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문학 127

그믐달 (수필)- 나도향 -

그믐달 (수필)                                                - 나도향 -   나는 그믐달을 사랑한다. 그믐달은 요염하여 감히 손을 잡을 수도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 계집 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고 쓰린 가련한 달이다. 서산 위에 잠깐 나타났다 숨어 버리는 초생달은 세상을 후려 삼키려는 독부(毒婦)가 아니면, 철모르는 처녀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세상의 갖은 풍상을 다 겪고 나중에는 그 무슨 원한을 품고서 애처롭게 쓰러지는 원부(怨婦)와 같이 애절하고 애절한 맛이 있다. 보름에 둥근 달은 모든 영화와 끝없는 숭배를 받는 여왕과도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애인을 잃고 쫓겨남을 당한 공주와 같은 달이다.   초생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

한국단편문학 2025.01.30

이순신전(李舜臣傳) - 신채호 -

이순신전(李舜臣傳)                                                                                - 신채호 -    목   차  1. 제 1 장 서 론  2. 제 2 장 이순신의 어렸을 적과 젊은 시절  3. 제 3 장 이순신의 과거급제와 그 후에 당한 곤경  4. 제 4 장 오랑캐를 막던 작은 싸움과 조정에서 인재를 구함  5. 제 5 장 이순신의 전쟁 준비  6. 제 6 장 부산 앞바다로 구원하러 나가다  7. 제 7 장 이순신이 치른 첫 번째 싸움 : 옥포해전(玉浦海戰)  8. 제 8 장 이순신의 두 번째 싸움 : 당포(唐浦) 해전  9. 제 9 장 이순신의 세 번째 싸움 : 견내량(見乃梁) 해전  10. 제 10 장 이순신의 네 번째..

한국단편문학 2025.01.23

자전거 도둑 - 박완서 -

자전거 도둑                                                        -박완서 -   수남이는 청계천 세운 상가 뒷길의 전기 용품 도매상의 꼬마 점원이다. 수남이란 어엿한 이름이 있는데도 꼬마로 통한다. 열여섯 살이라지만 볼은 아직 어린아이처럼 토실하니 붉고, 눈 속이 깨끗하다. 숙성한 건 목소리뿐이다. 제법 굵고 부드러운 저음이다. 그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면 점잖고 떨떠름한 늙은이 목소리로 들린다. 이 가게에는 변두리 전기 상회나 전공들로부터 걸려오는 전화가 잦다. 수남이가 받으면,    "주인 영감님이십니까?"   하고 깍듯이 존대를 해 온다.    "아, 아닙니다. 꼬맙니다."   수남이는 제가 무슨 큰 실수나 저지른 것처럼 황공해 하며 볼까지 붉어진다.  ..

한국단편문학 2025.01.14

낙엽기 - 이효석 -

낙엽기                                                                     - 이효석 -    창 기슭에 붉게 물든 담장이 잎새와 푸른 하늘-가을의 가장 아름다운 이 한 폭도 비늘구름같이 자취 없이 사라져 버렸다. 가장 먼저 가을을 자랑하던 창밖의 한 포기의 벚나무는 또한 가장 먼저 가을을 내버리고 앙클한 휘초리만을 남겼다. 아름다운 것이 다 지나가 버린 늦가을은 추잡하고 한산하기 짝없다. 담장이로 폭 씌워졌던 집도 초목으로 가득 덮였던 뜰도 모르는 결에 참혹하게도 옷을 벗기어 버리고 앙상한 해골만을 드러내 놓게 되었다. 아름다운 꿈의 채색을 여지없이 잃어버렸다. 벽에는 시들어 버린 넝쿨이 거미줄같이 얼기설기 얽혔고 마른 머루송이 같은 열매가 함빡 맺..

한국단편문학 2025.01.07

두 파산 - 염상섭 -

두 파산                                                   - 염상섭 -  1   어머니, 교장 또 오는군요. 학교가 파한 뒤라 갑자기 조용해진 상점 앞 길을, 열어 놓은 유리창 밖으로 내다보고 등상(凳床)에 앉았던 정례가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다본다. 그렇지 않아도 돈 걱정에 팔려서 테이블 앞에 멀거니 앉았던 정례 모친도 저절로 양미간이 짜붓하여졌다. 점방 안에서 학교를 파해 가는 길에 공짜 만화를 보느라고 아이들이 저편 구석 진열대에 옹기종기 몰려섰다가, 교장이라는 말에 귀 번쩍하였는지 조그만 얼굴들을 쳐든다. 그러나, 모시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며 우둥퉁한 중늙은이가 단장을 짚고 쑥 들어오는 것을 보고, 학생들이 저희끼리 눈짓을 하고 킥킥 웃어버린다. 저희 학교..

한국단편문학 2024.12.31

종탑 아래에서 - 윤흥길 -

종탑 아래에서                                                                               - 윤흥길 -1. “대미를 장식헐 만헌 순애보라고 내 입으로 말허기는    약간 거시기헌 구석이 있지마는…….”   인테리어 전문점을 운영하는 최건호였다. 묵비권이라도 행사하듯 내내 잠자코 앉아 남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그가 뜻밖에도 자진해서 마지막 이야기 순번을 떠맡고 나서자 그에게도 입이 달려 있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좌중은 깜짝 반가워했다.    “반세기가 지나가드락 영 잊혀지지 않는 소녀가 있다면    혹시 순애보 계열에 턱걸이로라도 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묵적보살처럼 입이 천근이기로 소문난 최건호가 절대로 허튼소리를 할 리 없다고..

한국단편문학 2024.12.24

수난이대 (受難二代) - 하근찬 -

수난이대 (受難二代)                                                                   - 하근찬 -  진수가 돌아온다. 진수가 살아서 돌아온다. 아무개는 전사했다는 통지가 왔고, 아무개는 죽었지 살았는지 통 소식이 없는데, 우리 진수는 살아서 오늘 돌아오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어깻바람이 날 일이다. 그래 그런지 몰라도, 박만도는 여느 때 같으면 아무래도 한두 군데 앉아 쉬어야 넘어설 수 있는 용머리재를 단숨에 올라채고 만 것이다. 가슴이 펄럭거리고 허벅지가 뻐근했다. 그러나 그는 고갯마루에서도 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들 건너 멀리 바라다 보이는 정거장에서 연기가 몰씬몰씬 피어오르며 삐익 기적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아들이 타고 내려올 기차는 점심..

한국단편문학 2024.12.17

가을과 사냥 - 이효석 -

가을과 사냥                                                                - 이효석 -   화단 위 해바라기 송이가 칙칙하게 시들었을 젠 벌써 가을이 완연한듯하다 해바라기를 비웃는 듯 국화가 한창이다. 양지쪽으로 날아드는 나비 그림자가 외롭고 풀숲에서 나는 벌레소리가 때를 가리지 않고 물 쏟아지듯 요란하다. 아침이나 낮이나 밤이나 그 어느 때를 가릴까. 사람의 오장육부를 가리가리 찢으려는 심산인 듯하다. 애라에게는 가을같이 두려운시절이 없고 벌레소리같이 무서운 것이 없다. 지난 칠년 동안 - 준보를 알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 어느 가을인들 애라에게 쓸쓸하지 않은 가을이 있었을까. 밤 자리에 이불을 쓰고 누우면 눈물이 되로 흘러 베개를 적신다.    "사랑..

한국단편문학 2024.12.10

비오는 날 - 손창섭 -

비오는 날                                                                 - 손창섭 -  이렇게 비 내리는 날이면 원구(元求)의 마음은 감당할 수 없도록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동욱(東旭)남매의 음산한 생활 풍경이 그의 뇌리를 영사막처럼 흘러가기 때문이었다. 빗소리를 들을 때마다 원구는 으례 동욱과 그의 여동생 동옥(東玉)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그들의 어두운 방에 쓰러져 가는 목조 건물이 비의 장막 저편에 우울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비록 맑은 날일지라도 동욱이 오누이의 생활을 생각하면, 원구의 귀에는 빗소리가 설레이고 그 마음 구석에는 빗물이 스며 흐르는 것 같았다. 원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동욱과 동옥은 그 모양으로 언제나 비에 젖어있는 인생들..

한국단편문학 2024.12.03

우황청심환 - 박완서 -

우황청심환                                                        - 박완서 - 가까스로 잠이 좀 오려는데 또 그놈의 소리가 났다. 주우지 니집뿐, 주우지 니집뿐…….    "몇 시라는 소리유?"   노파가 물었다. 남궁씨는  되는 대로 대답했다. 기계로 합성한 음향이면서도 일본 말 특유의 교성(여자의 간드러지는 목소리)이 알려주는 시각은 어차피 지금 이 지점의 시간과는 무관할 터였다. 노파의 시계가 친절을 다해 가르쳐 주는 시간이 노파가 떠나온 여행지의 시간인지, 한국의 시간인지도 그는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나는 비행기 속이었다. 노파는 태엽을 누르면 현재의 시간을 말로 알려주는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다. 백내장 수술 후 시력이 밤낮이나 가릴 정도로 떨어지고 ..

한국단편문학 2024.11.26

자전거 도둑 -김소진 -

자전거 도둑                                                                - 김소진 - 자전거에 도둑이 생겼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나 몰래 훔쳐 타는 얌체족이었다. 내 골반뼈 높이에 맞춰 놓은 자전거 안장이 엉덩이 밑선으로 밀려가 있었고 바퀴 틈새에는 방금 묻어난 것 같은 황톳물이 군데군데 배어 있곤 하는 게 바로 그 증거였다. 누군지는 몰라도 현관문 밖의 도시가스 연결 파이프에 쇠줄로 붙들어 매놓은 자전거의 자물쇠를 풀고 몰고 다닌 다음 내가 퇴근해 돌아오기 전에 얌전히 제자리에 갖다 놓곤 하는 모양이었다. 신문사 일이라는 게 저녁 늦게 끝나기가 일쑤인데다 퇴근 후 술자리를 워낙 좋아하는 나로서는 낮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도리가 없다. 가만히 생..

한국단편문학 2024.11.19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 윤흥길 -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 윤흥길 -   워낙 개시부터가 기대했던 바와는 달리 어긋져 나갔다. 많이 무리를 해서 성남에다 집체를 장만한 후 다소나마 그 무리를 봉창해 볼 작정으로 셋방을 내놓기로 결정했을 때, 우리 내외는 세상에서 그 쌔고쌘 집주인네 가운데서도 우리가 가장 질이 좋은 부류에 속할 것으로 자부하는 한편, 우리 집에 세들게 되는 사람은 틀림없이 용꿈을 꾸었을 것으로 단정해 버렸고, 이와 같은 이유로 문간방 사람들도 최소한 우리만큼은 질이 좋기를 당연히 요구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기대는 어쩐지 처음부터 자꾸만 빗나가는 느낌이었다. 특히 사복 차림으..

한국단편문학 2024.11.12

유예 (猶豫) - 오상원 -

유예 (猶豫)                                                      - 오상원 -  몸을 웅크리고 가마니 속에 쓰러져 있었다. 한 시간 후면 모든 것은 끝나는 것이다. 손과 발이 돌덩어리처럼 차다. 허옇게 흙벽마다 서리가 앉은 깊은 움 속, 서너 길 높이에 통나무로 막은 문 틈 사이로 차가이 하늘이 엿보인다.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냄새로 짐작하여 그리 오래 된 것 같지는 않다. 누가 며칠 전까지 있었던 모양이군. 그놈이나 매한가지지, 하고 사닥다리를 내려서자마자 조그만 구멍으로 다시 끌어올리며 서로 주고받던 그자들의 대화가 아직도 귀에 익다. 그놈이라고 불린 사람이 바로 총살 직전에 내가 목격하고 필사적으로 놈들의 사수(射手)를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던 그 ..

한국단편문학 2024.11.05

노벨문학상수상 소설가 한강 시(詩) 14편

한강 작가(시인)의 시 모음 14편     1. 저녁 잎사귀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찾아온 것은 아침이었다 한 백 년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내 몸이 커다란 항아리같이 깊어졌는데 혀와 입술을 기억해내고 나는 후회했다 알 것 같다 일어서면 다시 백 년쯤 볕 속을 걸어야 한다 거기 저녁 잎사귀 다른 빛으로 몸 뒤집는다 캄캄히 잠긴다     2. 거울 저편의 겨울 8 흰 지팡이를 짚은 백발의 눈먼 남자 둘이서 앞뒤로 나란히 구두와 지팡이의 리듬에 맞춰 걷고 있었다 앞의 남자가 더듬더듬 상점 문을 열고 들어가자 뒤의 남자는 앞의 남자의 등을 보호하듯 팔로 감싸며 따라 들어갔다 미소 띤 얼굴로 유리문을 닫았다     3. 저녁의 대화 / 한강 죽음은 뒤돌아서 인사..

한국단편문학 2024.11.04

해바라기 - 이효석 -

해바라기                                                       - 이효석 -  언제인가 싸우고 그날 밤 조용한 좌석에서 음악을 듣게 되었을 때, 즉시 싸움을 뉘우치고 녀석을 도리어 측은히 여긴 적이 있었다. 나날의 생활의 불행은 센티멘탈리즘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사회의 공기라는 것이 깔깔하고 사박스러워서 교만한 마음에 계책만을 감추고들 있다. 직원실의 풍습으로만 하더라도 그런 상스러울 데는 없는 것이 모두가 꼬불꼬불한 옹생원이어서 두터운 껍질 속에 움츠러들어서는 부질없이 방패만은 추켜든다. 각각 한줌의 센티멘탈리즘을 잃지 않는다면 적어도 이 거칠고 야만스런 기풍은 얼마간 조화되지 않을까.   ─아닌 곳에서 나는 센티멘탈리즘의 필요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모..

한국단편문학 2024.10.28

사평역 - 임철우 -

사평역                                                       - 임철우 -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별로 복잡한 내용이랄 것도 없는 장부를 마저 꼼꼼히 확인해 보고 나서야 늙은 역장은 돋보기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놓고 일어선다.    "벌써 삼십 분이나 지났군."    출입문 위쪽에 붙은 낡은 벽시계가 여덟시 십오분을 가리키고 있다. 하긴 뭐 벌써라는 말을 쓰는 것도 새삼스럽다고 그는 고쳐 생각한다. 이렇게 작은 산골 간이역에서 제시간에 정확히 도착하는 완행 열차를 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님을 익히 알고 있는 탓이다. 더구나 오늘은 눈까지 내리고 있지 않는가.   역장은 손바닥을 비비며 창가로 다가가더니 유리창 너머로 무심히 시선을 던진다. 건널목 옆 외..

한국단편문학 2024.10.21

노벨문학상수상 소설가 한강 시(詩) 12편

1. 편지    그동안 아픈데 없이 잘 지내셨는지 궁금했습니다 꽃 피고 지는 길 그 길을 떠나 겨울 한번 보내기가 이리 힘들어 때 아닌 삼월 봄눈 퍼붓습니다 겨우내내 지나온 열 끓는 세월 얼어붙은 밤과 낮을 지나며 한 평 아랫목의 눈물겨움 잊지 못할 겁니다     누가 감히 말하는 거야 무슨 근거로  이 눈이 멈춘다고 멈추고 만다고··· 천지에,  퍼붓는 이··· 폭설이, 보이지 않아?  휘어져 부러지는 솔가지들,···  퇴색한 저 암록빛이, 이, 이, 바람가운데,  기댈 벽 하나 없는 가운데,  아아··· 나아갈 길조차 묻혀버린 곳, 이곳 말이야···   그래 지낼 만하신지 아직도 삶은 또아리튼 협곡인지 당신의 노래는 아직도 허물리는 곤두박질인지 당신을 보고난 밤이면 새도록 등이 시려워 가슴 타는 꿈 ..

한국단편문학 2024.10.19

노벨문학상 이후 한강 첫 글 '깃털'

깃털 / 한강   문득 외할머니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다. 사랑이 담긴 눈으로 지그시 내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손을 뻗어 등을 토닥이는 순간. 그 사랑이 사실은 당신의 외동딸을 향한 것이란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등을 토닥인 다음엔 언제나 반복해 말씀하셨으니까. 엄마를 정말 닮았구나. 눈이 영락없이 똑같다.   외갓집의 부엌 안쪽에는 널찍하고 어둑한 창고 방이 있었는데, 어린 내가 방학 때 내려가면 외할머니는 내 손을 붙잡고 제일 먼저 그 방으로 가셨다. 찬장 서랍을 열고 유과나 약과를 꺼내 쥐어주며 말씀하셨다. 어서 먹어라. 내가 한입 베어무는 즉시 할머니의 얼굴이 환해졌다. 내 기쁨과 할머니의 웃음 사이에 무슨 전선이 연결돼 불이 켜지는 것처럼.   외할머니에..

한국단편문학 2024.10.17

노벨문학상수상 소설가 한강 / 서시

서시     /    한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

한국단편문학 2024.10.16

2024년 노벨문학상수상 소설가 한강 시(詩) 4편

서울의 겨울  12 / 시 한강 어느 날 어느 날이 와서 그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 내 가슴 온통 물빛이겠네, 네사랑 내 가슴에 잠겨 차마 숨 못쉬겠네 내가 네 호흡이 되어주지, 네 먹장 입술에 벅찬 숨결이 되어 주지, 네가 온다면 사랑아 올 수만 있다면 살얼음 흐른 내 빰에 너 좋아하던 강물소리 들려주겠네     얼음꽃/ 시 한강 오래 내리어 뻗어간 그들 뿌리의 몫이리라 하여 뿌리 여윈 나는 단 한 시절의 묏등도 오르지 못하였고 허깨비, 허깨비로 뒹굴다 지친 고갯마루에 무분별한 출분의 꿈만 움터놓았다 모든 미어지는 가슴들이 그들 몫의 미어지는 가슴들이 그들 몫의 미어지는 꽃이라면  꽃이라면 아아 세상의 끝까지 가리라 했던 죽어, 죽어서라도 보리라 했던 저 숲 너머의 하늘 무엇이 꿈이냐 무엇이 시간이냐 ..

한국단편문학 2024.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