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문학

마음의 감옥 - 김원일 -

하얀모자 1 2026. 1. 10. 10:45

 

 

           마음의 감옥
                                 - 김원일 -

금년으로 일곱 번째 맞은 ‘모스크바 국제도서박람회’에
한국이 처음으로 오백칠십여 종 도서를 출품하게 되었다.
그 사무를 주관한 대한출판문화협회는 도서박람회 참관과 소련 시찰을
목적으로 모스크바 파견 대표단을 모집한 결과,
스물두 개 회원 출판사 대표가 참가신청서를 내었다.
나도 그 일원으로 지원했다.
모스크바에서의 도서박람회 개최 기간은 일주일이었으나
한국 대표단 일정에 따라 나 역시 레닌그라드와 키예프를 둘러보는
열이틀 동안의 소련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김포공항으로 마중을 나온 아내가 안부말 끝에 현구 소식을 알려주었다.

“그쪽은 국제전화도 힘들고, 공연히 걱정만 안고 다니실 것 같아
 당신이 레닌그라드에선가 전화했을 때 그 말은 하지 않았어요.
 근데, 일주일 전에 삼촌이 경북대 의대 부속병원에 입원했어요.”

현구의 병에 따른 감정유치(鑑定留置)* 명령이 드디어 법원으로부터
떨어진 모양이었다.
나는 아내 말에서 아우 병이 전문의의 지속적인 관찰이 요구될 만큼
나빠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현구는 일심 공판에서 징역 일 년 육 월이 선고되어
고법에 항소 계류 중에 있었다. 그러나 감정유치가 너무 늦은 감이 있어
나는 법원의 그 조치를 선의로만 해석할 수 없었다.
십 년 전 아우는 간염을 앓은 적이 있었다. 1979년 그해,
일 년 팔 월 형을 살고 형 집행정지로 석방된 직후였다.
눈 흰자위에 노르끄레한 황달 증세가 나타났으나,
누이 집에서 쉬며 가까운 개인병원 통원 치료로 쉽게 회복되었다.
아우의 허우대가 건장하다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허약 체질도
아니었기에 그 뒤 그는 별 탈 없이 바쁘게 그의 삶을 살아왔던 셈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구속된 뒤, 경찰에서 검찰로 넘어가고부터
그는 그 알량한 그곳 식사조차 제대로 소화를 못해 늘 속이 쓰리고
기운이 없어 앉아 있기조차 힘들다고 면회자에게 호소했던 터였다.
첫 장마절기에 들어 날마다 비가 뿌리던 칠월 초순 어느 날,
내가 대구로 내려가서 면회를 통해 아우 얼굴을 보자,
그를 못 본 지 불과 한 달 사이에 보기 딱할 정도로 야위었고
혈색 또한 좋지 않았다.
얼굴색이 검누렇게 찌든 데다 광대뼈가 도드라져,
다시 단식이라도 시작한 듯 영양실조증이 완연했다.
다섯 해 전 아우가 안동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교도소 당국의 양심범 가혹 행위에 항의하여 일주일 동안 물만 먹고
단식한다기에 내가 그를 면회 갔을 때가 꼭 그랬다.
그때는 얼굴색이 창백했지 검누렇지는 않았다.
일거리도 없을 이 장맛비에 주민들이 뭘 먹고 지낼까.
그 걱정을 하다 보면 잠이 오지 않았는데 마치 꿈이나 꾸듯,
내가 석방되어 산동네로 막 뛰어 올라가고 있잖아요.
그 말을 하며 아우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수줍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표정 중에 한 특징이라 말해야 할 그런 미소를 지을 때,
입가에 메마른 살갗이 겹주름까지 져서 서른아홉 살의 한창 나이인 그가
마치 늙은이 같아 보였다.
아무래도 위장이나 간장에 문제가 있다며 진찰을 받았느냐고 내가 묻자,
아우는 소화제를 타 먹는다며,
달리 아픈 데는 없으니 곧 낫겠지요 하고 힘담없게* 대답했다.
나는 아우 담당 변호사 주영준을 만나,
현구가 병이 있으니 병원 감정유치를 청구하여 종합병원에서
진찰과 치료를 받게 해달라고 부탁하곤 상경 했다.
내가 소련으로 떠날 때까지 현구의 감정유치 허가는 떨어지지 않았다.

공항을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내는,
그저께 당일치기로 대구에 다녀왔다며,
현구 종합검진이 진행 중이더라고 말했다.
의사 말로는 병이 위가 아니라 간 쪽이며, 자기가 보기에도
상태가 아주 좋지 않더라는 것이다.

“복수(腹水)가 심해 배에 찬 물부터 뽑았는데,
 체중이 한꺼번에 육킬로나 빠졌대요. 차마 마주 볼 수 없을 정도로
 여위었어요. 검사를 받느라 미음조차 먹지 못하니……
 간병하시는 어머님이 몸져누우실까 걱정 됩디다.
 그렇다고 애들 때문에 내가 내려가 있을 수도 없잖아요.
 아무리 바쁘더라도 당신이 속히 한번 다녀와야겠어요”
 
하며 손수건으로 눈을 훔치던 아내가 문득 생각했는지,
 
“지난번 것하고, 이번 힘써준 사례비며 변호사 비용 일백만 원은
 대구 아가씨가 냈어요” 하고 말했다.
 
차창 밖으로 팔월 중순의 불볕더위가 끓고 있었다.
가로수 잎이 후줄근히 늘어졌고 멀리 보이는 아파트 단지는
증발하는 증기로 무너져 내릴 듯 흐물거렸다. 그 흐물거리는 뒤쪽,
현구의 여윈 모습이 물 아래 가라앉은 탈색한 가랑잎이듯 얼비쳐 보였다.
아우와 나는 여덟 살 나이 차이로 속 깊은 대화는 나누어보지 못한 채,
여지껏 떨어져 살아온 세월이 더 길었다.
그와 함께 생활하기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였다.
그가 중학교에 다닐 때 나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고,
그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나는 입대했으며,
그가 대구에서 대학을 다닐 때 나는 이미 사회인이 되어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아파트 주차장에 보름째 덮개를 쓰고 있는 자가용을
그대로 두고 나는 좌석버스 편으로 출근했다.
회사로 나오자 나는 국외 여행으로 자리를 비운 동안의
판매 실적 장부부터 살폈다. 모두 산과 바다를 찾아 빠져나갔을
지난 두 주일, 따분한 읽을거리가 잘 팔릴 리 없었다.
가을 출간을 목표로 진행하던 신간 세 권의 편집 진행 현황도 살폈다.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가져온,
초판이 현지 시중에 나온 지 불과 달포밖에 되지 않은
아나톨리 리바코프의 소설 『1935년과 그 이후』 첫째 권 원서 번역을
서둘러 착수해야 했기에, 『아르바트의 아이들』을 번역했던
러시아어과 교수를 만났다. 『1935년과 그 이후』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힘입어 소련에서 출간되자마자
곧 서방 세계 여러 나라말로 번역되어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한
리바코프 만년의 대작 『아르바트의 아이들』 제2부 첫 권에 해당되는
소설이었다. 삼백여 쪽 분량의 원서를 두 달 안으로 번역을 마쳐달라는
내 부탁에, 교수는 더위를 핑계로 난색을 표명했다.
조급한 마음 같아선 우리보다 한 발 앞서 이미
시판되고 있을지도 모를 일어판을 구해 서너 토막으로 나누어
여럿에게 중역을 의뢰했으면 싶었으나 내 출판 기본 방침이
그러하지 아니했기에 제1부 역자와 밀고 당기는 설득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꼼꼼한 번역은 믿을 만했다.
인원 아홉 명을 거느린 내가 경영하는 소규모 단행본 출판사는
그동안 팔십여 종 책을 출판했으나
작년 이후로 내세울 만한 상품이 없어 현상 유지가 빠듯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 점에는 영업부장의 은근한 투정도 있었듯,
시류에 영합하는 청소년 취향의 감상적인 읽을거리를
출판에서 배제한 내 출판 방침에도 원인이 있었다.
그런데 리바코프의 『아르바트의 아이들』 세 권이,
근래 도하 신문 외신란과 특집란을 거의 덮다시피 하는
소련의 민주화 개혁정치 소개 기사에 힙입어 사 개월 만에
총 구만여 권 판매 실적을 올리고 있으므로 운영 자금에
큰 도움을 받고 있었다.
마침 소련에서 열린 국제도서박람회에 내가 선뜻 나서게 된 것도
‘소련작가동맹’ 산하 ‘소련저작권협회’와의 사무 협의와 리바코프
면담에 주목적이 있었다.
한편, 문화 해방기를 맞아 재평가를 받는
스탈린 치하 강제수용소 실태를 고발한
샬라모프 소설 『콜리마 이야기』의 원전을 입수해 오기도 했다.
그래서 저녁 시간에는 다른 러시아어과 교수를 만나
샬라모프 소설 번역을 교섭하느라 식사와 곁들여 맥주도 마셨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이미 아내에게 말해두었기에,
나는 떠난다는 전화 한 통만 집에 걸고 대구로 가는 밤기차를 탔다.

동대구역에 도착하니 짧은 여름밤이 지나고
역광장이 희뿌옇게 트여왔다. 손가방을 든 나는 빈 택시에 올라,
기사에게 대학병원으로 가자고 말했다.
이제 대구에도 의과대학이 여러 개 생겨 대학병원이라면
어느 의과대학 부속병원을 가리키는지 혼동되겠지만,
대구에 오래 터를 잡은 사람에게 대학병원은 으레 시 중심부
삼덕동에 있는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알고 있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넓게 터를 잡아 마주 보는 의과대학 부속병원은
대구에서 이제 몇 남지 않은 연조 깊은 서양식 벽돌건물이었다.
동대구역에서 대학병원까지는 기본요금 거리였다.

택시에서 내리자, 미명 속에 의과대학과 부속병원 사이의 좁장한 한길은
한적했다. 불현듯 중학 시절이 생각났다.
중앙지 조간신문을 배달하던 때, 내 구역이 삼덕동과 동인동 일대였다.
길은 물론 주위의 봉경까지 그때와 변한 데가 없었으나
그 시절은 사 차선 팔 차선 도로가 없던 때여선지 널찍한 큰길이었다.
나는 사람 자취가 없는 휑한 이 길로 신문 덩이를 끼고 새벽별 보며
종종걸음 쳤다. 의과대학에서 신문 여섯 부,
부속병원에서 일곱 부를 구독했는데, 양쪽 수위실에 신문 열세 장을
문틈에 밀어 넣고 나면 마치 배달을 절반쯤 마친 듯
끼고 있는 신문덩이가 가뿐했다. 그 시절이 1955년이던가.
아우가 사변둥이이니 다섯 살이었으리라.
어머니가 양키시장에서 미제물건을 팔아 삼 남매를 키웠고,
다른 피란민들도 그렇게 힘들게 살았듯 우리 역시
전후 애옥살이한* 시절이었다.

안이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낮은 벽돌담 안 양쪽 구내는
예전 그대로 넓은 뜰에 숲이 울창했다.
한길을 지붕 삼아 덮다시피 한 무성한 버즘나무 가로수는
새벽이슬에 젖어 있었다. 기차 안에서 숙면을 못한 탓인지 골이 패었고
피곤으로 발걸음이 희뜩거렸다.
따지고 보면 모스크바와 서울과의 일곱 시간 시차를 극복하기에는
그 날수가 이틀이 채 되지 않기도 했다.

병원 정문 안쪽 수위실에는 파리한 형광등 불빛 아래 제모 쓴 수위가
고갯방아를 찧으며 졸고 있었다.
그에게 현구가 입원한 병동 위치를 물으려다 그만두고,
저만큼 육중하게 버틴 일정 때 지은 우중충한 본관 건물을 향해
숲 사이로 난 아스팔트 길을 걸었다.
새벽의 신선한 공기가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아우를 만날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워,
골치를 무릅쓰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한쪽 숲 속 어디에서인가 깊이 가라앉은 정적을 흩뜨리며
잠을 턴 새가 날카로운 소리로 울었다.

아내가 일러준 현구가 입원한 병동은 다른 병동과 뚝 떨어진,
담쟁이덩굴로 벽면이 덮인 뒷담장과 붙은 후미진 데 있었다.
마지못해 그를 감정유치로 옥에서 내주며 유폐된 정신병동에
처넣어버린 느낌이었다. 단층 병동으로 들어서자 컴컴하고 긴 통로가
나를 맞았다. 멀리 보이는 복도 끝 뒷문 채광창 두 개가
안경같이 뽀윰하게 트여 있었다.
아우가 제집처럼 들랑거린 옥사로 들어선 듯 으스스했다.
다섯 걸음 정도마다 창을 낸 앞쪽은 숲이 짙은 널짱한 뜰이었고
뒷담장 쪽은 칸칸으로 나누어진 병실이었다.
칠팔십 년째 견디어낸 건물이라 회칠한 천장과 벽은 그을음과 먼지에
절었고 시멘트 바닥도 여러 차례 땜질해서 누더기가 된 형편이었다.
병원 특유의 크레졸 냄새에 눅눅한 곰팡이 내음이 섞여 있었다.
뿌연 형광등이 이따금 걸린 어둑신한 복도를 걸으며
나는 아우 병실을 찾았다.
문짝에 바짝 붙어 서서 병실 호수를 읽어야 했기에
복도를 헤매는 내 발짝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더위 때문인지 어느 병실은 문을 반쯤 열어놓아,
안에서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의 여린 신음이 새어 나오기도 했다.
그 소리가 깊은 지하에서 솟아오르는 절망의 하소연 같아,
내 어두운 마음을 더 무겁게 눌렀다.
복도 벽에 붙여 놓은 긴 의자에는 더러 환자 가족이 아무것도 덮지 않고
새우잠에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그들 중에 어머니나 동수 엄마가 있나
싶어 나는 잠든 사람 얼굴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기도 했다.
세 사람째 그렇게 눈여겨보다,
아내 말이 아우 병실은 특실이라 했기에 그럴 리 없다 싶어
더 살피지 않았다.

“큰애 오는구나. 에미다.”

얼굴을 구별하기 힘든 침침한 회색 공간임에도 어머니는 모성 특유의
감각으로 멀리서 걸어오는 나를 알아보았다.
복도 의자에 한쪽 무릎을 세워 꼬부장히 앉은
어머니 표정을 볼 수 없었고 쉰 목소리만 들렸다.

먼 길을 잘 다녀왔느냐는 어머니 안부말이 있고,
왜 밖에 앉아 계시냐고 내가 물었다.
어머니는 병실 쪽을 흘끗 돌아보며, 꼴 보기 싫은 자가 버티고 있어
여기서 잠시 눈을 붙였다고 대답했다.
아우가 주거 제한 감정유치 허가를 받은 미결수이기에
입원실은 간수가 지키고 있음을 알았다.

“윤구야, 어찌 뭔가 잘못 돌아가는 것 같으다.
 감정유치 명령이 뭔가 모르지만, 관할서에서 높은 양반이 와서
 입원비와 치료비는 걱정 말라더라. 나라에서 다 부담한다구.
 사람을 큰 쇠판에 십자가처럼 매달아 붙여선 빙빙 돌리는
 그런 고문 같은 종합검사도 끝난 모양인데,
 담당 의사는 함구만 허구…… 모두들 간경변증인가 경화증인가
 그렇다지만 어쩐지……”
 
무엇인가 목울대를 치받는지 어머니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다면 암이냐고 나 역시 물을 수 없었다. 나는 어머니 옆에 앉았다.
지금 시간, 잠들어 있기 십상인 아우를 위해 특별한 대책을
세워오지도 않은 형으로서 그를 서둘러 깨울 이유가 없었다.

“너 대학병원에 동기생 의사 있지?” 어머니가 물었다.

“다들 서울로 올라와버렸으나 한 친구가 있어요.”

고등학교 졸업반 때 우리 반만 해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한 급우가 다섯이었다. 그동안 넷은 서울로 올라와
종합병원 과장급이 되었고 개인병원을 개업하기도 했다.
함근조만은 스무 해째 아직 여기 병원 임상병리과에 남아 있었다.

“설마 네 불알친구까지 속이랴. 너가 한번 그 친구를 만나봐야겠다.
 그런데 만약 그 입에서…….”

어머니는 작은 몸을 더욱 움츠려, 회한이 사무치는지 울음을 삼켰다.
하얗게 센 앞머리카락이 형광등 희뿌연 빛에 반사되어 잘게 떨렸다.

평안북도에서도 오지에 속하는 희천,
거기에서도 오십여 리 산골에 들어앉은 사십 여 호 한재 마을에서
개척교회를 열었던 아버지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직계가족만 데리고
월남하여 서울에 정착하기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해인
1947년 가을이었다. 삼 년 뒤에 전쟁이 터지자,
당시 서울 시민 모두가 그랬듯 우리 가족도 피란을 못 갔고,
아버지는 내무서에 연행당했다. 구이팔 서울수복 직전,
아버지가 퇴각하는 인민군에 끌려 북행하자,
어머니는 북진하는 국군을 뒤따라 만삭의 몸으로 어린 두 자식을 달고
아버지가 간 길을 뒤쫓았다. 황해도 사리원을 못 미쳐,
아버지와 함께 납치되어 끌려갔던 일행 중 용케 탈출에 성공하여
서울로 되돌아오던 몇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경기도 연천 어름에서 박 목사를 비롯한 스무여남은 명이
미군기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려주었다.
잘못 보았을 수도 있어 어머니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아
발길을 연천으로 되돌렸고, 기어코 아버지 죽음을 확인했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피란을 떠나 빈집으로 남은 토방에서
유복자를 낳았다. 바로 현구였다.
어떻게 목숨이 붙었는지 모른 채 가위눌려 남북으로 동분서주했던 그해
1950년, 어머니는 젊디젊은 수물아홉 살에 청상이 되셨다.
중공군 참전으로 국군이 다시 밀리기까지 어머니가 겪어야 했던 수난은
훗날 당신 말로, 필설로써 어찌 다 기록할 수 있냐고 했다.
엄동의 혹한이 몰아치는데 삼 남매를 이끌고 물설고 낯선 대구까지 흘러
내려왔으니, 당시 초등학교 삼 학년이던 내 기억에도 추위와 굶주림,
끝없는 보행과 발가락이 떨어져 나갈 듯 아프던 그 쓰라림만은
지금도 또렷하게 남아 있다.
어떤 경우에는 여자가 남자보다 강기*가 있다는 말처럼,
불평 없이 옹골지게 따라붙던 어린 숙영이의 다부진 모습 또한
눈에 선하다.

피붙이라곤 남한 땅에 남은 세 자식을 오로지 기둥 삼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홀어미 생애를, 나는 내 나이 마흔일곱이니
이제 넉넉한 마음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키운 세 자식 중에 그 하나를
어쩌면 애물로 저세상에 먼저 보내지 않을까 하는 벼랑에 선 모정을,
나는 넋 놓고 앉은 당신의 주름 많은 어두운 모습에서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울어서는 안 되는데, 하며 혼잣말을 하던
어머니 눈에 먼빛이 그 물기에만 강하게 응집되어 번쩍임을
볼 수 있었다. 세 자식을 보듬고 타관의 모진 세파를 이겨올 동안
모질음으로 쌓아 올린 그 강인한 성채도
어느 순간 저렇게 머릿돌부터 흔들리는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아니, 당신은 한 시절, 육순을 넘긴 연세에도 아랑곳 않고
갇힌 아우를 구해내겠다며 머리와 어깨에 띠를 두르고
‘민가협’ 모임에도 부지런히 나다니는 열성을 보였다.
유복자로 태어난 현구였기에 어머니는, 서로 몸뚱이는 다르지만
저 막내만은 자나 깨나 지아비와 함께 내 몸속에 있다는 말버릇처럼,
감옥이 아닌 바깥세상에서도 당신은 마음속에 현구가 들어앉은
감옥 한 칸을 마련해두었던 것이다.

“현구와 내가 스물아홉 나이 차이라, 작년에 남들이 말하는
 그 험한 아홉수를 서로가 그런대로 넘긴다 싶더니……”
 
어머니가 맞은쪽 창밖을 바라보며 중언부언 했다.
어머니가 셈하는 아홉수는 전래의 우리식 나이 계산법이었다.
얼마나 속울음을 지우셨는지 꺽 쉰 가라앉은 그 목소리에서,
열렬한 사랑이 쏟는 만큼의 반비례로 되돌아오는 허탈감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어머니 눈길을 좇았다.
히말라야시타의 벌린 가지와 넓은 뜰 건너,
뚝 떨어진 앞 병동의 이층 벽돌 건물 사이로,
조각 져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들 울음이 빛살처럼 뿌려지는 새벽하늘이 맑게 트여왔다.
이 병동 안에 한 생명의 불꽃이 지금 사그라지고 있을 때도
저 땅 끝에서부터 해는 늘 그렇게 무심히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가방을 들고 말없이 일어났다.
병실 문에는 ‘관계자 외 일절 출입금지’라는 큼지막한 팻말이 걸렸다.
나는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침대 발치에 걸어놓은 ‘절대 안정’이란
또 다른 팻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현구는 링거 주사기를 팔에 꽂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병실 중앙에는 탁자를 가운데 두고 비닐로 씌운 철제 응접의자 셋이
있었다. 한쪽 벽에 켜진 반투명 전등불빛이 창으로 밀려드는 빛살에
사위어갔다.

긴 의자에 신을 신고 잠을 자던 제복 입은 젊은이가
잠귀도 밝게 벌떡 일어나 앉으며, 돌연한 침입자를 쏘아보았다.
허리에 수갑과 방망이를 차고 있었다.

“현구 형 됩니다.” 내가 목소리 낮추어 말했다.

가방을 빈 의자에 놓고 나는 침대로 다가갔다.
아우는 팔뚝에 꽂힌 주삿바늘에 묶여 있기라도 하듯
갈고리같이 마른 손을 홑이불 밖에 얌전하게 포개어 얹고,
잠들어 있었다. 땀으로 찌든 긴 머리카락 아래 겅성드뭇이(부사, 많은
수효가 듬성듬성 흩어져 있는 모양) 자란 수염자리가 안쓰러웠다.
더 깎았다간 뼈를 다칠 듯, 얼굴은 나무로 빚은 모습이었다.
환자복 사이로 보이는 빗장뼈도 집어낼 만큼 돌기 졌다.
육질이 제거된 그의 흉상이 내게는 탈속한 경건함까지 느끼게 했다.
대구 중심부 장관동 단칸 셋방에 살며 현구와 내가 집과 가까운
‘제일교회’에 다닐 때, 아우는 초등반이었고 나는 고등반이었다.
부끄럼 잘 타는 현구가 기도할 때만은,
우리 어머니 우리 어머니 하며 어찌나 잘 읊는지 신통하더라는
초등반 교사 말을 들은 적 있었다.
어릴 적에 그는 나이답잖게 어머니를 끔찍이 섬겼고,
그래서 위로 우리 남매보다 당신의 사랑을 더 도탑게 받았다.
땅거미가 낄 때쯤 일 마치고 돌아오는 어머니와 함께 저녁밥을 먹겠다며
한길로 나가 장맞이도 곧잘 하던 그였다.
우리 막내 효자가 엄마하고 밥 먹겠다고 여지껏 기다렸다 안 그러나,
하며 어머니는 현구 손을 잡고 대문을 들어서곤 했다.
잠에 든 아우의 평화로운 얼굴을 보자 마음이 착한 자는
나이가 들어도 그 얼굴에 소년티의 순진성이 남아 있듯,
어릴 적 그의 모습을 떠올려주었다.

잠이 든 현구를 깨울 수 없어 나는 빈 의자에 앉았다.
어느 사이 어머니가 병실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상고머리에 얼굴이 각 진 젊은이가 자기소개를 했다.
간수 최는 방명록에 내 이름, 주소, 전화번호를 기록하곤
이것저것 여러 말을 물었으나 심심풀이 질문이라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병실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머릿수건 쓴 아낙네가
플라스틱 물통을 들고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소매를 걷은 군복 윗도리에 왜바지(몸뻬) 차림이었다.

“상주댁 이구려. 일찍도 나왔네.” 어머니가 반갑게 그네를 맞았다.

“일곱 시 반부터 일을 시작해요.” 볕에 까맣게 그을린 상주댁이
 죄지은 사람처럼 조그맣게 대답했다.

상주댁은 뒷산 약수터에서 갓 받아 온 생수라며 물통을 한 켠에 놓았다.
그네는 잠이 든 현구 모습을 멀찌감치에서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권사님, 기도하세요 하고 상주댁이 말하곤,
손을 여며 잡았다. 어머니가 그네와 머리를 마주 대어,
현구를 살려달라는 간곡한 기도를 했다.
상주댁은 십 분 정도 병실에 머물다 발소리 죽여 돌아갔다.
그동안 간수 최는 밖으로 나가 세수를 하고 왔다.

“너도 현구 공판 때 상주댁을 봤을걸. 상주댁 사글세 든 집을
 철거반원들이 허물 때 그 사단이 벌어졌으니, 저 여편네가 저렇게
 정성으로 마음을 쓰는구나. 세 자식과 거동 불편한 시어머니를
 거느리구 살다 보니 신새벽에 공사장에 나가,
 삼층 사층까지 엉성한 철다리를 밟고 모래와 벽돌을 져다 올려.”
 
어머니가 상주댁이 가져온 물통을 현구가 누운 침대 밑에 옮겨 놓으며
말했다.
현구가 잠에서 깨어나기는 삼십 분쯤 뒤로,
복도에 발짝 소리가 분주하게 들릴 때였다.

“형님, 언제 귀국했어요?”

아우가 말문을 떼곤 내게 나직나직 여러 말을 물었다.
이십 세기 마지막 대결단이라 일컬어지는 소련의 민주화 개혁 추진,
칠십 년간 소련을 장악해온 볼셰비키 보수파에 의해
실각이 우려된다고 보도되는 고르바초프의 현지 지지도,
무너져버린 동, 서독 장벽과 동구 여러 나라의 탈이념 조치에 따른
소련의 반응 따위였다.
탁자의 전화기와 성경책 옆에 신문이 여러 장 있어 외신을 통해
들어와 날마다 실리는 그런 기사를 그가 읽었을 텐데도
내 입으로부터 직접 목격담이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진보도 보수도 아닌 회색 중산층 지식인 반응이
궁금했는지도 몰랐다. 이념을 절대가치로 앞세운 패권주의를 청산하고
소련은 지금 탈사회주의화로 과감한 수정을 하고 있으며
고르바초프 인기가 대단하더라고 대답하기에는
나 자신도 그 단정이 성급할 수 있었다.
또한 그런 쪽 문제를 남한의 현실과 결부하여 스무 해 가까이
실천운동으로써 그 해답을 얻겠다고 해온 아우에게
주마간산 격이었던 내 관찰이 섣부른 판단으로 들릴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회주의가 인민의 삶을 좀 더 향상시키기 위해
지금껏 굳혀온 교조주의적 체질을 바꾸고 있는 갈등의 현장을 보았다고,
애매모흐한 표현으로 몽똥그려 대답했다.
모든 생필품의 부족 현상으로 모스크바는 물론 레닌그라드도
백화점이든 상점이든 장사진을 이룬 구매자의 긴 행렬 따위는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신문에 이미 보도된 소련의 그런 현상을 두고,
정치의 일방통행식 관료주의 체질, 모든 생산 공장의 국영화에 따른
경쟁 없는 사회가 안고 있는 제품의 형편없는 수준,
생산과 수요의 차질, 균등한 배급제에 따른 노동자의 타성적인
근무 태도를 장황한 설명으로 보충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우는, 절대 수정될 것 같지 않던 마르크스 경제이론도
그렇게 수정되는데, 어찌 우리나라만이 남북 어느 쪽도 기득권을
빼앗길세라 한 치의 양보가 없는지 모르겠다며 힘없이 머리를 저었다.
링거 속에 진통제가 주입되어 있는지, 간은 자각 증상이 없어서 그런지,
아우는 말을 하면서도 고통은 느끼지 않아 보였고,
목소리는 기가 빠졌으나 표정이 밝았다.

“모스크바 교외에 작가동맹 주택단지가 있더군.
 고리키가 레닌에게 부탁하여 일천구백삼십삼 년에 건설한
 문학가들의 이상촌이지. 소련 펜클럽 회장인 노작가 리바코프가
 거기에 살아. 별장식이라 뜰은 넓은데, 낡은 목조 가옥에는
 방이 두 개밖에 없어. 하나는 침실이요 하나는 집필실이라
 거실 겸 식당에서 대화를 나누었어.
 소련 인민의 가정이 다 그렇겠지만 노대가 집도 검소함이
 한눈에 보이더라. 한국에서도 선생님 소설이 많이 읽힌다고 말하니
 기뻐하더군. 일흔일곱의 노익장인데, 목소리가 힘이 있고
 안광이 빛나. 그러니 말년에도 『아르바트의 아이들』과 같은 대작을
 써낼 수 있겠지. 그는 다른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고르바초프를 열렬히 지지하더군. 고르바초프는 전 인민에게
 제한 없는 여행의 자유와 말할 권리를 주었고,
 예술가들에게도 무한대 표현의 자유를 주었다면서 말이야.
 사실 『아르바트의 아이들』이 스탈린 시대 일인 독재 공포정치를
 고발한 내용에다 그런 내용이 빛을 보는 시대가 됐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분 말로는, 스탈린 독재 치하 스물두 해 동안
 지식인을 포함해서 칠천만 명이나 처형되고 유배되었다더군.
 그래도 우리는 살아남았다,
 아랍 민족과 몽고로부터 침탈당했을 때 이삼백 년 노예 생활을
 묵묵히 견디어왔듯, 슬라브 민족은 참고 견디는 데는 어느 민족보다
 강하다, 하며 열변을 토하더군. 그분이 왜 그런 말을 했냐 하면,
 지급 소련에서 벌어지는 페레스트로이카는 결국 슬라브 인의
 그런 인내심이 수십 년 만에 피워낸 꽃이란 뜻이지.”

귀국을 갓 한 탓인지 해외 여행담을 늘어놓다 보니 내 말이 길어졌다.

“형님이 차입해준 『아르바트의 아이들』 세 권을 읽었죠.
 러시아 묵학의 스케일은 역시 다릅디다. 그런데 그 책에 실린
 리바코프의 약력을 보았더니, 스탈린 시대 대학 재학 중
 삼 년간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 적은 있으나
 그 뒤부터는 체제순응주의자가 되어 스탈린이 죽기 직전
 ‘스탈린상’도 수상했더군요.
 그로부터 삼십여 년 동안 이렇다 할 작품도 쓰지 않고 보신책으로
 긴 침묵 끝에, 표현의 자유시대가 도래하자 드디어 필을 들어
 스탈린을 공격한다! 이게 뭡니까? 만약 그가 이런 대변혁이 오기 전,
 칠 년 전쯤 칠십 세로 사망했다면 어찌 되 었을까요?”

현구가 리바코프를 신랄하게 공격했다. 내가 그렇게 말한다면
부르주아 지식 인의 탁상공론이란 비납깨나 받겠으나,
아우로서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충분했다.

“그래서 작가는 시대를 타고난다는 말도 있지.”

궁색해진 내 답변을 묵살하며, 현구가 화제를 바꾸었다.

“사회주의 이념은 원래 도덕적 정의에 기초를 두잖습니까.
 레닌이 볼셰비키 혁명에 성공하자 공정한 분배를 원칙으로
 계급 평등부터 실현했잖아요. 고르바초프는 정치, 경제의 다원주의를
 도입하여 그 기반 위에 삶의 질을 서유럽 수준으로 높여보자고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를 실천하고 있는 줄 아는데요?”

“볼셰비키 혁명에 성공한 일천구백십칠 년 시점에서는
 사회주의 경제이론이 맞아떨어졌지만,
 이제는 그 한계에 봉착한 셈이지. 국영백화점에 그 흔한 전자계산기
 하나 없이 판매원은 아직도 수판으로 셈을 하고 있는 실정이니깐.”

“거기 사람들 생활은 어때요?”

“자본주의 관점에서 보자면 대체로 가난해.
 백화점에 있는 상품 질은 우리나라 육십 년대 중반쯤 될까.
 그러나 사회복지 정책이 잘돼 있고 기본적인 의식주 걱정은
 없는 것 같애. 그 사회의 장점이라면, 네 말처럼 윤리적,
 도덕적 측면에서 청결하다는 점일 게야.
 그쪽 사람들은 정직하고 순박할 수밖에 없지. 당 고위층은 모르지만,
 부정부패가 없고, 그 사회에서는 거짓말, 사기, 폭력, 쟁의 따위가
 안 통하는 세상이니깐.”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어요. 소련이 서구 선진국보다 생활수준 면에선
 이삼십 년 뒤떨어졌다 하더라도, 삶의 질에서는 평균화가
 이루어져 있잖아요. 설령 더디더라도 그 평균화된 질을
 한 단계씩 높이는 일이 중요하지 우리나라처럼 소수 독점자본가와
 권력자, 거기에 기생하는 소수 유한계층 질만 높이면 뭘 합니까.
 우리 현실을 보세요. 가진 자는 너무 가져 불로소득으로 호의호식하고
 빈민층은 지하실 단칸 셋방에서 일고여덟 명이 복작대며 살고 있으니,
 지옥과 천당이 따로 없지요.
 제가 말하는 것은 사회주의를 이 땅에 꼭 실현하자는
 강경론이 아닙니다. 사회주의 국가가 정치적으로는 독재요,
 문화적으로는 획일적이요, 경제적으로는 낙후성을 면치 못하는
 단점을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을 직시할 때,
 당장 눈앞에 벌어지는 이 악순환만은 빨리 시정되어야 해요.
 우리 사회도 이제 성장 초입에 들어섰으니,
 삼백오십 만 정도로 추산되는 소외계층인 빈민층에 따뜻한 눈길을
 돌려야 해요. 이 시점에선 성장이나 수출이 더 급한 게 아니라
 분배 정의부터 제 궤도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자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만나는 꼭짓점이 있을 겝니다…‥”

말하기도 힘든지 현구가 헐떡거렸다.

“얘야, 그만 하거라. 흥분하면 몸에 좋지 않으니 그만큼 해둬.
 네가 하는 그런 말도 이천 년 전 말씀이신 성경에 이미 다
 기록되어 있지 않더냐. 부자가 천국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힘들다 했으니, 주님이 먼저 다 알고 계신다.”
 
듣고만 있던 어머니가 말참견을 했다.
나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현실 속으로 들어가 몸소 싸우는 자 앞에 나는 방관자밖에 되지 못했다.

“좋은 세월입니다. 형님이 국외 첫 나들이로 사회주의 종주국부터
 다녀오게 됐으니…….”
 
현구가 지친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현구는 자신의 일로 하여 형인 내가 당한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감옥에 있지 않은 도피 시절에는 나 역시 당국으로부터
늘 감시 대상이었고, 경찰서 정보과로 잡혀가 아우의 거처를 대라며
저들로부터 폭행을 당한 적도 두 차례 있었다.
현구가 대구에서 대학에 입학하여 서클 활동으로 처음 나선 일이
‘기독교학생연맹’이었다.
이는 아버지가 목사였으므로 우리 삼 남매가 유아세례를 받고
어릴 적부터 교회에 나가게 된 이력이 먼 인연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곧 기독교의 현실대응논리를 ‘민중적 해방신학’ 쪽에서
그 답을 얻었고, ‘억압과 가난’으로부터 민중 해방을 위해
반정부 집회와 시위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내성적이며 착하기만 하던 그가 그렇게 변할 줄은 어머니를 비롯한
주위의 누구도 짐작조차 못했다.
그러나 궤변론자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내성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변할 수 있다는, 뒤집어 생각해보기에 일리가 있는 변화였다.
아우는 몇 차례 수배당하고 구류를 산 뒤에, 삼 학년 때 강제징집당해
입대했다. 최전방 특수부대에서 냉대를 톡톡히 당한 끝에
만기제대하고, 일 년 뒤였다. 졸업을 앞둔 1976년,
아우는 서슬 푸른 긴급조치 9후 위반으로 수배되자
도피 생활을 하던 중, 이듬해 대구 근교 경산읍 건축공사 현장에서
날품을 팔다 체포되었다. 징역 이 년 자격정지 사 년을 선고받고
복역을 시작한 지 일 년 팔 개월 만에 그는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그 뒤부터 그는 노동운동판에 뛰어들었다.

졸업은 포기한 채 학력을 낮추어 대구 비산동에 있는 염색공단
‘동영염직’ 양성공을 출발로, 그는 식구에게 거주지도 알리지 않고
노동자로, 노동야학 교사로, 빈민운동가로, 대구 검단공단, 제¸공단,
비산동 염색공단, 성서공단, 월배공단을 돌며 동가식서가숙했다.*
나 역시 1980년 그해 해직기자가 되어 사 년 뒤 출판사를 시작할 때까지
생계에 타격이 컸으나, 그 당시는 물론 그 뒤에도 현구 소재를
파악하려는 수사기관의 출입이 내 서울 집과 출판사로 간단없이
이어졌다. 박현구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쟁의와 파업과 생계 대책
빈민 시위가 뒤따른다는 출입 형사의 말이었다.
그동안 아우는 두 차례 옥고를 겪었고, 그가 옥에 갇힘으로써
활동할 수 없을 때만은 우리 집에도 수사기관의 출입이 끊어졌다.
그가 마지막으로 투옥되기는 금년 봄 대구 비산동
달동네 재개발지 철거 과정에서, 철거반원과 주민 사이의 분쟁에
뛰어든 결과였다.
그는 아내와 함께 그 달동네에서 빈민운동에 헌신하고 있었는데,
철거반원 한 명의 중상과 또 한 명의 경상에 따른 피의자 고발로
구속되었던 것이다. 그를 당국에서는 대구지방 대표적인 문제인물로
파악하고 있었으나, 내게는 현구 폭행이
사실로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보아온 아우는 외유내강의 한 전형으로,
누구에게나 늘 겸손했다. 그는 내게 빈민운동의 마음가짐을 이야기하며
봉사, 헌신, 사랑을 늘 강조했다.
그런 그가 철거반원의 쇠지레를 빼앗아 그들에게 휘둘렀다는 사실은
믿을 수 없었으나 증인도 인정했고, 법정에서 아우도 시인했다.
작년 유월 중순이던가, 자기 체면도 조금은 살려달라는
숙영이의 두 차례에 걸친 장거리 전화질에 못 이겨,
나는 누이 막내시동생 결혼식에 참석차 대구로 내려간 적이 있었다.
현구로 하여 김 서방까지 자주 경찰서로 불려 다니는 누이로서
시가 쪽에 유일하게 내세울 점이라면,
오빠는 그런대로 서울에서 사장 소리를 들으며 모범적 시민으로
살고 있다는 자랑이었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결혼식에 참석하고,
어머니 뜻에 좇아 현구가 빈민운동에 헌신하는 달성공원 뒤쪽
비산동 산동네로 나섰다. 오후 두 시쯤이었다.
택시를 타자는 내 말에, 어머니는 어림없는 소리라며 한사코 버스를
고집 했다. 나는 조카 동수에게 줄 선물로 제과점에서
케이크를 한 통 샀다. 버스에서 내린 비산동 산동네 입구는
개천을 복개한 길이었다. 인도는 사람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노점 행상이 전자리를 벌이고 있었다.
싸구려 옷장수를 비롯하여 과일장수, 풀빵장수, 장난감장수,
채소를 파는 아낙네, 플라스틱 가정용품을 늘어놓은 젊은이 외에도,
온갖 잡동사니를 벌여놓은 장수들 호객 소리에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토정비결과 손금 그림판을 펼쳐놓은 점쟁이도 있었고,
면봉, 이쑤시개, 때밀이수건, 고무장갑을 파는 양다리 없는 불구자,
코흘리개를 앞에 앉혀두고 누운 채 까만 손바닥을 편 동냥꾼도 한몫을
차지했다. 좋게 말한다면 활달한 생존경쟁 현장을 보는 셈이고,
그렇지 않은 관점으로는 호구가 무엇인지 살아남기 위한
비탄의 아우성을 듣는 셈이었다.
어머니를 따라 골목길로 들어서서 소개소, 약국, 여인숙, 미장원 간판이
붙은 가게와 상점을 지나자, 빈민촌이 시작되는 언덕길이 나섰다.
뒤에서 밀어주어야 할 리어카나 지겟짐 이외에는
아무 차도 올라갈 수 없게 비탈이 삼십 도는 될 듯했다.
기왓장과 시멘트 골판을 지붕으로 덮은 집들이 주위로
촘촘하게 들어찼고, 두 사람이 비켜 갈 수 있는 좁은 골목길이 옆으로
가지를 쳤다. 골목길에는 쓰레기통은 물론,
작은 단지와 무엇이 들었는지 사과궤짝 같은 살림도구까지
내다 놓은 집도 있었다. 그런 좁은 골목에도 러닝셔츠와 팬티만 입은
여윈 아이들이 맑은 웃음을 터뜨리며 싸대었고,
골목 담장 그늘에는 노친네들이 앉아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거기서부터 나는 빈민들의 생활을 후각으로 먼저 느꼈다.
수채 내음이 섞였고 지린내가 섞였고,
털을 태우는 노린내도 섞인 듯한, 그런 모든 냄새가 함께 버무려진
역한 내음이 초여름 후텁지근한 공기 속에 녹아 있었다.
초년병 사회부 기자 시절 나는 상계동 난민촌이며,
사당동 산동네에도 취재를 다녔는데, 강남 중산층 아파트에 옮겨
살게 된 지 오륙 년 사이에 까맣게 잊어온,
이제 낯이 선 철저히 소외된 지역이었다. 길은 차츰 좁아지고
굽이로 휘돌았는데, 비탈이 갑자기 사십오 도는 되게 가팔라졌다.
수도관이 급한 비탈을 타고 올라갈 수 있는지,
쓰레기와 변소 오물은 어떻게 처리하는지, 하수물은 어디를 통해 빠져
내려가는지 알 수 없었다.

―큰애야. 여기 사는 사람들 직업을 따지면 공장 직공, 미장이, 목수는
그래도 반반한 축들이지. 막노동, 행상꾼, 무직자가 육 할이 넘는단다.
나머지는 뭔지 아냐? 다쳤거나 몸이 아파 일을 할 수 없는 병자들이지.
성경에도 보면 그렇지 않더냐. 가난한 마을에 병자와 병신이 많이 살듯,
여기도 그렇게 영육의 괴로움으로 신음하는 사람들만 모여 산단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그랬듯, 부자를 보지 않고 불쌍한 이웃들을
지켜보고 계시지.

어머니가 무릎에 손을 짚고 꼬부장히 한 발 두 발 내디디며,
헉헉 내쉬는 숨길 사이로 뱉는 말이었다.
어머니는 가압장이 설치된 공동 수도장에서, 잠시 다리쉼을 하자며
걸음을 멈추었다.
수돗물을 받으려는 물통이 골목길 가장자리로 오십 미터는
좋이 늘어섰고 물통 임자들이 뙤약볕 아래 줄을 서서,
멀끔한 차림의 내 모습보다 손에 들린 케이크 통을 내려다보았다.
부수럼딱지 같은 층층의 지붕들 사이로 발쫌한 구석마다 널어놓은
빨래가 시골 초등학교 운동회의 만국기같이 걸려 있었다.
더운 볕살이 그 위로 자글자글 끓었다.
어머니가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내게 말했다.

―큰애야. 새벽부터 일터 나가는 사람이 도시락 싸 들고
 이 골목길을 메워 걸어 내려오는 것도 볼 만하지만,
 해 질 무렵에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과 밤일 나가는 사람들을
 여기에 앉아 보고 있으면,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밀가루 한 봉지나 쌀 한 봉지 사 들고,
 또는 연탄 서너 장 새끼에 꿰어 들고 올라오는 사람들의
 그 허기진 퀭한 눈이란 배부른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거다.
 야근 나가는 젊은 애들이며, 화장 짙게 하고 술집에 나가는
 처녀애들은, 언덕길 허덕대며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비켜서서
 길을 내어준단다. 그게 여기 사람들의 인사법이지.

현구 집과 탁아소가 아직 멀었냐고 내가 물었다.
어머니가 웃으며, 하늘나라와 가장 가까운 곳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 사는 곳이야, 하고 말했다.
어머니는 산마루를 올려다보았다.
그 위로 게딱지 같은 집들이 층을 이루어 다닥다닥 이어져 있었다.
어머니와 나는 물지게 지고 땀 흘리며 오르는 아낙네들을 비켜 가며
다시 비탈길을 올랐다.
가압장 아래쪽은 한 집 평수 삼십 평은 넘어 보였는데,
그 위쪽부터는 대체로 이십여 평 정도여서 마당이래야 고작
처마 밑에 신발 벗어놓을 터밖에 없었다.
어머니 말로는, 그래도 한 가구에 일곱 자 정도 크기지만
방이 세 개는 된다고 했다.
두 개는 주인이 쓰고 하나는 세를 놓거나,
주인이 한 칸만 쓰고 방 두 개를 세로 놓고 있다는 것이다.
현구가 사는 방은 물론 사글셋방이었다. 처마 밑에 쪽마루가 있고,
쪽마루 한쪽에 간이 찬장과 개수통이 있었다.
그 옆이 연탄아궁이로, 부엌이 따로 없었다.
방 안에 아무도 없음을 알고 있었던지 어머니가 방문을 열었다.
컴컴한 방 안에는 낡은 서랍장 하나, 가방이 세 개,
서랍장 위에 이불이 얹혀 있었다. 그리고 앉은뱅이책상이 고작이었다.
그 방에서 그래도 값이 될 만한 물건은
방구석에 켜켜로 쌓인 책더미였다. 살림살이래야
리어카 하나로 실어내면 족할 분량이었다.
그나마 나머지 발쫌한 공간은 어른 셋이 누우면 꽉 찰 크기였다.

―현구네는 이렇게 산단다. 그 애가 자청하여 이렇게 사는데
 뭘 도와주랴. 숙영이가 텔레비전이라도 한 대 사줄까 했으나,
 현구 말이 그걸 볼 시간조차 없다며 거절했단다.
 가진 것이 없을수록 마음이 홀가분하다니,
 그 애야말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

어머니는 방문을 닫고, 동수 보러 빨리 가야겠다며 탁아소로
걸음을 옮겼다. 탁아소는 소나무와 잡목이 듬성듬성 섰는 산꼭대기에
있었다. 한때는 넝마주이들이 움집을 엮고 살다 그들이 떠난 뒤
쓰레기장이 되었는데, 이태 전 쓰레기장을 흙으로 묻고
현구가 천막으로 시작했다는 탁아소였다.
블록으로 벽을 쌓고 시멘트 골판으로 지붕을 덮은,
그래도 번듯하게 큰 건물이었다.
아이들의 재잘거림 이 바깥까지 왁자하게 들렸다.
교실 두 개가 각 열 평씩, 마당이 스무 평 정도되었다.
운동장은 물론, 교실도 아이들로 초만원이었다.
보모 셋이 그 아이들 시중을 들고 있었다.
자원봉사 여대생들이 교대로 동수 엄마를 돕는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녀들이겠거니 여겨졌다.

아이구, 아주버님까지 오셨네 하며, 교실에서 나온 동수 엄마가
우리를 맞았다. 마당에서 뛰놀던 아이들이
케이크 통 주위로 몰려들었다. 어머니는 방 안을 기웃거리다
고만고만한 아이들 속에서 동수를 찾아내었다.
제 할머니 품에 안겨 드는 동수에게 나는 케이크 통을 넘겼다.
동수 엄마 말로는, 이 산동네에 살며 ‘동협제작소’에 나가는 견습공이
성형연마기에 왼손 손가락 두 개가 절단되어
현구는 산재보험 관계로 아침 일찍 나갔다 했다.
그래서 결혼식에도 참석 못 했다는 것이다.
전 국민 의료보험화가 되기 전 언제인가,
서울로 올라와 내게 삼십만 원을 마련해달라던 끝에 현구가 하던 말이
그때 문득 생각났다.

―형님,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다 선량하지만은 않습니다.
 때로는 그들을 철부지 어린아이나 노망 든 노인이나 정신병자로
 생각해야 할 때도 있어요. 경우에 없는 생떼를 쓰고,
 걸핏하면 싸우고, 거짓말하고, 심지어 도둑질까지 하지요.
 살아가는 데 너무 지쳐 마음마저 그렇게 황폐해져버린 겁니다.
 그 어리광과 투정과 사나움을 탓하기에 앞서,
 그의 괴로운 삶만큼 나도 그들과 함께 아파하지 않으면
 그들을 진정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살인한 자식조차 조건 없이 사랑하듯,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않곤 하루인들 여기서 배겨내지 못해요.
 그러니 처음은 벗에게 봉사한다는 정신에서 출발하여,
 한몸이 되어 함께 뒹굴며 희생하다 보면, 얻게 되는 결론이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의 실천이요, 종 된 자로서 겸손이
 최상임을 깨닫게 되지요. 여기로 들어올 때 전 자존심 따위는
 아주 버렸어요. 안사람한테도 내가 그 점을 늘 강조하지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며칠 전, 선생님이 무조건 살려주셔야 한다며
 골수암으로 죽어가는 소년을 업고 달려온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와 함께 이틀 동안 내가 소년을 업고 병원을 여덟 군데나
 뛰었습니다. 한결같이 입원 보증금이 없다고 퇴짜를 놓더군요.
 이틀째 저녁 무렵, 소년은 끝내 내 등판에서 숨을 거뒀어요.
 막막한 분노로 그 엄마와 나는 큰길에 주저앉아 목 놓아 울었습니다.
 이번에도 그런 처지에 놓인 딱한 가정이 있어서
 한 아이를 꼭 살려내야겠기에 이렇게 형님을 찾아와
 손 벌리게 됐습니다……

그때의 현구 말을 떠올리며 탁아소 안을 둘러보던 내 눈에
올망졸망한 아이들 모습이 멀어지고, 핑글 눈물이 돌았다.
빈민촌 탁아소, 동수 엄마도 현구만큼 힘든 일을 하고 있음이
한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탁아소 건물 옆에 가건물 한 동이 있기에 열린 창문 안을 들여다보니
아녀자들이 스무 명 정도 눌어앉아 한쪽에는 조화를 만드는 참이었고,
한쪽에는 싸구려 목걸이 구슬을 잇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빈민촌 아녀자가 일용직 막노동이나, 파출부나, 행상으로 나서지 않으면
들어앉아 할 수 있는 부업이란 스웨터 뜨기, 봉투 붙이기, 조화 만들기,
목걸이 구슬 꿰기었다.
 
여덟 시 반이 되어서야 동수 엄마가 동수를 탁아소에 두었는지,
음식 싼 보자기를 들고 병실로 들어왔다.
눈 아래 주근깨 많은 깜조록히 탄 얼굴에 생머리를 뒤로 빗어
핀으로 질끈 묶었고, 헐렁한 무명셔츠 윗도리는 소매를 걷어붙였다.
여름이어서 내가 보았을 때마다 줄기차게 입고 다니던
청바지가 아닌 무릎 덮은 통치마 차림 이었다.

동수 엄마는 제 서방에게, 잘 주무셨느냐,
밤새 어디 불편한 데는 없었느냐고 사근사근 묻곤, 내게 인사 삼아 말했다.

“아주버님은 노독*도 안 풀리고 회사 일로 바쁘실 텐데
 이렇게 와 주시니 자꾸 빚만 느는군요. 고 삼 엄마는 일 년 동안
 피가 마른다던데, 중 삼에 고 삼이 겹쳤으니 서울 형님 고생이
 오죽하겠어요.”

동수 엄마는 그동안 서방 옥바라지와 그네가 꾸려가는 탁아소 일로
그 바쁘기가 다른 여자 서너 배는 될 터인데, 언제 보아도 표정이 밝았고
몸놀림이 가벼웠다.
악의는 없지만 말을 덜렁덜렁 함부로 하여 어머니 빈축을 사는 점 또한
그네의 스스럼없는 성격 탓이었다.

― 탁아소만 해도 그렇지. 온갖 병균과 악취가 진동하는 빈민촌에
그 부모가 어디 자식 인들 제대로 챙기겠냐.
밥벌이로 모두 일터에 나가면 그 애들을 받아 씻기고, 먹이고,
글 가르치고, 병원에 데려가고…… 어디 동수 엄마가 그 일뿐이냐.
탁아소를 중심 삼아 빈민촌 부녀운동도 하고 있잖아.
취업 상담에서부터 사글세 방값 문제까지, 저렇게 발 벗고 나서서 뛰니
내가 보아도 테레사든가, 그 수녀가 따로 없어.
재라고 어디 몸이 무쇠인가. 저러다 쓰러지면 어떡할는지 모르겠어.

어머니가 동수 엄마를 두고 작년에 서울에 와서 계실 때
내게 들려준 말이었다.
대구 노원동 제5공단에서 현구가 노동야학을 열고 있을 무렵,
동수 엄마는 시골 종합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곳 안경테 만드는 공장
총무부에 근무하며 야학 일을 돕다 아우와 사귀게 되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만났음인지 아우와 나이 차이가
아홉 살이나 졌다. 원형섭 목사 주례로 노곡동 산동네 교회에서
결혼식이 있던 날이 떠올랐다.
결혼식에는 노동야학에 다니던 공원들과 빈민촌 주민이 하객으로 참석했다.
결혼식 날 당사자의 가슴 두근거리는 기쁨이야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그날 신부 얼굴은 시종 미소 띤 밝은 표정이었다.
어른들 말로 혼례식 날 신부가 웃으면 흉으로 잡힌다 했는데,
그네는 서른 살을 훨씬 넘긴 나이 든 신랑을 맞으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젊은 간수 최가 나이 지긋한 간수 홍과 교대하고,
곧 전문의와 인턴들이 뭉쳐 다니는 오전 회진이 있었다.
잘 깎은 밤처럼 깔끔하게 생긴 현구 담당의인 마흔 중반의 민 박사는
환자 상태를 잠시 관찰하더니, 인턴에게 저희들이 쓰는 의학 전문 용어를
몇 마디 주고받은 뒤 병실을 떠났다.
내가 뒤쫓아 나가 민 박사에게 현구의 종합검진결과를 물었다.
민 박사는, 결과를 종합하여 분석 중이라고만 대답했다.
동수 엄마가 민 박사에게, 집에서 마련해 온 묽은 녹두죽을 환자에게
간식으로 먹여도 되냐고 물었다.
민 박사는, 필요한 영양제를 공급하고 있으며 병원 측 식단도
그렇게 짜여 있으니 무엇이든 사식은 안 된다며,
심지어 일정량의 보리차 이외 주스류도 먹여서는 안 된다는 주의를 주었다.
그들은 우르르 옆 병실로 옮겨 갔다. 잠시 뒤, 간호팀이 회진을 돌 때도
담당 간호사는 민 박사의 주의를 다시 환기시켰다.

“어머니, 아침 밥 잡수셔야지요. 저와 잠시 나갔다 오시죠.”

내가 권했으나 어머니는 아침밥 한 끼니를 금식하고 있는 지가
오래되었다며 거절했다. 병원 밖으로 나가더라도 아침 식사가 되는
음식점을 찾아야 했기에 나 역시 한 끼를 건너뛰기로 했다.
나는 고등학교 동기생 함근조를 만나러 임상병리실을 찾았다.
그곳은 본관과 가까운 다른 병동이었다.

“야, 박윤구 아닌가. 전화도 없이 아침부터 자네가 불쑥 웬일이야.
 지방병원에 처박혔다구 사람 아주 무시하기니.
 그래, 출판사 일은 어때? 책 잘 팔려?”

근조가 나를 반갑게 맞았다. 그를 만난 지 이 년이 넘은 것 같았다.
우리는 본관 건물에 달린 구내 휴게실로 옮겨 앉아,
그는 생강차를 나는 우유를 마시며, 동기생들 근황을 두고
한동안 잡담을 나누었다. 티케이로 알려진 지방 명문고 출신이라
동기생들 중에는 정계와 재계에서 출세한 자가 많았다.
해직 기자 생활을 거친 뒤 재경 동기회에 잘 나가지 않았던 터라
그들과 교우가 없었으나, 근조는 서울에 있는 출세한 동기생 근황을
나보다 더 잘 꿰뚫고 있었다. 해직기자도 복직하거나 창간된 신문사에
흡수되던데 너는 조그만 출판사에 매달려 도대체 뭘 꼼지락거리냐며
근조가 진담 반 농담 반 말했다.
지난번 역시 현구 일로 내려와 대구 동기생 몇을 만났을 때도
그가 비슷한 말을 했던 기억이 났다.
해직기자도 곧잘 정당 쪽에 붙거나 투사가 되더라만,
너는 출신이 티케이라 반정부 투사 쪽은 글렀고 전공이 사회학이니
여당 쪽은 어떠냐고 내게 물었던 것이다.
네가 뜻만 있다면 그쪽에서 붙여줄 친구들이 많지 않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삶의 길이 그런 공명심의 충족에만 있지 않다고 근조에게 대답하기에는
내가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는 맹한 사람으로 취급당하기 알맞아,
나는 멋쩍게 웃기만 했다.
내가 추레한 모양새로 해직기자 협의회모임에 나다니며
농성으로 더러 외박도 할 무렵, 어머니는 아예 대구 생활을 작파하고
서울 내 집에서 기거했다. 저렇게 남다른 길을 걷는 현구를 보나,
피란 내려와 너희들만 믿고 살아온 이 어미를 보더라도 장자인 너만은
제발 험한 길 스스로 찾아 나서지 말라는 당신의 간곡한 호소를
이틀이 멀다하며 듣고 살았다.

ㅡ 내 살아생전 통일될 그날, 이 어미 등에 업고 봄철이면
 진달래 지천으로 피는 고향산천을 꼭 구경시켜주겠다고
 너 대학 들어갈 때 굳은 약속 하지 않았느냐.
 어미한테는 너가 돈 많이 버는 일도, 남처럼 높은 사람 되어
 낮은 사람 시기 사는 것도 원치 않는다.
 너가 그저 부부 금슬 좋게 오순도순 다숩게 살며
 자식 건사 잘하고 건강만 하다면야 그 이상 소원이 없다고
 나는 늘 하나님께 기도한단다.

어머니는 그런 말도 했다. 어머니가 철야기도에 금식까지 단행하며,
장자인 내가 제발 가정적인 안정을 찾게 되기를 기원드릴 때,
나는 다른 어머니들과 구별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 모성애와 현실 사이에서
갈등도 적잖게 겪었고, 주량이 약한 나로서 소주도 꽤나 마셨다.
제5공화국이 들어선 직후던가,
현구가 ‘대구지방 노동운동 실태와 현장 사례’라는 제목의 원고 묶음을
들고 나를 찾아와 출판 문제를 상의했을 때,
내가 거절한 것도 아우가 부탁한 책을 형 출판사에서 낸다는
계면쩍은 점보다, 아우가 관계하며 원고의 편자로 되어 있는
‘대구지방 민주노조’의 그 활동이 당시의 시국과 견줄 때
다분히 문제시될 수 있다는 기우 탓이 더 강하게 작용했다.
그 원고는 대구지역 경제변천 과정, 산업구조, 제조업 현황,
노동계급 실태에 절반을 할애하고, 나머지는 열악한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의 눈물겨운 생존권 투쟁의 기록이었다.
당국의 방해로 대부분 중소 공장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친목회 단위로 사용자 측을 상대하여 노동자들이 공동투쟁에 임한
일지(日誌)식 사례가 공장 단위별로 분류되어 있었다.
신문사 통폐합에 따른 관제 언론화의 획책에 맞서서 내가 솔선하여
그 투쟁에 나섰다기보다, 나는 내 양심의 뜻에 좇아 해직기자의 길로
나섰던 셈이다. 그런 내 전력으로 보아도 비록 내 출판사가
진보적인 사회과학서를 십여 종 출판했으나,
역시 노동 현실을 다룬 그런 책은 그런 종류의 책을 내는 출판사라야
동류항으로서 성격이 부각되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현구에게 출판사를 천거할 입장이 아니었다.
나는 당시의 경색된 시국 전반을 들먹이며 아우에게 출판을 보류하라고
강력하게 권고했다. 아우는 어느 쪽으로도 자기의 마음을 보이지 않고,
바쁜 형님 시간만 빼앗았다며 예의 그 수줍은 미소를 보이곤
원고를 찾아갔다. 그 원고는 석 달 만에 책이 되어 나왔고,
보란 듯 한 권이 내게 우송되었다.
역시 내 예상대로 그 책은 발매와 동시 당국에 전량이 압수되는
수난을 겪었다. 아우는 물론, 출판사 대표와 편집 책임자가
보름 동안 구류를 살고 나왔다.

“윤구야, 너 이진서 소식 들었냐? 건설업 하는 뚱뚱한 친구 말이야.
 진서가 죽었어.” 근조가 말했다.

“그 친구가 갑자기 왜?”

“과로로 심장마비야.”

이진서는 고등학교 삼 학년 때 급우였다.
나 역시 그가 그렇게 쉬 죽으리라곤 생각 밖이었다.
문득 1960년 2월 28일이 떠올랐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 선거강연회에
고교생이 참석할까봐 우려하여 당국이 학교 측에 일요일 등교를 종용했다.
그 발상법조차 우스꽝스러운, 영화 관람이 미끼였다.
우리들은 일요 등교에 항의하여 고등학교로는 전국 처음인
가두서위를 벌였다. 오후 한 시 오 분, 삼 학년이 주동되어
수백 명이 교문을 빠져나와 어깨를 겯고 반월당 네거리에 이르는
대구 중심 관통로를 내달았다.
 “학생들 인권을 옹호하라!”
 “민주주의를 소생시켜라!”
 “우리는 학원에 개입하는 정치권력에 반대한다!”
 “우리는 비굴하지 않다!”
학생들은 이런 구호를 외치며 주먹을 내둘렀다.
대학 입시에 매달렸던 나는 그 시위를 촉발시킨 주동자 중 하나는
아니었다. 그러나 나 역시 장기집권을 음모하는 이승만 정권의
비민주적인 작태에 의분을 느끼고 있었다.
개체에서 공동체 운명으로 결속되자 모두 힘에 넘쳤다.
우리는 계속 산발적인 구호를 외치며 중앙통을 거쳐 도청광장을 향해
질주했다. 그때 나와 어깨 겯었던 동무가 진서였다.
물론 근조도 동참했다. 진서를 마지막으로 본 지 벌써 삼 년이 넘었다.
그는 소규모 건축업자답게 사십 대에 들자 몸이 났고,
말끝마다 바빠서 미치겠다는 푸념이었다.
집에서는 식구로부터 하숙생으로 내몰리고, 낮이면 현장에서 뛰고,
밤이면 그 스트레스를 푸느라 술판 앞에 앉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몸을 돌보지 않고 뛰니 주택 경기가 좋은 시절이라
그가 짓는 다세대 연립주택은 잘 팔렸다.

ㅡ 세끼 밥 먹기는 마찬가진데 돈 몇 푼 더 벌겠다고 내가 꼭
이렇게 미친놈 널뛰듯 허둥대야 하냐? 난 정 말 속물이 다 되어버렸어.
윤구, 우리 그 시절 좋았잖아. 도청 앞까지 진출했을 때 말이야.
그때 대구경찰서로 무더기 연 행 당해 꽤나 얻어터졌지.
사일구혁명은 우리가 그렇게 도화선에 불을 붙였는데,
길 닦는 놈은 따로 있고 세단 타고 지나가는 놈 따로 있으니 젠장.
이상은 멀고 현실은 가까워. 출세하구, 잘 먹구 잘살라지.
지금 우리는 뭐냐. 난 집장수가 되고 넌 그래도 식자 소리 듣는
출판쟁이가 됐으니 나보다는 낫다. 자, 마시자구. 먹는 게 남는 거 아냐.

진서가 맥주잔을 들며 떠들던 불콰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 역시 사일구 세대의 일원으로 대학 일 학년 그해,
학우들과 함께 경무대 앞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사일구의 순수한 의미는
그 뒤 계속된 군사정권에 의해 퇴색되었다.
이 땅에 참다운 민주주의의 소생을 바라며 소박한 정의감만으로
뛰쳐나갔다 총탄에 쓰러진 일백팔십오 명의 영령은 역사 뒷장으로 물러나
수유리에 밀폐되었다.
그 ‘미완의 혁명’을 열심히 들먹이던 우리 세대 일부는
혁명주역으로 자처하며 정권에 유착되어 영달에 급급했고,
사일구 이름을 욕되게 하는 자도 계속 생겨났다.
그러나 사일구가 순수하고 정직한 젊은이들 의분만으로
사령탑의 전략 전술 없이 시작되었고 끝났기에, 참여자 대부분은
본래 자기 직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사일구 정신을 계승하려는 그 어떤 노력에도 몸 바치지 않은 채,
결혼하여 가정에 안주해 버림으로써 봉급쟁이 기자로
평범하게 살아간 나날이었다.
후진국 종속적 정치 형태를 탓하며 나까지 혁명을 팔아먹기에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 나는 여지껏 어느 자리든
사일구 세대로 떳떳하게 자처한 적 없었다.

사십 대 사망률이 세계 일 위라는 말끝에
근조는 한국인의 지나친 성취욕구, 물신숭배의 이기심,
거기에 따른 맹렬한 저돌성과 조급증을 통박했다.

“한창 일할 나이인 사십 대에 쓰러진다고 생각해봐. 자식이 뭔지,
 이제부터 시집 장가 보낼 때까지 돈이 다발로 들어가는 나이 아냐.
 일할 나이만 믿고 천방지축 뛰다 진서도 그렇게 쓰러진 게야.
 예전에는 삼시 세끼만 먹어도 족했는데, 먹고살 만하게 되니
 모두들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잘사는 놈들은 제 배 터지는 줄 모르고
 돈과 땅에만 혈안이 됐지, 반대쪽에 섰는 학생 놈들과 노동자들 보라구.
 그렇게 폭력을 앞세워 죽자 살자 나선다구,
 제 배 부른 자들이 나누어 먹자며 백기 들고 나서겠어?
 이 정경유착의 방만한 시대에 말이야. 혼란만 오구, 경제나 망치는 게지.
 노동자가 파업투쟁해서 임금 쬐금 올려놓으면
 정부가 그 노동파업에 신경 쓰는 사이 물가가 더 뛰어
 노동자 가계를 덜미 잡는 것, 그들이 그걸 모르니 탈이란 말이야.
 지엔피 일만 달러까지만 좀 참으면 안 되나……”

논리가 서지 않은 근조의 주절거림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는 다시 진서 죽음으로 말머리를 돌리더니, 고 삼인 딸애가
서울대학교를 목표로 피아노를 배우는데 일주일에 두 번씩
비행기로 왕복하며 서울의 모 유명한 교수 밑에서 두 시간씩
개인교습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 수업료가 자그마치 월 큰 것 한 장이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그는 오늘의 교육제도까지 마구잡이로 헐뜯었다.
상류층 속물로 주저앉아버린 근조를 두고 사일구 세대라면,
그의 말은 꼴사나운 작태가 아닐 수 없었다.
다만 그가 남들처럼 티케이를 앞세워 세속적 욕망으로 뭉쳐진 서울바닥에
껴 붙지 않고 고향에 남아 있다는 점은 신통했다.
어쩌면 그 끼어들지 못함의 화풀이를 그렇게 입으로 짓찧는지 몰랐다.
그의 말을 들을 만큼 들어주었다 싶어 내가 말을 꺼냈다.

“너도 알고 있지. 내 동생 말이야. 현구 여기 입원했어.”

근조는, 그 문제 많은 동생? 하며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언젠가 지방신문에서 법정에 선 현구를 사진으로 보았다고 그가 말했다.
아마 비산동 재개발지역 철거민들이 몰려와 법정 소란을 벌였던
아우의 이심 공판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구속 중인 줄 아는데, 어디가 안 좋아?”

나는 현구 병력을 설명했다. 종합검진이 끝난 모양인데
지금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앞으로 병원 측에서 어떤 조치가 있을는지
알아보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그렇게 해보마고 시무룩이 대답했다.

“이따 점심이나 같이 하지. 내가 입원실로 찾아가마.”

나는 그의 말을, 그때까지 현구에 대한 결과를 알아오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현구 병동으로 돌아오니 입원실 앞 복도에 아낙네 다섯이
의자에 앉거나 쪼그려 앉아 동수 엄마와 무슨 이야기인가 나누고 있었다.
모두 표정이 어두웠다.

“친구분 만나셨어요?” 동수 엄마가 내게 물었다.

“점심시간에 이쪽에 오기로 했어요. 그때 무슨 소식이든 알아 오겠지요.”

“아주버님, 그럼 그 시간에 제가 여기로 전화하겠어요.
 만약 외출하신담 어머님께 귀띔해주세요.”

동수 엄마가 내게 말하곤 입원실로 들어갔다 나오더니,
일터는 어찌하고 이렇게 몰려오면 어떡하냐며,
그들과 함께 바삐 병동을 떠났다. 복도를 걸으며 아우 병실 쪽을
돌아보던 한 아낙네가, 선생님이 어서 회복되시고 풀려나야 될 텐데 하며
손등으로 눈꼬리를 훔쳤다. 아낙네들은 동수 엄마가 운영하는
빈민촌 탁아소 어머니들임에 틀림없었다.
하나같이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주름살이 고랑으로 패어 있었다.
상주댁처럼 왜바지 차림에 흙가루 뒤발한* 남자용 작업복을 입어,
공사판 일용직에 나섰음이 한눈에 짚여졌다.

내가 복도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찐득하게 괴는
목덜미 땀을 손수건으로 훔칠 때, 저만큼에서 숙영이 양산을 접으며
걸어왔다. 누이는 초급대학 재학 시절 그런대로 반반한 외모와
활발한 성정 덕인지 약학대학에 다니던 시골 출신
김 서방과 연애를 하더니, 졸업 뒤 곧 결혼했다.
지금은 세 아이를 두었고, 시 외곽 아파트 단지에서 약국을 열고 있었다.
일 년으로 쳐서 어머니가 서울 내 집에서 두세 달을 보낸다면
대구에서는 주로 숙영이네 살림집에 기거하며,
현구네가 사는 비산동 산동네로 그 노구를 이끌고 마치 등산이나 하듯
반찬거리를 싸 들고 다녔다. 어머니는 내 집으로 올라와 열흘쯤 계시면,
아파트 생활이 닭장 같고 감옥 같다며 푸념하기가 일쑤였다.
그럴 때 쯤이면 어김없이 누이로부터,
서울에 웬만큼 계셨으니 어머니를 보내달라는 장거리 전화가
내 집으로 걸려왔다. 김 서방이 약국을 비우면 누이가 개인주택 살림집과
삼백 미터쯤 떨어진 약국으로 나가 대신 점포를 지킬 때가 잦으니,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 밥을 챙겨 먹이랴, 잡다한 집안살림을 맡아줄
사람이 필요했다. 한편, 장사로 서른 해 가까이 시장바닥에서 보낸
바지런한 ‘니북녀자’인 어머니로선, 비록 타관이긴 하지만
오래 정이 들었던 대구요, 아직도 교동시장(예전의 양키시장)에는
벗들도 있었고, 늘 위태로워 보이는 막내아들 생활이 마음에 걸려
서둘러 서울을 떠났다.
홀어미는 죽 쑤어먹을 처지라도 되면 맏이 집에 살아야 한다던데
내가 이 무슨 주책인고 하시면서, 출근길 내가 승용차 편에 고속터미널까지
모셔다 드릴 때는, 그 자그마한 몸집에 떠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러나 현구가 다시 구속된 뒤로는 아주 대구에 주질러 앉아버리셨다.
아우 옥바라지가 어머니 몫이었던 것이다.

“오빠, 김 서방이 여기 아는 의사가 있어 알아봤는데,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다고만 말하지 구체적인 답은 회피한대.”
 
숙영이 들고 있던 양산 날개를 모두어 똑딱단추로 채우곤 말했다.
밝은 성격처럼 그 목소리에는 그늘이 없었다.

“이제 와서야 보석을 허가해줄 정도니 그렇다고 봐야지.
 시국사범으로 몰아붙이면 사람 목숨 하나야 짐승쯤으로 아는 세상 아냐.”

“오빠도 알지? 간질환이 일단 경화로 넘어가면 양의로서는
 치료제가 없다잖아. 잘 먹고 푹 쉬고…… 그래도 위와 신장 기능이
 자꾸 떨어져 소화도 안 되구 소변이 시원치 않구…….”

간장약은 잘 팔면서 약사 아내가 아는 지식이나 내가 알고 있는 상식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내가 말이 없자 숙영이, 엄마 안에 계시지 하며
입원실로 걸음을 돌렸다. 나는 누이를 불러 세웠다.

“지난번에 고마웠어.”

나는 지갑에서 접은 봉투를 꺼냈다.

“뭔데?”

“너가 대납한 현구 변호사 비용이야.”

“뭘 그런 걸 다 돌려주고 그래. 우리가 어디 남이야.”

숙영이 정색하며 내 손을 밀쳤다. 순간적으로,
우리는 정말 남다른 동기간이구나 하는 정감이 내 가슴을 뿌듯이 채웠다.
 
현구의 감정유치가 결정되었을 때, 나는 소련에 나가 있었다.
내가 집에 들여놓는 월 구십만 원으로 가계를 꾸려가는 아내로선
일백만 원을 자기 통장에서 현찰로 선뜻 찾아낼 여축금이 없었다.
출판사 경리 최 양에게 어떻게 돈을 변통하려고
회사에 전화질을 하는 사이, 대구에서 누이가 일백만 원을
내놓은 모양이었다. 그러며 올케에게 전화로, 출판사가 다들 어렵다는데
오빠가 귀국하더라도 그 돈 걱정은 말라는 단서까지 달았다고
아내가 말했다. 그러나 그 문제의 해결이야말로 출가외인인 누이 몫이
아니었기에 나는 대구로 내려오며 당좌수표 한 장을 가져왔던 것이다.

숙영이는 한사코 봉투를 받지 않겠다고 우겼다.
자기야말로 여지껏 시가와 친정을 따로 저울질해본 적이 없으며,
시집은 갔지만 그만한 돈몫 낼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잠시 실랑이 끝에, 나는 누이가 팔에 걸고 있는 마로 짠 손가방에
봉투를 쑤셔 넣고 병실로 돌아섰다.

정오를 조금 넘겨 위생복을 벗은 함근조가 왔다.
그는 내가 궁금하게 여긴 현구 문제는 언급 않고,
모처럼 만났는데 괜찮은 데로 안내하겠다며 나를 이끌었다.
어머니는 동수 엄마가 가져온 밥과 빨리 먹지 않으면 쉬어버릴
녹두즙이 있어 병실에서 누이와 함께 식사하겠다 했기에,
나는 근조를 따라나섰다. 건물 안에 있을 때는 눅눅하던 더위가,
볕살 아래 나서자 금세 살갗 땀구멍마다 물기를 자아내었다.
해는 머리맡에서 작열했다. 말복을 넘겼는데도
알아줄 만한 대구 불볕 더위였다.

“너 개 먹지?” 근조가 자기 승용차에 나를 태우고 시동을 걸며 물었다.

“물론이지.”

근조는 경산읍으로 빠지는 외곽도로로 차를 몰았다.
대구도 변두리로 계속 고층 아파트가 늘어나고 있었다.
한낮의 더위 탓도 있겠지만 이제 시내고 시 외곽이고 구별이 없는
서울에 비한다면 대구는 그런대로 교통 소통이 원활했다.
근조는 여름 한철만의 보양이 아니라 중년 나이에
왜 개고기가 좋은지에 대해 들은 풍월을 읊었다.
그는 자기들이 안 먹는다고 우리를 야만인 취급하는 서양인의
얄팍한 선민의식을 성토하며, 각 민족의 고유한 음식 관습과 식성은
존중되어야 마땅한 기본적 향유권이라고 주장했다.
근조는 병원에도 사십 대가 중심이 된 동우회 ‘멍멍회’가 있는데
그 먹자판 모임에는 결석자가 없으며, 자신이 그 회 간사라고
자랑스레 말했다.

대구와 경산 접경지대 야산 숲 속에는 보신탕과 염소탕을 전문으로 하는
대형 식당이 드문드문했다. 승용차들이 넓은 주차장에 들어찼고,
옥내 옥외 가릴 것 없이 넥타이 풀어 헤친 우리 나이 또래의 식도락 패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젓가락질하고 있었다.
갈대를 지붕으로 얹은 평상 한 귀퉁이에 자리 잡자,
근조는 주인과 잘 아는 사이인지 ‘목살’ 세 근을 전골로 주문했다.

“내과 쪽에서 뭐라 그래?” 전골냄비에서 야채와 고기가 익을 동안
 내가 물었다.

“글쎄 말이야, 경화가 심하다면서도 모두 쉬쉬하데,
 그게 단순한 폭행사건이 아닌 데다 재판에 계류 중이라…….”
 
근조가 꼬리를 빼다 말을 이었다.
 “내가 후배 한 놈을 다잡았지. 간경화라면 뻔한 병 아냐.
 그렇다면 재수감은 불가하고 장기요양 조치가 필요하잖냐고 말이야.
 그러자 후배 녀석이, 가족 승낙이 있어야겠지만,
 담당 의사들이 수술을 권유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고 있다나…….” ˇ

“그렇다면?” 나는 숨을 죽였다.

“수술이람 캔서로 봐야지.
 종양 크기가 벌써 사 센티쯤 된다나 어쩐다나……”

현구가 간암이라니! 발달한 현대의학도 간암 완치까지는 이르지 못했고,
간암 진단을 받은 환자가 일 년 이상 수명을 연장하는 경우가 흔치 않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병원으로부터 퇴원에 따른
가정 요양을 권고 받았고, 그럴 경우 서너 달이 마지막 고비였다.
아니면 수술 도중, 또는 수술 직후 합병증으로 사망하기 예사였다.
내 나이 또래 사망 소식을 전화로 접할 때,
교통사고가 아니면 간질환이 많았다. 나는 상갓집에서,
간염의 시작에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여러 차례 이야기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임상 강의를 새겨듣다 보면, 한국인에게 사십 대 후반에
주로 발생하는 간질환이야말로 아닌 밤중에 불시로 달려드는 흉악범의
비수와 같았다. 간은 자각증상이 없으므로 아무런 통증을 수반하지 않은 채
잠복하다, 어느 날 느닷없이 ‘급성간경화’란 초대장으로 날아들었다.
죽음을 남의 일로 여기고 열심히 사회 활동하는 자에게 날아드는
사형집행 예고장과 다를 바 아니었다.
그래서 내게 간질환이야말로, 반드시 내가 죽고 너도 죽이겠다는
맹독성이 간을 비밀한 터 삼아 자생력을 기르다,
결정적 시한에 당도하면 스스로 폭발해버림으로써,
간은 물론 주위의 생생한 장기까지 일시에 파괴시켜 몸뚱이를
통째 휴지(休止)화시키는 정예 결사대로 여겨졌다.

“만약에 수술한다면?”

“가능성도 많지. 물론 조기 발견일수록 성공률이 높지만,
 내가 알기로 수술 후 삼사 년 버틴 사람도 있고
 정상인으로 더 산 사람도 있으니깐.
 간은 그 무게가 일 점 사 킬로나 되는 가장 큰 장기 아냐.
 그러니 자생력이 강하고, 간이 삼 분의 일만 기능을 해줘도
 정상인과 다름없이 활동할 수 있으니깐.”
 
찬 물수건으로 땀을 닦던 근조의 무심한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현구도 수술을 받아야 할까?”

“메스를 대지 않는다면 식이요법과 휴식밖에 더 있겠어?”

“수술해야 할 만큼 악화되었다는 거냐?”
 
쓸데없는 질문인 줄 알면서 나는 어눌한 목소리로 자꾸 물었다.
미끄러운 나무줄기에 한사코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려
버둥거리는 나를 보듯 했다.

“네 동생이 재판에 계류 중이라 그 점에서 선뜻 단안을 못 내리는
 눈치더라. 사실 간질환도 조기 발견만 하면 완치가 가능하지만
 병원을 찾을 땐 이미 한 발 늦은 뒤거든.
 그러므로 꼭 교도소 당국을 탓할 수만도 없지.
 어제까지 멀쩡한 사람이, 요즘 과로로 피곤하다며 종합검진이나 한번
 받겠다고 병원에 왔다가 간경변이란 진단을 덜컥 받게 되는 게
 보통이니깐. 그러고 삼사 개월, 길면 일이 년 이내 끝장을 보게 되지……”

근조 말이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촛농으로 녹아내리듯
기운이 빠졌고 주위의 사물이 눈앞에서 멀어졌다.
충분한 보양만이 장수의 지름길이란 듯 이열치열의 화식(火食)을 즐기는
식도락 패 모습도, 그들의 지껄임도 내 눈과 귀에 닿지 않았다.
사망을 남의 일로만 알고 병상에 누워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던
현구의 마르고 찌든 얼굴만이 떠올랐다.
아니, 나는 그의 모습에서 어쩌면 이런 상태가 되기까지 아주
무관하다고만 볼 수 없는 그의 유년 시절 한 토막을 회상할 수 있었다.

우리네 식구가 1950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겨울의 눈보라를 가르고
동두천에서 서울을 거쳐 천안으로 정처 없는 남행길을 재촉할 때,
숙영이와 나조차 영양실조로 꼬치꼬치 말라가던 처지인데,
어머니야말로 제대로 입에 들어갈 건더기가 없었다.
현구를 산파의 도움 없이 낳았으나 젖이 말라 젖퉁이는
늘어진 빈 주머니였다. 아직 핏덩이와 다름없던 현구는
오디! 같은 어머니 젖꼭지를 피멍 들게 빨았으나 젖이 나올 리 없었다.
누이와 나는 꽁꽁 언 버려진 밭을 헤매며 서리앉아 얼어붙은
누런 배춧잎도 소중히 거두어 삭정이를 지핀 불에 데쳐 허기를 끌 때,
어머니는 밀고 내려오는 중공군 공세에 쫓겨 다시 피란 짐을 싸던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아우의 애처로운 모습을 팔아
동냥죽을 구걸해야 했다. 동냥젖이 아니라 죽이었고,
끼니때에 앞서 만나 좁쌀죽마저 제대로 못 얻어먹일 때는
잦아진 죽물을 얻어 어린 목숨을 연명시켰다. 생명력이란 모질었다.
어머니가 이삼십 리쯤 걷다, 등짝에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며
내게 포대기를 들쳐보라 했을 때, 꺼지지 않는 불씨로 한 생명이 거기에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었다.
현구는 그렇게 여린 숨줄을 이어 마치 어머니에 혹처럼 붙어
대구까지 달려올 수 있었다. 대구에 도착하여 피란민 수용소에서
겨울을 넘기고 신암동 산비탈에 거적 집을 짓자,
어머니는 양키시장으로 싸돌며 양담배와 미제 비누 따위를 팔았다.
나는 피란민 천막학교에 편입했고 누이도 나와 함께 입학했다.
나는 방과 후면 탈지분유나 옥수수가루 한 봉지를 얻으려
코쟁이가 운영하던 구호급식소에서 늘 줄을 서야 했다.
헛걸음치는 날도 있었지만 서너 시간 기다려 얻어오는
그 구호물자 한 봉지는 현구에게 요긴한 양식이었다.
아우에게 이상한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기는 그의 나이 세 살 때였다.
그즈음에는 행상이 아니라 양키시장 골목길 모퉁이에 좌판을 펴놓고
장사를 벌이던 어머니는 일터로 나갈 때 현구를 늘 데리고 다녔다.
그러나 하루 종일 발목을 잡아매어둘 수 없다 보니
어머니가 물건을 팔 때나 잠시 다른 데 눈을 돌리면 현구가 없어지곤 했다.
아우는 어느 사이 안짱다리 걸음으로 골목길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다.
마치 신생아 때 굶은 벌충이라도 하듯, 여름철이면 길바닥에 버려진
수박이나 참외 껍질을 닥치는 대로 주워 먹었다.
버린 복숭아씨에 붙은 아교 같은 속살을 뜯어 먹으려다
복승아씨가 목구멍에 걸려 숨이 막혀 죽을 뻔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현구 몸에 나타난 헛배 부른 증상은 이상한 게 아니라
충분히 그럴 소지가 있었다. 현구 배는 올챙이처럼 탱탱하게 부풀었고
푸른 심줄이 요철처럼 도드라졌다.
어머니는 그제서야 아우를 데리고 위생병원으로 갔다.
유동식으로 식사량을 줄이고 규칙적인 식사를 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과 함께 산토닌⁕ 몇 알을 얻어 왔을 뿐 달리 조치는 없었다.
아우는 산토닌을 먹자 엄청난 양의 회충을 설사로 쏟아내었다.
밑을 닦아주니 실지렁이 같은 회충이 까맣게 묻어나왔다고
어머니가 말했다. 그로부터 아우의 배는 차츰 꺼졌다.
노랗던 얼굴도 핏기가 돌았다.
그러나 유아기 건강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을 어느 책에서 읽었듯,
아우는 유아 때의 굶주림으로 오장육부가 발육 단계부터 부실할 수밖에
없었음이 자명한 이치였다.

낮술이라 무엇하지만 보신탕에는 소주로 입을 헹궈야 한다며
근조는 오이채를 섞은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그는 넥타이를 느긋이 풀고 끓는 탕에서 고기를 건져 갖은양념으로 버무린
접시에 열심히 찍어 먹었다.

“간병에는 고단백질의 충분한 공급이 급선무인데,
 개고기가 바로 불포화성 고단백 덩어리 아닌가.
 그런데 경화로 진행되어 간이 굳기 시작하면 육질은 소화를 못 시켜
 단백질 분해 능력이 떨어지는 게 탈이란 말이야.” 근조가 말했다.

근조는 목뼈 한 토막을 냄비에서 건져내어 젓가락으로 게살 파먹듯
뼈에 붙은 살을 발기어 먹었다. 나는 아침밥을 걸렀는데도 입 안이 썼고,
식욕이 동하지 않았다. 아직은 간에 별다른 이상이 없음을 알고 있지만
그 간을 더 보호하겠다고 고단백질을 밝히는 내 식탐이
간질환을 앓는 현구에게 죄를 짓는 마음도 들었다.
고기 몇 점을 먹고 국물을 안주로, 나는 평소 낮술을 하지 않았으나
소주를 석 잔이나 마셨다.

현구가 있는 병동으로 돌아오니 병동 현관 앞에는 뙤약볕 아래
대학생인지 공원인지 얼핏 구별이 가지 않는 젊은이 여덟 명이
이열종대로 줄지어 서 있었다. 그들 중에는 여성도 둘 끼였다.
한 젊은이의 선창에 따라 다른 젊은이들이 후렴 구호를 외쳐댔다.
구호를 외칠 때 불끈 쥔 오른손을 힘차게 앞으로 뻗었다.

“박현구 선생을 살려내라!”

“살려내라, 살려내라!”

“박현구 선생을 당장 석방하라!”

“당장 석방하라, 석방하라!”

“당국은 빈민촌 철거민 대책을 조속히 세워라!”

“조속히 세워라, 세워라!”

나는 주위에 모여 구경하는 사람들과 함께 농성에 나선 그 젊은이들의
외침을 잠시 구경했다. 현구의 나이 어린 동지들을 보며 나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사일구 때 내 모습도 저렇게 용감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복도로 들어서자 전투경찰대원 셋이 나를 막았다.
무전기를 든 상급자가 내게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나는 주민등록증을 보이며 박현구 형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 통과를 허락하더니 무선전화기로 어디론가 바삐 연락했다.
전투경찰대원 둘이 병실 앞을 지켰다.
병실에는 천장에 붙은 선풍기의 프로펠러가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하사관생 같던 간수 최에 비해 사람이 물러 보이는 나이 든 간수 홍은
열린 창밖을 무료하게 내다보다 나를 맞았다.
흰 노타이에 감색바지 차림의, 머리를 치켜 깎은 뚱뚱한 사내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신문을 보다 내게 감사나운* 눈길을 던졌다.

“누구시오?” 신문을 보던 사내가 수사관 말투로 물었다.

“현구 형 됩니다.”

내 말에 그는 잠자코 신문에 다시 눈을 옮겼다.
어머니와 숙영이, 그리고 소매 짧은 여름용 점퍼에 이마가 벗겨진 사내는
현구가 누운 침대 쪽에 몰려 있었다.
마침 이마 벗겨진 사내가 기도를 하던 참이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다 하셨으니, 우리 형제의 이 아픔과 눈물을
 씻겨주옵소서.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셨듯,
 능멸한 것은 치시고, 썩을 것은 땅속에 묻으시고,
 선하고 힘없는 사람은 새롭게 태어나게 하소서……”

성경 책을 두 손에 받쳐 든 어머니가 기도 중간에 간절하게 아멘을
애소했다.*
훤한 정수리에 몇 가닥 머리카락이 푸스스하게 엉킨 낡은 점퍼 차림의
그는 원형섭 목사였다. 현구가 빈민촌 개척교회로 뛰어들게 만든
장본인으로 현구 결혼식에 주례를 섰던 그는,
대구 노곡동 산동네에 교회를 열고 있었다.
아우가 대학교 다닐 때 나는 공판정 피고석에 아우와 나란히 앉았던
당시 원형섭 전도사를 본 게 그와 첫 만남이었다.
불온 유인불 소지죄로 잡혀 들어간 기독교학생연맹 소속 대학생 셋과
원 전도사는 그 재판에서 2년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당시 민완기자 소리를 들으며 시건방도 곧잘 떨었던 나는
다방에서 원 전도사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지금도 일요일 낮 예배는 아내와 함께 빠지지 않지만,
나는 내가 생각해도 독실한 신자로 자부할 입장은 봇 된다.
그즈음에는 지금만큼도 교회에 열성을 보이지 않을 때였다.
다방에서 나는, 원 형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까 하고
당돌한 질문을 던졌다. 그런 종류의 질문은 누가 내게 던졌을 때
그 답변이 가장 궁한, 두려운 질문이기도 했다.
원 전도사는 별 어려움 없이 그 대답을 풀어나갔다.

― 부활을 믿지 않고 어떻게 목회자의 길을 한평생 걸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살아나신 사건은 사실입니다. 그분 주위에 있던 여러 추종자들이
 살아나신 예수님을 똑똑히 보았다고 증거했지요.
 제자 도마만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그 못 자국을
 직접 손으로 만져보지 않고는 그분의 부활을 못 믿겠다고 말했지요.
 냉철한 이성과 과학을 앞세우는 오늘의 현대인도 도마와 같은 그런 의심을
 마음속에 품고 있을 겁니다. 예수님이 친히 도마 앞에 나타나셔,
 내 손을 만져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치고 믿음을 가져라라고 말씀했지요.
 도마가 그제서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도마가 살았던 그 시대에 살고 있지 않으므로
 그분의 피 묻은 못 자국 흉터를 직접 볼 수는 없지요.
 훗날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주님은 도마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복이 있다.”

원 전도사의 다음 말은 그 비약이 심했음에도, 나의 폐부를 강하게 찔렀다.

ㅡ 저는 예수님의 못 박힌 그 핏자국을 가난한 자의 신음과
 그들이 흘리는 눈물을 통해 지금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지상의 고통받는 자들 속에 다시 부활하신 겁니다.
 너희들을 대속하여*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의 모습이 이러하다고,
 예수님은 많은 빈자들의 모습으로 지금도 부활하여 도마 앞에 보여주듯
 우리에게, 너희들이 나를 위해 할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기도를 마치자 눈을 뜬 네 사람이 나를 보았다.
원 목사와 나는 인사를 나누었다. 악수를 할 때 상대방 손을 쥐지 않고
맡기는 그의 버릇은 여전했다. 원 목사는 언제 보아도 그 복장이
노동자나 지게꾼 같았다. 후줄그레한 바지에 싸구려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민 박사가 보호자를 찾기에, 너가 오면 함께 가기로 했다.
 그래, 친구가 뭐라든?”
 
어머니가 눈물 괸 겹주름 진 눈꺼풀을 슴벅이며 물었다.

“그 친구도 뭘 잘 알지 못하고…… 나중에 말씀드리지요.”

나는 현구에게 눈을 돌렸다. 복수를 뽑았다는데도 홑이불 아래
그의 배가 마른 몸만큼 꺼져 있지 않았다.
아우가 나와 눈을 맞추며 미소를 띠었다.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음에도 병실이 무더운 탓인지 그의 얼굴과 목에는
찐득한 땀이 번질거렸다.
나는 보조탁자에 있는 젖은 수건으로 그의 이마와 목을 닦아주었다.

“어디 불편한 데는 없고?” 내가 물었다.

“여기로 오기 전에는 코피가 자주 났지만 그건 그쳤는데,
 허리가 계속 결려요.”

“내가 좀 주물러주랴?”

“어머니가 해주셨어요.”

매미 울음소리를 가르며 바깥에서 외치는 구호가 조금 디 크게 들렸다.
그쪽에 신경 쓰던 뚱뚱한 사내가,

 “저 새끼들…….”
 
하고 이빨 사이에 욕설을 으깨며 병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내가 나가 저 애들을 돌려보냈으면 좋겠는데, 병실 밖으로는
 허가 없이 나갈 수 없다니……”

현구가 말하자, 그 말에 이어 원 목사가 내게 보충설명을 했다.

“조금 전에 한바탕 소동이 났습니다. 학생 둘과 공원 하나가
 병실을 노크하며 현구 씨 면회를 요청했지요. 간수 저이가 안 된다며
 병실 문을 안에서 잠가버렸습니다. 그러곤 어디로 전화를 걸자
 전경대원들이 나타나고, 퇴짜 맞은 학생들은 자기 패를 불러 모으고…….”

“나 때문에 주위에서 이렇게 걱정하니 미안해서…… 
 어서 회복되어야 할 텐데…… 뭐 살 가망이 없다 해도 순종해야지,
 그런 생각도 하지요. 그동안 열심히 살았고, 제가 했던 일을
 후회하진 않으니깐요. 이 나라 이 땅에 다시 태어난다 해도
 현실이 지금 상태에서 개선되어 있지 않다면 역시 제 할 일은
 이 일이겠거니, 그런 마음밖에 들잖아요.”

현구 말이 꼭 유언처럼 들려 마음이 아팠다. 그의 말에는,
태어날 때부터 마음 한 귀퉁이에 자기가 들어앉을 감옥 한 칸을
마련해놓고 살아온 듯한 달관이 느껴지기도 했다.
후회 없는 삶은 아름답지만, 현구의 경우는 아름다운 만큼 안타까움도
더했다.

“얘야, 그런 말 말아라, 넌 이 어미보다 스물아홉 해는 더 살 거다.
 너는 명줄을 길게 타고났으니깐.
 큰애들은 그때 나이가 어려 잘 모를 거다. 현구가 유아세례를 받을 때
 제일교회 이 목사님이, 박 목사님을 하늘나라로 데려가시며
 이렇게 한 생명을 대신 주셨으니 이는 아브라함의 자손처럼
 아버지 몫까지 살아 대대로 번창할 거라고 하시지 않았겠냐.
 나는 지금도 그 말씀을 똑똑히 외고 있단다.
 연전에 팔순을 넘기신 이 목사님을 병문안 가서 그 말을 했더니
 문 권사님은 기억력도 좋다며 웃으시더라.”
 
어머니가 말했다.
현구의 유아세례 이야기는 여러 차례 들은 말이었다.
어머니는 그 말을 스스로에게 최면이라도 건 듯 철저히 믿었고,
지금도 말을 할 때 그 목소리가 확신에 차 있었다.
그 누구도 나로부터 현구만은 빼앗거나 떼어놓을 수 없다는 신념은
절대적 신앙만큼이나 옹골차, 아들이 옥에 갇혔을 때나 수배당할 때,
민가협 모임에서도 어머니는 누구보다 강단 있고 당당하게 대처(敖)다.
 꼭 그런 결과는 아니겠지만, 어머니는 끝내 아들을 당신 품으로
 돌려받곤 했다.

“어머니, 그럼 민 박사 뵈러 갑시다.”

내가 말하자, 현구가 일어나려는 몸짓을 했다.

“형님, 소변이……”

나는 현구를 부축하여 일으켜 앉혔다. 주삿바늘이 팔목과 연결된 링거병을
들고 그를 부축하여 실내 화장실로 데리고 갔다.
아우는 주삿바늘이 꽂히지 않은 손으로 환자복 오줌 구멍을 더듬어
시든 연장을 꺼내었다. 그가 용을 썼으나 오줌이 쉬 나오지 않았다.
요기가 있는데도 늘 이렇다니깐 하고 그가 중얼거리며,
다리를 떨고 한동안 서 있었다. 불룩한 배가 가쁜 숨길 탓으로
경련을 일으켰다. 한참 만에야 뜨물이듯 고름이듯 몇 방울 탁한 오줌이
변기에 떨어졌다. 이뇨제를 쓰고 있을 텐데 신장 기능이
그 도움조차 받아들일 수 없다면?
수술로써 그가 회복되리란 가능성에 한 가닥 기대마저 내 마음에서
무너짐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어머니처럼 신념화되지 못했으나
현구가 여기에서 생을 고별한다곤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숱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튼튼하게 버티어왔다.
또한 그는 이 땅에 사는 어느 누구보다 그 쓰임새에서
소중한 머릿돌이었다. 그는 서울올림픽 이후,
노동운동에선 한발 물러서서 빈민운동 쪽에 열성을 쏟아왔다.

― 노동자들은 그래도 좋은 세상 만나 이제 자기네 스스로 조합을 만들어
공동투쟁으로 대처하는데, 일용직이 대부분인 빈민들이야말로
일정한 봉급을 받나요, 조합을 만들 수 있나요.
거기에다 빈민들 가족 구성을 보면 결손가정이 아니면 한둘씩
병자나 노약자가 끼였게 마련이거든요. 정박아나 지체부자유아,
그 외 심신장애아도 빈민층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제 나는 평생 그들을 위해 살기로 했어요.

현구는 내게 했던 말처럼, 그의 그‘가난한 자를 위한 사랑의 실천운동’
이야말로 하나님이 누구보다도 귀히 여기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한마디로 그는 소명(召命)을 받은 자였다.

침대에 다시 뉘어놓은 현구를 숙영이와 원 목사에게 맡겨두고,
나는 어머니와 함께 민 박사를 만나러 갔다.

우리가 긴 복도를 질러가자, 현관 입구에서 전투경찰대원들과 두 노인이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들어가겠다, 못 들어간다는 입씨름이었다.
밀짚모자 쓴 콧수염 기른 노인이 어머니를 알아보곤,
문 권사님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했다. 창길이 할아버지시구먼요,
하고 어머니가 알은체 절을 하며 반겼다.
현구 주위 사람들이 다 그렇듯 외양을 보니 산동네 비산동 주민인 듯했다.

“아, 글쎄 박 선생 면회가 안 된다잖아요. 젊은이들은 그렇다 치구,
 노인들 문병까지 왜 막습니까. 면회도 못할 만큼 박 선생이 그렇게
 위독한가요?”

“이 사람들이 안 된다면 난들 어쩌겠어요.
 위독하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현구는 위독하지 않아요.”
 
어머니가 또렷하게 말했다.

“어머니, 가세요.”

나는 어머니 팔을 끌었다. 구호가 끊긴 바깥으로 나서니 학생들은
뙤약볕 아래, 겉옷이 땀에 흠뻑 젖은 채 가부좌 틀고 앉아 있었다.
침묵시위를 벌이는지 말없이 앉아 있는 그들의 땀에 젖은 모습이,
마치 선정(禪定)에 임한 고행하는 승려들 같았다.

“너들 중에 학생도 있는 것 같구나. 지성인이라 자부한다면
 다른 환자들도 생각해얄 게 아냐. 여기가 어디 시장바닥인가.
 또한 현구 씨도 지금 몸 상태가 아주 나빠. 직계가족 이외
 일절 접견을 금지하라는 의사의 엄명인데, 이렇게 고함까지 질러대면
 그분이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겠어? 만약 또 구호를 외쳤다간
 모조리 연행할 테니 그리 알아!”
 
뚱뚱한 수사관이 훈계하곤 병동 안으로 걸음을 돌렸다.
본관 건물로 결을 때야 나는 근조가 들려준 말을 어머니에게 옮겼다.
신앙으로 다져진 신념이 어머니를 굳게 붙들고 있는 이상,
뒤에 받게 될는지 모를 큰 충격을 나눈다는 뜻에서 사실대로 들려줌이
좋을 것 같았다. 경화에 종양까지 발견된 상태라는 내 말에 어머니는,
하나님 맙소사 하고 신음을 흘렸다.
어머니는 쪼그라진 입을 굳게 다물고 다른 말을 더 묻지 않았다.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하는 냉정한 모습이라 나 역시 말을 붙일 수 없었다.
어머니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으나 옮겨 딛는 고무신 코끝이 떨렸다.
나는 내과 안내실에서 민종학 박사를 찾았다.
간호사는 ‘내과 3’을 찾아가라고 일러주었다.
민 박사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바깥 회출이 아니고 병원 안에 있다기에
어머니와 나는 진찰실 안쪽 개인 방에서 그를 기다렸다.
에어컨이 가동되어 실내가 시원했다.
이십 분이 지나서야 민 박사가 나타났다. 그는 가족을 위로시킬 속셈인지,
앞으로 지게 될 부담을 덜려는지, 난치병으로서의 간질환을
자상하게 설명했다. 현구를 지목하진 않았으나,
‘치명적’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그 빈도만큼, 위협적인 내용이었다.
어머니가 암이냐고 대놓고 물었다. 민 박사는 상냥하게,
굳어진 부분에 더욱 굳은 팥알 크기가 발견되었다고 완곡하게 표현 했다.

“……우리의 소견으로 최선의 방법은,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병행해야 한다는 데 일차 합의를 보았습니다. 물론 확률은 절반이지요.
 만약 당사자나 가족 측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인슐린 요법과 식이요법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긴 합니다만……”

“박사님.” 나는 민 박사 말을 잘랐다. 
“방사선 치료라면, 종양이 다른 부위까지 퍼졌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악화된 상태라면 수술을 종용하지 않고,
 차라리 자가 요양의 퇴원을 권고하겠습니다.”

“검찰 쪽에도 병원 측 복안을 통보했습니까?”

“우리는 검진 결과에 따른 후속조치로서 의견만 밝혔습니다.”

민 박사 표현은 사무적이었으나, 여유가 있었고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나는 어머니 얼굴을 보았다. 어머니는 뚫어지게 민 박사를 쏘아보았다.
에어컨 바람을 타는지 하얀 머리카락 몇 올이 주름진 이마 앞에서
나풀거렸다.

“수술은 안 돼요. 현구 몸에 칼을 댈 수 없어요. 칼을 대느니 차라리
 안수로 그 간을 정케 하겠어요. 누가 뭐래도 하나님은
 우리 아이 편이니깐요!”

어머니가 갑자기 소리쳤다.
어머니는 튕기듯 의자에서 일어섰다. 조그마한 몸이지만 넘어질 듯하여
내가 어머니를 부축했다.

“박사님, 일단 변호사를 만나보겠습니다. 당장 수술을 할 만큼
 그렇게 위급하진 않지요? 그렇게 위급하다면 지연된 감정유치 허가가
 현구 생명을 빼앗은 결과입니다.”

내가 바삐 말하곤 어머니 허리에 팔을 둘러 진찰실 쪽으로 나섰다.
환자 가족에게 점진적인 충격요법의 일차 단계 통보를 끝냈음인지,
등 뒤에서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현구 병동 쪽으로 걸으며, 막내를 공기 좋은 기도원으로
데리고 가면 어떠냐고 내게 물었다. 안수로 말기 암환자까지 완치시킨
신령한 목사가 있다는 것이다. 간질환에 소양이 있는 교회 권사 한 분이
오늘 저녁 토룡탕 한 병을 가져오기로 했는데 그걸 싸 들고
기도원으로 가서 먹이며 주님께 의지하면 현구 병을 깨끗이
완치시킬 수 있다고 장담했다.
어머니는 간질환에 관해 웬만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으나
의외로 그 목소리는 카랑카랑했고, 걸음걸이도 힘이 있었다.
눈물을 비추지 않는 점으로도 어머니는 아우의 병을 애써 절망적으로
생각지 않고 있음이 분명 했다.
내 그런 판단은 어머니의 다음 말을 통해 금방 드러났다.

“외국에서 갓 돌아와 너도 바쁠 텐데 여기서 이렇게 어정거려서야 되겠냐.
 올라가서 네 일 보거라. 급한 다른 일이 있으면 또 연락하마.
 서울에서 대구까지 오는 데야 네 시간밖에 더 걸리느냐.
 전에도 동수 엄마와 내가 다 옥바라지했고, 현구를 구해냈다.
 옥 안이 아니고 병원까지 빼냈는데 설마 기도원이나 집으로
 못 데려가려구. 내가 변호사를 만나마. 그 젊은이도 교회 집사고,
 내 말을 잘 듣더라.”

어머니가 내 걱정까지 했다. 변호사는 내가 만나보겠다고 말했다.
변호사가 수술 가부를 판단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누구보다 현구와 가까운 동수 엄마의 의견이 어떨는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수술에 반대하고 싶은 입장이었다.
간 수술은 최후의 수단으로서 마지막 걸게 되는 한 가닥 희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내 상식적 판단은 나 자신도 믿을 수 없었기에,
나는 밤기차 편으로 상경하여 내과 전문의 동기생을 만나
자문을 구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법원 앞에 있는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
인권 변호사로 시국사범을 많이 맡아온 주영준을 만났다.
그는 현구 나이 또래였다.
나는 그에게 현구의 종합검진 결과를 알려주었다.
간질환은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이 권위가 있으니 현구를 그쪽으로 옮기면
어떠냐고 내가 물었다. 내 생각으론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종합검진을 한 번 더 받고, 수술 문제를 그때 결정할 수도 있었다.

“내가 보기에 여기서의 수술은 이판사판으로 해보자는 거고,
 가족이 수술을 거부한다면 시간이나 끌겠다는 배짱 아닙니까.
 ‘유치장소변경 신청서’를 법원에 내겠어요. 서울대학교 부속병원과
 비산동 거주지 두 군데로 말입니다.
 그러나 법원이 서울대학교 쪽은 모르지만 집으로는 허가해주지
 않을 겁니다. 비산동 일대 빈민지역과 그 주변 공단은
 현구 씨 생활 터전이니깐요. 현구 씨 문제가 밖으로 알려질수록
 당국으로선 골치 아픈 문제가 발생할 테니 이로울 게 없지요.”
 
주 변호사가 말했다. 그는 내일 아침에 유치장소 변경 신청서를
법원에 청구하겠다고 내게 약속했다.
대학병원으로 돌아오니 어느덧 여름의 긴 해가 기울어 석양에
당도해 있었다. 현관 앞에서 농성을 벌이던 학생들은 돌아가버렸고,
오늘부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야간근무까지 설 요량인지
병동 현관과 병실 앞은 여전히 전투경 찰대원틀이 지키고 있었다.
병실에는 간수가 젊은 최로 다시 교대되었으나, 뚱뚱한 수사관은 없었다.
숙영이와 원 목사 역시 돌아갔고, 조카 동수를 데리고 계수 씨가 와 있었다.
그네는 침대 뒤로 돌아가 옆으로 누운 아우의 허리를
주먹으로 가볍게 치거나 주물렀다.
아우는 아들을 침대 가장자리에 앉히고 아비와 자식과의 정다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동수 엄마는 미소 띤 얼굴로 부자 대화를 들었다.

“나는 이담에 의사가 될 테야. 그래야 아빠 병도 고쳐줄 수 있으니깐요.”
 네 살배기 동수 말이었다.

“아빠 병도 고쳐주어야겠지만 우리 산동네에는 아픈 사람이 많잖아.
 그 사람들 병도 고쳐주어야지.”

“그래, 그래. 꼭 의사가 돼야지. 아빠, 아파서 걸을 수 없으면
 택시 타고 집에 가요. 버스 말고 택시. 난 택시 안 타봤거든.
 탁아소에 붙은 내 그림도 보여줄게요.”

동수가 혀 짧은 소리로 제 아버지를 조르자 돋보기 끼고 성경을 들치던
어머니가, 조 앙증맞은 것 하며 눈을 흘겼다.
병실 안은 어디에도 죽음의 그림자가 없었다.
저 젊은 아내와 어린것을 두고 현구가 눈을 감는다면…… 
쉰을 바라보는 나이인데도 내 마음이 감상에 젖어 코끝이 찡해왔다.
그제서야 가방에 들어 있는 소련에서 사 온 선물이 떠올랐다.
어머니, 숙영이, 동수 엄마 몫의 양털로 짠 숄과 동수에게 줄 함석으로
만든 장난감 두 개였다. 하나는 병원차였고 하나는 소방차였다.
나는 장난감 자동차를 동수 손에 쥐여주었다.

“와, 좋다! 내일 애들한테 자랑해야지. 큰아버지 고맙습니다.”

동수가 장난감 자동차를 머리 위로 쳐들고 우쭐거렸다.
기쁨이 얼굴 가득 피어났다.
나는 담배를 피우러 복도로 나왔다. 창밖 뜰에는 해 진 뒤의 그늘이
넓게 펴져 있었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바람기가 있는지 나뭇잎이 흔들렸다.
넓은 뜰 여기저기에 휠체어를 탄 환자들이 더위가 꺾인 저녁 한때의
시원함을 즐기려 산책 나온 한가로운 모습도 보였다.
가까이에서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깃소리가 들렸다.
창틀 옆에 바짝 다가서서 내다보니 바로 창 아래 그늘에 노인 네 사람이
모여 앉아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두 노인은 어머니와 내가 민 박사를 만나러 갈 때 어머니에게 인사했던
낯익은 분이었다.

“……에이지구 철거할 때 말이야. 아 글쎄, 양같이 순한 박 선생이
 그렇게 화를 내는 걸 처음 봤다니깐. 앓는 할머니가 집 안에 있다며
 선생이 몇 차례나 엄 씨네 집 앞을 막아서서 두 팔 벌렸지.
 한 시간만 여유를 달라고 말일세. 그런데 그 무지막지한 철거반원들한테
 박 선생 호소가 먹혀들 리 있겠어.
 공무를 집행한다는 데야 인정사정 볼 게 없었지.
 철거반원이 선생을 사납게 밀어뜨리고 함마*와 쇠지레로
 판자벽을 내리치기 시작하더군. 그러자 안에서 비명이 터지고,
 상주 댁이 어린 자식을 품에 안고 쪽문으로 뛰어나왔어.
 집 안에 어머님이 계시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상주댁이 외쳤지.
 그러나 철거반원들은 들은 척도 않더군. 그때, 함마질에 튕겨 나간
 판자 조각이 상주댁 어린 자식 이마를 때려버린 거라.
 어린것 이마에서 피가 줄줄 흘렀어. 그 광경을 보던 박 선생 얼굴이
 갑자기 험악해지더군. 내가 옆에서 보니 선생 눈에 불이 번쩍하더라.
 이거 무슨 일이 터지겠구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박 선생이 철거반원에게 달려들어 쇠지레를 빼앗더니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지 뭐냐. 눈물을 철철 흘리며 미친 사람처럼,
 너들도 인간이냐며 철거반원을 치지 않았겠어.”

“내가 보았대도 가만있잖았겠다. 피토 눈물도 없는 종자들 같으니라구.”

“원 목사 그 양반도 현장에 있었는데, 박 선생이 구속되고 난 뒤,
 그때 그 장면을 두고 묘한 말을 하대. 뭐라더라, 그 있잖는가.
 예수께서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를 내쫓고 돈 바꾸는 자며
 비둘기 파는 자들 의자를 둘러엎으셨다는 그 말씀,
 바로 그 장면을 보는 듯하더라고 말이야.”

“이 시대가 아까운 사람 하나 죽이는군. 이십 년 가까이 감옥이다,
 노동운동이다, 빈민운동이다 하며 뛰었으니 어디 세끼 밥인들
 제대로 챙겨 먹었겠어. 우리 집 애 말로는 박 선생이 감방에서
 단식도 숱해 했다더군. 그러니 간이 쪼그라든 게야.”

“글쎄, 못 먹고 고생한 사람 간도 멀쩡하기만 하던데,
 나이 한창인 젊은이가 그렇게 운이 없을 수 있나.”

“박 선생이 만약 어찌 된다면 가만있잖겠다고 벼르는 주민들이 많더군.
 성안염직에 다니는 공원들하고, 한국경전기에 다니는 여공들 있지?
 그 애들이 앞장을 서서 치료비 모금운동을 벌일 모양이라……”

나는 노인들 대화를 듣다 담뱃불을 끄고 병실로 들어갔다.
전등불이 들어와 있었다. 나는 동수 엄마를 복도로 불러내어
민 박사한테 들은 현구 수술 문제를 두고 의논했다.
동수 엄마도 현구가 간경변증과 암이 병치되어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네 역시 수술에는 일단 반대 의견을 표시했다.
그렇다고 법원 허가 없이 미결수를 당장 어디로든 옮길 수 없으니
며칠 동안 환자의 상태와 경과를 지켜보겠다는 것이다.

“저도 여러 곳에 알아보고 있습니다. 글피가 주일이니 그때까지
 어떤 결정이든 내려야겠지요. 종양이 작을 때는 셀루핀과 같은
 얇은 막으로 종양을 밀봉하여 확산을 막는 새로운 치료법도
 개발되었다던데, 상경하시면 그 점도 알아봐주세요.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에 입실도 예약해두는 게 좋겠습니다.
 내일 아침 변호사와 함께 법원에 들어가겠어요.”
 
동수 엄마의 담담한 말이었다.
갈라 터진 입술을 꼬옥 깨문 동수 엄마 얼굴이 엄숙하여,
이미 최악의 경우까지 예상하고 있는 듯한 다부진 모습이었다.
그네가 이 위급한 사태에도 흔들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대처하고 있음이
다행이었다.

“동수 어머니, 우리들 여기 있어요. 선생님 면회가 안 되면
 동수 어머니라도 이리로 나와보세요. 드릴 말이 있습니다.”
 
동수 엄마 목소리를 들었는지 노인 하나가 창틀에 얼굴을 들이밀고 말했다.

“아직 안 가셨군요. 예, 제가 나갈게요.”

그날, 자정 가까이 출발하는 서울행 새마을호 편으로 나는 동대구 역을
떠났다. 출판사 일은 내가 없더라도 잘 돌아가게 아퀴*를 짓고,
예정으론 사흘 뒤 대구로 다시 내려오리라 작정 했다.
서울로 돌아온 이튿날 나는 출판사 일과 현구 일로 동분서주했다.
대구의 현구 병실과 숙영이네 약국으로 전화를 걸어 그쪽 사정을
문의하기도 했다. 현구 병세는 별 달라진 점이 없으나
소변을 보지 못하고 허리 통증이 더 심해진다고 어머니가 알려주었다.
하루를 그렇게 넘기고 자정 가까이 집으로 돌아온 나는
얼굴과 손발 씻기도 포기한 채 잠에 곯아떨어졌다.
나로서는 보름 넘어 처음으로 맞는 숙면이었다.
숙영으로부터 다급한 장거리 전화가 걸려오기는
이튿날 오후 한 시 반쯤으로, 내가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을
막 다녀왔을 때였다.

“오빠, 어쩌면 좋아. 현구가, 현구가 혼수상태로…… 빨리 와줘야겠어.
 날이 새고부터 못 견디겠다며 통증을 호소하더니…… 
 깨어났다 까무라치다 하던 끝에 끝내……

또렷하게 들리는 숙영이의 울부짖음인데도 내 귀에는 아득히 먼 메아리로
들렸다. 갑자기 기운이 쭉 빠졌다. 드디어 올 것이 왔는데 어찌해야 하나.
나는 전화기를 던지듯 놓고 망연자실 멍해지고 말았다.
좋잖은 소식이냐고 경리 최 양이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나는 잠시 눈을 감은 채 된숨만 내쉬었다.

“주택은행 통장 있잖아. 어서 가서 잔고 있는 대로 빨리 찾아와.
 현찰 오십, 나머지는 수표로.”
 
내가 최 양에게 일렀다. 나는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내에게 현구의 상태를 알리고 지금 곧 대구로 내려가겠다고 말했다.
아내는 청주 친정집에 연락하여 친정어머니가 상경하는 즉시
아이 들을 맡겨놓고 뒤따라 내려가겠다고 다급하게 대답했다.

“차 몰고 가지 마세요. 꼭 그래야만 돼요. 흥분 상태로 차를 몰면……
 아시죠?”

아내는 몇 차례 다짐하곤 전화를 끊었다.
나는 그 점까지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여자란 역시 세심하고
영악한 데가 있었다.
강남 고속버스터미널보다 서울역이 회사와 가까웠기에
나는 기차를 타기로 했다. 기차가 영등포를 벗어나자,
차창 밖으로 들과 산이 희뜩희뜩 나타났다.
푸른나무들은 더운 햇살만으로 푸르게 살아나는데,
죽어가는 사람도 저렇게 싱그럽게 살아날 수 있다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몸이 식은땀에 전 채 삶과 죽음 사이를
마치 그네 타듯 오락가락하고 있을 현구의 검누런 여윈 모습이 떠올랐다.
허약자에게는 여름 그 자체가 견디기 어려운 고역 인데,
한증막 같은 더위가 끝내 현구를 부패시켜버린 것이리라.
냉장고에 돌연 전기가 나가버렸을 때, 아니 전압이 떨어져 냉장고 안이
미적지근하게 되었을 때, 밀폐된 공간의 내용물은 빠르게 부패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지금 현구 몸을 냉장고로 비유한다면
코드를 뽑았다 끼웠다 하는 상태여서,
몸 안의 내용물인 간은 물론 신장, 위장, 허파가 그렇게 부패되고
있지 않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현상이었다.
차라리 나는 현구에 관하여 다른 장면을 떠올리는 편이 나았다.
지금 기차가 달리고 있는 이 방향으로 그해 겨울 우리 가족이 남행을
재촉할 때, 어머니 등짝에 묻힌 작은 불씨 하나가
그때는 끝내 꺼지지 않았다. 그 시절 살아남음과 서른여덟 해 뒤,
지금의 죽음과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자식 하나를 후대에 남겼다 함일까.
아니면 그가 장성하여 벌인 아름다운 일을 하나님이 보고 싶어 했을까.
이제 너는 현세에서 네 몫을 다했으니 내 곁으로 오라고
하나님이 그를 불러 가려 함일까…… 
나는 신의 섭리를 알 수 없었고, 어쩌면 냉혹한 현실은 신의 섭리와
무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식당차로 옮겨 앉아 점심밥 대신
맥주 두 병을 비워냈다.
동대구역에 도착하자 오후 여섯 시 십 분으로 해가 도회 건물 뒤로
기운 저녁 무렵이었다. 나는 택시 편에 서둘러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대학병원 정문은 닫혔고, 정문 옆에는 창문에 철망을 친 전투경찰
수송용 버스 두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발쫌하게 열린 비상용 쪽문을 전투경찰대원 여럿이 지켰다.
문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전투경찰대원에게 방문 목적을 밝히고 주민등록증을 제시한 뒤
안으로 들어가는 줄이었다. 나도 그 줄 꼬리에 섰다.
병원에 무슨 사고가 났구나 하는 의문보다 직감적으로 현구 탓이겠거니
여겨졌다. 내 차례가 오자, 나는 현구가 입원한 병동과 병실을 밝혔다.

“입원 환자와 어떻게 되는 사입니까?”
 
내 주민등록증을 보며 전투경찰대원 이 물었다.

“현구 형이오. 급히 연락을 받고 서울에서 방금 도착한 참이오.”

“그분, 들여보내.” 수위실 앞에 섰던 자가 전투경찰대원에게 말했다.
 
그저께 현구 병실에서 보았던 뚱뚱한 수사관이었다.
나는 뛰다시피 걸었다. 본관 모퉁이를 돌자, 현구가 입원한 병동 쪽에서
합창으로 부르는 노랫소리가 땀에 찬 얼굴로 홧홧 끼얹어왔다.
노래에 맞추어 치는 손뼉 소리도 들렸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불고 눈보라 쳐도
온누리 끝까지 마음껏 푸르다……
 

현구가 입원해 있는 병동 앞 넓은 정원에는 볼 만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완전무장한 전투경찰대원이 겹겹이 에워싼 가운데,
학생과 노동자, 빈민촌 아주머니들이 쉰 명 정도 줄지어 앉아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창문에 철망을 씌운 지프 옆에는
경찰 간부인 듯 무선전화기를 든 건장한 중년 남자 둘이 지켰는데,
동수 엄마가 그들에게 손짓해가며 무슨 말인가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둘은 농성꾼들에게 한눈을 팔 뿐 묵묵부답이었다.
농성 중인 사람들 뒤쪽에 머릿수건 쓴 아낙네 둘이 맞잡아 들고 있는
현수막 글자가 얼핏 눈에 들어왔다. 한 아낙네가 상주댁이었다.

‘빈자의 등불, 박현구 선생 만세!’

내가 구경꾼으로 그 대치 광경에만 한눈을 팔 때가 아니었다.
나는 농성 패들 속에 섞여 앉아 노래를 따라 부르는 원형섭 목사에게
잠시 눈을 주다, 병동 안으로 들어섰다.
병동 현관을 지키는 전투경찰대원과 병실 앞을 지키고 섰는
전투경찰대원에게 나는 현구 형임을 밝혔다. 나는 병실로 뛰어들었다.
병실 안에 있던 여러 눈길이 내게로 쏠렸다.
나는 아무와도 인사를 나누지 않고 현구와 어머니가 있는 침대 앞으로
다가갔다.

“현구야! ”

깊은 잠의 수렁에 빠진 듯 현구는 대답이 없었다.
그의 얼굴은 이미 살아 있는 자의 살색이 아니었다.
녹두색이 땀구멍 승승한 얼굴 전체에 번져 있었다.
현구는 악몽이 괴로운지 간힐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된숨을 몰아쉬었다.
홑이불 아래 불룩하게 솟은 배는 사흘 전과 확연히 다르게,
만삭의 임산부를 방불케 했다.
요독증이 핏줄을 타고 온몸에 번진 증거였다. 나는 아우 손을 잡았다.
축축한 그의 마른 손이 서늘했다. 내 얼굴에서 땀인지 눈물인지가
침대보에 떨어졌다. 나는 터져 나오는 오열을 가까스로 삼켰다.

“실낱같은 가망도 없나봐, 오늘 밤이 고비래. 이제 그 어느 누구도
 이 애를 살릴 수 없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의사 그 말을
 이제 믿어야 하다니…… 젊디젊은 너희들 아비를 그렇게 했듯,
 하나님이 이 애를 천당에서 더 요긴한 데 쓰시려구 데려가려 하시나봐.
 이 불쌍한 늙은 어미를 남겨두고……그분이 주장하시는 일은
 순종해야겠지만……이리도 절통한 사연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꼬…….”
 
젖은 수건으로 현구 얼굴을 닦으며 어머니가 말했다.
흘리는 눈물의 양만큼 그 엉절거림*은 말이 아니라 차라리 피눈물로
쏟아내는 통곡이었다.
혼수상태로 들어간 현구를 지켜보는 어머니도 이제는,
막내가 당신 몸속에서 함께 산다는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현구가 덮은 홑이불을 허리께까지 걷어 내렸다.
환자복 단추를 풀더니 그의 가슴을 열었다.
땀에 젖은 앙상한 갈비뼈가 드러났다. 그 가슴은 흙색으로 검누랬다.
어머니가 수건으로 아우 가슴에 찬 땀을 천천히 닦았다.

“애비도 못 보고 태어나, 이제 그렇게도 그리던 제 애비를 보려 가겠다고
 이러나. 서른셋에 죽은 네 애비가 젊디젊은 그때 모습으로
 거기 천당에 있나……”

천장에 달린 선풍기가 왱왱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데
땀에 전 현구의 긴 머리카락은 한 올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우는 몸 안의 수분을 다 뱉듯 온몸의 땀구멍마다 식은땀을 쏟아내고
있었다. 잦아져 곧 멈출 것 같던 아우의 숨 쉼이 다시 폭발하듯
코 푸는 소리로 다급해졌다. 그럴 때, 아우가 슬며시 눈을 뜨고
예의 그 수줍은 미소를 띠며 천천히 일어나 앉을 것만 같았다.
숨소리는 다시 낮아졌다.
아우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눈초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혼수상태가 언제부터 계속됐나요?” 내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벌써 반나절이 넘었다. 그 후로는 영 깨어나지 않는구나.
 우리 아들을 풀어주지 않으니 기도원 안수도 못 받고·……
 내가 달겨들어, 우리 아들 풀어달라고 싸우고 애원했지.
 맨발로 금호산 기도원까지 내가 이 자식 등에 업고,
 피란 올 때처럼 달려가려 했건만…… 나는 그때서야 이 애를
 살릴 수 없다고…….”
 
어머니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머리를 흔들었다.
 
“오, 하나님, 이 애를 보세요. 이 세상 못사는 사람들의 근심과 한숨을
 다 맡아 떠나자니 저도 힘이 드는지, 이렇게, 이렇게 고된 숨을 쉬며
 울고 있잖아요……”

나는 현구 침대 옆에서 물러났다. 그제서야 병실 안을 둘러보니
동수를 무릎에 안고 반쯤 틀어 앉은 숙영이가 손수건으로 눈을 가려
어깨를 들먹이며 훌쩍이고 있었다.
내가 준 장난감 자동차를 양손에 쥔 동수가 붉게 충혈된 겁먹은 눈으로
나를 흘끗 곁눈질했다. 나이 든 간수 홍과,
수사관인 듯 여름용 점펴 차림의 중년 사내가 묵묵히 나의 거동을
지켜보았다.
바깥에서 이제 구호가 터지고 있었다.

“양심수 박현구 선생을 즉각 석방하라!”

“즉각 석방하라, 석방하라!”

“양심수 박현구 선생을 우리에게 돌려달라!”

“우리에게 돌려달라, 돌려달라!”

내가 넋 빠진 사람 같게 멍하니 섰자, 창밖을 내다보던 간수 홍이
손가락질하며 투덜거렸다.

“저, 저 못된 놈들 수작 보더라구, 담을 넘어 들어오다니!”

내가 열린 창밖에 눈을 주니, 담쟁이덩굴이 올라간 담을
대학생인지 노동자인지 여럿이 타넘어 오고 있었다.
그 작태를 보던 수사관이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밖으로 달려 나갔다.
바깥은 구호 소리와 매미 울음으로 시끄러운데,
후텁지근한 더위와 병실의 무거운 침묵에 나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어머니가 무슨 말인가 현구를 내려다보며 중언부언 읊는 침대 쪽으로
차마 눈길을 줄 수 없었다. 나는 병실에서 빠져나왔다.
담배를 피워 물고 흐린 눈으로 창밖 뜰을 내다보았다.

“일곱 시 반까지 해산하지 않으면 모두 연행하겠습니다.
 앞으로 이십오 분 내로 모두 돌아가십시오!”
 
지프 쪽에서 중견 경찰 간부가 확성기를 들고 말했다.
농성 패들이 그 말에, 우우 하며 야유를 보냈다.
농성 패들이 다시 노래를 합창하기 시작했다.
손뼉만 치는 게 아니라 이제 둥둥 북소리까지 들렸다.
전투경찰대원이 울을 친 뒤쪽에서 동수 엄마가 바삐 걸어왔다.
주위에 젊은이 셋이 그네를 따랐다. 젊은이들을 떨어뜨려놓고
동수 엄마만 병동 안으로 들어섰다. 바깥은 이미 그늘이 짙게 내린 만큼
복도가 어두컴컴했다. 복도를 질러 온 동수 엄마가 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운명할 때까지 여기에서 한 발짝도
 떠날 수 없대요. 주민들은 동수 아빠가 운명하시기 전에
 집으로 모셔 산동네 빈민장으로 장례를 치르자고 했으나,
 그게 안 되게 됐어요. 무슨 폭동이라도 일어날까봐 저들이
 어디 그 조그만 우리들 소망이나마 들어주겠어요.
 어쩌면 시신조차 내주지 않고 저들이 마음대로 화장해버릴는지 몰라요.”
 
동수 엄마 말투는, 그네 역시 이제 남편 소생에 가망이 없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설마 그럴 리야 있겠어요. 장지 문제는 내가 김 서방하고 의논해보리다”
 하고 말하자, 이제 현구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
 그 뒤치다꺼리를 읊조리는 나 자신이 서글펐다.

생각에 잠겼던 동수 엄마가 눈빛을 세웠다.

“아주버니, 그래서 우리는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동수 아빠를
 운명하기 전에 집으로 모셔 가려 해요.
 오후에 이미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보았어요.”
 
그네가 주위를 둘러보며 내게 조그맣게 말했다.
나는 동수 엄마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동수 엄마가 병실로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어느 사이 농성 패가 육십여 명으로 불어났는데,
돌연 새로운 구호가 터져 나왔다.

“운명 직전에 있는 박현구 선생을 당장 석방하라!”

“당장 석방하라, 석방하라!”

“빈민장으로 장례를 치를 수 있는 조치를 허가하라!”

“귀가 조치를 허가하라, 허가하라!”

선창을 외치는 자가 조금 전 동수 엄마와 함께 따르던 젊은이였다.
그의 구호는 절규였고, 동수 엄마와 그 어떤 묵계가 된 듯 느껴져,
조금 전 그네 말과 함께 퍼뜩 짚이는 생각이 있었다.
젊은이 구호가 그만큼 자극적인 탓인지, 앉아 있던 농성 패가 모두 일어나
주먹을 내두르며 소리쳤다.

“정말 돌아가시게 됐어?”
 “이거 어찌 된 거야?”
“병세가 그렇게까지 악화되다니”

하고 농성 패들이 쑤군거리며 당황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당국은 박현구 선생 죽음을 책임지라!”

“죽음을 책임지라, 책임지라!”

구호가 더욱 다급해졌다.
농성 패 앞쪽은 젊은이들이 자리했는데,
그들이 돌연 양팔을 옆 사람 목 뒤로 둘러 어깨 겯기를 시작했다.
곧이어 농성 패가 모두 어깨를 겯고 거센 파도를 이루어 앞을 막은
전투경찰대원들의 두꺼운 벽을 뚫을 듯 움직였다.
방패막을 앞세운 전투경찰대원들은 콘크리트벽이듯 꿈쩍을 않았다.

“해산하지 않으면 연행한다!”

확성기가 숨 가쁘게 외칠 때, 뒤쪽에서 지프를 향해 화염병이 날더니,
펑 하고 터졌다. 뒤쪽에서 와와, 어샤어샤 하는 함성이 터졌다.
드디어 어깨 겯은 농성 패가 전투경찰대의 벽을 뚫겠다고 맹렬한 기세로
전진했다.

“폭력은 안 됩니다. 자제해요. 폭력으로 해결될 거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 외침은 원 목사 목소리가 분명했다.
펑펑, 화염병이 연달아 터졌다. 여기는 거리가 아니고 병원이라고
외치는 원 목사 목소리도, 군충들 고함소리도 잦아들었다.
인내에 한계가 있다는 듯, 병원이라는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드디어 최루탄도 퍽퍽 소리를 내며 터졌다.

“모두 연행해!” 확성기를 통해 경찰 간부 명령이 떨어졌다.

벽이듯 움직이지 않던 전투경찰대원들이 한마디 명령에
농성 패 속으로 밀려들더니 무차별 연행을 시작했다.
고함과 비명소리로 넓은 뜰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병실 앞을 지키던 전투경찰대원들도 요란한 발소리를 울리며
복도를 거쳐 밖으로 뛰어나갔다.
내 코에는 최루탄 내음이 스며들었다. 눈물이 돌고 재채기가 쏟아졌다.
나는 화급히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였다. 뒤쪽 창문으로 복면을 하고
각목을 든 젊은이가 병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한 명이 아니고 네댓 명이었다. 그들은 한꺼번에 몰려들어 각목으로
간수 홍을 내리칠 듯 위협했다. 파랗게 질린 홍이 입을 벙긋 벌린 채
항복하듯 손을 들고 떨었다.

“사모님, 갑시다. 어서 나서요! 병원 후문에 봉고를 대기시켜 놓았어요.”
 작업복 차림의 젊은이가 동수 엄마에게 외쳤다.

“얘들아, 뭐냐? 어, 어디로 가자구?”
 
다칠세라 현구를 끌어안듯 팔을 벌려 보호하던 어머니가
 어마지두*해져 말을 더듬었다.

“어머님, 동수 아빠를 비산동 우리 방에서 돌아가시게 하고 싶어요.
 동수 아빠는 죄인도 아니고, 그러기에 여기에 갇혀 감시받는 자리에서
 돌아가시게 할 수 없어요!”
 
동수 엄마가 발통 달린 침대를 끌어내며 빠르게 말했다.
단속적으로 여린 숨을 내쉬는 현구를 보는 그네의 눈이 눈물로 빛났다.

“그래, 그래야지. 네 말 맞다. 현구는 죄인이 아냐. 동수야,
 우리가 앞장서자. 너와 내가 앞장서야 해!”

며느리 말에 어머니도 정신이 번쩍 드는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숙영으로부터 동수를 빼앗아 덥석 등에 업었다.

“할머니, 아빠 정말 집으로 가는 거예요?”
 
동수가 또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집으로 가는 거다. 이제는 네가 아빠가 되는 거다.
 현구가 못다 한 일을 네가 하는 거야. 네가 이제 이 할미의 막내다!”
 
어머니가 신들린 듯 외쳤다.
어머니는 그해 겨울 현구를 업고 남행길을 재촉하듯,
꼬부장한 좁은 등판에 김장독 같은 동수를 업고 앞으로 나서며
병실 문을 활짝 열었다. 간수 홍은 어느 사이 몸을 피하고 없었다.

“오빠, 이래도 되는 거예요?”
 
얼떨떨한 표정으로 숙영이가 나를 보고 물었다.

“어쩔 수 없잖아. 상황이 이렇게 된걸. 자, 우리도 나가자.”

숙영의 말에 어리벙벙해졌던 나는 홀연히 정신을 차렸다.
나는 누이 등을 밀었다.

“앞쪽은 안 돼요. 뒷문 쪽으로, 어서!”
 
하더니, 숙영이도 결심을 한듯 어머니 뒤를 따랐다.
저물한 속에 복도는 벌써 최루탄 내음으로 매캐했다.
바깥뜰은 매연이 자욱했고 난장판 소요가 계속되고 있었다.
동수 엄마가 침대를 앞에서 당기고, 젊은이들은 침대를 옆에서 당기고
뒤에서 밀었다. 복도로 나서니 어둑발*이 내리는 속에
현구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초조했다.
언뜻 한 가지 결단이 전류처럼 머리를 때렸다.
이제 현구는 우리 모두의 마음에 자신이 들어앉아 살아 숨 쉴
감옥 한 칸을 짓기 시작했다는 깨달음이었다.
나는 비로소 현구를 거주제한구역 안에서 운명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폭행죄와 공무집행방해죄로 구속된 이번 사건의 상징성이 말해주듯,
설령 비산동 사글세방까지 현구를 데려갈 수 없다 하더라도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숨 쉬고 있을 동안만이라도
그를 감시받는 병실이 아닌, 자유로운 구역까지 내보낼 책임이
나에게도 있음을 알았다.
나는 동수 엄마와 나란히 침대머리 손잡이를 힘주어 잡았다.

최루탄 내음이 들어찬 복도로, 침대가 좌르르 굴러 갔다.
동수를 업은 어머니와 어머니 뒤허리에 팔을 두른 숙영이는
뒷문을 향해 저만큼 앞장서서 종종걸음 치고 있었다.
그때, 뒷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던지 젊은이 몇이
그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막혔던 통로가 자유로 향한 출구처럼
훤하게 뚫렸다.
어머니와 함께 우리 오누이 셋이 그해 겨울 그렇게 남행길을 재촉했듯,
우리들은 마치 포연을 뚫고 진군하듯, 최루탄 매연을 헤쳐 침대를 끌고
밭은걸음을 걸었다. 그제서야 사일구 그날,
우리 모두 어깨 겯고 경무대를 향해 내닫던 그 벅찬 흥분이
되살아남을 나는 가슴 뿌듯이 느낄 수 있었다.


『현대소설』 3호(1990. 6);
『김원일 중단편전집』 5권 (문이당 1997)

※2005년 10월 작가가 부분 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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