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약한 자의 슬픔
- 김동인 -
1
가정교사 강 엘리자베트는 가르침을 끝낸 다음에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이제껏 쾌활한 아이들과 마주 유쾌히
지낸 그는 찜찜하고 갑갑한 자기 방에 돌아와서는
무한한 적막을 깨달았다.
‘오늘은 왜 이리 갑갑한고? 마음이 왜 이리 두근거리는고?
마치 이 세상에 나 혼자 남아 있는 것 같군. 어찌할꼬.
어디 갈까. 말까, 아. 혜숙이한테나 가보자.
이즈음 며칠 가보지도 못 하였는데.’
그의 머리에 이 생각이 나자, 그는 갑자기 갑갑하던 것이
더 심하여지고 아무래도 혜숙이한테 가보여야 될 것같이 생각된다.
“아무래도 가보여야겠다.”
그는 중얼거리고 외출의를 갈아입었다.
‘갈까? 그만둘까?’
그는 생각이 정키 전에 문 밖에 나섰다. 여학생간에 유행하는
보법(步法)으로 팔과 궁둥이를 전후좌우로 저으면서
엘리자베트는 길로 나섰다.
그는 파라솔을 받은 후에 손수건을 코에 대어서 쏘는 듯한 콜타르
내음새를 막으면서 N통, K정 등을 지나서 혜숙의 집에 이르렀다.
그리 부자라 할 수는 없지마는, 그래도 경성 중류민의 열에는 드는
혜숙의 집은 굉대(宏大)하지는 못하지만 쑬쑬하고 정하기는 하였다.
그 집의 방의 배치를 익히 아는 엘리자베트는 들어서면서
파라솔을 접어서 마루 한편 끝에 놓은 후에,
“너무 갑갑해서 놀러 왔다 얘.”
하면서 혜숙의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는 들어서면서, 혜숙이가
동모(同某) S와 무슨 이야기를 열심으로 하다가 자기 온 것을 알고
뚝 그치는 것을 알았다. S는
‘원, 무엇 하러 왔노.’
그는 이유 없는 질투가 마음에서 끓어 나오는 것을 깨달았다.
‘흥, 혜숙이는 S로 인하여 나한테 놀러도 안 오는구만.
너희끼리만 잘들 놀아라.’
혜숙이가 한 번도 자기에게 놀러 와 본 때가 없으되
엘리자베트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아, 엘리자베트 왔니. 우린 이제껏 네 이야기 하댔지.
그새 왜 안 왔니?”
혜숙이와 S는 동시에 일어나면서, 혜숙이는 엘리자베트의 왼손,
S는 바른손을 잡고 주좌(主座)에 끌어다 앉히었다.
엘리자베트는, 아직 십구 세의 소녀이지만 재주와 용자(容姿)로
모든 동창들에게 존경과 일종의 시기를 받고 있었다.
그는 재주로 인하여 아직 통학중이지만 K남작의 집에 유(留)하면서
오후에는 그 집 아이들에게 학과의 복습을 시키고 있었다.
“내 이야기라니 무슨? 내 숭들만 실컷 보고 있었니?”
엘리자베트는, 앉히는 자리에 앉으면서 억지로 성난 것을 감추고
농담 비슷하니 물었다.
혜숙과 S는 의논하였던 것같이 잠깐 서로 낯을 향하였다가
웃음을 억지로 참느라 입을 비죽하니 하고 머리를 돌이켰다.
“내 이야기라니 무슨?”
“네 이야기라니. 저― 그만두자.”
혜숙이가 감춰 두자 엘리자베트는 더 듣고 싶었다.
그는 차차 노기를 외면에 나타내게 되었다.
“내 이야기라니 무엇이야 얘? 안 가르쳐 주면 난 가겠다.”
“네 이야기라니. 저―”
혜숙이는 아까와 같은 말을 한 후에 S와 또 한번 마주 향하여 보았다.
“그럼 난 간다.”
하고 엘리자베트는 일어서려 하였다.
“얘, 가르쳐 줄라. 참말은 네 이야기가 아니고
저-―-- 이환(利煥) 씨 이야기.”
말이 끝난 뒤에 혜숙이는 또 한번 S와 낯을 향하였다.
혜숙의 말을 들은 엘리자베트는 노기와 부끄러움과 모욕을
당했다는 감을 함께 머금고 낯을 붉히고 머리를 숙였다.
엘리자베트가 매일 통학할 때에 N통 꺾어진 길에서 H의숙(義塾)
제모를 쓴 어떤 청년과 만나게 되었다. 만나기 시작한 지 닷새에
좀 정답게 생각되고, 열흘에 그를 만나지 못하면 섭섭하게 생각되고,
이십 일에 연애라 하는 것을 자각하고, 일 삭 만에 그 청년의 이름을
탐지하였다.
‘그도 나를 생각하겠지’ 하는 생각과
‘웬걸, 내게는 주의도 안 하더라’ 하는 생각이
그 후부터는 항상 그의 마음속에서 쟁투하고 있었다.
연애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그렇거니와 엘리자베트도 연애―---
짝사랑〔片戀〕이던-―--를 안 후부터는 벗들과 함께 있을 때는
아뭏지도 않지만, 혼자 있을 때는 염세의 생각과 희열의 생각이 함께
마음속에서 발하여 공연히 심장을 뛰놀리며 일어섰다,
앉았다, 밖에 나갔다, 들어왔다, 일도 없는데 이환이와 만나게 되는
길에 가보았다, 이와 같이 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다가 아무게도
통사정할 사람이 없는 엘리자베트는 혜숙에게 이 말을 다 고백하였다.
이와 같은, 사람의 비밀을 혜숙이는 S에게 알게 하였다 할 때는
그는 성이 났다.
처녀가 학생에게 사랑을 한다 하는 것이 그에게는 부끄러웠다.
둘―---혜숙과 S―---이서 내 숭을 실컷 보았겠거니 할 때에
그는 모욕을 당했다 생각하였다.
혜숙과 S가 서로 낯을 보고 웃을 때에 이 생각이 더 심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비밀을 혜숙에게 고백하였다 할 때에,
엘리자베트는 자기에게 대하여서도 성을 안 낼 수가 없었다.
‘이껀 자기를 믿고 통사정을 하였더니 이런 말을 광고같이 떠들춘단
말인가. 이 세상에 믿을 만한 사람이 누구인고?
아, 부모가 살아 계시면…….’
살아 있을 때는, 자기를 압박하는 것으로 유일의 오락을 삼던 부모를
빨리 죽기를 기다리던 그도, 부모에게 대하여, 지금은 유일의
믿을 만한 사람이고 유일의 의뢰할 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났다.
그리고 혜숙에게 대하여서는 무한한 증오의 염이 난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 바람을 품고 있었다. 이것―---이환과 자기의
새-―--이것이 이제 화제가 되는 것을 그는 무서워하고 피하려
하면서도 그것이 화제가 되기를 열심으로 바라고 있다.
좀더 상세히 알고 싶었다.
자기 말을 듣고 엘리자베트가 성을 낸 것을 빨리 알아챈 혜숙이는,
화제를 바꾸려고 학과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너 기하 숙제 해보았니? 난 암만해두 모르겠두나.”
‘아차!’
엘리자베트는 속으로 고함을 쳤다. 그의 희망은 끊어졌다.
‘내가 성을 낸 것을 알고 혜숙이는 이렇게 돌려다 대누나.’
하면서도 성을 억지로 감추고 낯에 화기를 나타내고 대답하였다.
“기하? 해보지는 않았어도 해보면 되겠지.”
“그럼 좀 가르쳐 주렴.”
기하책을 갖다 놓고 셋은 둘러앉아서 기하를 토론하기 시작하였다.
한 이십 분 동안 기하를 푸는 새에 엘리자베트의 머리에는
혜숙과 S의 우교(友交)에 대한 시기도 없어지고, 혜숙에게 대한 증오도
없어지고, 동창생에 대한 애정과 동성에 대한 친밀한 생각만
나게 되었다. 복습을 필한 후에 셋은 잠깐 무언으로 있었다.
그 동안 혜숙은 무슨 말을 할 듯 할 듯하면서도 다만 빙긋 웃기만 하고
말은 못 발하고 있었다.
‘무슨 말이든 빨리 하렴.’
엘리자베트는 또 갑자기 희망을 품고 심장을 뛰놀리면서 속으로
명령하였다. 엘리자베트가 듣고 싶어하는 것을 보고
혜숙이는 안심한 듯이 말을 시작한다.
“얘― 얘―”
이 말만 하고 좀 말하기가 별(別)한 듯이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또 시작한다.
“이환 씨느으으은 S의 외사촌 오빠란다.”
이 말을 들은 엘리자베트는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깨달았다.
그 가운데는 부끄러움도 섞여 있었다. 갑자기 이환이와 직접
대면한 것같이 형용할 수 없는 별한 부끄러움이 엘리자베트의 마음을
지나갔다. 그러면서도 그는 좀더 똑똑히 알려고,
“거짓말!”
하고 혜숙이를 쳐다보았다.
“거짓말은 왜 거짓말이야. S한테 물어 보렴. 이 애 S야, 그렇지?”
엘리자베트는 머리를 S 편으로 돌려서 S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환이가 S의 외사촌이라는 것은 팔구분은 믿으면서도…….
S는 다만 웃고 있었다.
‘모욕당했다. 집으로 가고 말아야지.’
엘리자베트는 이렇게 속으로 고함을 치고도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는 S에게서 이환의 소식을 듣고 싶었다.
그리고 ‘오빠도 너를 사랑한다더라’란 말까지 듣고 싶었다.
“응, 그렇지 얘?”
하는 혜숙의 소리에 S는 그렇단 대답만 하였다.
그리고 의미 있는 듯한 웃음을 머금고 엘리자베트를 들여다보았다.
‘S의 웃음. 의미 있는 듯한 웃음. 무슨 웃음일꼬? 거짓말?
이환 씨가 S의 오빠라는 것이 거짓말이 아닐까? 아니!
그것은 참말이다. 그러면 무슨 웃음일꼬? 이환 씨는 나 같은 것은
알아도 안 보나? 아! 무엇? 아니다. 그도 나를 사랑한다.
그리고 S에게 고백하였다. 아, 이환씨는 날 사랑한다. 결혼! 행복!’
그는 자기게 이익한 데로만 생각을 끌어가다가 대담하게 되어서
머리를 들면서, 결심한 구조(口調)로 말을 걸었다.
“얘, S야.”
“엉?”
경멸하는 듯이 S는 대답하였다.
이 소리에, 엘리자베트의 용기가 대부분은 꺾어졌다.
“너…….”
그는 차마 그 뒤는 말을 발하지 못하여 우물우물하다가
예상도 안한 딴말을 묻고 말았다.
“기하 다 했니?”
“기하라니? 무슨?”
S는 대답 겸 물어 보았다.
“내일 숙제.”
“이 애 미쳤나 부다.”
엘리자베트는 왜인지 가슴에서 똑 하는 소리를 들었다.
S는 말을 연속하여 한다.
“이제 우리 하지 않았니?”
“응?…… 참…… 다 했지…….”
S는 ‘다 알았소이다’ 하는 듯이 교활한 웃음을 머금고 엘리자베트의
그리스 조각을 연상시키는 뺨과 목의 윤곽을 들여다보았다.
‘모욕을 당했다.’
엘리자베트는 또 이렇게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집으로 가고 말아야지.’
이 생각을 할 때에 그는 아까 집에서 혜숙의 집에 가야겠다
생각할 때에, 참지 못하게 가고 싶던 그와 동 정도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가고 싶은 고로,
“난 간다.”
소리만 지르고, 동무들이
‘왜 가니?’ ‘더 놀다 가렴’등
소리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팔과 궁둥이를 저으면서 나섰다.
2
늦은 봄의 저녁빛은 따슷하였다.
도회의 저녁은 더 번잡하였다.
시멘트 인도는 무수히 통행하는 사람의 발로 인하여 처르럭처르럭
때가닥때가닥 하는 소리를 시끄럽도록 내면서도 평안히 누워 있었다.
어떤 때는 사람의 위를 짧게 비추었다,
사람이 다 통과한 후에는 도로 길게 비추었다 하는,
자기와 함께 나아가는 자기 그림자를 들여다보면서 엘리자베트는
본능적으로 발을 움직였다.
‘아! 잘못하였군. 그 애들은 내가 나선 다음에 웃었겠지.
잘못하였어? 그럼 어찌하여야 하노? S를 얼려야지. 얼려? 응.
얼린 후엔 들어야지. 무엇을. 무엇을? 그것을 말이지. 그것이라니?
아― 그것이라니? 모르겠다. 사탄아 물러가거라. S가 이환 씨의
누이이고. S가 혜숙의 동무이고. 또 내 동무이고. 이환 씨는 동무의
오빠이고. 사람이 다니고. 전차. 아이고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었다. 왜 웃는단 말인가? 왜? 우스우니깐 웃지.
무엇이 우스워. 참 무엇이 우스울까?’
그는 또 한번 웃었다. 그렇지만, 이 웃음은 기뻐서 웃는 것도 아니고
즐거워서 웃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스워서 웃는 것이다.
그가 왜 우스운지 그 이유를 해석하려고, 혼돈된 머리로 생각하면서,
발은 본능적으로 차차 집으로 가까이 옮겨 놓았다.
꾸부러진 길을 돌아설 때에, 그는 아직껏 보고 오던 자기 그림자를
잃어버린 고로 잠깐 멈칫 섰다가, 또 한번 해석지 못한 웃음을 웃고
다시 걷기 시작하였다.
그가 집에 들어설 때는, 다섯시 반 좀 지난 후 K남작은 방금 저녁을
먹고 처와 아이들이 저녁을 먹을 때이다. 조선의 선각자로 자임하는
남작은, 내외의 절(節)과 안방 사랑의 별은 폐하였지만 남존여비의
생각은 아직껏 확실히 지켜 왔다.
엘리자베트는, 먹기 싫은 밥을 두어 술 먹은 후에 자기 방으로
돌아와서 아직 어둡지도 않았는데 전등을 켜고 책궤상 머리에
가 앉았다. 아무 작용도 아니 하는 눈을 공연히 멀거니 뜨고,
책상을 오르간으로 삼고 다뉴브 곡을 뜯으면서, 그는 머리를
동작시키고 있었다. 웃음. S. 이환. 결혼. 신혼여행. 노후의 안락.
또는 거기는 조금도 상관없는 다른 공상이 속속이 그의 머리에
왕래하였다. 끝없이 나는 공상을 두 시간 동안이나 한 후에, 이제껏,
희미하니 아물아물 기어가는 것같이 보이던 벽의 흑점이 똑똑히 보이기
시작할 때에, 그는 자리를 펴고 자고 싶은 생각이 났다.
아까 저녁 먹을 때에 남작의,
“오늘 밤에는 회(會)가 있는 고로 밤 두시쯤 돌아오겠다.”
는 말을 들은 엘리자베트는,
별로 안심이 되어 자리를 펴고 전나체가 되어 드러누웠다.
몇 가지 공상이 또 머리에서 왕래하다가 그는 잠이 들었다.
한참 자다가, 열한시쯤, 자기를 흔드는 사람이 있는 고로
그는 눈을 번쩍 떴다. 전등 아래, 의관을 한 남작이 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엘리자베트는 갑자기 잠이 수천 리 밖에 퇴산(退散)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남작의 자기를 들여다보는 눈으로,
남작의 요구를 깨달았다. 하고 겨우 중얼거렸다.
“부인이 아시면?”
‘아차!’
그는 속으로 고함을 쳤다.
‘부인이 모르면 어찌한단 말인가?…… 모르면?……
이것이 허락의 의미가 아닐까? 그러면 너는 그것을 싫어하느냐?
물론 싫어하지. 무엇? 싫어해? 내 마음속에, 허락하려는 생각이
조금도 없냐 아…… 허락하면 어쩠냐? 그래도…….’
일순간에 그의 머리에 이와 같은 생각이 전광과 같이 지나갔다.
“조용히! 아까, 두시에야 돌아오겠다고 하였으니깐 모르겠지요.”
남작은 말했다.
이제야 엘리자베트는 아까 남작이 광고하듯이 지껄이던 소리를
해석하였다. 그러고, 두 번째 거절을 하여 보았다.
“부인이 계시면서두……?”
‘아차!’
그는 또 속으로 고함을 안 칠 수가 없었다.
‘부인이 없으면 어찌한단 말인가?……
이것은 허락의 의미가 아닐까……?’
남작은 대답 없이 엘리자베트를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왜 그리 보세요?”
그는 남작의 시선을 피하면서, 별한 웃음―---애걸하는 웃음―---
거러지의 웃음을 웃으면서 돌아누웠다.
‘아차!’
그는 세 번째 고함을 속으로 발하였다.
‘이것은 매춘부의 웃음, 매춘부의 행동이 아닐까……?’
몇 번 거절에 실패를 한 엘리자베트는 마지막에는 자기에게 대하여서도
정이 떨어지게 되었다. 그는 뉘게 대하여선지는 모르면서도
모르는 어떤 자에게 골이 나서,
몸을 꼬면서 좀 날카롭게, 그래도 작은 소리로 말했다.
“싫어요 싫어요.”
남작은 역시 대답이 없었다.
엘리자베트는, 갑자기 방 안이 어두워지는 것을 알았다.
남작이 불을 끈 것이다. 그 후에는 남작의 의복 벗는 소리만 바삭바삭
났다. 엘리자베트는 정신이 아득하여지고 말았다.
정신이 아득하여진 엘리자베트는, 한참 있다가 거기서 직수면상태로
들어서 푹 잠이 들었다가, 다섯시쯤, 동편 하늘이 좀 자홍색을 띠어
올 때에 무엇에 놀란 것같이 움쭉 하면서 눈을 떴다.
회색 새벽빛을 꿰어서, 먼트고메리회사제 벽지가 눈에 드는 동시에,
그의 머리에는 남작이 생각났다. 곁에 사람의 기척이 없는 고로
남작이 돌아갔을 줄은 확신하면서도, 만일 있었다는 하는 의심이
나는 고로, 그는 가만가만 머리를 그편으로 돌렸다.
거기는 남작이 베느라고 갖다 놓았던 책이 서너 권 두겨 있었다.
‘그럼 저편 쪽에 있지. 저편 쪽 벽에 꼭 붙어 서서,
날 놀래려고 준비하고 있지.’
엘리자베트는 흥미 절반, 진정 절반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갑자기
남작이 숨기 전에 발견하려고 머리를 돌이켰다. 거기는 차차 흰빛으로
변하여 오는 새벽빛에 비친 벽지의 모양만 보였다.
‘어느 틈에 또 다른 편으로 뛰었군!’
하면서 그는 남작을 잡느라고 이편 저편으로 머리를 휙휙 돌리다가,
‘일어나야 순순히 나올 터인가 원.’
하면서 벌떡 일어나 앉아서 의복을 입기 시작하였다.
속곳, 바지로서 버선까지 신는 동안에, 그의 머리에는 남작을 잡으려는
생각은 없어지고 엊저녁 기억이 차차 부활키 시작하였다.
‘내 속이 왜 그리 약하단 말인고? 정신이 아득하여질 이유가
어디 있어? 아무래도 그렇게 되겠으면 정신이나…… 아―
지금 남작은 무엇 하고 있노.’
그는 자기가 남작에 대하여서도 애정을 가지게 된 것을 깨달을 때에,
차라리 놀랐다. 마음속에서는 또 적막의 덩어리가 뭉쳐 나왔다.
그는 무한 울고 싶었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 아직 다섯시 십삼분이다.
‘울 시간이 넉넉하지.’
이 생각을 할 때에 그는 참지 못하고 꼬꾸라져서 흘쿡 느끼기
시작하였다.
‘남작은 아내가 있는 사람이다. 아내가 있는 사람에게……
내 전정(前程)은 어떠할까…….’
울음이 끝나기까지 한참 운 그는, 눈물이 자연히 멎은 후에
머리를 들었다. 아침 햇빛은 눈이 시도록 방 안을 들이쪼이고 있었다.
밝은 햇빛을 본 연고인지 실컷 운 연고인지, 엘리자베트는, 오랫동안
벼르던 원수를 갚은 것같이 별로 속이 시원한 고로,
일어서서 세수를 하러 갔다. 세수를 한 후에 그는, 거기서 잠깐
주저치 않을 수가 없었다. 밥을 먹으러 가나. 안 가나.
밥은 먹어야겠고. 거기는 남작이 있겠고…….
그러다가 그는, 필사적 용기를 내고 밥을 먹으러 갔다.
거기는 남작은 없었지만 그는 부인과 아이들에게도 할 수 있는 대로
낯을 안 보이게 하고 밥을 먹었다. 그런 후 자기 방에 와서
이부자리를 간지피고 책보를 싸가지고 학교로 향하였다.
정문 밖에 나선 그는, 또 한번 주저치 않을 수가 없었다.
이 길로 가나. 저 길로 가나. 이 길로 가면 이환이를 만나겠고.
저 길로 가면 대단히 멀고. 그의 마음속에는 쟁투가 일어났다.
자기에게 대하여 애정을 나타내지도 않는 이환의 앞을,
복수 겸으로 유유히 지나갈 때의 자기의 상쾌를 그는 상상하여 보았다.
이환이는 그 일을 모르겠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엘리자베트에게는
한 쾌락-―--만약 엘리자베트에게 복수 할 마음이 있다 하면―--- 에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환이를 사랑하였다. 문자 그대로
‘자기 몸과 동 정도로 그를 사랑’하였다.
이러한 엘리자베트는 그런 참혹한 일을 행 할 수가 없었다.
‘이 길로 갈까? 저 길로 갈까?’
그는 생각이 정키 전에 어느덧 먼 길―--- 안 만나게 되는 길―---
편으로 발을 옮겨 놓았다.
학교에서도 엘리자베트는 성가신 일일을 보내고
하교 후 곧 집으로 돌아왔다.
3
단조하고도 복잡한 엘리자베트의 생활은 여전히 연속하여 순환되고
있었다. 아침 깨어서는 학교에 가고. 하학 후에는 아이들과 마주 놀고.
자고-―--다만 전보다 변한 것은 평균 일 주 이 회의 남작의 방문을
받는 것이라. 대개는, 엘리자베트가 예기한 날 남작이 왔다.
남작이 오리라 생각한 날은, 엘리자베트는 열심으로 남작을 기다렸다.
그렇지만 그 방은 남작 부인의 방과 그리 멀지 않은 고로 남작이 와도
그리 말은 사 괴지 못하였다.
엘리자베트는 그것으로 남작이 와 있을 동안은 너무 갑갑하여 빨리
돌아가기를 기다렸다. 치만 일단 남작이 돌아가고 보면 엘리자베트는,
남작이 좀더 있지 않는 것을 원망하고 무한한 적막을 깨달았다.
만약 엘리자베트가 예기한 날 남작이 오지를 않으면 그는 어찌할 줄
모르게 속이 타고 질투를 하였다.
그렇지만, 이보다 더 큰 고통이 엘리자베트에게 있었다.
때때로 이환의 생각이 나는 것이다. 그런 때는,
‘자기도 나를 생각지 않는데, 내가 그러면 뭘 한가.’
‘내가 자기와 약혼을 했댔나.’
등으로 자기를 위로하여 보았지만, 대개는 ‘변해(辯解)’를
‘미안(未安)’이 쳐 이겼다. 그럴때는 문자 그대로
‘심장을 잘 들지 않는 칼로 베어 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그는 꼬꾸라져서 장시간의 울음으로 겨우 자기를
위로하곳 하였다. 그는 부인에게 대하여서도 미안을 감(感)하였다.
“남편을 가로앗았는데 왜 미안치를 않을까.”
그는 때때로 중얼거렸다.
그러는 새에도, 학교에는 열심으로 상학(上學)하였다.
학교에도 무한한 혐오의 정과 수치의 염이 나지마는, 집에 있으면
더 큰 고통을 받는 그는 일종의 위안을 얻느라고 상학하였다.
그 동안 시절은 바뀌었다. 낮잠 잘 오고 맥이 나는 봄시절은,
비 많이 오는 첫여름으로 변하였다.
4
엘리자베트와 남작의 첫 관계가 있은 후, 다섯 번 일요일이 찾아왔다.
오후 소아주일학교(小兒主日學校) 교사인 엘리자베트는 소아 교수와
예배를 필한 후에 아이들 틈을 꿰면서 예배당을 나섰다.
벌겋고 누런 장마때 저녁해는 절벅절벅하는 길을 내리쪼이고 있었다.
북편 하늘에는 비를 준비하는 검은 구름이 걸려 있었다.
엘리자베트가 예배당 정문을 나설 때에,
“너 이즈음 학교에 왜 다른 길로 다니니?”
하는 혜숙의 소리가 그의 뒤에서 났다.
엘리자베트는 돌아보지도 않고 속으로 다만,
‘다른 길로 학교엘 다녀? 다른 길로 학교엘 다녀?’
하면서 집으로 향하였다. 남작 집 정문을 들어서려 하다가
그는 우뚝 섰다. 혜숙의 말이 이제야 겨우 해석되었다.
‘응 다른 길로 학교엘 다닌다니
내가 다른 길로 학교에를 다닌다는 뜻이로군.’
그는 별한 웃음을 웃고 자기 방으로 향하였다.
자기 방에 들어서서 책보를 내어던지고 앉으려 하다가 그는 또 한번
꼿꼿이 섰다. 사지가 꼿꼿하여지는 것을 깨달았다.
십여 초 동안 이와 같이 꼿꼿이 섰던 그는 그 자리에 꼬꾸라졌다.
그의 가슴에서는 무슨 덩어리가 뭉쳐서 나오다가,
목에서 잠깐 회전하다가 그 덩어리가 코와 입으로 폭발하곳 한다.
그럴 때마다 눈에서는 눈물이 푹푹 쏟아지고 가슴은 싹싹 베어내는
것같이 아팠다. 그에게는, 두 달 동안 몸이 안 난 것이 생각이 났다.
잉태! 엘리자베트에게 대하여서는
이것이 ‘죽으라’는 명령보다도 혹독한 것이다.
그는 잉태가 무섭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미래-―-- 희미하고
껌껌한 그의 ‘생’ 가운데, 다만 한 줄기의 반짝반짝하게 보이는
가는 (細한) 광선―---이러한 미래를 향하고 미끄러져서 나아가던
그는 잉태로 인하여 그 미래를 잃어버렸다. 기(其) 미래는 없어졌다.
엘리자베트의 울음은 이것을 깨달은 때에 나오는 진정의 울음이다.
심장 복판 가운데서 나오는 참눈물이다.
이렇게 한참 운 그는 눈물 주머니가 다 마른 후에 겨우 머리를 들고
전등을 켰다. 눈이 붉어지고 눈두덩이 부은 것을 스스로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는 자기 배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보통보다
곱 이상이나 크게 보였다.
‘첫 배는 그리 부르지 않는다는데.
게다가 달 반밖에는 안 되었는데.’
하고 그는 다시 보았다. 조금도 부르지를 않았다.
‘그래도 안 부를 수가 있나?’
하고 그는 또다시 보았다. 보통보다 삼 곱이나 크게 보였다.
쾅쾅 하는 아이의 발소리가 이럴 때에 엘리자베트의 방으로 가까이
온다. 엘리자베트는 빨리 어두운 편으로 향하였다. 문이 열리며
여덟 살 된 남작의 아들이 나타나서, 엘리자베트에게 저녁을
재촉하였다. 저녁을 먹으러 가기가 싫은 엘리자베트는 안 먹겠다고
대답할 수 밖에는 없었다.
아이가 돌아간 뒤에 엘리자베트는 중얼거렸다.
‘꼭 좋은 때 울음을 멈추었군. 좀더 울었더면 망신할 뻔했다.’
조금 후에 부인은 친절하게 죽을 쑤어다가 그에게 주었다.
죽을 먹고 죽그릇을 돌려 보낸후에, 아까 울음으로 얼마 속이
시원하여지고 원기까지 좀 회복한 엘리자베트는 남작과이환 두 사람을
비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마음속에 두 사람을 그린 후에
어느 편이 자기에게 더 가깝고 더 사랑스러운고 생각하여 보았다.
사랑스럽기는 이환이가 더 사랑스럽지만, 가깝기는 아무래도 남작이
더 가까운 것같이 생각된다.
이와 같은 결단은 그의 구하는 바를 채우지를 못하였다.
그는, 사랑스러운 편이 더 가깝고 가까운 편이 더 사랑스럽기를
원하였다. 그렇지만 사랑과 가까움은 평행으로 나가서 아무데까지
가도 합하지를 않았다. 그는 평행으로 나가는 사랑스러움과 가까움이
어디까지나 나가는가를 알려고, 마음속에 둘을 그려 놓고 그 둘을
차차 연장시키면서, 눈알을 구을려서 그것들을 따라가기 시작하였다.
둘은 종시 합하지 않았다. 끝까지 평행으로 나갔다.
사랑스러움과 가까움은, 끝까지 분립(分立)하여 있었다.
여기 실패한 엘리자베트는 다시 다른 생각으로 그것을 보충하리라
생각하였다. 사랑스러운 편이 자기게 더 정다울까 가까운 편이 더
정다울까, 그는 생각하여 보았다. 어떻든, 둘 가운데 하나는
정다워야만 된다고, 그는 조건을 붙였다. 그렇지만 엘리자베트는
여기서도 만족한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아까 생각과 이번 생각이 혼돈되어 나온 결론은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랑스러운 편이, 물론 자기게 더 가깝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다운 편은 어느 편인고?’
그는 생각하여 보았지만,
머리가 어지러운 것이 완전한 해결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엘리자베트는 속이 답답하여졌다.
자기에게는 ‘사랑스러움’과 ‘가까움’이
온전히 분립하여 있는 것을 안 엘리자베트는, 어느편이 자기게
더 정다울지를 알지 못하게 되었다. 둘이 동 정도로 정답다 하는 것은,
엘리자베트 자기가 생각하여 보아도 있지 못할 일이다.
남작과 이환 새에는 어떤 차이가 있었다.
두 번째 생각도 실패로 돌아갔다.
두 번이나 실패를 한 엘리자베트는, 이번은 직접 당인(當人)으로
어느 편이 자기게 더 정답게 생각되는가 자문하여 보았다.
이환이가 더 정답다 생각할 때에도 마음에 얼마의 가책이 있고,
그러니 남작이 더 정답다 생각할 때에는 더 큰 아픔이 마음에서
일어난다. 그는 억지로 생각의 끝을 또 다른 데로 옮겼다.
엘리자베트는 맨 처음 생각을 다시 하여 보았다.
이번도, 사랑스러움은 이환의 편으로 갔다.
‘이환이가 더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운 편이 자기게 더 가까우니까,
이환이가 자기게 물론 더 가깝다. 따라서,
정다움도 이환의 편으로 간다.’
그는 억지로 이렇게 해결하였다.
이렇게 해결은 하였지만, 또 한 의문이 있었다.
‘그러면, 가깝던 남작은 어찌 되는가.’
그는 생각하여 보았다.
맨 첫번과 같이 역시 남작은 자기게는 더 친밀하게 생각되었다.
그럼 이환이는……?
이환에게 대한 미안이 마음속에 떠올라오기 시작하였다. 그는 속이
타서 팔을 꼬면서 허리를 젖혔다. 그때에 벽에 걸린 캘린더가 그의
시선과 마주쳤다. 캘린더는 다른 사건을 엘리자베트의 머리에 생각나게
하였다. 이 절박한 새 사건은 이환의 생각을 머리에서 내어쫓기에
넉넉하였다. 오늘 밤에는 남작이 오리라 하는 생각이다.
이 생각이 엘리자베트에게 잉태를 생각나게 하였다.
남작이 오면 모든 일―---잉태와 거기 대한 처치-―--을 다 말하리라
엘리자베트는 생각하였다.
그리고, 남작에게 할 말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말은 짧지마는, 이 말을 남작에게 하는 것은 엘리자베트에게
큰 부끄러움에 다름없었다.
그는 자기에게 부끄럽지 않고 남작이 알아들어야 된다는 조건 아래서
할 말을 복안하여 보았다. 한 번 지어서 검열한 후 교정을 가하고
두 번 하고 세 번 네 번 하여 보았지만 자기 뜻대로 되지를 않았다.
이렇게 한참 생각할 때에 문이 열리며 남작이 들어왔다.
엘리자베트의 복안은 남작을 보는 동시에 쪽쪽이 헤어지고 말았다.
그는 다만, 남작에게 매어달려 통쾌히 울고, 남작이 아프도록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
남작의 ‘아이고’ 소리 ‘이 야단났구먼’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는 이 생각을 억제하느라고 손으로 ‘해변의 곡’을 뜯기
시작하였다. 둘은 전과 같이 서로 마주 흘겨만 보고 있었다.
엘리자베트에게는 싸움이 일어났다.
‘말할까말까. 할까. 말까. 어찌할꼬.’
이러다가 갑자기 무의식히,
“선생님.”
하고 남작을 찾은 후에 자연히 머리가 수그러지는 것을 깨달았다.
남작은 찾았는데 그 뒷말을 어찌할꼬. 이것이 엘리자베트의 마음에
일어난 제일 큰 문제이다. ‘해변의 곡’을 뜯던 손도 어느 틈에
멎었다. 엘리자베트는 자기가 어디 있는지도 똑똑히 의식지
못하리만큼 마음이 뒤숭숭하였다. 낯도 훌꾼훌꾼 단다.
“네?”
남작은 대답하였다.
남작이 대답한 것을 엘리자베트는 속으로 원망하였다.
남작이 엘리자베트 자기가 부른 소리를 못 들었으면 좋겠다 하는
희망을 엘리자베트가 품는 동시에 남작은 엘리자베트의 부름에 대답을
한 것이다. 엘리자베트는 나가지도 못하고 물러서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자기가 부르고 남작이 대답을 하였으니 설명을 하여야겠고
그러니 그 말을 어찌 하노?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울기 시작하였다.
‘이 울음에서 얼마의 효과가 나타나리라.’
엘리자베트는 울면서 생각하였다.
“왜 그러오.”
남작은 놀란 소리로 물었다.
“아―아 어찌할까요?”
“무엇을?”
엘리자베트는 대답 대신으로 연속하여 울었다.
한참이나 혼자 울다가 그는 입술을 꽉 물었다.
아까 대답을 못 한 자기를 책망하였다.
남작이 ‘왜 그러는가’ 물을 때가 대답하기는 절호의 기회인 것을,
그 기회를 비게 지나 보낸 엘리자베트는 자기를 민하다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그런 기회를 기다려 보았지만,
남작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좀더 심히 울면 남작이 무슨 말을 하겠지’
생각하고, 엘리자베트는 좀더 빨리 어깨를 젓기 시작하였다.
“아 왜 그러오.”
남작은 이것을 보고 물었다.
엘리자베트는 대답을 또 못 하였다.
‘무엇이라고 대답할꼬’ 생각하는 동안에 기회는 지나갔다.
이제는 대답을 못 하겠고 아까는 대답을 못 하였으니 다시 기회를
기다려 보자 엘리자베트는 생각하고,
기회를 다시 기다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니 이번 물을 때에는 무엇이라 대답할까?’
엘리자베트는 울면서 생각하여 보았다.
이때에 남작의 세 번째 물음이 이르렀다.
“아 왜 그런단 말이오?”
“잉태.”
대답을 한 후에 엘리자베트는 자기의 용기에도 크게 놀랐다.
이 말이 이렇게 쉽게 평탄하게 나올 것이면, 아까는 왜 안 나왔는고
하는 생각이 엘리자베트의 머리에 지나갔다.
“잉태!?”
남작은 놀란 목소리로 엘리자베트의 말을 다시 하였다.
제일 어려운 말-―--잉태란 말을 하여 넘기고, 남작의 놀란 소리까지
들은 엘리자베트는, 갑자기 용기가 몇 배가 많아지는 것을 깨달았다.
그 뒷말은 술술 잘 나왔다.
“병원에-―-- 가서―--- 떨어쳤으면…… 어…….”
남작은 대답이 없었다. 남작이 대답을 안 하는 것을 본 엘리자베트는
마음속에 갑자기 한 무서움이 떠올라왔다.
난 모른다 하고 돌아서지나 않을 터인가? 이것이 엘리자베트에게는
제일 무서움에 다름없었다.
훌쩍훌쩍 소리가 더 빨리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본 남작은 성가신 듯이 물었다.
“원 어찌하란 말이요? 그리 울면.”
“어떻게든…… 처치…….”
엘리자베트는 겨우 중얼거렸다.
남작의 성낸 말을 들은 때는 엘리자베트의 용기는 다 도망하고 말았다.
“처치라니, 어떤?”
“글쎄…… 병원…….”
“벼엉원?…… 응!…… 양반이 그런…….”
엘리자베트는 ‘그러리라’ 생각하였다.
‘그래도 남작이라고 존경까지 받는 사람이 낙태 일로 병원이라니.’
그는 갑자기 설움이 더 나왔다. 가는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본 남작은 좀 불쌍하게 생각났던지 정답게 말하였다.
“우니 할 수 있소? 자 어떻게 하잔 말이오?”
이 말을 들은 엘리자베트는 일변 기쁘고도 일변은 더 섧고
억지도 쓰고 싶었다. 그는 날카롭게 말했다.
“모르겠어요 몰라요. 전 아무래도 상것이니깐.”
“그러지 말구. 어쩌잔 말이오?”
“몰라요 몰라요. 저 같은 것은 사람이 아니니깐.”
“조용히! 저 방에서 듣겠소.”
“들어두 몰라요.”
엘리자베트는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하였다.
“에―익!”
하고 남작은 벌떡 일어섰다.
엘리자베트도 우덕덕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들었다.
그는 정신이 없어졌다. 자기 뇌를 누가 빼어 간 것같이 마음속이
텡텡 비게 되면서 퉁퉁거리며 걸어나가는 남작의 뒷모양을 눈이
멀거니 보고 있었다.
남작이 나가고 문을 닫는 소리가 엘리자베트의 귀에 들어올 때에,
그의 머리에는, 한 생각이 번갯불과 같이 번쩍 지나갔다.
한참이나 멀거니 그 생각을 하고 있다가 또 엎디며 울기 시작하였다.
아까 실컷 운 그는 이번에는 눈물은 안 나왔지만, 가슴에서, 배에서,
머리에서 나오는 이 참울음은 눈물을 대신키에 넉넉하였다.
그가 아까 혜숙의 말의 의미와 나온 곳을
이제야 겨우 온전히 깨달았다.
‘내가 다른 길로 다니는 것을 혜숙이가 어찌 알까? 어찌 알까?
혜숙이는 이것을 알 수가 없다. 이환! 그가 알고 이것을 S에게
말하였다. S는 이것을 혜숙에게 말하였다. 혜숙은 이것을 내게
물었다. 그렇다! 이렇게밖에는 해석할 수가 없다. 물론 그렇지!
그러면 그도 내게 주의를 한 거지? 이 말을 S에게까지 한 것을
보면 그도-―-- 내게…… 그도-―-- 내게…… 그도…… 남작.
남작은 내 말을 듣고 도망하였지. 아니 도망시켰지.
아니 도망했지. 남작은…… 남작의…… 이환 씨. 전에 본 S의 웃음.
응. 그 전날 그는 S에게 고백하였다. 그것을 고것이, 고것들이.
고, 고, 고것들이…… 어찌 되나. 모두 어찌 되나. 나와 남작,
나와 이환 씨. 이환 씨와 S. S와 남작. S. 혜숙이. 남작과 이환 씨.
모두 어찌 되나?’
그의 차차 혼돈되어 가는 머리에도 한 가지 생각은 꼭 들어붙어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는 이환이를 사랑하였다. 이환이도 그를
사랑하였다. (엘리자베트는 이것을 의심치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서로 사랑을 고백할 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것으로 인하여, 그들은, 각각 자기 사랑은 짝사랑〔片戀〕이라
생각하였다. 그것을 짝사랑이라 생각한 엘리자베트는 그렇게 쉽게
몸을 남작에게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사랑―---거반 성립되어
가던 그의 사랑―---신성한 동애(童愛)―---귀한 첫사랑은 파괴되었다.
육(肉)으로 인하여 사랑은 파멸되었다. 사랑치 않던 사람으로 인하여
참애인을 잃었다. 엘리자베트의 울음에는 당연한 이유가 있었다.
‘모, 모, 몸으로 인하여…… 참사랑……을…… 아― 이환 씨…… S와
혜숙이. 고것들도 심하지. 우우 왜 당자에겐…… 그 이……
그―그 이야기를 안 해…… 남작이. 아― 잉태.’
일단 멎어 가던 그의 울음이 이 생각이 머리에 지나갈 때에 또다시
폭발하였다. 눈물도 조금씩 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한참 운 그는, 두 번째 울음이 멎어 갈 때에 맥이 나면서
그 자리에 엎딘 채로 잠이 들었다.
5
하루 종일 벼르기만 하고 올 듯 올 듯하면서도 오지 않던 비가
이튿날 새벽부터는 종시 내리붓기 시작하였다.
서울 특유의, 독으로 내리붓는 것 같은 비는, 이삼 정(丁) 앞이
잘 보이지 않도록 좔좔 소리를 내며 쏟아진다.
서울 장안은 비로 덮였다. 비로 싸였다. 비로 찼다.
그 비 가운데서도 R학당에서는 모든 과목을 다 한 후에 오후 두시에
하학하였다. 엘리자베트는 책보를 싸가지고 학교를 나섰다.
그가 혜숙의 곁을 지나갈 때에 혜숙이가 찾았다.
“얘 엘리자베트야!”
“응?”
대답하고 엘리자베트는 마음이 뜨끔하였다.
‘혜숙이는 모든 일을 다 알리라.’
그는 이와 같은 허황한 생각을 하였다.
“너 이즈음 왜 우리집에 안 오니?”
“분주하여서…….”
엘리자베트는 거짓말을 하면서도 안심을 하였다.
‘혜숙이는 모른다.’
“무엇이 분주해?”
혜숙이가 물었다.
“그저 이 일두 분주하구 저 일두 분주하구…… 분주 천지루다.”
엘리자베트는 이와 같은 거짓 대답을 하면서도 그의 마음속에는
한 바람〔希望〕이 있었다. 그는 달반이나 못 간 혜숙의 집에 가보고
싶었다. 혜숙이가 억지로 오라면 마지못하여 가는 체하고 끄을려 가고
싶었다. 혜숙이는 엘리자베트의 바람을 이루어 주지를 않았다.
아무 말도 안 하였다.
엘리자베트는 혜숙의 주의를 끄을려고 혼자말 비슷이 중얼거렸다.
“너무 분주해서…….”
“분주할 일은 없겠구만…….”
혜숙이는 이 말만 하고 자기 갈 길로 향하였다.
엘리자베트는 혜숙의 행동을 원망하면서 마지못하여 집으로 향하였다.
엘리자베트의 자존심은 꺾어졌다. 혜숙이가 엘리자베트 자기를 꼭
혜숙의 집에 끌고 가야만 바른 일이라 생각한 엘리자베트의
미릿생각〔豫想〕은 헛데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혜숙을 원망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엘리자베트는 생각하였다.
‘내가 혜숙이를 위해서 났나?’
엘리자베트는 이렇게 자기를 위로하여 보았지만,
부끄러운 일이든 무엇이든 원망은 원망대로 있었다. 이러다가,
‘내가 혜숙이로 인하여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는가? 그것을…….’
할 때에 엘리자베트의 원망은 다른 의미로 바뀌었다.
그는 혜숙의 집에 못 간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는 가운데도
가고 싶은 생각이 온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가고 싶은 생각’과 ‘갔다는 안 된다는 생각’이
다투기 시작하였다. 본능적으로 길을 골라 짚으면서, 비가 오는 편으로
우산을 대고 마음속의 싸움을 유지하여 가지고 집에 까지 왔다.
그는 우산을 놓고 비를 떤 다음에 자기 방에 들어왔다.
멀끔히 치워 놓은 자기 방은 역시 전과 같이 엘리자베트에게 큰 적막을
주었다. 방이 이렇게 멀끔할 때마다 짐짓 여기저기 널어 놓던
엘리자베트도 오늘은 혜숙의 집에 갈까말까 하는 번민으로 인하여
그렇게 할 생각도 없었다. 그는 책상머리에 가 앉았다.
책상 위에는 어떤 낯선 종이가 한 장 엘리자베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자베트는 빨리 종이를 들었다. 가슴이 뛰놀기 시작한다…….
‘원 무엇인고……?’
그는 종이를 들고 한참 주저하다가 눈을 종이편으로 빨리 떨어쳤다.
‘오후 세시 S병원으로.’
남작의 글씨로다 엘리자베트는 생각하였다. 남작에 대한 애경(愛敬)의
생각이 마음속에 떠올라오기 시작하였다. 이 글 한 줄은
엘리자베트로서 남작에 대한 원망과 혜숙의 집에 갈까말까의 번민을
다 지워 버리기에 넉넉하였다.
‘역시 도망시킨 것이로군.’
그는 어젯밤 일을 생각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젯밤에 남작에게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청하기는 하였지만 갑자기 남작 편에서 꺾어져서
오라 할 때에는 엘리자베트는 못 가겠다 생각하였다.
이 ‘부정’은 엘리자베트로서 무의식히 일어서서 병원으로 향하게
하였다. 그는 ‘못 가겠다 못 가겠다’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문 밖에
나서서 내리붓는 비를 겨우 우산으로 막으면서 아랫동이 모두
흙투성이가 되어서 전차 멎는 곳(停留場)까지 갔다.
그는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똑똑히 알지 못하였다. 꿈과 같이 걸었다.
엘리자베트는 멎는 곳에서 잠깐 기다려서, 오는 전차를 곧 잡아탔다.
비가 너무 와서 밖에 나가는 사람이 적었던지 전차 안은 비교적 승객이
없었다. 이 승객들은 엘리자베트가 올라 탈 때에 일제히 머리를
새 나그네 편으로 향하였다. 엘리자베트는 빈자리를 찾아 앉아서
차 안을 둘러보았다. 그는 자기 편으로 향한 모든 눈에서,
노파에게서는 미움, 젊은 여자에게서는 시기, 남자에게서는 애모를
보았다. 이 모든 눈은 엘리자베트에게 한 쾌감을 주었다.
그는 노파의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하였다. 젋은 여자의 시기의
눈은 엘리자베트에게 이김의 상쾌를 주었다.
남자들의 애모의 눈이 자기를 볼 때에는 엘리자베트는 약한전류가
염통을 지나가는 것같이 묘한 맛이 나는 것이 어째 하늘로라도
뛰어올라가고 싶었다. 그는 갑자기 배가 생각난 고로 할 수 있는 대로
배를 작게 보이려고 움츠러뜨렸다.
차장이가 와서 엘리자베트에게 돈을 받은 후에 뚱 소리를 내고 도로
갔다. 남자들의 시선은 가끔 엘리자베트에게로 날아온다.
그들은 몰래 보느라고 곁눈질하는 것도 엘리자베트는 다 알고 있었다.
남자들이 자기를 볼 때마다 엘리자베트는 자기도 그편을 보아 주고
싶었다. 치만 종시 실행은 못 하였다.
이럴 동안 전차는 S병원 앞에 멎었다.
엘리자베트는 섭섭한 생각을 품고 전차를 내렸다.
어떤 시선이 자기를 따라온다 그는 헤아렸다. 비는 보스럭비로
변하였다. 수레에서 내린 그는 마음의 무거워지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병원에는 차마 못 들어갈 것같이
생각되었다. 집 편으로 가는 전차는 없는가 하고 그는 전차 선로를
쭉 보았다. 그의 보이는 범위 안에는 전차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병원으로 들어가서 기다리는 방(待合室)으로 갔다.
고지기(受付)한테 가서 주소 성명 연세 들을 기입시킨 후에 방을 한번
둘러다볼 때에 엘리자베트의 눈에는 한편 구석에 박혀 있는 남작이
보였다. 엘리자베트는 다른 곳에서 고향사람이나 만난 것같이 별로
정다워 보이는 고로 곧 남작의 곁으로 갔다.
그렇지만 둘은 역시 말은 사괴지 아니하였다.
엘리자베트는 눈이 멀거니 벽에 붙어 있는 파리떼를 보고 있었다.
몇 사람의 순번이 지나간 뒤에 사환아이가 나와서,
“강 엘리자베트 씨요.”
할 때에 엘리자베트는 우덕덕 일어섰다.
가슴이 뚝뚝 하는 소리를 내었다.
‘어찌하노.’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무의식히 사환아이를 따라서 진찰실로
들어갔다. 남작도 그 뒤를 따랐다.
석탄산과 알코올 내음새에 낯을 찡그리고 엘리자베트는
교자에 걸어앉았다. 의사는 무슨 약병을 장난하면서
머리를 숙인 채로 물었다.
“어디가 아프시오?”
엘리자베트는 대답을 못 하였다. 제일 어찌 대답할지를 몰랐고,
설혹 대답할 말을 알았대도 대답할 용기가 없었고, 용기가 있다
하더라도 부끄러움이 ‘대답’을 허락지 않을 터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 ”
남작이 엘리자베트의 대신으로 대답하려다가 이 말만 하고 뚝 그쳤다.
의사는 대답을 요구치 않는 듯이 약병을 놓고 청진기를 들었다.
엘리자베트는 갑자기 부끄러움도 의식지를 못하리만큼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하였다. 그의 눈은 보지를 못하였다. 그의 귀는
듣지를 못하였다. 그의 설렁거리는 마음은 다만
‘어찌할꼬 어찌할꼬’ 하는,
엘리자베트 자기도 똑똑히 의미를 알지 못할 구(句)만 번갈아 하고
있었다. 의사는 엘리자베트에게로 와서 저고리 자락을 열고 청진기를
거기 대었다. 의사의 손이 와 닿을 때에 엘리자베트는,
무슨 벌레를 모르고 쥐었다가 갑자기 그것을 안 때와 같이 몸을
옴쭉하였다. 그러면서도 엘리자베트는 의사의 손에서 얼마의
온미(溫味)를 깨달았다. 이성의 손이 살에 와 닿는 것은,
엘리자베트와 같은 여성에게 대하여서는 한 쾌락에 다름없었다.
엘리자베트가 이 쾌미를 재미있게 누리고 있을 때에 의사는 진찰을
끝내고 의미 있는듯이 머리를 끄덕거리며 남작에게로 향하였다.
남작은 의사에게 눈짓을 하였다. 어렴풋하게나마 이 두 사람의 짓을
본 엘리자베트는 이제껏 연속하고 있던
‘어찌할꼬’ 뒤로
무한 큰 부끄러움이 떠올라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는 가운데도 그는
희미하니 한 가지 일을 생각하였다.
‘내가 대합실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뒷일은 남작이 다 맡겠지.’
그는 일어서서 기다리는 방으로 나왔다.
그 방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은 일제히 엘리자베트의 편으로 향하였다.
모두 내 일을 아누나 엘리자베트는 생각하였다. 아까 전차에서
자기게로 향한 눈 가운데서 얻은 그 쾌미는, 구하려도 구할 수가
없었다. 이 모든 눈 가운데서 큰 고통과 부끄러움만 받은 그는
한편 구석에 구겨앉아서 치마 앞자락을 들여다보기 시작하였다.
거기는 불에 타진 조그마한 구멍 하나가 엘리자베트의 눈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 구멍이 공연히 미워서 손으로 빡빡
비비다가 갑자기 별한 생각이 나는 고로 그것을 뚝 그쳤다.
‘이 세상이 모두 나를 학대할 때에는 나는 이 구멍 안에 숨겠다.’
그는 생각하였다. 이럴 때에 그 구멍 안에는 어떤 그림자〔幻影〕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첫번에는 흐릿하던 것이, 차차 똑똑히까지 보이게 되었다.
때는 사 년 전 ‘춘삼월 호시절’, 곳은 우이동. 피고 우거지고
퍼진 꽃 사이를 벗들과 손목을 마주잡고 웃으며 즐기며 또는
작은 소리로 곡조를 맞추어서 노래를 부르며 희희낙락 다니던
자기 추억이 그림자로 변하여 그 구멍 속에 나타났다.
자기 일행이 그 구멍 범위 밖으로 나가려 할 때에는 활동사진과 같이
번쩍 한 후 일행은 도로 중앙에 와 서곳 한다.
엘리자베트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의 엘리자베트와 지금의 엘리자베트 사이에는 해와 흙의 다름이
있다. 그때에는 순전한 처녀이고 열렬한 분홍빛 탄미자(歎美者)이던
그가 지금은……? 싫든지 좋든지 죽음의 갈흑색의 ‘삶’ 안에서
생활치 않을 수 없는 그로 변하였다.
‘때’도 달라졌다. 십 년 동안 평화로 지낸 지구는,
오스트리아 황자(皇子)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러시아가 동원을 한다,
도이치가 싸움을 하련다, 잉글리시가 어떻다, 프랑스가 어떻다,
매일 이런 이야기가 신문에 가뜩가뜩 차게 되었다.
엘리자베트의 주위도 달라졌다. 그의 모든 벗은 다 쪽쪽이 헤어졌다.
R은 동경서 미술공부를 한다. 또 다른 R은 하와이로 시집을 갔다.
T는 여의가 되었다. 그 밖에 아직 공부하는 사람도 몇이 있기는
하지만은 대개는 주부와 교사가 되었다.
주부 된 벗 가운데는 벌써 두아이의 어머니 된 사람까지 있다.
그들 가운데 한둘밖에는, 지금은 엘리자베트를 만나도 서로
모른 체하고 말도 안 하고 심지어 슬슬 피하게까지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혜숙이--―-그는 엘리자베트의 어렸을 때부터의 벗이다.
둘은 같은 소학에서 졸업하고 같이 R학당에 입학하였다가
엘리자베트가 부상(父喪)에 연속하여 모상(母喪)으로 일년 학교를
쉬는 동안에 혜숙이도 연담(緣談)으로 일년을 쉬게 되고,
엘리자베트가 도로 상학게 될 때에 혜숙이도 파혼으로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혜숙이는 엘리자베트에게는 유일의 벗이다. 불에 타진
구멍 속에 나타난 그림자 가운데서도 엘리자베트는 혜숙이와 제일
가까이 서서 걸었다.
추억의 눈물이 엘리자베트의 치마 앞자락에 한 방울 뚝 떨어졌다.
눈물로써, 슬프고 섧고 원통하고도 사랑스럽고 즐겁고 회포 많은 그
그림자가 가리운 고로, 엘리자베트는 눈물을 씻고 다시 그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그 구멍에는, 참예술적 활인화(活人畵), 정조(情調)로
찬 그림자는 없어지고 그 대신으로 갈포바지가 어렴풋이 보인다.
엘리자베트는 소름이 쭉 끼쳤다. 자기가 지금 어디를 무엇 하러 와
있는지 그는 생각났다. 엘리자베트는 머리를 들고 방을 둘러보았다.
어떤 목에 붕대를 한 남자와 어떤 아이를 업고 몸을 찌긋찌긋하던
여자가 자기를 보다가 자기 시선과 마주친 고로 머리를 빨리 돌리는
것밖에는 엘리자베트의 주의를 받은 자도 없고 엘리자베트에게
주의하는 사람도 없다. 그는 갑갑증이 일어났다.
너무 갑갑한 고로 자기 손금을 보기 시작하였다. 손금은 그리 좋지
못하였다. 자식금도 없고 명금도 짧고 부부금도 나쁘고
복(福)금 대신으로 궁(窮)금이 위로 빠져 있었다.
이 나쁜 손금도 엘리자베트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못하였다.
그의 심리는 복잡하였다. 텡텡 비었다. 그는 슬퍼하여야 할지
기뻐하여야 할지 알지 못하였다. 그 가운데는, 울고 싶은 생각도 있고
웃고 싶은 생각도 있고 뛰놀고 싶은 생각도 있고
죽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이 복잡한 심리는 엘리자베트로서 아무 편으로도 치우치지 않게
마음이 텡텡 빈 것같이 되게 하였다.
이제 자기에게는 절대로 필요한 약이 생긴다 할 때에 그는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기의 경우를 생각할 때에 그는 슬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혜숙이와 S를 생각할 때에…….
엘리자베트가 손금과 추억 및 미릿생각들을 복잡히 하고 있을 때에
남작이 와서 그에게 약을 주고 빨리 병원을 나가고 말았다.
약을 받은 뒤에 엘리자베트는 마음이 두근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약을 병째로 씹어 먹고 싶도록 애착의 생각이 나는 또 한편에는
약에게 이 위에 더없는 저주를 하고 태평양 복판가운데 가라앉히고
싶었다. 그러는 가운데도 그에게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는 일어서서 몰래 가만히 기지개를 한 후에
허둥허둥 병원을 나서서 전차로 집에까지 왔다.
6
저녁 먹은 뒤에 처음으로 약을 마실 때에 엘리자베트에게는
한 바라는 바가 있었다. 그의 조급한 성격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낳은
바람은 다른 것이 아니다. 약의 효험이 즉각으로 나타났으면…… 하는
것이다. 이 바람은 벌써 차차 엘리자베트의 머리에 공상으로서
실현된다. 그는 생각하여 보았다.
이제 남작 부인이 죽는다. 그때에는 엘리자베트는 남작의 정실이 된다.
‘조선 제일의 미인, 사교계의 꽃이 이 나로구나.’
엘리자베트는 눈을 번뜩거리며 생각한다.
이환이는 어떤 간사한 여성과 혼인한다. 이환의 아내는 이환의 재산을
모두 없이한 후에 마지막에는 자기까지 도망하고 만다.
그리고 이환이는 거러지가 된다. 어떤 날 엘리자베트 자기가 자동차를
타고 어디 갈 때에 어떤 거러지가 자동차에 친다.
들고 보니 이환이다.
‘그렇게 되면 어찌 되나.’
엘리자베트는 스스로 물어 보고 깜짝 놀랐다. 자기의 사랑의 전부가
어느덧 남작에게로 옮겨 왔다.
그는 자기의 비열을 책망하는 동시에 아까 그런 공상에 대한
부끄러움과 증오 놀람 절망들의 생각이 마음에 떠올랐다.
그 가운데도 가느나마 그에게는 희망이 있다. 앞에 때가 있다.
약의 효험은 얼마 후에야 나타난다더라 엘리자베트는 생각하고
좔좔 오는 장마비 소리에 귀를 귀울이고, 자기 바람의 나타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바람은 종시 그 밤은 나타나지를 않았다.
이튿날, 하기 시험 준비 날, 엘리자베트는 시험 준비도 안 하고
하루 종일 누워서 약의 효험을 기다리고 있었다.
약의 효험은 그날도 안 나타났다.
사흘째 되는 날도 효험은 없었다. 시험하러 가지도 않았다.
이렇게 대엿새 지난 후에 엘리자베트는 자기 건강상의 변화를
발견하였다. 모든 복잡하고 성가신 일로 말미암아 음식도 잘 안 먹히고
잠도 잘 안 오던 그가, 지금은 잠도 잘 오고 입맛도 나게 된 것을
깨달았다. 그때야 그는 그것이 낙태제(落胎劑)가 아니고 건강제인
것을 헤아려 깨달았다. 그렇지만 약은 없어지도록 다 먹었다.
마지막 번 약을 먹은 뒤에 전등을 켜고 엘리자베트는 생각하여 보았다.
병원 사건 이후로 남작은 한 번도 저를 찾아오지 않았다.
엘리자베트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였다.
그리 근심도 아니 났다. 시기도 아니 하였다.
다만 오지 않아야만 된다, 그는 생각하였다.
왜 오지 않아야만 되는가 자문할 때에 그에게 거기 응할 만한 대답은
없었다. 이
‘오지 않는다’는
구는 엘리자베트로서 자기가 근 두 달이나 혜숙의 집에 안 갔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이러다는 이환 씨 생각이 나겠다.’
이와 같은 생각이 나는 고로 그는 곧 생각의 끝을 다른 데로 옮겼다.
이와 같이 이 생각에서 저 생각, 또 다른 생각 왔다갔다할 때 문이
열리며 남작 부인이 낯에는
‘어찌할꼬’
하는 근심을 띠고 들어왔다.
“어찌 좀 나으세요?”
“네, 좀 나은 것 같아요.”
대답하고 엘리자베트는 자기가 무슨 병이나 앓던 것같이 알고 있는
부인이 불쌍하게 생각났다.
부인은 말을 할 듯 할 듯하면서 한참이나 우물거리다가,
“그런데요.”
하고 첫말을 내었다.
“네.”
엘리자베트는 본능적으로 대답하였다.
부인의 낯에는 ‘말할까말까’ 하는 표정이 똑똑히 나타나 있었다.
그러다가 입을 또 연다.
“아까 복손이(남작의 아들 이름) 어른이 들어와 말하는데요…….”
엘리자베트는 마음이 뜨끔하였다. 부인은 말을 연속한다.
“선생님은 이즈음 학교에도 안 가시고 그 애들과도
놀지 못하신다구요. 게다가 병까지 나셨다구, 얼마 좀 평안히
나가서 쉬시라고, 자꾸 그러래는수.”
부인의 낯에는 말한 거 잘못하였다 하는 표정이 나타났다.
말을 다 들은 엘리자베트는 벌떡 일어섰다. 그는 무엇이
어찌 되는지는 모르고 무의식히 자기 행리(行李)를 꺼내어 거기에
자기 책을 넣기 시작하였다. 그의 손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엘리자베트의 행동을 물끄러미 보던 부인은 물었다.
“이 밤에 떠나시려구요? 어디로?”
엘리자베트는 우덕덕 정신을 차렸다. 그의 배에서는 뜻없이 큰 소리의
웃음이 폭발하여 나온다. 놀라는 것같이, 우스운 것같이.
부인도 따라 웃는다. 한참이나 웃은 뒤에 둘은 함께 웃음을 뚝 그쳤다.
엘리자베트는 웃음 뒤에 울음이 떠받쳐 올라왔다.
자연히 가는 소리의 울음이 그의 목에서 나온다.
이것을 본 부인은 갑자기 미안하여졌던지 엘리자베트를 위로한다.
“울지 마십쇼. 얼마든 여기 계세요. 제가 말씀 잘 드릴 테니…….”
“아니, 전 가겠어요.”
“어디, 갈 곳이 있어요?”
“갈 곳이…….”
“있어요?”
“예서 한 사십 리 나가서 오촌모(五寸母)가 한 분 계세요.”
“그렇지만…… 이런 데 계시다가…… 촌…….”
부인의 눈에도 이슬이 맺힌다.
“제가 말씀…… 잘 드릴 것이니…… 그냥 계시지요.”
“아니야요. 저 같은 약한 물건은 촌이 좋아요, 서울 있어야…….”
부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한 방울 뚝 떨어진다.
“서울 몇 해 있을 동안에…… 갖은 고생 다 하고…… 하던 것을
부인께서 구해 주셔서…….”
부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치마 앞자락에 떨어진다.
“참 은혜는…… 내일 떠나지요.”
엘리자베트는 눈물을 씻고 머리를 들었다.
“내일!? 며칠 더 계시…….”
“떠나지요.”
“이 장마때…….”
“……”
“장마나 걷은 뒤에 떠나시면…….”
“그래두 떠나지요.”
7
이튿날 아침 열시쯤 엘리자베트의 탄 인력거는 서울 성밖에 나섰다.
해는 떴지마는 보스럭비는 보슬보슬 내리붓고 엘리자베트의 맞은편에는
일곱 빛이 영롱한 무지개가 반원형으로 벌리고 있다.
비와 인력거의 셀룰로이드창을 꿰어서 어렴풋이 이 무지개를
바라보면서, 엘리자베트는 뜨거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어젯밤에, 남작 부인에게 자기 같은 약한 것에게는 촌이 좋다고 밝히
말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반생 이상을 서울서 지낸 엘리자베트는
자기 둘째 고향을 떠날 때에 마음에 떠나기 설운 생각이 없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울에 자기 사랑 이환이가 있고 자기에게
끝없이 동정하는 남작 부인이 있지 않으냐, 엘리자베트는 부인의
친절히 준 돈을 만져 보았다.
이렇게 서울에게 섭섭한 생각을 가진 엘리자베트는 몸은 차차 서울을
떠나지만 마음은 서울 하늘에서만 떠돈다.
어젯밤에 밤새도록 잠도 안 자고 내일은 꼭 서울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여, 양심이 싫다는 것을 억지로 그렇게 해결까지 한 그도,
막상 서울을 떠나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만약 자기가 말할 용기만 있으면 이제라도 인력거를 돌이켜서 서울로
향하였으리라 생각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치만 그에게는 그리할 용기가 없었다. 아니, 제일 말하기가 싫었고
인력거꾼에게 웃기우기가 싫었다. 그러는 것보다도,
그는 말은 하고 싶었지만, 마음속의 어떤 물건이 그것을 막았다.
그는 입술을 악물었다.
인력거는 바람에 풍겨서 한편으로 기울어졌다가 이삼 초 뒤에
도로 바로 서서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장마때 바람은 윙! 소리를
내면서 인력거 뒤로 달아난다.
엘리자베트의 머리에는, 갑자기 ‘생각날 듯 생각날 듯하면서
채 생각나지 않는 어떤 물건’이 떠올랐다. 그는 생각하여 보았다.
한참 동안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남작, 그는 가렵고도 가려운 자리를
찾지 못한 때와 같이 안타깝고 속이 타는 고로 살눈썹을 부들부들
떨었다. ‘남작’이 자기 생각의 원몸에 가까운 것 같고도
채 생각나지 않았다.
‘남작이 고운가 미운가. 때릴까 안을까. 오랠까 쫓을까.’
그는 한참이나 남작을 두고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탁 눈을 치뜨면서
주먹을 꼭 쥐었다. 이제야 겨우 그 원몸이 잡혔다.
“재판!”
그는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남작을 걸어서 재판하는 것은 엘리자베트에게는 큰 문제에
다름없었다. 남작 부인에게 얻은 위로금이 재판 비용으로는
넉넉하겠지만, 자기를 끝없이 측은히 여기는 부인에게 남편이 잘못한
일을 알게 하는 것은 엘리자베트에게는 차마 못 할 일이다.
이 일을 알면 부인은 제 남편을 어찌 생각할까,
엘리자베트 자기를 어찌 생각할까. 남작 집안의 어지러움―---
엘리자베트는 한숨을 후― 하니 내쉬었다. 그것뿐이냐,
서울에는 자기 사랑 이환이가 있다. 만약 재판을 하면 그 일이 신문에
나겠고, 신문에 나면 이환이가 볼 것이다.
이환이가 이 일을 알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까, 또 몇백 명 동창은
어떻게 생각할까, 세상은 어떻게 생각할까.
“재판은 못 하겠다.”
그는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남작의 미운 짓을 볼 때에는, 엘리자베트는 가만 있지
못할 것같이 생각된다. 자기는 남작으로 인하여 모든 바람과 앞길을
잃어버리지 않았느냐. 자기는 남작으로 인하여 바람과 앞길 밖에
사랑과 벗과 모든 즐거움까지 잃어버리지 않았느냐.
그런 후에 자기는 남작으로 인하여 서울과는 온전히 떠나지 않으면
안 되지 않게 되었느냐. 이와 같은 남작을…… 이와 같은 죄인을…….
“아무래도 재판은 하여야겠다.”
그는 다시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로도 재판을 하여야 할지 안 하여야 할지 똑똑히
해결치를 못하였다. 하겠다 할 때에는 갑(甲)이 그것을 막고,
못 하겠다 할 때에는 을(乙)이 금하였다.
‘집에 가서 천천히 생각하자.’
그는 속이 타는 고로 억지로 이렇게 마음을 먹고 생각의 끝을
다른 데로 옮겼다. 이 생각에서 떠난 그의 머리는 걷잡을 새 없이
빨리 동작하였다. 그의 머리는 남작에서 S, 이환, 혜숙, 서울, 오촌모,
죽은 어버이들로 왔다갔다하였다. 한참 이리 생각한 후에
그의 흥분하였던 머리는 좀 내려앉고 몸이 차차 맥이 나면서
그것이 전신에 퍼진 뒤에 머리와 가슴이 무한 상쾌하게 되면서
눈이 자연히 감겼다. 수레의 흔들리 는 것이 그에게는 양상스러웠다.
조을지도 않은 채 깨지도 않고 근덕근덕하면서 한참 갈 때에
우르륵 우뢰 소리가 나므로 그는 눈을 번쩍 떴다.
하늘은 전면이 시커멓게 되고 그 새에서는 비의 실이 헬 수 없이 많이
땅에까지 맞닿았다. 비 곁에 또 비 비 밖에 비 비 위에 구름 구름 위에
또 구름이라 형용 할 수밖에 없는 이 짓은,
엘리자베트에게 큰 무서움을 주었다.
‘저 무지한 인력거꾼 놈이…….’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사면은 다만 어두움뿐이고 그 큰 길에도 사람 다니는 것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툭툭툭툭 하는 인력거의 비 맞는 소리, 물 괸 곳에 비 오는
소리, 외앵 하고 달아나는 장마때 바람 소리, 인력거꾼의 식식거리는
소리, 자기의 두근거리는 가슴 소리-―--
엘리자베트의 떨림은 더 심하여졌다.
그는 떨면서도 조그만 의식을 가지고 구원의 길이 어디 있지나 않은가
하고 셀룰로이드 창을 꿰어서 앞을 내어다보았다.
창을 꿰고 비를 꿰고 또 비를 꿰어서 저편 한 이십 간 앞에 조그마한
방성 하나가 엘리자베트의 눈에 띄었다.
“아!”
그는 안심의 숨을 내어쉬었다.
‘저것이 만약?’
그는 갑자기 생각난 듯이 눈을 비비고 반만큼 일어서서
뚫어지게 내어다보았다. 가슴은 뚝뚝 소리를 낸다…….
어렴풋이 보이는 그 방성에 엘리자베트는 상상을 가하여 보기
시작하였다. 앞집만 보일 때에는 상상으로 뒷집을 세우고 그것이
보일 때에는 또 상상의 집을 세워서 한참 볼 때에 그방성은 자기가
오촌모의 있는 마을로 엘리자베트의 눈에 비쳤다.
엘리자베트는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이 흥분하여 피곤하여지고 가슴이
뛰노는 고로 서 있을 힘이 없었다. 가슴과 목 뒤에서는 뚝뚝 소리를
더 빨리 더 힘있게 낸다. 가뜩이나 더디게 걷던 인력거가 방성 어구에
들어서서는 더 느리게 걷는다…….
엘리자베트는 흥분한 눈으로 가슴을 뛰놀리면서 그 방성을 보았다.
길에 사람 하나 없다.
평화의 이 촌은 작년보다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작년에 보던 길 좌우편에만 벌려 있던 이십여 호의 집은 역시 내게
상관 있나 하는 낯으로 엘리자베트를 맞는다.
그 방성 맨 끝, 뫼 바로 아래 있는 엘리자베트의 오촌모의 집에
인력거는 닿았다. 비의 실은 그냥 하늘과 땅을 맞맨 것같이 보이면서
힘있게 쪽쪽 내리쏜다. 엘리자베트는 인력거에서 내렸다.
세 시간 동안이나 앉아서 온 그의 다리는
엘리자베트의 자유로 되지 않았다. 그는 취한 것같이 비츨비츨하며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같이 허둥허둥 낮은 대문을 들어섰다.
비는 용서 없이 엘리자베트의 머리에서 가는 모시저고리 치마 구두로
내리쏜다. 대문 안에 들어선 엘리자베트는 어찌할지를 몰라서
담장에 몸을 기대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때에 마침 때좋게 오촌모가 무슨 일로 밖에 나왔다.
“아주머니!”
엘리자베트는 무의식히 고함을 치고 두어 발자국 나섰다.
오촌모는 늙은 눈을 주름살 많은 손으로 비비고
잠깐 엘리자베트를 보다가,
“엘리자베트냐.”
하면서 뛰어와서 마주 붙들었다.
“어떻게 왔냐? 자 비 맞겠다. 아이구 이 비 맞은 것 봐라.
들어가자. 자, 자.”
“인력거가 있어요.”
하고 엘리자베트는 땅에 발이 닿지 않는 것 같은 걸음으로 허둥허둥
인력거꾼에게 짐을 들여오라 명하고, 오촌모와 함께 어둡고 낮고
시시한, 내음새나는 방 안에 들어왔다.
“전엔 암만 오래두 잘 안 오더니, 어찌 갑자기 왔냐?”
오촌모는 눈에 다정한 웃음을 띠고 물었다.
엘리자베트는 진리 있는 거짓말을 한다.
“서울 있어야 이젠 재미두 없구 그래서…….”
“으응!”
오촌모는 말의 끝을 높여서 엘리자베트의 대답을 비인(非認)한다.
“네 상에 걱정빛이 뵌다. 무슨 걱정스러운 일이라도 있냐?”
‘바로 대답할까.’
엘리자베트가 생각하는 동시에 입은 거짓말을 했다.
“걱정은 무슨 걱정이요. 쯧.”
엘리자베트는 혀를 가만히 찼다. 왜 거짓말을 해…….
“그래두 젊었을 땐 남 모르는 걱정이 많으니라.”
‘대답할까.’
엘리자베트는 갑자기 생각했다. 가슴이 뛰놀기 시작한다.
치만 기회는 또 지나갔다. 오촌모는 딴 말을 꺼낸다.
“그런데 너 점심 못 먹었겠구나. 채려다 주지,
네 촌밥 먹어 봐라. 어찌 맛있나.”
오촌모는 나갔다.
“짐 들여왔습니다.”
하는 인력거꾼의 소리가 나므로 엘리자베트는 나가서 짐을 찾고 들어와
앉아서, 밖을 내어다 보았다.
뜰 움푹움푹 들어간 데마다 물이 고였고 물 고인 데마다 비로 인하여
방울이 맺혀서 떠다니다가는 없어지고, 또 새로 생겨서 떠다니다가는
없어지곳 한다. 초가집 지붕에서는 누렇고 붉은 처마물이 그치지 않고
줄줄 흘러내린다.
한참이나 눈이 멀거니 뜰을 바라보고 있을 때에 오촌모가 밥과 달걀,
반찬, 김치 등 간단한 음식을 엘리자베트를 위하여 차려 왔다.
엘리자베트는 점심을 먹은 뒤에 또 뜰을 내어다보기 시작하였다.
뜰 한편 구석에는 박 넌출이 하나 답답한 듯이 웅크러뜨리고 있었다.
잎 위에는 빗물이 고여 있다가 바람이 불 때 마다 잎이 기울어지며,
고였던 물이 땅에 쭈루룩 쏟아지는 것이 엘리자베트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그 잎들 아래는 허옇고 푸른 크담한 박 하나가 잎이 바람에
움직일 때마다 걸핏걸핏 보였다.
박 넌출 아래서 머구리가 한 마리 우덕덕 뛰어나왔다.
본래부터 머구리를 무서워하던 엘리자베트는 머리를 빨리 돌렸다.
머구리에게 무서움을 가지는 동시에 엘리자베트의 머리에는
아깟걱정이 떠올랐다. 그는 낯을 찡그리고 한숨을 후 내어쉬었다.
이것을 본 오촌모는 물었다.
“왜 그러냐? 한숨을 다 짚으면서……
네게 아무래두 걱정이 있기는 하구나.”
엘리자베트는 마음이 뜨끔하였다.
그러면서도, 이 기회 넘겼다가는…….
“아주머니!”
그는 흥분하고 떨리는 소리로 오촌모를 찾았다.
“왜, 왜 그러냐? 이야기 다 해라.”
“서울은 참 나쁜 뎁디다그려…….”
엘리자베트는 울기 시작하였다.
“자, 왜?”
“하―아!”
엘리자베트는 울음이 섞인 한숨을 쉬었다.
“아 왜 그래?”
“아― 어찌할까요.”
“무엇을 어찌해. 자 왜 그러느냐?”
“난 죽고 싶어요.”
엘리자베트는 쓰러졌다.
“딴소리한다. 왜 그래? 자 이야기해라.”
오촌모는 얼른다.
엘리자베트는 끊었다 끊었다 하면서 무한 간단하게 자기와 남작의
새를 이야기한 뒤에, 재판하겠단 말로 말을 끝내었다.
“너 같은 것이 강가(姜家) 집에…….”
엘리자베트의 말을 들은 오촌모는 성난 소리로 책망하였다.
괴로운 침묵이 한참 연속하였다. 아주머니의 책망을 들을 때에
엘리자베트는 울음 소리까지 그쳤다.
한참 뒤에, 오촌모는 엘리자베트가 불쌍하였던지 이제 방금 온 것을
책망한 것이 미안하였던지 말을 돌린다.
“그래두 재판은 못 한다. 우리는 상것이고 저편은 양반이 아니냐?”
아직 채 작정치 못하고 있던 엘리자베트의 마음이 이 말 한마디로
온전히 작정되었다. 그는 아주머니의 말을 우쩍 반대하고 싶었다.
“재판에두 양반 상놈이 있나요?”
“그래두 지금은 주먹 천지란다.”
엘리자베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양반 상놈 문제에 얼토당토 않은
주먹을 내어놓는 아주머니의 무식이 그에게는 경멸스럽기도 하고
성도 났다. 그렇지만 그 말의 진리는 자기의 지낸 일로 미루어 보아도
그르달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재판은 꼭 하고 싶었다.
“그래두 해요!”
“그리 하고 싶으면 하기는 해라마는…….”
“그럼 아주머니!”
“왜.”
“이 동리에 면소가 있나요?”
“응 있다. 무엇 하려구?”
“거기 가서 재판에 대하여 좀 물어 보아 주시구려…….”
“싫다야…… 그런 일은.”
“그래두…… 아주머니까지…… 그러시면…….”
엘리자베트의 낯은 울상이 되었다.
이것이 불쌍하게 보였던지 오촌모는 면서기를 찾아갔다.
이튿날 엘리자베트는 남작을 걸어서,
정조 유린에 대한 배상 및 위자료로서 5천 원, 서생아(庶生兒) 승인,
신문상 사죄광고 게재 청구 소송을 경성지방법원에 일으켰다.
8
늘 그치지 않고 줄줄 내리붓던 비는 종시 조선 전지(全地)에 장마를
지웠다. 엘리자베트가 있는 마을 뒷뫼에서도 간직하여 두었던
모든 샘이 이번 비로 말미암아 터져서 개골가에 있는 집 몇은
집채같이 흘러내려오는 물로 인하여 혹은 떠내려가고 혹은 무너졌다.
매일 흰 물방울을 안개같이 내면서 왉왉 흘러내려가는 물을 보면서
엘리자베트는 몇 가지 일로 느끼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반성도 없지 않았다.
이번 이와 같이 큰 재판을 일으킨 것이 엘리자베트의 뜻은 아니다.
법률을 아는 사람이
‘그리하여야 좋다’는
고로 엘리자베트는 으쓱하여서 그리할 뿐이다.
그에게는 서생아 승인으로 넉넉하였다.
“에이 썅.”
그는 만날 이 일이 생각날 때마다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서울을 떠난 것도 그의 느낌의 하나이다. 차라리 반성의 하나이다.\
오촌모는
‘에이구 내 딸 에이구 내 딸’
하며 크담한 엘리자베트의 궁둥이를 두드리며 사랑하였고,
엘리자베트는 여왕과 같이 가만히 앉아서 모든 일을 오촌모를
부려먹었지만, 그것만으로 그는 만족지를 못하였다.
그는 낮고 더럽고 답답하고 덥고 시시한 냄새 나는 촌집보다 높고
정한 서울집이 낫고, 광목바지 입고 상투 틀고 낯이 시꺼먼 원시적인
촌무지렁이들보다 맥고모자에 궐련 물고 가는 모시두루마기 입은
서울 사람이 낫다. 굵은 광당포치마보다 가는 모시치마가 낫고,
다 처진 짚신보다 맵시나는 구두가 낫다. 기름머리에 맵시나게
차린 후에 파라솔을 받고 장안 큰거리를 팔과 궁둥이를 저으면서
다니던 자기 모양을 흐린 하늘에 그려 볼 때에는,
엘리자베트는 자기에게도 부끄럽도록 그 그림자가 예뻐 보였다.
장마는 걷혔다.
장마 뒤의 촌집은 참 분주하였다. 모를 옮긴다 김을 맨다 금년 추수는
이때에 있다고, 각 집이 모두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나서서 활동을
한다. 각 곳에서 중양가(重陽歌)의 처량한 곡조,
농부가의 웅장한 곡조가 일어나서 뫼로 반향하고 들로 퍼진다.
자농(自農) 밭 몇 뙈기와 뒤뜰에 터앝을 가진 엘리자베트의 오촌모의
집도 꽤 분주하였다. 자농 밭은 삯을 주어서 김을 매고
터앝만 오촌모 자기가 감자와 파 이종을 하기로 하였다.
뻔뻔 놀고 있기가 무미도 하고 갑갑도 한 고로,
엘리자베트는 아주머니를 도와서 손에 익지 않은 일을 하고 있었다.
첫번에는 일하기가 죽게 어려웠지마는, 좀 연습된 뒤에는 땀으로
온몸이 젖고 몸이 곤하여진 뒤에 나무 그늘 아래서 상추쌈에
고추장으로 밥을 먹고 얼음과 같은 찬 우물물을 마시는 것은
참 엘리자베트에게는 위에 없는 유쾌한 일이 되었다.
첫번에는 심심끄기로 시작하였던 일을 마지막에는 쾌락으로
하게 되었다.
그러는 새에도 틈만 있으면 그는 집 뒤 뫼에 올라가서 서울을 바라보고
한숨을 짓고 있었다. 보얀 여름 안개로 둘러싸여서 아침 햇빛을
간접으로 받고 보얗게 반짝거리는 아침 서울,
너무 강하여 누렇게까지 보이는 여름 햇빛을 정면으로 받고 여기저기서
김을 무럭무럭 내는 낮 서울, 새빨간 저녁놀을 받고 모든 유리창은
그것을 몇십 리 밖까지 반사하여 헬 수 없는 땅 위의 해를 이루는
저녁 서울, 그 가운데 우뚝 일어서 있는 푸른 남산, 잿빛 삼각산,
먼지로 싸인 큰거리, 울깃불깃한 경복궁, 동물원, 공원, 한강, 하나도
엘리자베트에게 정답게 생각 안 나는 것이 없고,
느낌 안 주는 것이 없었다.
‘아― 내 서울아, 내 사랑아 나는 너를 바라본다. 붉은 눈으로
더운 사랑으로…… 아침 해와 저녁 놀, 잿빛 안개 흩어진
더움 아래서, 나는 너를, 아― 나는 너를 바라본다.
천 년을 살겠냐 만 년을 살겠냐. 내 목숨 다하기까지,
내 삶 끝나기까지, 나는 너를 그리리라.’
처량한 곡조로 엘리자베트는 부르곤 하였다.
엘리자베트는 한 자리를 정하고 뫼에 올라갈 때에는 언제든지
거기 앉아 있었다. 뒤에는 큰 소나무를 지고 그 솔그늘 아래
꼭 한 사람이 앉아 있기 좋으리만한 바위가 하나 있었다.
그것이 엘리자베트의 정한 자리다.
그 바위 두어 걸음 앞에서 여남은 길 되는 절벽이 있었다.
이 절벽을 내려다볼 때마다 그의 마음속에는 한 기쁨이 움직였다.
종시 재판날이 왔다.
9
재판 전날, 엘리자베트는 오촌모와 함께 서울로 들어와서
재판소 곁 어떤 객줏집에 주인을 잡았다.
서울을 들어설 때에 엘리자베트는, 한 달밖에는 떠나 있지 않았으되
그렇게 그리던 서울이므로 기쁨의 흥분으로 몸이 죽게 피곤하여져서
부들부들 떨면서 객줏집에 들었다.
‘혜숙이나 만나지 않을까, 이환 씨나 만나지 않을까,
S 혹은 부인이나 혹은 남작이나 만나지 않을까.’
그는 반가움과 무서움과 바람으로 머리를 푹 숙이고 곁눈질을 하면서
아주머니와 함께 거리들을 지나갔다.
할 수 있는 대로는 좁은 길로…….
그는 하룻밤 새도록 모기와 빈대와 흥분, 걱정 들로 말미암아
잠도 잘 못 자고, 이튿날 낯이 뚱뚱 부어서 제시간에 재판소에
들어왔다. 아주머니는 방청석으로 보내고 자기 혼자 원고석(原告席)에
와 앉을 때에는, 엘리자베트는 자기도 어찌 되는지를 모르도록 마음이
뒤숭숭하였다. 염통은 한 분(分) 동안에 여든일곱번이나 뛰놀고 숨도
한 분 사이에 스무 번 이상을 쉬게 되었다.
땀은 줄줄 기왓골에 빗물 흐르듯 흘러서 짠물이 자꾸 눈과 입으로
들어온다. 서울 들어오느라고 새로 갈아입은 엘리자베트의
빈사저고리와 바지허리는 땀으로 소낙비 맞은 것보다 더 젖게 되었다.
세 분쯤 뒤에 그는 마음을 좀 진정하여 장내를 둘러보았다.
방청석에는 아주머니 혼자 낯에 근심을 띠고 눈이 둥그래져 서 있었고
피고석에는 남작이 머리를 저편으로 돌리고 있었다.
남작을 볼 때에 그는 갑자기 죄송스러운 생각이 났다.
‘오죽 민망할까. 이런 데 오는 것이 남작에게는 오죽 민망할까?
내가 잘못했지, 재판은 왜 일으켜? 남작은 나를 어찌 생각할까?
또 부인은……?’
그는 이제라도 할 수만 있으면 재판을 그만두고 싶었다.
짐짓 자기가 남작에게 져주고 싶기까지 하였다.
그는 머리를 좀더 돌이켰다. 거기는 남작의 대리인인 변호사가 엄연히
앉아 있었다. 만장을 무시하는 낯으로 자기 혼자만이 재판을 좌우할
능력이 있다는 낯으로 변호사는 빈 재판석을 둘러보고 있었다.
변호사를 볼 때에 엘리자베트는 남모르게,
“아!”
하는 절망의 소리를 내었다. 자기의 변론이 어찌 변호사에게 미칠까,
그의 머리에는 똑똑히 이 생각이 떠올랐다.
남작에 대한 미움이 마음속에 솟아나왔다. 자기를 끝까지 지우려고
변호사까지 세운 남작이 어찌 아니꼽지를 않을까.
그는 외면한 남작을 흘겨보았다.
판사, 통변, 서기 들이 임석하고 재판은 시작되었다.
규정의 순서가 몇이 지나간 뒤에 원고의 변론할 차례가 이르렀다.
규정대로 사는 곳과 이름 들을 물은 뒤에 엘리자베트는 변론하여야
하게 되었다. 엘리자베트는 벌떡 일어서서 묻는 말에는 대답하였지만
변론은 나오지를 않았다. 재판소가 빙빙 도는 것 같고 낯에서는
불덩이가 나올 것 같았다. 그러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용기를 내어야지.’
생각할 때에 얼마의 용기는 회복되었다.
그는 끊었닷 끊었닷 하면서 자기의 청구를 질서 없이 설명하였다.
“더 할 말은 없냐?”
엘리자베트의 말이 끝난 뒤에 주석판사가 물었다.
“없어요.”
엘리자베트는 말이 하기 싫은 고로 겨우 중얼거리고 앉았다.
‘겨우 넘겼다.’
엘리자베트는 앉으면서 괴로운 숨을 내어쉬면서 생각하였다.
피고의 변론할 차례가 되었다. 변호사는 일어서서 웅장한 큰 소리로,
만장을 누르는 소리로, 장내가 웅웅 울리는 소리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원고의 말은 모두 허황하다. 그 증거가 어디 있는가?
있으면 보고 싶다. 잉태하였다 하니 거짓말인지도 모르거니와,
설혹 잉태하였다 하여도 그것이 남작의 자식인 증거가 어디 있는가?
자기 자식이니까 떨어뜨리려고 병원에 데리고 갔다 원고는 말하지만,
주인이 자기 집에 가정교사가 병원에 좀 데려다 달랄 때 데려다
줄 수가 없을까? 피고가 자기 일이 나타날까 저퍼서 원고를
내어쫓았다 원고는 말하지마는, 다른 일로 내어보냈는지 어찌 아는가?
원고는 당시에는 학교에도 안 가고 가정교사의 의무도 다하지 않고
게다가 탈까지 났으니, 누구가 이런 식객을 가만 두기를 좋아할까?
어떻든 원고에게는 정신이상이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엘리자베트는 변호사가
‘원고의 말은 허황하다’ 할 때에 마음이 뜨끔하였다.
‘남작의 자식인지 어찌 알까’ 할 때에 가슴에서 ‘툭’하는 소리를
들었다. 병원 이야기가 나올 때에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에는 어찌 되는지 몰랐다. 청각은 가졌지만 듣지는 못하였다.
다만 둥둥 하는 사람의 말소리가 한 백 리 밖에서 나는 것같이
들렸을 뿐이고 아무것도 의식지를 못하였다.
유도에 목 끼운 때와 같이 온몸이 양상스러워지는 것이 구름을타고
하늘을 떠다니는 것 같았다.
그가 바롯 의식상태로 들기 비롯한 때는 판사가
‘더 할 말이 없느냐’고 물을 때이다.
판사의 묻는 말을 똑똑히 알아듣지 못하고 또 말하기도 싫은
엘리자베트는 다만,
“네.”
하고 대답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런 뒤에는 그의 눈앞에는
검은 물건이 왔닷갔닷 움직움직 하는 것만 보였다. 무엇인지는 똑똑히
알지 못하였다.
한참 있다가 판결은 났다. 원고의 주장은 하나도 증거가 없다.
그런 고로 원고의 청구는 기각한다.
이 말을 겨우 알아들은 엘리자베트는 가슴에서 두 번째 ‘툭’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뒤에는 정신이 아득하여지고 말았다.
몇 시간 동안을 혼미상태로 지낸 후에 겨우 정신이 좀 드는 때는 그는
이상한 방 안에 앉아 있었다.
껌껌한 그 방은 사면 침척(尺) 두 자밖에는 안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방은 들썩들썩 움직인다.
‘흥 재미있구나!’
그는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한가한 생각이 그의 머리에 오랫동안 머물지를
못하였다. 높이 세 치, 길이 다섯 치쯤 되는 조그만 구멍으로
자기 아주머니가 보일 때에 엘리자베트는 펄떡 정신을 차렸다.
그때야 그는 자기 있는 곳은 보교(步轎) 안이고,
벌써 아주머니의 집에 다 이르렀고, 아까 판결받은 것이 생각났다.
보교는 놓였다.
엘리자베트는 우덕덕 보교에서 뛰어내리다가 꼬꾸라졌다.
발이 저린 것을 잊고 뛰어내리던 그는 엎드러질 수밖에는 없었다.
“에구머니!”
아주머니는 엘리자베트가 또다시 기절을 한 줄 알고 고함을 치며
뛰어왔다. 엘리자베트는 ‘죽어라’ 하고 발이 저린 것을 참고
일어서서 뛰어 방 안에 들어와 꼬꾸라졌다.
그는 울음도 안 나오고 웃음도 안 나왔다. 다만,
‘야단났구만, 야단났구만.’
생각만 하였다.
그렇지만 어디가 야단나고 어떻게 야단났는지는 그는 몰랐다.
다만, 어떤 큰 야단난 일이 어느 곳에 있기는 하였다.
오촌모가 들어와 흔드는 것도 그는 모른 체하고
다만 씩씩거리며 엎디어 있었다.
‘야단, 야단.’
그의 눈에는 여러 가지 환상이 보인다. 네모난 사람, 개, 우물거리는
모를 물건, 뫼보다도 크게도 보이고 주먹만하게도 보이는 검은
어떤 물건, 아주머니, 연필-―-- 이것이 모두 합하여 그에게는
야단으로 보였다.
오촌모가 펴준 자리에 누워서도
그는 이런 그림자들만 보면서 씩씩거리며 있었다.
10
이튿날 아침.
엘리자베트는 눈을 번쩍 뜨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주머니는 방 안에 없었다. 부엌에서 덜겅거리는 고로
거기 있나 보다 그는 생각하였다.
전에는 그리 주의하여 보지 않았던 그 방 안의 경치에서 병인의
날카로운 눈으로 그는 새로운 맛있는 것을 여러 가지 보았다.
제일 눈에 뜨이는 것은, 담벽 사면에 붙인 당지들이다.
일본 포속(布屬)들에서 꺼내어 붙인 듯한 그 당지들을 엘리자베트는
흥미의 눈으로 하나씩 하나씩 건너보았다.
그 다음에 보인 것은 천장 서까래 틈에 친 거미줄들이다.
엘리자베트는 그 가운데 하나를 자세히 보았다. 그가 보고 있는 동안에
욍 하니 날아오던 파리가 한 마리 그 줄에 걸렸다.
거미줄은 잠깐 흔들리다가 멎고 어디 있댔는지 보이지 않던 거미가
한 마리 빨리 나와서 파리를 발로 움킨다. 파리는 깃을 벌리고
도망하려 애를 쓰기 시작하였다. 거미줄은 대단히 떨렸다.
그렇지만 조금 뒤에 파리는 죽었는지 거미줄의 흔들림은 멎고
거미 혼자서 발발 파리를 두고 돌아다닌다.
엘리자베트는 바르륵 떨면서 머리를 돌이켰다.
‘저 파리의 경우와…… 내 경우가, 어디가 다를까? 어디가……?’
엘리자베트가 움직할 때에 파리가 한 마리 욍 나타났다.
그 파리의 날기를 기다리고 있었던지 다른 파리들도 일제히
웅― 날았다가 도로 각각 제자리에 앉는다…….
엘리자베트는 눈을 감았다. 상쾌한 졸음이 짜르륵 엘리자베트의
온몸에 돌았다. 엘리자베트는 승천(昇天)하는 것 같은 쾌미를
누리고 있었다. 이때에 오촌모가 샛문을 벌컥 열며 들어왔다.
엘리자베트는 눈을 번쩍 떴다. 오촌모는 들어와서 물에 젖은 손을
수건에 씻은 뒤에 엘리자베트의 머리곁에 와 앉았다.
“좀 나은 것 같으냐?”
“무엇 낫지 않아요.”
“어디가 아파? 어젯밤 새도록 헛소릴 하더니…….”
“헛소리까지 했어요?”
엘리자베트는 낯에 적적한 웃음을 띠고 묻는 대답을 하였다.
“그런데 어디가 아픈지는 일정하게 아픈 데가 없어요.
손목 발목이 저리저릿하는 것이 온 몸이 다 쏘아요. 꼭……
첫몸할 때…….”
“왜 그런고…… 원.”
“왜 그런지요…….”
잠깐의 침묵이 생겼다.
“앗!”
좀 후에 엘리자베트는 작은 소리로 날카로운 부르짖음을 내었다.
낯에는 무한 괴로움이 나타났다.
“왜 그러냐!?”
오촌모는 놀라서 물었다.
“봤다는 안 되어요.”
엘리자베트는 억지로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보지 않을 것이니 왜 그러냐?”
“묻지두 말구요!”
“묻지두 않을 것이니 왜 그래?”
“그럼 안 묻는 거인가요?”
“그럼 그만두자…… 그런데 미음 안 먹겠냐?”
“좀 이따 먹지요.”
엘리자베트는 괴로운 낯을 하고 팔과 다리를 꼬면서 앓는 소리를 내고
있다가 참다 못하여 억지로 말했다.
“아주머니 요강 좀 집어 주세요.”
오촌모는 근심스러운 낯으로 물끄러미 엘리자베트를 들여다보다가
말없이 요강을 집어 주었다. 엘리자베트는 요강을 타고 앉았다.
나올 듯 나올 듯하면서도 나오지 않는 오줌은 그에게 큰 아픔을
주었다. 한 십 분 동안이나 낯을 무한 찡글고 있다가 내어놓을 때는
그 요강은 피오줌으로 가득 찼다.
“피가 났구나!”
오촌모는 놀란 소리로 물었다.
“……네.”
“떨어지려는 것이로구나.”
“그런가 봐요.”
말은 끊어졌다.
엘리자베트의 마음은 무한 설렁거렸다.
그 가운데는 저픔과 반가움이 섞여 있었다.
“깨를 어떻게 먹으면 올라붙기는 한다더라만…….”
잠깐 후에 아주머니가 말을 시작했다.
“그건 올라붙어 무엇 해요.”
엘리자베트는 낯을 찡글고 대답하였다.
“그래도 낙태로 죽는 사람두 있너니라…….”
엘리자베트는 대답을 하려다가 말이 하기 싫은 고로 그만두었다.
말은 또 끊어졌다.
엘리자베트는 ‘죽어두 좋아요’라고 대답하려 하였다.
‘죽으면 뭘 핬나.’
그는 병적으로 날카롭게 된 머리로 생각하여 보았다.
‘내게 이제 무엇이 있을까? 행복이 있을까? 없다. 즐거움은?
그것도 없다. 반가움은? 물론 없지. 그럼 무엇이 있을까?
먹고 깨고 자는 것뿐-―-- 그 뒤에는? 죽음! 그 밖에 무엇이
있을까? 아무것도 없다. 그것뿐으로도 살 가치가 있을까?
살 가치가 있을까? 아, 아! 어떨까? 없다! 그러면?
나 같은 것은 죽는 편이 나을까? 물론. 그럼 자살? 아!’‘자살?
(그는 사지를 부들부들 떨었다.) 모르겠다. 살아지는 대로
살아 보자. 죽는 것도 무섭지 않고, 사는 것도 싫지도 않고-―-- ’
이때에 오촌모가 말을 시작했다.
“내가 가서 물어 보고 올라.”
“그만두세요.”
그는 우덕덕 놀라면서 무의식히 날카롭게 말하였다.
“그래두 내 잠깐 다녀오지.”
아주머니는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아주머니가 나간 뒤에 그는 또 생각하여 보았다.
내 근 이십 년 생애는 어떠하였는가? 앞일은 그만두고 지난 일로……
근 이십 년 동안이나 살면서, 남에게, 사회에게 이익한 일을 하나라도
하였는가? 벗들에게 교과를 가르친 일-―-- 이것뿐!
이것을 가히 사회에 이익한 일이라 부를 수가 있을까?
(그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응! 하나 있다! ‘표본!’ (그는 괴로운 웃음을 씩― 웃었다.)
이후 사람을 경계할 만한 내 사적! 곧 ‘표본!’표본생활 이십 년……
아……! 그러니 이것도 내가 표본이 되려서 되었나? 되기 싫어서도
되었지. 헛데로 돌아간 이십 년, 쓸데없는 이십 년,
‘나’를 모르고 산 이십 년, 남에게 깔리어 산 이십 년.
그 동안에 번 것은? 표본! 그 동안에 한 일은? 표본!
그는 피곤하여진 고로 눈을 감았다. 더움과 추움이 그를 쏘았다.
그는 추워서 사지를 보들보들 떨면서도 이마와 모든 틈에는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아래는 수만 근 되는 추를 단 것같이 대단히
무거웠다. 괴로움과 한참 싸우다가 오촌모의 돌아옴이
너무 더딘 고로 그는 그만 잠이 들었다.
자는 동안에 여러 가지 그림자가 그의 앞에서 움직였다.
네모난 사람이 어떤 모를 물건을 가지고 온다. 그 뒤에는 개가
따라온다. 방성 뒷산에서 뫼보다도 큰 어떤 검은 물건이 수없이 많이
흐늘흐늘 날아오다가, 엘리자베트의 있는 방 앞에 와서는 주먹만하게
되면서 그의 품속으로 뛰어들어온다. 하나씩 하나씩 다 들어온
다음에는 도로 하나씩 하나씩 흐늘흐늘 날아 나가서 차차 커지며
뫼만하게 되어 도로산 가운데서 쓰러져 없어진다. 다 나갔다는
도로 들어오고 다 들어왔다는 도로 나가고, 자꾸자꾸 순환되었다.
엘리자베트는 앓는 소리를 연발로 내며 이 그림자들을 보고 있었다.
이렇게 무서운 그림자를 한참 보고 있을 때에,
“얘 미음 먹어라.”
하는 오촌모의 소리가 나는 고로 눈을 번쩍 떴다.
그는 미음 그릇을 들고 들어오는 아주머니를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저런 큰 그릇을 원 어찌 들고 다니노?
키도 댓자밖에는 못 되는 노파가…….’
오촌모가 미음 그릇을 놓은 다음에 엘리자베트는 그것을 먹으려고
엎디었다. 아픔이 온몸에 쭉 돌았다…….
“숟갈이 커서 어찌 먹어요?”
그는 놋숟갈을 보고 오촌모에게 물었다.
그는, ‘숟갈이 커서 들지를 못하겠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어제두 먹던 것이 커?”
엘리자베트는 안심하고 숟갈을 들었다. 그것은 뜻밖에 크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았다.
그는 곁에 놓인 흰 가루를 미음에 치고 먹기 시작하였다.
“아이고 짜다.”
그는 한 술 먹은 뒤에 소리를 내었다.
“짜기는 왜 짜? 사탕가루를 많이 치구…….”
병으로 날카롭게 된 그의 신경은 그의 자유로 되었다.
마치 최면술에 피술자(被術者)가 시술자(施術者)의 명령을 절대로
복종하여, 단 것도 시술자가 쓰다 할 때에는 쓰다 생각하는
것과 같이 그의 신경도 절대로 그의 명령을 좇았다.
휜 가루를 소금이라 생각할 때에는 짜게 보였으나 사탕가루라
생각할 때에는 꿀송이보다도 더 달았다. 그렇지만 그의 신경도
한가지는 복종치를 않았다. 아픔이 좀 나았으면 하는 데는
조금도 순종치를 않았다.
미음을 먹는 동안에 오촌모가 투덜거렸다.
“스무 집이나 되는 동리 가운데서
그것 아는 것이 하나두 없단 말인가 원…….”
“무엇이요?”
엘리자베트는 미음을 삼키고 물었다.
“그 올라붙는 방문 말이루다. 원 깨를 어짠대든지…….”
엘리자베트는 성이 나서 대답을 안 하였다.
미음을 다 마신 다음에 돌아누우려다가 그는,
“읽!”
소리를 내고 그 자리에서 꼬꾸라졌다.
어디가 아픈지 똑똑히 모를 아픔이 온몸을 쿡 쏘았다.
정신까지 어지러웠다.
“어찌? 더하냐?”
“물이 쏟아져요.”
엘리자베트는 똑똑한 말로 대답하였다.
“어째?”
“바람이 부는지요?”
“얘 정신채레라.”
엘리자베트는 후덕덕 정신을 차리면서,
“내가 원 정신이 없어졌는가?”
하고 간신히 천장을 향하고 누웠다.
천장에는 소가 두 마리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엘리자베트는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리 시작하였다.
두 마리의 소는 싸움을 시작했다.
‘떨어지면……?’
생각할 때에 한 마리는 그의 배 위에 떨어졌다.
일순간 뜨끔한 아픔 뒤에 는 아뭏지도 않았다.
‘앍’
소리를 내고 그는 다시 천장을 보았다.
소는 역시 두 마리지만 이번은 춤을 추고 있다.
“표본생활 이십 년!”
그는 중얼거리고 담벽을 향하여 돌아누웠다.
거기서는 남작과 이환과 도야지와 파리가 장거리 경주를 하고 있었다.
‘흥! 재미있다. 누구가 이길 터인고?’
그는 생각하였다.
조금 있다가 그는 생각난 듯이 수군거렸다.
“표본생활 이십 년!”
11
그가 눈을 아무 데로 향하든지 어떤 그림자는 거기 벌려 있었다.
그가 자든지 깨든지 어떤 그림자는 거기서 움직였다.
이렇게 엘리자베트는 사흘을 지냈다.
그러는 동안 다함이 없는 철학이 감추여 있는 것 같고도 아무 뜻이
없는 헛말 같이도 생각되는 말구가
흔히 무의식히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표본생활 이십 년!’
그는 이 말을 여러 번 거푸 하였다.
이렇게 사흘째 되는 저녁, 복거리 낮보다도 더 훈훈 타는 저녁,
등과 사지 맨끝에서 시작하여 짜르륵 온몸에 도는 추위의 쾌미를
역증으로 받으면서 잠과 깸의 가운데서 돌던 엘리자베트는 오촌모의
소리에 놀라 흠칠 하면서 깨었다.
“왜 그리 앓는 소리를 하냐?
(혼자말로) 탈인지 무엇인지 낫지두 않구.”
“아― 유― 죽겠다아― 하아―”
엘리자베트는 눈을 감은 채로 아주머니의 소리 나는 편으로
돌아누우면서 신음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아프리라 생각하는 데서
나온 아픔밖에는 아픔이 없었다.
“왜 그래? 참 앓는 너보다두 보는 내가 더 속상하다. 후!”
오촌모도 한숨을 쉰다.
“아이구 덥다!”
오촌모는 빨리 부채를 집어서 엘리자베트를 부치면서 말했다.
“내 부쳐 줄 것이니 일어나서 이 오미잣물을 마세 봐라.”
오미자라는 소리를 들은 그는 귀가 버썩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오미자를 좋아하던 그는 이불 속에서 꿈질꿈질 먹을 준비를
시작하였다. 오늘은 그의 머리는 똑똑하여졌다. 그림자가 안 보였고
아픔도 덜어졌다. 오촌모는 자기도 한 숟갈 떠먹어 본 뒤에 권한다.
“아이구 달다. 자 먹어 봐라.”
엘리자베트는 눈을 뜨고 엎디어서 오미잣물을 마셨다.
새큼하고 단 가운데도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내음새를 가진
오미잣물은 병인인 엘리자베트에게 위에 없는 힘을 주었다.
그는 단숨에 한 사발이나 되는 물을 다 마셔 버렸고 도로 누웠다.
“맛있지?”
“네.”
“그런데 어떠냐, 아프기는?”
엘리자베트는 다만 씩 웃었다. 다 큰 것이 드러누워서
다 늙은 아주머니를 속상케 함에 대한 미안과, 크담한 것이
‘읅읅’ 앓은 부끄러움이 합하여 낳은 웃음을 그는 다만 감추지
않고 정직하게 웃은 것이다.
“오늘은 정신 좀 들었냐? 며칠 동안 별한 소릴,
어더런 소릴 하던지?…… 응!…… 응! 무얼
‘표분 생울 이십 년’이라던지?”
“표본생활 이십 년!”
엘리자베트는 생각난 듯이 무의식히 소리를 내었다.
“응! 그 소리 그 소리!”
오촌모도 생각난 듯이 지껄였다.
“아이 덥다!”
엘리자베트는 이불을 차 던지고 고함을 쳤다.
“응, 부쳐 주지.”
어느덧 부채질을 멈추었던 오촌모는 다시 부치기 시작했다.
속에서 나오는 태우는 듯한 더움과 밖에서 찌르는 무르녹이는 듯한
더위와 사늘쩍한 부채 바람이 합하여, 엘리자베트의 몸에 쪼르륵
소름이 돋게 하였다. 소름 돋을 때와 부채의 시원한 바람의 쾌미는
그에게 졸음이 오게 하였다. 그는 구름 타고 하늘에 올라가는 맛으로
잠과 깸의 가운데서 떠돌고 있었다.
몇 시간 지났는지 몰랐다.
무르녹이기만 하던 날은 소낙비로 부어 내린다. 그리 덥던 날도 비가
오면서는 서늘하여졌다. 방 안은 습기로 찼다.
구팡에 내려져서 튀어나는 물방울들은 안개비와 같이 되면서
방 안으로 몰려 들어온다.
그는 눈을 번쩍 떴다. 어느덧 역한 내음새 나는 모기장이 그를 덮었고
그의 곁에는 오촌모가 번뜻 누워서 답답한 코를 구르고 있었다.
위에는 불티를 잔뜩 앉히고 그 아래서 숨찬 듯이 할락할락하는
석유 램프는 모기장 밖에서 반딧불같이 반짝거리며 할딱거리고 있었다.
‘가는 목숨으로라도 살아지는 껏 살아라.’
그 램프는 소곤거리는 것 같다.
엘리자베트는 일어나서 요강을 모기장 밖에서 들여왔다.
한참 타고 앉았다가 ‘악’ 소리를 내고 그는 엎으러졌다.
가슴은 뛰놀고 숨도 씩씩하여졌다. 마음은 무한 설렁거렸다.
맥도 푹 났다. 한참 엎디어 있다가 그는 생각난 듯이 벌떡 일어나서
요강을 내어놓고 번갯불과 같이 빨리 그 속에 손을 넣어서 주먹만한
핏덩이를 하나 꺼내었다.
‘내 것.’
그의 머리에 번갯불과 같이 이 생각이 지나갔다.
그의 머리에는 모순된 두 가지 생각이 일어났다.
‘내 것.’
참 자식에 대한 사랑이 그 핏덩어리에게 일어났다.
‘이것 때문에…….’
그는 그 핏덩이에 대하여 무한한 미움이 일어났다.
‘이것도 저 아니꼬운 남작의 것, 나는 이것 때문에…….’
이 두 가지 생각의 반사작용으로 그는 핏덩이를 힘껏 단단히 쥐었다.
거기는 미움이 있고 사랑이 있었다.
그는 그 핏덩이를 씹어 먹고 싶었다.
거기도 미움이 있고 사랑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쥔 채로 드러누웠다. 맥이 나서 앉아 있을 힘이 없었다.
드러누운 그에게는 얼토당토 않은 딴 생각이 두어 가지 머리에 났다.
이것도 잠깐으로 끝나고 잠이 들었다.
이삼 푼의 잠이 그를 슬치고 지나간 뒤에 그는 눈을 번쩍 뜨면서
무의식히 중얼거렸다.
“표본생활 이십 년!”
그 다음 순간 그에게는 별한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약한 자의 슬픔!’
‘천하에 둘도 없는 명언이루다.’
그는 생각하였다.
그는 이 문제를 두고 논문 비슷이,
소설 비슷이 하나 지어 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는 생각하여 보았다.
자기의 설움은 약한 자의 슬픔에 다름없었다.
약한 자기는 누리에게 지고 사회에게 지고
‘삶’에게 져서, 열패자(劣敗者)의 지위에 이르지 않았느냐?!
약한 자기는 이환에게 사랑을 고백지 못하고 S와 혜숙에게서 참말을
듣지 못하고 남작에게 저항치를 못하고 재판석에서 좀더 굳세게
변론치를 못하여 지금 이 지경을 이르지 않았느냐?!
‘그렇지만 이것은 밖이 약한 것이다. 좀더 깊이, 안으로!’
그는 생각하였다.
자기의 아직까지 한 일 가운데서 하나라도 자기게서 나온 것이 어디
있느냐? 반동(反動)안 입고 한 일이 어디 있느냐?
남작 집에서 나온 것도 필경은 부인이 좀더 있으라는 반동에서
나온 것이 아니냐? 병원 안에 들어간 것도 필경은 집으로 돌아올
전차가 안 보임에 있지 않으냐? 병원으로 향한 것도 그렇다.
재판을 시작한 것은? 오촌모가 말리는 반동을 받았다!
모든 일이 다 그렇다!
“이십세기 사람이 다 그렇다!”
그는 힘있게 중얼거렸다.
“어떻든…… 응! 그렇다! 문제는 ‘이십세기 사람’이라고 치고,
첫줄을 ‘약한 자의 슬픔’으로 시작하여 마지막 줄을
‘현대 사람의 다의 약함’으로 끝내자.”
그는 자기 짓던 글을 생각하고 중얼거렸다.
‘표본생활 이십 년이란 구는 꼭 넣어야겠다.’
그는 생각하였다. 그리고 글을 속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이리 짓고 저리 지어서, 이만하면 완전하다 생각할 때 그는 마지막
구를 소리를 내어서 읽었다.
“현대 사람 다의 약함!”
그런 다음에는 그의 머리에 한 공허가 생겼다.
그 공허가 가슴으로 퍼질 때에 그는 맥이 나고 발끝과 손끝에서
그 공허가 일어날 때에 그는 눈을 감았다. 눈이 무한 무거워졌다.
그 공허가 온몸에 퍼질 때에 그는 ‘후―’
숨을 내어쉬면서 잠이 들었다.
12
“저런! 원 저런!”
이튿날 아침 엘리자베트에게 어젯밤 변동을 듣고 눈이 둥그래져서
그 핏덩이를 들여다보며 오촌모는 지껄였다.
엘리자베트는 탁 그 핏덩이를 빼앗아서 이불 아래 감춘 뒤에 낯을
붉히며 이유 없이 씩 웃었다.
“어떻든 네 속은 시원하겠다. 밤낮 떨어지면 떨어지면 하더니-―--”
오촌모는 비웃는 듯이 입살을 주었다.
아깟번에 웃은 엘리자베트는 이번에도 웃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는 억지로 입과 눈으로만 일순간의 웃음을 웃은 뒤에
곧 낯을 도로 쪽 폈다. 그리고 미안스러운 듯이 오촌모의 낯을
들여다보았다. 오촌모의 낯에는 가련하다는 표정이 똑똑히 보였다.
‘역시 가련한 것이루구나!’
그는 속으로 고함을 쳤다.
‘그것도 내 것이 아니냐!?’
어머니가 자식에게 가지는 육친의 정다움이 엘리자베트의 마음에
일어났다. 그는 몰래 손을 더듬어서 겁적겁적하고 흐늘거리는
그 핏덩이를 만져 보았다.
‘어디가 엉덩이구 어디가 머리 편인고?’
하고 그는 손가락으로 핏덩이를 두드리고 쓸어 주고 있었다.
차디찬 핏덩이에서도 엘리자베트는 다스한 맛이 올라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이란 이런 것이루다.’
그는 생각하였다.
물끄러미 한참 그를 들여다보던 오촌모는
도로 전과 같은 사랑의 낯이 되며 생각난 듯이 말했다.
“잊었댔다. 오늘은 장날이 되어서 서울 잠깐 들어갔다 와야겠다.
무엇 먹고 싶은 것은 없냐? 있으면 말해라. 사다 줄 거니…….”
“없어요.”
엘리자베트는 팔딱 정신을 차리며 무의식히 중얼거렸다.
‘서울’ 소리를 듣고 그는 갑자기 가슴이 뛰놀기 시작하였다.
‘저런 노파가 다 서울을 다니는데 내가 어찌…….’
그는 오촌모를 쳐다보면서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오촌모를 찾았다.
“아주머니!”
“왜?”
“서울 들어가세요?”
그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떨렸다.
“응.”
엘리자베트는 비쭉하여졌다. 오촌모의 ‘응’이란 대답뿐은
그를 만족시키지 못하였다. ‘응, 들어가겠다’든지
‘응, 다녀올란다’든지 좀더 친절히 똑똑히 대답 안 한 오촌모가
그에게는 밉게까지 보였다.
그렇지만 그의 정조(情調)는 그의 비쭉한 것을 뚫고 위에 올라오기에
넉넉하였다. 그는 좀 더 힘있게 떨리는 소리로 오촌모를 찾았다.
“아주머니!”
“왜?”
오촌모는 또 그렇게 대답하였다.
“나두 함께 가요!”
“어딜?”
“서울!”
“딴소리한다. 넌 편안히 누워 있어얀다.”
오촌모의 낯에는 무한한 동정이 나타났다.
“그래두…… 가구 싶어요!”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내 다 구경해다 줄 거니 잘 누워 있거라. 너 다 나은 다음에
한번 들어가 실컷 돌아다니자. 그래두 지금은 못 간다.”
“길 다 말랐어요?”
그는 뚱딴짓소리를 물었다.
“응, 소낙비니깐 땅 위로만 흘렀지 속은 안 뱄더라.”
“뒤뜰 호박두 익었지요 인제. 메칠 동안 나가 보지두 못해서…….”
그의 목소리는 자못 떨렸다.
“아까 가보니깐 아직 잘 안 익었더라.”
잠깐 말은 끊어졌다. 조금 뒤에 엘리자베트는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아― 서울 가보구…….”
“걱정 마라. 이제 곧 가게 되지.”
“아주머니!”
“왜 그러냐?”
“그 애들이 아직 날 기억할까요?!”
“그 애덜이라니?”
“함께 공부하던 애들이요.”
“하하! (한숨을 쉬고) 걱정 마라. 거저 걱정 마라. 내가 있지 않냐?
인젠 그깟것들이 무엇에 쓸 데가 있어? 나하구 이렇게 편안히
촌에서 사는 것이 오죽 좋으냐! 아무 걱정 없이……
지난 일은 다 꿈이다, 꿈이야! 잊구 말어라.”
‘강한 자!’
엘리자베트는 속으로 고함을 쳤다.
‘아주머니는 강한 자이고 나는 약한 자이고…… 그 사이에
무슨 차별이 있을꼬?!’
“내 다녀올 것이니 편안히 누워 있거라.”
오촌모는 말하면서 봇짐을 들고 나간다.
“무얼 사다 줄꼬 원. 복숭아나 났으면 사다 줄까. 우리 딸을…….”
엘리자베트는 자기 생각만 연속하여 하였다. 스스로 알지는
못하였으나 어떤 회전기(廻轉期) 위기 앞에 선 그는 산후(産後)의
날카로운 머리를 써서 꽤 똑똑한 해결을 얻을 수가 있었다.
‘그렇다! 나도 시방은 강한 자이다. 자기의 약한 것을 자각할
그때에는 나도 한 강한 자이다. 강한 자가 아니고야 어찌 자기의
약점을 볼 수가 있으리요?! 어찌 알 수가 있으리요?!
(그의 입에는 이김의 웃음이 떠올랐다.)
강한 자라야만 자기의 약한 곳을 찾을 수가 있다.
약한 자의 슬픔! (그는 생각난 듯이 중얼거렸다.) 전의 나의 설움은
내가 약한 자인 고로 생긴 것밖에는 더 없었다. 나뿐 아니라,
이 누리의 설움, 아니 설움뿐 아니라 모든 불만족, 불평 들이 모두
어디서 나왔는가? 약한 데서! 세상이 나쁜 것도 아니다!
인류가 나쁜 것도 아니다! 우리가 다만 약한 연고인밖에 또 무엇이
있으리요. 지금 세상을 죄악세상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이, 아니!
우리 사람이 약한 연고이다! 거기는 죄악도 없고 속임도 없다.
다만 약한 것!
약함이 이 세상에 있을 동안 인류에게는 싸움이 안 그치고 죄악이
안 없어진다. 모든 죄악을 없이하려면은 먼저 약함을 없이하여야 하고,
지상낙원을 세우려면은 먼저 약함을 없이 하여야 한다.
만일 약한 자는, 마지막에는 어찌 되노? ……이 나! 여기 표본이 있다.
표본생활 이십 년 (그는 생각난 듯이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참 약했다. 일 하나라도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어디 있는가!
세상 사람이 이렇다 하니 나도 이렇다,
이 일을 하면 남들은 나를 어찌 볼까 이런 걱정으로 두룩거리면서
지냈으니 어찌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으리요!
하고 싶은 일은 자유로 해라. 힘써서 끝까지! 거기서 우리는 사랑을
발견하고 진리를 발견하리라!
‘그렇지만 강한 자가 되려면은……!’
그는 생각하여 보았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사랑하라!’
(그는 기쁨으로 눈에 빛을 내었다.) 그렇다!
강함을 배는 태(胎)는 사랑! 강함을 낳는 자는 사랑!
사랑은 강함을 낳고, 강함은 모든 아름다움을 낳는다.
여기, 강하여지고 싶은 자는, 아름다움을 보고 싶은 자는,
삶의 진리를 알고 싶은 자는, 인생을 맛보고 싶은 자는
다 참사랑을 알아얀다.
만약 참 강한 자가 되려면은? 사랑 안에서 살아야 한다.
우주에 널려 있는 사랑, 자연에 퍼져 있는 사랑,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사랑!
‘그렇다! 내 앞길의 기초는 이 사랑!’
그는 이불을 차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의 앞에는 끝없는 넓은 세계가 벌여 있었다.
누리에 눌리어 살던 그는 지금은 그 위에 올라섰다.
그의 입에는 온 우주를 쳐누른 기쁨의 웃음이 떠올랐다.
출전:창조1~2(1919.2~3) - 김동인 -
'한국단편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문제(4 중 2)- 강경애 - (0) | 2023.06.21 |
---|---|
인간문제 (4 중 1) - 강경애 - (0) | 2023.06.12 |
레디메이드 인생 - 채만식 - (1) | 2023.05.23 |
낙동강 - 조명희 - (1) | 2023.05.16 |
만세전(萬歲前, 하 ) - 염상섭 - (1) | 2023.05.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