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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비우스의 띠 - 조세희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뫼비우스의 띠 - 조세희 - 수학 담당 교사가 교실로 들어갔다. 학생들은 그의 손에 책이 들려 있지 않은 것을 보았다. 학생들은 교사를 신뢰했다. 이 학교에서 학생들이 신뢰하는 유일한 교사였다. 그가 입을 열었다. 제군, 지난 1년 동안 고생 많았다. 정말 모두 열심히들 공부해주었다. 그래서 이 마지막 시간만은 입학 시험과 상관이 없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는 몇 권의 책을 뒤적여보다가 제군과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은 것을 발견했다. 일단 내가 묻는 형식을 취하겠다.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했다. 한 아이는 얼굴이 새까맣게 되어 내려왔고, 또 한 아이는 그을음을 전혀 묻히지 않은 깨끗한 얼굴로 내려왔다. 제군은 어느 쪽의 아이가 얼굴을 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학생들은 ..

한국단편문학 2024.01.29

별 - 현경준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별 - 현경준 - 1. 1 달마다 한 번씩은 꼭 어김없이 오고야마는 수업료 납부기. 벌써 완납 기일을 사흘이나 넘은 교실 안은 처처에 빈 자리가 생겨서 횡뎅그레한데 아무 표정도 없이 눈알만 말똥거리는 중대가리들의 멍하니 벌린 괴지지한 입들, 훌쩍거리는 코들. 찌는 듯이 무더운 속에서 파리들이 앵앵거리며 햇볕을 좇아 날아다니고 가담가담 물쿤하고 콧구멍을 쿡쿡 찌르는 땀 냄새 방귀 냄새. 6월의 교실 안 공기는 웅덩이 속에 갇혀 있는 무겁고도 어지러운 흙탕물과도 같아 당장에 질식이라도 할 것 같다. 그러한 속에서 명우는 땀을 발발 흘려가며 거의 싸우다시피 악을 쓰는 것이었다. “이놈들아. 정신을 좀 차려서 선생님 설명을 들어라.” 그래도 아이들은 얼빠진 것처럼 멍하니 입만 벌리..

한국단편문학 2024.01.22

봄과 따라지 - 김유정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봄과 따라지 - 김유정 - 지루한 한 겨울동안 꼭 옴츠러졌던 몸뚱이가 이제야 좀 녹고 보니 여기가 근질근질 저기가 근질근질. 등어리는 대구 군실거린다. 행길에 삐쭉 섰는 전봇대에다 비스듬히 등을 비겨대고 쓰적쓰적 비벼도 좋고. 왼팔에 걸친 밥통을 땅에 내려놓은 다음 그 팔을 뒤로 젖혀올리고 또 바른팔로 다는 그 팔꿈치를 들어올리고 그리고 긁죽긁죽 긁어도 좋다. 본디는 이래야 원 격식은 격식이로되 그러나 하고 보자면 손톱 하나 놀리기가 성가신 노릇. 누가 일일이 그러고만 있는가.\ 장삼인지 저고린지 알 수 없는 앞자락이 척 나간 학생복 저고리. 허나 삼 년간을 내리 입은 덕택에 속껍데기가 꺼칠하도록 때에 절었다. 그대로 선 채 어깨만 한번 으쓱 올렸다. 툭 내려치면 그뿐. 옷..

한국단편문학 2024.01.15

술 권하는 사회 - 현진건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술 권하는 사회 - 현진건 - "아이그, 아야” 홀로 바느질을 하고 있던 아내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 가늘고 날카로운 소리로 부르짖었다. 바늘 끝이 왼손 엄지손가락 손톱 밑을 찔렀음이다. 그 손가락은 가늘게 떨고 하얀 손톱 밑으로 앵두빛 같은 피가 비친다. 그것을 볼 사이도 없이 아내는 얼른 바늘을 빼고 다른 손 엄지손가락으로 그 상처를 누르고 있다. 그러면서 하던 일가지를 팔꿈치로 고이고이 밀어 내려놓았다. 이윽고 눌렀던 손을 떼어보았다. 그 언저리는 인제 다시 피가 아니 나려는 것처럼 혈색이 없다 하더니, 그 희던 꺼풀 밑에 다시금 꽃물이 차츰차츰 밀려온다. 보일 듯 말 듯한 그 상처로부터 좁쌀 낟 같은 핏방울이 송송 솟는다. 또 아니 누를 수 없다. 이만하면 그 구멍이..

한국단편문학 2024.01.08

복덕방 - 이 태 준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복덕방 - 이 태 준 - 철석, 앞집 판장 밑에서 물 내버리는 소리가 났다. 주먹구구에 골독했던 안초시에게는 놀랄 만한 폭음이었던지, 다리 부러진 돋보기 너머로, 똑 모이를 쪼으려는 닭의 눈을 해가지고 수챗구멍을 내다본다. 뿌연 뜨물에 휩쓸려 나오는 것이 여러 가지다. 호박 꼭지, 계란 껍질, 거피해 버린 녹두 껍질. “녹두 빈자떡을 부치는 게로군, 흥…….” 한 오륙 년째 안초시는 말끝마다 ‘젠―장……’이 아니면 ‘흥 !’ 하는 코웃음을 잘 붙이었다. “추석이 벌써 낼 모레지! 젠―장…….” 안초시는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었다. 기름내가 코에 풍기는 듯 대뜸 입 안에 침이 흥건해지고 전에 괜찮게 지낼 때, 충치니 풍치니 하던 것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아래윗니가 송곳 끝같..

한국단편문학 2024.01.01

미스터 방 - 채만식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미스터 방 - 채만식 - 주인과 나그네가 한가지로 술이 거나하니 취하였다. 주인은 미스터 방(方), 나그네는 주인의 고향 사람 백(白)주사. 주인 미스터 방은 술이 거나하여 감을 따라, 그러지 않아도 이즈음 의기 자못 양양한 참인데 거기다 술까지 들어간 판이고 보니, 가뜩이나 기운이 불끈불끈 솟고 하늘이 바로 돈짝만한 것 같은 모양이었다. "내 참, 뭐, 흰말이 아니라 참, 거칠 것 없어, 거칠 것. 흥, 어느 눔이 아, 어느 눔이 날 뭐라구 허며, 날 괄시헐 눔이 어딨어, 지끔 이 천지에. 흥 참, 어림없지, 어림없어." 누가 옆에서 저를 무어라고를 하며 괄시를 한단 말인지, 공연히 연방 그 툭 나온 눈방울을 부리부리, 왼편으로 삼십도는 넉넉 삐뚤어진 코를 벌씸벌씸 해가면..

한국단편문학 2023.12.25

땡볕 - 김유정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땡 볕 - 김유정 - 우람스레 생긴 덕순이는 바른팔로 왼편 소맷자락을 끌어다 콧등의 땀방울을 훑고는 통안 네거리에 와 다리를 딱 멈추었다. 더위에 익어 얼굴이 벌거니 사방을 둘러본다. 중복 허리의 뜨거운 땡볕이라 길 가는 사람은 저편 처마 밑으로만 배앵뱅 돌고 있다. 지면은 번들번들히 달아 자동차가 지날 적마다 숨이 탁 막힐 만치 무더운 먼지를 풍겨 놓는 것이다. 덕순이는 아무리 참아 보아도 자기가 길을 물어 좋을 만치 그렇게 여유 있는 얼굴이 보이지 않음을 알자, 소맷자락으로 또 한번 땀을 훑어 본다. 그리고 거북한 표정으로 벙벙히 섰다. 때마침 옆으로 지나는 어린 깍쟁이에게 공손히 손짓을 한다. "얘! 대학병원을 어디루 가니?" "이리루 곧장 가세요!" 덕순이는 어린 깍..

한국단편문학 2023.12.18

가실(嘉實)- 이광수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가실 (嘉實) - 이광수 - 1 때는 김 유신이 한창 들날리던 신라 말이다. 가을 볕이 째듯이 비치인 마당에는 벼 낟가리, 콩 낟가리, 모밀 낟가리들이 우뚝우뚝 섰다. 마당 한쪽에는 겨우내 때일 통나무더미가 있다. 그 나무더미 밑에 어떤 열 예닐곱살된 어여쁘고도 튼튼한 처녀가 통나무에 걸터앉아서 남쪽 한길을 바라보고 울고 있다. 이때에 어떤 젊은 농군 하나이 큰 도끼를 메고 마당으로 들어오다가, 처녀가 앉아 우는 것을 보고 우뚝 서며, " 아기, 왜 울어요? " 하고 은근한 목소리로 묻는다. 처녀는 깜짝 놀라는 듯이 한길을 바라보던 눈물 고인 눈으로 그 젊은 농군을 쳐다보고 가만히 일어나며, " 나라에서 아버지를 부르신대요. " 하고 치마 고름으로 눈물을 씻으며 우는 양을 ..

한국단편문학 2023.12.11

날 개 -이상-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날 개 - 이상 -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릿속에 으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파라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놓소. 가증할 상식의 병이오. 나는 또 여인과 생활을 설계하오. 연애기법에마저 서먹서먹해진 지성의 극치를 흘깃 좀 들여다 본 일이 있는,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분일자말이오. 이런 여인의 반-그것은 온갖 것의 반이오. - 만을 영수하는 생활을 설계한다는 말이오. 그런 생활 속에 한 발만 들여놓고 흡사 두 개의 태양처럼 마주 쳐다보면서 낄낄거리는 것이오. 나는 아마 어지간히 인생의 제행이..

한국단편문학 2023.12.02

단발여탐정(斷髮女探偵)- 차상찬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단발 여탐정(斷髮 女探偵) - 차상찬 - 광해군(光海君) 십오년 계해 서기 일천육백이십삼년 삼월십오일 (十五年 癸亥, 西紀 一六二三年 三月十五日)밤에 청천벽력 같이 일어난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정변은 그 전날에 (前日[전일])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을 쫓아내고 자기가 왕위(王位)에 들어서던 소위 세조반정(世祖反正)과 또 중종(中宗)이 연산군(燕山君)을 몰아내고 대신 임금이 되던 중종반정(中宗反正)과 아울러서 이씨 조선역사상(李氏朝鮮歷史上) 삼대정변으로 큰 정변들이었다. 그 반정운동(反正運動)에 표면(表面)에 나서서 온갖 음모(陰謀)와 활약을 다 하던 사람들은 물론 당시 서인파(西人派)의 김류(金瑬), 최명길(崔鳴吉), 이귀(李貴), 김자점(金自點), 신경진(申景鎭), 이..

한국단편문학 2023.11.24

논 이야기 - 채만식-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논 이야기 - 채만식 - 일인들이 토지와 그 밖에 온갖 재산을 죄다 그대로 내어놓고, 보따리 하나에 몸만 쫓기어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한생원은 어깨가 우쭐하였다. “거 보슈 송생원, 인전들, 내 생각 나시지?” 한생원은 허연 탑삭부리에 묻힌 쪼글쪼글한 얼굴이 위아래 다섯 대밖에 안 남은 누―런 이빨과 함께 흐물흐물 웃는다. “그러면 그렇지, 글쎄 놈들이 제아무리 영악하기로소니 논에다 네 귀탱이 말뚝 박구섬 인도깨비처럼, 어여차 어여차, 땅을 떠가지구 갈 재주야 있을 이치가 있나요?” 한생원은 참으로 일본이 항복을 하였고, 조선은 독립이 되었다는 그날―--- 팔월 십오일 적보다도 신이 나는 소식이었다. 자기가 한 말〔豫言〕이 꿈결같이도 이렇게 와 들어맞다니…… 그리고 자..

한국단편문학 2023.11.15

가난의 설움 -연성흠-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가난의 설움 - 연성흠 - 사직골 막바지 솟을대문 달린 큰 기와집 행랑방에서는 큰 야단이 일어났습니다. 땟국이 꾀죄죄 흐르는 행주치마를 앞에 두른 채 뒤축 달아빠진 고무신을 짝짝 끌면서 행랑어멈인 듯한 여인이 대문을 벼락 치듯 열고 뛰어 나오더니 “아이구 이를 어쩌나, 아이구 이를 어쩌나.” 하면서 어쩔 줄을 모르는 듯이 길 아래위로 허둥지둥 오르내리기만 할 뿐 입니다. “여보, 동선 어머니! 이게 웬일이요?” 그 아랫집 행랑방 들창문이 열리며 두 눈이 휘둥그레서 이같이 묻는 여인도 그 옷맵시로 보아 그 집 행랑어멈 같아 보였습니다. “개똥 어머니, 이 일을 어쩌면 좋소. 우리 동선이 녀석이 양잿물을 들이마셨구려.” 하고 동선 어머니라는 이는 눈물이 글썽글썽하는 눈으로 개똥..

한국단편문학 2023.11.05

B녀의 소묘(素描)- 이무영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B녀의 소묘(素描) - 이무영 - 1 “기왕 올 테면 나 있을 제 오게. 뭔, 그렇게 어색해할 거야 있는가? 오래간만에 친구 찾아오는 셈 치면 그만이지. 하기야 그런 일이 없었다기로니 친구 찾아 강남도 간다는데 친구 찾아 천리쯤 오기로서니 그게 그리 망발될게야 없잖은가?” 이러한 편지를 받고 나니 그도 그럼직했다. 지난 가을부터 “갑네, 갑네.”하고도 초라니 대상 물리듯 미뤄온 데는 물론 15원이라는 차비가 그의 생활로 보아 엄두가 안 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벌써 여러 번째 A가 한번 놀러 오라고 졸라대다시피 해도 “응응.” 코대답만 해오던 그로서, 너를 기다리는 여성이 있다고 한다고 신이 나서 달려간다는 것도 쑥스러워 솔깃하면서도 이때껏 미뤄온 것이다. “뭘..

한국단편문학 2023.10.25

그 여자네 집 - 박완서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그 여자네 집 - 박완서 - 난 여름 작가 회의에서 북한 동포 돕기 시 낭송회를 한 적이 있다. 시인들만 참여하는 줄 알았더니 각계 원로들도 자기가 평소 애송하던 시를 낭송하는 순서가 있다고, 나한테도 한 편 낭송해 달라고 했다. 내가 원로 소리를 듣게 된 것이 당혹스러웠지만, 북한 돕기라는 데 핑계를 둘러대고 빠질 만큼 빤질빤질하지는 못했나 보다.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거역할 수 없는 명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낭송하고 싶은 시가 있었다는 게 아니었을까. 그 무렵 나는 김용택의 "그 여자네 집"이라는 시에 사로잡혀 있었다. 김용택은 내가 좋아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일 뿐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라고는 말 못 하겠다. 마찬가지로 "그 여자네 집"이 그의 많은 시 중 빼어난 시에..

한국단편문학 2023.10.16

고 향 - 현진건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고 향 - 현진건 -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차중에서 생긴 일이다. 나는 나와 마주앉은 그를 매우 흥미있게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두루마기격으로 기모노를 둘렀고, 그 안에서 옥양목 저고리가 내어 보이며, 아랫도리엔 중국식 바지를 입었다. 그것은 그네들이 흔히 입는 유지 모양으로 번질번질한 암갈색 피륙으로 지은 것이었다. 그리고 발은 감발을 하였는데 짚신을 신었고, 고부가리로 깎은 머리엔 모자도 쓰지 않았다. 우연히 이따금 기묘한 모임을 꾸미는 것이다. 우리가 자리를 잡은 찻간에는 공교롭게 세 나라 사람이 다 모였으니, 내 옆에는 중국 사람이 기대었다. 그의 옆에는 일본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는 동양 삼국 옷을 한 몸에 감은 보람이 있어 일본 말로 곧잘 철철대이거니와 중..

한국단편문학 2023.10.05

돌다리 - 이태준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돌다리 - 이태준 - 정거장에서 샘말 십 리 길을 내려오노라면 반이 될락말락한 데서부터 샘말 동네보다는 그 건너편 산기슭에 놓인 공동묘지가 먼저 눈에 뜨인다. 창섭은 잠깐 걸음을 멈추고까지 바라보았다. 봄에 올 때 보면, 진달래가 불붙듯 피어 올라가는 야산이다. 지금은 단풍철도 지나고 누르테테한 가닥나무들만 묘지를 둘러, 듣지 않아도 적막한 버스럭 소리만 울릴 것 같았다. 어느 것이라고 집어 낼 수는 없어도, 창옥의 무덤이 어디쯤이라고는 짐작이 된다. 창섭은 마음으로 ‘창옥아’ 불러 보며 묵례를 보냈다. 다만 오뉘뿐으로 나이가 훨씬 떨어진 누이였었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자기가 마침 방학으로 와 있던 여름이었다. 창옥은 저녁 먹다 말고 갑자기 복통으로 뒹굴었다. 읍으로 ..

한국단편문학 2023.09.26

금 따는 콩밭 - 김유정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금 따는 콩밭 - 김유정 - 땅속 저 밑은 늘 음침하다. 고달픈 간드렛불, 맥없이 푸르끼하다. 밤과 달라서 낮엔 되우 흐릿하였다. 겉으로 황토 장벽으로 앞뒤좌우가 콕 막힌 좁직한 구뎅이. 흡사히 무덤 속같이 귀중중하다. 싸늘한 침묵, 쿠더브레한 흙내와 징그러운 냉기만이 그 속에 자욱하다. 곡괭이는 뻔질 흙을 이르집는다. 암팡스러이 내려쪼며, 퍽 퍽 퍼억. 이렇게 메떨어진 소리뿐. 그러나 간간 우수수 하고 벽이 헐린다. 영식이는 일손을 놓고 소맷자락을 끌어당기어 얼굴의 땀을 훑는다. 이놈의 줄이 언제나 잡힐는지 기가 찼다. 흙 한줌을 집어 코밑에 바짝 들여대고 손가락으로 샅샅이 뒤져본다. 완연히 버력은 좀 변한 듯싶다. 그러나 불통버력이 아주 다 풀린 것도 아니었다. 밀똥버력..

한국단편문학 2023.09.15

광화사(狂畵師) - 김동인 -

광화사(狂畵師) - 김동인 - 인왕(仁王). 바위 위에 잔솔이 서고 잔솔 아래는 이끼가 빛을 자랑한다. 굽어보니 바위 아래는 몇 포기 난초가 노란 꽃을 벌리고 있다. 바위에 부딪치는 잔 바람에 너울거리는 난초잎. 여(余)는 허리를 굽히고 스틱으로 아래를 휘저어 보았다. 그러나 아직 난초에서는 사오 척의 거리가 있다. 눈을 옮기면 계곡(溪谷). 전면이 소나무의 잎으로 덮인 계곡이다, 틈틈이는 철색(鐵色)의 바위도 보이기는 하나, 나무 밑의 땅은 볼 길이 없다. 만약 여로서 그 자리에 한 번 넘어지면 소나무의 잎 위로 굴러서 저편 어디인지 모를 골짜기까지 떨어질 듯하다. 여의 등뒤에도 이삼 장(丈)이 넘는 바위다. 그 바위에 올라서면 무학(舞鶴)재로 통한 커다란 골짜기가 나타날 것이다. 여의 발 아래도 장여..

한국단편문학 2023.09.05

표본실의 청개구리 - 염상섭 -

표본실의 청개구리 - 염상섭 - 1 무거운 기분의 침체와 한없이 늘어진 생의 권태는 나가지 않는 나의 발길을 남포까지 끌어 왔다. 귀성한 후 칠팔개 삭간의 불규칙한 생활은 나의 전신을 해면같이 짓두들겨 놓았을 뿐 아니라 나의 혼백가지 두식하였다. 나의 몸의 어디를 두드리든지 알코올과 니코틴의 독취를 내뿜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피로하였다. 더구나 육칠월 성하를 지내고 겹옷 입을 때가 되어서는 절기가 급변하여 갈수록 몸을 추스리기가 겨워서 동네 산보에도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친구와 이야기하면 두세 마디째부터는 목침을 찾았다. 그러면서도 무섭게 앙분한 신경만은 잠자리에도 눈을 뜨고 있었다. 두 홰, 세 홰 울 때까지 엎치락뒤치락거리다가 동이 번히 트는 것을 보고 겨우 눈을 붙이는 것이 일 주일 간이나 넘은 ..

한국단편문학 2023.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