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문학

노벨문학상수상 소설가 한강 시(詩) 14편

하얀모자 1 2024. 11. 4. 00:09

 

 
한강 작가(시인)의 시 모음 14편
 

  1. 저녁 잎사귀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찾아온 것은 아침이었다

한 백 년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내 몸이
커다란 항아리같이 깊어졌는데

혀와 입술을 기억해내고
나는 후회했다

알 것 같다

일어서면 다시 백 년쯤
볕 속을 걸어야 한다
거기 저녁 잎사귀
다른 빛으로 몸 뒤집는다 캄캄히
잠긴다
 

  2. 거울 저편의 겨울 8

흰 지팡이를 짚은 백발의 눈먼 남자 둘이서
앞뒤로 나란히
구두와 지팡이의 리듬에 맞춰 걷고 있었다

앞의 남자가
더듬더듬 상점 문을 열고 들어가자

뒤의 남자는 앞의 남자의 등을
보호하듯 팔로 감싸며 따라 들어갔다

미소 띤 얼굴로
유리문을 닫았다
 

  3. 저녁의 대화 / 한강

죽음은 뒤돌아서 인사한다.
『너는 삼켜질 거야.』
검고 긴 그림자가 내 목줄기에 새겨진다.

아니,
나는 삼켜지지 않아.

이 운명의 체스판을
오래 끌 거야,
해가 지고 밤이 검고
검어져 다시
푸르러 질 때까지

혀를 적실 거야
냄새 맡을 거야
겹겹이 밤의 소리를 듣고
겹겹이 밤의 색채를 읽고
당신 귓속에 노래할 거야

나직이, 더없이,
더없이 부드럽게.
그 노래에 취한 당신이
내 무릎에 깃들어
잠들 때까지.

죽음은 뒤돌아서 인사한다.
『너는 삼켜질 거야.』
검은 그림자는 검푸른 그림자
검푸른
그림자​
 

  4. 몇 개의 이야기 6 

어디 있니.
너에게 말을 붙이려고 왔어.
내 목소리 들리니.
인생 말고 마음, 마음을 걸려고 왔어.
저녁이 내릴 때마다 겨울의 나무들은 희고 시린 뼈들을
꼿꼿이 펴는 것처럼 보여. 알고 있니.
모든 가혹함은 오래 지속되기 때문에 가혹해.


  5. 거울 저편의 겨울 2 / 한강

새벽에
누가 나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인생에는 어떤 의미도 없어
남은 건 빛을 던지는 것뿐이야

나쁜 꿈에서 깨어나면
또 한 겹 나쁜 꿈이 기다리던 시절

어떤 꿈은 양심처럼
무슨 숙제처럼
명치 끝에 걸려 있었다

빛을
던진다면

빛은
공 같은 걸까

어디로 팔을 뻗어
어떻게 던질까

얼마나 멀게, 또는 가깝게

숙제를 풀지 못하고 몇 해가 갔다
때로
두 손으로 간산히 그러쥐어 모은
빛의 공을 들여다보았다

그건 따뜻했는지도 모르지만
차갑거나
투명했는지도 모르지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거나
하얗게 증발했는지도 모르지만

지금 나는
거울 저편의 정오로 문득 들어와
거울 밖 검푸른 자정을 기억하듯

그 꿈을 기억한다


한강, 「거울 저편의 겨울 2」,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6. 새벽에 들은 노래 / 한강

봄빛과 번지는
어둠 틈으로
반쯤 죽은 넋
얼비쳐
나는 입술을 다문다

봄은 봄
숨은 숨
넋은 넋
나는 입술을 다문다

어디까지 번져가는 거야?
어디까지 스며드는 거야?

기다려봐야지
틈이 닫히면 입술을 열어야지
 
혀가 녹으면
입술을 열어야지

다시는
이제 다시는

​ 
한강, 「새벽에 들은 노래」,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7. 저녁의 소묘 / 한강

어떤 저녁은 피투성이
(어떤 새벽이 그런 것처럼)

가끔은 우리 눈이 흑백 렌즈였으면

흑과 백
그 사이 수없는 음영을 따라

어둠이 주섬주섬 얇은 남루들을 껴입고

외등을 피해 걸어오는 사람의
평화도,
오랜 지옥도
비슷하게 희끗한 표정으로 읽히도록

외등은 희고

외등 갓의 바깥은 침묵하며 잿빛이도록

그의 눈을 적신 것은
조용히, 검게 흘러내리도록


한강, 「저녁의 소묘」,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8. 여름날은 간다

검은 옷의 친구를 일별하고 발인 전에 돌아오는 아침
차창 밖으로 늦여름의 나무들 햇빛 속에 서 있었다
나무들은 내가 지나간 것을 모를 것이다
지금 내가 그중 단 한 그루의 생김새도 떠올릴 수 없는 것처럼
그 잎사귀 한 장 몸 뒤집는 것 보지 못한 것처럼
그랬지 우린 너무 짧게 만났지
우우우 몸을 떨어 울었다 해도 틈이 없었지
새어들 숨구멍 없었지 소리 죽여 두 손 내밀었다 해도
그 손 향해 문득 놀라 돌아봤다 해도


한강, 「여름날은 간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9. 심장이라는 사물

지워진 단어를 들여다본다

희미하게 남은 선의 일부

 또는 ㄴ이 구부러진 데
지워지기 전에 이미
비어 있던 사이들

그런 곳에 나는 들어가고 싶어진다
어깨를 안으로 말고
허리를 접고
무릎을 구부리고 힘껏 발목을 오므려서

희미해지려는 마음은
그러나 무엇도 희미하게 만들지 않고

덜 지워진 칼은
길게 내 입술을 가르고

더 캄캄한 데를 찾아
동그랗게 뒷걸음질치는 나의 혀는


한강, 「심장이라는 사물」,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10. 새벽에 들은 노래 3

나는 지금
피지 않아도 좋은 꽃봉오리거나
이미 꽃잎 진
꽃대궁
이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

누군가는
목을 매달았다 하고
누군가는
제 이름을 잊었다 한다
그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

새벽은
푸르고
희끗한 나무들은
속까지 얼진 않았다

고개를 들고 나는
찬 불덩이 같은 해가
하늘을 다 긋고 지나갈 때까지
두 눈이 채 씻기지 않았다

다시
견디기 힘든
달이 뜬다

다시
아문 데가
벌어진다

이렇게 한 계절
더 피 흘려도 좋다

한강, 「새벽에 들은 노래 3」,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11. 피 흐르는 눈 

나는 피 흐르는 눈을 가졌어.

그밖에 뭘 가져보았는지는
이제 잊었어.

달콤한 것은 없어.
씁쓸한 것도 없어.
부드러운 것,
맥박치는 것,
가만히 심장을 문지르는 것

무심코 잊었어, 어쩌다
더 갈 길 없어.

모든 것이 붉게 보이진 않아, 다만
모든 잠잠한 것을 믿지 않아, 신음은
생략하기로 해

난막(卵膜)처럼 얇은 눈꺼풀로
눈을 덮고 쉴 때

그때 내 뺨을 사랑하지 않아.
입술을, 얼룩진 인증을 사랑하지 않아.

나는 피 흐르는 눈을 가졌어.
​​

  12. 피 흐르는 눈 2 

여덟 살이 된 아이에게
인디언 식으로 내 이름을 지어달라 했다

펄펄 내리는 눈의 슬픔​

아이가 지어준 내 이름이다

(제 이름은 반짝이는 숲이라 했다)

그후 깊은 밤이면 눈을 감을 때마다
눈꺼풀 밖으로
육각형의 눈이 내렸지만
그것을 볼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은
피의 수면​

펄펄 내리는 눈 속에
두 눈을 잠그고 누워 있었다


  13. 피 흐르는 눈 3 

허락된다면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초여름 천변
흔들리는 커다란 버드나무를 올려다보면서
그 영혼의 주파수에 맞출
내 영혼이 부서졌다는 걸 깨달았던 순간에 대하여​

(정말) 허락된다면 묻고 싶어​

그렇게 부서지고도
나는 살아 있고

살갗이 부드럽고
이가 희고
아직 머리털이 검고​

차가운 타일 바닥에
무릎을 끓고

믿지 않는 신을 생각할 때
살려줘, 란 말이 어슴푸레 빛난 이유

눈에서 흐른 끈끈한 건
어떻게 피가 아니라 물이었는지

부서진 입술

어둠 속의 혀​

(아직) 캄캄하게 부푼 허파로​

더 묻고 싶어

허락된다면,
(정말)
허락되지 않는다면,
아니,


  14. 피 흐르는 눈 4 

이 어스름한 저녁을 열고
세상의 뒷편으로 들어가 보면
모든 것이
등을 돌리고 있다

고요히 등을 돌린 뒷모습들이
차라리 나에겐 견딜 만해서
되도록 오래
여기 앉아 있고 싶은데​

빛이라곤
들어와 갇힌 빛뿐​

슬픔이라곤
이미 흘러나간 자국뿐

조용한 내 눈에는
찔린 자국뿐

피의 그림자뿐

흐르는 족족​

재가 되는
검은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