이야기로 소일하며
적절한 치료도 받을 수 있는 노인들의 천국이 꼭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물론 자주 면회를 갈 테고 또 자주 그분을 가정으로 초대할 테고,
상태를 봐가며 퇴원도 시킬 수 있으리라.
이런 꿈을 꾸며 남편이 직접 일요일마다 그런 수용기관 중
시설이 괜찮다고 소문난 데를 찾아나섰다.
그러나 번번이 기대에 어긋나는지 남편은 일요일마다
초죽음이 돼서 돌아왔다. 어떻더냐고 캐물으면 몬도가네야 몬도가네,
하는 대답이 고작이었다.
남편이 노인들의 천국을 단념하고 나도 십자가를 다시 질만큼
건강을 회복해 갈 무렵 역시 시어머님의 친정 쪽에서
스님이 하는 좋은 수용기관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일러주었다.
왠지 남편이 또 솔깃해졌다.
“불교 쪽보다는 기독교 쪽에서 하는 기관이 안 낫겠어요?”
“그건 또 왜?”
“그냥요. 기독교 계통이 학교도 더 많이 짓고
경영도 더 잘하는 것 같아서요.”
나는 약간 근거가 희박한 소리를 했다.
“모르는 소리 말아요. 여지껏 내가 다녀온 데가 다
무슨 기도원 이름이 붙은 덴데 망령난 노인이나 정신병자를
다 함께 마귀 들린 걸로 취급하면서 마귀 쫓는 기도를 하는데,
마귀 쫓는 기도가 왜 꼭 마귀 목소리처럼 소름이 끼치던지……”
처음으로 남편한테서 그런 기관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를 들은 셈이었다.
“시설은 어때요? 살 만해요? 주위 환경은요?”
“그렇게 궁금하면 같이 가볼래.
우리가 무슨 일을 저지르려는지 당신도 어차피 알아야 할 테니까.”
이렇게 해서 오래간만에 동부인해서 기차를 탔고,
완행열차나 서는 작은 역에서 내린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포장 안된 시골길을 한 시간이나 달렸다.
기도원 대신 무슨 암자라는 이름이 붙은 그곳은
거기서도 한참을 더 가야 한다고 했다. 마침 가을이었다.
논에서는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경운기가 겨우 다닐 정도의 도롯가엔
코스모스가 한창 보기좋게 끝도 없이 피어 있었다.
우선 코스모스 길을 말없이 타박타박 걸었다.
남편이 윗도리를 벗어 들었다.
알맞은 기온인데도 그의 와이셔츠 등어리에 동그랗게 땀이 배어 있는 게
보였다. 나도 괜히 진땀이 났다.
조그만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 어귀엔 구멍가게도 있었다.
구멍가게 좌판엔 비닐통에 든 부연 막걸리와 라면이 진열돼 있을 뿐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남편이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엔 막걸리가 먹고 싶다고 씌어 있었다.
나는 너그럽게 웃었지만 속으론 까닭없이 낭패스러웠다.
남편이 좌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주인도 찾지 않고 막걸릿병 마개를 비틀었다.
등어리뿐 아니라 이마에도 번드르르 땀이 배어 있었다.
서늘한 미풍이 숲을 이루다시피 한 길가의 코스모스를
잠시도 가만 놔두지 않았다.
색색가지 꽃이 오색의 나비떼처럼 하늘댔다. 쾌적한 날씨였다.
그런데도 우린 둘 다 달군 프라이팬에 들볶이고 있는 것처럼
안절부절을 못했다.
막걸리를 병째 마시는 그가 조금도 호방해보이지 않고
조바심만이 더욱 드러나 보이는 걸 나는 쓰라린 마음으로 곁눈질했다.
“라면이라도 하나 끓여달랠까요?”
“당신 시장하오?”
“아뇨, 당신 술안주 하게요.”
“안주는 무슨…….”
나는 주인을 찾아 가게터 뒤로 돌아갔다.
좀 떨어진 데 초가가 보였다.
초가지붕 위엔 방금 떠오른 보름달처럼 풍만하고 잘생긴 박이
서너 덩이 의젓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여보, 저 박 좀 봐요. 해산 바가지 했으면 좋겠네.”
나는 생뚱한 목소리로 환성을 질렀다.
“해산 바가지?”
남편이 멍청하게 물었다.
“그래요. 해산 바가지요.”
실로 오래간만에 기쁨과 평화와 삶에 대한 믿음이
샘물처럼 괴어 오는 걸 느꼈다.
내가 첫애를 뱄을 때 시어머님은 해산달을 짚어 보고 섣달이고나,
좋을 때다, 곧 해가 길어지면서 기저귀가 잘 마를 테니,
하시더니 그해 가을 일부러 사람을 시켜 시골에 가서
해산 바가지를 구해 오게 했다.
“잘 생기고, 여물게 굳고, 정한 데서 자란 햇바가지여야 하네.
첫손자 첫국밥 지을 미역 빨고 쌀 씻을 소중한 바가지니까.”
이러면서 후한 값까지 미리 쳐주는 것이었다.
그럴 때의 그분은 너무 경건해보여
나도 덩달아서 아기를 가졌다는 데 대한 경건한 기쁨을 느꼈었다.
이윽고 정말 잘 굳고 잘생기고 정갈한 두 짝의 바가지가 당도했고,
시어머니는 그걸 신령한 물건인 양 선반 위에 고이 모셔 놓았다.
또 손수 장에 나가 보얀 젖빛 사발도 한 쌍을 사다가
선반에 얹어 두었다. 그건 해산 사발이라고 했다.
나는 내가 낳은 첫아기가 딸이라는 걸 알자 속으로 약간 켕겼다.
외아들을 둔 시어머니가 흔히 그렇듯이
그분도 아들을 기다렸음직하고 더구나 그분의 남다른 엄숙한 해산 준비는
대를 이를 손자를 위해서나 어울림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퇴원한 나를 맞아들이는 그분에게서 섭섭한 티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잘생긴 해산 바가지로 미역 빨고 쌀 씻어 두 개의 해산 사발에
밥 따로 국 따로 퍼다가 내 머리 맡에 놓더니
정성껏 산모의 건강과 아기의 명과 복을 비는 것이었다.
그런 그분의 모습이 어찌나 진지하고 아름답던지,
비로소 내가 엄마 됐음에 황홀한 기쁨을 느낄 수가 있었고,
내 아기가 장차 무엇이 될지는 몰라도 착하게 자라리라는
확신 같은 게 생겼다.
대문에 인줄을 걸고 부정을 기하는 삼칠일 동안이 끝나자
해산 바가지는 정결하게 말려서 다시 산반 위로 올라갔다.
다음 해산 때 쓰기 위해서였다.
다음에도 또 딸이었지만 그 희색이 만면하고도 경건한 의식은
조금도 생략되거나 소홀해지지 않았다.
다음에도 딸이었고 그 다음에도 딸이었다.
네 번 째 딸을 낳고는 병원에서 밤새도록 울었다.
의사나 간호사원까지 나를 동정했고
나는 무엇보다도 시어머니의 그 경건한 의식을 받을 면목이 없어서
눈물이 났다. 그러나 그분은 여전히 희색이 만면했고 경건했다.
다음에 아들을 낳았을 때도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똑같은 영접을 받았을 뿐이었다.
그분은 어디서 배운 바 없이,
또 스스로 노력한 바 없이도 저절로 인간의 생명을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분이었다.
그분이 아직 살아 있지 않은가.
그분의 여생도 거기 합당한 대우를 받아 마땅했다.
나는 하마터면 큰일을 저지를 뻔했다.
그분의 망가진 정신, 노추한 육체만 보았지
한때 얼마나 아름다운 정신이 깃들었었나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지금 빈 그릇이 되었다 해도
사이비 기도원 같은 데 맡겨
있지도 않은 마귀를 내쫓게 하는
수모와 학대를 당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남편이 막걸릿병을 다 비우기도 전에
길을 재촉해 오던 길을 되돌아섰다.
암자 쪽을 등진 남편은 더 이상 땀을 흘리지 않았다.
시어머님은 그 후에도 삼 년을 더 살고 돌아가셨지만
그 동안 힘이 덜 들었단 얘기는 아니다.
그분의 망령은 여전히 해괴하고 새록새록해서 감당하기 힘들었지만
나는 효부인 척 위선을 떨지 않음으로써
조금은 숨구멍을 만들 수가 있었다.
너무 속상할 때는 아이들이나 이웃 사람의 눈치 볼것없이
큰 소리로 분풀이도 했고 목욕시키거나 옷 갈아입힐 때는
아프지 않을 만큼 거칠게 다루기도 했다.
너무했다 뉘우쳐지면 즉각 애정표시에도 인색하지 않았다.
위선을 떨지 않고 마음껏 못된 며느리 노릇을 할 수 있고부터
신경안정제는 필요 없게 됐다.
시어머니도 나를 잘 따랐다.
마치 갓난아기처럼 천진한 얼굴로 내 치마꼬리만 졸졸 따라다녔다.
외출했다 늦게 돌아오면 그분은 저녁도 안 들고
어린애처럼 칭얼대며 골목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곤 했다.
임종 때의 그분은 주름살까지 말끔히 가셔 평화롭고 순결하기가
마치 그분의 그런 고운 얼굴을 내가 만든 양
크나큰 성취감에 도취했었다. <1985>
'한국단편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 김만중 - (4) | 2024.09.18 |
---|---|
왕치와 소새와 개미와 - 채만식 - (1) | 2024.09.11 |
표구된 휴지 - 이범선 - (3) | 2024.08.29 |
산 - 이효석 - (0) | 2024.08.23 |
역마(驛馬) - 김동리 - (1) | 2024.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