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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생전(許生傳) "
- 채 만 식 -
1
허생(許生)은 오늘도 아침부터 그 초라한 의관을 단정히 갖추고 단정히
서안 앞에 앉아 일심으로 글을 읽고 있다.
어제 아침을 멀건 죽 한 보시기로 때우고, 점심은 늘 없어왔거니와 저녁과
오늘 아침을 끓이지 못하였으니, 하루낫 하룻밤이요 꼬바기 세 끼를 굶은
참이었다. 그러니, 시장하긴들 조옴 시장하련마는, 굶기에 단련이 되어
그런지 글에 정신이 쏠리어 그런지, 혹은 참으며 내색을 아니하여
그러는지, 아뭏든 허생은 별로 시장하여 하는 빛이 없고, 글 읽는 소리도
한결같이 낭랑하다.
서울 남산 밑 묵적골이라고 하면, 가난하고 명색 없는 양반 나부랑이와
궁하고 불우한 선비와 이런 사람들만 모여 살기로 예로부터 이름난
동네였다.
집이라는 것은 열이면 열 다 쓰러져가는 오막살이 초가 집이 몇해씩을
이엉을 덮지 못하여 지붕은 움푹움푹 골이 패이고, 비가 오면 철철 들이
새고 하였다. 서까래는 볼썽없이 드러나고, 벽은 무너지고 중방은 헐어지고
하였다.
사는 집이 그렇게 볼썽없는 것처럼, 사람들의 의표도 또한 궁기가 꾀죄죄
흘렀다. 갓은 파립이요, 옷은 웃옷 속옷 할것없이 조각보를 새기듯
기움질을 하였다. 여름에 가을살이를 입고, 겨울에 베옷을 입기가
예시였다. 신발은 진날이나 마른날이나 나막신이었다. 남산골 샌님에
나막신은 붙은 문자였다.
어느 집 할것없이 굶기를 먹듯 하였다. 하루 세 때는 고사하고, 하루한
때씩이라도 거르지 아니하고 굴뚝에서 연기가 오르는 집은, 일부러 찾고자
하여도 없었다.
그렇게 궁하게들 살면서 하는 일이 무엇이냐 하면, 명색 없는 양반
나부랑이는 헤엠 긴 기침이나 하고, 세도재상 찾아다니면서 벼슬날이나
시켜 달라고 조르기가 일이요, 선비들은 밤이나 낮이나 글을 읽으면서
과거나 보아 장원을 하여서 발신할 세월을 기다리는 것이 일이요 하였다.
허생도 이 묵적골의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 초가 집에서 끼니가 간데없고
주린 배를 허리띠 졸라매어 가며, 밤이나 낮이나 글을 읽기로 일을 삼고
사는 궁한 선비의 한 사람이었다. 궁한 것으로는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더할지언정 나을 것은 없는 처지였다.
부엌 한 간, 방 한 간의 오막살이하고도 지지리 근천스런 오막살이이고
보매, 방은 안방이자 겸하여 허 생이 글도 읽고, 십년일득으로 찾아오는
손님을 맞아들이는 사랑방이기도 하여야 하였다.
허생이 글을 읽고 있는 옆으로 넌지시 비켜앉아, 부인 고씨는 헌
누더기옷을 깁고 있다.
남편 허생과 달라, 부인 고씨는 얼굴에 시장함을 못 견디어하는 빛이
완구히 드러나고, 자주 바느질손을 멈추고는 한숨을 내어쉬곤 한다. 그럴
적마다 남편 허생의 옆얼굴을, 심정 편안치 못한 눈으로 건너다보고
건너다보고 한다.
얼마를 그러다가 고씨부인은 마침내
“여보?”
하고 남편을 부른다.
허생은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대로 글만 읽는다. 글을
읽고 있는데, 옆에서 부인이든 누구든 불러서, 첫마디에 대답을 하는 법이
허생은 없었다.
“여보?”
두번째 부르는 부인의 음성은 약간 높기도 하였거니와 저으기
성화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래도 허생은 못 들은 성
“글쎄, 여보?”
더 높고 더 성화스런 음성으로 세번째 부르면서, 그럴 뿐만 아니라
바느질꾸리를 거칠게 밀어젖히면서, 한무릎 남편에게로 다가앉아서야
허생은 비로소 글읽기를 그치고 천천히 부인에게로 얼굴울 돌린다.
“어째 별안간 그러시요?”
태연한 얼굴과 부드러운 음성으로 허생이 그렇게 묻는 말에, 고씨부인은
씨근씨근하면서
“당신은 시장하지두 않으시우.”
“세 끼를 굶은 창자가 아니 시장할 리야 있겠소.”
“당신은 글읽기에 세상 재미가 쏟아져 시장해두 시장한 줄 모르구
그러시나 보우마는, 나는 곧 현기증이 나구, 쓰러질 것 같아요.”
“거 안됐소이다그려. 그렇지만 당장 무슨 도리가 없지 않소.”
“그럼 우두커니 앉아 굶어죽기를 바라야 옳아요.”
“설마한들 사람이 굶어죽기야 할랍디까.”
“굶어죽으면 죽는 것이지 설마가 무슨 설마예요.”
“참는 게 제일입넨다. 참으시요.”
허생은 조금도 언성과 내색을 변하지 않고 조용히 부인을 타이른다.
얼굴은 가무잡잡하고, 이목구비가 다 선뜻하지 못하고, 그런 상모에
노랑수염이 시늉만 나서 있고, 앉은키는 한 뼘만 하고, 일어선다 하여도 오
척이 차지 못할 듯싶은 작은 체구요, 어디로 보나 잔망스럽고 궁졸한
풍채였다. 그런 상모와 풍채를 하고도, 어디서 그런 침착하고 대범스러움이
우러나는지가 이상하였다. 아마도 그의 눈에 가 모든 것이 들어 있는
성부르다. 맑고도 정채가 뻗치는 그의 두 눈에 온갖 것이 다 있음일시
분명하였다.
허생의 참으란 소리에, 고씨부인은 도리어 더 보풀증이 나서, 포악을 하고
대든다.
“십 년 …… 십 년을 하루같이 바누질품, 빨래품 팔아서 그 뒷시중해
드렸으면 무던하지, 게서 더 참아요. 그것도 바누질품 빨래품이나마
전처럼 여일히 일거리가 있어, 하루 한 끼 입에 풀칠이라두 하게
마련이라면 몰라두, 당신 보시는 배, 나날이 일거리가 귀해 오다,
오늘두 벌써 나흘째 보선 한짝 꼬매 달라는 이 없잔아요.
무얼 바라구 참아요, 참기를. 굶어죽기 기대리면서 참아요.”
“글쎄, 아니 참으니 어떡하겠소.”
“어째 과거는 아니 보려 드세요, 드시기를. 남은 다 당신만 못한
글가지구두 과거 보아 장원급제해서, 벼슬허구, 이름내구,
호강으루 잘들삽디다.”
“그런 사람들이야 시운을 잘 만났든지, 타고난 천품이 좋아 일찌감치
그렇게 발산이 된 게지요. 나 같은 시운도 타고 나지 못하고,
재조도 없는 사람이야 졸연히 어데……”
“핑계를 마세요. 누가 당신 속 모르는 줄 아시우?”
허생은 일찍이, 철이 들던 스무 살 적부터 이래 십년 독실히 글을 읽었다.
글만 독실히 읽었지, 한번도 과거는 볼 생각을 아니하였다.
철 들기 전, 부모의 슬하에서 글공부를 하기 십오 년, 철이 들고 나서 십
년, 도합 이십오 년을 글을 읽었다. 노상 적은 글이 아니었다.
남 같았으면 그동안 벌써 여러 차례를 과거를 보았을 것이었었다.
그렇것만 허생은 이십오 년 글을 읽고, 나이 삼십이요, 찌부러진 일간
두옥에서 젊은 아낙의 그 체모 아닌 바느질 품팔이 빨래 품팔이로,
하루 한끼가 어려운 연명을 겨우 하여 가는 군색한 살림이요,
하면서도 도시에 과거라는 것을 보아볼 염의를 하지 아니하였다.
자고로 선비가 세태에 어둡고, 집안 살림에 등한하기는 일반이었다. 또,
선비가 점잖으면 점잖을수록 벼슬이니 일신의 영달이니 하는 것에는 좀처럼
뜻을 두지 아니하고, 오직 때를 기다리며 글읽기로 유유히 세월을 보내기를
떳떳한 도리를 삼았다.
그럴 뿐만 아니라, 과거하는 것이 속에 글과 포부가 많이 들고, 사람이
영특하고 한 것보다는 소위 가문이 좋고 뒷줄이 든든하고 하여야 손쉽게
장원급제를 하기로 마련인 것이었다.
허생은 그런데, 가문이며 포부며 사람은 어떠한지 모르되, 가장 요긴한
뒷줄이라는 것이 없었다. 허생은 당대의 세도 있다는 재상들이 어느 동네에
살고 있는 것조차도 통히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 고로 허생 같은 사람이
막상 과거를 보았다고 하였더라도 꼭이 장원급제를 하였으리 라고는 장담키
어려운 노릇이었다.
그러나 일변, 과거가 백이면 백이 다 반드시 사와 인정으로만 장원급제가
되고 말고 하기로 정해져 있는 것은 또한 아니었다. 가문이 좀
섭섭하더라도, 뒷줄이 없더라도, 글이 좋고 사람이 잘나고 하였더라면,
버젓이 자원급제를 하는 수가 노상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가령
허생으로 말을 하더라도, 되고 아니 되고는 우선 차치하고서, 마음만 있을
양이면, 과거를 보아보기는 하였어야 할 일이었다. 그렇것만 허생은 도무지
그 과거 이자와는 담을 쌓고, 말도 내려고 아니하는 사람이었다.
이십오 년 독실히 글한 보람도 없이, 남보다 동이 떨어지게 글든 것이
없는 천하 미련동이가 아니면, 남이 따르지 못할 큰 뜻과 포부를 지닌 한
특출한 사람일시가 분명하였다.
고씨부인은 오늘이야말로 기어코 무슨 요정을 내고라야 말려는지,
바싹바싹 남편의 서안마리로 다가앉으면서, 일면 푸념을 쏟아 놓는다.
“당신네 가문으루 출가를 해온 지가 열여섯 해 아니요. 그 열여섯 해동안
날 그만침 고생시켰으면 무던하지, 어떡허자구 이러시는 거예요,
이러시기를. 나두 서른 고생 하다, 한때라두 즐거운 세상 보고
죽어예지요. 원퉁히 이대루 굶어죽구 말란 말씀예요.”
“………”
허생은 묵묵히 앞 벽만 바라다보고 앉았고,
고씨부인은 가슴을 쥐어 뜯으면서
“과거를 보아 벼슬을 허구, 하시기가 싫거든 다 작파허구 집안
살림이라두 하실 염량을 차리세예지요. 하다못해 장사라두.”
“장사는 하자니 밑천은 있으며, 해보지 못하든 노릇을 어떻게 하오.”
“아니 해본 노릇이라두 남들은 잘만들 해먹읍디다. 맨주먹 쥐구
나서서두, 남들은 잘만들 해먹읍디다.”
“그런 사람이야 다 재주가 좋아 그런 게지요.”
“그럼 어떡허잔 말씀이예요. 과거두 아니본다, 장사두 못한다,
어떡허잔 말씀예요.”
“………”
“하루 한 끼가 어렵구, 그거나마 이틀 사흘 빳빳이 굶구, 그러면서두
과거는 아니 보신다, 장사는 못하신다, 그러면서 태평세월루 글만 읽구
앉아 기시려 드니 어떡허잔 말씀예요, 말씀이.”
“인전 그만해 두시오. 여러 끼 굶운 사람이 소리를 지르구 그래싸면,
도 허기만지지 아니허우.”
허생은 여전히 조용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타이르고는, 도로 다시 글을
읽으려고 한다. 그러는 것을 고씨부인은 와락 달려들어, 서안의 책을 집어 방바닥에다 태질을 치면서
“글은 읽어 무얼 하시자구 읽으세요. 삼십 년 글을 읽구두, 과거 한 장
하실 생각 아니하는 글, 무엇하자구 읽으세요, 읽기를.”
“허어, 이 책 소중한 줄을 모르고.”
허생은 그제서야 한마디 점잖이 나무라면서, 일변 책을 집어다 서안 위에
도로 잘 놓는다. 그러고는 입만을 거듭 다시면서, 잠깐 동안 무엇을
생각하더니
“오 년만 글을 더 읽었어야 할 텐데…… 쯧, 딱한 노릇이로곤.”
하고 푸스스 일어나 나막신을 딸깍거리고 싸리문 밖으로 나가버린다.
시방으로부터 대범 삼백 년 전,
효종대왕(孝宗大王)이 위에 계실 시절의 일이었다.
2
서울 다방골 변진사라고 하면, 서울 장안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조선
팔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이름이 난 큰 부자였다.
변진사는 나라에서도 알아주는 부자였다. 나라에서는 효종대왕이,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원수갚음으로, 북벌———— 북쪽으로 청나라를 칠
계획을 차리고 있었다.
청나라 같은 큰 나라를 쳐들어가 전쟁을 하자면 동병(動兵)을 많이 해야
하고, 도병을 하자면 돈이 많이 들고, 돈이 많이 드는 데는 부자들이
조력을 해야 하였다. 이 부자들의 조력을 받기 위하여 나라에서는 서울
장안은 물론이요, 조선 팔도의 큰부자들을 일일이 조서허여 가지고, 혹은
조정으로 불러다가, 혹은 관원을 보내어 벼슬도 주고 하면서 달래고
하였다. 그러고 다방골 변진사는 부자 중에도 으뜸가는 큰부자라고 하여,
효종대왕이 친히 궐내로 불러 장차에 청나라 칠 계획을 이르고, 집사
벼슬을 재수하면서 후일을 당부 신칙하였었다.
돈이 있고, 겸하여 나라에서 알아주는 변진사는 권세와 위의가 대단한
것이 있어 주축을 하여도 조정의 내로라는 재상이며 양반들과 늘 주축을
하고, 집이랄지 차리고 사는 범절이며 법도는 당대의 이른난 세도 재상
부럽지 않게 홀란스러웠다.
그러한 변진사인만큼, 가령 누가 찾아가더라도 웬만한 사람은 대문간이나
하인청에서 퇴짜를 맞고 쫓겨나오고, 변진사의 앞에는 졸연히 얼찐거리지도
못하였다.
이런 변진사를 묵적골 샌님 허생이 불쑥 찾아왔다. 부인 고씨한테 구박을
맞고서 푸스스 집을 나온 허생은 그 길로 변진사를 찾아온 것이었었다.
그렇다고 허생이 변진사와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더냐 하면 그도 아니요,
누구의 천거가 있더냐 하면 역시 아니요, 단지 다방골에 변진사라는 장안
갑부가 있더냐 하면 역시 아니요, 단지 다방골에 변진사라는 장안 갑부가
있다는 말만 증왕에 들은 것이 있을 따름이었다.
다섯 자가 찰락말락한 키에, 앙상한 얼굴은 성깃성깃한 노랑수염으로 더욱
근천스럽고, 헐어빠진 갓에 노닥노닥 기운 웃옷을 걸친데다 우환중에
나막신을 신고, 이 지지리 궁한 꼴을 하고서, 장안의 갑부요 나라에서도
괄시를 못하는 변진사를 처억 찾아왔으니, 대문간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하인들에게 창피를 당하고 쫓기어나기가 십상이었다.
허생에게는 그러나, 몸집이며 의표의 초라함을 넉넉히 가리고도 남을
위엄이라는 것이 있었다. 허생의 눈에는 정채가 있었다. 그 정채는
사람으로 하여금 압기(壓氣)에 불리게 하는, 그래서 감히 침노키 어려운
위엄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었다.
과연 허생이 대문을 지나 중정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 한 하인이, 이게
웬 화상이냐는 듯이, 허생의 그 나막신 떨걱거리면서 들어오고 있는 초라한
행색을 위아래로 쓱 훑어보았다. 그러면서 하인은 곧
“웬 사람야?”
하고 을러메는 소리가 나올 듯하다가 허생과 눈이 마주치자 그만 압기에
눌려 허리를 굽신하고 옆으로 비껴서고 말았다.
허생은 서슴지 않고 사랑으로 올라갔다.
변진사는 사랑에 나와 있었다. 사오 인의 문객과 함께 한담을 하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주인 변진사가 누구인 줄은 얼른 알 수가 있었다.
허생은 변진사의 앞으로 가 선뜻 마주 일어서는 변진사와 마주 읍을
하고는 자리에 앉은 후에
“당신이 변진사시요?”
하고 물었다.
“네, 내가 변아모요.”
변진사가 대답을 하고, 허생이 다시
“내가 쓸 곳이 있으니 돈 만 냥만 돌려 주시오.”
하는 말에 변진사는 서슴지도 않고
“그럭허시오.”
하고 대답을 하였다.
“만 냥에서 백 냥은 묵적골 허생의 집으로 보내주고, 구천구백 냥은
안성읍내 강선달집 허생의 앞으로 환을 놓아주시요.”
“그럭허지요.”
“평안히 계시오.”
“평안히 가시오.”
그러고는 허생은, 나막신을 떨걱거리면서 중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좌중은 문객들은 마치 도깨비에게 홀린 형국이었다.
돈이 만 냥이면 부자가 몇이 왔다갔다하는 큰 돈이었다. 그런 큰 돈을
생면부지 모르는 사람, 모르는 사람일 뿐 아니라 노랑전 한푼껏 없어
보이는 궁한 선비에게, 선뜻 한마디에 그런 큰 돈을 주다니. 황차 평일에는
뒤가 든든한 자리에도 백 냥 하나를 취해 주기에도 조심을 하던 변진사가
아니었던가.
허생의 나막신 떨걱거리고 나가는 소리가 중 문 밖으로 사라지자, 벌린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뻐언히 앉았던 문객들은 그제서야 정신이 들어,
그중 하나가 변진사더러
“아니, 초면이신가본데, 만 냥 돈을 그렇게 함부로 주십니까?”
하고 걱정하여 묻는다.
변진사는 곰곰 무엇을 생각하고 앉았다가 그도 비로소 정신이 들어
“초면에 와서 만 냥 돈을 달라는 사람이면, 미친 사람이 아니면, 만 냥
값이 더 나가는 큰사람이 아니겠소. 그런데 보아허니 미친사람은 아니고.”
“그렇지만, 외양이 너무……”
“외양을 잘 차리고 다니는 사람이면 돈이 있는 사람인데, 돈이 있는
사람이면, 돈 있는 사람이 무엇하러 남더러 돈을 취해 달래며, 취해
줄며리는 있소. 도대체 사람이란 외양만 보고는 모르는 법입넨다.”
대답을 하고 변진사는 서사를 불러, 돈 만 냥을 백 냥은 묵적골 허생의
집으로 태전 지워 보내고, 구천구백 냥은 안성읍네 강선달집 허생에게로
환을 놓아 보내고 하라고 분별을 시킨다.
허생은 부인 고씨가 여자의 좁은 소견에 작은 발신과 편안을 바라고
아등바등 바가지를 긁으며 성화를 먹이는 데 성가신 생각이 들어, 에라
잠시 동안 바람도 쏘일 겸 지닌 바 포재의 한끝도 시험을 하여 볼 겸,
그렇게 집을 나선 것이었었다.
우선 생면부지 모르는 사람 변진사에게서 한마디로 만 냥 돈을 취하는
데에 성공을 하였다. 그러고는 시방 안성읍을 향하여 나막신을
떨걱거리면서 한강 건너 논들을 지나는 참이었다.
추석을 십여 일로 앞둔 팔월 초생, 들의 벼는 목이 숙고 누릇누릇
익어가고 있다. 고추가 붉고 김장이 파릇파릇 이쁘게 자랐다. 콩은 여물고,
수수목은 무거웠고 감과 대추는 다투어 볼이 붉었다.
허생은 이런 보이는껏 살지고 여물어가는 가을을 뜻있어 두루 살피며
나막신을 떨걱거리고 길을 걷는데, 그러자 웬 시꺼먼 총각 하나가 길 옆에
나뭇지게를 받쳐놓고 앉아 쉬다가 허생을 보더니 반겨 달려들면서
“생원님 어데 행차허세요?”
하고 너풋 절을 한다. 허생도 반기는 기색을 하면서
“오, 네가 먹쇠 아니냐?”
사오 년 전까지 허생의 집에서 종으로 있던 먹쇠였다. 먹이고 입히고
뒤치다꺼리를 할 도리가 없어, 부인 고씨가 양반의 체모에 하인 하나 없이
살까보냐고 미련겨워하기는 하면서도 하릴없이 속량(贖良)을 시켜 주자고
말을 내어, 허생은 선뜻 응락을 하였다. 허생은 본시 양반의 후예는 양반의
후예이면서, 자기가 양반이라고 생각하는 일도 없고, 양반 행세나 양반
자세를 하는 일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양반이라는 것을 인정치 아니하는
동시에, 따라서 종이라는 것도 인정치 아니하였다. 다 같은 사람인데
어째서 양반과 상놈이 있으며, 어째서 상전과 종이 있어 가지고 상전은
종을 부려먹고 천대하며, 종은 양반을 공경하고 일을 해다 바치고 할까
보냐는 것이었다.
먹쇠도 그래서 진작에 속량을 시켜주었을 것이로되, 부인 고씨가 무가
내히로 듣지를 아니하여 마음에도 없고 사세도 닿지 않는 상전 노릇을 하던
참이었었다. 그러다가 부인 고씨가 영영 할수가 없어, 마침내 속량을
시켜 주자는 말을 내자, 허생은 기다리고 바라던 일이라 당장에 응락을
한것 이었었다.
그 먹쇠가 한번 간 뒤에 사오 년이나 소식이 없더니, 이 날 여기에서
나뭇지게를 지고 있었다.
“그래, 아직도 장가도 들지 못하고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나보구나.”
허생은 가엾이 여기는 눈으로 먹쇠를 위아래로 씻어보면서 묻는다. 먹쇠는
나이 이십이 훨씬 넘었었다.
먹쇠는 계면쩍은 듯이, 손으로 뒤통수를 만지면서
“네, 쥔을 고만 잘못 얻어 만나서와요.”
“으음……”
그러면서 허생은 잠깐 무엇을 생각하더니
“너 그럼, 날 따라오려느냐?”
“데리구 가 주신다면 뫼시구 가구말굽쇼.”
먹쇠는 그의 생김새대로 우적한 성질이라 허생의 그 어질고, 상전이면서
상전 태를 아니하고, 하인을 하인으로 천대하지 않는 데에 퍽 심복을
하였었다. 허생의 집에 있으면서 늘 굶고 헐벗고 하였으면서도, 속량을
시켜주어 마침내 나가게 된 마당에서는 차마 떠나지 못해 한 것도, 오로지
허생을 상전으로서가 아니라, 부모같이 형같이 존경하고 따르고 한 정 그것
때문이었었다.
허생은 여전히 종 부리기를 반대하는 사람이요, 종의 필요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먹쇠가 아직도 장가도 들지 못한 채 고생을 하는 것이
가긍하고, 일변 책임도 느꼈다. 어떻게든 살 도리를 마련하여 주는 것이
떳떳하였다. 앞으로 일을 하자면 종은 아니라도, 손대는 하나쯤 데리고
다녀 무방하였다. 먹쇠는 마음 맞는 손대 노릇을 할 수가 있었다. 데리고
다니면서 일도 시키고, 그러다가 계제를 타서 살 끈을 잡아주도록 할
것이고.
다섯 자가 착락말락한 키에, 앙상한 얼굴에는 근천스런 노랑 수염이
성깃성깃하고, 헐어빠진 갓에 노닥노닥 기운 웃옷을 떨쳐 입은데다
나막신을 떨걱거리면서 앞을 선 허생과, 굴뚝 구멍에서 나온 듯 시꺼먼
놈이, 키는 구척 장신인데 잠방이 적삼을 시늉만 걸치고는 성성큼 뒤를
따르는 먹쇠와, 참으로 우스꽝스런 주종의 행색이 아닐 수 없었다.
먹쇠는 다른 것은 몰라도 허생의 떨걱거리는 나막신의 마음에 걸렸다.
뒤를 따라가면서 내려다보고, 내려다보고 하다가 마침내
“생원님?”
하고 부른다.
“오냐.”
“시방 어디루 가시죠?”
“안성으로 간다.”
“몇리나 되죠?”
“한 이백 리 되리라.”
“이백 리를 저 나막신을 신구 가세요.”
“그럼, 맨발로 가느냐.”
“담배 한 대 전만 저 그늘루 앉어 쉬시죠. 그동안 제가……”
그러고는 먹쇠는 길 옆 논두덕으로 내련간다. 논두덕에는 올벼를 타작한
햇짚이 널려 있었다.
먹쇠는 짚을 한 줌 걷어가지고 오더니, 허생이 쉬는 옆으로 와 앉아, 날을
꼬고 총을 비비고 하면서 부지런히 짚신을 삼는다.
먹쇠를 만난 덕에 허생은 우선 서울서 안성끼리 이백 리 길을 떨걱거리는
나막신 대신 세총박이 털메신이나마 짚신을 신고 발 편안히 갈 수 가
있었다.
그뿐 아니라, 허생은 어인 돈이 되었든 만 냥의 돈이 생겼고, 백 냥은
집으로 보낸 것이 있고 하니, 잠깐 들러서 부인 고씨와 작별도 하고, 돈도
돈냥이나 노수로 허리에 차고 나섰어야 하였을 것을, 그는 다방골 변진사의
집을 나와, 그 길로 바로 길을 떠났었다. 노수 한푼 몸에 지닌 것이 없고,
그렇다고 남의 사랑이나 글방을 찾아들어 과객질을 할 체모나 비위는 없는
터. 만일 먹쇠가 조석으로 마을에 들어가서 호박잎에다 밥 한 덩이씩을
얻어오는 것이 아니었으면, 이백 리 이틀 길을 빳빳이 굶어갔지 별수가
없을 판이었다.
3
안성장에는 과일이 많이 났다. 감·대추·밤 같은 것은 물론이요,
배·호도·잣·은행 이런 것들이 섬으로 짐으로 그 넓은 장판이 미어지도록
들이 나 쌓였다. 그 과일들을 서울서 내려온 도가들이 흥정을 하느라고
지껄이고, 소리지르고, 다투고, 싸움하고, 세고 하기에 장판은 벌집을
쑤신 것처럼 요란하였다.
그런 장판에 웬 굴뚝 구멍에서 나온 것 같은 시꺼먼 구척 장신의 총각
녀석 하나가 장판을 위아래로 휘젓고 돌아다니면서
“자아, 과일삽시다, 과일. 값은 달라는 대로 주고, 과일은 있는 대로 다
사고. 자아, 누구든지 값 잘 받고, 과일 쉽게 팔려거든, 물산도 가하는
강선달네 집 앞으로 지고 오시요. 한 접도 사고 열 접도 사고, 한 섬도
사고 열 섬도 사오. 부르는 게 값이요, 있는 대로 몰아 사오. 자아,
강선달네 집 앞으로 오시요 오시요.”
하고 인경소리 같은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었다.
장사들은 처음에는 웬 미친 놈인고 하였다. 그래도 그중 한 사람이,
바지게에 지고 온 감 한 접을 지고, 허실삼아 물산도가하는 강선달네 집
앞으로 가보았다. 과연 강선달네 집 서두리꾼이 수십 명이, 둘씩 한패가
되어가지고 띄엄띄엄 벌려앉아 과일장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감 팔러 왔소?”
“네.”
“몇 접이요?”
“한 접이오.”
“값은 얼마요?”
“한돈이오.”
“세여서 들여놓고, 돈 받아 가시요.”
이 날 안성장에서는 감 한 접에, 상이 칠푼이요, 보통 오푼이었다. 그런
것을 감장사는, 값은 달라는 대로 준다고, 그 거먹동이가 외우는 소리를
들은 것이 있기 때문에, 한 돈이라고 불러본 것이었다. 했더니,
아닌게아니라 부르는 대로 한 돈에 사들이는 것이었다.
소문은 삽시간에 장판으로 퍼졌다.
소문을 들은 과일장사들은 너도 나도 하고 앞을 다투어 과일짐을 지고
강선달네 집 앞으로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바지게에 감을 지고 오는 사람,
호도섬을 말에 싣고 오는 사람, 밤섬을 소 등에 싣고 오는 사람, 대추를
멱서리에 넣어 지고 오는 사람, 광우리에 배를 이고 오는 여인네, 자루에
은행을 넣어 걸메고 오는 꼬마동이……
거먹동이가 외우던 대로, 그리고 소문을 들은 대로 가지고 와서, 부르는
게 값이요, 물건 호불호 가릴 것 없이 있는 게 한이었다.
마침내 과일장은 강선달네 집 앞으로 쏠려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석양
무렵까지에는 이 날 장에 났던 과일이, 한 톨 남지 않고 죄다 강선달 네
고간으로 들어가 쌓이고 말았다. 서울서 내려온 과일도가들도, 약간 초장에
산 것을 도로 다 팔아버렸다. 이문이 남기는 일반인데, 구태여 서울까지 떠
싣고 갈 며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장판에 난 과일을 값은 부르는 대로 내고 싹싹 쓸어 사들이다니, 이건 큰
변괴였다. 안성장이 생긴 이후로 처음 일이었다.
구석구석이, 둘만 모여도 수군거리고, 셋만 모여도 그 이야기로 판을
짰다. 그러나 아무도, 과일을 그렇게 사들이는 사람이 누구며, 무슨
목적으로 그러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혹이 강선달과 아는 사람이 있어
“거, 과일은 웬 걸 그렇게 사들이오?”
하고 물으면, 강선달은
“나도 모르오. 나는 손님의 심부림을 할 따름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이날 밤, 허생은 조촐한 술상을 앞에 놓고, 주인 강선달과 마주 앉아 향기
있는 약주술로 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하였다. 허생은 좋은 술이면 십여
배 기울이기를 즐겨하던 터이었다.
“오늘 도합 얼마치나 샀나요?”
허생이 묻는 말에, 강선달은 공순히
“한 팔백 냥어치나 샀나 봅니다.”
하고 대답을 한다.
“겨우 팔백 냥이요.”
“팔백 냥 돈이 적습니까?”
“돈 팔백 냥만 생각하면 크달 수도 있지만, 이 큰 안성장 과일을 죄다
사기에 팔백 냥이라면 너무 허망치 않소.”
“앞으로 서리가 올 때까지 더 나기는 날 것입니다.”
“그럼. 구월 그믐께까지는 과일이 있겠소이다그려.”
“그렇지요.”
“장날 아닌 무시날에도 과일이 들어오나요?”
“많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과일 들어오는 것이 떨어지는 때까지, 감 한 개, 대추 한
개라도 다른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다 사주시요.”
“오신 손님 물건 사 드리는 것이 영업이니깐, 그야 사 드리기가
어렵겠읍니까마는 과일 따라 상할 것이 있겠으니 정이올시다. 감이 제일
상하고, 배 대추 같은 것도……”
“상하는 것이야 어떡허겠오. 아무튼 사서 들여 재이기만 하시요.”
이리하여 구월 그믐까지, 강선달은 허생이 시킨 대로 안성으로 들어오는
과일이라는 과일은 깡그리 사서 곡간에 들여쌓았다. 그러고 나니, 과일도
끊겼거니와 돈도 만 냥 돈이 거진 다 나가고, 강선달네 곡간은 있는 대로
다 차고 하였다.
시월이 가고 동지달로 접어들었다. 그동안 허생은 과일을 그렇게
사놓고는, 어떻게 처분을 한다는 말이 없이 밤이나 낮이나 강선달네 안사랑
조용한 방에 들어앉아 글만 읽고 있었다.
먹쇠는 가끔 곡간에 들어가, 상한 과일을 추어 내다가는 버리는 것이
일이었고,
강선달이 하도 민망하여 허생더러
“아, 저 많은 과일을 날이 차서 얼고 하기 전에 방을 하시든지 하서야
아니합니까?”
한다치면, 허생은 태연히
“다 썩혀도 돈 만 냥 아니오.”
할 뿐이었다.
한편, 서울서는
해마다 서울서 먹히는 과일이 태반은 안성장을 거쳐서 서울로 올라오게
마련이었다.
강원도·황해도 그리고 경기도에서 나는 과일이 서울로 약간 들어오지
아니하는 것은 아니다, 초가을에 조금 들어오고 나면 그만이었다. 그러고서
늦은 가을로부터 겨울과 이듬해 봄까지 대는 과일은 역시 안성장을 거쳐
남쪽으로부터 오는 과일이었다.
이렇게 서울의 과일을 대는 안성으로부터의 과일이 올해는 칼로 자른 듯이
뚝 끊겨버렸다.
추석 무렵부터 벌써 과일이 귀하기 시작하더니, 구월로 들어서면서는
과일전이 열에 대여섯은 파리를 날렸고, 그러다가 시월 동지달에는 서울
장안에서 감 한 개, 밤 한 톨 구경을 할 수가 없었다.
호강하는 양반들이 잣죽 구경을 못하였다.
어느 대가집에는 과일 없는 제사를 지냈다.
대궐에서는 밤·대추·곶감이 없어 약식을 만들지 못하고, 식혜에
실백자를 띄우지 못하였다.
탕약에 대추 두 알을 넣지 못하고, 생 세 쪽만 넣어 달여먹기는 예사였다.
서울 장안에 과일이 귀하단 소문을 듣고, 양주 사람 누구는 제 부모
제사에 쓰려고 무어두었던 밤 한 말을 파가지고 와서 한 냥을 받았다.
여느때라면 밤 한 말에 오 푼이 벗지 아니하였다.
누구는 곶감 한 접을 가지고 와서 큰 수를 보고, 누구는 부자집 환갑
잔치에 대추 서 되를 구해다 주고서 삼동 땔 나무를 장만하고 하였다.
이렇게 서울 장안에 과일이 씨가 마르자, 과일도가들은 제마다 안성읍의
강선달에게로 내려달았다.
처음에는 시세의 갑절을 불렀다.
강선달은 시세가 갑절로 올랐으니 방을 하라고 허생에게 권하였다.
허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다음엔 삼곱으로 올랐다. 허생은 그래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월로 들어서서는 시세의 다섯 곱절로 불렀다. 허생은 종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동지달이 되자, 마침내 열 곱절을 불렀다. 밤 한 말에 너돈 닷돈이요,
곶감 한 접에 엿 돈이 넘는 시세였다.
시세가 열 곱이 되는 것을 보고, 허생은 비로소 곡간문을 열었다.
허생이 과일을 방하자, 지나간 초가을 그가 과일을 긁어 사들일 때보다 더
큰 난리가 났다.
날마다 수백 명씩 서울서 온 과일장사들이, 돈을 짊어지고 와서는 돈을
풀고 그 대신 과일을 져가기에 눈이 뒤집혀가지고 납뛰었다.
열흘이 못하여 과일 곡간은 텅텅 다 비었다. 그러고는 과일 대신 십만
냥의 돈이 들어와 쌓였다. 허생은 석 달 동안에 십 곱절의 이문을 남 긴
것이었었다.
과일이 다 나가던 날 밤, 허생은 술상을 앞에 놓고, 주인 강선달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하였다.
“과연 몰라뵈었읍니다.”
강선달이 새삼스럽게 이런 감탄과 추앙을 하는 것을, 허생은 도리어
폐로운 듯이
“그런 말을 하면, 내가 이 좋은 술이 술맛이 없소이다.”
“선비라면 글이나 읽을 줄 알았지, 세태에는 통히 범연하고 어둔 줄
알았더니, 허생원 같으신 선비도 기섰읍니다그려.”
“………”
“선비더러 물꼬를 막으라고 시키니까, 아래께를 막으면 터지고, 막으면
터지고 하드라고요. 그래, 물꼬는 어떻게 막아야 한다는 것을 글로 쓰라고
하니깐, 물은 그 근원을 막아야 하는 법이니라고 써놓았드라지요, 허허.”
“나라가 상하없이 이학(理學)만 숭상하고 실학(實學)을 업수이 여긴
탓이지요”
“그래도 선비네는 세태에 어둡고 등한한 것을 오히려 자랑으로 여기지
않습니까?”
“선비 그 사람의 자랑일는지는 몰라도, 그런 사람네가 정사(政治)를
하니, 나라일이 말이 아니지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저 돈 십만 냥으로 이번에는 무얼 사실
생각이신지요?”
“글쎄, 아직 별로 작정이 없소이다.”
“그러시거들랑, 쌀을 사 놓시는 게 어떠신가요?”
“쌀을 사 놓으라고요?”
“쌀도 서울로 올라가는 쌀이 이 안성을 거쳐 갑니다. 십만 냥에치 몽땅
사 놓시면 한 달이 못가 서울 장안은 쌀이 없어 난리가 나고,
금새는 열 곱절이 더 오를 것입니다.”
“허어, 딱한 말씀을……”
선뜻 응할 줄 알았던 허생은 뜻밖에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여보시오, 강선달!”
“네”
“과일은 양반이나 부자들이, 주장 입치레로 먹는 게 아니오.”
“그렇지요.”
“그러니깐 그런 사람들야 한때 과일을 좀 비싼 값으로 사먹기로서니 별반
관계가 없을 게 아니겠오. 서울 양반들이나 부자들이 밤 한 말에 너푼 하든 것을 너돈이나 닷돈에 사 먹기로서니 거덜이 날 이치야 없지않소?”
“그렇지요.”
“서민이나 가난한 사람들은 과일을 먹지 못해 죽지는 아니하니깐,
비싸면 아니 사먹으니 그만이고.”
“그렇지요.”
“그렇지만 서민이나 가난한 사람들도 과일은 아니 먹어도 살지만 쌀이
없어서는 당장 죽을 게 아니오.”
“네, 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양반이나 부자들은 몇 달씩 먹을 양식을 진작에 다 장만해 두었으리다.
그러나 쌀이 아모리 귀하고 값이 아모리 비싸드래도 그 사람네가 밥을
굶거나 답답할 일은 없을 게 아니겠소. 쌀이 귀하고 비싸면 당장
죽어나는 건 서민과 가난한 사람들이지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서민과 가난한 사람들을 못살게 하고서 장사 이문을 보려 들다니, 큰
죄가 아니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여보, 강선달?”
“네에.”
“당신도 보아허니, 돈을 좀 모았나 봅디다마는, 돈도 모을 돈이 있고,
모아서 아니 될 돈이 있고 합넨다.”
“네.”
“악한 돈일랑 모으지 마시오. 인자는 불부라는 말이, 세상 사람이 돈을
악하게밖에는 모을 줄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 난 말이지요. 악하지 않게
모아 악하지 않게 쓰면야 부자가 나뿔 며리야 없는 것이니깐요.”
마악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잇는데, 그때 별안간 마당에서 여러 사람의
어지러운 발짝 소리와 웅성거리는 소리가 일었다.
종종 겪어본 가늠이 있어, 강선달은 단박에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고
사지를 떨면서
“화적이 들었읍니다. 얼른 피신을 하십시요.”
하고 당황히 납뛰었다.
허생은 그러나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태연히 앉은 채
“화적이 그대지 두려울 게 무어란 말이지요.”
“못 당해 보셨으니 그렇게 말씀을 하시지만……”
“화적이면, 저이가 달래는 돈을 주면 그만이 아니요.”
“그야 그렇지요만.”
“내가 다 요량이 있으니, 아모 염려 마시오.”
그러자, 방문을 와락 열어젖히면서 번쩍거리는 장검을 든 자가 앞을 서고,
식칼과 몽둥이와 창을 든 여럿이 앞선 자를 옹위하듯 방으로 척척
들어섰다. 모두들 눈이 붉었고, 살기가 뎅겅뎅겅 듣는 것 같았다.
두목일시 분명한 그 앞선 자가, 허생과 강선달을 번갈어 보면서
“둘 중에 누가 허생이냐?”
하고 을러메듯 묻는다.
허생은 눈썹 하나 까딱 않고, 거기 어데 지나가는 사람과 수작이라도 하는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허생은 낸데, 너이는 누구며, 무슨 일들이냐?”
하고 묻는다.
“보면 몰라. 너 돈 십만 냥 가졌지?”
“그렇다. 십만 냥 있다.”
“저놈, 꼼짝 못하게 묶어라.”
두목이 졸개를 돌어보고 허생을 칼로 가리키면서 그러는 것을 허생은 껄껄
웃으면서
“못 생긴 놈들이로곤. 그래, 장기까지 지닌 너이 수십 명이 이 약질
하나를 못 당해낼까 바서 묶는단 말이냐, 십만 냥 돈을 몸에 지녔기에
내뺄까 바서 묶는단 말이냐.”
도적 두목은, 들이단짝 이마빡을 딱 부딪뜨린 맛이었으니, 그래도 기는
앗기지 아니하려고 컬컬히
“얘, 이놈 봐라. 응. 뚝배기보다 장맛이 낫다드니, 그 생김새허구는
제법이로구나. 그래 돈은 다 내놀 테냐, 순순히.”
“아니 주면 사람을 궃히고 뺏어갈 테니, 내놓았지 별수가 있는냐.”
“그럼 내놓아라.”
허생은 방구석에 처박혀 앉아 벌벌 떨고 있는 강선달더러, 돈 둔 곡간의
열쇠와 그리고 등불을 밝혀오라고 이른다.
이윽고 열쇠와 등불이 왔다.
“날 따라오느라.”
허생은 도적 두목더러 이르고, 손수 열쇠와 등불을 들고 앞을 선다. 도적
두목과 졸개들이 웅기종기 그 뒤를 따랐다.
허생은 강아지만 자물쇠를 열고, 곡간문을 좌우로 활짝 열면서
“자아, 이게 십만 냥이니, 너이들 힘껏 마음껏 져가거라.”
하고 등불을 들여 비춰 준다.
곡간 안에는 구렁이가 서리고 있는 것 같은 십만 냥의 돈더미가 희미한
불빛에 거무스름히 드러났다. 그것은 세상 사람의 다 좋아하고 부러워하고
귀히 여기고 하는 돈———보배라기보다는 하도 더미가 크고, 하도 수효가
많아 차라리 무슨 괴물같이 무섭기도 하고 지겹기도 하였다.
도적 두목은 돈에 아바기를 받아 잠깐 멍하니 섰다가, 인하여 뒤를
돌아보면서
“들어가, 질 수 있는껏 지고 나오느라.”
하고 영을 내린다.
영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졸개들은 손에 들었던 식칼이며 몽둥이며
창등속의 장기를 내동댕이치고, 우우 한꺼번에 곡간 안으로 몰려들어간다.
한 이십 명 됨직하였다.
도적들은 제마다 허리에 찬 큼직큼직한 전대를 뽑아가지고, 한 냥씩 한
냥씩 꿴 돈을 집어넣는다. 그러느라고 서로 밀치고 비비대고, 지껄이고
탓하고 나무라고 야단법석이 난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 흐벅지게 많은 돈과
돈을 마음껏 자져가는 데만 정신이 팔려, 옆에서 벼락이 떨어진 대도 모를
지경이었다.
이럴 때에 만일 허생이 곡간문을 닫아버리고 밖에서 자물쇠를 딸꼭 잠가
놓는다면, 도적들은 독 안에 든 쥐요, 관원을 불러 쉽사리 다 붙잡을 수가
있었을 것이었다.
허생은 그러나, 조용히 등불을 비춰주고 서서, 도적들이 돈을 지고
나오기를 기다릴 따름이었다.
도적들은 이윽고 하나씩 둘씩, 돈전대를 멜빵 걸어 짊어지고, 끙끙하면서
곡간 밖으로 기어나오기 시작한다.
전대에 돈을 넣어 진 외에, 저마다 허리띠에 돈꿰미를 여러 냥씩 찼다. 그
돈꿰미가 중동이 잘라지든지 끝이 풀리든지 하여, 돈이 좌르르 무딘
쇳소리를 내며 쏟아지기도 한다.
어떤 자는 무거운 돈짐에 눌러, 비척비척하다가 그대로 퍽 쓰러지기도
한다.
어떤 자는 너무 무거워 지고 일어서지를 못해, 멜빵만 어께에 걸고는
주저앉아 낑낑거리기도 한다.
어떤 자는 발을 떼어놓기에조차 대견하도록 돈짐을 지고 나오면서도,
그래도 더 많이 못 가져가는 것이 안타까와 연신 뒤를 돌아보다가는 곡간
턱문에 걸려 에쿠 하고 앞으로 넘어박히는 자도 있다.
그럭저럭 도적들은 다 한 짐씩을 해 지고 곡간 밖으로 나왔다.
곡간의 돈은 별로 축나 보이지 않았다.
허생은 곡간문을 닫고, 자물쇠를 잠그고 한 후에, 마당으로 늘비하니
주저않은 도적들은 바라다본다. 마당에는 달빛이 비치고 있었다.
곡간에서 마당까지는 이삼십 보에 불과하였다. 도적들은 욕심에 돈을 너무
많이씩 지고는, 겨우 이삼십 보의 마당까지 나와서는 돈 무게에 눌려, 서서
있지도 못하고 제마다 펄씬펄씬 주저앉아 있었다.
도적들은 돈 무게에 몸을 지탱하지만 못할 뿐 아니라, 돈에 정신 또한
빠져 저희들이 도적이라는 것까지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마당에
내동댕이친 식칼이며 몽동이며 창 동속의 장기————돈보다도 실상 더 소중히
할 것이며, 목숨과 같이 조심하여 건사하고 챙겨야 할, 이 장기들을 그들은
돌아보려고 아니하였다.
“저 꼬락서니들을 하고서야 어떻게 무사히 돈을 져다 먹을까.”
딱한 생각이 저도 들었던지, 우두커니 졸개들을 바라다보고 섰는 도적
두목더러 허생이 하는 말이었다.
도적 두목은 입맛을 다실 뿐 말이 없고.
허생은 다시
“모두 해 몇 명인고?”
“한 이십 명……”
“그렇다면, 한 명 앞에 많이 졌어야 오십 냥에서 더는 못 졌을 테니,
도합 천 냥이로구나.”
“………”
“돈 겨우 천 냥을 져갈 데면서, 십만 냥을 다 내놓라고 큰 소리를 쳐.”
“………”
“이왕, 마소라도 몇 바리 끌고 왔으면 그래도 만 냥 하나는 가져갔지.
요량이 그렇게 없고, 담보가 그렇게 적고서,
두목이 무슨 두목이란 말이냐.”
고개를 깊이 떨어뜨리고 묵묵히 섰던 도적 두목은, 별안간 손의 장검을
버리고, 접질리듯 끓어앉으면서
“크신 어른을 몰라뵈었읍니다. 살려주옵시요, 대왕마님.”
하고 비는 것이었다.
허생은 피식이 웃으면서
“실없은 사람이로곤, 내가 도적의 괴수드란 말인가,
대왕마님이란 어데 당한 소린고.”
“그럼 무어라고 불러 이쭈오.”
“나는 한낱 선비로세. 남들도 나를 허생원이라 부르니, 그렇게 부르면
그만이 아닌가.”
“그럼 그대로 불러 올리겠읍니다.”
도적 두목은, 그러고는 일변 마당의 졸개들을 돌아보면서
“다들 이 허생원님 앞으로 와 꿇어앉어라.”
하고 명령을 한다.
도적들은 처음부터 이 허생의, 저희들에게 대하는 점잖고도 침착한,
그러면서도 위엄있는 태도와, 겸해서 돈이 그렇듯 많은 데에 부지중
경복하는 마음이 나고 있던 터라, 두목의 영이 한번 있자, 그들은 아무
주저도 없이 일제히 허생의 앞으로 와 주욱 꿇어앉아 머리를 조읍는다.
허생은 한참이나 도적의 무리를 내려다보고 섰다가
“어째서 도적이 되었는고?”
하고 묻는다.
아무도 얼른 대답이 없더니, 이윽고 그중 늙수그레한 도적 하나가 고개를
들면서 대답을 한다.
“본시야 다 양민이올시다마는, 양민으로는 먹고 살 길이 없어 부득이
도적이 되었읍니다.”
허생이 만일, 때의 나라 형편과 민정을 짐작치 못하는 위인이었다면, 이
도적의 말도 흔히 도적들이 핑계삼아 입에 붙은 말로 하는 말이거니 하여
신용치 아니하였을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허생은 역시 허생답게 넓고 깊이 아는 바가 있었다.
이때의 조선의 나라 형편과 민정은 대강 어떠하였던가.
본조(本朝 : 李朝) 오백 년의 역사를 상고할 때에, 그 어느 시절이고
외적(外敵)의 침노가 없은 적이 드물고 내란이 일지 아니한 적이 드물었다.
조정에는 외척의 전황과 동서남북 파가 갈려 사색당쟁의 끊일 사이가 없고,
지방에서는 토호와 수령 방백의 토색질이 백성을 편안히 살도록 한 세월이
드물었다. 큰 도적이 생기어 여러 해씩 양민을 괴롭히는가 하면, 흉년이
들고, 흉년이 지나면 모진 병이 퍼져 사람을 무수히 죽게 하고,
이렇듯 안팎으로 국난과 재장이 연달다시피 한 그중에서도, 가장 어렵던
시절이 어는 시절이더냐 하면,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치른
선조대왕(宣祖大王) 중연으로부터 효종대왕(孝宗大王)에 이르는 범 칠십 년
동안일 것이었다.
선조 이십오년, 임진(壬辰) 사월에 왜병의 선봉 오만 명의 남쪽 부산포롤
침노를 하였고, 이것이 곧 임진왜란의 시초였다.
임진왜란은 전후 칠 년 동안을 끌었고, 우리 조선이 외적의 침노를 받은
큰 난리 가운데 나중의 병자호란(丙子胡亂)과 더불어 다시 없는
국난이었었다.
임진왜란 일곱 해 동안에 조선 팔도 방방곡곡이 왜병이 이르지 아니한
곳이 없고, 왜병이 지나는 곳에 성곽과 백성의 살림이 짓밟혀 황폐되지
아니한 곳이 없었다. 성을 무너트리고 인가에 불을 지르고, 양식과 가축을
약탈하여 가고, 재물과 보화를 도적하여 가고, 부녀를 겁탈하고, 백성을
인질로 붙잡아 가고.
이 왜병이 짓밟고 지나간 뒤를 다시금 짓밟으면서 약탈과 행패를 함부로
한 것이 명나라 군사였다. 우리나라 조장에서는 우리의 힘으로 왜병을
물리칠 힘이 없으매, 명나라에다 청병을 하였었다. 명나라에서는
우리나라를 위하여 준다기보다는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영영 망하고 보면,
순망치한———— 입술이 상하면 이빨이 해를 보겠으므로, 겉으로는 우리나라를
돕는 체하고, 군사를 보내어 왜병과 대전을 하였다.
명나라 군사는 온 바램이 노상 없었던 바는 아니나 크게 신통한 것은
없었고, 차라리 그들의 약탈과 행패로 우리나라가 은근히 해를 입은 것이
더 컸었다.
왜병으로 하여금 이상 더 조선에 머물러 있어 약탈과 행패를 더 계속치
못하고 칠년 만이나마도 물러가게 한 것은 명나라 군사의 힘보다도 우리
이순신(李純信) 장군이 수전(水戰)에서 일본의 수군을 번번이 이겨
마침내는 적멸을 시킨 그 공이 더 컸었다.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만들어 수전에 쓰면서, 싸우는마다 일본의 수군을
무찔렀고, 필경은 전멸을 시켰으며, 일본은 수군이 전멸이 되니
본국으로부터 군사와 그 밖에 여러 가지를 조선에 와서 있는 군사에게 뒤댈
길이 없어 그만 스스로 물러가지 아니치 못한 것이었었다.
임진왜란을 칠년 동안 치르고 난 조선은 마치 죽을 병을 앓다가 겨우
살아난 사람 같았다.
장정들은 태반이 전장에 나가 죽었다. 왜병에게 사로잡혀 일본으로 간
사람도 많았다.
성은 무너지고 집들은 불에 탔다.
논밭은 황폐하고, 황폐한 땅을 갈자 하나 말과 소가 없었다. 먹을 곡식도
없고 입을 옷도 없었다.
이렇게 중병을 앓고 나서 비척거리는 사람같이 피골이 상접한 조선이, 그
다음에는 조정이 시끄란하였다. 광해주(光海主)의 난정(亂政)과
인조반정(仁祖反正)이 그것이었다.
임진왜란을 치른 지 십 년 만에 선조대왕이 승하하고, 광해주(光海主)가
위에 오르자, 전대부터 싹이 튼 궁내(宮內) 골육간의 갈등이 마침내 겉으로
퉁겨져 가지고 광해주는 필경 동생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인다.
어머니(母后)를 폐하여 내친다 하는 해거를 저질렀다. 이 틈을 타
조정에서는 사색 봉당의 당파 싸움이 뒤엄부러져 겯고트는 사품에, 나라의
정사는 더욱 어지러워졌다. 궁중과 조정이 어지러우며 방백수령과 토호들의
행악은 날로 심하였고, 그 폐를 입는 것은 애꿏은 백성들뿐이었다, 가뜩이
임진왜란이라는 중병을 치른 지 겨우 십여 년이요, 미처 기운도 추기 전에.
광해주 십오 년에 그동안 다른 당파의 득세로 힘을 쓰지 못하던
이서(李曙)·이괄(李适)·최명길(崔鳴吉)·김자점(金自點) 등의
서인(西人)이, 광해주가 골육의 형제를 죽이고 모후를 폐하여 내쳤다는
허물을 탈잡아 가지고 왕 광해주를 폐하고서, 선조대왕의 손자요 광해주의
조카되는 능양군(綾陽君)을 받들어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것이 소위
인조반정(仁祖反正)이었다.
능양군으로 위에 오른 인조대왕은 총명한 임군이었다. 위에 오르면서
재주와 덕이 있는 선비를 널리 뽑아들여 나라의 정사를 맡게 하고, 또
팔도에 어사(御使)를 보내어 민정을 살피며 악정하는 수령 방백을
징계하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피폐한 국정을 바로잡으려고 애쓴 자취가
있었다.
그러나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지고 백성이 편안하고 하자면, 한 임군의
총명만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총명한 임군도 어진 신하와 좋은
시절을 만나야 하는 법인데, 인조대왕은 임금만 홀로 총명하였지, 좋은
시절도 어진 신하도 다 얻어 만나지 못한 불우한 임군이었다.
인조대왕은 큰 당파 가운데 하나인 서인(西人)들이 힘으로 왕위에 오른
임군이었다. 그러한만큼 조정에는 그 서인들이 판을 짜고 들어앉어서
권세를 부리었다. 이러는 서인의 세력을 꺾으려고 다른 당파에서는 갖은
책모를 부리고 죄 없는 사람을 참소하고 하였다.
무릇 당파들이 싸움을 하는 것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기 위하여 싸우면
나라와 백성은 그르쳐지고 괴로움을 당하고 할 따름이지 조금도 이로울
것은 없었다.
인조대왕이 즉위한 이 년 만에 유명한 이괄(李适)의 난리가 났다.
이괄은 인조반정에 큰 공이 있는 장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반정에 성공을 하여 공을 주는 마당에서는 이괄은 조그마한 벼슬밖에는
받지 못하였다.
이괄은 그것을 매우 불평히 여기던 중에, 다시 자리가 떨어져 평안 병사로
내려가게 되자, 마침내 그는 반심을 품게까지 되었다.
편안 병사로 밀려내려간 이괄은, 겨울 동안 은밀히 군사를 조련하였다가
이듬해 정월에 군사 일만이천 명을 거느리고 서울로 짓쳐 올라왔다. 임군의
옆에 간신들이 있어 나라의 정사를 그르치므로 그를 벤다는 것이었었다.
이괄은 미구에 도원수 장만(腸滿)의 관군과 싸우다 패하여 그의 수하에게
죽고, 그것으로 이괄의 난은 무사히 평정이 되었다.
이괄은 이군의 옆에 간신이 있어 나라와 정사를 어지럽히니 그를 벤다는
것이 군사를 일으킨 구호라고 하였으나, 실상은 찬역의 뜻이 없지
아니하였던 모양이었다. 이괄이 용상(龍床) 바라듯 한다는 속담은 이때에
생긴 말이었다.
이괄의 난이 있은 지 열두 해를 지나, 인조대왕 십사년 병자(丙子)
십이월에 병자호란이 났다.
이보다 앞서 인조대왕 오년 정묘(丁卯) 정월에 벌써 청(淸)나라
태종(太宗) 홍타시(洪多時)가 그의 종제 아민(阿敏)을 시켜 삼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을 쳐 황해도 평산(平山)까지 들어온 일이 있었다. 이때의
난리는 겨우 두어 달 남짓하였으나, 호병의 약탈과 행패가 어떻게도
흑심하였던지, 청천강(淸川江) 이북은 하마 쓱밭이 되다시피 하였다.
고을들이 황폐하고 백성의 자취가 끊이고 하였다. 그러고서 십 년 만에
다시 병자호란이 난 것이었었다.
병자호란은 호병이 병자년 십이월 구일 압록강을 건너던 발로부터 이듬해
정축년(丁丑) 정월 그믐날, 인조대왕이 광주(廣州) 남한산성(南漢山城)
아래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을 하던 날까지 오십 일 만에
끝이 났었다. 그러나 그 오십 일 동안에 조선이 받은 손해는, 실로 저 칠
년이나 끈 임진왜란 못지 아니하게 큰 것이었었다. 청병은 이른 곳마다
무고한 백성을 죽이고, 부녀를 능욕하고, 집을 불지르고, 양식과 의복과
육축을 빼앗고 하되, 그들이 지나고 난 자리에는 티검불 하나도 남기지
아니할 지경으로 약탈과 행악은 극심하였다.
이와같이 자주 이는 난리에 백성들은 마치 위태한 가지에 깃든 새와 같이
불안한 마음으로, 그래도 불탄 자리에 집을 엮고, 병마에 짓밟힌 따을 파
씨앗을 뿌리고 하였다.
울며불며 그래 논 보람도 없이 또다시 병란이 일기 아니면, 이태 삼년씩
흉년이 들고.
요행 풍년이 들어 넉넉히 먹을 것을 거두어 놓으면, 양반이라는 ‘관쓴
도적들’들이 노략질을 하여 가고.
때를 정하고 찾아오는 손님처럼, 모진 병은 몇해만큼씩 돌아, 송장을
쓸어내듯 하고.
백성들은 이렇게 오랜 도탄에 빠져 마음과 몸을 의탁할 곳이 없건만,
조정에서는 당파 싸움으로 세월만 보내고, 가다가는 피비린내나는 살육을
함부로 하고.
마음이 불안하고 먹을 것이 없고 보면, 백성들로서 취하기에 가장 쉬운
두 길이 있으니, 도적과 걸인이 그것이었다.
이때의 조선 천지는 걸인과 도적으로 차다시피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오늘
밤의 이 무리들도 따지고 보면 그렇듯 깊은 곡절이 있는 도적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 늙은 도적으로부터
“본시야 다 양민이올시다마는, 양민으로는 먹고 살 길이 없어 도적이
되었읍니다.”
하는 대답을 듣는 허생은, 무연히 도적의 무리를 내려다보고 서서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얼마만에야
“그러면 지금부터라도 살 집이 있고, 부칠 땅이 있고, 농사해서 거둔
것을 빼앗기지 않고 배불리 먹을 수가 있고 하다면,
그렇다면 도로 양민이 될 터란 말인가?”
하고 묻는다.
여러 입이 한꺼번에
“그야 일러 무얼 하겠읍니까.”
“그럴 수만 잇다면 작히 좋겠읍니까.”
“우리 같은 놈이 언제 그런 세상을 볼 날이 있을까.”
“나는 제발 한번만 그렇게 살아보다 죽었으면 소원이 없겠구면.”
하면서 좋아들을 한다.
허생은 너의 생각은 어떠냐고 묻듯이, 도적의 두목을 돌려다본다.
도적의 두목은 그 뜻을 알아차리고
“전들 별다른 인간이겠읍니까. 저도 본시 농군으로 살 길이 없어 도적이
된 놈이올시다. 처음에는 혼자 다니다가 패가 하나씩 둘씩 늘어가는
동안에, 제가 힘꼴이나 쓴대서 제풀에 두목 노릇을 한 것이지,
달리 무슨 포재나 궁량이 있어서 취당을 한다, 두목질을 한다 한 것은
아니올습니다. 저도 도로 농군이 되기기 소원이올시다.
밝은 날을 피하여 밤으로 다니면서 남의 재물을 빼앗고,
가다오다 인명을 살상하고, 목숨은 언제 희광이(○首人)의 칼끝에
사라질지 모르고, 그런 이 화적질을 무엇이 즐겨 끝끝내 하자고
들겠습니까. 허생원님 말씀대로 살 집이 있고, 부칠 땅이 있고,
농군으로 그보다 더 호강이 어데 있으며, 그보다 더한 것을 바랄
것이 무엇이겠읍니까.”
두목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허생은 여럿을 향하고 묻는다.
“다들 이 두목과 한뜻이겠는가?”
“네에.”
여럿이 일제히 대답을 한다.
“그렇다면! 아까 말을 한 대로 살 집이 있고, 부칠 땅이 있고,
농사해서 거둔 것을 빼앗기지 않고 배불리 먹을 수가 있고,
그럴 뿐만 아니라 양반 상놈의 구별이 없고, 저 혼자만 편안히 앉어서
남을 부려먹으려 드는 사람도 없고, 난리도 없고 이런 곳으로
여러 사람을 내가 데려다 줄 테니 따라오겠는가?”
“네에.”
여럿이 일제히 대답을 하고, 누구는
“그런 별유천지가 있다면야 열 번도 더 갑지요.”
한다.
“그러면 여러 사람은 이 길로 각기 고향으로 돌아가서 가족들을 거느리고
새 달 보름날까지 충청도 강경(江景) 장터로 모이시요. 홀애비는 마누라를
얻어가지고 오고, 총각은 장가를 들어 색시를 더리고 오시요.”
네 대답도 하고, 킥킥 웃는 소리도 나고 한다. 예서 강경장터가 몇리나
되는냐고 옆엣사람더러 묻는 사람도 있다. 그러느라고 좌중은 잠깐
웅성거린다. 조용하여지기를 기다려, 허생은 다시
“돈은 각기들 소용될 만치 가지고 가시요. 열 냥이 소용될 사람은 열
냥을, 백 냥이 소용될 사람은 백 냥을 가지고 가시요. 등으로 지고 가기에
무거운 사람은 말을 사서 싣고 가시요.”
허생의 말끝은 어느덧 하시요, 가시요 하고 공대로 변하였다.
“또, 여기 왔던 여러 사람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오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거든 많이들 더리고 오시요.”
“도적놈도 상관 없습니까?”
하나가 불쓱 그렇게 묻는 것을 허생이 미처 대답을 하기 전에 다른 하나가
“그 녀석, 저는 무척 양민인감.”
하여서 여럿은 한꺼번에 웃었다.
“물론 도적도 상관이 없고, 다 상관이 없소. 그러나 저는 편안하고
남이나 부려먹으려 드는 게으름뱅이나 찌부러진 양반 나부랑이는 데려오지
말도록 하시요.”
허생의 신칙이었다.
허생은 강선달을 시켜 술과 음실을 나오게 하여 여러 사람을 먹인 후에,
그들이 가지고 온 장기를 거두고, 각기 소용되는 돈을 주어 돌려보냈다.
돈은 태반이 열 냥씩 가지고 물러섰다.
바깥사랑에서 자고 있던 먹쇠가 그제서야 눈을 비비면서, 천둥에 개
뛰어들 듯 뛰어들어, 돈을 지고 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승강을 하려다가
허생에게 핀잔을 먹고 물러섰다.
4
이튿날.
허생은 십만 냥 돈에서 이만 냥을 서울 다방골 변진사에게로 환을 놓아
보냈다. 만 냥 빛을 반드시 본전의 곱절을 하여 이만 냥으로 갚는다는
약조도, 그러라는 법도 없던 것이나 허생은 당장 십만 냥토록 많은 돈이
필요치가 아니하므로, 아무려나 우선 그렇게 처치를 한 것이었었다.
나머지 팔만 냥에서 만 냥을 떼어 강선달을 행하로 주었다. 그리고 그
나머지 칠만 냥은 강선달을 시켜 그와 거래를 하는 강경 장터의 큰
물산객주 윤서방집으로, 허생이 가서 찾도록 환을 놓아보내게 하였다.
만 냥으로 장사를 하여 십만 냥의 이문을 남겨 그렇게 후하게 처분을
하면서도 허생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서는 미영 몇 필을 끊여들여 먹쇠와
함께 겨울옷 한 벌씩을 해 입은 것밖에는 단돈 한 푼을 쓰는 일이 없었다.
먹쇠가 본댁에도 돈을 좀 보내 드려야 하지 않느냐고, 무얼 잡수고
지내시라고 모른 척하시느냐고 게두덜거리는 것을, 허생은 서울서 떠날 제
돈 백 냥을 보낸 것이 있으니, 졸략히 한동안 지낼 테지 하고 하였다.
가난하여서 혹은 양반의 등쌀에 살 수가 없게 된 사람을 살기 좋은
고장으로 데려다 준다는 소문이 안성읍에도 널리 퍼졌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허생을 찾아왔다.
허생은 일일이 사정을 묻고 사람도 보고 한 후에 노수를 주어 새 달
보름날까지 가족을 거느리고 충청도 강경 장터로 오라고 일러서 돌려보내고
하였다. 사흘 동안에 이백여 명이나 왔었다.
허생은 이 뒤로도 오는 사람이 있거든, 자기가 하던 대로 이리이리 하여
달라고 강선달에게 부탁을 하고 마침내 안성을 떠났다.
아침 일찌감치 허생은 먹쇠를 데리고 나섰다.
허생은 행색은 지나간 팔월, 처음으로 이곳을 올 때와 별로 다를 것이
없어 꾀죄죄하고 초라하였다. 미영으로 안팎 옷 한 벌을 새로 해 입은
것이었으나, 입은 지가 오래서 벌써 때가 묻었다.
갓은 올 때에 쓰고 왔고, 이내 쓰고 있던 헌 갓이었다.
노상에서 먹쇠가 삼아 신긴 세총박이 털메짚신 대신 나막신이었다.
처음 와서 얼마 아니 되어 강선달이 그 나막신이 하도 민망하여 가죽신을
주면서 신으라고 하였다.
허생은 그런 것은 신을 줄도 모르고 신어본 적도 없다고 하였다.
“그럼, 허다못해 짚신이나 미투리도 신으서야지, 저 조금
불편하십니까.”
강선달이 그러는 말에 허생은
“짚신이나 미투리는 마른날밖에 못 신지만, 나막신은 진날 마른날 두루
신으니 그보다 더 편리한 신발이 있소.”
하였다.
강선달은 비단 신발뿐이 아니라, 그 동안 옷도 몇 차례 값진 비단 등
속으로 일습씩을 짓게 하여 가지고 나와서 허생에게 권을 하였다. 그러나
허생은 번번이 거절을 하고 입지 아니하였다.
고기나 생선도 먹지 아니하였다. 밥상에 고기와 생선이 올라도 저깔도
대지 않고, 채소와 장만으로 밥을 먹었다.
허생으로 오직 한 가지 과분한 것이 있었다면, 술울 조금씩 먹은
것이었었다. 며칠 걸러큼씩 밤으로 강선달이 향기 있고 맛좋은 술을 내온
다치면, 여남은 잔씩 기울이기를 매우 즐겨하였다. 그것도 매일 밤은
아니고 며칠 걸러큼씩이요, 또 낮에는 절대로 술을 입에 대지 아니하였다.
허생이 안사랑 중문 밖으로 나서는데 네패 교군 하나가 마침 등대를 하고
있었다.
강선달이 허생의 소매를 잡듯 하면서 간곡히
“마지막 청이올시다. 이걸 타고 가시지요.”
한다. 허생은 웃으면서
“성한 두 다리를 두고 어째 그런 걸 타고 다니오.”
“저한테는 그대지도 후히 해주섰는데, 저는 그것을 만분 일도 보답치
못해 차마 도리가 되였읍니까.”
“괜헌 말씀을. 아 내가 만 냥을 들여, 십만 냥 번 것이, 따지고 보면
그게 다아 강선달이 잘 서두리를 해준 덕택이 아니오.
그런 일을 생각하면, 돈 만 냥 드린 것이 오히려 나는 미흡한 생각이
드는데, 후하달 것이 무엇 있겠소.”
“겸사 말씀이시지. 자아, 날도 차고 또 강경 장타 이백 리를
걸어가시자면 아모래도 이틀은 가서야 하시니 조옴 고생이십니까. 어서
오르십시요.”
“여보 강선달?”
“네.”
“하나님이 인간에게 두 다리를 점지하신 것은 제가끔 제 발로
걸어다니도록 마련을 하시느라고 그러신 노릇이 아니겠오. 그러니 성한
두 다리를 가지고도 교군이니 무어니를 타고 다니는 것은
첫째 왈 하늘의 뜻에 거슬리는 것.”
“………”
“또오, 사람은 매일반인데, 누구는 교군 위에 편안히 앉어 가고, 누구는
사람 무게, 교군 무게 해서 그 무건 것을 메고 가고, 그런 공편되지 못할
데가 있오. 그것도 나이 많은 노인이라든가 병자라든가. 먼 길을 걷기
어려운 여인이나 어린 사람이라든가 그렇다면 혹시 모르지오만, 두 다리와
육신이 멀쩡하여 가지고, 끄덱끄덱 사람을 타고 다녀서야 그 될 말이오.”
“그럼, 말을 타시도록 하실까요?”
“말은 급한 길을 갈 때나 타라는 것이지, 편안하자고 타서는 안되지요.
한가한 사람이 편안히 가지고 타는 그 말이, 그동안 짐을 싣거드면, 그만침
일한 것(勞動)이 떨어지고, 일한 것이 떨어지니 나라에 그만침 이(利)가
생기고 하지 않소. 그뿐더러, 말을 타자면 불가불 마부가 있어야 하니,
말을 탄다는 것은 매양 마부를—————사람을 타는 것과 진배 없읍넨다.”
강선달은 하릴없이 하인을 시켜 미투리를 가져오게 한다.
“이백 리 길을 나막신을 신고야 가십니까. 이걸 신으시지요.”
강선달이 미투리를 돌기 매어, 발부리에 놓아주는 것을 허생은 웃으면서
“가다가 우리 먹쇠가, 보기에 딱하면 세총박이 털메짚신을 삼아 줄
테지만, 쯧, 이왕 그럼 신고 가지요.”
하고 미투리를 신은 후에, 나막신은 먹쇠더러 어깨에 멘 구럭에다
건사하도록 이른다.
그럴 즈음에 머리와 매무시를 흐트린 배젊은 여자 하나가 허둥거리면서
달려들었다.
여자는 허생을 알아보고, 그 앞에 가 펄썩 주저앉으면서
“허생원님, 사람 살리세요.
그런 존 세상이 있거든 나두 좀 데려다 주세요.”
한다.
“무슨 일로 그려시요.”
허생이 묻는 말에 여자는 손을 들어 가리키면서
“저 아래 술집에 있는 술에민(酒母 : 酌婦)데,
수영어미 등쌀에 살 수가 없어요.”
“수영어미가 무얼 어떻길래?”
“허구헌날을 날마다 서방을 아니한다고
때리고 꼬집고 밥을 굶기고 한답니다.”
그러면서 여자는 부끄럼도 없이 가랑이를 훌쩍 걷어춘다. 부우연
너벅다리가 성한 곳이 없는 피멍이 졌다.
허생은 무심결에 배려다보다가 문득 외면을 하면서
“팔려왔소.”
“먹고 살 수가 없어서 팔려왔어요.”
“얼마에?”
“오 년 있어 주기로 하고 일흔 냥에 팔려왔어요.”
“몇해나 되었소?”
“열일곱에 팔려와, 홀해 스물둘인데,
한은 벌써 지났어도 그동안 또 빛을 졌답니다.”
“얼마나?”
“수영집 말어, 백 냥이 넘는다고 하나봐요.”
“그 돈만 갚아 주면 몸이 빠져나올 수가 있겠구려.”
“네.”
허생은 강선달더러, 여자의 빛을 물어주라고 부탁하고 돌아서려고 한다.
여자가 다시금 앞을 막으면서 투정하듯이
“이왕이니, 그 존 세상, 나두 제발 좀 데려다 주세요.”
“부모한테로 가구려.”
“다 죽고 없답니다. 수영집 빚도, 절반은 부모 치상한 빚인걸요.”
“형제나 일가도 없소?”
“가차운 일가는 없고, 손윗오래비 하나가 있다는 것이, 노름꾼에 백
피난봉으로 밤낮 나한테 와서 돈 뜯어가기가 일이랍니다.
수영집 빚이 부모 치상빚 말고 절반은 그 밑구멍으로 들어간 빚인걸요.”
“그래도 젊은 여자 하나는 데리고 갈 수가 없어.”
“이 천지에 머리 두르고 갈데라고는 오래비 집뿐이데, 가서 사흘이 못해
다시 또 팔아먹고 말걸요.”
“마땅한 홀애비라도 만나, 살림 차리고 살든지.”
“싫어요. 사내라면 말만 들어도 몸서리가 치이는걸요.”
“허어. 이런 딱할 노릇이라고야.”
“데려다 주세요. 이 은공 저 은공 해서 평생 두고 허생원님 종살이해
드리께요.”
“나는 종이 소용도 없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종이라면 담을 쌓는 사람이오.”
“저 시커먼 사람은 누구예요?”
“우리 먹쇠, 내 일 거달아 주는 사람.”
“사람을 살려놓고 도루 죽이는 법이 어딨어요. 데려다 주세요.
종 두기가 싫으면, 나두 일 거달아 드리는 사람이라구 하면
그만 아녜요.”
“온 이런 질색할 일이 또 있나.”
“아니 데려다 주신다면, 뒤따라서라두 그여코 가고 말걸요.”
이건 사뭇 떼를 쓰는 판이었다.
“그럼 데리고 가기는 가는데, 가서 술집에서 지나든 버릇을 내거나
해서는 도로 쫓을 테니, 그리 알렷다.”
“그건 허생원님이 내게 하실 나름이지요.”
“젊은 여자가 어데 한평생 혼자야 지냈겠오. 마땅한 자리가 있으면
남편을 얻어 살렷다.”
“그건 그때 가보아야 하지요.”
“다짐을 두어야지, 그래서야 되오.”
“혹시, 허생원님 같은 자리나 있다면, 가 살는지.”
기집이, 하는 소리가, 가만히 보면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인물은 와락 보잘것없어도 열일곱 살까지 얌전한 어머니 밑에서 배우고
치어나고 해서 침선은 제법이랍니다. 허생원님 옷도 잘 꼬매 드리고
찬수도 입에 맞으시게 해 드리고 그러께요.”
설렁설렁하고, 침선은 제가 자랑하는 대로 얌전한지 어떤지 모르겠으되,
인물은 보잘것없다는 제 말과 달라, 썩 밉지 않게 생겼고, 태도 그럴
듯하였다.
일찌기 노는 계집을 겪어보지 못한 허생은 이 여자 하나를 다루기가
오히려 만 냥 돈을 들여 석 달 만에 십만 냥을 만들어내기보다도 더
맹랑하였다. 그래서 받자던 다짐도 받지를 못하고, 계집이 눙쳐 넘기는
데로 넘어가, 그대로 데리고 길을 떠나버렸다.
5
흰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는 섣달 스무날.
강경 선창에서, 허생과 및 그를 따라 낙천지(樂天地)─살 집이 있고,
부칠 땅이 있고, 농사해서 거둔 것을 빼앗기지 아니하고 배불리 먹을
수가 있고, 그리고 양반 상놈의 구별이 없고, 저 혼자만 편안히 앉아서 남을 부려먹으려 드는 사람도 없고, 이런 살기 좋은 고장을 찾아가는
천여호총(戶總)의 사천여 명이 뱃길로 길을 떠나는 날이었다.
허생은 강경 장터에 당도하던 길로, 먹쇠와 객주 주인 윤서방네
서두리꾼을 데리고, 여러 가지 준비에 골몰하였다.
배를, 넓은 바다를 건널 수 있는 큰 배 오십 척을 샀다.
배는, 한편으로 사들이면서, 한편으로 상하고 불비한 것을 배 목수를 대어
말끔히 수리를 하였다.
곡식을 사 오천 명이 일 년을 먹을 수 있을 만큼 사들였다. 주장 쌀을
많이 사고, 보리, 콩, 팥, 서속, 수수 모두 골고루 샀다.
미영과 삼베를 각각 수천 필씩 끊어들였다.
소를 삼백 바리와 도야지 새끼를 천여 마리와 닭을 수천 마리를 샀다.
보습, 쇠스랑, 괭이, 호미, 낫, 가래 등속의 농사 연장과 톱, 자귀, 대패
등속의 목수 연장과 솥, 식칼, 기명, 소반, 도마 등속의 밥 지어먹을
제구와 가위, 바늘 등속의 바느질 제구와 길쌈하는 베틀과 아뭏든 천여
가족에 사오천 명 식구가 집을 짓고, 농사를 하고, 살림을 차리고 하기에
부족이 없을 만큼 넉넉히 그리고 골고루 장만을 하였다.
허생의 흥정이라 값을 시세보다 비싸게 내는 고로, 그 숱한 것을
사둘이기에 별로 힘이 들지 아니하였다. 찾으면 물건은 척척 나오고, 값은
부르는 대로 치르고 하였다.
매화(梅花:안성서 따라온 여자)는 허생에게 생각잖아 좋은 소대 노릇을
하였다.
오천 명 식구의 새살림을 마련하는 일이라 허생의 계획이랄지 일 서두는
법이 비록 도저하다고는 하여도, 역시 남자인 관계로 세세한 구석에는 간혹
소홀한 데가 없지 못하였다. 매화는 그런 것을 연해 촉념하여 일쑤
재치있는 훈수를 하고 하였다.
허생의 신변 시중에는 더욱 세밀하고 알뜰하였다. 끼니때면 반드시
행주치마 두르고 객주집 부엌에 들어서서 허생의 밥상 분별을 제 손으로
하였다. 그는 가르쳐 준 일도 없건만, 허생이 밥은 조금 무름한 것을
즐겨하고, 고기가 생선은 입에 대지도 않고, 주장 김치 깍두기와 장으로
밥을 먹되, 진건한 것보다 담(談)한 것을 즐겨하고 한다는 것을 허생의
시중을 하던 이틀 만에 벌써 알아차렸고, 꼭 그 입에 맞도록 찬수 분별을
하였다.
밤저녁으로 향기 있고 맛좋은 술울 몇 잔씩 기울이기를 줄겨하는 것도
그는 진작에 알았고, 이삼일만큼씩 그 분별을 하기를 또한 잊지
아니하였다.
방을 허생이 거처하는 바로 옆엣방에다 정하고서, 아침 허생이 잠이 깰
때로부터 밤에 자리에 들기까지 그 앞에서 어른거릴 때 어른거리고,
물러나 있을 때 물러나 있고 하면서, 입안에 혀처럼 성미를 맞추며
시중을 들었다.
객주 주인 윤서방 집에서는 처음 매화를 허생의 소첩이거니 하였었다.
그래서 아씨 혹은 마마로 그를 불렀다.
먹쇠의 발명으로 매화가 허생의 소첩이 나닌 것을 윤서방네 집안에서는
알았으나, 한번 밖으로 난 소문은 되돌아오지를 못하였다.
섣달 초생이 되자 사람들이 벌써 모이기 시작하였다.
너댓 식구의 한 가족도 있었다. 단 두 내외의 호젓한 한 가족이 있는가
하면, 조부모, 부모, 형제, 자질 모두 해서 열댓 명이 넘는
가족도 있었다.
허생은 그들을 한 가족씩 한 가족씩 맞아 고향과 성명과 나이를 적은 후에
임시로 방을 빌어 한 가족씩이 들게 하였다. 그러다가 열 가족이 되면 그중
한 사람을 뽑아 그 열 가족을 거느리고 모든 범절을 보살펴 주게 하였다.
이 거느리는 사람을 십사장(十司掌)이라 하였다. 열 가족을 맡아 거느리고
보살펴 주고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 다음 또 열 가족을 한데 모아 그중 한 사람을 뽑아 십사장을 내고, 또
그 다음 열 가족을 모아 그중 한 사람을 뽑아 십사장을 내고.
이렇게 하여 보름날까지에 모인 바 일천의 가족을 열 가족씩 열 가족씩
백으로 나눠 제일호로부터 제백호까지의 일백 명의 십사장으로 하여금 각기
그 열 가족씩을 맡아 거느리게 하여놓았다.
십사장의 위에다는 다시 백사장(白司掌)을 두었다. 백 명의 십사장을
열씩, 열씩 열로 나눠 제일호로부터 제십호까지 있는 열 명의 백사장으로
하여금 한 명의 백 사장이 열 명의 십사장씩을 맡아 거느리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허생의 밑에는 열 명의 백사장이 있고, 백사자의 밑에는 각기
열 명씩의 십사장이 있고, 십사장의 밑에는 각기 열 명씩의 가족이 있고
하였다.
이와같이 폐를 짜놓았기 때문에, 허생이 만일 전원에게 무슨 알려야 할
일이 있으면, 천의 가족을 일일이 부르거나 찾아다니지 않고도 열 명의
백사장만 모이게 하여 필요한 전갈을 한다. 그런다 치면 백사장들은 제각기
제가 맡아 거느린 열 명씩의 십사장을 불러 허생의 전갈을 전하고,
십사장들은 각기 제가 맡아 거느린 열 가족에게 비로소 전갈을 전한다.
또 이와 반대로, 제육십오호 십사장이 맡아 거느린 가족들이 누구는 등에
종기가 나서 고약이 있어야 하고, 누구는 해산이 임박하였으니 산미와
미역이 있어야 한다고 하고, 누구는 부여가 바로 처가인데 마지막 작별삼아
내외가 함께 작별을 다녀오겠다고 하고 할 경우면, 그들을 세 사람이면 세
사람이 제마다 그리고 직접 허생에게를 갈 것이 없이, 자기네의 십사장이
대신하여 제육호 백사장에게 사연을 보고하고, 백사장은 그것을 허생에게
보고하고, 그런다 치면 허생은 백사장에게다 적당히 그 처리를 지시하고,
백사장은 제육십오호 십사장으로 하여금 각기 그 당자들에게 허생의 지시를
전달하도록 하고 하는 것이었었다.
이를테면, 군대의 조직과 같은 조직으로 규모가 있고 여러 가지로
순편하였다.
허생이 그와 같이, 돈을 물쓰듯 하면서 갖은 물건을 사들이는 판에 강경
장터는 큰 난리가 난 형국이었다.
난데없는 큰부자가 들어와 그 큰 배를 자그만치 오십 척이나 산다, 곡식을
수천 석을 사들인다, 육축을 수백 마리씩 사들인다, 그 밖에 미영이며 농사
연장이며 살림살이 제구 하며를 산더미같이 사들인다, 그러나마 값은
부르는 대로 내고.
웬만한 장사꾼들은 그 바람에 큰 수를 잡았다.
강아지가 냥돈을 물고 다닌다는 소리가 날 지경으로 돈이 흔하여졌다.
강경 장터가 크다고는 하지만, 생긴 이후로 이렇게 세월이 좋고
풍성풍성하기는 처음이었다.
아무도 그러나 영문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서울 어떤 큰부자가 돈은 많고 할 일은 없어 심심풀이로 장난을 하느라고
그런다더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오래지 않아 정도령이 계룡산 신도안(鷄龍山新都內)에 도읍을 하게
되었는데 시방 그 준비로 그런다더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남해바다에 있는 신조선(新朝鮮)으로 실어갈 물건들이라고, 그래서 배까지
그렇게 많이 샀다하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명년에 또 호란(胡亂)이 난다는데, 아마도 서울 양반들이 지리산 속으로
피난갈 채비를 차리느라고 그러나보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구구히 소문이 자자한 판에, 그러자 조금 있더니, 웬 험수록 한
사람들이 이불 보퉁이야 옷보따리를 해서 지고 이고 꾸역꾸역 모여 들었다.
다섯, 열, 백, 이백, 천, 이천…… 꼬리를 물고 자꾸만 모여들었다.
하되, 혼자 혼자의 단신이 아니요, 저마다 부처를 중심으로 노인이며
어린아이를 데란 한 가족씩들이었다.
마침내 수수천 명이 모였다.
강경 장터가 터질 것 같았다.
바이 동이 나고, 사방에다 움을 팠다.
바닥 사람들은 정녕 무슨 변괴가 나는 것이라 하여 불안에 휩싸여
구석구석이 수군덕거렸다.
그러다가 그 모여든 사람들의 입으로부터, 살기 좋은 고장————살 집이
있고, 부칠 땅이 있고, 농사해서 거둔 것을 빼앗기지 않고 배불리 먹을
수가 있고, 그리고 양반 상늠이 없고, 편안히 앉아서 남을 부려먹는 사람도
없고, 이런 낙천지를 찾아가는 사람들이요, 그러느라고 여러 가지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의혹들이 풀리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반신반의하는 편도 없지 아니하였다.
배 오십 척 가운데 스무 척에다는 곡식을 실었다.
열 척에다는 소와 도야지와 닭 등속의 육축과 그밖에 사들인 여러 가지
물건을 실었다. 그리고 나머지 스무 척에다는 사람을 태울 참이었다.
섣달 열아흐렛날까지에 만단의 준비는 다 되었다. 허생은 열 사람의
백사장을 불러 예정한 대로 밝는 날 아침에 길을 뜰 터이니 전원이 다
선창으로 모이도록 전달을 하게 하였다.
사천여 명의 희망을 싣고, 배 떠날 아침은 밝았다.
흐릿하던 날이 굵은 흰 눈발이 하나둘 빠지기 시작하였다. 금년 들어
첫눈이었다. 첫눈은 반가운 것, 사천여 명 여러 사람의 가는 앞길을
축복하는 듯 상서로운 눈이었다.
떠나는 사람 사천여 명에 구경하러 모인 바닥 사람 수천 명이 그 넓은
강경 선창을 덮었다.
떠나는 사람들은 열 가족씩 열 가족씩이 각기 십사장의 지휘하는 대로 한
무더기씩 따로따로 모여서서 배에 오를 차례가 오기를 기다린다.
사람들은 서로 이야기하고 지껄이고, 아기가 울고 하느라고 대단히
요란하였다. 그러나 함부로 자리를 떠나거나, 혹은 먼저 배에 오르려고
다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팔도 각처에서 모인 형형색색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일찌기 농민들이었다는 것과, 남의 압제를 받으며 굶주리고 살던
사람이라는 점에서 꼭같은 운명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었다.
허생은 여전히 그 낡아빠진 갓에 꾀죄죄한 옷 주제에 나막신을 떨걱거리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지휘하고 명령하고 한다.
허생을 오늘야 처음 보는 구경꾼들은 모두들 허생이 그렇듯 외양이
보잘것없는 사람인 데에 놀란다.
저 사람은 허생원이 아니고, 그 밑에서 서두리를 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새때까지에 전원이 다 배에 오르기를 마쳤다.
맨 앞배에 탄 허생이 기를 두른 데 좇아, 배들은 일제히 닻을 감고 돛을
올렸다. 바람은 쾌히 불었다. 사천여 명 인간의 새로운 희망을 실은 오십
척의 선단은 둥둥 울리는 북소리와, 어야디야 뱃소리도 높게 조용히
선창으로부터 떨어져나갔다.
6
제주 목사 김아무는, 도임하여 온 지 삼 년 동안에 한 일이라고는 돈냥
있는 백성을 무실한 죄로 얽어 붙잡아다 가두고는 두들겨패어 재물을
빼앗기…… 이 짓을 하여 그동안 벌써 만금을 몽똥그려 두었고,
인물 반주그레한 남의 집 처녀와 남의 부인을 한 삼백 명 가량 농락을 한
것이 있고. 이 두가지 것밖에는 삼 년 제주 목사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다.
명색이 송사라는 것이 간혹 없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송사는 으레껏
뒷줄로 돈을 많이 먹이는 놈이 이기고, 아무리 잘했더라도 뒷줄로 돈을
쓰지 아니하면
“이놈, 죄는 네게 있느니라.”
하는 호령과 더불어 늘씬 곤장을 맞고 나와야 하였다.
이런 다스림을 하는 목사건만, 군데군데 그의 선정비(善政碑)가 섰으니,
재미스런 노릇이었다.
송삼복이라는 이방이 있었다.
몸집은 조막만하고 얼굴은 족제비 상으로 생긴 요놈이, 목사의 심복으로
목사가 핥고 난 찌꺼기를 천신하고 다니면서, 온갖 자깝을 다 부리는
놈이었다. 정월 초사흗날이었다.
목사의 심부름으로 조천(朝天)에 나갔던 이방 송삼복이가 저뭇하여
돌아오더니, 까맣게 기다리고 앉았는 목사더러
“사또안전, 큰일났읍니다.”
하고 밑도끝도 없는 소리를 하였다. 목사는 일이 마가 든 줄 알고
“어째, 계집아이가 도망질이라도 쳤드란 말이냐.”
하고 초초히 묻는다.
조천 사는 이좌수가 열일곱 살 먹은 딸이 있는데, 인물이 제법 쓸 만
하였다. 목사는 그것을 알고, 이방 송삼복을 시켜,
이좌수더러 딸을 들여보내라고 하였다.
이좌수는 못한다고 잡아 끊었다. 작년 세안 대목이 압박하여서였었다.
목사는 오늘 아침에 다시 송삼복을 시켜, 순리로 듣지 아니하면 내일은
새벽같이 포리가 물려나가느니라고 엄포를 하게 하였었다. 소위 ‘관쓴
불한당’의 행티하고도 자못 노골한 행티였다.
“계집아이는 둘째올시다. 시방 조천은 생난리가 났읍니다.”
송삼복의 대답에, 목사는 갈피를 잡지 못하여
“난리라니, 건 무슨 소리냐?”
“서울 사는 큰부자로, 허씨라는 양반이, 큰 배 오십 척에다 곡식을 수천
석을 싣고 사람을 수천 명이나 데리고, 돈도 수만 냥을 가지고 조천으로
들어와서 시방 짐을 푼다, 사람을 내린다 하느라고 야단법석이 났어와요.”
“허씨에, 큰부자에, 양반이라…… 못 듣든 사람인데……그래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많은 곡식에, 돈에, 사람들을 싣고 왔다드냐?”
“소인도 자상히는 모로겠사와도, 우리 제주도로 살러 왔다고
하나보와요.”
“그럼, 실없이 잘 되었구나. 응, 삼복아. 불감청이언정 고소원하든
노릇이지, 그렇지 않으냐.”
“그야 여부가 없읍지요.”
“그런데, 큰일이 무슨 큰일이란 말이냐.”
“헤헤헤.”
송삼복은 근천스럽게 웃고 나서
“하도 큰 봉이 걸려들었길래, 사또안전 좋아하시 전에 놀래 드릴 양으로
그랫읍니지요, 헤헤.”
“허, 그놈 참. 저 기름에 튀할 놈한테 가끔 내가 속아넘어간단 말야,
허허. 그래 얘 삼복아?”
“네.”
“기집두 쓸 만하게 더러 있다드냐?”
“그 많은 인총에 기집이 절반일 텐데, 그중에서 쓸 만한 기집이
없겠사와요.”
“그렇기는 하다마는.”
“그거보담두, 그 허씨가 소첩 하나를 데리구 왔는데, 인물이 아주 똑
떨어졌사와요.”
“똑떨어졌어. 정말이냐?”
목사는 사뭇 회가 동하는 듯, 그의 우람스런 체집이 무색할 만큼
경망스럽게, 그러면서 이방 송삼복에게 얼굴을 들이댄다. 목사는 외양
생김새 하나만은 얻다 내놓아도 한 사람의 방백으로 손색이 없을 만큼
좋은 풍신이었다.
“소인이 눈으로 보지는 못했읍니다마는, 조천 백성이 이르느니, 그
말이니, 아마 잘 생기기는 잘 생겼나보와요.”
“으응……”
목사는 눈을 갠소롬히 하고 호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연방
끄덕이더니
“허가는 그럼, 그물에 든 고기니, 수히 곧 주물러 짤 도리를
마련하려니와, 얘야 그렇다고 생일날 잘 먹자고 이레 굶겠느냐. 이좌수
딸년은 어떻게 되였느냐?”
“아무래도 포교가 나가야 할까보와요.”
“영영 내뻗드냐?”
“나를 죽이고 데레가라고 허와요.”
“내일 포교를 풀어 내보내라. 고현놈이지, 제가 어딜.
내가 제주 목사 삼년에 하고 싶은 노릇을 못해 본 일이 없다.
이좌수 따위가 다 무엇이냐.
애비와 딸년을 다 잡아 대령해라. 잡아다, 애비는 옥으로, 딸년은
별당으로…… 알지.”
“네에.”
“에잉. 오늘 저녁에 꼬옥 재미를 보기로 요량을 했드니, 에잉. 삼복이,
네 에미라도 오늘 저녁에 대신 대령시켜라.”
“네에. 그렇지만 소인의 에미는 쪼굴쪼굴합니다.”
같은 날, 이보다 조금 앞서서 조천에서는
오십 척 배에 실은 물건을 풀고, 사람이 내리고 하느라고 이방 송삼복이
목사더러 허겁을 떤 대로 완연 난리가 났었다.
내린 사람들은 일변 움을 파기 시작하였다. 강경 장타와도 달라,
사천여명을 임시나마 거접케 할 방이 이곳 조천에는 없었다.
요행 제주는 기후가 온화하여 정월인데 밭의 무배추가 푸르고 무성한채
그대로 있는 곳이라, 간단한 움으로도 추워서 못견딜 염려는 없었다.
짐 푸는 데로, 사람들 내리는 데로, 움을 파는 데로 오락가락하면서
지시도 하고, 보살펴 주기도 하던 허생은, 문득 마을을 향하여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뒷짐을 지고, 여전히 그 굽 닳아빠진 나막신을
떨걱거리면서.
허생은 무엇보다도 바닥 사람을 사귀어야 하였고, 민정을 살피어야 하였다.
행방이 없이 마을로 들어간 허생은, 이 고샅 저 고샅 돌어다니다가
한 고살에서 곡성이 나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초상집인가 하였으나, 초상집 울음과는 좀 다른 것이 있었다.
허생은 걸음을 멈추고 서서 귀를 기울였다.
울음은 늙은 울음, 젊은 울음, 서넛이나가 어우러져 우는 울음이었다.
“어이구 분하고 원통한지고. 그놈이, 그 몹쓸 놈이, 필경은 내 딸자식을,
내 딸자식을…… 어이구 원통한지고.”
이런 넋두리를 하면서, 그중에도 늙은이 하나가 설리설리 울었다.
허생은 주저하지 아니하고, 그 집 앞으로 가 사립문 밖에서
“일오느라.”
하고 커다란 음성으로 불렀다.
몇 번을 불러서야, 울음이 하나씩 둘씩 다 그치더니, 그러고도 다시
몇번을 불러서야 겨우 뉘시오 하고 허연 노인이 나왔다.
한 칠십 되었을까, 의표도, 허술한 집과 한가지로 곤궁은 하여 보였으나,
사람은 매우 깨끗하고 점잖스런 풍모였다.
노인은 숨겨지지 않는 울음끝을 강잉하여 숨기면서, 퉁명스럽게
“누구요?”
하고 책망하듯 묻는다. 그러면서 손의 그 근천스런 노랑수염이 성깃성깃한
얼굴에, 다섯 자가 찰락말락한 키에, 낡아빠진 갓에, 굵다란 무명 옷에,
가뜩이나 나막신을 끈 몰골을 시장스럽게 위아래로 씻어본다.
허생은 공순히
“주인인가요?”
“그렇소. 무슨 일로 그러오?”
“내 성명은 허생이라고 부릅니다.”
“허씨요?”
노인은 의외라는 듯이, 허생을 고쳐 한번 위아래로 씻어보면서
“일전에, 사람을 많이 데리고 이 조천으로 왔다는 허씨요?”
하고 묻는다. 성가시어하는 눈치와, 퉁명스런 말씨가 저으기 가시면서.
허생은 그러노라고 대답한 후에
“우연히 이 앞을 지나느라니까. 댁에서 심상치 아니한 곡성이 들리기에
정녕 무슨 원통한 일을 당하신 모양 같고 해서,
남의 댁 일에 이런 참섭이 부질없기야 합니다마는,
그래 좀 보입자고 한 것입니다. 어떤 곡절이신가요?”
노인은, 손의, 생김새와는 달라, 정중하고도 위품 있는 언사하며, 겸하여
그의 어데서라 없이 풍기는 어떤 거역키 어려운 업기에, 일변 서울의
큰부자요 양반이요, 오십 척의 큰 배에다 많은 물화와 수천 명의 사람을
싣고, 시방 조천으로 들어와 법석을 낸다는, 그 호기 좋은 나그네라는
데에, 마침내 기운이 눌리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응대하는 태도가
훨씬 더 부드러워지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쯧, 불필히 아시려고 하실 것까지 없소이다.”
“그렇지 않을 일이 있읍니다. 노인한테 이하면 이했지 해는 끼쳐 들릴
리가 없으니, 좌우간 곡절 이야기를 해보십시요.”
“………”
노인은 잠깐 무엇을 생각하면서 덤덤히 섰더니
“누추한 대로 좀 들어앉입시다.”
하고 허생을 사랑으로 인도한다.
주객이 자리를 정하고 앉아, 새로이 나는 이좌수요, 나는 허생이요 하고
통성명을 한 후에, 주인 이좌수가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내가 젊어서 슬하에 혈육이 없다가 오십이 넘어 딸자식 하나를 낳아서
올해 나이 열일곱이요. 남의 부모 된 사람으로 자식 귀여 아니할 사람이
있을꼬마는, 나는 남의 열 자식보다 더 소중한 자식인데,
제주 목사가 그걸 제게다 바치라는 것이오.
그것도 뺏어다가 소첩을 삼아, 길이 데리고 산다고 해도 나로서는 차마\
못할 노릇인데, 그놈의 행투로 보아, 며칠 두고 농락이나 하고 나서
헌신짝 버리듯 버려버릴 것이니, 강약이 부동으로 아니 뺏기는 수는 없고, 그러니 이런 원통하고 분할 도리가 있오. 내가 칠십 평생에 제주 목사를 수십 명을 치렀고, 그중의 악한 목사놈도 많이 보기는 보았소마는,
이번 김가놈 같은 놈은 보기를 처음 보았소.”
그러고는 이좌수는 이어서, 제주 목사의 토색질하는 것, 처녀와 남의 안해
빼앗아다 버려주는 것, 그 밖에 여러 가지 악정과 행악을 들어 세세히
이야기를 하였다.
허생은 일찌기 서울서와 또 이번에 해남에서 제주 목사의 선성을 들은
것이 없지 아니하였으나, 이좌수의 말을 종한다면 듣더니보다도 훨씬 더
악랄한 것이 있음을 알겠었다.
“힘은 없으나마 내가 나서서 무사하도록 해 드리지요.”
“그럴 수만 있다면 백골이라도 은공을 못 잊겠소이다.”
“우선, 지금부터라도 노인이 좀 서둘러 주서야 할 일이 있읍니다.”
“불 가운댄들 사양하겠소이까.”
“제주성내에서 목사의 행악에 불평심을 먹은 사람이 허다히 있을 게
아니겠읍니까?”
“제주 백성이 다 그렇다고 해도 빈말이 아니지요.
이방 송삼복이 한놈만 빼놓고는.”
“그렇게 불평심을 품은 사람으로, 그중에서 사람 똑똑하고 남들이
미더워하고 하는 사람을 몇십 명이고 내일 밤까지에 조천으로 모여서 나와
조용히 만나도록 해주십시요.”
“그렇다면 오늘 밤 안으로 서둘러야 할걸. 내일이면 오때가 못 되어서,
나는 붙잡혀가고 말 테니.”
“그러면 시방 이 길로 성내로 들어가서서, 우선 몇몇 사람만 청해 가지고
나오십시요. 그리고 노인일랑 오늘 밤 이윽해서 가권 데리고 내 배로
피신을 하십시오.”
7
사흘이 지나 초엿샛날이었다.
바로 어저께까지도, 육방 관속에 송사하러 들어온 백성들에 사령들의
긴대답 소리에 사람으로 가득 차서 오락가락하고 시끄럽고 할 동헌이,
목사 하나 이방 송삼복이 하나가 달랑하니 상방에 앉았을 뿐,
어리친 개새끼 한마리 볼 수 없고, 죽은 듯이 조용하였다.
목사나 이방 송삼복이나 참으로 도깨비에 홀린 형국이었다.
아침에 내아에서 잠이 깬 목사는, 내아에서 부리는 하인들이 밤 사이로
죄다 없어져버렸다는 실내마마의 말에 우선 놀라고 화가 났다.
남이 해다 바치는 밥을 먹을 줄밖에 모르는 목사 내외는 아침밥을 굶어야
하였다.
동헌으로 나와 이방 송삼복이 외에는 각방 아전은 물론이요, 통인 한놈,
방자 한 놈 없이 텅 빈 것을 본 목사는, 화증이 나기보다도 무서운 생각에
등골이 우선 서늘하였다.
대체 무슨 내력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밤 상이에 육방 관속이 죄다 병이 나고, 죽고, 연고가 생기고 한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변 또 밤 사이에 육방 관속이 죄다 병이 나고, 죽고, 변고가
생기지 하지 아니한 다음에야 이다지도 싹싹 무엇이 쓸어간 것처럼
한 놈도 없이 없어지고 말 이치는 없는 것이었었다.
목사는 당장 배가 고팠다. 마마가 하는수 없이 정주로 내려가기는
하였으나 팔짱을 끼고 우두커니 섰는 도리밖에는 없었다. 할 줄 모르나
따나, 밥을 짓고자 하여도 물을 길어올 재주가 없기 때문이었다.
목사는 변소에를 가야 할 터인데, 뒤지를 가지고 대령하는 똥방자가
없으니 큰일이었다.
화가 나니 담배라도 먹어야 하겠는데, 담뱃대에 담배를 넣어 올리고,
부시를 쳐서 불을 붙이게 하여 주는 통인이 없었다.
오늘은 옥에 가둔 죄인 가운데 끌어내다 닦달을 할 놈도 많았다. 또
사흗날 이후로 종적을 숨긴 이좌수와 그 딸년도 기어코 찾아서
붙잡아들여야 하였다.
그런 것도 그런 것이려니와 이놈들이 죄다 밤 사이에 죽었거나 무엇이
물어가지는 아니하였을 터인즉, 놈들을 붙잡아다 혀가 나오도록 깡그리
매질을 해야만 할 터인데, 대체 누구를 시켜, 우선 놈들을 붙잡아 오기라도
하느냔 말이었다.
제주 목사가 저으기 우둔치 아니한 인간이었다고 하면, 남의 시중과 남의
손발이 아니면 기거범절의 신변사를 비롯하여 모든 공사에 이르기까지
도무지 꼼짝을 할 수가 없는 것이 양반이라는 것, 따라서 세상에 양반처럼
무력하고 양반처럼 불편하고 한 것은 없다는 것을 저으기 깨달았을
것이였으나, 그는 타고나기를 우둔하게만 타고난 사람이어서 도저히 생각이
그런 데까지 미치는 수가 없었다.
“이놈아, 너라도 나가서 우선 수형방(首刑房)놈 먼저 묶어들이게 해라.”
목사는 이방 송삼복을 이렇게 구박을 하는 것이었다.
송삼복은 하는 수 없이 일어서면서
“소인이 오랏줄이 있어야 수형방을 묶어들입지요.”
“밧줄로는 못 묶느냐?”
“밧줄이야 있읍지요마는, 몸집이 소인 갑절이나 큰 수형방이 소인에게
묶이겠읍니까?”
“이놈아, 어명을 받들고 내려온 제주 목사의 영이란 말도 못하느냐?”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답니다. 아뭏든 우선 나가서 동정이나 살피고
옵지요?”
동헌을 나와 수형방의 집을 찾아가던 길초에서 송삼복은
사령 하나를 만났다.
“아아니, 너 웬 일이냐?”
송삼복이 질책하듯 묻는 말에 사령은 천연덕스럽게
“네, 인전 사령 구실 그만 다니고 달리 장사라두 할까 해서요.”
“그렇드래두, 온다간다 말이 없이 그러는 법이 있단 말이냐.”
“하기 싫은 사령 구실 억지로 다니라는 법은 있나요.”
“너 이놈, 그렇게 방자히 굴고서도 제주 바닥에서 온전히 살까.”
“아따 못 살면 대수요.”
송삼복은 분한 깐으로 하면 사령놈을 당장 물고를 낼 것이지만, 누가 있어
송삼복을 위하여 방자스런 사령을 덜미 짚어다 형틀에 올려매고 넓죽넓죽
곤장질을 해줄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수령방은 집에 있었다.
수형방은 나이 많아 형방 구실을 그만 다니겠다는 것이 먼저의 사령과
핑계가 다를 뿐이지, 그 나머지 문답은 결국 그 말이 그 말이었다.
호장, 공방, 형장, 비장 죄다 찾아보았으나 죄다 같은 대답이요, 같은
태도였다.
사실 보고를 들은 목사는 화증을 내어 펄펄 뛰고 할 기운조차 없었다.
목사는 어깨가 축 처져가지고 앉아 한숨만 거듭 쉬었다.
“정녕 그놈들이 나를 끕끕수를 주자고 저희끼리 짜고서 이 거조를 낸
것이 아니냐?”
얼마를 있다가 목사가 그러는 말에 송삼복은
“소인 소견에도 십분 그런 상싶습니다.”
“그러니, 놈들이 길래 이런다면 큰일이 아니겠느냐.”
“길래 그런다면 큰일이다뿐이겠읍니까마는……”
“마는……”
“하여튼 좀 두고 동정을 봅지요.”
마마가 몸소 동헌으로 나와 조반이 되었다고 하였다.
속은 상하여도 시장한 판에 밥은 반가운 것이었다. 목상의 밥상은 있던
김치에 장조림에 젓갈 등속으로 아무려나 시늉만은 내었으나, 밥은 밥인지
죽인지 분간 키 어려운 이상한 물건이었다. 그러나남 냇내가 코를 지르는.
그럭저럭 보름이 지났다.
목사는 할 수 없이 제주를 떠나기로 하였다.
그동안 목사는 이방 송삼복을 시켜 육방 관속들을 달래도 보고, 위협도
하여 보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송삼복이 나서서 새로이 관속을 뽑아보았다. 다리가 뻣뻣하도록 온종일
돌아다니면서 권을 하여도 통인 하나 구하지를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요를 그 전의 삼 곱을 주기로 하고 사방에 방을 붙이는 한편,
다시 송삼복이 나서서 권면을 하고 다녔다.
역시 아무 보람이 없었다.
이방 하나를 데리고는 목사질이 되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목사질을 못하게 된 바에야, 우두커니 언제까지고 텅 빈 동헌만 지키고
앉았을 터무니가 없는 것이었다. 제일에 밤이면 귀신 우는 소리에 사뭇
한축이 날 지경이었다.
마침내 목사는 마마와 함께 평복으로 차리고 보따리에다 값나가는
것으로만 보화를 꾸려 짊어지고 제주성내를 떠났다. 이방 송삼복이도 제가
한 가늠이 있어 부지를 못할 줄 알고 마침 식구가 단 내외인 것이
다행이어서 목사를 따라 서울로 가기로 하였다.
욕심 같아서는 모아 둔 돈과 그 밖에 모든 것을 죄다 가지고 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을 위하여 성내에서 조천까지 짐을 져다 줄 사람은 눈먼 병신
하나가 없었다.
평복에 짚신을 신고, 꽤 큰 보따리를 어깨가 진 목사가 앞을 서고, 마마가
그 엯; 힘에 겹도록 무거운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서 뒤를 따르고, 그 뒤를
이방 송삼복이 내외가 커다란 한 보따리씩을 지고이고 하고서 따르고, 이런
창피한 행색으로 목사는 제주를 떠나지 아니치 못하였다.
목사가 제주를 떠난다 하니, 거리거리 나서서 구경들을 하였다.
어떤 장난꾸러기는, 고개 푹 수그리고 지나가는 목사의 앞으로 뛰어나가
너풋 절을 하면서
“사또안전, 어데 행차신가요?”
하는 사람도 있었다.
누구는 따라가 보따리를 만지면서
“져다 드립지요.”
하는 사람도 있었다.
제주 백성은 거개가 목사에게 원한이 깊었다. 그중에도 목사의 손에
부형이 억울히 매를 맞고 죽은 사람, 안해나 딸자식을 농락당한 사람, 이런
사람들의 원한은 도저히 목사를 제 발로 성하게 걸어서 돌아가도록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허생의 단속으로 패하여 추렷이 물러가는
자에게 손을 대지는 아니하였다.
목사 일행은 조천에서 두 달을 묵었다. 배는 없었다.
그들은 주막에 들어 한 상에 열 냥 스무 냥 하는 밥을 혹은 금싸라기로,
혹은 은덩이로, 혹은 패물로 주고 사먹어야 하였다. 값을 그렇게 받지
않고는 그들에게 밥을 팔고자 하는 사람이 없으니 무가내한 노릇이었다.
일행이 목숨같이 여기며, 어깨가 휘고, 목이 옴츠라드는 것도 헤아리지
아니하고 성내에서 조천까지 지고 온 보따리의 금은 보화와 비단이 하나도
없이 밥값으로 동이 나던 두 달만에야 겨우 배가 있어 아무려나 그들은
조천을 떠날 수가 있었다. 물론 맨주먹에 빈 보따리였다.
미구에 새로이 제주 목사가 나고, 도임을 하고 하였다.
신연 하인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다 못하여 신관은 자기 집 하인 둘을
데리고 호젓한 도임을 하였다.
배에서 조천에 내린 신관은 우선 말을 구하지 못하여 걸어서 성내까지
들어가야 하였다.
동헌은 텅 비고, 구관 때 그대로 육방 관속이라고는 구림자도 구경을 할
수가 없었다.
신관이 데리고 온 자기 집 하인을 시켜 전임 관속을 찾아다니며 다시
구실을 다니도록 일렀으나 아무도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방 하나를 데리고는 목사지를 못 하듯이, 하인 둘을 데리고도 목사질은
못하는 법이었다.
도임한 지 스무 날 만에 신임 목사는 도임하던 때 모양으로 하인 둘을
데리고 걸어서 제주를 떠났다.
둘쨋번의 신관 제주 목사도 별수가 없었다.
세쨋번, 네쨋번도 매양 일반으로, 보름 아니면 스무 날 만에 돌아가고
말았다.
서울서는 아무도 제주 목사를 원하는 사람이 없게쯤 되었다. 조정에서는
성가신 참이라, 제주 하나쯤 한동안 공관(空官)이면 어떠랴 하고서 내버려
두고 말았다.
8
어느덧 삼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제주는 허생이 일찍이 여러 사람들에게 언약을 한 대로, 그리고
조천에 내리어 제주의 유력한 사람들에게 역시 언약한 대로,
낙천지──살기 좋은 고장이 되었다.
살 집이 있었고 부칠 땅이 있었다. 농사해서 거둔 것을 빼앗기지 않고
배불리 먹을 수가 있었다. 양반 상놈의 구별이 없고, 저 혼자만 편안히
앉아서 남을 부려먹으려 드는 사람도 없고, 이런 살기 좋은 고장이 되었다.
게으르면 당장 배가 고프고, 또 남들이 게으른 놈으로 돌려놓고 하기
때문에 다들 부지런히 일을 하였다.
남의 것을 부러워할 일도 없고, 남에게 의지해서 살 필요도 없었다.
저마다 성실히 일하며 살되, 남을 해롭게 하기를 절대로 삼가하였다.
사람들은 남에게 사폐가 되는 일이면 아무리 이가 되는 일이라도
사양하였다. 자연 싸움이 없고 화목하였다.
말을 많이 쳐서, 말과 말총을 육지로 내어 돈과 제주에 없는 물건을
사들였다. 생선과 미역을 많이 따서 역시 육지로 보내었다.
일본 장기(長崎)에도 배로 교역을 하였다. 더러는 청국과도 교역을
하였다.
제주는 아무 부족할 것도 기릴 것도 없는 낙천지──살기 좋은 고장이
되고서도 오히려 남을 것이 있었다.
모든 것이 허생의 힘이었다.
삼 년 동안 허생은 오로지 제주를 살기 좋은 고장으로 만들기에만 정성을
다하였으며, 사람들을 편안히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데에만 힘을 썼다.
그리고 모든 것이 허생의 뜻한 대로 다 되었다.
언약한 바를 언약한 대로 성취한 허생은 제주에 더 머물러 있어 할 일이
없었다.
부인 고씨가 가난을 참지 못하여 바가지를 긁고 하는데, 예라 잠시 동안
세상 바람도 쏘이고 세태와 물정도 두루 살펴 후일의 도움을 삼으리라 하고
집을 나선 것이었었다.
막연히 과객질이나 하고 돌아다니기보다는, 자기의 경세(經世)하는 재능과
솜씨를 한번 시험하여 봄도 무방한 일이었다.
우선 초면 부지의 변진사에게서 단 두 마디로 만 냥의 큰 돈을 구하여
내는 데 성공하였다
만 냥의 밑천으로 십만 냥의 돈을 용이히 만들기도 하였다.
제주 목사를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제풀에 물러가게 하기도 하였다.
사천여 명의 불우한 사람들과 제주 일판의 사람들로 하여금 편안히 잘 살
수 있도록 하여 주기도 하였다.
모든 것이 성공이었다. 그러니 인제는 돌아가 글을 더 읽는 것이
것이었었다.
허생쯤으로는 장사를 하여 돈을 많이 남기고, 사람이나 몇천 명, 조그마한
섬으로 데리고 가서 편안히 살게 하는 것으로 만족할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재주를 시험한 것에 지나지 못하였다.
허생에게는 보다 더 큰 포부와 경륜이 있었다. 그 보다 더 큰 포부와
경륜을 펴기 위하여는 언제까지고 조그마한 섬 속에 꿇어 엎드려 있을 수가
없었다. 또 몇 해 동안 글도 더 읽어야 하고.
허생을 부모같이 여기고 따르던 제주의 뭇 사람들은, 허생 보내기를 차마
못 하였다. 울면서들 만류하였다.
막상 떼치기 어려운 인정이었으나, 그래도 허생은 떠나지 아니치
못하였다.
떠나기 전에 허생은 앞으로도 시방처럼 잘 살아가는 도리를 가르쳐 주었다.
부지런할 것.
남의 것을 탐내지 말 것.
남의 허물을 용서할 것.
여러 사람의 이 되는 일이면 나 한 사람의 해를 상관치 말 것.
함부로 제주를 떠나지 말 것.
이 다섯 가지를 지키면 제주는
길이길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남을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조정에서 목사를 보내어 다스리는 마당에 만약 목사가
악정을 하거든, 일찌기 하던 법식대로 하여 그로 하여금 있지 못하고
물러가게 하라고 하였다.
봄 삼월, 일기 화창한 하루날, 허생은 만 명도 넘는 남녀노소의 전별을
받으면서 먹쇠를 데리고 배에 올랐다.
헌 갓에, 해어진 무명옷에, 굽 닳아빠진 나막신에…… 허생의 행색은
여전히 이렇게 초라하였다.
허생은 그동안 삼 년만 하여도, 육지로부터 여러 만금을 벌어들였었다.
그러나 그는 떠나는 마당에서는 먹쇠의 전대에 돈 석 냥을 넣게 한
것밖에는 없었다. 해남서 서울까지 갈 두 사람 모가치의 노수돈 석
냥이었다.
허생의 탄 배가 드디어 닻을 감고 돛을 올렸다. 배는 선창으로부터 조용히
물러났다.
“잘 가세요.”
“안녕히 기세요.”
이 마지막 작별의 인사 소리가 만 명의 입으로부터 수없이 외쳐졌다.
노인들은 눈물을 씻었다. 여자들은 허생원님, 허생원님 부르면서 울었다.
허생은 정든 자식을 떼치고 떠나기처럼 마음이 창연하였다. 뱃전에
지여서서 연방 손을 젓는 동안 무심코 눈물이 어리었다.
허생의 뒤에 서서 먹쇠도 주먹으로 눈물을 닦았다.
이 융숭한 배웅과 간곡한 작별에 누구보다도 빠져서는 아니 될 사람이
하나가 눈에 뜨이지 아니하였다. 매화가 없어진 것이었다.
매화는 그도 만 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조천으로 허생을 배웅하러
나오기는 나왔었다. 그러나 정작 허생의 배가 떠나는 자리에는 보이지를
아니하였다.
허생은 제주를 떠나기로 작정을 하고 나서 어느 날 매화를 앞에 앉히고
조용히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할 텐가?”
“저는 여기 있겠어요.”
머리를 숙이고 이윽고 생각하던 매화는 얼굴을 들어 똑바로 허생을 보면서
대답하였다.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하였고.
그대로 머물러 있겠다는 매화의 대답이 허생은 자못 의외였다.
한마디에 따라가겠노라고 하려니만 하였었다.
허생은 오입장이도 활량도 아니었다. 일만 사람의 민정(民情)은 살필줄
알아도 한 계집의 은근한 사모의 정은 알 줄을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그는 계집에 들어서는 골샌님이요, 근경속 없는 벽창호였다.
허생의 배가 선창에 빡빡히 들어선 여러 배 사이를 빠져 맨 갓배 옆을
지날 때에 그 맨 갓배의 뱃전에 가 매화는 서서 있었다.
허생도 뱃전에 서서 있다가 매화를 보았다.
“부디 몸조심하세요.”
“몸 편히 잘 있게.”
한마디씩 작별을 나누는 말이 떨어지기 전에 사정 없는 배는 벌써 지나쳐
버렸다.
매화는 허생의 탄 배가 멀리멀리 물 너머로 가물가물 잠길 때까지 울면서
뱃전에 가 서서 있었다. 그러다가 허생의 배가 마침내 아니 보이고 말자.
그대로 치마를 뒤쓰고 바닷물로 몸을 던졌다.
9
서울 다방골 변진사는 허생이 돈 만 냥을 취해 간지 석 달 만에 본전의
갑절 이만 냥을 보낸 것을 받고, 차라리 놀라지 아니하였다.
변진사는 생면부지 초면에, 와서 돈 만 냥을 취하라고 하는 데에 벌써
그가 비범한 사람임을 알았었다.
따라서, 그 취하여 간 만 냥 돈에 대하여,
일후에 필연코 어떤 비범한 하회가 있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했던 것이 과연 석 달 만에 만 냥의 갑절 이만 냥을 올려보냈던
것이었었다. 취해 간 만냥을 반드시 갚을 것으로, 갚되 이만 냥으로
갚을 것으로 믿고 기다린 바는 아니었다.
돈이야 설혹 갚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여커나 범상한 사람에게서는
만금으로 구할 수 없는 비범한 재주를 부리고야 말 것을 그는
믿었던 것이었었다.
달리 큰 황제라도 하였다면 모르거니와, 돈 만 냥을 가지고 석 달 동안에
그 갑절 이만 냥으로 늘린다는 것을 졸연한 일이 아니었다.
가사 또 몇만냥의 이문을 보았다손 치더라도, 본전 만 냥에다
석 달만에 이자 만 냥을 얹어서 이만 냥으로 갚는다는 것은
여간한 담보로는 생의치 못하는 짓이었다.
변진사는 조선에 모처럼 큰 사람이 난 것이라고 하였다.
변진사는 인물을 돕기 위하야 돈과 수고를 아끼지 싶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묵적골 허생의 본집에 다달이 양식과 그리고 옷감이며 찬거리를
대었다. 물론 간소하게였다.
허생의 부인 고씨는, 이 다음 사랑에서 돌아오시면 걱정을 하신다고,
처음에는 받지 아니하려고 하였다. 이런 것을 보면 고씨부인도 노상
어리석기만한 지어미는 아니던 모양이었다.
변진사는 허생의 부탁이라고 하인으로 하여금 꾸며대게 하였다. 그 말을
듣고서야 고씨부인은 잠자코 받아들었다.
변진사는 하인을 시켜 다달이 그렇게 살림 뒤를 대는 한편, 열흘 만에
한번, 혹은 보름 난에 한번 동자를 앞세우고 스스로 허생의 집을 찾아가
허생이 돌아온 여부를 묻고 하였다.
삼 년을 변지사는 꾸준히 그것을 계속하였다. 한 달 두 달도 아니요, 삼
년을 꾸준히 그런다는 것은 여간 정성으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삼 년 만에 허생은 마침내 돌아왔다. 집을 나갈 때처럼 헌 갓을 쓰고,
낡은 무명옷을 걸치고, 굽 닳아빠진 나막신을 끌고, 이삼 일 동안 가까운
시골이라도 다녀오는 사람처럼 심상한 얼굴로 그는 돌아왔다.
허생이 돌아오던 닷새 만에 변진사가 올라왔다. 둘이는 만났다.
허생과 변진사는 두 번째 대면이었다.
그러나 둘이는 오랜 교분이 있었던 것처럼 지기가 상합하였다.
변진사가 허생이 비범한 인물임을 안 것과 한가지로,
허생도 변진사가 녹록한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었다.
첫째 변진사는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
또, 만 냥의 큰 돈을 성명도 거주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러나마 궁한
선비에게 말 한마디로 선뜻 내어주는 것은 여는 사람과 다른 딴 보짱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사람이면 더불어 천하의
경륜을 논하여도 족하리라고 허생은 생각하였었다.
허생이 돌아온 뒤로, 변진사는 사흘만큼씩 닷새만큼씩 밤저녁으로, 더러는
일기 화창한 날이면 낮으로, 조촐한 술상을 들려 가지고 허생을 찾아와
밤이 깊도록, 혹은 날이 저물도록 권커니잣거니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에
세월 가는 것을 잊고 하였다.
어떻게 하면, 조선의 정치와 나아가서는 조선 전체의 운명을 그르쳐 가고
있는 사색 당파의 싸움을 없이할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조선이 부하고 강성한 나라가 되어 백성이 주리지 않고
편안하며 밖으로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우리의 약함을 엿보고 침노한
외난을 미리서 막을 수가 있을까.
이런 이야기로 긴 밤을 짧게 새우며, 해를 지우며 하기 무릇 몇 번일는지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변진사는 낯모를 손님 하나를 데리고 왔다.
허생이 수인사를 하고 보니, 당시에 크게 이름이 떨치고 있던 이완(李浣)
대장이었다.
이때에 조정에서는 북벌──북쪽으로 청국을 칠 계획을 세우고,
여러가지로 준비를 하면서 아울러 널리 인제를 구하고 있었다.
병자호란 때에 때의 임군 인조대왕이 남한산성에 농성하여 호병을
저항하다 못해 삼전도에서 청 태종(淸太宗) 홍타시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한 것은, 그리고 그것으로써 청국을 상국(上國)으로 받들게 된
것은, 낡은 상전 명나라 대신 새로이 청나라의 종이 된 것일 따름이라고
하면 그만 일수도 있었다. 약하고 어리석어 뻐젓이 제 나라 제 강토를
가지고 남의 종노릇을 한 그것이 욕이요 부끄럼이지, 우리를 정복한 자가
한족(漢族)인 명나라거나 몽고족(蒙古族)인 청나라거나, 거기에 무슨
차이가 있을 턱이 없는 것이었다. 한족 명나라를 상국이라 부르며 상전으로
받들고, 그 속국 ──종노릇을 하였다고 욕이 덜하고 부끄럼이 적을리가
없으며, 명나라를 멸하고 대륙의 주인이 된 몽고족 청나라에게 새로이
정복을 당하였음으로 하여, 그를 새로이 상국이라 부르며 새로운 상전으로
받들고, 그의 속국──종노릇을 하게 되었다고, 욕이 더하고 부끄럼이
더하랄 법은 없는 것이었었다.
그러하건만, 때의 지도자──유생이라는 사람들은 조선이 명나라의
속국으로부터 청나라의 속국이 된 것을, 죽도록 욕되고 부끄럼으로
여겼었다. 타고난 종놈의 기질(奴婢氣質)이었다. 선비의 집 종이 장사꾼의
집 종보다는 제가 지체가 나은 줄로 자긍를 하고, 서울 재상의 집 종이
시골 아전의 집 종이 되기를 욕되고 부끄럽게 여김과 다를 것이 없는 그
종놈의 기질인 것이었다.
조선의 유생이라는 사람들은 명나라의 문화에 미치다시피 중독이
되었었다. 그들은 명나라의 문물, 제도, 사람, 풍토 이런 것들을 하늘처럼
크게 여기고 숭배하고 하였다. 심하게 말하면, 명나라의 것이면 방귀도
구리지 아니할 지경이었다. 이리하여 조선의 유생들과 일부 사람들은
진심(精神的)으로 명나라의 종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명나라가 조선의
상국이요 우리의 상전인 것을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겼다. 따라서 조선이
명나라의 속국이요, 우리가 그 종노릇을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인
동시에 영광이요 자랑으로 여겼다.
이른바 사대사상(事大思想)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사대사상은 약한 민족이 무력──전쟁으로 정복을 당한 후에, 이어서
문화적으로 정복을 당하였을 때에 생기는 무서운 아편인 것이었다.
문화적으로 정복은, 피정복자를 동화시키고 마취시켜 피정복자인 약한
민족으로 하여금 저를 잊어버리고 정복자를 숭배코 따르고 함으로써,
정복자에의 반항력을 영원히 마비되게 하는 요물이었다. 사대사상은
그러므로 민족을 멸망시키는 대적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었다.
조선의 사대사상은 물론 이조시대에 와서 비로소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멀리 삼국 때 당(唐)나라의 무력을 빌어 삼국통일을 이룸으로써 어느덧
당나라에게 문화적인 정복을 받은 바 되어, 그 결과 정신적으로 당나라의
노예──종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그 속국 노릇을 하지
아니치 못한 신라(新羅)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또 가까이는 원(元)에게 정복을 당한 후 이윽고 조선 천지가 원나라의
행랑이 되다시피한 고려(高麗)의 중엽 이후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효종대왕은 병자호란에 삼전도에서 청 태종의 발부리 앞에 무릎 꿇고
항복을 한 이조대왕의 바로 아드님이었다. 그는 당시의 욕을 몸소
겪었음이나 다름이 없는 터라, 청나라에 대한 복수심이 자못 깊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다, 그는 또 한 가지 병자호란의 뒤치다꺼리로서, 청병에게
인질──볼모로 끌려가 팔 년 동안이나 요양(遼陽 : 奉天)에 붙잡혀
있으면서 갖은 고통을 당한 것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미리미리 청나라에다 한번 복수를 시험할 뜻이 있었고,
위에 오르자 미구에 북벌── 청나라를 칠 계획을 세워 부지런히 준비를
시작하였다.
이 효종대왕의 뜻을 받들어 북벌을 맡아보는 문신(文臣)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있었다.
송시열은 혼백을 명나라에다 팔아먹은 사대사상의 당대 두목이었다.
송시열과 및 그와 종파를 같이하는 지도자──유생들이 보기에는, 몽고와
만주의 호지에서 일어난 청나라는 한낱 보잘것없는 변방 족속이요, 공맹의
도와 학문이 없는 오랑캐였다. 그런 오랑캐의 무리가 그래도 신하는
신하이겠는데, 신하로 임군을 쳐 물리치고 그 자리에 올랐으니, 천하에
용서치 못할 찬역이었다.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물어야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하였으니 명나라의 원수였다. 조선은 명나라의 신하
뻘이요, 명나라는 조선의 상국인즉 명나라를 멸한 명나라의 원수 청나라는
곧 조선의 원수였다. 그뿐 아니라 조선과는 병자호란의 원수가 있었다.
조선은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 청나라를 쳐 멸함으로써 두 가지 원수를
갚아야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명나라는 일찌기 임진왜란 때에 오십만의 대병을 조선으로 보내어, 망하게
된 조선을 살려내어 주었다.
조선이 왜병에게 아주 망하는 날이면 그 다음에 망하는 것은 명나라였다.
그러므로 명나라가 조선에 동병을 한 것은 단지 조선을 구하자는 것이
아니요, 조선을 구함으로써 명나라 자신의 보전을 도모하자는 노릇이었다.
조선이 열 번 망하더라도 명나라의 안전에 별반 영향이 없는 것이라고
하면, 명나라는 단 한 명의 군사도 동병을 하려고 아니하였을 것이었었다.
조선의 사대사상자──명나라에 혼백을 팔아먹은 유생들은, 그러나
명나라의 동병이 전혀 조선의 멸망을 구원하기 위한 상국의 의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덕택에 조선은 왜병의 손에 망하고 말 것이 뻐젓이
구원이 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 임진왜란의 동병의 대의를 위하여, 조선은
군사를 일으켜 청나라를 칠 의리가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송시열을 두목으로 한 유생들의 북벌──청국을 치는 이유와 목적은
그러하였다.
임군 효종대왕괴 및 무신(武臣)으로 북벌의 중심 인물인 이완 대장의
뜻하는 바 북벌의 목적은 그러나 지극히 단순하였다. 변방의 오랑캐
족속에게 무릎을 꿇어 항복을 하고, 그를 상국으로 받들고 한, 분을 푼다는 것이었다.
그 이완 대장이 변진사에게서 누누이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어 인물을
시험할 겸 함께 허생을 찾아온 것이었다.
당당한 훈련대자의 지체로, 명색없는 궁한 선비를 몸소 찾아본다는 것은
적지않이 파격이었다. 그러나 이완 대장도 그런것쯤에 구애되어 방금 큰
인물이 얼마든지 소용되는 이판에, 사람 찾아보기를 주저할 옹색한 사람은
아니었다.
한 번 다녀간 이완 대장은 그 뒤에도 종종 변진사와 함께 혹은 혼자서
허생을 찾아오고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허생이라는 사람이 당절에는 드문
포부와 경륜과 담략을 갖춘 큰 인물인 것을 차차로 깨닫게 되었다.
하루 저녁, 마침내 이완 대장은 마음에 먹은 바를 토설을 하였다.
변진사를 하필 따돌린 것은 아니나 마침 이완 대장만 혼자 온 길이었다.
변진사가 보내는 맛좋고 향기 있는 술과 조촐한 안주는 떨어지지를 않는
터라, 허생은 이완 대장과 마주 앉아 여러 잔을 기울였고, 이미 술이
거나하였을 무렵이었다.
“허생원, 오늘 저녁에는 내가 긴히 할 이야기가 있읍니다.”
이완 대장은 이렇게 허두를 내고 나서 잔을 들어 주욱 마신 후에
“다른 게 아니라, 조정에 한번 나와 보실 의향이 없으십니까?”
하고 묻는다.
허생은 빙긋이 입가에 미소를 띠고
“날더러 벼슬을 하라고요?”
“조정에서는 시방 은밀히 큰 계획을 꾸미고 있는 것이 있읍니다. 북벌할
준비를 하는 중이지요. 그래서, 두루 큰 인물을 구하던 차인데, 마침
허생원 같은 분을 만나 나로서는 여간 마음 든든한 바가 아니올시다.”
“네에, 북벌을 하신다고요. 네에. 거 매우 장하신 노릇입니다.”
정중한 말과는 달라, 허생은 신통치 못해하는 얼굴로 연해 그러더니
“무슨 필요로 북벌은 하시나요?”
“문신으로는 우암(尤庵)이, 무신으로는 불초한 내가 각기 상감의 명을
받들어 북벌 일자를 계획하고 있기는 있으나, 그 우암이라는 사람과
사사이 의견이 맞지를 아니해서 여간 각다분한 게 아닙니다.
도시에, 같은 북벌이라고 해도 우암의 북벌에 대한 뜻과 상감이나
나의 북벌에 대한 뜻이 서로 어긋나는 것이 있어서.”
“우암은 물으나마나 변방의 오랑캐 족속 청나라가 이신벌군(以臣伐君)을
하였으니 쳐야 하고, 대명을 멸망시킨 원수와 삼전도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청나라를 쳐야 하고, 임진란 적에 구원병을 보내준 의리로 청나라를 쳐야
하고, 그런다는 것일 테지요.”
“꼭 허생원 말씀대로랍니다.”
“그러면, 상감께서와 이대장의 북벌에 대한 뜻은?”
“삼전도의 원수를 갚자는 것이지요.”
“단지 그것인가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북벌은 아예 파의하시기만 못할 듯합니다.”
“북벌을 파의하라고요?”
이완 대장은 펄쩍 뛰면서 따지듯 묻는다. 허생은 한결같이 침착히
“여보시요, 이대장?”
“네.”
“자고이래로 이 동방 천지에서 제로라는 족속은 제마다 한번씩 연경에다
도읍을 하고, 중원을 호령해보지 아니했읍니까. 중원 바닥의 한족은 물론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元(원)나라가 청나라가 다 한번씩은 중원의 주인
노릇을 해보지 아니했읍니까. 심지어 저 왜국의 풍신수길이 같은 놈이 다
그런 앙큼스런 배포로, 임진년에 우선 조선을 범했든 게 아닙니까. 조선을
수중에 넣는 날이면 연경 도읍은 절반도 더 성공이니까요. 그런데 우리
조선 족속은 사천 년을 내려오면서 언제 한번 그런 생의라도 해보았나요.
육장 그놈들한테 침노를 당하고 눌려만 살았지. 그러니, 예라 우리도 어디
연경다 도읍을 하고 한바탕 중원을 호령해 보자 이런 뜻으로, 이런
목적으로 북벌을 한다면 모르거니와 그래 고작 삼전도의 분풀이 그거란
말씀이요. 우암 같은 명나라 놈의 서족(庶族)이 지껄이는 잠꼬대는 족히
더불어 논할 것도 없지만 말이지요.”
“………”
이완 대장은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약간 괴참한 얼굴이었다.
허생은 자작으로 한자을 부어마시고 나서 다시
“가사 경륜이 그렇게까지는 크지 못하다고 하드래도, 요동(遼東)이나마
도로 찾겠다는 것으로 북벌하는 목적을 삼아야지요. 아시다시피 요동은
고구려 적까지도 우리 땅이 아니었읍니까. 앞으로 삼사백 년이 못가서,
우리 조선은 땅이 모자랄 날이 옵니다. 그러니, 시방부터라도 서둘러서
도로 찾아야 할 게 아닙니까. 찾아만 놓으면 삼사백 년 후뿐이 아니라,
지금 당장도 요긴한 땅이니깐요. 그럴 것이지, 그래 국력을 기울여 성패를
걸고 북벌을 한다면서, 겨우 삼전도의 분풀이나 하겠다고요. 설마
이대장으로 앉아 전쟁을 장기 한판 두기처럼 대수론 일로 여기시지야
아니하시겠지.”
“………”
“이대장?”
“네.”
“준비를 하셨다니, 무엇이 얼마나 준비가 되섰나요?”
“서울서 오천 명, 팔도에서 만 명, 도합 일만오천 명 군사를 조련한 것이
있고, 그 일만오천 명 군사를 일 년 동안은 동병할 만한 각종 병장기,
군량, 마초, 화약, 돈이 준비가 되었읍니다.”
“수군(水軍 : 海軍)은?”
“없읍니다. 주장 육전만 할 요량이니까요.”
“이대장?”
“네.”
“원나라가 중원을 평정하기에 군사를 얼마나 동원했으며, 몇해나 걸려서
평정을 했는지 아십니까?”
“………”
“또오, 청나라가 중원을 평정하기에 얼마나 군사를 동병을 했으며,
몇해나 걸려서 평정을 했는지 아십니까?”
“………”
“설마 군사 일만오천 명을 동병해가지고 일 년 만에 중원을
평정하리라고는 생각지 아니하시겠지.”
“………”
“우리도 중원을 평정하고 연경다 도읍을 하든지, 요동만 도로 찾고
말든지, 그것은 하여간 삼십만 보병과 오만 수병으로, 연방 축나는
군사를 보충해 가면서 졸잡아 십 년 하나는 끌어야 목적을 이룰
것입니다. 대장 요량에 지금 조선 형편으로 삼십오만을 십 년 동안
동병을 할 수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
“정녕 북벌을 하시려거든 우선 북벌을 파의하십시요. 조련하든 군사를
헐으십시요. 병장기는 녹혀서 괭이를 만들게 하십시요. 화약은 물에 넣고,
돈과 군량은 가난한 백성을 노나 주십시요. 그러고서 이십 년 동안 전쟁
이자는 입밖에 내지를 말고, 오직 조정에서는 사색 붕당의 싸움을
물리치고, 수령 방백으로는 백성의 재물을 범치 못하게 하십시요. 그래서
우선 우리 조선이 부강하고,
일변 백성은 나라를 신뢰하는 나라가 되게 해놓십시요.”
“이십 년은 너무 요원치 않습니까?”
“가만히 거십시요. 그렇게 이십 년을 해서 뜻대로 조선이 부강하고
백성이 조정을 신뢰하고 하거든, 그때부터 십 년 위한하고, 전쟁할 준비를
시작하십시요. 삼사십만 군사를 십 년 이상 동병할 수 있는 준비를
하십시요. 그러나 전쟁할 준비라고 해서 군사를 조련하고, 병장기를
만들고, 군량 마초를 장만하고 그러는 것만이 전쟁할 준비가 아닙니다.
염탐을 몇백 명이고 청나라를 들여보내서 사백여 주의 지리를 세밀히
조사하고, 군비의 어떠한가를 조사하고, 또 한편으로는 청나라 조정과 중원
백성의 사이를 떼어놓고, 그 밖에도 할 일이 많습니다마는 우선 대강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삼십 년이 지난 뒤겠는데,
그때 가서는 이 이완은 벌써 지하의 객이 되었을 게 아니겠읍니까?”
“이대장은 돌아가섰어도 나라와 백성은 있읍니다. 한 개인의 수명은 불과
칠십이지만, 나라와 백성의 앞날은 영원무궁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대에
못하면 우리 아들들이 잇지 않습니까. 우리 아들들이 못다 하면 우리
아들들의 아들들이 또 있지 않습니까.”
“허생원. 아니, 선생님!”
그러면서 이완 대장은 허생의 손목을 덤쑥 쥐고
“크신 줄은 알았지만, 이대지 크신 줄은 몰랐읍니다. 내 상감께
품하지요. 매우 반가워하실 것입니다. 부대 조정에 나와 주십시요.”
“허허, 실없은 말씀을. 자, 약주나 드십시요.”
“진정이올시다. 저바라지 마십시요.”
“나는 미흡한 공부를 좀 해야 하겠읍니다, 허허허. 내가 오늘 저녁은
과음을 했어, 허허.”
그러더니 허생은 술상 앞에 쓰러지면서 드르렁드르렁 코를 고는
것이었었다.
이완 대장은 허릴없이 자리를 일어서고.
사흘 후에 이완 대장은 변진사와 같이 허생을 찾아왔다.
그러나 허생의 집은 이미 비고 없었다.
(解放[해방] 2년 9월 16일 鄕第[향제]에서)
<朝鮮金融組合聯合會[조선금융조합련합회] 協同文庫[협동문고]
4-1, 1946.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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