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탑
황 석 영
본대로부터 R에 :도착했을 때, 겨우 아홉 명의 병사가 맡은
무모한 임무를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본대에서 출발할 때는 그 지역이 몹시 중대한 전략적 가치를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네 명의 후보자 가운데 내가 선택되었던 것은 우연에 지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만족스립고 타당한 우연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미군 혼성 지원기지인 아메리칼 사단의
합동 기동순찰병으로서 마치 관광객과 같은 파견생활을 하였다.
그 미군기지는 해안을 따라서 모래밭 위에 엄청난 대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다. 내가 처음 LST로부터 상륙했을 때
모래먼지가 일고 있는 광대한 벌판 위에서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것은 거대한 고설의 산더미였다.
포탄 껍데기와 부서진 중장비들과 레이션의 깡통들이
벌겋게 녹슨 채로 곳곳에 쌓여 있었고,
주위에는 야전변소의 인분과 식량 찌꺼기를 태우는 기름연기가
검게 올라가고 있었다.
이 대륙에서의 첫밤을 함상(艦上)에서 새웠을 때,
검고 짙은 어둠 저 너머로 아시아의 또다른 불빛들이 명멸하고
있었는데, 집들의 창문에서 새어나오는 빛이 아니라
탐조등과 조명탄과 작렬하는 포탄, 그리고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헬리콥터의 불빛이었다.
그때 나는 상갑판의 쇠줄 난간에 그네를 타듯 걸터앉아서,
약간의 기대와 설레는 가슴을 진정하며 파도를 타고 내게로 전해오는
저 미지의 대륙의 아우성과 고통을 감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새벽이 되어 낯선 태양이 바닷속으로부터 솟아올랐을 때,
불어오기 시작한 바람 속에 내가 제일 처음 맡은 냄새는
소금 냄새나 대지와 숲의 냄새도 아닌 가솔린 냄새였다.
내가 순찰병의 명을 받고 파견대를 찾아가던 중 길을 잃었던 일은
잊어버릴 수가 없다. 나는 하역작업이 한창인 부듯가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아직 위장 무늬가 선명한 새 정글복을 입고 있었으며,
여기서는 이미 구식인 엠원 소총을 느슨히 걸쳐메고 한쪽 어깨에는
내가 지급받은 보급물로 가득 찬 촌스러운 의낭을 땅에 질질 끌듯
짊어지고 있었다.
나는 냉동창고가 있는 A레이션 창고 앞의 상자들 사이를
두리번거리며 오르내렸다. 철모에 눌린 이마와 관자놀이에서
땀이 철철 흘러내렸고, 어깨에서 자꾸 미끄러지는 의낭의 끈과
소총의 멜빵을 번갈아 치켜올려야만 했다.
나를 지켜보던 밤색 머리털의 앳된 위병 근무자가 다가와서
도와줄 수 있겠느냐 물었다.
내 소속과 찾아가려는 부대 이름을 말했더니 그는 웃으면서
여기가 보급창임을 알려주고 파견대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주위에는 벌써 곳곳에 불이 켜지고 캔틴 컵과
프라이팬을 든 병사들이 식당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는 친절하게도 여러차례 애를 쓰면서 전화를 걸었고
드디어 나를 위한 차가 보내진다는 연락이 왔다.
그동안 위병은 나를 자기 근무석에서 쉬도록 해주었다.
그는 내게 샌드위치 한조각을 나눠주며 뭐라고 말했는데
부드러운 햄을 씹어넘기고 있는 동안 내 귀에는
로온리!라는 말이 들렸다. 나는 그때 아이처럼 눈물이 핑 돌았고,
마실 것을 권하는 그 밤색 머리털의 위병의 얼굴도 약간 시무룩해져
있었다. 그는 한손으로 먼곳을 가리키듯 하면서 말했다.
―여긴, 집에서 아주 멀다네.
순찰대의 한국군 책임자는 하사였는데 제일 졸병이었던 나 외에도
서넛의 대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나는 날마다 작전차량의 TCP 근무와 1번 도로를 기동순찰하는 것으로
일과를 보냈다. 먼지 속에서 코끝에까지 내리덮이는
플라스틱 글라스를 쓰고 쉴새없이 오가는 중장비들의 행렬과
LVT, 탱크, 호송행렬 들을 안전한 도로로 안내했다.
오후에는 두 명의 미군 순찰병과 함께 나는 뒷자리의 30밀리 기관총
좌에 앉아서 1번 도로를 달렸다.
우리는 촌락을 정찰중인 수색대로부터 포로를 인계받기도 하고,
군사정보대를 찾아가는 첩자를 호송하거나, 도로에 매설된 부비트랩을
발견해서 공병대에 연락하기도 했다.
저녁 에 귀대할 때쯤에는 내 드러난 팔과 목덜미와 글라스 아래편의
턱 언저리와 뺨에 두터운 붉은 흙의 켜가 덮여 있었다.
한번은 얼마큼 되나 하고 손톱으로 긁어모았더니,
큰 자두알만한 흙덩이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본대의 대원들과 보병들을 생각했고,
가끔 마음의 갈등이 있었을 때엔 내일은 꼭 작전엘 나가리라, 가리라,
하고 결심했던 것이다.
가슴에 뭔가 무거운 것이 얹힌 듯한 날에 나를 찾아들었던
불면의 밖이 있었다. 고향에서 좋지 않은 소식을 받았을 때,
또는 포로수용소에서 여자 포로나 소년병들을 봤을 때,
대량살륙의 흔적이 남은 밀림 속의 협로를 순찰했을 때라든가,
순찰차 위에 저격받은 아군 시체를 싣고 올 때,
그리고 가장 나를 괴롭혔던 것은 파견대의 책임조장인 하사와 나 사이에
있었던 알력이었다.
그는 내가 PX에서 위조 카드로 수없이 냉장고와 텔레비전을 사 내오기를
명했고, 모종의 구멍 뚫기를 재촉했던 것이다.
구멍 이란 보급병들과의 접선을 의미했다.
그는 우리에게 본때를 보인다는 식으로 아침마다 모래펄 위를
기어가게 했고, 우리들에게 미군 녀석들의 활기 있는 사기 속에서
깊은 열등감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나는 장교가 되지 못한 것과 작전에 지원하지 않은 것을 날마다 후회했다.
어쨌든, 기지에서의 나의 파견생활은 전투를 하고 있던 동료들에 비해서
마음은 불편했지만 관광객과 같은 나날이었다.
깡통식품이 아닌 요리된 뜨거운 식사를 두 끼나 먹을 수 있었고,
밤마다 샤워를 하고 나서 모기장을 친 에어베드 위에서 잠들었다.
한달에 두 번인 비번날은 냉맥주를 마시거나, 해변 노천극장에 위문쇼를
보러 갈 수도 있었으며 간혹 여자를 살 수도 있었다.
처음엔 어느 정도 거리꼈지만, 낯익은 얼굴이 생기고부터는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물론 늘씬하게 빠졌다든가 달콤한 웃음을 지어낼 줄 안다거나 하는 것은
바랄 수도 없는 농촌의 피난민 부녀자들이었다.
캄캄한 판잣집의 어둠속, 대나무로 엮은 침대 위에서 퍼덕이는
갈색의 작은 살덩이는 내 몸처럼 슬펐다.
석달 동안의 파견생활 중에 내가 촌락에서 겪었던 위험을 빼놓고는
호화판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실탄을 장전한 45구경 권총을
한손에 쥐고 여자의 배 위에서 그짓을 하며 습격의 밤을 보냈다.
적들은 마을을 샅샅이 뒤지고 지나갔으나 나는 발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원대복귀된 것은 우리 여단이 북으로 이동함으로 해서 늘어난
외곽 경비 때문에, 파견된 인원의 귀대가 절대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곧 몬순이 닥쳐왔지만, 적의 공세가 시작되고 있어서
우리는 주요 도시의 방어를 위해서 남으로부터 북상하라는
작전명령을 받은 것이다.
사령부가 의도하는 것은 평정된 우리 지역의 치안을 정부군으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월초부터 면밀하게 계획된 철수가
조심스럽게 시작되었고, 전 여단은 중대별로 새로운 지역에 투입되어갔다.
정부군에게 여단본부 지역을 인계하기까지의 마지막 일주일 동안은
소속 구분 없는 2개 중대 병력의 최종 후발대가 담당하게 되었는데,
내가 받은 넘버는 재수없이 후발대 속에 끼여 있었다.
내가 본대에 도착하기 전에 R 포인트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적은 곧 물러갔지만 몇명의 전상자가 생겼으므로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서
누군가 차출되어야만 했다. 파견되었던 인원은 여섯 명이었는데,
본대의 동료들은 모두 외곽 방어에 나갔거나 선발대로 떠났기 때문에
우리들 중 누군가 R에 가야 할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제비뽑기를 제의했고, 모두들 찬성했다.
국도로 나가는 도로 정찰차가 출동하기 직전에
우리는 잠깐 카드놀이를 했다. 염병하게 재수없는 날이었다.
내가 쥔 패는 끗발이 제일 약했고, 중대장에게 출발 신고하러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앞에 말했듯이 나는 지난날의 여행자와 같던 파견생활을
떠올림으로 해서 만족한 결론이라고 자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파견생활중에도 여러번 작전에 참여했거나,
모두들 더럽게 조건이 나쁜 시기를 겪었던 것이다.
――잘해라, 이사갈 때 만나자,라고 그들은 말하면서 내가 준비하지 못했던
여분의 탄창과 연발상태가 불량한 내 소총을 자동화기로 바꿔주었다.
내가 R 지역에 관해서 아는 것은 국도가 세 갈래로 갈라지는
교통 통제소라는 것과 부근에 모두 철수해버린 보급대대의
빈터가 있다는 것뿐이었다.
중대 선임하사가 순찰 지프 위에 나를 태우고 국도를 달려내려갔다.
운전병은 저격이 두려워서인지 핸들 위로 얼굴을 바싹 낮추고
악셀을 한껏 밟았다. 질주하는 차 옆으로 짙은 밀림의 그늘들이
음산하게 지나갔다.
도착했을 때, 분대원들은 식사중이었다.
마침 월남 정부군의 컨보이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들은 구름 같은 먼지에도 아랑곳없이 음식을 벌여놓은 채로
맛있게 먹고 있었다. 장갑차와 트럭 위에 올라앉은 정부군들은,
국도에 외롭게 남아 있는 몇명의 외국군 해병대를 보자
엄지를 꼿꼿이 세워 보이면서 지나갔다.
“새끼들 엿이나 먹어라!”
지프차 앞으로 다가오던 하사관이 내뱉듯 중얼거렸다.
그의 머리털은 길게 자라서 목덜미를 덮고 있었고,
찌푸려진 실눈이 번쩍였다. 검게 그을은 그의 얼굴에는 소년과 같은
천진한 표정이 깃들여 있었다. 그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선임하사는 내게로 눈을 주며 말했다.
“보충병이다.”
“겨우 한명입니까?”
나이 어린 하사관은 이빨 사이로 멋지게 침을 내쏘면서 투덜댔다.
“아시겠지만 우리는 보충병 한사람 포함해서 겨우 아홉 명입니다.
그래도 본대는 여기보다 상황이 나을텐데요. 저따위 쓸데없는 걸
지키는 데 겨우 아홉 명이 목을 걸구 있다 그 말입니다.”
하면서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선임하사가 말했다.
“명령이다. 인원은 모자라겠지만 잘 운영 해봐.”
“차라리 매복이라면 어떻게 되겠지만 이건 정말 쓸데없는 노릇입니다.”
선임하사는 분대장의 불평을 건성으로 흘리면서
운전병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달려가는 차 위에서 그는 소리쳤다.
“꾹 참구, 앞으루 사흘만 버티라구!”
하사는 찌푸린 얼굴 그대로 절도있게 경례를 붙였다.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나는 길 가운데 우뚝 서 있는 하사 옆으로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파견대에서 귀대한 오상병입니다.”
그는 나를 힐끔 쳐다보고 나서, 지어낸 듯이 나직하게 말했다.
“정식으로 신고해.”
“네?”
나는 아니꼬운 느낌이 들었다. 애송이 같은 신병 하사 자식.
“파 대에선 화려했겠군. 신고해!”
나는 그의 정면으로 돌아가서 꼿꼿이 부동자세를 취한 다음
소속 계급 성명을 대고 본대로부터 R에 보충명령을 받았기 이에 신고함,
어쩌고저쩌고 길게 늘어놓았다.
그 사이에 하사는 윗주머니에서 굵다란 시가를 꺼내어
여린 입술 끝에 물었으며 주위에서 분대원들의
킥킥거리는 웃음소리를 들었다. 나는 귀끝이 화끈 달아올랐다.
줄을 지어 달려가던 월남군의 소송행렬이 모두 지나가자
황혼 무렵의 국도는 병원의 복도처럼 텅 비어버렸고,
드높게 떠올랐던 연막 같은 먼지는 밀림 쪽으로 불려 날아가버렸다.
나는 하사가 어술렁거리며 내 앞을 떠날 때까지 바보처럼 꼿꼿이 서 있었다.
혀끝에 쌍소리가 얹혀서 맴돌다가 목구멍 속으로 꿀꺽 넘어갔다.
분대원들 틈에서 문상병이 손짓하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그의 옆에 가서 앉았다.
"분대장은 어떤 놈이냐, 속이 틔었냐, 아니냐?”
"글쎄…… 애송이의 똘똘이 새끼라구나 말할까.”
"유능하니?“
“저 새낀 융통성이라군 눈곱만치두 없지. 하사관 교육대에서
우등한 녀석이야. 우리 생명을 보관하구 있다.”
“개새끼, 여긴 교육대가 아니란 걸 잘 알 텐데.”
문상병이 웃었다.
“저치는 아마 상황만 좋아지면 제식교련이라두 시킬걸.”
문상병은 내 몫의 야전식량을 건네주고, 내가 식사를 하는 동안
자기의 M16 자동소총을 삼등분으로 분해해서 열심히 닦았다.
그는 재빨리 먹어치우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너 월남군 차가 지나가면, 그걸 집어타구 기지루 내빼라.”
나는 어리둥절해서 농담이라기엔 아주 진지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기지에 가면 미군 수송선이 있잖나.
배를 타구 이동지역으루 꺼지란 말야.”
“무슨 소리야.”
“나는 R포인트의 대원이었지만, 넌 재수가 없어서 보충된 거 아냐.”
“나중에 군재에 올라가서 총살당하면 너 책임질 테냐?”
말하고 나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우리는 웃었다. 문이 말했다.
“피 보는 건 마찬가지다. 총살은 괜찮지만, 잡히면 찢겨 나무에 걸린다.
우리가 뭘 하구 있는지 아니?”
그는 한쪽 눈을 감고 총구 속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참모들은 미쳤어.”
그가 고개를 돌리며 분해된 총대로 도로 건너편을 가리켰다.
“가서 봐라. 그리구 생각해봐. 정신이 온전한 놈들의 짓인가를 말이지.”
나는 식사를 하다 말고 깡통을 손에 든 채 일어섰다.
도로 건너편에는 블록으로 지은 세 채의 초소가 있었는데,
보급대대의 경비초소였던 자리였다. 초소가 부대에서 따로 독립되어
지어져 있던 것을 보면 꽤 중요한 무엇이 있는 것 같았으나,
세 갈래로 갈라진 길의 한복판에 약간 널찍한 빈터와 초소 뒤로
울창하게 자란 숲이 보일 뿐이었다.
“아무것두 안 보이는데, 길을 지키려구 초소를 지었을 리는 없구.”
역시 문상병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구 보니까, R의 임무는 뭐야? 도대체 모두 철수해버린
보급대대 앞 노상을 지킬 무슨 이점이라두 있니?”
“탑이 있거든.”
“탑이라니…… ”
“그전엔 여기 사원(寺院)이 있었어. 무너진 사원을 불도저루 밀어낼 때
주민들의 반대루 탑만 남겨놓았거든. 월남인들의 감정에 큰 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부대 진주 초기부터 지켜왔던 거야.
우리는 저 탑을 적이 옮겨가지 못하도록 무사히 보존했다가
정부군에게 물려주는 거지. 저따위를 지켜야 된다구 생각해낸 자들은
바보야. 전략적 가치와 정치적 가치가 어떻다느니 하지만,
이놈의 전쟁은 시작부터가 전략적이라 그 말이지.”
장난감과 같은 작은 탑을 지켜야 하는 일이란 걸 알았을 때,
나는 지프에 실려 이곳으로 오면서 느꼈던 공포감마저도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로, 그것은 탑이라는 거창한 말을 붙이기엔 너무나도 초라한 물건이었다.
초소와 숲 사이의 마당에 사람 두 키 정도의 높이로 세워져 있는
보잘것없는 돌덩이에 지나지 않았다.
돌은 조잡한 솜씨로 여섯 모 비슷하게 다듬어졌고,
중간중간에 희미하게 지워진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윗부분을 관찰하면서 나는 차츰 그렇게까지 초라한 것은
아님올 깨닫게 되었다. 탑의 위층부터 춤추는 듯한 사람들의 옷자락에
둘러싸인 부처의 좌상이 부조(浮彫) 되어 있었는데,
그 꼭대기 부분만은 진짜인 듯했고,
나머지 부분은 나중에 보수한 것 같았다.
부녀들의 옷자락과 긴 띠와 손가락들의 윤곽은 아주 섬세했으며,
부처님의 거의 희미해진 조상은 그래서 더욱 신비로워 보였다.
짐작컨대는 이것이 지방민의 사랑과 애착의 대상이리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포연과 총성 이 없었을 때, 빛나는 햇빛 아래
나무 그림자의 옷을 입은 사원에서 종이 울려퍼지고,
지나는 농부와 아이들과 가축들은 탑을 향하여 경건하게 부릎을 꿇었으리라.
일부해방전선은 그들의 정치적 선전을 위하여
탑의 탈환을 목적으로 할 것이라는 예상은 오래 전부터 있어온 모양이었다.
월남군 수뇌부는 그 점에 착안하였고, 우리 부대가 진주했을 때,
참모들에게 건의 했을 것이다. 나는 전에도 순찰중에 여러 촌락들을
지나다니면서 그들의 종교적 열의에 놀랐었다.
곳곳마다 집 앞에는 그들의 서서히 타오르는 듯한 평화에의 염원처럼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는 향로와 내실에 불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향은 줄기찬 기도였을 것이다.
그들이 집과 토지를 버리고 비교적 안전한 도시로 몰려들 때에도,
가족 중의 누군가는 소중히 향로를 그의 가슴에 운반하고 있었다.
강과 교량이나 유리한 지형처럼 탑은 누가 보기에도 전략적 가치가 있으며,
그것을 차지하는 쪽은 주민들의 신뢰와 석가여래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을 것이었다.
그러한 양편의 관심 으로 해서 탑은 이 전쟁의 한 상징적인 물건이었다.
우리들이 모여서 식사를 하던 곳은 전에 보급대대의 외곽선이었던
모래자루로 쌓아올린 방벽 앞이었다.
이제 철수해버리고 폐허가 되어 있는 대대의 건물들은
우리의 경계 대상으로서 최전방이었다. 막사로 쓰던 목조건물과
수많은 전투 벙커들은 그보다 훨씬 뒤에 빽빽이 들어찬 밀림에서
침투해 들어올 게릴라들의 확보지나 은폐물로서 이용될 가능성이 많았다.
PS판과 철조망으로 차단된 대대의 남쪽을 국도를 따라 내려가면
여러가지 무늬와 색깔이 칠해진 주민들의 백토집 마을이 있었고,
맞은편으로는 역시 국도 연변으로 낙화생밭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마을과 낙화생밭이 평행으로 가다가 끝나고 다리가 있었다.
작전지도에 의하면 그것은 B고량이며 미군들이 LVT 세 대를 가지고
강변을 경계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최후 방어선은 탑을 둘러싼 세 채의 초소를 중심으로
가슴까지 오도록 파인 배수로를 참호로 이용하게 되어 있었다.
거기서 보면 정남쪽으로 B교량이 있으며 서쪽으로 보급대대의 폐허,
동쪽으로는 세 갈래로 갈라진 국도의 지선 너머로 낙화생밭의 끝이 보이고
밭 뒤로는 울창한 대숲이 보였다.
대나무숲 후방에 고지가 있는데,
좌표상으로는 부근 평지를 제압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문의 얘기로는 분대장의 간곡한 요청에 의하여 고지에 지원사격조가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동쪽의 간선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2개 중대가 지키고 있는 허술한 여단본부가 나오게 되어 있었다.
탑 뒤의 우리 최후 저지선의 후방은 낮은 바나나숲이 띄엄띄엄
자라고 있어서 한사람의 경계로 충분했고,
우리들이 식사를 하던 모래 방벽 앞에 두 명의 청음초병이 배치되어야 했다.
나머지 다섯 사람들은 배수로에서 말굽형의 화기 진을 치기로 했다.
나는 탄창의 용수철과 약실을 검사하고, 자동소총의 활동 부분에
기름을 쳤다.
어느 분대원이 겁도 없이 민가에서 토주(土酒) 가 가득 담긴 항아리를
날라왔다. 원래 경기관총 사수인 그는 작전중에도 포복하면서
귀대 후 탄약통에 담아 먹을 김칫거리로 배추와 고추를
가스 마스크집에 따넣는다는 먹성이 끈질긴 친두였다.
우리는 마시다 남은 술을 수통에 하나 가득씩 나누어 채웠다.
사수 녀석이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목조건물을 뜯어가게 해달라구 그러더라.”
“거저 뜯어가겠다던?”
“아니, 내일이 설이쟎나. 닭을 잡아주겠대.”
주민들은 대대의 목조건물들과 벙커의 굵직한 재목이며
철근을 탐내고 있었다. 튼튼한 방공호를 짓는다든가 땔감으로서 재목은
그들에게 귀한 것이었다. 울창한 밀림 가운데 살면서도
주민들은 나무를 가공해볼 엄두를 내지 못해서 음식을 요리할 때에도
부대 주변에서 주워온 레이션상자라든가 쓰레기종이들을 곧잘 땔감으로
사용했다. 하사가 우리들에게로 걸어왔다.
“대대지역은 이미 정부군의 재산이다. 아무도 손댈 수 없어.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발포하게 되어 있어.”
“놈들의 재산이 어디 있어요. 우린 여길 뜨는데.”
“자, 해가 있을 때 모두들 집을 짓자.”
하사는 내게 샌드백 방벽 앞의 청음초 근무를 명했다.
그는 병사들을 곳곳에 배치했다. 도로를 가로질러 원형 철조망을 치고,
샌드백을 운반해다가 배수로 위에 쌓았다.
“그 녀석을 끌구 나와.”
하사가 첫번째 초소 안을 손짓했다. 병사 하나가 뛰어들어가서
손을 뒤로 묶인 삼십세쯤의 사내를 끌고 나왔다.
사내는 검은색 파자마에 타이어 고무로 만든 샌들을 신고 있었다.
그의 팔목과 다리에는 부스럼이 여러 군데 곪아 있었으며,
안질에 걸려서 눈물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는 컴컴한 초소에서 갑자기 바깥으로 끌려나오자 눈을 가늘게 뜨고
재빠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건 뭐야, 포로냐?”
나는 함께 청음초로 배치된 소총수인 일등병에게 물었다.
“인질이죠. 어제 전투에서 잡았습니다.”
“왜 수용소루 후송 안했지?”
“수용소 같은 건 없어요. 우리두 잡히면 피차 마찬가집니다.
수용소는 멀리 이동해버렸으니까요. R을 철수할 때 처치해두 좋다구
부대에서 연락이 왔다는군요.”
“적의 사격을 막자는 셈인가.”
“탑의 방패막이죠.”
인질은 탑에 묶였고, 우리가 시킨 대로 얌전히 앉아서 먼 숲속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부대의 폐허 너머 컴컴해진 밀림 위에
적도의 태양이 잘 익은 망고처럼 떠 있었다.
습지에서는 도마뱀들의 울음소리가 끓어올랐고,
숲속에서 원숭이들의 아우성소리가 들렸다.
날카롭고 높은 소리와 단조로운 깩깩거림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하사가 저고리를 벗은 맨살 위에 방탄조끼만 걸치고,
머리에는 철모 대신 MARINE이라 새긴 붉은색 산악병 모자를 쓰고,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도로를 건너왔다. 그는 한손에 PRC6 무전기를
들고 와서 우리 옆에 놓았다. 하사가 말했다.
"청음초 근무중에 이상이 있으면, 송수화기의 통화 스위치를 눌러서
두 번 축음을 보내도록.”
내가 그에게 물었다.
“언제까지입니까? 우리가 여길 지키는 게……”
“중대가 철수할 때까지.”
그의 대답은 막연했다. 언제 철수할 것인가 물으면,
그는 정부군에게 인계할 때까지라고 대답할 것이고,
언제 인계하는가를 물으면 상부의 명령에 따라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꼭두각시 같은 자식.
“분대장님, HQ에서 호출입니다.”
“누군데?”
“중대장입니다.”
“네가 직접 교신해. 뭐야, 병력이라도 보충시키겠다는 건가.
아니면 작전이 변경 됐으니 철수하라는 거냐?”
“좌표를 불러 달랍니다.”
“네가 지도 보구선 중요 지점을 읽어줘. 포라두 쏴준대?”
“81밀리 2문이 배당됐다는데요.”
“있으나마나야.”
하사가 전방의 대대지역 너머로 이미 짙은 어둠이 깔려 있는 숲속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쪽으루 들어오면 손쓸 방도가 없어.”
하사가 돌아간 다음 소총수와 나는 전기 충전식 방향지뢰인 클레이모어를
샌드백의 방벽 너머 전방에다 묻었다.
“어제 전투는 아주 치열했던 모양이지?”
“전투가 아니라, 테러였어요. 우리는 총 한방 쏘아보지 못하고 당했어요.“
“밤에 그랬어?”
“아니, 대낮…… 모여앉아 병기 손질을 하구 있는데…….”
차량도 뜨음해졌고 매미가 요란하게 울어대는 한낮에
먼곳에서 오토바이가 질주해왔다. 그들은 달려오는 오토바이가 일으켜놓은
높다란 먼지를 무심히 바라보면서 앉아 있었다.
뒷좌석에 착 달라붙은 듯 타고 있던 사내가 모자를 벗었는가 했는데,
그의 쳐들어진 손아귀에서 감자 같은 것이 날아왔다. 누가 외쳤다.
수류탄이다! 폭음이 일어나자마자 남쪽 도로변의 비어 있는 민가에서
소총의 사격이 쏟아져왔다. 몇 사람이 더 쓰러졌고,
약삭빠른 사수와 조장이 집의 배후를 우회해서 수색하고
채 달아나지 못한 포로를 잡았는데, 그는 지도와
권총을 소지 한 것으로 미루어 지휘자일 거라는 얘기였다.
우리는 담배를 끄고, 탄띠에서 수통을 꺼내어 곰팡내 나는 토주를
조금씩 마셨다. 석양은 밀림의 나무 사이로 갈가리 흩어져 보이다가
금시에 어둑어둑해졌다.
“오상병은 뭐 했어요?”
소총수가 물었다.
“순찰병이었어.”
“군대 오기 전에 말요.”
“글쎄! 돌아다녔지.”
“상사 했소?”
"아니, 그냥 에서 나가 있었어.”
“뭐할 작정이쇼? 돌아가게 되면…….”
"제대하구 봐야지, 모르겠는걸. 전쟁이라두 터지면 야단인데.”
“거긴…… 이따위 전쟁은 다신 안 일어나길 바라야죠.
난 잘 모르지만 식구들이 무척 고생 했답디다.”
“그때 몇 살이었는데?”
"두살, 줄곧 업혀다녔거든요.”
"나는 식구들을 걸어서 따라다녔어. 겨울에 동상이 걸려서 고생 많았지.”
“좀 자두쇼. 그동안 나 혼자 근무할 테니까, 나중에 교대합시다.”
“잠이 안 오겠는데.”
“탈영만 안했다면 나는 지금 제대해서 고향에 있을 텐데.”
“사고자 출신이야?”
“사단 영창에서 나오자마자, 여기루 명령났소.
가면…… 수당받은 걸루 땅을 사서 염소나 길러야지.”
“자, 이젠 그런 얘기 집어치우자.”
나는 어느 결에 얘기 속으로 깊이 끌려들어간 것에 짜증이 났다.
그런 말을 지껄일 때의 허망한 느낌이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만약에 돈이 많이 생긴다면, 만약에 내가 살아남는다면,
만약에 늙지 않는다면, 만약에 내가 포로가 된다면,
그래서 탈출한다면, 하는 식으로.
“오상병은 그런 작은 일두 바라지 않는 모양이오.”
“말해봤자, 김만 새지 뭐.”
소청수와 나는 한참 동안 잠잠했고, 나는 여러가지 공상들을 떠올려
그것을 껌처럼 야금야금 씹으면서 아꼈다.
“들어봐! 저게 무슨 소리야.”
먼곳에서 대통을 연속적으로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차츰 가까워지면서 숲 언저리에 퍼져갔다.
이곳저곳에서 목탁 때리는 것 같은 소리가 함께 어울렸다.
“적이 왔소.”
소총수가 놀이쇠를 후퇴시켰다가 철컥 밀어올리면서 실탄을 쟀다.
소리가 길게 연결되다가 일시에 끊기고, 잠깐 사이를 둔 뒤에
호각 소리가 삐익, 하고 날카롭게 들려왔다.
여러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한꺼번에 일어났다가 멎고 나서 아주 조용해졌다.
“어젯밤에도 저애들은 우릴 밤새껏 놀렸어요.”
다시 여럿의 고함소리와 타악기의 연속음이 계속 들려왔다.
소리는 또 그치고, 일종의 예리하게 긴장된 정적을 사이사이에
준비하고 있었다. 그 정적이 우리를 몹시 초조하게 했다. 내가 말했다.
“어쩔 작정일까, 매일 이 모양으루 밤을 새우기만 하면…….”
“적은 마지막으루 한판 겨룰 셈예요.
그때까지는 우릴 환장하게 만들자는 거겠지.”
“숲속으로 꼬여들이려는 걸지두 몰라.”
“며칠 동안 밤새껏 듣게 되면, 누구라두 새벽쯤엔 아주 돌아버릴 거요.”
한사람의 구령 붙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뒤따라 여럿의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이상한 잔치소리는 밀림을 넘고 우리들의 초소 위로 불안하게 덮쳐왔다.
무전기에서 축음이 들렸다. 나는 송수화기를 귀에 갖다댔다.
통신병 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청음초, 말없이 듣기만 해라. 명령 내리기 전에는 절대 사격하지 말 것.
아무리 위급해도 사전에 보고하기 바람.”
먼 하늘에서 번쩍이는 섬광이 지나갔고, 뇌성이 뒤를 이었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또 비가 올 모양인데요.”
“우비는 있나?”
“우리가 가진 건 해군용 반우의뿐요. 모기약 바르겠소?”
“싫어, 몸에 바르는 건 질색야.”
끈적한 올리브 기름기와 지독한 냄새 때문에
나는 바르는 모기약을 중오했다. 말라리아에 걸린다 해도
그걸 바르기보다는 차라리 마셔버렸을 것이다. 비가 내리기 직전은
밀림의 모기들이 제일 설칠 무렵이었다. 모기들이 악착같이 날아 덤볐다.
나는 그것들이 내 피를 실컷 빨도록 내버려둔다.
얼굴과 드러난 팔뚝이 온통 부풀었다.
가려움 때문에 팽팽히 곤두선 신경이 느슨해지는 느낌 이었다.
유리알이 맞부딪치는 듯한 투명 한 총소리가 났고,
숲 사이를 흘러가는 여운이 들렸다. B교량 쪽에서 미군들이
경기관총을 볶아대기 시작했다. 쌍방이 쏘아대는 소총소리와,
자동소총의 탄환 튀는 소리가 파문처럼 그곳에 번져나갔다.
유리창이 깨어져나가는 것 같은 총류탄의 날카로운 파열음이
장단을 맞추었다. 소총수가 말했다.
“적은 교량을 파괴 하려는 거예요.”
“양키들두 지친 모양이군. 적들은 포를 가지구 있나?”
“그애들이 무반동포루 우릴 쓸어버리는 일은 간단하지.
그렇지만 못 쏠 거요. 우리가 지키는 게 바루 우릴 방어해주고 있거든.”
“탑이…… 아니면 인질이냐?”
“둘 다죠. 인심을 얻으려면 탑을 파괴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구 재들두 전우애가 강하죠.”
총성이 계속되었고 다리 부근의 숲은 탄환과 유탄의 불똥들이
휘황하게 반짝였다. 양쪽 모두 치열한 근접 사격을 벌이고 있었다.
조명탄이 계속해서 오르더니, 가느다랗게 헬리콥터의 프로펠러 소리가
머리 위로 지나갔다. 두 대의 건십이 번갈아 대지공격을 시작했다.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다. 폭음과 흰 연기가 솟아올랐으며
뭔가 한꺼번에 무너져버리는 듯한 굉장한 소리가 들려왔다.
교량 쪽의 하늘에서 불꽃이 높이 솟아올랐고,
주위가 일시에 고요해질 때까지 불빛은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며
타오르고 있었다. 오랫동안 상공을 맴돌던 건십은 밀림 위로 날아가서
중기관포의 불꽃놀이를 한 다음 미련이 남은 듯
천천히 선회하면서 돌아갔다. 나는 속삭였다.
“다리가 폭파됐나보다. 적은 그게 목적 이었어.”
“멍청한 놈들! 이제 월남군의 이동수송망은. 마비된 거나 다름없어요.
작전은 지연될 겁니다.
‘우리의 철수도 그만큼 늦어질 거야.“
게릴라들은 R 근처엔 접근하지 않는 것 같았다.
타오르던 불꽃이 서서히 사그라져갔고,
밀림에서는 짐승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파도가 아득한 벼랑 끝을 때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물결의 굽이굽이가 뒤를 이으면서 자꾸만 밀려오듯
밤 바다처럼 깊고 어두운 나무숲 위로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굵은 빗방울이 팔뚝과 목 위에 떨어졌다. 철모를 때리는 빗방울 소리로
귓바퀴 속이 가득 찼다. 소총수와 나는 반우의를 꺼내 입었지만,
젖어가는 바지에서 느껴지는 한기 때문에 저절로 이빨이 부딪쳤다.
소총수는 주위가 빗소리에 가득 차자 비옷 안으로 손을 넣어
상의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트랜지스터를 최저음으로 틀었다.
심야의 음악방송이 아득하게 먼곳에서 떠올라왔다.
꿈결 같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여자는 부드럽고 졸린 듯한 목소리로
노래를 했다. 철모에서 빗방울이 줄지어 떨어졌다.
전방은 온통 뽀얀 빗줄기 때문에 관측하기가 어려워졌다.
번개가 지나칠 적마다 곧게 내리퍼붓는 빗줄기와 구부러진 나무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소총수와 나는 우리가 고향에서 먹었던 온갖 종류의
음식 얘기를 무의미하게 지껄이기 시작했다. 내일은 설날이다.
고향의, 손님과 같은 함박눈이 눈앞에 흩날렸다.
“동치미 국물은 어때요?”
“지붕 끝에 달린 고드름이 생각나는군. 여기 아침은
언제나 명쾌하지가 않아. 우리네 여름 아침은 정말 아름다워.”
“연애해 봤소?”
라고 소총수가 말했다.
“기억이 없는데.”
“친하던 여자가 없어요?”
“잊어버렸어. 생각이 잘 안 나는걸.”
“전혀.”
“민간인 시절의 일은 모두 희미해. 제대하면 생각나겠지.
자꾸 생각하다간 총대를 던지구, 여기서 꺼질 거야.”
소총수가 하품을 했다. 그는 무슨 생각에 잠겼다가 갑자기
웃음을 작게 터뜨렸다.
“나는 참 바보였지. 그날 먹어버리는 건데.”
우리는 잠깐, 알아듣지도 못할 외국 쇼의 사회자가 지껄이는 재담에
귀를 기울였다. 여러 사람들의 미친 듯한 폭소가 트랜지스터 속에서 터졌다.
청중들의 뒤로 제껴진 목 가운데 불뚝 솟아오른 똑같은 크기의 목젖이
아래위로 흔들리고 있을 듯했다. 트랜지스터의 음성은 딱 그쳤다.
계속해서 떨어지는 빗소리가 그쳐진 폭소의 뒤를 이었다.
소총수는 총구를 전방으로 겨누고 자물쇠를 풀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렸어요.”
나는 머리를 내밀고 샌드백의 방벽 너머로 부대의 폐허 쪽을 노려보았다.
호흡을 끊고 땅바닥에 얼굴을 기울여 청각을 집중시켰다.
젖은 땅을 딛는 듯한 찰박거리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발걸음 소리는 다가오다가 그치고, 쇠가 돌에 부딪는 듯한 소리가 났다.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포복하구 있어.”
물체가 땅에 끌리는 듯한 소리는 집요하게 다가왔다.
나는 송수화기를 잡고 축음을 넣었다. 저쪽에서도 축음이 왔고,
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야, 적이 왔나?”
“지금 가까이 침투해 왔습니다. 사격해버릴까요?”
“아니, 기다려.”
“클레이모어는.”
“그건 낭비야. 곧 간다.”
우리는 샌드백 위로 눈을 바짝 붙이고 지면을 관측하려고 애를 썼나.
도로 건너편에서 하사가 한사람의 대원을 데리고 몸을 낮게 숙이며
뛰어왔다. 오십미터쯤 떨어져 있는 허물어진 벙커 뒤에서
뭔가 움직인 것처럼 보였다. 야간침투에 익숙하지 못한 녀석이었다.
그가 벙커 위로 검은 몸집을 노출시킨 채 꼼짝 않고 엎드려 있었다.
조바심이 나서 사격하려고 총구를 겨누었을 때,
적은 뒤편으로 미끄러져 숨어버렸다.
"생포하는 거다.”
하사가 말했고, 나는 반대했다.
"함정인지두 모릅니다. 사격해버리죠.”
“분명히 적의 척후병이야. 한놈이다.”
“내가 해치우죠.”
소총수가 방벽 위에 철모를 벗고 무장을 끌러놓고 나서 대검을 뽑았다.
그는 대검을 입에 물고 방벽을 타넘어갔다.
소총수는 벙커의 측면을 향해 포복해 나아갔다.
번개가 번쩍이며 스쳐갔을 때, 창백하게 드러난 땅과 벙커 근처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소충수가 잽싸게 벙커의 후면으로
기어 돌아가는 게 보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투는 소리라든가 비명이 들리지 않았으므로 나는 우리의 소총수가
적을 놓쳐버린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벙커 뒤로부터 나타나지 않았으며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그때, 부대 안에서 고막을 찌르는 듯한 호각소리와
시끄러운 타악기소리가 들려왔다.
게릴라들은 벌써부터 대대의 무너진 참호와 벙커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들도 한사람의 인질을 원했던 것이다.
하사는 내 팔을 억세게 잡아죄면서 말했다.
“속았다! 포를 요청 할 테니까 두 사람이 계속 경계해.”
그는 본대와 교신하기 위해서 도로를 건너갔다.
잠시 후 그가 쏘아올린 오성 (五星) 신호탄이 하늘 위로 치솟았다.
다섯 개의 푸른 별이 천천히 꼬리를 끌면서 어둠에 먹히웠다.
뒤이어 아군의 포탄이 휘파람소리를 내면서 날아오기 시작했다.
본대는 R포인트에 대해서 더이상의 인원 보충을 해줄 수 없다는 것과,
상황의 악화에 따라서 도로 정찰분대와 순찰차량의 근무를
그만둔다는 것이었다.
또한 R의 무모한 고립 사수에 관해서 중대장은 멀리 이동해버린
작전상황실에 여러차례 건의했으나, 회답을 받지 못했다고 알려왔다.
우리는 무전에 의해서 간밤에 미군들이 지키고 있던 교량이
완전히 파괴되어버 렸다는 것을 알았다.
다리의 교각은 복구하기 힘들 정도로 폭파되어서 미군들이
국도를 완전히 장악해서 부교라도 놓지 않는다면,
정부군의 진주는 언제까지가 될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는 낙심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국도의 한복판에 꽂혀서 펄럭이고 있는 해방전선의 깃발을 보았다.
선명한 진홍 바탕에 별이 그려진 깃발은 장대 끝에 매달려서
도전적으로 펄릭이고 있었다.
한사람이 달려가서 깃대 주변에 부비트랩이 없는가를 확인한 뒤 뽑아왔다.
아직도 하늘은 검은 구름에 뒤 요란하게 들려 왔다.
“양키들이 철수한다.”
창가에 서 있던 선임조장이 바깥을 가리켰다. 우리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소대 병력의 미군이 LVT 세 대에 올라앉아 초소 앞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들은 비에 흠뻑 젖어 있었고 철모나 방탄조끼를 벗어던진 자가 많았다.
그들은 우울한 표정으로 우리들을 내려다보며 지나갔다.
교량이 폭파되었으므로 그들이 강변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미군들은 새로운 작전명령이 내릴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서
기지로 철수하는 중이었다. 누군가 불안하게 말했다.
“이제 R에는 우리뿐이다.”
“집중 공격을 받겠는데.”
오후에 비가 완전히 그쳤고, 더욱 뜨거워진 태양이 구름을 헤치고
빠져나왔다. 정찰조가 출발했다.
초소에는 분대장이 통신병과 두 사람의 대원과 함께 남았다.
우리는 R에서 천야드 지점 밖으로 벗어나지 않기를 지시받았고,
전투가 벌어질 경우 가능한 대로의 신속한 동작으로 되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적의 주력은 멀리 퇴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소규모의 정찰대가 부근에 잠복해서 우리를 노리고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여하튼 좌표에 나타난 R 부근 외곽 지점들의 확인 결과를
보고하라는 중대본부의 명령 이었고,
분대장은 고지식하게 그것을 실지로 답사해보기를 원하고 있었다.
중대본부는 우리의 안전을 철저하게 믿고 있었는데,
밀림과 강변의 중간 지점에 있는 민병대의 매복소대가 적의 활로를
끊어주리라는 것과, 적들은 사흘 후에는 철수하려는 아군을
구태여 공격하려 애쓰지 않을 것이란 점,
그리고 인민을 존중한다는 정치적 이유로서 탑 주위에 있는 우리 분대를
포격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정찰조는 보급대대의 빈터 안에 있는 벙커와 목조건물들과
참호 속을 일일이 점검 했다. 우리는 교통호 속에서 붉은 명찰이 달린
소총수의 상의를 발견했다.
문상병이 상의를 집으려고 호 속에 뛰어들려 했을 때 선임조장이
그의 옷자락을 잡으며 말렸다.
“기다려, 조사해보자.”
선임조장이 호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 참호의 흙바닥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일어났다. 탄띠에 매어 있던 갈고리가 달린
가는 나일론 줄을 풀면서 그가 말했다.
“짐작하던 대로야. 인계 철선을 봐라.”
주의해서 보니까, 상의 단춧구멍에는 잘 알아볼 수 없는 코일이
붙들어매어져 한발짝쯤의 거리에 묻혀 있는 게 보였다.
우리는 멀찍이 엎드려서 선임조장이 부비트랩을 파괴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우선 갈고리를 철선 밑에 늘어뜨린 다음 줄을 잡고
안전한 거리로 가서 잡아당겼다. 두어 번 되풀이 끝에 폭음이 일어났고
파편에 맞은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이 떨어져 날아갔다.
우리는 대대 외곽의 숲으로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숲으로 들어서는 초입에 물이 얕게 괸 진흙 수렁이 있었다.
진흙 위에 어지럽게 찍힌 맨발과 샌들의 자국들을 보았다.
밀림 안으로 깊숙이 전진할수록 태양은 울창한 잎새에 가려버리고
손바닥만한 빛조각들이 가끔씩 우리의 눈가를 스치며 지나갔다.
땅이 차츰 낮아지다가 조개 껍데기처럼 둥글게 파인
저지(低地)가 나타났는데, 헤치고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관목 덩굴들이
뒤엉켜 있었다. 선임조장이 말했다.
“우리가 확인해야 할 곳은 저 너머 보이는 오두막 부근이다.
너희들 갈 테냐?”
저지대가 끝나고 땅의 비탈이 평평해지면서 비교적 큰 나무들이
띄엄띄엄 자라고 있는 숲 가운데, 포탄에 파괴된 집 한채가 보였다.
문상병이 말했다.
“여기서두 잘 보입니다.”
“그래, 적은 없는 모양이다.”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저지대를 우회했다.
갈대가 가슴팍에까지 자라 있었고, 더러운 흙탕물이 괸 웅덩이가 있었다.
웅덩이 가운데 고무공처럼 부푼 검은 물체가 떠 있었다.
화염에 그을린 시체가 부풀대로 부풀어서 다리 하나가 커다란
나무등걸만했다. 부패하는 시체 부근에 물매미가 새카맣게 모여서
와글거리고 있었다. 어젯밤 건십의 폭격에 맞은 적의 시체가 틀림없었다.
숲을 등지고 국도를 향해서 걸어나갔다.
무릎 높이쯤의 선인장들이 자라고 있는 개활지로 나섰다.
진홍빛의 칸나와 찔레꽃들이 드문드문 피어 있었다.
국도 연변의 마을로 들어가는 샛길이 보였다.
태양이 우리 등뒤를 따갑게 내리쪼았다. 우리는 개활지를 눈앞에 두고
모래땅 위에 엎드려 잠깐 동안 맞은편 샛길과 밀림을 관측했다.
나와 부사수는 서로를 엄호하면서 지그재그로 개활지를 건너갔다.
야자나부숲 가운데 마을 외곽의 집 몇 채가 보였다.
나와 부사수는 마을을 가장 똑똑히 관측할 수 있는 지점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 선임조장과 문상병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마을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두 사람씩 갈라지기로 했다.
선임조장과 문상병이 마을 중심부를 똑바로 가로질러 국도가 내다보이는
우물가에서 기다리기로 했고, 부사수와 나는 마을 외곽의 숲과
서너 채의 외딴집을 수색하기로 했다.
우리는 첫번째로 마을 맨 끝에 있는 집을 수색했다.
나는 집의 뒤로 돌아가, 넝마 같은 휘장을 들치고 안으로 뛰어들었는데,
덧문이 모조리 닫힌 집안은 어두웠고 멍석 한장이 깔려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불단이 없는 것으로 보아 빈집이었다.
앞문으로 뛰어들었던 부사수와 내가 실내에서 마주쳤다. 부사수가 말했다.
“녀석 들은 낮에는 멀리 철수해버리는 모양이죠.”
“적의 관측병이 남아 있을지두 몰라.”
우리는 집을 나서기 전에 덧문을 약간 옅어놓고 숲과 또 한채의
외딴집 주위를 내다보았다. 부사수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저게 뭡니까?”
“뭘까, 마당에 떨어져 있는 게…….”
우리는 허리를 굽혀 선인장 사이를 헤치고 뛰다가 집의 마당 앞에 이르러
엎드렸다. 그것은 밀짚으로 만든 삿갓 모양의 라였다.
집안에 누군가 농라의 임자가 있다.
파리가 뙤약볕 아래를 오르내리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나는 집 뒤로 돌아가 뒷문에 걸쳐놓은 대나무발을 총 끝으로 들쳤다.
텅 빈 부엌으로 해서 실내가 보였는데 방의 반쯤은
기다란 커튼으로 가려져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나무의자 두 개와 대나무로 엮은 침상이 보였다.
판자문이 요란한 소리로 부서지며 부사수가 앞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부엌과 실내의 통용문에 몸을 기대고 그의 수색을 엄호했다.
찰그락, 하는 쇳소리를 들었는데…… 들었다고 느끼는 것과 거의 동시에
자동소총의 탄피 튀는 소리를 들었다. 부사수가 방 가운데 버티고 서서
휘장의 뒤쪽에다 긁어대고 있었다.
탄환이 뚫고 지나가는 기다란 헝겊이 거칠게 흔들렸다.
휘장 뒤에서 총대가 굴러떨어졌다. 나는 커튼의 한끝을 힘껏 잡아당겼다.
찢어진 커튼 뒤에서 피투성이의 지금 막 숨이 넘어가려는 깡마른 사내가
우리를 멍청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벌거숭이에
카키색 팬디만 입고 있었고, 다리를 부상당했기 때문에 대들보에 매어진
해먹에 누워 있었다. 사내는 흔들리는 해먹 위에서 몇번 몸을 뒤채며
꿈틀거리다가 머리를 떨어뜨렸다. 그물망 사이로 피가 끊임없이
흘러떨어졌다. 해먹은 차츰 그 간격을 좁혀가면서 천천히 흔들거렸다.
아래에 바나나 잎사귀에 싼 음식과 물이 담긴 야자 껍질이 놓여 있었다.
“먼저 우릴 쏠라구 그랬지.”
맥풀린 듯한 부사수가 말했다. 우리는 잠깐 피가 번져가는 땅바닥은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부사수가 장총을 주워올렸다.
활대를 후퇴시키니까 장전되었던 기다란 실탄이 튀어나왔다. 내가 말했다.
“어제 폭격에 낙오된 자야.”
“마을 사람들이 숨겨놓고 간호해주던 모양이오.”
우리는 장총을 갖고 집을 나섰다. 주변을 살피며 마을 외곽을 돌고 나서,
샛길로 들어섰다. 마을 가운데서 우리를 찾아오고 있는 선임조장과
문상병을 만났다. 그들은 총성 때문에 날카롭게 긴장해서 몸을 굽히고
접근해오고 있었다. 우리는 총을 어깨에 걸어메고 그들에게로
어슬렁거리며 걸어갔다.
"꼭 사냥 나온 꼴이군.”
선임조장이 안전장치를 잠그며 말했다.
“원숭이라두 쏘았나?”
“한마리 잡았지요.”
"이건 선물입니다.”
라고 부사수와 내가 말했다. 선임조장은 우리가 노획한 장총을 조사했다.
“적이 마을엔 없는 모양이야. 수색 했지만 주민들뿐이더군.”
우리는 산개해서 마을을 지나갔다. 주민들이 덧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우리들이 지나가는 것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두려움과 적의가 깃들인 시선을 던졌다.
노인들은 음흉스러워 보였고, 아이들은 교활해 보였으며,
여인네들은 우리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고,
남자들은 모두들 밤에는 게릴라로 변하는 적인 것 같았다.
그들의 고요한 마을에 침입한 것은 바로 우리들이었다.
여긴 우리의 고향이 아니다.
마을을 벗어나 대대지역의 울타리 근처에 있는 우물가에 이르렀다.
우리는 비워진 수통을 채우기 위해 잠깐 우물가에 머물렀다.
철모를 벗어 물을 떠서 머리 위에 뒤집어썼다.
한참 물을 끼얹고 있을 때 우리의 배후에서
회초리로 마룻장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저격이다!”
나는 우물 옆 물구덩이 속으로 상반신을 처박았다.
방향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벌떡거리는 가쁜 숨소리가 바로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가슴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문상병이 구덩이 안으로
기어들어오려고 헐떡이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쳐서 그를 내게로 끌어당겼다.
그는 얻어맞은 가슴속에 손가락을 찔러넣고 바람이 좁은 구멍을
빠져나가는 듯한 호흡을 내쉬고 있었다.
그는 두어 번 연약하게 기침을 했는데 그때마다 피가 입으로 솟아올랐다.
웅덩이에 괸 물이 차츰 붉어졌다.
우리 머리 위로 실탄이 계속해서 지나갔다.
마을에서 남쪽으로 떨어진 선인장숲에서 경기관층이 짖어대고 있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얼마 동안 저항했다. 그러나 우리는 기관총 사계 정면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어서 대대의 울타리 쪽으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나는 세 개째의 탄창을 갈아끼웠다.
총구가 열을 내서 울부짖고 있는 동안은, 내가 적의 공격을 제압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우리의 좌측 울타리 너머로 진출한 분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호할 테니, 울타리를 넘어와라!”
그들이 숲을 향해서 집중사격을 하는 동안, 나는 축 늘어진 문상병을
둘러업고 울타리 앞에까지 기어갈 수 있었으나,
두 몸이 한꺼번에 넘을 수는 없었다. 몸을 반쯤 일으키며 그를 울타리
너머로 던지는데 성공했다. 철모가 팩 돌아갔다. 실탄이 철모를 빗기며
지나간 것이다. 나는 철모를 벗어던지고 울타리 옆을 기었다.
아군 쪽에서 M79 유탄발사기의 사격하는 소리가 들렸고
숲에 날아가서 터지는 째지는 듯한 파열음이 일어났다.
유탄이 계속해서 날아갔다. 적 의 경기관총 소리가 멀어져가다가 그쳤다.
분대장이 손을 내밀어 우리를 하나씩 끌어올렸다.
“모두 무사한가?”
"한사람 얻어맞았습니다.”
참호 아래 쓰러진 문상병의 몸을 일으켰을 때, 그는 완전히 절명해 있었다.
우리가 그를 운반했을 적에는 경직이 시작되어,
그의 뻣뻣해진 다리가 땅에 질질 끌려왔다.
나는 나중에 우리 소속대인 중대에 돌아가 전사보고서를 쓰기 위해
그의 소지품을 간수하기로 했다.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것은
수첩 한권뿐이었다. 수첩 안에 구겨진 5달러 짜리 GI군표와 검역카드,
품목마다 모두 빈칸인 PX카드, 겉봉이 찢겨 닳아버린 편지 몇장,
두어 장의 가족사진이 있었다.
우리는 그를 블록 초소의 뒤편에 뉘어놓고, 파리가 날아앉지 못하도록
개인 텐트의 반쪽으로 덮어놓았다.
텐트 자락 아래로 아주 커다랗게 보이는 정글화가 솟아올라 있었다.
나는 땅 위에 떨어진 삐죽한 그림자를 보았고, 얼굴을 쳐들어
눈부신 햇살이 그 뒤에서 빛나고 있는 검은 석탑을 올려다보았다.
포로는 더위에 지쳐 탑에 묶인 채 졸고 있었다.
이런 입체감 없는 사진 속을 누비고 보급 헬리콥터가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낮게 떠왔다.
우리는 헬리콥터가 떨군 이틀분의 C레이션과 탄약을 받고,
길게 늘어진 로프에 시체를 달아 매어올렸다. 보충병은 역시 오지 않았다.
하사는 무전으로 한사람이 전사했다는 것을 알렸으나,
본대의 무전병은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알았다.
R포인트는 계속 수고하도록. 라쟈 아웃!
분대는 초소 주위의 배수로를 최후 저항선으로 정하고
적의 기습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밤 적은 틀림없이 결전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황혼녘에 보급대대 부근의 마을 사람들이
간단한 짐을 짊어지고 국도의 남쪽으로 피난가는 게 보였다.
그들은 적의 어떤 작전계획을 알아차린 것이 분명했다.
중대병력쯤의 집결은 관내 정규군과 지방 게릴라 몇사람이면 충분하니까,
아무 때나 우리를 공격할 수 있을 것이다.
일곱 사람이 중대 병력을 상대한다는 것은 이미 승산 없는 싸움이며,
며칠 전부터 같은 장소에 배치되어 있었던 우리의 위치와 화력이
이미 노출되었으므로 몇시간 못 가서 탑은 점령될 것이다.
우리가 시간을 지연시킬 가능성을 믿고 있는 것은 본대에서 지원될
81밀리 박격포의 포격과, 적이 탑을 파괴하지 않으려고
소화기로써만 우리를 공격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무전 수신을 하교 있던 통신병이 소리를 질렀다.
“작전은 변경된다구 합니다.”
“철수명령이냐?”
“우리를 내버리는 건 아니겠지.”
제각기 떠드는 우리들을 묵살하고 통신병이 하사에게 수신내용을 보고했다.
“정부군은 예정과 달리 훨씬 남쪽으로 공격해 들어가고 있습니다.
미군 교체병력이 명일 09시까지 여단본부를 접수합니다.
후발 중대는 미군에게 작전권을 인계하고 헬리콥터로 이동지역에
공수된다는 하달입니다. 그리고 적의 구정 공세가
전 남부 월남에 걸쳐 개시되었습니다.”
“좋아, 모두 들었나? 하루 앞당겨졌다. 오늘이 전투의 마지막 밤이다.”
“기분 나쁜데.”
“높은 놈들은 지도만 들여다보구 있을 거다.”
“R 전원에게 무공훈장을 내리도록, 그리고 보상금과 조위금은……”
“재수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아.”
북쪽에서 포성이 계속 들려왔고, 하늘 위 사방으로 떠오른 조명탄의
불꽃들이 보였다. 편대를 지어 날아가는 무장 헬리콥터들의
프로펠러 소리가 먼곳에서 들려왔다.
“작전명령만 없다면 저따위 탑 같은 건 수류탄으루 당장 날려버렸으면
좋겠다.”
부사수가 말했고,
“사기당하는 건 우리뿐이다.”
하면서 선임조장이 말했다.
“마지막 전투라……”
도로의 남쪽을 향해 원형 철조망을 치고 클레이모어 지뢰 두 대를 매설했고,
도로 건너편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철조망을 친 다음
세 대의 클레이모어를 묻었다. 또 측면의 낙화생밭 앞에도
철조망과 클레이모어로 차단하고 탑 뒤의 바나나밭 쪽으로는 참호를 팠다.
사수와 2조장은 바나나밭 앞의 참호에 배치되었다.
나는 배수로 왼쪽 끝에서 낙화생밭을 경계했다.
낙화생밭 너머로 높다란 담장 같은 대나무숲이 보였다.
구멍을 기어나온 도마뱀들이 음산하게 울고 있었다.
도로 남쪽의 마을을 향해서 M79 유탄발사기를 가진 분대장과 통신병이,
도로 건너편 대대 방향은 선임조장과 부사수가 맡았다.
우리는 여덟 개들이 수류탄 띠를 차고 1기수의 탄띠가 다섯 탄띠씩
들어 있는 실탄통을 각자 가지고 있었다.
만일 우리의 화력이 제대로 발휘된다면 적의 중대 병력쯤은
두 시간 동안 방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다음엔, 여단본부를 향해서 수단껏 탈출하는 게 상수이리라.
22시에 적의 사격이 대대지역에서 날아왔다.
탄환이 블록 벽을 부수며 튀었다. 그들은 연이어 쏘지 않고 한발 한발씩,
우리를 건드려 보았다. 우리는 응사하지 않었다.
대대지역 뒤에서 호각소리가, 마을 쪽에서는 목탁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본대에 조명탄을 청했다. 아득한 곳에서 박격포가 조명탄을 쏘아올리는
둔중한 소리가 들렸고, 달걀을 깨는 것 같은 경쾌한 소리로 점화된
5만 촉광의 조명탄이 우리 머리 위로 천천히 낙하했다.
조명탄은 간격을 두어 연달아 떠올라 왔다.
낙하하는 조명탄의 섬광에 비친 나무 그림자가 길게 늘어나 잠깐
캄캄해졌다가 다시 대낮처럼 드러나곤 했다.
대대의 벙커들과 건물들 사이를 달리는 적들이 보였다.
그들은 엄폐하지는 않고 벙커 위로 가볍게 뛰어다녔다.
먹이를 요리하려는 야수처럼 그들은 자신만만했다.
적이 샌드백 가까이 접근해왔다. 박격포의 뒷날개가 바람을 헤치는 소리가
들렸고, 포탄이 대대지역 위에 떨어져 작렬했다.
목조 건물 위에 떨어진 백린탄이 불길을 올리며 요란하게 타올랐다.
호각소리가 짧게 두 번 들리자, 적 이 일제히 방벽 에 바짝 붙어서 쏘았다.
“우측 사격.”
하사가 나직하게 말했다. 선임조장과 부사수가 자동소총으로
사격하기 시작했다. 적의 배후에서는 박격포가 계속해서 터지고 있었으나
적의 사격 이 점점 치열해졌다. 그들을 수류탄 투척 거리에까지
접근시킨다면 우리는 마지막이다.
적이 양끝에 자동화기를 설치하고 배수로에다 대고 집중사격을 했다.
실탄이 배수로 앞에 쌓아올린 모래주머니를 찢고 드디어 몇개를 넘어뜨릴
정도였다. 하사가 방벽 너머로 유탄을 날려보냈다.
이곳저곳에서 터진 유탄의 파편이 우박처럼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통신병은 계속해서 포를 유도했다.
적과 아군이 탄착점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 곤란하다고 전해왔다.
하사가 송수화기를 빼앗아들고 소리쳤다.
“야, HQ 개새끼들아, 포 하나 갖구 깔작거리면서 재는 거냐?
계속해서 쏘지 않으면 우린 전멸한단 말이다.”
포탄이 조금 더 가까워졌고, 귀청이 찢어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흙덩이가 전신에 쏟아져내렸다. 아슬아슬하게도 포탄은 배수로
댓 발짝 앞에 떨어진 것이다. 통신병이 욕지거리를 퍼붓고 있었다.
HQ에서도 매우 절망적인 쌍소리로 회답해왔다.
적은 드디어 방벽을 넘기 시작했다. 검은 파자마를 입은 작은 몸들이
날렵하게 샌드백을 뛰어넘으면서 소리치고 있었다. 따이한 라이라이,
따이한 라이라이. 나는 배수로를 기어돌아 하사의 옆에 붙어서 사격했고
탑 뒤의 참호 속에서 사수와 2조장이 사격 했다. 하사가 외쳤다.
“전원 침착하게: 접근시키지 말구…….”
도로 건너편을 차단한 철조망 위에서 수류탄이 터졌다.
동강난 철조망들이 사방으로 헤쳐졌다. 대대의 샌드백을 기어넘어온 적들이
치열한 사격에 쓰러지면서도 옆구리총을 하고 사격하면서
우리에게 똑바로 달려왔다. 그들은 소리쳤다. 철조망을 뛰어넘고 있었다.
“A탄 눌러.”
급박해진 하사의 갈라진 고함소리. 여러 개의 드럼통이 한꺼번에
굴러가는 듯한 소리로 클레이모어가 터지고,
돌격하던 게릴라들의 몸이 위로 펄쩍 솟았다가 떨어졌다.
방벽을 넘으려던 게릴라들도 직선으로 날아간 파편에 맞아 굴러떨어진다.
호각소리가 길게 한번 들리면서 적의 사격이 멎었다.
차가운 정적이 이 소강상태 속으로 스며들었다.
두개골 속이 곧 터져나가기 직전인 것처럼 각자의 맥박소리만이 들렸고,
갑작스런 고요함 때문에 나는 피부의 땀구멍들이 모두 막혀버릴 것 같았다.
남의 땅, 남의 어둠속에 있는 우리는 뭐냐. 도대체 우리는 무엇이냐.
도피로가 차단된 일곱 마리의 쥐새끼였다.
“손님을 죽여버립시다.”
부사수가 말했다.
“분대장, 총살합시다. 저 새끼는 이용가치두 없잖소.”
“포로를 도로 가운데 묶어놓자.”
결국 선임조장의 말대로 포로는 길 가운데 교통표지판에 묶어놓기로 했다.
우측 대대지역으로 침투했던 적의 분대는 크게 타격을 받은 것 같았다.
적들은 우리의 완강한 저항에 신중해진 모양이었다.
어둠속에서 부상당한 게릴라의 생존자가 뭐라고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보내줘라.”
“수류탄 한방 날려버려.”
선임조장이 방벽 앞으로 수류탄을 까던졌다. 모래먼지가 일어났고,
곧 조용해졌다. 부사수가 초소 안에서 포로를 끌고 나왔다.
그는 밖으로 끌려나오자 허공을 향해서 뭐라고 긴 고함을 질렀다.
어둠속에서 포로의 눈이 번들거렸다.
부사수가 그의 몸을 방패 삼아 도로 가운데로 걸어갔다.
교통표지 앞에 앉혀놓고 붙들어맸다. 길 옆을 따라 포복하고 있는
적의 분대 병력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을 엄호하기 위해서
좌측 대숲 속으로 적들이 몸을 낮추어 달려가고 있었다.
우리의 화력과 지원포의 탄착점을 여러 방향으로 분산시키려는 것이다.
하사가 말했다.
“이젠 정면을 포로가 막아준다. 시간을 좀 끌 수 있을 거야.”
“적은 저놈을 사살할지도 모릅니다.”
“시간이 걸릴걸. 저쪽두 명령 계통이 있을 테니까.”
적의 통신신호로 여겨지는 목탁소리가 사방에서 들리다가 그쳤다.
좌측 대숲의 적들도 잠잠해졌다. 포로가 겉 가운데서 숲을 향해 뭐라고
자꾸만 소리쳤다. 하사가 말했다.
“저자가 뭐라는 거야?”
“아마, 자길 쏘라구 그러는 모양이오.”
선임조장이 말했다. 조명탄이 떠올랐는데 환한 빛에 노출된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민가 쪽에서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앞에는 발가벗기운 소총수가 절뚝거리며 걸어왔고,
뒤에 적이 바싹 따르고 있었다. 소총수는 몇 번이나 쓰러지려고 했고,
그때마다 뒤에 붙어선 자가 부축해 올렸다.
우리는 눈앞에 포로 된 빈사의 동료가 다가오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았다.
“교환하죠. 살려야 합니다.”
뒤의 참호 속에서 사수가 말했다. 선임조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적은 다만 침투하려는 거야.”
단발로 쏘아대는 총성이 대숲 쪽에서 들려왔다.
뭔가 드높게 외치면서 표지판 앞의 포로가 쓰러졌다.
소총수를 앞에 끌어안고 다가오던 게릴라의 팔이 번쩍 치켜졌다.
우리 쪽에서 잠깐 사격했다. 적과 소총수가 함께 쓰러졌고,
던져졌으나 못 미친 수류탄이 배수로 앞에서 터졌다. 비명소리가 들렸다.
매캐한 화약 연기가 배수로 안에 가득 찼다.
통신병이 얼굴을 감싸쥐고 흙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침투해온 적이 아직 절명하지 않고 철조망 가에서 움직였다.
클레이모어의 살상판을 우리 쪽으로 돌려놓으려는 모양이다.
그는 우리의 자동소총의 집중사격을 받았다.
그러나 두 대의 클레이모어가 이쪽으로 돌려져 있었다.
안면에 파편상을 입은 통신병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고통에 찬 신음을 질렀다. 하사가 말했다.
“참아라, 날만 새면 우리는 살아남는다.”
“틀렸어. 클레이모어를 쓸 수 없습니다.”
부사수가 말했다. 하사가 부사수의 어깨를 잡아흔들며 부르짖었다.
“우리 정면이 뚫어지면, 뒤로 퇴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퇴각하면 우리는 전멸한다. 모두 죽는 거야.”
“아직 결판은 안 났소.”
하며 선임조장이 말했다.
“저 클레이모어의 살상 방향을 바깥 쪽으로 돌려놓으면,
아직 방어할 수 있으니까.”
“누가, 뛰어가 돌려놓겠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적의 십자화력에 벌집이 될 것이다.
세 사람의 시체가 철조망 주변에 뒹굴고 있었다.
“분대장, 네가 가라!”
참호 속에서 사수가 말했다.
“이 개새끼야, 지금 보여줘. 큰소리만 치지 말구.”
대숲 속에서 적의 BAR 기관총이 배수로를 훑으며 날아왔다.
우리들이 머리를 박고 잠깐 움츠린 동안 국도 연변의 분대 병력이
침투포복을 해왔다.
“씨팔, 좋아.”
하사가 이빨 사이로 씹어내며 총을 던지고 일어섰다.
“말려라.”
선임조장이 외쳤다. 하사는 도로 가운데로 뛰어나갔다.
적의 BAR가 도로 위로 두 줄의 먼지를 일으키면서 질타했다.
하사가 돌에 걸린 듯이 주춤했다가 앞으로 곤두박질쳐 넘어지는 게 보였다.
우리는 건너편 대숲 속과 도로에 대고 응사했다.
아군의 박격포탄이 이따금 생각났다는 듯이 한발씩 날아와서
대숲 후방과 도로 위에서 터졌다. 나는 통신병을 잡아일으키며 소리쳤다.
“싸울 수 없으면 포라두 유도해라.”
“안 보여, 보이질 않아.”
신병은 무전기를 껴안고 있었다. 적이 계속 포복해왔다.
하사가 철조망 가에까지 바짝 기어가 있었다. 그는 클레이모어를 돌렸고,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대나무숲에서 나온 적들이 낙화생밭을
건너오고 있었다. 대대의 방벽 너머로는 수류탄만을 양손에 쥔 게릴라들이
뛰어왔다. 참호 속에서 사수와 2조장이 대대 쪽에 사격했다.
수류탄이 날아왔고, 적들은 넘어졌다. 참호 곁에서 수류탄이 터졌다.
계속해서 연달아 터졌다. 우리의 방탄조끼 위로 후두둑거리며
날아와 박히는 파편조각의 소리가 들렸다. 참호에서의 사격이 멎어버리고
팔뚝에 파편상을 입은 사수가 혼자서 배수로 쪽으로 건너왔다.
낙화생밭을 건넌 적의 분대가 수류탄으로 철조망을 제거하고 달려들었다.
도로 정면에서 포복하던 게릴라들이 들개처럼 몸을 숙이고 달려왔다.
선임조장이 외쳤다.
“정면 A탄, B탄.”
부사수가 접선시켰다.
“좌측 A탄.”
나는 클레이모어의 접선기를 손아귀에 쥐고 힘껏 눌렀다.
도로 위에, 밭을 향해서 방향성 지뢰의 푸른빛이 번쩍였다.
정면을 돌파하려던 적의 주공이 거의 꺾였고,
좌측으로는 뒤에 처져 있던 제2파 공격조가 밀려왔다.
우리는 수류탄을 연거푸 까던졌다. 배수로 가까이로 뛰어왔던 자들이
사격에 얻어맞고 나뒹굴었다.
“착검!”
선임조장이 외쳤다. 자동소총에 대검을 꽂고, 화력망을 뚫고
배수로 속으로 뛰어든 몇명의 게릴라들을 막았다. 어둠속의 눈,
그들의 장총과 자동소총 끝에 꽂힌 날카로운 알루미늄의 창 끝.
마주치는 첫 순간에 적을 제압해버리지 못하면 죽는다.
적의 창 끝을 위로 쳐올리면서 개머리를 휘둘러 가슴을 강타한다.
적이 뒤로 넘어진다. 군홧발로 그의 면상을 차면서 다른 자를 맞는다.
최초의 공격에 적을 찌르지 못하면……
나는 몸을 낮추어 적의 옆구리로 파고들며 대검을 깊숙이 꽂는다.
발로 차면서 대검을 뽑는다. 적의 총검이 방탄조끼로 가려진 등을 찔렀으나
뚫지 못하고 튕겨져나간다. 숨이 막히며 앞으로 넘어질 듯하다.
돌아서서 고함을 치며 곧장 대검을 내밀어 육박해 들어간다.
총대로 그의 총검을 막아올리고 발로 급소를 올려찬다.
우리 주위가 조명을 받은 듯이 환해졌다.
커다란 탐조등의 원반이 땅바닥을 핥으면서 지나갔다.
두 대의 건십이 대숲과 도로 위에 기총소사로 내리갈겼다.
저항선을 계속 넘으려던 적들이 일제히 퇴각하기 시작했다.
헬리콥터가 한곳에 머물러 빙빙 돌면서 유탄과 로케트 포탄을 내쏘았다.
적의 배후에 있던 지원병 력이 흩어져 밀림으로 쫓기고 있었다.
선임조장이 배수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네 사람은 모두 도로 양측으로 전진하면서 쫓겨가는 적을 사격했다.
사수가 미처 달아나지 못한 적의 부상자들을 철저히 사살했다.
우리는 도로가에 머물러 적의 퇴각을 확인한 다음, 초소로 되돌아왔다.
통신병은 배수로 속에서 무전기를 끌어안고 죽어 있었다.
우리는 모두 넋이 빠져 미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람다운 모든 것이 탈진되어 의식이 흐려졌다.
나는 배수로 속에 꿇어앉아 토했다. 전투가 끝나버렸는지,
아니면 다시 끝없이 시작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서로 누가 남았는지 바라보기조차 귀찮았다.
그래서는 죽은 자들의 굳어진 몸뚱이 사이에 넘어져 졸기 시작했다.
“R포인트, 감잡고 나오라, 여기는 HQ.”
무전기가 떠들고 있었다. 내가 눈을 떴을 때,
저 헤아릴 수 없는 과거의 기억들 속에 굳게 이어져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이 여전히 불었고, 대기는 내 코를 건드렸으며 숲과 구름이 보였다.
언제나 똑같은 모습으로 적도의 태양이 떠올라 있었다.
모두 지나간 것이다.
“R포인트, 감잡고 나오라, 여기는 HQ.”
나는 계속해서 똑같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무전기의 스위치를 딸깍
꺼버렸다.
국도 북쪽에서 무한궤도가 굴러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에, 나뭇잎과 풀을 철모에 꽂은 미군 도로정찰대가
지뢰탐지기를 등에 짊어지고 지나갔다.
장갑차의 포수가 머리를 내밀고 즐비한 시체들의 사진을 찍었다.
뒤로 멀리 떨어져서 교량에서 철수했던 LVT 세 대와 경비소대가 지나갔다.
2.5톤 한대가 우리 초소 옆으로 대어졌고,
말쑥한 정글복 차림의 미군 중위가 승차 책임자석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대낮에도 얼굴에 바른 흑색 위장 초콜릿을 지우지 않은 병사들을
도로변에 배치했다. 똑같은 규격으르 허리에 매달린 가스마스크가
인상적이었다. 미군 중위가 우리를 향해 엄지를 세워 보이면서 웃었다.
대대지역 안으로도 몰려들어가는 차량의 행렬이 그치질 않았다.
우리는 배수로에서 기어나와 담배를 피웠다.
멍청히 주저앉아서 잠을 깨운 자들을 아무 생각 없이 올려다보았다.
흰 페인트로 SEA BEE라고 쓴 미해군 공병대의 불도저 한대가 멎었다.
운전석의 배불뚝이 중사가 초소를 가리키며 장교에게 물었다.
“여깁니까?”
“그래, 여길 넓혀야겠어.”
불도저가 크게 회전하더니, 뒤로 멀찍이 물러섰다가 달려들면서
바나나밭을 밀어버리기 시작했다.
불도저는 드디어 초소 뒤의 빈터를 향하여 굴러왔다.
우리는 담배를 내던지고 벌떡 일어섰다.
선임조장이 불도저 앞으로 달려갔다. 그는 자동소총을 운전사에게로
겨누었다.
“꺼져, 이 새끼.”
“갈겨버려 .”
미군 중사는 발동을 끄고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우리를 두리번거리고 나서
두 손을 벌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어리둥절해 있는 장교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뭐하는 겁니까?”
장교가 얼굴이 새빨개져서 말했다.
“바나나숲을 밀어내야겠어. 캠프와 토치카를 지을 걸세.
저 해병이 막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네.”
“우리는 작전명령에 따라서 저 탑을 지켰습니다.”
나는 초라하게 서 있는 작은 석탑을 가리켰다. 중위가 고개를 저었다.
“탑이라구? 나는 저런 물건에 관해서 명령 받은 일이 없는데.”
“아직 통고되지 않았을 겁니다.
아군은 월남군에게 탑을 인계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인민해방전선은 저것을 빼앗아 옮겨가려고 했습니다.”
나는 얘기하고 싶지 않았으나, 불교와 주민들의 관계,
참모들의 심리전적 판단이며 마을에 관해서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말하고 나자마자 우리는 깨끗이 속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게 누구의 것인가. 내 말이 다 끝나기 전에 불교라는 낱말이 나오자
이 단순한 서양 친구는 으흥,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중위가 말했다.
“그런 골치 아픈 것은 없애버려야지.
미합중국 군대는 언제 어디서나 변화시키고 새롭게 할 수가 있네.
세계의 도처에서 말이지.”
나는 우리가 탑과 맺게 된 더럽고 끈끈한 관계에 대해서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음을 깨달았다.
장교는 자기가 가장 실질적이며 합리적인 강대국 아메리카인의 전형임을
내세우고, 탑에 대한 견해도 그런 바탕에서 출발할 것이다.
한 무더기의 작은 돌덩어리가 무슨 피를 흘려 지킬 가치가 있었겠는가.
나는 안다. 우리가 싸워 지켜낸 것은 겨우 우리들 자신의 개 같은 목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역겨움을 꾹 참고 말했다.
“중지시켜주십시오.”
중위는 내게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기계 앞으로 걸어가서 중사에게 뭔가 일렀다.
배불뚝이 미군 중사는 불도저 위에서 뛰어내리며 투덜거렸다.
“노란 놈들은 이해할 수 없단 말야.”
중위가 비워둔 2.5톤을 가리키며 여단본부까지 태워다주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전사자의 시체와 장비를 싣고 R을 떠났다.
차가 바나나 숲을 채 돌아가지 못해서,
나는 불도저의 굵직하게 가동하는 엔진소리를 들었다.
불도저는 빈터의 가운데로 돌격 했고, 떠받친 탑이 기우뚱했다가
무너져 자취를 감추었다. 탑의 그림자마저 짓이겨졌을 것이다.
달리는 트럭이 일으켜놓은 먼지가 시야를 차단했다.
〔조선일보 1970. 1. 6: 객지, 창작과비평사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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