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전(李舜臣傳)
- 신채호 -
목 차
1. 제 1 장 서 론
2. 제 2 장 이순신의 어렸을 적과 젊은 시절
3. 제 3 장 이순신의 과거급제와 그 후에 당한 곤경
4. 제 4 장 오랑캐를 막던 작은 싸움과 조정에서 인재를 구함
5. 제 5 장 이순신의 전쟁 준비
6. 제 6 장 부산 앞바다로 구원하러 나가다
7. 제 7 장 이순신이 치른 첫 번째 싸움 : 옥포해전(玉浦海戰)
8. 제 8 장 이순신의 두 번째 싸움 : 당포(唐浦) 해전
9. 제 9 장 이순신의 세 번째 싸움 : 견내량(見乃梁) 해전
10. 제 10 장 이순신의 네 번째 싸움 : 부산(釜山) 해전
11. 제 11 장 다섯 번째 싸움 이후의 이순신
12. 제 12 장 이순신의 잡혀들어감〔구나(拘拿)〕
13. 제 13 장 이순신이 옥에 들어갔다 나오는 사이의 나라의 비운(悲運)
14. 제 14 장 이순신이 통제사로 다시 임명받음과
명량(鳴梁)의 대승첩(大勝捷)
15. 제 15 장 왜구(倭寇)의 말로(末路)
16. 제 16 장 진린이 중도에 변함과 노량(露梁) 큰싸움
17. 제 17 장 이순신의 상여가 고향으로 돌아옴과 남은 한(恨)
18. 제 18 장 이순신의 부장(副將)들과 공의 남긴 자취 및 기담(奇談)
19. 제 19 장 결 론
이순신전(李舜臣傳)
제 1 장 서 론
오호라, 섬나라 유다른 종족이 대대로 한국에 혈적(血敵)이 되어,
한번 쳐다봄에도 쏘아보듯 시선이 독살스럽고,
대대손손 갚기를 기약한 듯 골수에 맺히게 원한을 깊이 품어서,
한국 사천 년 역사에 외적의 침략을 헤아려 보건대
'왜구' 두 글자가 무려 열에 여덟, 아홉 정도나 되었다.
그로 인해 변방에 봉화가 오르고 해상에 풍진(風塵)이 일어나매
잠자리가 편한 날이 드물었다.
그럼에도 왜구가 쳐들어 오면 놀라 달아나고 물러가면
그제야 기뻐할 뿐, 주먹과 완력으로 멱살을 나꿔잡고 싸운 적은 없이
한 때의 고식지계(姑息之計)만을 상책(上策)으로 삼음에
연해(沿海) 각지에 피비린내가 그치지를 않았으니
단군자손의 치욕이 극심하였다.
이제 돌이켜보아,
일본과 대적함에 있어 우리 민족의 명예를 대표할 만한 위인을 꼽는다면
고대에는 두분,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과 신라 태종왕(太宗王)이 있고,
근세에는 김방경(金方慶)·정지(鄭地)·이순신(李舜臣)의 세 분으로
무릇 다섯 분에 그친다.
그러면서도 그 시대가 가깝고 그 유적이 손상되지 않아
후세 사람의 모범되기가 가장 좋은 이는 오직 이순신이다.
저자의 무딘 붓끝으로는 이공(李公)의 정신을 만분의 일이나마
그려낸다 하기가 어렵겠지만,
되는대로 써서 소루하기 짝이 없는 묵은 전기(傳記)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점이 있을터이니,
오호라 독자여 눈을 비비고 나의 이순신전을 읽어볼지어다.
임진왜란 때의 일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으리요만,
당파간 의론이 조야(朝野)에 분분하고 위아래 할 것 없이
모두 사사로운 뜻에 골몰하여 남을 모함하거나 남에게 아첨하는 데만
급급한 소인(小人)들이 집안 싸움으로 살육을 벌이지 않은 날이 없으니,
어느 겨를에 정치를 의론하고 어느 겨를에 나라의 안위(安危)를 염려하며,
어느 겨를에 외교의 방책을 강구하며 군비(軍備)를 갖추리요.
정승이니 판서니 대장이니 영상(領相)이니 하는 자들이
한바탕 수라 장 속에 버티고 서서 각기 제 집안의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는 싸움질로 눈을 부릅뜨고 서로 흘겨보며
팔을 걷어붙이고 큰소리치던 시대라.
그럼으로해서 저 평수길(平秀吉)이란 자가 명분도 없는 군사를 일으켜
우리 국토를 침범하매,
장졸(將卒)이 흩어지고 백성이 뿔뿔이도 망하여
왜적이 출병한 지 불과 10여일 만에 서울을 핍박하여
무인지경(無人之境)같이 몰아 들어왔던 것이다.
슬프다, 이미 화란(禍亂)이 난 것을 다시금 누구를 탓하리요.
비린내 나는 먼지가 팔역(八域)에 넘치고 악한 기운이 동해를 덮어
전란이 7, 8년을 이어지니,
이처럼 부패한 정치와 이 처럼 흩어진 인심에 무엇에 기대어
국가를 되살렸는가. 아아, 우리 이순신의 큰 공이여,
이 에 다시금 생각키우도다.
제 2 장 이순신의 어렸을 적과 젊은 시절
하늘은 푸르러 높이 있고 땅은 멀리 퍼져 넓은데,
그 가운데 거주하는 인류는 난데없이 살벌한 성품으로들 태어난지라.
그러므로, 빗장을 걸어 잠금으로써 저절로 지켜짐을
국시(國是)로 삼아 노자(老子)의 말과 같이 이웃나라와는 늙어 죽도록
서로 왕래하지 않던 시대에도 민족과 민족이
어쩌다 한번 접촉하는 경우에는 뼈를 부수고 피를 뿌려
천지가 참혹해지고 생멸(生滅)과 존망(存亡)이 순식간에 결단이 났는데,
하물며 세상의 변란이 더욱 크고 경쟁이 더욱 치열하여
병기(兵器)와 군대를 신성시하는 근래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말해 무엇하랴. 그렇건대 저 긴 소매를 늘이고서 느린 걸음 걸으면서
수백년 동안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나 강론하던 자는
모두가 꿈속에서 잠꼬대하던 인물들이 아니던가.
일체 중생이 빈 손으로 왔다 빈 손으로 가며,
병인양요(丙寅洋擾) 때도 강화도(江華島)의 대포소리 귓가에 울리자마자
제각기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서는 풀뿌리와 숨을 석굴(石窟)을
다투어 찾아서 한 목숨 구차하게 보존하다가
결국에는 살아도 쓸모없고 죽어도 손해될 것 없이
황량한 산기슭에 해골이 초목과 같이 썩어가는데,
오호라, 3백년 전 일을 회상하면 창망한 물결 위에 한 몸을 우뚝 세우고
장검(長劍)을 짚고서 제장(諸將)을 지휘할 때
적선(敵船)이 개미떼처럼 모이고 탄환이 비오듯하는 가운데서도
의연히 버티어 서서 하늘에 기도하여 이르되
"이 원수를 멸(滅) 할진댄 죽어도 여한(餘恨)이 없겠나이다"라 하고
그 몸을 희생하여 온나라를 구해낸 이――――오늘날 삼척동자까지도
입으로 전하며 칭송해 마지않는
우리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이 아니던가.
풍신수길(豊臣秀吉)이란 흉포한 자가 졸병(원래는 직전신장(織田信長)의
부하였다)의 처지에서 떨치고 일어나
일본의 세 섬을 통합하고서는 우두머리의 지위를 문득 차지한 후,
한국을 엿보아 노린 지가 오랬었다.
동래(東萊), 부산(釜山)에 살기(殺氣)가 날로 가까이 닥치매,
단군 신령께서 우리나라에 인물이 없음을 한탄하시어
큰 적에 대항할 간성(干城)과도같은 인재를 내려 보내셨다.
그리하여 공(公)은 실로 조선 선조대(宣祖代) 을사년(乙巳年(1545년))
3월 8일 자시(子時)에 서울 건천동(乾川洞)에서
세상에 태어난 첫울음 소리를 터뜨렸다.
부친의 이름은 정(貞)이요, 모친의 성(姓)은 변(卞)씨였다.
그 조부는 이름을 백록(百祿)이라 하였고 살아 생전에는
생원(生員)의 지위에 있었는데,
이순신을 낳으려 할 때 꿈에 나타나 순신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한다.
풀피리 불며 대막대기 말을 타고 울타리 담 언저리를 넘나들며 노는 것을
어린 아이들의 장난질이라 해서 심상히 보아 넘기지는 말지어다.
영웅의 싹수는 왕왕 이런 가운데서도 드러나는 것이니,
대저 이순신이 어렸을 적 여러 아이들과 놀이함에 있어서도
전진(戰陣)을 벌여놓고서 원수(元帥)라 자칭(自稱)하고
나무를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들어 내고 동네 사람들 중에
뜻이 맞지 않는 이가 있으면 활을 당겨 그 눈을 쏘려 하곤 하였다.
슬프다, 시대의 습속이 항상 호남아(好男兒)를 속박하여
악착같이 앉아서 썩게 하나니,
이 순신의 태어난 시대는 유림(儒林)이 나라에 가득하고
청담(淸談)이 성행할뿐더러 더욱이 이순신의 선조들이 대대로 유림
가문의 인물이니, 공이 비록 하늘이 내린 군인의 자격을 갖추었지만
어찌 쉽게 저절로 뽑혀나리오?
그러므로 큰 형, 작은 형 두분을 좇아 유학을 배우느라
스무 해 세월을 보냈도다.
그러나, 장래에 해상에서 조각배 한 척으로 적의 목줄기를 잡고서는
호남(湖南) 지방을 지켜 내어 전국의 대사령관(大司令官)이 될 인물이
어찌 이런 식으로 끝내 늙으리오.
분연히 붓을 던지고 무예(武藝)를 배우기 시작하니
그 때 나이 스물 둘이었다.
스물 여덟 살에 훈련원(訓練院) 별과(別科) 시험에 응시하여
말달리기 과목을 치르다가 말 위에서 떨어졌다.
왼쪽 다리가 부러져 한참을 정신이 아뜩하여 넘어져 있으매
보는 이들이 다들 말하기를 "이순신이 죽었다"하는데,
홀연히 한쪽 발로만 일어서서 버들가지를 꺾어서는 그 껍질을 벗겨
상처를 싸매고 훌쩍 뛰어 말에 오르니,
구경하던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오호라, 이는 비록 작은 일이나 크게 분투 인내하는 영웅의 됨됨이를
가히 알지니, 손가락에 조그만 가시 하나만 박혀도 밤새도록 앓으며
입맛을 통째로 잃는 용렬한 무리들이야 무슨 일을 능히 해내리요.
큰 무대에서 활동할 인물은 지략만 아니라 그 풍채와 힘도 역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순신이 일찍이 선조(先祖)의 묘에
성묘하러 갔던 차에 무덤 앞 장군석(將軍石)이 넘어져 있어서,
하인배 수십 명이 이를 들어 일으키다가 힘이 부쳐
숨을 헐떡이는 것이었다.
이순신이 한 번 크게 꾸짖어 다들 물러나게 하고,
도포(道袍)도 벗지 않고 입은 채로 등짐으로 져서는
제자리에 세워 놓으니, 보던 이들이 크게 놀라마지 않았다.
장성하여서는 어렸을 적의 양양하고 당돌한 태도가 줄어들고
심성과 인격을 닦으니, 같이 어울리는 무인패들이
저희들끼리는 종일토록 허튼 얘기나 하며 놀면서도 이순신에게는 감히
그러지를 못하였다. 비록 서울에서 나서 자랐지만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홀로 무예를 연구 하였으니,
오호라, 영웅을 배우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그 소양을 먼저
배울 것이니라.
제 3 장 이순신의 과거급제와 그 후에 당한 곤경
백낙(伯樂 : 중국 주(周)나라때 사람으로 말의 감정(鑑定)을 잘 하기로
이름이 높았음)을 만나지 못하여 천리마가 소금밭에서 헛되이
말굽자국을 남기듯이 무정한 세월은 장부의 머리털만 희게 만들어
이순신의 나이 어언 서른 둘이 되었다.
이 해에 과거에 뒤늦게 합격하여 무과(武科) 급제의 출신(出身)이 되니,
문관(文官)은 고귀하고 무관은 비천하매 상전(上典)은 어찌 그리 많으며,
산은 높고 물은 구비쳐 흐르매 어디가서 활동하리오.
그 해 겨울에 함경도 동구비보(董仇非堡)의 권관(權官)이 되고,
4년 후 인 서른 다섯 살에 훈련원 봉사(奉事)의 내직(內職)으로 옮겼다가,
다시 그 해 겨울에 충청병사(忠淸兵使)의 군관(軍官)이 되었다.
서른 여섯에 발포(鉢浦)의 수군만호(水軍萬戶)가 되고,
그 이듬해에 어떤 일에 연루되어 파직(罷職)되었다가
그 해 가을에 훈련원 봉사로 복직되더니,
그 3년 후에는 함경남도 병사영(兵使營) 군관이 되었다.
다시 그 해 가을에 건원보(乾原堡) 권관이 되니,
이순신의 나이 한 살만 더하면 만(滿) 사십인 때였다.
당시 이름높은 벼슬아치 집안의 자식들은
아직 젖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채로 한 가지 재주도 없으면서도
오늘은 승지(承旨), 내일은 참판(參判)이 되어 좋은 말, 좋은 옷으로
호사를 다하며 동서로 횡행하였다.
또 기세등등한 권력 가문에 아침 저녁으로 문안 올리는 무리들은
유능한 데라곤 한 군데도 없으면서 오늘은 절도사(節度使),
내일은 통제사(統制使)가 되어 좋은 음식 배불리 먹으면서 좌우로
눈치보기에나 바빴다. 심지어는 서너 가호(家戶)만 사는 촌구석에서
욱욱호문(郁郁乎文)을 도도평장(都都平丈)이라 가르칠 정도로
무식한 무리가 수년만 무릎끓고 대기하고 있어도
이조판서(吏曹判書)로 발탁되어 관용마(官用馬)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 판이었다.
그런데도 세상없는 위인인 이순신 같은 이는 관직에 투신한 지
7, 8년이 되어도 승진이 안된 채 봉사나 권관 등의
미관말직(微官末職)에만 틀어매인바 되어 궁벽한 도정(途程)에서
서글픈 마음 못이기게 하였다.
만일 지위를 일찍 얻어 재주와 지략을 한껏 펴게 하였으면
참담한 풍운을 불어 날려버리고 중국 길림(吉林) 봉천(奉天)의 옛 강토를
회복하여 고구려 광개토왕에 못지 않은 공적비(功蹟碑)를
다시 세우게끔 할 만도 하였으며,
대판(大坂)과 살마(薩摩)의 섬들을 토벌하여 신라 태종대왕의
백마총(白馬塚)을 다시 짓게 할 만도 하였거늘,
비열한 무리들이 조정에 가득찼음으로 말미암아 동정서벌(東征西伐)할
굳센 대장부를 좁디좁은 강산에 오래도록 가두어 두었도다.
아아, 남이(南怡) 장군이 백두산에 올라 중국 일본 여진(女眞)
말갈(靺鞨) 등 각국을 휘둘러 보며 우리나라의 미약함을 회고하고
젊은 기상을 이기지 못하여 시(時) 한 수를 지었던 바,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닳게 하고(백두산석마도진(白頭山石磨刀盡))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마르게 하리로다(두만강수음마무(頭滿江水飮馬無))
남아가 나이 이십에 적을 평정치 못하면(남아이십미평적(男兒二十未平賊))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일컬으리요(후세수칭대장부(後世誰稱大丈夫))
라 읊고, 이 글로 인하여 결국은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였으니,
인민의 외국과의 겨룸사상을 이처럼 틀어막던 시절이라 영웅에게 닥친
곤경과 고생이 좀처럼 가실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곤궁과 영달의 여부는 전연 염두에 두지 않고
바르고 옳은 것만을 스스로 지켜 나가며,
위세 떠는 힘에 굴하지 않고 권문귀족(權門貴族)에 아부하지 않으니,
이것이 옛사람이 일컫던 바 '호걸이면서 성현'이로다.
훈련원 봉사로 재직하던 때에 병조판서 김귀영(金貴榮)이
자기 첩의 몸에서 난 딸을 이순신의 첩으로 삼도록 주고자 하였으나,
이순신이 말하기를, "내가 벼슬길에 처음 나와 어찌 권세가문에
의탁하리오"하고 중매 선 사람을 그 자리에서 거절하여 돌려 보냈다.
발포만호 로 재직하고 있을 적에 좌수사(左水使) 성진(成震)이
사람을 보내어 객사(客舍) 뜰 가운데 서 있는 오동나무를
거문고 재료로 쓰려고 베어가고자 하였다.
이에 이순신이 "이것은 관가 의 물건으로서 여러 해를 재배한 것을
하루 아침에 잘라 내려 함은 무슨 까닭이뇨"하고 허 용하지를 않았다.
또 재상 유민이 좋은 화살통을 청구했을 때도 말하기를,
"이런 말을 다른 사람이 들으면 공(公)이 받은 일과 제가 내준 일을
다들 어떻게 여기리까?" 하고 내주지를 않았다.
한번은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서애(西崖) 유성룡(柳成龍)을 통하여 보기를 청하여 왔으나,
이순신은 "같은 성(姓)이니 보아도 무방하나 율곡 선생이 관리의 인사를
관장하는 자리에 앉아 있는 한은 보아서는 안되리라"
하여 듣지를 아니하 였다.
이처럼 강직함과 더불어 조심스런 언행으로써 자기 이름을 지킴이
이순신의 평생의 주의였던 것이다.
건원보의 권관으로 재임할 시에 오랑캐 울지내(鬱只乃)가 난을 일으켜
변방을 어지럽혔다. 이에 이순신이 기묘한 계책을 써서
울지내를 사로잡았는데, 병사 김우서(金禹瑞)가 그 공 을 시기하여
"주장(主將)에게 품신(稟申)하지도 않고서 제멋대로
대사(大事)를 처리했다"
는 장계(狀啓)를 올려, 결국에는 이순신이 포상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이리저리 옮겨 다닌지 8년만에야 훈련원 참군(參軍)으로
한 계급 승진되었고,
이내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관직 을 내놓은 상태에서
복상(服喪)을 마친 다음 사복사(司僕寺) 주부(主簿)로 임명되니,
이때 이순신의 나이 마흔 둘이었다.
제 4 장 오랑캐를 막던 작은 싸움과 조정에서 인재를 구함
선조대 병술년(丙戌年[1586])에 바야흐로 오랑캐의 난이 빈발하므로
조정에서 공을 기용하여 조산만호(造山萬戶)로 임명하고,
다음 해 정해년(丁亥年)에는 녹둔도 둔전관(鹿屯島屯田官)을
겸임케 하였다. 이순신이 그 섬의 지형을 자세히 살피고 나서
병사 이일(李鎰)에게 누차 보고하기를
"섬이 홀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지키는 군사의 숫자가 적으니
오랑캐가 쳐들어 오면 어찌할 것인가"라고 하였으나,
이일은 "태평시절에 병사를 증원하여 무엇하리요"하면서 듣지 아니하였다.
그 일이 있은 지 오래지 않아 변방의 오랑캐가 과연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섬을 포위하였는데, 이순신이 적의 장수 몇 사람을
활을 쏘아 넘어뜨리고 이운룡(李雲龍)과 함께 추격하여,
적에게 포로가 된 우리 군사 60여명을 도로 빼앗아 왔다.
전투가 한창이던 중에 오랑캐가 쏜 화살에 이순신의 왼쪽 다리가 맞아
부상을 입었으나, 군사들이 놀랄까 염려하여 몰래 빼 버렸다.
이는 비록 작은 전투이긴 하였으나 이순신의 선견지명과
굳센 의지를 가히 알만 하니,
이 또한 이순신 역사의 한 조그만 기념이다.
용이 진흙탕에 묻혀 있으면 땅강아지와 개미에게 곤핍을 당하는 것이
늘상 있는 일이다. 이 일도 또한 공의 공로를 시기해 마지않던
김우서의 화신인지, 공을 포상할 뜻이 애초부터 없었을뿐더러,
이순신의 증병(增兵) 건의를 묵살했던 것을 부끄러이 여겨
이순신을 죽이려 하였다. 이순신이 이일의 부름을 받아 영(營)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친구인 선거이(宣居怡)가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술을 권하여 이르기를,
"이 술에 취하면 형벌을 받을 때에 고통을 잊을 수 있으리라"했다.
이에 이순신이 정색하여,
"죽고 삶이 다 천명이니 술은 먹어 무엇하리오"라고 말하고는
끝끝내 영내로 들어간즉, 이일이 패전보고서를 제출하라고 위협하며
꾸짖는 것이었다. 이순신이 대답하기를,
"내가 군사증원을 누차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한 경위가
문서로써 명백히 나타나 있는데 어찌 나를 죄주며,
또한 내가 힘껏 싸워 적을 물리치고 아군 포로를 탈환해 왔거늘
어찌 패전했다 하느뇨"하고 음성과 안색이 다 꿋꿋하니,
이일이 말문이 막혀 더 이상 힐문하지를 못하였다.
그런데도 이일은 마침내 조정에 무고하여 이순신의 관직을 뺏고
백의종군케 만들었다.
재주 있으면 시기의 대상이 되고 공로가 있으면 죄를 얻으니,
그 당시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가히 알 것이다.
그러나 문충공(文忠公) 유성룡이 공의 재주를 높이 사서
무관 중에는 우선 발탁, 등용해야 할 인재라고 거듭 천거하곤 하였다.
선조대 무자년(戊子年[1588])에 정읍(井邑) 현감으로 임명되고
더불어 태인(泰仁) 현감도 겸직하였으니,
이때에 태인 고을의 수령 자리가 오래도록 비어 있었던 것이다.
미결(未決)로 쌓인 장부와 문서를 잠깐 사이에 모두 처리 해결하니,
온 고을 사람이 모두 경탄하고 어사 (御史)에게 글을 올려
이순신을 태인 현감으로 임명해 달라고 청원하는 자가 허다했다.
호랑이 같은 장수감이 정사(政事)에도 재주가 뛰어났던 것이다.
경인년(庚寅年[1590])에 고사리(高沙里) 첨사(僉事)로 임명받았으나,
수령을 첨사로 이동시킨다고 대간(臺諫)이 반대함으로써 취소되어
임기를 넘긴 채 현감 자리에 그대로 머물렀으며,
또 얼마 안가서 만포(滿浦) 첨사로 임명받았으나 이번에도
대간이 갑작스런 승진이라고 반대하여 끝내 저지되었다.
그러던 중, 다음해 신묘년(辛卯年)에 왜구의 발호 소식이 날로 커짐에
이제 비로소 장수의 재목을 구하기 시작하니
이순신이 빛을 볼 날이 점점 가까워지게 되었다.
진도(珍島) 군수로 임명되었다가
부임 전에 가리포(加里浦) 진수군절제사(鎭水軍節制使)로 변경 임명되고,
다시 미처 부임하기 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임명되니 이때 나이 마흔 일곱이었다.
이는 이순신이 해상에 발을 내딛게 된 시초이니
이제야 영웅이 그 무용(武勇)을 떨칠 터전을 얻은 것이다.
제 5 장 이순신의 전쟁 준비
이때 풍신수길이 제 나라 안의 각 지방 무인들을 한 계통으로 통합하고는
야심을 크게 품어, 서쪽 나라들의 형세를 엿보면서
사신을 보내어 우리 나라의 속사정을 탐지하고,
번번히 국서(國書)를 보내어 모욕을 주곤 하였다.
그런즉 양국간의 일전(一戰)의 기미가 바로 코앞에 닥쳤는데도
어리석기 짝이 없는 조정의 벼슬아치들은 가만히 앉아서
왜가 쳐들어 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가하면,
왜구가 장차 군사를 일으키리라고 예언하는자도 고작해야
한가한 이야깃거리로나 삼아 왜의 사신이나 목베자고 하며,
명(明)나라의 의견을 들어보자고나 하지 스스로 나라를 지키고 자립함을
구하는 자가 도무지 없었다.
다만 묵묵히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서 침식(寢食)을 잊은 채로
후일의 큰 전쟁을 예기하여 대비하는 이는
오직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 한 분 뿐이었다.
본영(本營) 및 속진(屬鎭)을 지휘하여 군량을 비축하고 병기를 정비하며,
군사를 조련하고, 해로를 자세히 살펴 행군하고 왕래할 길을
마음 속으로 정해 놓으니, 오호라, 이순신이 절도사로 나간 지 1년만에
왜란이 일어났는바
이와 같이 짧은 기간의 대비로써 큰 공을 이룬 것 이다.
게다가 기발한 지혜를 내어 큰 배를 발명하였으니,
앞에는 용머리와 같은 입을 만들고, 등에는 끝을 뾰족하게 간 쇠를 박고,
배 안에서는 밖을 내다 볼 수가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하여, 수백 척 되는 적선 가운데를 거침없이 왕래하여도
아무 탈 없게끔 만들었는데,
그 모양이 거북과 흡사한 까닭에 거북선이라 이름하였다.
그것으로 왜적을 토벌 평정하여 한 때의 큰 공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곧 세계 철갑선(鐵甲船)의 비조(鼻祖)가 되어 서양 각국의 해군 기록에
왕왕 그 이름이 등장하고 있음을 본다.
정예의 군사를 거느리고도 조령(鳥嶺)의 험준한 지세를
고수하지 아니하고 탄금대(彈琴臺)에 진을 쳤다가 패전하여 몰살된
신립(申砬) 장군이 육전(陸戰)에만 전력을 기우리고 해군을 폐지하자고
장계하여 조정에서 허락코자 한 적이 있다.
이에 이순신이 막바로 장계하여 이르되,
"바다로 들어오는 도둑을 막는 데는 해군이 제일이니 해군과 육군을
다 살려야지 어느 한 쪽을 편벽되게 폐지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여,
해군이 폐지되지를 않았다.
그럼에도 조정에서는 해군을 업신여김이 갈수록 심하여,
항상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로 아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체찰사(體察使)에게 글을 올려,
"우리 나라의 방어 설비가 곳곳이 아귀가 맞지 않을뿐더러
왜놈이 두려워 하는 바는 해군인데,
도(道)의 관찰사 에게 협조문을 보내도 단 한 명의 수졸(水卒)도
보내 주지 않으며, 군량의 궁색함이 더욱 심하여
해군은 모름지기 그 기세가 사그러지고 말 것이니
나라 일을 장차 어찌하리요"
라고 하였다. 또 왜란이 난 후에도 장계하여 말하기를,
"부산 동래의 연해를 담당하는 장수들이 미리 함선을 많이 준비시켜 놓고
바다 어귀에 군사를 배치하여 무력 시위를 크게 벌이며
쌍방의 세력을 헤아려 진퇴(進退)의 방책이 있었던들
도적이 어찌 육지로 한 발자국이라도 내딛 을 수 있었으리오,
생각이 이에 미침에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한다"라고 하였으니,
당시 조정에서 해군을 육성할 뜻이 없었음을 가히 알 것이요,
다만 이순신만이 만약의 사태에 대비 하는 일에 홀로 힘썼음을
가히 알 것이다
제 6 장 부산 앞바다로 구원하러 나가다
이때에 육군을 보건대 신립 이일 등 서너 사람이 나누어 통솔하고
(일월록[日月錄]에 이르기를 "서너 동자(童子)가 나누어 통솔하니
적이 오기를 기다리지 아니하고도 그 패전할 것을 가히 알지"라 운운함),
수군을 보건대는 원균(元均) 배설(裵楔) 등 경망스런 자들이
각기 자기 주장만 펴니, 소위 방어준비가 실로 한심스럽다할 것인데,
당시 호남, 영남에 만리성(萬里城)이 되어 중흥의 기초를 세우기는
오로지 이순신에나 의지할 것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지위가 일개 수군절도사에 지나지 않으니,
그 지위가 극히 낮고 직권이 미치는 범위가 전라좌도에 한정되어
극히 좁았다. 만일 육해군 대제독(大提督)으로 임명 받았거나,
아니면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의 직이라고
좀더 일찍 임명받았더라면, 풍신수길이 백 명 쳐들어 온다 하더라도
물고기의 배 속에 장사지낼 터였으리라.
동래 부산 바다 어귀에 어두운 구름끼고 경기 영남 각지에 봉화가 올라
사람을 놀라게 하기 이를 데 없는데,
변방 국경의 신하는 제 뜻대로 몸을 놀릴 수 없어 밤새 잠을 못이루고
칼날 어루만지며 탄식하니 분노의 심정만 끝이 없어라.
임진년[1592] 4월 15일에 경상우도(慶尙右道) 수군절도사 원균의
통신문이 부쳐져 왔는데, 왜선 90척이 좌도의 축이도(丑伊島)를 지나
부산포로 잇달아 나타난다 하였다.
4월 16일에는 진시(辰時[아침 여덟 시경])에 경상도 관찰사 김래(金徠)의
통문이 왔는데, 왜선 400여 척이 부산포 건너편에 대어있다 하더니,
같은 날 해시(亥時[밤 10시경])에 원균의 통문을 또 접한 즉,
부산포 큰 고을이 이미 함락되었다 하는 것이었다.
이에 이순신이 즉시 휘하의 장수들을 불러 나아가 토벌할 것을 의논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우리 도의 수군은 우리 도나 지 키면 되지
영남에 들어 온 도적이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하며 회피하는 자가
심히 많은 중 에, 광양(光陽) 현감 어영담(魚泳潭),
녹도(鹿島)만호 정운(鄭運) 및 군관 송희립(宋希立) 등 이
분연히 말하기를 "영남도 나라의 강토요, 영남의 왜도 나라에 들어 온
도적이니, 이제 영 남이 함락되면 내일 전라도는 능히 보전되겠는가"고
하였다. 이에 이순신이 책상을 치며 "옳다!"하고,
각 포구의 전선(戰船)을 불러 모아 인마를 나누어 거느리고
29일 에 본영 앞바 다에서 약속을 단단히 하고는 출전을 서둘렀다.
선단(船團)을 지휘하여 막 떠나려 할 참에,
연락병으로 보냈던 순천(順天)의 수군 이언호(李彦浩)가 바삐 돌아와서
고하기를, "남해현(南海縣)의 현령과 첨사가
도적이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도망하여 종적을
알 수가 없으며, 관가와 여염집이 모두 다 한가지로 비어 있어
밥짓는 연기가 끊어지고, 관청창고의 곡식은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무기고의 병기는 땅바닥 가득히 흩어져 어지러운데,
유독 무기고 행랑 밖에서 절뚝발이 한 사람이 나앉아 울고 있더이다"고
보고하니, 오호라, 이순신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며
탄식해 마지 않았다.
무릇 남해는 전라 좌수영(左水營)과 멀지 않은 거리에 있어
북과 호각 소리가 서로 들리고, 앉았는지 섰는지 사람의 형체도
역력히 알 수가 있는데,
그 고을이 이미 비었은즉 본영도 도적의 환란이 눈 앞에 다가온 셈이었다.
그러나, 버티고 앉아서 본영을 지키고자 하니 사면(四面) 도적의 기세는
우쭐하여 날로 커짐에 팔도 인민의 울부짖는 소리가 땅을 흔드는데,
장수 신하의 이름을 가지고서 앉아서 보기만 하며 구원치 않음은
불인(不仁)한 일 이라 가히 할 바가 못되며,
각 지방을 모두 구원코자 해도 부산에 보낼 구원병도 잔약하기가
그지 없어 앞길의 승산이 묘연한데, 만약 다시 군사를 나누면
어떻게 싸움을 할 것이리오.
지혜로운 바가 못되니 할 바도 아니로다.
한밤중에 상 위에 엎드려 눈물을 뿌리며 방황 하다가
이튿날 장계를 올리고 마침내 부산 앞바다로 원균을 구하러
가기로 하였다.
배의 척수가 적함의 백분의 일이 못되고,
군사의 인원이 적군의 천분의 일이 못되며,
무기와 장비도 적의 것과 같이 정밀 예리하지가 못하고,
위세도 적처럼 장대(壯大)하지가 못하며,
전투경력도 적만 못하고, 물에 익숙하기도 적만 못하건만,
다만 '의(義)' 한 자로써 군사 의 마음을 격려하여 각자 도적과
더불어서는 같이 살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싸움의 길에 오르니,
판옥선(板屋船)이 24척이요, 협선(挾船)이 15척이요,
포작선(鮑作船)이 46척이었다.
5월 4일, 첫닭이 울자마자 배를 띄워 급히 나가는데,
지나는 길마다 쌍가마와 짐지운 말에 아내는 앞서거니 남편은 뒤서거니
하며 처량한 행색으로 집 떠나는 자가 길을 메우고 줄을 이었으니,
그들은 다 누구인가, 평상시 후한 녹(祿)을 받아 배불리 먹고
따뜻이 입으면서 금테, 옥테 둘러 태수(太守)니 영장(營將)이니 칭하던
인물들의 피난행차였던 것이다.
제 7 장 이순신이 치른 첫 번째 싸움 : 옥포해전(玉浦海戰)
이 날, 경상도 소비포(所非浦) 바다 가운데 진을 치고 밤을 지내고 나니,
이튿날인 5일과 6일에는 경상 전라 양도(兩道)의 장수들이
뒤쫓아 따라오는 자가 많았다. 그들을 한 곳에 불러 모아
재삼 약속을 단단히 한 후에 거제도 송말포(松末浦) 바다 가운데서
밤을 지내고, 7일 새벽에 배들을 출발시켜 적선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정오 무렵에 옥포 앞바다에 다다르니
척후장(斥候將) 김완(金浣) 등이 신기총(神機銃)을 쏘아
전면에 왜적이 있음을 보고하여 왔다.
이순신이 장수들에게 일러 당부하기를 산과 같이 조용하고
무겁게 행동하여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말도록 하고 군중(軍中)에도
똑같은 명령을 내린 뒤 대오를 정비하고 일제히 나아갔다.
앞에는 왜적선 50척이 정박하여 있는데,
배 사면에 갖가지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써넣은 장막을 둘렀고
장막 주변에는 홍색, 백색의 작은 깃발들이 제멋대로 걸려서는
바람에 펄럭이니 눈이 다 어지러웠다.
아군의 장수와 병사들이 일제히 떨쳐 일어나 죽기를 각오하고
동서로 부딪쳐 싸우니, 적의 무리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탄환에 맞거나
화살에 꿰어 유혈이 낭자하며 배에 실었던 물건들을 바삐 물에
던져 버리고 일시에 흩어짐에,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뭍으로 헤엄쳐 올라가 도망하는 자도 줄을 이었다.
아군이 더욱 분전하여 왜선 수십 척을 깨뜨려 부수고 불살라 없애니
온 바다에 연기와 화염이 하늘을 덮었다.
산으로 도망친 적병을 수색하여 잡으려다가 산세가 험준하고
수목이 울창하여 발 들여 놓을 데가 없을뿐더러 날 또한 저물어 가므로
부득이 영등포(永登浦) 앞바다로 물러가 주둔하며 밤을 지내기로 하였다.
신시(申時) 무렵에 왜의 큰 배 다섯 척이 갑자기 나타나서
머지 않은 거리에 떠 있기에 즉시 김해(金海) 앞바다로 쫓아가
격파한 후에, 창원해(昌原海)의 남포(藍浦) 앞바다에서 밤을 지냈다.
초파일(初八日) 이른 아침에 진해(鎭海) 고리량(古里梁)으로부터
왜선이 정박해 있다는 보고가 오므로 즉시 선단(船團)을 발동시켜
고성(固城) 적진포(赤珍浦)에서 왜선 13척을 발견하고는
여러 함선이 돌격 엄습하며 있는대로 포를 쏘아 대승을 거두었다.
군사를 잠시 쉬게 하고 아침을 먹으려 하는데,
적진포 근처에 사는 이신동(李信同)이라는 이가 산위에서
우리 배의 함기(艦旗)를 보고서는 등에 어린애를 들처업고 울부짖으며
갯가 모래밭으로 엎어질 듯 자빠질 듯 허겁지겁 달려오기에
작은 배로 실어와 왜적 무리의 종적 을 물었다.
이에 그가 답하여 이르기를, 왜적들이 어제 이 적진포에 와서
인명을 살해하며 부녀를 겁탈하고 재물을 우마로 실어다가
자기들 배에 싣더니 밤들자 곧 물 가운데에 배를 띄우고
소를 잡아 술을 먹으며 노래소리와 피리소리가 밤새도록 그치지 않다가
오늘 이른 아침에 고성 등지로 향하였습니다 한다.
또한 저는 노모와 처자를 난중에 잃어버리고 어디로 갔는지를
도무지 모르겠습니다고 말하며 비오듯 눈물을 쏟거늘,
이순신이 측은 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진중에 머물러 있게끔 하고자
하였으나 그 노모와 아내를 찾아볼 뜻으로 이신동이 따르지를 않았다.
이순신 등 장사(將士) 일행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더욱더 분격하여 일인(日人)과는 생(生) 을 같이 하지 않기로
스스로 맹세하고, 적선이 진을 치고 머물러 있는 곳으로 내쳐 향하였다.
이 싸움에서 왜적의 사상자(死傷者) 수는 수천 명을 넘고,
우리 쪽은 오직 순천대장(順天代將) 이선지(李先枝)가
왼쪽 팔에 총상을 입는 피해만 보았다.
제 8 장 이순신의 두 번째 싸움 : 당포(唐浦) 해전
바야흐로 예기(銳氣)가 성한 때에 비참한 소식이 돌연히 들려 왔다.
5월 8일에 고성 월명포(月明浦)에 이르러 진을 치고 병사들을 쉬게 하며
여러 장수와 왜적 격파의 방책을 상의하는 중에
경상도 도사(都事) 최철견(崔堅)이 서면으로 보고하여 오기를,
"적병이 서울을 이미 함락시키고 임금께서 평양으로 파천(播遷)하였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순신이 슬픔에 눈물을 금치 못하고
분노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분연히 기(旗)를 올려 내륙으로 들어가
도적의 무리를 소탕하고 나라의 치욕을 깨끗이 씻고 싶었으나,
군마와 군량(軍糧)이 부족할 뿐더러 수군을 한 번 거두면
삼남 지방의 울타리는 또 어찌될 것이뇨,
의분(義憤)에 몸을 떨고 피가 끓음이 원래 영웅의 본색이지만
경솔하게 몸을 놀리고 미쳐 날뜀도 또한 장수된 자의 절대 경계할 바였다.
이에 이순신이 슬픔과 분함을 억지로 누르고 본영(本營)으로 돌아와서
우수군절도사(右水軍節度使) 이억기(李億祺)에게 부산 방면의 왜적을
소탕하자고 글을 보내어 6월 3일에 같이 모여 왜적을 파하기로
약속을 정하고 손꼽아 날을 기다리던 차에,
약속된 날 사흘 전쯤에 적선 십수 척을 노량(露梁)에서 발견하였다.
그들이 더 모이기 전에 쳐부숴 없앨 계획으로
이순신이 전선(戰船) 23척을 혼자서 거느리고 노량 바다 가운데로
직행하여 왜선 10척을 공격하여 잡고서는 사천(泗川) 선창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해안으로부터 약 7, 8리쯤 되는 거리의 한 산 위에
왜적 400여 명이 홍기, 백기 등을 어지러이 꽂아 놓고
긴 뱀과도 같은 대형으로 진을 치고 있는데,
그 산 꼭대기에는 장막이 따로 설치되어 있고 언덕 아래에는
왜선 12척이 늘어서 있는 가운데 왜적의 무리들이 칼을 뽑아 들고서는
의기양양하게 굽어 보고 있는 것이었다.
총을 쏘아 이를 거꾸러뜨리려 하니 거리가 너무 멀어 쏘는 힘이
도저히 미치지 못하겠고 진격하여 맞싸우고자 해도 이미 썰물 때가 되어
배가 빨리 나아가지를 못하겠을 뿐더러 적은 높은 데 있고
아군은 낮은 쪽에 있어 지세(地勢)가 불리한 데다
서쪽 하늘을 돌아보니 해가 거의 넘어가 어두워지려 하고 있었다.
이순신이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려 이르기를
"저 도적의 오만한 태도가 매우 심하므로 물 가운데로 나오게끔 유인하여
한꺼번에 격파함이 좋은 계책일지라"하고 즉시 뱃머리를 돌리니,
과연 왜적 수백명이 배를 타고 달려 나오는 것이었다.
이에 거북선을 내보내어 포를 쏘고 돌격하며 죽기를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서 적선 여러 척을 격침시키니 적이 크게 놀라 다 도망하고
그림자도 보이지를 않았다.
이튿 날인 6월 1일에는 육지에 내려 왜적의 종적을 탐지하다가
2일 진시(辰時 : 오전 8시 전후)에 당포에 도착하여 본즉
적의 대선 9척, 소중선 12척이 나누어 정박하고 있었다.
그 중 큰 배 하나에 여러 층으로 된 망루가 높이 솟아 있는데.
그 높이가 서너 장(丈)쯤 되며 바깥면은 붉은 비단장막으로
둘러쳐져 있고 왜장(倭將) 한 명이 그 앞에 우뚝 서 있는지라,
거북선으로 막바로 들이닥쳐 중충위장(中衝衛將) 권준(權俊)이
그 적장(賊將)을 활로 쏘아 넘어뜨렸다.
적군이 혹 탄환을 맞거나 혹 화살을 받으며 어찌할 줄 모르고
황급히 달아 나기에 육지까지 내려가 끝까지 추격하려 할 때에
마침 "왜의 대선 20여 척이 소선 수백척을 이끌고 거제(巨濟)에 들어와
정박하였다"는 보고가 탐망선(探望船)으로부터 들어왔다.
바삐 노를 저어 다시금 바다 가운데로 나가니,
적이 '조선 전라도 좌수군절도사 이순신'의 깃발 그림자만 보고도
그 성위(聲威)에 놀라 떨며 벌써 5리 밖에서부터 일시에
도망쳐 숨는 것이었다.
연이은 싸움에 거듭 이김으로써 군사의 위세는 크게 떨쳤으나
적병은 날로 숫자가 늘어나는 만큼 우리측 사기는 날로 떨어져
온 진(陣)의 장사(將士)가 탄식하는 소리를 금치 못하는 가운데
이 날 당포 앞바다에 도착하여 보니, 호각소리가 구름을 뚫고
청랑하게 들리고 돛그림자가 푸른 하늘을 가득 메웠던 바
이는 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을 거느리고 와서 합류함이었다.
모든 군사가 기뻐 날뛰며, 이순신이 이억기와 손을 잡고서 말하기를
"왜적이 창궐하여 국가의 존망이 경각에 달렸는데
공(公)은 어찌 그리 더디 오느뇨?"라 하였다.
6월 5일에 안개가 하늘을 뒤덮어 지척을 분간키 어렵게 하다가
느지막해서야 차차 걷히기에 도망친 왜적을 쫓아 토벌하기로
이억기와 상의하고 돛을 달아 바다로 나갔다.
이때 거제에 사는 백성 7, 8명이 작은 배를 타고서 내달아 와 맞으며
말하기를,
저희가 장군을 기다림이 실로 오랩니다. 장군이 아니면 저희 부모가
도적의 칼에 어육(魚肉)이 되고 저희 처자가 도적의 총앞에
참혹한 귀신이 되어 전라도 전체가 크게 한 번 피비린내 나는
세계가 되었을 것을 다행히도 하느님이 장군을 내려 보내셨습니다.
장군이여, 장군이여, 저희를 낳은 이는 부모님이지만 저희를 살린 이는
장군이시니 장군도 우리 부모님이십니다.
당포에서 쫓겨간 도적이 당항포(唐項浦)에 몰래 머물러 있나이다.
장군께서는 하루라도 빨리 신위(神威)를 떨치셔서 저희를 살리시소서
하는 것이었다. 이에 곧 당항포의 형세를 물으니 멀기는 10여 리쯤 되고
넓기는 배가 움직 일 만하다 하는지라,
먼저 두세 척의 탐망선을 내어 지리를 살피게 하면서
왜적이 만약 쫓아 오거든 쫓기는 양 유인해 오라고 엄중히 당부하여
보내고 함선의 주력대(主力隊)가 그 뒤를 몰래 따라 갔다.
탐망선이 바다 어귀로 들어가자마자 신기포(神機砲)를 쏘아
적을 발견했음을 보고하거늘, 전선(戰船) 4척은 포구에 잠복하고
주력대가 옹위하여 들어간즉 강을 끼고 20여 리 양편 산허리에
적병이 있는데 그 사이의 지형이 그다지 좁지는 않아
전선이 충분히 움직일만 하였다.
우리 배가 모두 줄을 지어 차례로 들어가서 소소강(召所江) 서편 언덕에
다다르니, 판자집 만큼 큰 검은 색 왜선 9척과 중선(中船) 4척,
소선(小船) 13척이 정박하여 있는 것이었다.
그 중 가장 큰 배 한 척의 뱃머리에는 3층으로 된 널집이
따로 지어져 있는데, 회칠한 벽과 단청(丹靑)이
마치 절간의 법당과 흡사하며 널집 아래에는 검게 물들인 위에다
흰 꽃 무늬들이 크게 그려진 명주 장막이 드리워 있고
장막 안에 무수한 왜놈들이 벌여 서 있었다.
또 조금 있다가 왜의 대선 수 척이 포구 안쪽으로부터 나와서
한 곳에 모이니, 각 선에 모두 흑기를 꽂고 기마다에는 모두
'남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花經)의 일곱 자를 써놓고 있었다.
적이 우리 배를 보더니 다투어 총을 쏘므로 여러 배들이 에워싼 가운데
거북선이 앞장서서 돌입하여 꽤 오래 접전하였으나
얼른 승부가 나지를 않았다. 이에 이순신이 말하기를,
저들이 만일 세(勢)가 궁(窮)해져서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면
죄다 섬멸키가 어려워지니, 우리가 거짓으로 후퇴하는 척하여
포위를 풀고 진(陣)을 거두었다가 저들이 배를 옮기는 틈을 타서
좌우로 협공함이 좋겠다
라 하고 한 쪽을 열어 주니,
왜선이 과연 포위가 풀린 그쪽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우리 배들을 독려하여 다시금 사면을 포위하고 거북선으로
그 층각(層閣) 있는 배의 아랫 부분을 들이받으며 총포를 쏘니,
선각(船閣) 위에 높이 앉았던 적장(賊將)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물에 떨어지고 그 나머지 배들도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른채
사방으로 흩어지는데, 후에 항복한 왜병의 입을 통해 들은즉
이 전투에서 죽은 자는 풍신수길이 총애하던 장수
우시축전수(羽柴筑前守)라는 것이었다.
싸움을 더욱 독려하여 왜선을 전부 불태워 없애고
배 한 척만 짐짓 놓아 돌려 보내니, 죽이려면 죽이고 살리려면 살림이
장군이 아니더면 할 수 없는 신위(神威)에 다름아니었다.
6일 새벽에 방답첨사(防踏僉使) 이순신(李舜臣)을 불러 이르기를,
"어제 놓아 보낸 배의 나머지 도적이 당항포에서 산으로 올라간 도적과
합세하여 새벽녘을 타서 슬그머니 침범하여 오리니 그대가 이를 쳐서
모두 잡으라"고 명하였다. 첨사 이순신이 출동한 지 얼마 안되어
급보가 들어왔다. 그 내용인즉, 과연 바다 어귀를 벗어나자마자
왜놈 수백 명이 탄 배 한 척을 발견하였는데
그 중 왜장(倭將)은 나이가 이십사, 오세 가량으로 용모가 씩씩늠름하고
복장이 화려한데 칼을 짚고 홀로 서서 그 무리를 지휘하며
두려워하거나 겁먹은 기색이 조금도 없거늘
이(李) 첨사가 누차 활을 쏘아 맞히니 10여 발의 화살에 맞은 뒤에야
비로소 소리를 지르며 물에 떨어졌고 나머지 무리도
죄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이었다.
이순신이 적을 요량(料量)함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적장이 탔던 배를 끌어다 살펴보니 배안에다 바람이 잘 통하게
방을 따로 꾸며 놓고 방안에는 장막을 극히 사치스럽게 쳐놓았으며,
그 안에 문서를 가득 채운 작은 궤가 하나 있어 열어 보니
그 배의 왜장이 군사를 나눠 받은 기록인데 무릇 3천 40명에다
이름 밑에는 각자 혈인(血印)을 찍어 맹세한 것이었다.
이 날에 비가 쏟아지고 먹구름이 일어 바닷길을 분간할 수 없으므로
당항포 앞바다에 그대로 머무르며 군사를 쉬게 했다가
이튿날 영등포 앞바다로 나아가 이르매 싸움에 져 도망치는 왜선 7척과
맞닥뜨리게 되어 전부 쳐서 불태워 없애니,
이후로는 적병이 이순신을 만나면 크게 떨며 보이기만 하여도
곧바로 달아나서 험한 곳에 틀어박혀서는 나오지를 않았다.
이 당시 우리나라 군중(軍中)에서는
옛적 중국의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 진(秦) 나라의
전공포상법(戰功褒賞法)을 본따서 적군 병사를 죽이고
그 머리를 베어 온 수의 많고 적음으로써 공로의 우열을 가르곤 했는데,
이순신이 이르기를 "머리를 벨 시간이면
그 동안에 활과 총을 한 번이라도 더 쏘는 것이 옳다"하고,
드디어는 그 법을 개정하였다.
이번 싸움에서 쳐부수어 침몰시킨 왜선의 수가 82척이요
왜군의 시체가 바다를 뒤덮었는데, 우리 군사는 전사자가 18인이요
부상자가 30인에 불과했다.
제 9 장 이순신의 세 번째 싸움 : 견내량(見乃梁) 해전
왜놈들이 바다를 차지하여 종횡으로 들고 나며 우리 병사로 하여금
분주히 명령을 좇음에 피로케 하고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옮기고 나름에 수고롭게 한 다음 서서히 그 쇠잔함을 타서
몰아쳐 뺏으려는 악랄한 계교를 품고 있었는데,
문득 이순신을 만나서 싸우면 반드시 패하며 공격하면 꼭 거꾸러지고
마니 그들이 품은 계교가 그림의 떡으로 되고 마는지라.
풍신수길이 이에 대하여 크게 이를 갈고 휘하의 제장(諸將)을 불러 모아
이순신의 적수(敵手)될 자 있는지를 물으니,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란 자가 팔을 걷어부치고 선뜻 자기가 한번
나서보기를 청하였다. 이에 풍신수길의 허락을 얻고
수군총대장(水軍總大將)을 임명받아 살마병(薩摩兵) 13만을 거느리고는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진공해 오니,
수가는 원래 수길의 각 번(藩) 정벌전(征伐戰)에 누차 종군하여
기이한 전공을 여러 번 세운 명장이었다.
이순신이 왜적의 내공(來攻) 소식을 접하고 여러 장수들과 약속하여
일시에 배를 내어 남해의 노량(露梁)에 이르니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가 전선 7척을 거느리고 와서 합세하였다.
7일에 고성(固城) 땅 당포에 이르니 가파른 산 꼭대기로부터
머리 풀어 산발한 웬 목동(牧童)이 우리 배를 보고는
급히 내려와 말하기를,
"저는 피난민 김천손(金千孫)이로소이다" 하며,
"오늘 미시(未時 : 오후 2시 전후)쯤에 왜적의 배 70여 척을
고성땅 견내량에서 보았나이다"고 고하였다.
이에 장수들에게 다시금 단단히 이르고는 그리로 향하던 차에,
한바다에 채 못미친 곳에 왜군의 선봉 20여 선이 진을 치고 있고
그 뒤에는 무수한 적선이 어지러이 늘어서 있는 것이었다.
이순신이 지형을 찬찬히 살피더니 제장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바다가 좁고 뱃길 또한 얕으니 영웅이 군사를 쓸 땅이 못되도다.
내가 이제 탁 터진 큰바다 가운데로 나오게끔 유인하여 적을 섬멸하리라"
하고, 판옥선(板屋船) 5, 6척을 지휘하여 적의 선봉을 뒤쫓으며
덮쳐 격파할 모양을 거짓으로 내보였다.
그러자 각 배의 왜장이 일시에 돛을 달고 치달아 쫓아 오거늘
우리 배가 퇴각하는 척하며 한바다 가운데로 적을 끌어 내니
그것이 곧 승패의 갈림길이 된 셈이었다.
솟구쳐 오르는 파도는 장사(壯士)의 의기(意氣)를 북돋우며
광활한 하늘은 장군의 품은 뜻과도 같은데 우뚝한 양 어깨에
4천년 국가의 운명을 짊어지고 대대로 원수 맺은 왜적과
승부를 겨루게 되니, 오호라,
남아가 이에 이르러 비록 죽은들 무슨 한이 있으리오.
승자총(勝字銃) 한 방을 놓음에 거북선이 돌진하여 왜선 2, 3척을
쳐부수니 적들은 넋을 잃고 우리 군사들은 사기가 충천하였다.
순천부사(順天府使) 권준(權俊)과 광양현감(光陽縣監) 어영담(魚泳潭)이
죽기를 무릅쓰고 먼저 올라가서 적장 2명과 왜병 22명의 머리를 베고
층각(層閣)있는 왜선 두 척을 쳐서 침몰시켰으며,
사도첨사(蛇渡僉使) 김완(金浣)과 흥양현감(興陽縣監) 배흥립(裵興立)이
적장 1명과 왜병 24명의 머리를 베었고
이순신(李舜臣)·이기남(李奇男)·윤사공(尹思恭)·가안책(賈安策)
·신호(申浩)·정운(鄭運) 등 제장과 군졸들이
각자 용맹을 떨치고 다투어 앞장서서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그리하여 일천 개의 돛폭이 바람에 휘날리고 일만 개의 총이
우뢰 같이 불을 뿜는 가운데 삽시간에 왜군의 피로
바닷물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왜적의 배 73척에 한 척도 온전히 남은 게 없고,
다만 싸움이 붙었을 때 뒤에 처져 있던 적선 몇 척이 배가 불타고
장수가 목베이는 광경을 보고는 바삐 노를 저어 도망갔을 뿐이다.
웅천(熊川) 사람 저말(諸末)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 갔을 적에
대마도(對馬島)에서 나도는 글을 언뜻 본즉 이때 왜병의 죽은 자가
9천명으로 되어 있더라고 하였다.
다음 날인 9일에 왜선 40여 척이 안골포(安骨浦)에 머물러 정박하고
있다고 탐망꾼이 보고하여 오기에 이순신이 즉시 군사들의 사기를
다시 돋구고 전라우수사 및 경상우수사와 상의하여 배를 재촉하여
전진하다가 날이 저물므로 거제 온천도(溫川島)에서 밤을 지냈다.
이튿날인 10일 새벽에 안골포에 이르러서 적의 운송선(運送船) 59척을
유인하여 남김없이 불살라 없애고, 그 병선(兵船)을 향하여 다시금
싸움을 벌인즉 살아남은 왜적들이 일제히 육지로 내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순신이 또 가만히 생각하되,
'만일 왜선을 전부 불사르고 왜적들이 돌아갈 길을 끊어버리게 되면
저들이 필시 내륙에서 궁지에 처한 도적이 되어서는
난리를 피해 숨어 있는 우리 인민들을 마구잡이로 죽이리라' 하여,
1리(里)쯤을 물러서서 저들의 도망갈 길을 열어 주니, 오호라 어질도다,
나라를 사랑하는 이는 반드시 백성도 사랑하는도다.
이튿날 아침에 왜적이 패주한 곳을 둘러보니,
왜적이 싸우다 죽은 자기 군사들의 시체를 두루 열두 군데에다
쌓아 놓고는 불을 질렀는데, 황급히 도망치던 중에 미처 다 태우지를
못하였던지 손목이나 다리 조각들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흩어져 있어
그 참상이 보는 이의 탄식을 절로 낳게 하였다.
그 후에 우리 나라 사람으로 포로가 되었다가 생환한 자의 말에 의하면,
왜적의 장졸(將卒)들이 매양 칼을 뽑아 들고는 전라도 쪽을 가리키며
이를 몹시 갈더라 하니,
그들이 어찌 패하여 달아난 치욕을 하루라도 잊으리요마는
충무공 이순신이 바다의 만리장성이 되어 있으므로
그들로서는 공연히 마음만 태우는 셈이었다.
이 때부터 공의 크나큰 명성이 왜국의 아이 울음소리를 그치게 할 정도가
되어 출전하는 곳마다 싸우지 아니하고도 저절로 이기곤 하였으니,
한 번은 김해성(金海城) 안팎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의 무리들이
멀리 있는 포구에서 고기잡이 하는 배들의 불빛을 보고서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군사가 온다고 지레 놀라 순식간에 도망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제 10 장 이순신의 네 번째 싸움 : 부산(釜山) 해전
임진 계사(癸巳)년간에 각지의 번화한 도회지에는 왜인들이 흙을 쌓고
집을 지어 혹 4,5백 집 되는 곳도 있으며
혹 2, 3백 집 되는 곳도 있어(이상은 충무공 장계[狀啓] 중에서
뽑은 것임), 당당한 한국을 자기네 식민지로 봄은 곧 당시 풍신수길의
야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웃과의 우의(友誼)는 생각치도 않고 명분 없는 군사를 일으켜
갑자기 우리 나라를 침범하다가,
우리의 큰 호걸장군 이순신을 만나 한 번 패하고 두 번 패하고
세 번을 싸워도 패하는 데까지 이르러 10만 용사를 모두
바다에 장사지냈으니, 그들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어찌 감히
싸울 뜻을 다시 품어 보리요. 그저 삼십육계의 상책만 생각할 따름이니,
임진란의 역사를 읽는 자가 부산 싸움의 대목에 이르게 되면
큰 술잔을 높이 들고
"조선 만세! 조선수군 만세! 조선 수군통제사 이순신 만세!"를
부를지로다.
경상도 해안에 왜구의 그림자가 문득 끊어지고 각지에 들끓던
도적의 무리들이 낮이면 숨고 밤에만 다니면서 도망갈 생각으로 바닷가에
모여드니, 말로(末路)에 이른 강도들이 오히려 그 기세가 장대해졌는바
전선이 5백여척이요 군사가 십 수만에 달하였다.
이순신이 경상우도 순찰사(巡察使) 김쉬(金)의 통지문을 받아 보고서
전라좌도와 우도의 전선 도합 74척을 정리하여 계사년 2월 24일에
출발하여 27일에 웅천 자포(紫浦)에 이르니, 고성·진해·창원 등지에
진치고 있던 왜군들은 전라도 군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서
도망친 지가 이미 여러 날 되었다.
이튿날 새벽에 양산(梁山) ·김해 두 고을 앞바다 쪽으로 나아가는데,
마침 그때 창원 사람 정말석(丁末石)이 왜적의 포로가 된지 3일만에
밤을 타서 도망쳐 와서는 왜적이 가덕도(加德島) 북서쪽에 몰래 잠복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29일 첫닭이 울 때쯤 출발해서 가덕도에 도착하여
본즉 왜적의 종적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고,
장림포(長林浦)에 도착하니 왜의 대선(大船) 네 척,
소선(小船) 두 척만 보이는 것이었다. 대선 한 척을 쳐부숴 없애고,
군사를 좌우로 나누어
양강(兩江 : 낙동강[洛東江]과 밀양강[密陽江]을 말하는 듯함 :옮긴이)
으로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강 어구가 좁아서 도저히 싸움을 벌이기
어려우므로 군사를 돌이켰다.
9월 1일에 몰운대(沒雲臺)를 지나치던 중에
동풍(東風)에 파도가 솟구치는 데서 왜의 대선 다섯 척을 격파하고,
다대포(多大浦)에 이르러 왜의 대선 8척을 격파하였으며,
서평포(西平浦)에 이르러 왜의 대선 9척을 격파하고,
절영도(絶影島)에 이르러 왜의 대선 2척을 격파하고는
부산 앞바다에 이르러 적의 배를 탐지해 보니 대략 500여 척의 큰 숫자에
달하였다.
그들이 선창 동편에 열지어 정박하고 선봉의 대선 네 척이
초량(草梁)으로 들어가는 목에서 배회하기에,
이순신이 원균(元均)·이억기와 약속하여 말하건대
"우리 군사의 위세로 어찌 이것을 치지 아니하리요"하고 싸움을
독려하였다. 우부장(右部將)인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
거북선 돌격장인 군관(軍官) 이언량(李彦良),
전부장(前部將)인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좌부장(左部將)인 신호(申浩) 등이 앞장서 나아가서
선봉의 왜 대선 네 척을 우선 쳐부수고 그 기세를 몰아쳐
긴뱀[장사(長蛇)]전법으로 돌진하니,
진성(鎭城)의 동쪽 산 5리(里)에 머물고 있던 왜적이 우리 군사의 위세를
보고서는 감히 나와 싸우려는 자가 없었다.
우리 병사들이 그 앞으로 곧장 나아가서 부딪친즉 왜적들이 모두 일시에
산위로 기어 올라가서 여섯 군데로 나뉘어 진을 치고는 엎디어 보면서
활과 총을 우박같이 쏘아대는데 우리 배를 많이 맞추기도 하였다.
이에 우리 배의 군사들이 모두 분기(憤氣)가 더욱 끓어올라
죽기를 각오하고 다투어 돌격함에 장군전(將軍箭)·피령전(皮翎箭)
·장편전(長片箭)·소철환(小丸)·대철환(大丸)의 각종 화살과 총탄을
일시에 쏘면서 종일토록 교전하였다.
3도의 군사들이 힘을 합쳐 왜적선 백여 척을 부숴 없애니,
왜적이 그 시체를 불태우는데 냄새가 수백 보(步) 거리까지 가득찼다.
날이 저물므로 좌우의 도적떼로부터 앞뒤로 협공을 받지 않을까도
염려하여 제장(諸將)과 더불어 배를 돌려서 삼경(三更)녘에 가덕도에
도착하여 거기서 밤을 지냈다.
이튿날, 재차 왜적의 소굴을 소탕하고자 하였으나,
다만 적이 바다에서 패하면 뭍으로 도망가고 육지에서 패하면
바다로 도망감을 장기(長技)로 삼는지라,
이번에 왜적선만을 죄다 격멸하게 되면 저들이 다시금 육지로 올라가서
살륙 과 약탈을 자행할 것이 뻔한데,
그렇게 되면 백성들이 당할 혹심한 화(禍)가 또한 그 얼마요.
이공(李公)이 이 점을 깊이 경계하여, 왜적을 수륙 양면으로
같이 칠 것을 경상도 육군의 제장과 결의하고 전투를 일단 중지하였다.
이 번의 싸움은 비록 마지막 궁지에 처한 왜구를 토벌 평정함에
불과하였으나 그 살상(殺傷)시킨 왜적의 숫자는
한산도 싸움에 못지 아니하였다.
개선의 노래는 귀에 양양하고 만인이 입을 모아 이장군을 찬미하니
대장부의 영광이 이에 극진하였다.
그러나 이 때 이순신의 가슴 속은 마치 바늘로 찌르는 듯,
화살이 무더기로 날아와 꽂히는 듯하여 두 줄기 슬픈 눈물이 눈에서
뚝뚝 떨어지니 이는 무엇 때문이었는가?
그것은 녹도만호 정운의 전사를 슬퍼함에서였다.
정운은 임진 변란이 일어난 이래로 이순신과 뜻을 같이하고
일을 같이하던 사람이었다.
그 충의(忠義)가 금석(金石)을 꿰뚫을 만큼 굳어
매번 싸움에서마다 떨쳐 일어나 앞장서곤 하며,
큰 도적을 한 입에 삼켜버리지 못함을 한스러워 하고 일신의 생사는
도외시하던 이였다.
그런데 이번 싸움에서 적의 소굴로 돌진하다가 무도한 적탄에
머리를 관통당하고 죽고마니, 공(公)이 글을 지어 제사지내고
그 애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던 것이었다.
제 11 장 다섯 번째 싸움 이후의 이순신
여기서는 다음의 세 가지 일을 말하려 한다.
첫째, 이순신이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로 벼슬이 오른 일.
둘째, 당시의 민정(民情)과 조정의 붕당(朋黨).
세째, 이순신이 식사할 겨를도 없이 일이 많았던 일.
수그러들 줄 모르는 흉포한 왜적을 대여섯 번의 싸움마다
영웅의 기세로써 쳐서 넘어뜨리고 온나라 백성으로 하여금
안심케 하였으니 그 드높은 공적을 과연 무엇에다 비기리요.
대략 이때쯤에는 이순신이 바다 위에서 활약한 지가
무릇 3년이 되었으니,
"바다를 두고 맹세하니 고기와 해룡(海龍)이 감동하고,
산을 두고 맹세하니 초목이 알아듣도다
"(서해어룡동[誓海魚龍動], 맹산초목지[盟山草木知];
충무공(忠武公)의 시(詩)임)" 라 할 정도의 순일한 충성심을 품었으며,
"이 원수를 멸한진댄 죽어도 무슨 유감이 있으리요"
(차수약멸[此讐若滅],수사하감[雖死何憾]; 충무공(忠武公)의 시(詩))
라 하여 진심어린 정성을 보이면서
"낮이면 앉지 아니하고 밤에도 자지 않으며 먹어도 단맛을 모르고
아파도 눕지 아니하여"
(주불좌 야불면 식불감 병불와 [晝不坐 夜不眠 食不甘 病不臥];
『난중일기(亂中日記)』에서 뽑은 글귀임)
물 위에 비친 가을 경치에도 백발을 쓰다듬을 뿐이니,
대장부의 나라 위한 장한 뜻이 대략 이러하였다.
이때에 조정에서 이순신의 공을 포상하여,
경상·전라·충청 3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함으로써 3도의 수사(水使)가
모두 그 관할하에 있게끔 하였다.
역사책을 읽는 자가 이에 이르면 필시 춤을 출 듯 기뻐 뛰며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즉, "예전에는 이 충무공이 전라도 좌수사의 직권으로도 능히 공을
이루었거늘 하물며 이제 3도수군통제사가 되었으니
쳐서 항복 받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으며,
예전에는 이 충무공이 전라좌도의 적은 수의 수군으로도
능히 공을 이루었거늘 하물며 이제 3도 수군 전부로써 싸워서
쳐부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으며,
예전에는 이 충무공이 군권(軍權)을 완전히 장악 못하고
군령(軍令)이 통일되지 못한 때였는데도 능히 공을 이루었거늘
하물며 이제 군권을 완전히 손에 쥐고 군령이 하나로 내려질 때가
되었으니 쳐서 이기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으며,
예전에는 이 충무공이 거느린 병력이 크게 떨칠 만하지 못하고
위세가 널리 드러나지 못한 때였는데도 능히 공을 이루었거늘
하물며 이제는 거듭 승전한 여세를 몰아서 저 쇠잔한 도적을
제압할 때이니 불러와 항복시키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뇨?"
하리라.
그럴지나 그 내용을 살펴보면,
공이 통제사 된 이후가 통제사 되기 이전보다 사정이 어렵고
싸움에 이긴 이후가 싸움에 이기기 전보다 사정이 어려웠도다.
듣기에 믿기지를 않는가? 그렇다면 내가 이를 자세히 논하리라.
이순신이 장계(狀啓)에 쓰기를
지난 해의 6, 7개월 사이에 6만의 군사와 허다한 군량이 경기도 땅에서
모두 쓰러 지고, 병사(兵使)가 영솔하는 4만의 군사 역시
모두 얼어 죽거나 굶어 죽었습니다. 이제 또 순찰사(巡察使)가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북상해 버렸으며,
다섯 의병장이 연이어 군사를 일으켜 멀리 싸움하러 떠났습니다.
이런 이후로 경내(境內)가 어수선하고 공사(公私)의 재물은 죄다
탕진되었으며, 그나마 남아 있는 늙은이와 어린애들마저도
병사를 수송하고 군량을 운반할 때에는 채찍질을 문득 따르다가
웅덩이와 구렁으로 넘어지고 자빠지는 자가 비일비재하거늘,
그에 더하여 소모사(召募使)가 내려오더니 내지(內地)와 연해(沿海)를
가리지 않고 군사 의 수를 막무가내로 정해 놓고는
그를 뽑아낼 것을 독촉함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라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연해 각진(各鎭)에서 관할지역을 쓸어서 바다로 내려 보낸 군사의 숫자가
모두 합해 4만 여 명이 되는데,
이들은 모두 농민인바 농사를 전부 폐하게 되었으니
가을걷이 할 희망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 나라 팔도 중에 오직 이 호남 지역이 그래도 온전하여
군량은 모두 이 도에서 나왔는데, 도내의 장정들이 죄다 수군
혹은 육군으로 부역하고 노약자는 군량을 운반함에
경내에 도대체 남자가 남아나지 않았는지라,
봄이 다 가도록 밭에 사람 기척이 없으니,
비단 민생(民生)이 업을 잃었을 뿐 아니라 군량과 국가재정의 바탕을
댈 방도가 또한 막 막해졌습니다.
라고 하였으니, 각군 각읍의 피폐함을 가히 알 만하다. 또 이르기를,
명나라 군사가 남쪽으로 내려 오매 민가 마을에 출입하면서
사람과 재물을 겁탈하고 노략 하는가하면 들에 곡식을 손상시키는 등
지나는 곳마다 제멋대로 구니 무지한 백성들이 풍문 으로 듣고는
달아나 흩어지고 있습니다
라 하였으니, 이웃 나라 원병의 작폐도 가히 알 만했다. 또 이르기를,
올해에는 흉적이 험지(險地)에 들어앉아 곳곳에 암굴을 파고서
두려워 감히 나오지를 않으니, 해상에서 굶주려 파리한 군졸로써
저 굴속에 들어앉은 도적들을 치기에는 그 형세가 매우 어려운 지경에
있습니다.
라고 하였으니, 왜적을 토멸한 방편을 세우기가 어려웠음도
가히 헤아릴 만하다.
이 때를 당하여 나라의 온 상하신민(上下臣民)이 와신상담하여
군사와 군량을 보충하고 조달하는데 겨를이 없이 분발하고
서로 격려해야 할 때이거늘 조정(朝廷)의 상태를 볼작시면
과연 어떠했는가.
의주(義州) 한 귀퉁이에서,
"이제 나라의 명맥이 다하였으니 우리는 장차 어디로 갈꼬"하고
임금과 신하가 서로 부여잡고 통곡하다가,
다행히도 나라 안 군사와 백성들이 피를 흘리고
이웃 나라가 원조해 준 데 힘입어 옛 도읍에 들어온지 하루도 안되어,
어제는 무슨 욕을 당하였든지간에 오늘은 우선 즐기리라 하며
내일에는 무슨 화가 오든지간에 오늘은 잠시 잠이나 자리라 하여,
형제간에 창칼을 들어 쓸데없는 집안싸움을 벌이며 시비나 가리고
불구대천의 크나큰 원수를 잊어버리니,
여러분 가운데 임진왜란 때의 기록들을 읽다가 책을 덮고 눈물을 쏟지
않을 자 있으리이까.
그러나 팔뚝을 잡아끌어 제지한다고 주저하는 자는 남아가 아니며,
역경을 만나서 뒤로 물러서는 자는 영웅이 아니리라.
보라, 충무공 이순신이 수 년간에 걸쳐 저혼자 해놓은 일들을 보아라.
한산도(閑山島)는 적을 막는 요충(要衝)이라 하여 그리로 진을 옮겨 치고,
거기서 밤낮없이 군졸을 훈련시키면서 늘상 '충의'(忠義) 두 자로써
격려하였다. 조정에 주청(奏請)하여 진중(陣中)에서 무과(武科)를
시행하여서는 인재를 가려 뽑았다.
백성을 모집하여 소금을 만들도록 하고 독을 구워 지으며,
곡식을 사들여 쌓았다. 구리와 쇠를 캐거나 혹은 사모아서
총포를 제작하였고, 염초(焰硝)와 화약을 널리 구해 모으거나
혹은 제조해서 각 영(營)에다 나누어 주었다.
투항해 온 왜병 중에서 총 잘 쏘는 자를 택하여 우리 군사들로 하여금
그 기술을 배우게 하였고 저들의 군사 장비가 우리보다 훨씬 낫다 하여
왜총(倭銃)과 왜탄(倭彈)을 본떠 만들게 하였다.
유민(流民)들을 불러모아 돌산(突山) 등지에
둔전(屯田)을 경작케함으로써 한편으로는 그들의 생업을 안전케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군량을 준비하게끔 하였다.
의병과 승병(僧兵)을 각처로 나누어 보내어서 요해처(要害處)를
지키게 하고, 수륙의 요해지에 관해서 조목조목 보고하여 조정에서
잘 선택해 주기를 기다렸다.
전선(戰船)을 많이 지어서 수군의 군사를 더욱더 모집하였으며,
연해의 군량과 병기가 다른 도로 옮겨 넘어감을 막아서 해안 방위의
성세(聲勢)가 장대하게끔 하였다.
파수꾼과 정탐꾼을 사방으로 세우고 보내어 왜적의 동정을 잘 살피도록
하였다.
이후로 군량이 넉넉해지고 군사들의 사기가 치솟아
한 번 싸워볼 만도 했으니,
만일 (뒤에 서술할) 여러 소인배들의 간교한 꾸며댐만 없었어도,
일천 척의 군함과 일백명의 장수로써 일본을 곧 무찌르겠다 한,
이 충무공의 장계에 쓰여진 말이 실현을 보았을 것이다.
제 12 장 이순신의 잡혀들어감〔구나(拘拿)〕
선조(宣祖)대 정유년(丁酉年) [1597년] 정월 26일에
조선 충청·경상·전라 3도수군 도(都)통제사 이순신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하여 이순신이 5, 6년 동안 서릿발 같은 창검과
비오듯 하는 탄환 속에서 애써 모아 놓은 군량 수만 석(石)
(사서(史書)에 쓰여 있기로는
진중(陣中) 소유(所有)가 9천 9백 14석이고,
진외(陣外) 제장(諸將)의 소유는 논하고 있지 않다-저자(著者)),
화약 수만 근(斤), 총 수천 자루,
군함 수백 척을
용렬한 장수 원균(元均)에게 넘겨주고는
2월 26일에 호송수레에 실려 나아갈 적에 지나치는 길마다
남녀노소 백성들이 앞을 가로막고서 울부짖으며 이르기를,
"사또, 사또여,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나이까? 사또여,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나이까?
사또가 우리를 버리시면 우리의 앞길엔 <죽음> 뿐이라"하여
곡성(哭聲)이 하늘에 사무쳤다.
민심을 거스르고 장성(長城)을 스스로 헐어 적군의 눈가에
기쁜 빛을 일게 하니 이 재앙은 과연 누구의 소행이런가?
혹자는 말하기를 소서행장(小西行長)의 이간책이라 하나,
물(物)이 저먼저 썩은 후에 벌레가 괴는 법이니,
우리 조정에 틈이 없었다면 소서행장이 비록 간사한들 어찌 이간질을
할 수 있었으리오? 고로 나는 이 충무공의 잡혀들어 간 것이
소서행장의 탓이라 함을 옳지 않다 하는 바이다.
또 혹자는 말하기를 원균의 모함이라 하나,
한 사람의 손으로 만인의 눈을 가리기는 어렵나니,
조정의 모든 신하들이 공명 정대하였다면 원균이 비록 시기한들
어찌 그 악한 마음을 펼 수 있었으리오.
고로 나는 이 충무공의 잡혀 들어감을 원균의 죄라 함도
옳지 않다 하노라.
이 충무공의 잡혀들어감이 소서행장의 죄가 아니며 원균의 죄도 아니라
하니, 그렇다면 그 누구의 죄이런가. 내가 감히 한 마디로 단언하여,
이는 조정의 신하 무리들 가운데 사사로운 당파를 이룬 자들의 죄라
하노라. 선조가 왕위에 오른 이래로 조정 신하들의 당파가
분립(分立)하여 공적(公的)인 대의(大義)는 배척하고
사사로운 소견들만 주장함에,
이 당파가 세력을 얻으면 저 당파의 하는 일은 옳고 그름을 불문하고
모두 배척하며, 저 당파가 세력을 얻으면 마찬가지로
이 당파가 하는 일은 옳고 그름을 불문하고 모두 배척하는 것이었다.
왜구가 움직이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어떻든 중요한 문제인데도,
당초 황윤길(黃允吉) 김성일(金誠一)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오던 때에
황윤길이 속한 당파는 그의 말을 좇아서 "반드시 움직일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김성일이 속한 당파는 또한 그의 말을 좇아서
"결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겉으로만 보면 반드시 움직이리라 한 자와 움직이지 않으리라 한 자는
같은 의견을 말한 것으로 볼 수 없을 것이나,
그 속사정을 살펴보면 피차 오십보 백보라 할지니,
어째서 그러한가? 무슨 의미가 있어서 반드시 움직이리라 말한 것이
아니며, 선견지명이 있어서 반드시 움직이리라 말한 것도 아니며,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하는 마음에서 외적으로부터의
우환이 박두했음을 놀라고 염려하여
"반드시 움직인다",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저들은 저 당파를 추종하고 이들은 이 당파를 추종했던 것일 뿐이니,
두 까마귀떼가 모두 저 잘났다고 하는 판에
누가 자웅(雌雄)을 가려줄 것이며 조개와 도요새가 서로 다투는 판에
닥쳐오는 화를 어찌 알 것이뇨.
이제 이충무공의 잡혀 들어감은 조정의 사사로운 패싸움에서 나온 바이니,
오호라
"난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이 자초한 바이다"
한 옛말이 과연 나를 속이지 아니하도다.
비록 그러하나 태평시절에 집안에서 한가로운 싸움을 벌임은
오히려 있을 법도 하겠지만,
시방은 큰 도적이 아직 물러가지 아니하고 나라의 명맥이 살아남지
못하여 혹 한 걸음이라도 잘못 디뎌 넘어지면
곧바로 나라가 망할 판국인데, 해묵은 악습이 여전히 남아 있어
정부(政府)의 한 부서 내에서도 경계를 긋고 나누어서
한 파는 동(東)으로 가고 한 파는 서(西)로 가기에 저 시기심 많고
강퍅한 원균이 이를 이용하여 이순신을 배척하였으며,
저 흉악간특한 가등청정(加藤淸正)과 소서행장이 또한 이를 이용하여
이순신을 모해하였던 것이다.
풍신수길 도적놈이 우리나라를 까닭없이 침노한 이래로,
수백 년간 전쟁 없이 살아왔던 인민이 이를 졸지에 당하매
왜색(倭色)만 보이면 쥐가 숨을 곳을 찾듯 하며 왜성(倭聲)만 들어도
새가 흩어져 날 듯 하므로,
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박진(朴晋)·정기룡(鄭起龍)
제공(諸公)같은 절세위인이 몸을 일으켜 이들을 채찍질하고 독려하였으나
수년 후에야 민(民)의 기세가 겨우 떨치게 되었다.
민의 기세가 겨우 떨치게 될 즈음에는 왜구가 문득 퇴각하였던 고로,
싸움한 역사라 해봐야 낙오한 왜구나 습격하며 밖으로 성세(聲勢)나
부풀려서는 왜구로 하여금 전율케 했음에 불과하고,
격렬한 큰 싸움을 일으켜 바닷물결을 잠재우지는
(즉, 왜적을 소탕하지는-옮긴이) 못하였다.
권율(權慄)의 행주(幸州) 싸움과
김시민(金時敏)의 진주(晋州) 수성전(守城戰)에서
수만 명의 적병을 참살(斬殺)하여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는 하였으나 이 역시 휘하 수천 명의 훈련된 군사에
의지한 것이었음과 아울러 제자리를 지키면서 하는 방어전의 형세에
힘입은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충무공은 군사의 훈련됨 여부를 묻지 않았으며,
싸울 만한가 아니면 수비할 만한가도 따짐이 없이,
한 자루 칼을 들고 바다 위에 외로이 서서 약소하고 피로한 군사로써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증가해 가는 큰 적에 대항함에 있어,
지키매 반드시 단단히 지키고 진격함에는 반드시 몰아쳐 내닫고,
정지해 있음에는 산과 같으며 움직임에는 번개와 같고,
적을 침에 매와 같이 민첩하며 내리누름은 만근(萬斤)의 무게와도 같게끔
지휘함에 적국이 떨고 두려워하는 터였던 것이다.
당시 풍신수길의 장졸들이 모두 이 통제사의 이름 석자를 대함에
존경스러워 머리를 숙이고, 그러다가는 또 한을 품고 이를 갈며,
놀라서 간담이 바스라지고, 두려워서 말소리도 낮추는 고로,
매번 싸움에 멀리서 엎드려 절하면서 말하기를
"기묘하도다, 장군의 수전(水戰)이여!" 하였으며,
매번 싸워도 패함에 창검을 버리고 경의를 표하면서 말하기를
"장군은 천신(天神)에 가깝도다" 하였으며,
적장들이 풍신수길에게 글을 올려 이르기를
"조선 수군은 천하무적이라" 하였으며,
바다와 육지 각처에 주둔한 왜가 노상 칼을 뽑아 전라도를 가리키면서
"우리의 골수에 맺힌 원수가 저기에 있다"는 등의 말을 하였으니,
저들이 무단히 우리를 침범한 이후로 이 통제사를 단하루라도 잊은 날이
있었을소냐. 이런 연유로 이 통제사의 가슴을 겨누는 왜의 창이
몇 십만 개나 되지마는 창은 부러져도 이 통제사는 죽지 아니하였으며,
이 통제사의 목을 겨누는 왜의 칼이 수백만 자루나 되지마는
칼은 부러져도 이 통제사는 죽지 아니하였으며,
이 통제사의 몸을 향하여 쏘아대는 왜의 화살과 총탄이 수천만 개이지만
화살과 총알은 다하되 이 통제사는 죽지아니하였으며,
저들이 억천백방(億千百方)으로 이 통제사를 자기들 마음대로 하려는
독한 흉계가 죄다 그림의 떡이 되고 말매,
풍신수길은 하늘만 우러러 보며 소서행장은 애만 태울 따름이더니,
이제 막 조선의 군정계(軍政界)로부터 다음과 같이 그 틈을 탈 만한
좋은 소식이 새어 나오는 것이었다.
원균이 관직에 먼저 오른 오랜 경력의 장수로서
그 지위가 이순신의 아래로 놓이게 됨에, 항상 시기하는 눈으로
흘겨보면서 이순신의 행동을 비방하며, 이순신이 내놓는 계책을 가로막아
웃음거리인 양 취급하고, 조정의 세력가들에 줄을 대어
이순신을 모함하는데, 동서 양파의 조정 신하들 가운데서
원균을 돕는 자는 그 세력이 강하고 이순신을 돕는 자는 그 세력이
약한지라. 엿볼만한 틈이 없어도 왜적이 오히려 만들려 할 터인즉,
하물며 그 틈이 이렇게 생겼으니 저들이 가만히 있을리가 있겠는가.
풍신수길이 즉시 소매를 떨치고 회색이 얼굴에 가득하여 말하기를,
"내 원수를 갚게 됐다"하고, 소서행장에게 계책을 일러줬다.
소서행장의 부하인 통역관 요시라(要時羅)가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의 관아로 와서는 교섭할 것을 원하는데,
우리 옷을 입고 우리 식의 갓을 썼으니 엄연한 우리 나라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왜적의 소식을 일일이 전하여 보고하면서,
더욱이 소서행장의 화친하고자 하는 뜻을 전하며
김응서와 일차 상면하기를 요청한다고 하였다.
이에 김응서가 원수(元帥) 권율 장군에게 보고하니,
권율이 조정에 상신하여 그 의견을 듣고서는 김응서에게
"가서 왜의 정세를 탐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김응서는 백여 명의 군졸을 거느리고 소서행장은 수백 명의 군졸을
거느리고서 회견함에 있어,
소서행장 등 왜인들이 모두 우리 나라식의 의관을 착용하고서
화친의 의론을 벌일 것을 간절히 빌어마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소서행장이 말하기를
"전후 화친의 의론이 성사되지 못한 것은 모두 가등청정의 죄라.
내가 그 자를 죽이고자 한지 오래 됐으되 그 기회가 없더니,
이제 가등청정이 일본으로부터 다시 오는지라,
내가 그의 오는 때를 적확하게 탐지하여 귀국(貴國)에 통지하리니,
귀국의 통제사 이순신에게 명하여 바다 가운데서 기다리다가 치면
백전백승의 여세로써 이를 잡아 버리기 어렵지 않을 것인즉
조선의 원수를 가히 갚게 될 것이요, 나의 마음도 통쾌해지리로다"
하고 간곡히 권유하는 것이었다.
권율 원수가 이를 조정에 보고했더니,
조정에서는 그렇게 하도록 이순신에게 조칙을 내렸다.
이 충무공이 명철한 식견과 만리 밖을 내다보는 형안으로써 어찌 이같이
간악한 음모에 빠지리오. 그러나 조정의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매
되지도 않을 얘기임을 명백하게 일러 말해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기에, 분노의 회포를 홀로 품고서 탄식하며 앉아
있을 뿐 이었다. 얼마 안되어 소서행장이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가등청정이 장문포(長門浦)에 와 머무르고 있으니
급히 가서 이를 쳐서 잡으라"고 재촉하는 것이었다.
이순신이 형세를 살피기를 고집하고 미루기만 하면서 나가지를 않으니까,
제 한 몸 온전히 지키면서 처자 보전할 방책이나 강구하고
방 안에서나 큰 소리를 치는 겁쟁이 무리들이 본래 그 입은 살았기에
그럴 듯한 의론을 내어, 적을 놓아 보냈다고 이순신을 단죄하려 하였다.
또 호남 지방을 순시하고 살피는 어사가 충무공을 미워하는 자들의
부추김을 받고서는 장계를 올려 말하되,
"가등청정이 탄 배가 7일 동안을 섬에서 좌초하여 움직이지 못했는데도
이순신이 곧바로 치지 않았기 때문에 도망쳐 갈 수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조정의 의론이 분분하게 나와 드디어는
이순신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떨어지니,
왜적의 흉칙한 계책이 마침내 시행된 것이었다.
영의정(領議政) 정탁(鄭琢)이 상소하여 구원하려 해도 소용이 없었고,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장계를 올려 구원하려 해도
막무가내였고, 유성룡 또한 이순신을 구하려 하다가
오히려 그를 추천했던 혐의로 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탄식만 낼 뿐이었다.
3월 4일 저녁에 옥문(獄門)을 들어갈 때,
친척이 와서 보고는 헤어지며 말하기를
"사람 일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장차 이를 어찌할꼬" 하였으나,
이순신이 이윽고 말하기를 "죽고 삶은 명(命)이니 죽으면 죽을 뿐이로다"
하는 것이었다.
의금부(義禁府)의 옥에 갇힌 지 무릇 26일이 지났어도
사면령(赦免令)이 내리지 않을뿐더러 하늘의 뜻이 또 어떠한지를
알기 어려웠다.
5, 6년 동안을 나라 일에 함께 죽기로 충무공과 손을 잡고 맹세하던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묻기에
공이 심부름꾼에게 답장을 들려 보내며 말하기를,
"우리 수군이 머지않아 패하리니 우리는 어디서 죽어야 할지를
모르겠노라" 하고 눈물이 옷깃을 다 적셨다.
아아, 이 충무공 한 사람의 죽음이 어찌 이 충무공 한 사람의 죽음에
그칠 뿐이리오? 이는 곧 이억기 등 여러 장수들의 죽음이며,
이는 또 어찌 이억기 등 여러 장수들의 죽음일 뿐이리오?
이는 곧 3도 수군의 죽음이며,
이 역시 어찌 3도 수군의 죽음일 뿐이리오?
곧 전국 인민의 죽음이로다.
그러므로 남도 군민(軍民)이 밤마다 하늘에 아뢰어
이순신 대신 자기가 죽기를 원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제 13 장 이순신이 옥에 들어갔다 나오는 사이의 나라의 비운(悲運)
"나라에 충성을 다하였으나 그것이 죄가 되고, 부모에 효도하려 하여도
이미 돌아가시고 없네"
(갈충어국이죄이지 욕효어친이친역망
[竭忠於國而罪已至 欲孝於親而親亦亡])
라는 말은 백 대(代)를 두고 읽어도
여전히 사람의 슬픈 눈물을 자아낸다.
대체로 국가가 큰 액운을 당했을 때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장한 마음을 품고서 부모와 하직하는 슬픔을 무릅쓰고
의연히 부모 계신 방 앞에 나아가 작별의 말을 드림은 대장부가
당연히 행할 직분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아무리 군사 일에 바쁠지라도 틈틈이 고개 들어 흰구름을
바라보노라면 부모 생각에 어찌 그 마음이 아프지 않으리요?
그러기에 이 충무공도
《난중일기(亂中日記)》에 매일 "천지(天只=모(母)) 평안하시다"라
하지 않았으면 "천지께 무슨 일이 있었다"라고 적었으며,
아니면 "천지의 안부를 여러날 듣지 못하니 답답하기 짝이 없다"라고도
반드시 적었으니, 후일 공을 이루고서 벼슬길을 물러난 후에
모자(母子)가 손을 붙잡고 지난 일을 죽 얘기함이
충무공이 진정으로 원하던 바였다. 그러나 슬프도다,
하늘이 선한 사람을 돕지 아니함인지, 이순신이 잡혀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그 모친인 변씨(卞氏) 부인이 염려되어
가슴이 두근거림을 이기지 못하여 병을 얻고 말았다.
그러던 중 4월 1일에 이순신이 옥문을 나와,
백의종군(白衣從軍)하여 권율 원수의 휘하에서 공을 세워
죄씻음을 하라는 명령을 받들고서 바다로 떠나갈적에,
병중의 모친과 한 번 대면하고픈 마음이 어찌 없으리요마는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음을 어찌하리오? 금부도사(禁府都使)를 따라
4월 13일에 길을 떠나려 할 때에 집의 하인인 순화(順花)가 와서
모친의 돌아가신 소식을 전하는데, 상(喪) 난 지도 이미 이틀째였다.
금부도사에게 애원하여 모친의 영전에 가서 한 차례 곡을 하고
성복(成服)한 지 사흘만에 비로소 길을 떠났다.
이 충무공의 일기를 읽다가 이 대목에 이르러서
눈물 흘리지 않을 자 있을손가.
중국 명(明)나라 말년(末年)에 원숭환(袁崇煥)이라는 사람이
일찍 다른 사람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10여 년 동안 부모가 자식을 보지 못하고,
형제 간에 서로 보지 못하고, 아내가 남편을 보지 못하고,
자식이 아비를 보지 못하니,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대로 이름하여 가로대 '대명국(大明國)의 일 망명객(亡命客)이라
할 수 있을 것 이다
고 했던바, 구구절절 피눈물이 맺혀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충무공의 경우에 비하면 하늘 나라에 있는 폭이라고 해야지 않겠는가?
모친의 운명(殞命)에도 임종(臨終)을 못하고
아들이 죽어도 소식 듣지(내려가 보지) 못하며
몸이 또한 이와 같이 불우한 처지에 빠져 있으니,
오호라 자고로 나라 구하고 백성을 구하는 대영웅은 어찌 그처럼
역경이 많은가?
4월 27일에 도원수 권율의 진영으로 갔다.
전날 바다위에 바람과 구름을 일으키는 통제사의 직함을 갖고서
3도 수군을 지휘하던 이순신이 이제는 다른 사람의 휘하에
일개 병졸이 되어 어디를 가나 그의 명령을 들으니,
영웅의 회포가 당연히 어떠하겠는가?
그럼에도 이 충무공은 하늘이 보낸 신인(神人)이라 죽고 삶도
도외시하거늘, 하물며 한 때의 영욕(榮辱)이야 어찌 개의하겠으리오?
다만 눈물을 흘리고 통곡할 것은 나라의 비운이 집안의 비운과
동시에 닥쳐온 일이었다.
혼자서 말을 타고 비바람을 무릅쓰며, 초계(草溪)에 당도하여
육군의 여러 장졸들과 서로 인사를 나누면서
수군의 소식은 헛되이 꿈에만 그리다가,
7월 14일에 우리 배가 부산포 절영도(絶影島) 앞바다에서
왜선 1천5백척을 공격하다가 7척이 온데간데 없이 떠내려 갔다는 말을
듣게 되었으며, 다음 날인 15일에는 우리 배 20척이 또 적에게
패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또한 16일에는 우리 군사들이 왜적과 싸우다가
대장 원균이 배를 버리고 먼저 도망치므로
각선(各船)의 모든 군졸이 일시에 흩어져
장수 중에 죽은 자가 매우 많고, 이순신과 여러 해를 동고동락하던
전라우수사 이억기 역시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군관 이덕필(李德弼)이 와서 전하는 것이었다.
공이 분한 눈물을 뿌리고 큰 칼을 치며 있는데,
얼마 안있어 권율 원수가 와서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장차 어찌하면 좋을까"고 묻는 것이었다.
이에 공이 대답하기를 "내가 연해 등지의 적의 형세를 한 번 살핀 후에
방략을 정하겠소" 하니 원수가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19일에 단성(丹城)의 동산 산성(山城)에 올라 형세를 관찰하고,
20일에 진주 정개산(鼎盖山) 아래 강정(江亭)에서 유숙하고,
21일에 일찍 출발하여 곤양군(昆陽郡)에 이르니,
군민이 이번 난리로 인한 어려움 속에서도 농사일에 열심이어서
혹은 밭을 갈기도 하며 혹은 일찍 결실을 본 곡식도 수확하므로,
공이 지나가다가 두 번 절을 하였다.
정오(正午) 직후에 노량에 도착하니 거제군수 안위(安衛) 등
10여 인이 와서 서로 보며 통곡하기에 그 패한 이유를 물은즉
모두가 입모아 대답하기를,
"대장이 적을 보고서는 먼저 달아난 까닭입니다" 하는 것이었다.
그로인하여, 배 위에서 잠잘 때에는 비통한 울분이 가슴에 맺혀
밤새도록 눈을 붙이지 못하고 눈병을 얻게끔까지 되었다.
26, 27일 양일에 비를 무릅쓰고 정성(鼎城)에 이르러 원수가 파견하여
보낸 군대를 보니, 창과 총도 없고 활과 화살도 없는
빈 손의 몇 사람 뿐이었다.
8월 5일에 옥과(玉果)에 도착하니 피난 인파가 길을 가득 메우기에,
말에서 내려서는 '고을로 돌아가고 마음을 놓고 있으라'고 타이르고,
6일에 군관 송대립(宋大立)을 보내서 적정(敵情)을 탐색하고,
7일에 순천(順天)으로 가다가 패잔병 한 사람, 말 세 필, 화살 약간을
거두어가지고 곡성(谷城) 강정에 와서 유숙하였다.
8일 새벽에 길을 떠나 부유창(富有倉)에 이르니
병사(兵使) 이복남(李福男)이 왜적이 온다는 소식에 기겁하여
창고에 불을 지르고 도망간 때문에
눈앞에 다만 잿더미만 남아 참담한 꼴을 이루고 있었다.
순천에 도착해 보니 군내의 관리가 죄다 도망하여 성 안팎에 인적이
끊어졌으나 관사(官舍)·창고·군기(軍器) 등은 여전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우리가 가버린 뒤에 왜구가 이를 약탈하리니 이대로 두어서는 안되겠다"
하고 일체를 땅속에다 파묻었으며,
쌓여 있던 화살 약간만 군관이 휴대하게끔 하고 여기서 하룻 밤을 묵었다.
9일에 낙안(樂安)에 도착하니,
병사들은 도망갔고 읍내는 완전히 불에 타서 그 정경이 처참한 중에,
관리와 촌민들이 옛장군 이순신이 온다 함을 듣고서는
고통에 빠진 자가 구세주의 복음을 들은 듯이
풀숲과 돌틈 들에서 머리를 내밀어, 말 앞으로 와 모여서는
음식을 다투어 바치는 것을 받지 않으려 한즉
곡소리를 내어 울면서 억지로라도 받게끔 하는 것이었다.
17일에 장흥(長興)에 도착하여 백사정(白沙汀)에서 말을 먹이고
군영인 구미(龜尾)에 이르니, 이 지역 사람이 모두 도망을 가서
개 짖는 소리도 없었다.
적의 기세는 바다에 가득하고 군사의 사기와 백성의 민심은
흙처럼 무너졌으니 영웅의 무예가 쓰일 땅은 과연 어디인가?
독자들은 눈을 크게 뜨고서 다시금 발휘되는
이 통제사의 수완을 볼지어다.
제 14 장 이순신이 통제사로 다시 임명받음과
명량(鳴梁)의 대승첩(大勝捷)
"8월 3일에 한산도에서의 패전 소식이 들려 오매
조야(朝野)가 다 놀라 떨었다. 임금이 신하들을 급히 불러 들여
계책을 물었으되 모두들 두려워만 하지 아무도 대답을 못하였다.
다만 경림군(慶林君) 김명원(金明元)이 조용히 아뢰기를,
"이는 원균의 죄이오니 이제 뒷일을 위해서는 이순신을 통제사로
재임명함이 좋은 방책이라 하겠나이다"고 하였다.
임금이 이 의견을 좇아서 이순신을 다시금
충청·전라·경상 3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고
다음과 같은 칙명(勅命)을 내렸다.
오호라, 국가가 의지하여 울타리를 삼는 것은 오직 수군이거늘
하늘이 아직도 재앙을 거두지 아니하여 흉포한 무리가 다시금 성하매,
마침내 3도 수군도 한 번 싸움에 허물어져 눈썹을 태울 만큼 급박함이
조석(朝夕)에 이르렀도다. 이제 계책이라 할 것은
뿔뿔이 흩어진 군사들을 불러 모으고 군함을 거두어 들여서
급거 요해처(要害處)로 가서 웅거하여
엄연히 큰 군영(軍營)을 이룸일 뿐일 것이다.
그래야만 도망하여 숨은 백성들도 돌아갈 곳이 있음을 알 것이고,
바야흐로 세력이 강성해진 왜적을 조금이라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임을 맡은 자는 위풍과 인애(仁愛)와 지략과 재능을 갖추고서
평소부터 안팎으로 백성의 따름을 받던 자가 아니더면
능히 이 임무를 수행해 갈 수가 없을 것이다.
오직 경(卿)의 명성만이 일찍이 병사(兵使)의 직을 맡을 때부터
두드러졌으며, 그 전공(戰功)과 업적이 다시금 임진년의 큰 승전(勝戰)
이후로 떨쳐져서 변방의 군사들이 의지하기를 만리 장성처럼 굳게 하였다.
그럼에도 일전에 경의 직위를 갈고 죄형(罪刑)을 내렸던 것은
역시 사람들의 모해와 악의(惡意)에서 비롯된 일로서,
그러다보니 오늘에 이르러 패전하는 치욕을 당하게 되었으니
새삼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리오.
이제 특별히 경을 일으켜 세워 충청·전라·경상 등 3도 수군통제사를
제수하노니, 경은 임지(任地)에 이르거든 먼저 흩어진 군민들을 찾아서
수습하고 위로하며 뭉쳐서 해영(海營)을 이루어
적세(賊勢)를 누르도록 할지어다.
경이 나라를 위하여 제 한 몸을 잊고 기세를 보아가며
나아가고 물러감은 이미 그 능함이 시험된 바이니
나로서 어찌 여러 말을 할 것이뇨 ·············
(이상<기부수3도통제사교서[起復授三道統制使敎書]>에서
인용함-저자주(著者註)
8월 19일에 이순신이 여러 장수들을 불러 위의 칙서를 함께 읽고
엄숙히 절한 후에 회령포(會寧浦)에 다다르니,
흩어졌던 군사들이 이순신이 통제사로 재임명되었다는 말을 듣고서는
차츰차츰 모여와서 군사 120인과 전선 10척을 얻게 되었다.
전라우수사 김억추(金億秋)에게 명하여 병선을 수습하였으며,
제장에 분부하여 거북선을 꾸며 군세를 돋보이도록 하였다.
아울러 언약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다 한 번 죽더라도
무슨 애석함이 있으리오"하니 제장이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24일에 난포(蘭浦)로 나갔는데, 28일에 적선 8척이 몰래 와서
불의에 기습코자 하므로 이순신이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곧장 돌진하였던바 왜적이 이내 퇴각하였다.
9월 7일에 적선 13척이 또 내습하다가 공이 이를 맞아 치니 곧 도주하고,
그날 밤 이경(二更)에 다시 와서 총을 쏘기에 공이 군졸로 하여금
응사케 하니 또 달아났다.
이는 왜적이 이순신이 거느린 군사가 적은 줄 알고서 시험해 본 것이었다.
때는 늦은 가을이라 추운 날씨여서 사졸들이 얇은 옷을 한탄하는데,
마침 허다한 피난선들이 해안에 대어 정박한 것이 수백 척이 되거늘,
공이 물어 가로대,
"도적떼가 바다를 뒤덮었는데 그대들이 여기에 유숙함은
무슨 일을 하고자 함인가?"고 하였다.
그들이 모두 대답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사또를 의지하고서 여기에 머무나이다"고 하였다.
공이 다시 "그대들이 내 말을 따르면 살길이 있으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다 죽으리라"고 말하였다.
그들이 입을 모아 "오로지 공의 명령대로 하겠나이다"고 하므로,
공이 "장졸들이 굶주림과 추위로 다 죽을 지경이니
더욱이 도적을 막을 길이나 있겠는가, 그대들이 만일 남는 의복과 식량을
가지고서 군졸들을 구하면 이 도적을 가히 멸하고
당신들도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리라" 고 말하자,
이들 무리가 모두 이 말을 따랐다. 그리하여 거둔 양식을 나누어
각 배에 실으니 그제야 군사들의 얼굴에도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왜적과 우리 군사의 숫자가 현격하게 차이가 나므로
제장이 저마다 말하기를,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오름이 옳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공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또 조정에서도 수군이 매우 적어 왜적을 막기가 어려우므로
육지에서 싸우도록 하라고 명하였지만, 공이 다시 장계를 올려,
"임진년으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5, 6년간 왜적이 충청 전라 양도에
곧장 돌입해 오지 못했던 것은 수군이 그 길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신(臣)에게 전선 12척이 있으니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면
오히려 해볼 만하기도 하겠지만, 이제 만일 수군을 다 버리면
왜적이 필연적으로 호남 호서의 오른쪽을 거쳐 한강(漢江)에
다다를 터이니, 이 어찌 우려할 바 아니겠습니까?
비록 전선의 숫자는 적다 하지만 신이 죽지 않는 한에서는
왜적이 우리를 가볍게 보지 못할 것입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우수영(右水營) 앞바다에 나가서 제장을 모이게 하고
약속을 분명히 하여 이르기를,
" 한 사람이 길을 막으면 족히 천 사람을 두렵게 하나니,
이제 우리가 진을 친 곳이 이러한즉 제장은 근심치 말고
다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만 간직하고 있으면 싸워 이기리라"
하였다.
16일 이른 아침에 왜적이 하늘을 가리우고 바다를 덮을 기세로
우리 진을 향하여 명량(울돌목)에서부터 몰려왔다.
이순신이 제장을 거느리고 나가 막으려 하자 왜선 30여 척이 갑자기
전진하며 우리 배를 에워싸고자 하므로 이순신이 노를 빨리 젓게 하고
돌진하며 각 군사를 재촉하여 총을 쏘아대니
적병이 바로 범하지는 못하고 전진하듯 하다가 퇴각하곤 하였다.
이때에 군사의 숫자가 중과부적일 뿐만 아니라 왜선이 우리 배를
십여 겹이나 포위하고 장사진법(長蛇陳法)으로 맞부딪쳐 오매
그 형세를 헤아리지 못할 정도였다.
각선의 제장이 서로 돌아보며 낯빛이 달라지므로 공이 웃으면서 말하되,
"저 도적이 비록 만(萬) 척의 배를 거느리고 온다 할지라도
모두 우리 배에게 사로잡히는 바되리니, 망동(妄動)치 말고
사격하는 데에나 힘을 쏟으라"고 하였다.
이 몇 마디 말이 얼마나 쾌활하며 얼마나 자신에 넘치는가!
장졸마다 감격하여 뛰며
초요기(招搖旗; 초요(招搖)는 북두칠성의 일곱째 별을 말함-옮긴이)를
한번 휘두르니 제장이 다투어 진격하였다.
바다 가운데는 두 나라 군사의 싸우는 소리 가득하고 인근 산 위에는
싸움을 구경하는 우리 백성들로 가득찼다.
이 통제사만 다시 일어서면 원수를 통쾌하게 갚을 줄로 믿고서
먼데 가까운 데 가릴 것 없이 사람들이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백리 또는 천리를 달려와 높은 산봉우리에 모여 올라서
이 통제사의 전투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우리 배 12척이 해면에 떠 있는데 홀연히 수십 척의 적선이
일시에 에워싸서 먹구름이 모여들고 안개가 어지럽게 끼는 듯한 중에
우리 배는 어디에 묻혔는지조차 모르겠고,
다만 공중에 칼날 빛만 번득이며 대포 소리만 하늘가에 쾅쾅 울리는지라.
관전하는 사람들이 서로 부여잡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우리가 여기에 옴이 이 통제사만 믿었던 것인데 이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아아, 우리는 누구와 더불어 살리요"
하고 곡성이 낭자하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태산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크게 일면서
적선 30여 척이 조각조각 깨어지고, '조선 3도 수군통제사'라고
크게 쓴 깃발을 펄럭이며 우리 배들이 날랜 용처럼 도로 나오니,
이것이 하늘인가 귀신인가, 어떻게 믿을손가.
관전하던 일체의 사람들이 손으로 이마를 치면서 "조선만세!"를
크게 외쳐 불렀다.
이에 수천 척 적선이 혹은 깨어지고 혹은 도망치고 혹은 사로잡히는데
우리 배 12척이 왔다갔다 분주히 돌격하며 위무(威武)를 빛내니,
장하도다, 망망한 바다 위에서 사냥꾼이 노루를 쫓듯 하는 기묘한 광경을
드러내 보인 것이었다.
이번 싸움에서는 우리 배가 물 가운데 천연의 험처(險處)를
먼저 차지하였을뿐더러, 교전하기 일합(一合)만에
적의 선봉선을 깨부수고 그 날래기 이를 데 없는 선봉장
마다시(馬多時)를 베어 적의 사기를 먼저 꺾어버렸던지라
12척의 적은 배에 약한 군사로써도 수천척 적함을 토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충무공 역시 언젠가 한번 스스로 말하기를,
"나의 명량승첩은 새로 모집하여 훈련되지 못한 군사와
불과 십수 척의 배로써 수천 척 적선과 수만 명 적군을 꺾어 눌렀으니,
이는 하늘의 도우심이요 국가의 위광(威光)이라,
우연히 꿈 속에서 생각하여도 큰 소리를 부르짖을 만큼 통쾌하기
이를 데 없도다"고 하였다.
17일에 배를 이끌고 바깥 섬으로 나가니,
피난와 있던 인민들이 열과 성을 다하여 노래하고 춤추고
손뼉치고 뛰면서 다투어 고기와 술을 날라 왔다.
이때에 왜적이 마침내 멀리 도망하였기에,
이 통제사가 날마다 부장(副將)들을 보내어 각지를 둘러보게 하면서
유민(流民)들을 효유하고 흩어졌던 병력을 불러 모으니,
몇 달 되지 않아서 장수와 군사들이 운집하여 군사의 성위(聲威)가
크게 떨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통제사의 신묘한 헤아림이
능히 나라를 보위하면서도 그 집안은 보전치를 못하였으며,
온나라 백성은 능히 구원하였서도 그 자식은 구하지 못하였으니,
애닲도다. 저 우희다수가 소서행장 가등청정 등이 원균의 혀를 빌려
이 통제사를 살해하고 그 야심을 채우려다가,
거의 죽음의 지경에 이르렀던 이 통제사가 다시 살아나 구구한 열두 척의
쇠잔한 배로 수만명 왜병을 뒤엎어 섬멸하매,
저 도적들이 분하고 부끄럽고 절통하기 이를 데 없는 심정을
이기지 못하나 이 통제사의 혜안이 비추는 곳에서는
보복할 여지가 도무지 없었다.
그러므로 명량에서 패전한 그 날로 날쌘 기병(騎兵)들을 보내어
이 통제사의 본가가 있는 아산(牙山) 금성촌(錦城村) 한 동네를
전부 불질러 없애고 살육을 자행하였다. 그런데 이때,
이 통제사의 세째 아들 면()이 열 몇 살에 불과한 어린아이로서 집에
있으면서 말달리며 활쏘기를 익히다가 왜병이 난입함을 보고서는
즉시 작은 총을 들어 적병 3명을 쏘아 죽이고 오가며 내달아 치더니,
슬프다, 어린 범 하나가 혼자 뛰었지만 늙은 이리떼가 다투어 무는 것을
대적할 수는 없어 중도에 칼을 맞고 죽었다.
담력과 지략이 있고 말달리며 활쏘기를 잘하여,
장래 자기의 발자취를 이으며 국가의 간성이 되리라고 인정하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졸지에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매,
정 많은 영웅의 심사가 과연 어떠할까?
죽은 소식이 적힌 서찰(書札)을 감싸 안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가엾은 나의 어린 아들이여,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뇨?
영특한 기상이 범인(凡人)을 뛰어넘기에 하늘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를
않았는가? 내 지은 죄에 대한 재앙이 너의 몸에 미치었구나!
이제 나는 세상에서 장차 누구를 의지할 것이뇨 ·······
(《난중일기(亂中日記)》에 실려 있음-저자(著者))
라 하고 하룻 밤 지내기를 일년과 같이 하니, 슬프도다,
이는 또한 모친 상(喪)을 당한 후로 가장 애통해 하는 눈물이었다.
제 15 장 왜구(倭寇)의 말로(末路)
"첫째, 풍신수길의 죽음과 우희다수가의 도망.
둘째, 소서행장과 가등청정이 살 길을 달라고 애걸함.
세째, 명나라 군사가 와서 지원함.
네째, 이순신의 이웃 나라 장수와의 교제.
다섯째, 이순신의 왜적을 더불고 같이 없어지리라 하는 결심.
풍신수길이 "한 달음에 뛰어건너 곧바로 대명국(大明國)으로 들이친다"고
말은 시원스럽게 하면서, 길을 빌려 주면 우리 나라를 멸하려는 계교를
써서 유인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즉시 우희다수가·가등청정·소서행장 등 제장을 보내어 30만 병력을
거느리고 세 갈래로 쳐들어 왔었다.
그 거창한 야심이 조선 팔도를 단번에 삼킬 듯하더니
뜻밖에도 경상·전라의 바다 어구에서 하늘이 내린 일대 명장(名將)에게
가로막힌 바 되어, 왜장들은 수레 끄는 망아지 같이
엉거주춤 움츠러들었으며 왜병들은 물고기의 뱃속에 모두 장사지낸 채
그 분한 마음에 머리가 깨질 듯하여
8년간 계속하여 군사와 무기를 보내었으되 번번이 패하기만 하였다.
이에 풍신수길이 한맺힌 피를 토하고 죽어 넘어지니,
양국간의 전쟁이 차츰 끝나갈 때가 되었다.
수군의 승리를 호언장담하던 우희다수가가 이에 이르러서는
그 패할 조짐을 미리 알게되자 군대를 버리고 멀리 도망쳤는데,
저 염치 없는 소서행장과 가등청정은 우리 내륙 지역으로
깊이 들어 왔다가 육지에 오르면 의병이 둘러싸고 바다로 향하면
3도 수군이 가로막고 있어 그야말로 진퇴유곡의 경우를 당하게 되었다.
소서행장은 순천에 진을 치고 가등청정은 울산(蔚山)에 진을 치고서는
곤경에 처한 짐승이 오히려 덤벼드는 격으로 각처로 떠돌아 다니면서
싸우려 하다가,
가등청정은 도원수 권율과 이덕형(李德馨)에게 포위당하여
도산성(島山城) 가운데서 물 한 모금도 얻어 마시지 못하고
여러 날을 굶은 채로 곤하게 지내며,
소서행장은 전라도의 해안선 중간 지역에서 오락가락 하던 중에
그 군세가 우리 군사와 도저히 대적하지 못할 것을 스스로 알고서
누누히 사람을 보내어 화친하기를 청하여 왔다.
왜적과는 한 하늘 아래서 살지 않기로 스스로 맹세한 이순신이
어찌 이를 받아들여 허락하리오.
사신으로 온 자를 물리치고 더욱더 군사를 진군시켜 왜적의 귀로를
틀어막았고,
선조대 무술(戊戌)년 [1598년] 6월 27일에는 고금도(古今島)로
진을 옮기니 이는 전라도 바다 어구의 제일가는 요해처였다.
의병 승군(僧軍)을 모집하여 각지에 진을 쳐서 지키며 농민을 모아서
섬 중에서 농사 짓게 하고,
정예의 기병(騎兵)을 사방으로 나누어 보내서 돌아 다니는 왜구를
토멸케 하였으며, 소서행장과 가등청정은 천연의 요충지에
가두어 두고서는 그 군사가 쇠약해진 다음에 쓸어 없애기로
계획을 정하여 두었다.
그러던 중 7월 16일에 명나라 수군도독(水軍都督) 진린(陳璘)이
수군 5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내려와서는 우리 군사와 합세하니
수군의 위세가 한층 더 정돈되고 장엄해졌다.
그러나 진린은 원래 성품이 거칠고 사나워서 걸핏하면 화를 잘내기로
소문이 난 자라, 자기 나라에서 같은 급에 서는 장수들과도
서로 좋아지내는 자가 없을 정도였기에,
하물며 언어가 통하지 않고 습속이 같지 않은 타국의 장수들과
시종 거슬림이 없기를 어찌 바랄 수 있으리오.
두 나라의 장수끼리 한 번 틀어지면 양국의 병사들도 필연적으로
사이가 깨질 것 이요, 양국의 병사들의 사이가 한 번 결렬되면
왜적을 토벌 평정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그 틈을 타서 파놓은 함정에
빠지기도 쉬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조정에서는 이를 염려하여 왕이 "진린을 후대하라"는
교지를 내렸으며, 영의정도 "진린과 잘 사귀라"는 친서를 보내왔다.
그렇지만 이 통제사의 심중에는 이미 일찌감치 그 나름의 요량이 정해져
있어서 여유있는 수단으로 진린을 대접하고 있었다.
진린의 군사가 도착하기 시작하자 이 통제사는 즉시 소를 잡고
술을 갖춰서 진린 휘하의 제장을 한껏 위로하고 기쁘게 해주었다.
그런데, 얼마 안되어 그들 군사가 사방으로 나가서 우리 백성의 재산을
약탈하는지라, 이 통제사가 군민에게 영을 내려 크고 작은 초막집들을
동시에 부수어 철거케 하였으며 자기의 의복과 침구도 모두 배로 옮겨
놓게 하였다. 진린이 곳곳에서 가옥을 부수는 광경을 보고는
매우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보내어 그 연유를 물어오기에 공이 말하기를,
도독의 휘하 군졸들이 어거지로 노략질 하기만을 일삼아서
인민이 견뎌내지 못하는 까닭에 각기 집을 철거하여 먼 데로 이사하는데,
내가 대장의 직책에 앉아 있으면서 무슨 면목으로 홀로 여기에
머무르리오? 나도 이제부터는 진도독과 영영 이별하여 해상에 떠있든지
멀리 떠나버리려 하노라
고 하였다. 진린이 이 말을 듣더니 크게 놀라면서 급히 달려와
이 통제사의 손을 잡아 끌면서 하는 말이,
만약 공이 가버리면 린은 누구와 더불어 적을 막으리오
하며 간곡히 말려 마지 않거늘,
공이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나라가 왜적의 화를 입은 지 어언 8년이오.
그들이 성읍(城邑)을 불사르며, 우리의 인민을 살해하며,
우리의 분묘를 파헤치며, 우리의 재산을 약탈하여, 부모된 자는
그 자손을 곡(哭)하며, 부인된 자는 그 남편을 곡하고,
집이 있는 자는 그 집을 잃으며, 돈이 있는 자는 그 돈을 잃어서,
이제 팔도 인민이 '왜구'라는 두 글자만 들어도 몸 전체가 떨리고
아파오나이다. 순신이 비록 일개 무부(武夫)에 지나지 않으나
또한 나라와 백성이 당한 치욕을 대강이나마 아는 자로서,
이제 장군이 우리 나라를 위하여 만리(萬里)를 멀다 않고 와서
구원하였는데 순신이 장군과 하직하고 외따로 숨고자 하니,
어찌 이처럼 사람의 도리와는 먼 행동을 할 것을 차마 생각이나
하겠으리오. 그렇지만 요즘 장군 휘하 군사들의 폭행과 약탈을 보건대
당당한 대의명분을 갖춘 군대로서 무리한 만행을 일삼으니,
아아, 우리 백성들이 어찌 이 거듭되는 고초를 견뎌내겠습니까?
순신이 도저히 이를 참고 볼 수 없어 이렇게 떠나고자 하는 것이외다.
진린이 이 말을 듣고는 얼굴 빛이 달라지면서
린이 이제부터는 휘하를 엄히 단속하여 추호도 귀국 인민을
범하지 못하게 할 것이니
공은 잠시 머무르소서
라고 말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그럴 수 없소이다. 우리 백성이 설사 원통한 심정을 들어와
호소코자 할지라도 영문(營門) 출입이 엄하게 단속되고 있어서
그러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니,
장군이 비록 명찰(明察)하시더라도 어찌 휘하 군졸들이 밖에 나와
난잡한 행동을 하는 것을 일일이 살피고 규찰하리요?
장군이 만일 순신을 머무르게 하고자 할진댄 오직 한 가지 길이 있으니
장군이 이를 따라 주실는지?
라 하였다. 진린이 다시
오로지 공의 명령대로 따를 터이니 말을 해 보시오
하고 재촉하자, 이순신은
장군의 휘하 군졸들이 우리 나라에 원군(援軍)으로 왔다고 행세하여
도무지 거리낌이 없이 이같이 방자한 짓들을 해대는 것이니,
장군이 만일 나에게 그들의 죄를 다스릴 권리를 빌려 주신다면
양국 군민이 서로 편안하지 않겠나 하나이다.
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진린은
좋소, 오로지 공의 명령대로 따르리다
하였다. 이후로 명나라 군사가 우리 인민을 범하는 일이 있으면
이 통제사가 그를 엄하게 다스리니, 이에 백성들이 안도하게 되었으며
명나라 군사가 이 통제사를 두려워하고 경애함이 진린에 대해서보다도
더하였다.
18일에 적선 백여 척이 녹도를 침범해 온다고 정탐병이 와서 보고하므로,
이 통제사와 진 도독이 각기 전선을 거느리고 금당도(金堂島)에 이른즉,
단지 두 척의 적선이 있다가 우리 배를 보고는 급히 도망쳤다.
이 통제사는 여덟 척의 배를 내고 진 도독이 스무 척의 배를 내어
절이도(折爾島)에 매복했다가 같이 귀환했다.
24일에 이 통제사가 운주당(運籌堂)에다 술자리를 마련하고
진린을 청하여다 같이 마시던 차에 진린 휘하의 천총(千摠)이 와서
보고하기를, "오늘 새벽에 적선 6척을 만났는데 조선 수군이
이를 모두 잡아왔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진린이 크게 화를 내며 물러가라고 꾸짖으므로,
이 통제사가 그 심사를 헤아리고는 좋은 말로 권하면서
위의 노획한 적선과 왜적의 머리 69급(級)을 진린에게 넘겨 주었다.
그리고는
장군께서 여기로 온 지 며칠 되지 않아 즉시 왜적을 잡은 공을
귀 조정에 보고하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소이까?
고 말하니, 진린이 무척 기뻐하여 종일토록 취하고 놀았다.
이후로는 진린이 순신을 더욱 흠모하고 따랐으며,
또 자기의 선척(船隻)이 비록 많긴 하지만 왜적을 막아 싸우는 데
넉넉치 못함을 깨닫고서 우리의 판옥선(板屋船)에 올라서
이순신의 절도있는 통제를 받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순신을 부를 때는 항상 존칭을 붙이고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9월 14, 5일 경에 각처의 적장이 소서행장의 순천 진영으로 모여들므로,
그들이 본국으로 철수하여 돌아가고자 하는 것임을 이순신이 혜안으로써
미리 간파하고는 분개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찌 천고의 원수 도적이 살아 돌아감을 허용하리요"라 하였다.
이 날, 진린과 함께 수군을 거느리고 출발하여 19일에 우수영 앞을
통과하고 20일에는 순천 예교(曳橋)에 이르니,
이는 곧 소서행장의 진영앞이다.
군사를 사면으로 배치하여 적의 돌아갈 길을 막고 난 다음에
정예의 기병으로 장도(獐島)를 습격하게 하여 왜적이 비축해 놓은 양식을
탈취하였다.
제 16 장 진린이 중도에 변함과 노량(露梁) 큰싸움
"속담에 이르기를 "천하에 뜻과 같지 못한 일이 열에 아홉은 된다"라고
하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이순신이 통제사를 다시 맡은 이후로는
조정이 전적으로 그를 신뢰하였고 그런 중에 외국의 원군이 와서
군사의 위세를 한층 더 장엄하게 하니,
이는 마치 범이 날개를 단것과도 같다고 할 만했다.
더욱이 명나라 장졸들이 모두 이 통제사에게 한 마음으로 진심복종하여
"이야"(李爺;야(爺)는 존칭어조사임-옮긴이)라 부르며 천하 명장으로
우러러 보고, 천지 종횡무진의 재주와 하늘을 깁고 해를 씻어줄만한
수완을 갖췄다고 찬미하여
(진린이 선조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이순신은 '경천위지'(經天緯地) 운운(云云)이라
한 적이 있다-저자(著者)) 오로지 이순신의 명령만을 따르니,
차후 이순신의 성공은 강물이 쏟아져 흘러 내림과 같이 아무 거칠 것
없을 듯하였다. 그러나 어쩌랴, 이순신의 일생 역사는 간고(艱苦)함으로
시작되어 간고함으로 마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저 하늘의 뜻인지는 모르되, 이제 대장별이 떨어질 전날까지도
또 한 번 마귀의 장난이 일어나던 것이었다.
대개 당시에 명나라 원군의 장수들이 겉으로는 충의와 의분(義憤)의 빛을
띠며 입으로는 비분강개한 말을 읊조리지만,
이 무리들은 황금 몇 조각만 보이면 그 충의와 의분,
그 비분강개가 하늘 멀리로 날아가 버리고 온몸이 그 황금을 향하여
공손히 절을 하는 자들이었으니,
이런 어린 사람들과 무슨 일을 이루어 낼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이들 무리가 와서 구원한다 함이 이 통제사에게 해가 되면 됐지
이로울 건 조금도 없었다.
이순신이 장도(노루섬)에 본거를 정하고 적의 귀로를 끊은 이래로
소서행장이 양식은 떨어지고 형세도 쇠미해졌을 뿐더러
이순신이 진린과 함께 날마다 진공하여 연전연승하니,
소서행장이 행색이 말이 아니게 쭈그러들었다.
그리하여 명나라 장수인 유정(劉綎)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뇌물을 후하게 건네주고는 돌아갈 길을 내달라고 애걸하였다.
이에 유정이 후한 뇌물을 탐하여 진린에게 통고하기를
"행장이 장차 철수하여 돌아가려 하니 이를 막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일렀다.
소서행장이 십여 척 배를 거느리고 묘도(猫島 : 고양이섬)로 나오자
이순신과 진린의 군이 이를 공격하여 죄다 죽이니,
행장이 유정의 신의 없음을 책망하였다.
이에 유정이 "당신이 진 장군에게 화의를 빌어보라" 하자,
행장이 은화와 보검을 진린에게 보내며 애걸하기를
"군사들이 싸우지 않을 것을 책임지겠으니 나에게 길을 내달라" 하였다.
진린도 탐욕스런 자이라 이를 허락하고 또한 이순신더러도 길을 내주자고
권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대장이 화친을 논함이 옳지 않으며
원수의 왜적을 놓아 보냄도 더욱 옳지 않거늘 공이 무슨 이유로
이런 말을 하시느뇨?
라 하며 거절하였다. 진린이 아무 말도 못하더니 행장에게 일러 말하기를,
"당신이 이 통제사에게 화친을 빌어 보라" 하였다.
이에 행장이 이번에는 이 통제사에게 사람을 보내어 총검과
보화를 다량으로 내밀면서 귀로를 애걸하였지만, 이순신은
임진년 이래로 우리가 왜구로부터 빼앗은 총검 및 보화가
산덩어리 만하니 너희들이 보낸 것을 받더라도 쓸 곳이 없으며,
나아가 우리 나라는 왜놈의 머리를 보화로 여기노라.
하고 이를 물리치며, 행장이 퇴각차 내보낸 배 수십 척을 토멸하였다.
진린이 적을 놓아 보내고자 하는 마음이 왜적이 탈출해 가고자 하는
마음보다 더욱 간절하여, 하루는 이순신에게 넌지시 말하기를
"내가 남해의 왜적을 가서 토벌코자 하노라" 하였다.
이순신이 "남해의 왜적이라고 해봐야 태반이 포로로 잡힌
우리 인민들이니, 장군이 적을 토벌할 임무를 띠고 와서는
적은 토벌치 않고 되려 인민을 토벌코자 함은 무슨 뜻이오?" 하니,
진린이 "제 몸하나 아껴 도적에 빌붙으니 도적과 마찬가지가 아니요?"
하였다. 이에 이순신이 응대하기를,
"옛사람이 말하되, 악인에게 위협 당하여 좇은 자는
벌주지 말라 하였는데 이제 포로된 자를 어찌 도적과 같이 쳐서
토멸하리오?" 하니 진린이 부끄러워 하며 결국은 제 뜻을 꺾었다.
행장이 계교가 궁해지니까 다시금 돼지와 술을 진린에게 후하게 보내어
먹이며 큰 뇌물을 얹어 주고는 청하여 말하기를,
"각처의 여러 왜군진지에 사람을 보내어 본국으로 철수하기로
공동으로 약정할 터이니 제독은 이를 허락하시라" 하매,
진린이 많은 뇌물을 탐하여 그 말을 믿고 몰래 뱃길을 열어
적의 통신선(通信船) 하나가 나감을 허용하였다.
진린 휘하의 군사 중에 이순신을 진심으로 따르고 섬기는 자가
한 명 있어 이 사실을 와서 보고하므로,
이순신이 크게 놀라며 자기도 모르게 탄식하는 소리를 내면서 하는 말이,
이번에 적의 통신선이 빠져 나간 것이 필시 각처에 진치고 있는
왜적끼리 서로 소식을 전하여 한 곳으로 모이고
날을 잡아서 우리를 침범코자 함이니, 우리가 만일 여기서 응전하다가
등뒤로 적을 맞게 되면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된다.
큰바다로 본거를 옮기고 한 번의 싸움으로 생사를 결함이 옳도다.
애석하구나, 진씨여, 황금 몇 조각에 침을 흘려 대사를 그르쳤도다.
하였다.
이에 유형(柳珩)·송희립 등과 계책을 정하고, 진린에게도 일이 되어가는
기미가 위태하고 급박함을 통고하니, 진린이 크게 놀라 깨달으며
자책해 마지 않았다. 그러나 이순신은,
"지난 일은 후회해도 소용없는 것이니, 금일의 계책은 오직 대양으로
나가서 왜군을 기다려 치는 것밖에는 없다"하고,
탐망선을 보내서 적정을 살피게 하였다.
18일 유시(酉時 : 저녁 6시경)쯤에 곤양 사천(泗川) 남해 각지의 왜적이
노량으로 향한다 하므로, 이순신이 진린과 약속하고
이 날 밤 이경(二更)에 같이 출발하였다.
삼경이 되자 배 위에 홀로 서서 손을 씻고 분향하고 하늘에 축원하여
가로대,
"이 원수를 멸할 수 있다면 곧 죽어도 한이 없겠사옵니다" 하였다.
사경에 노령에 도착하여 포구와 섬 사이에 병선을 매복시키고
기다리고 있노라니, 잠시 후에 적선 오백여 척이 광주(光州) 바다로부터
노량 쪽으로 오거늘 좌우의 양군이 돌진하며 총을 쏘니 적선이 놀라
흩어졌다가는 얼마 후 다시 합류하였다.
이 통제사가 "우리의 승패와 사활(死活)이 이 싸움에 달렸도다" 하고,
총 쏘는 것을 응원하여 한 손으로 북을 치며 큰 소리를 지르면서
앞장서 나가니, 모든 군사들이 그 뒤를 다투어 따르면서 적을 쫓았다.
적이 지탱치를 못하고 관음포(觀音浦)로 퇴각해 들어갔다가
날이 밝자 나갈 길이 없음을 알고는 다시 군사를 돌이켜
죽기로 싸우는 것이었다. 이에 이 통제사와 진 도독이 힘을 합쳐
혈전을 벌이던 중, 명나라의 부총병(副摠兵) 등자룡(鄧子龍)이
지휘하는 배에 불이 붙어 군사들이 놀라 요동하며 배가 기우는데,
왜적이 이 틈을 타서 자룡을 죽이고 그 배를 불질렀다.
우리 군사들이 이를 바라보고는 서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적선이 또 불탄다"고 환호하고 분투 진격하였다.
적장 3인이 누각을 세운 배 위에 높이 앉아 싸움을 독려하므로,
이 통제사가 총을 쏘아 그 중 1인을 사살하고,
호준포(虎砲 : 범이 웅크린 모양의 포-옮긴이)를 연달아 쏘아
적선을 부수던 중에, 홀연히 큰 총알 한방이 날아와
이 통제사의 왼쪽 옆구리를 뚫고 지나갔다.
칼을 쥔 채로 넘어졌다가 곧 일어나서 북을 울리며 천천히
배 안으로 들어가서는 부장(副將) 유형을 불렀다.
옆구리를 들치고 다친 데를 보이면서 가로되,
"나는 죽게 될 터이니 그대는 노력하라" 하며 방패로 가리고 난 다음,
아들 회()와 조카 완(莞)과 부리는 종 금이(金伊)를 돌아보며
"싸움이 한창이니 내가 숨이 끊어지더라도 곡소리를 내지 말라,
군사들이 놀라 동요할까 두렵다"고 말하였다.
말을 마침과 함께 눈을 감으려 하다가 우리 군사가 호통치고 고함지르는
소리를 듣자 기뻐하는 기색이 미간에 넘치면서
드디어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휘하 제장이 그 유언에 의하여 이 통제사의 죽음을 감추고
깃발을 휘두르며 싸움을 독려하였는데,
유형이 여섯 군데나 총알을 맞고 송희립도 한 차례 총알을 맞아 배 위에
정신을 잃고 넘어졌다가,
잠시 후에 다시 일어나 상처를 싸매고 나아가 싸웠다.
양편 배가 서로 부딪치며 장검이 서로 치고, 화살이 비오듯 탄환이
우뢰 같이 해면에 쏟아지더니,
아침 새벽부터 시작하여 대낮에 이른 싸움에 적의 기세가 크게 꺾이었다.
아군이 더욱 추격하여 적선 200척을 격침시키고 적병 수천 명을 사살하고
목베니, 왜적의 건장한 장수와 사나운 군사들이 이 전투에서 모두 죽고
적의 군수물자와 장비도 이 전투에서 다 탕진되었다.
다만 악인을 잡는 하늘의 그물이 성겨서인지 저 소서행장을
놓쳐 버렸다
(행장은 쪽배를 타고 묘도로 나가서 도망쳐 돌아갔음-저자주(著者註))
왜선이 모두 함몰하고 전투 끝의 먼지들이 금방 걷히니,
3도 수군 장졸들이 돛대를 두드리며 양양하게 개선의 노래를 부르고
배를 돌려 오는데,
어두침침한 선루(船樓) 위에서 한 조각 처량한 소리가
늦가을 바람 소리에 섞여 나오는바,
이회·이완 등이 이 통제사의 죽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아아, 꿈이런가. 공은 어찌 그리 빨리도 가셨는가.
조선과 명나라 양국 장졸이 이 통제사가 전사했음을 비로소 알고,
아군에 유행 이하, 명군에 진린 이하, 수만 장졸이 다들 손에 들었던
무기를 떨구고는 마주 서서들 통곡하니, 그 소리가 하늘을 진동시켰다
제 17 장 이순신의 상여가 고향으로 돌아옴과 남은 한(恨)
"무술년 11월 20일에
'조선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朝鮮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겸 충청·경상·전라·삼도 수군 도통제사'
이순신의 영구(靈柩)가 고금도(古今島)를 출발하여 아산으로 돌아올 때,
길가에는 남녀가 상여를 붙들고 애통한 울음을 멈추지 아니하여
곡성이 천리에 그치지를 않고 팔도 인민이 모두 친척의 상을 당한 듯이
슬퍼하였다.
오호라, 임진년부터 무술년에 이르기까지 무릇 7년간의 역사를
생각해 보건대, 우리 대동(大東) 민족의 치욕과 고통이 과연
어떠하였던가? 노인과 어린이는 구렁텅이를 구르고 장정은 칼과 창을
맞기 일쑤였고, 배고파도 먹지를 못하며 추워도 입지를 못하고,
아침에 모여 있었던 부모처자가 저녁에는 서로 잃어버리고,
저녁때 즐거이 손을 잡고 있던 형제 친우가 이튿 날 아침에는
생과 사를 달리하여, 죽은 자는 물론이거니와 산 자들도 이미 죽은 지
오랜 걸로 치부하였던 것이다.
다행히도 천고의 명장 이 통제사가 나와서 그 손으로 우리가 빠진 것을
건져냈으며, 그 입으로 우리가 다시 살아나도록 외쳤으며,
뼈만 남은 우리에게 피를 토하여 살을 주었으며,
죽은 우리를 마음을 다바쳐 살리셨는데,
우리가 다시 살아나는 날에 홀연히 공의 죽음이 닥쳤으니,
이것이 이 충무공에 대하여 인민이 통곡할 만한 한 가지 이유이다.
우리가 생존함은 공의 힘이며, 우리가 편안하게 사는 것도 공의 힘이요,
우리가 옷을 몸에 걸치고 곡식으로 배를 채움도 공께서 준 바이며,
우리가 금슬좋고 화락함도 공이 내리신 바이다.
우리가 한 번 일어나거나 앉음과 한 번 노래하거나 우는 것이
공의 은덕이 아닌 것 없는데 우리는 공의 은덕을 조금도 보답치
못하였으니, 공이 7년간의 병란 가운데서 우리를 위하여 힘쓰고 고생하던
역사를 회고하면 어찌 슬프다 하지 않으리요?
이것이 이 충무공에 대하여 인민이 통곡할 만한 두 번째 이유이다.
공이 7년 전쟁 이전에 죽었더라면 우리는 이 난리에 다 죽었을 것이며,
공이 7년 전쟁 이후에 태어났더라도 우리는 이 난리에 다 죽었을 것이다.
또 공이 7년 전쟁의 제 1 년에 죽었거나, 제 2 년에 죽었거나,
혹은 제 3 년, 제 4 년, 제 5, 6년에 죽었더라도
이 난리에 우리를 죽음에서 구해줄 이 없었을 것이다.
이에 공이 먼저도 아니고 나중도 아닌 이때에 나셔서
이 7년을 거쳐 갔는데, 그 동안에는 총에 맞아도 죽지 아니하고,
칼에 찔려도 죽지 아니하고, 옥에 갇혀도 죽지 아니하였으며,
일천의 창이나 일만의 창이 다투어 겨눠 왔어도 죽지 아니하고,
허다한 풍상을 바다 위에서 겪던 생애를 7년 전쟁이 마무리지어지던
노량대전에 이르러서 마치셨던바,
공은 필시 하늘이 내려 보내신 천사로서 수군영(水軍營)에 내려와
그 노고와 그 흘리신 피로써 우리의 생명을 바꾸고 홀연히 가버리셨으니,
이것이 이 충무공에 대하여 인민이 통곡할 만한 세 번째 이유이다.
우리 백성이 이 충무공에 대하여 이처럼 정이 없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영웅의 마음씀은 원래 이와 같지가 않아서,
그 서리처럼 맑고 눈처럼 깨끗한 마음 속에는 부귀도 없으며
안락도 없고 고생스러움을 근심함도 없었다.
다만 이나라 이 백성을 지켜보는 두 눈빛이 그지없이 형형하였던 고로,
내 한 몸이 죽어서 나라와 백성에게 이로움이 있을진대
아침에 나서 저녁에 죽어도 좋으며 저녁에 나서 아침에 죽어도 좋다
하였다. 하늘과 땅이 있은 이후로 죽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없고
죽은 후에 썩지 않을 해골이 있을 수 없어,
부귀를 누리던 자도 마지막에는 한 개 썩은 해골이 되며,
빈천했던 자도 마지막에는 한 개 썩은 해골이 되고,
안락을 누리던 자도 마지막에는 한 개 썩은 해골이 되며,
근심하고 수심에 찼던 자도 마지막에는 한 개 썩은 해골이 되고,
오래 산 자도 마지막에는 한 개 썩은 해골이 되며,
일찍 죽은 자도 마지막에는 한 개 썩은 해골이 될 뿐이다.
종내에는 천 년, 만 년이 가도 변하지 않을 이치로써
한 개 썩은 해골이 될 개체로서의 나의 몸이 죽어서 미래 억만년을
오래 존재할 이 나라 이 백성에 이로울진대,
어찌 이를 피하며 어찌 이를 하지 않으리요.
설혹 광성자(廣成子)처럼 수명이 길며 석숭(石崇)처럼 부유하여,
입으로 고량진미를 먹고 머리가 하얗게 새도록 오래 살지라도,
나라와 백성의 치욕이 날로 심하여 사방에서 죽는 소리, 통곡 소리,
원망 소리, 한탄 소리, 신음 소리가 들려 오는데 차마 나 혼자 살고
나 혼자 즐거워 할 수 있겠는가.
무릇 영웅의 눈으로는 일찍부터 이 점이 간파되는고로,
이 충무공을 볼지라도 당시 이조전랑(吏曹銓郞)과 대제학(大提學)의
화려한 직책을 선망하지 아니하고 붓을 던져 버리고서는,
사람들이 누구나 천시하는 무반(武班)에 올라
대동무사(大東武士)의 정신을 발휘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리하여 일체의 권문세족들을 초개(草介)처럼 보아
그 문 안에 발을 들여놓지 아니하고 자기의 지조를 지켜 나갔다.
그러다가 나라의 동남방(東南方)에 괴이한 구름이 끼어서 나랏일이
어지러워지므로, 집안도 몸도 돌보지 않고 큰 칼을 휘두르며,
자기의 공적(公的)인 직무를 수행하다가 그 목적이 이루어지니까
갑자기 이 세상을 하직함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아, 누가 이 충무공의 죽음을 곡하는가?
대장부가 충성스런 뜻을 품고 국란에 몸을 던져 더할 나위 없이
마귀 같은 존재를 눌러 없애며, 억만의 창생(蒼生)을 구원하고
자기 몸은 날아오는 총탄에 맞아 죽었다.
그리하여 요사스런 기운이 걷혀서 활짝 갠 하늘에다 장군의 명정(銘旌)을
드높이 휘날리며, 빛나는 상여를 뽕나무 우거진 고향의 산으로
돌려 보내면서,
전국 팔도에서 만세 소리도 양양한 승리의 노랫소리 가운데서
상례(喪禮)를 거행하니, 오오, 장하도다,
누가 이 충무공의 죽음을 곡하는가?
오직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이 가하도다.
그렇지만 후세 사람이 이 충무공을 위하여 한 번 곡할 바 있나니,
그것은 대개 이 충무공이 관직에 나아갔던 초기에 허다히
사사로운 당리(黨利)를 도모하던 때와 문약(文弱)한 무리가 영웅을
위축시켜 일찍 등용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그 공적이 겨우 여기에 그치고 말았으며,
중간에 몇몇 참소하고 투기하는 자들이 마귀의 재주를 놀려
이 충무공이 수 년 동안 갈고 닦은 싸움의 준비를 탕진케 하였으므로
그 공적이 겨우 여기에 그치고 말았으며,
또 하늘이 위인을 낳으셔 우리 국민의 무사(武士)정신을
이처럼 고무하고 발동하였는데도 저 백성의 역적인 나약한 무리들이
해독을 끼쳐 공의 사후 수백 년 사이에 나라와 국민이 치욕을 맛본 적이
번번히 있었으니,
이것이 후인이 이 충무공을 위하여 한 번 곡할 바인 것이다.
그러나 이 어찌 다만 후인이 곡할 바 될 뿐이리요?
오히려 지하에서 이 충무공 역시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제 18 장 이순신의 부장(副將)들과 공의 남긴 자취 및 기담(奇談)
* 정운(鄭運)은 어릴 적부터 충의를 신조로 삼아
'정충보국'(貞忠輔國) 네 자를 칼에 새기기도 하더니,
임진란에 이순신을 따라 적을 거듭 격파하고 매번 싸움마다 앞장서서
용감하게 분전하였기에 이순신이 신임하여 공경과 찬탄을
보내 마지 않았다. 부산포 싸움에서 적탄을 맞아 결국 죽고마니,
이순신이 크게 통곡하며 말하기를,
"나라의 오른팔을 잃었다"라고 하였다.
(선묘중흥지[宣廟中興志] 영암군지[靈岩郡志] 참고)
* 어영담(魚泳潭)은 광양현감(光陽縣監)을 맡고 있던 중에
임진왜란을 만나자 이순신을 뵙고서 부산으로 가서 구원할 것을
역설하였다. 이순신이 물길의 험하고 평탄함을 알지 못하므로
근심하던 차에 영담이 기꺼이 선봉장이 될 것을 자원하기에
이를 허락하였더니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웠다.
이순신이 조정에 장계를 올려, 수전(水戰)의 수비에 능함과
해로의 형세에 숙달해 있음과 또한 제 몸을 잊은 채 나라를 위하는
충성을 포상하고 조방장(助方將) 삼기를 청하였다.
(조야집요[朝野輯要]와 이 충무공의 장계문 참고)
* 이억기(李億祺)는 전라우수사로서 이순신을 따라 거듭 왜적을
쳐부수더니, 급기야 이순신이 잡혀 들어가는 몸이 되자 통곡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죽을 곳을 모르겠다" 하였다.
원균이 패주한 싸움에서 마침내 순국하였다.
(이억기행장[李億祺行狀] 참고)
* 송대립(宋大立)·희립(希立) 형제는 둘다 충용한 의기가 남들보다
뛰어나더니, 대립은 첨산(尖山) 싸움에서 순절하여 죽고,
희립은 장도(獐島) 싸움에서 적탄을 맞고서도 힘껏 싸웠으며,
이순신 사후에도 능히 군사의 위세를 떨치고 적을 대파하였다.
* 유형(柳珩)은 남해현감으로서 이순신을 따라 적을 토벌하였다.
우의정 이덕형이 일찍이 이순신에게 은밀히
"공이 거느린 제장 중에 공의 후임을 맡을 만한 자는 누구인가?"고
물었던즉, 이순신이 답하기를 "충의와 담략이 유형을 따를 자가 없으니
가히 크게 쓸 만한 그릇이외다"라 하므로,
이순신 사후에 이덕형이 조정에 천거하여 통제사를 제수하였다.
* 이순신(李純信)은 중위장(中衛將)으로서 이순신을 따라 왜란 초에
원균을 구하러 갔을 때 고성 앞바다에서 왜적과 세 번 싸워
세 번 다 이겼고, 그 후에도 항상 앞장서 용감하게 분전하여
이순신의 신임을 받았다. (이순신 묘갈[李純信墓碣] 참고)
* 정경달(丁景達)은 이순신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뛰어난 공을
거듭 세웠으며, 후에 조정에 들어와 이순신의 나라 위한 충의와
적을 막아 낸 지략을 상세하게 아뢰고 원균이 무고하였음을 힘주어
설명하였다. (정씨가승[丁氏家乘] 참고)
* 송여종(宋汝鍾)은 이순신과 함께 노량에서 왜적과의 싸움을 벌일 적에
적병을 대패시켜 바닷물이 온통 피로 물들게 하였던 바,
이 싸움이 나라를 건진 전공으로는 으뜸갔으며,
여종의 공 또한 이순신 부하 제장 중에 으뜸갔었다.
(송여종비명[宋汝鍾碑銘] 참고)
* 이영남(李英男)은 조방장(助方將)으로서 이순신을 따라 종군하였으며,
매 싸움마다 이를 갈고 몸을 돌아보지 않았다
(진천현지[鎭川縣志] 참고)
* 황세득(黃世得)은 이순신의 처종형(妻從兄)이었는데,
비분강개형(型)인데다 의기와 절개가 있었다.
노량 싸움에서 힘써 싸우다 죽었는데, 이순신이 말하기를
"나라 일로 죽었으니 그 죽음이 영광되다"고 하였다.
(직산현지[稷山縣志]·이충무실기[李忠武實記] 참고)
* 김완(金浣)은 군량조달의 공도 있었고 왜군을 목베기도 많이 하였다.
(영천군지[永川郡志] 참고)
* 오득린(吳得麟)은 지략이 출중하여 이순신이 늘 참모로 삼았다.
(나주목지[羅州牧志]참고)
* 진무성(陳武晟)은 진주성이 포위당했을 적에 이순신이 성 안에
기별을 전하고자 하므로 왜군의 복장으로 변장하고서
낮에는 숨고 밤을 타서 넘어가 마침내 소식을 전했다.
그후에도 이순신을 따라 다니면서 여러 차례 뛰어난 공을 세웠다.
(흥양현지[興陽縣志] 참고)
* 제만춘(諸萬春)은 경상우수영의 군교(軍校)로서 그 용감성과
활쏘는 솜씨로 유명하였다. 임진년 9월에 우수사 원균의 명을 받아,
작은 배를 타고서 군졸 10명을 거느리고 웅천(熊川)의 왜적 정세를
살피러 갔다 오다가, 영등포(永登浦)에 이르러 왜선 6척을 만나
한 배에 탄 사람 모두가 사로잡히는 몸이 되어 일본의 대판(大阪)으로
끌려갔다.
계사년(癸巳年 : 1593년) 7월 24일 밤, 성석동(成石同) 박검손(朴檢孫)
등 12인과 공모하여 왜선을 훔쳐 타고서 육기도(六岐島)를 지나
동래 수영 아래 도착하여, 8월 15일에 삼도 사수사(三道四水使)가
합동으로 진친 곳에 와서 배알하였다.
이때, 이순신은 만춘이 욕을 보고도 죽지 않았음에
노하여 목을 베고자 하다가, 그가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도망쳐
귀국하였음을 기특하고 불쌍히 여겨, 장계문을 조정에 가지고 가는
사람을 따라 서울로 가서 왜적의 정세를 보고케 하였다.
조정에서는 그 죄를 사면하고 이순신의 군중(軍中)으로 다시 보냈다.
이때, 남쪽의 진중에서 용병한 지 2년이 되었어도 왜적의 사정 및
그들이 쓰는 무기와 장비의 좋고 나쁜 점들을 알지 못하던 차에
만춘을 얻음에 이순신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즉시 불러들여
대솔군관(帶率軍官)의 직을 주니, 만춘 역시 감격하고 분발하여 계책을
세우는 데 조력한 바 많았고,
매 싸움마다 활을 쏘면 백발백중하여 적병이 모두 그를 두려워하고
겁내었다. (제만춘전[諸萬春傳])
* 마하수(馬河水)는 선공주부(繕工主簿)의 직에 있다가 향리로 은퇴해
있었는데, 정유년(丁酉年 : 1597)에는 온 가족이 배 하나를 타고서
바다에서 피난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순신이 통제사로 다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기뻐하며
"이제 우리가 무슨 염려할 일이 있으리오" 하고,
드디어 이순신의 진영으로 가서 배알하였다.
노량 싸움에서 이순신이 적에게 포위됨을 보자 칼을 뽑아
"장부가 한 번 죽을 만한 곳이다"라 말하고는 칼을 휘두르며
적진에 돌입하였는데, 싸우기를 꽤 오래 하다가
적탄에 맞아 죽게 되었다. 그 아들인 성룡(成龍)과 위룡(爲龍)이
역시 칼을 쥐고 돌진하다가 적이 패주해 갔으므로 부친의 주검을 거두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마씨가장[馬氏家狀] 참고)
* 아산현(牙山縣) 동남쪽 20리쯤 되는 곳에 방화산(芳華山)이 있고
산 아래 백암촌(白巖村)이 있으며, 그 마을에 이 충무공의 옛 집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집 곁에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어서
뻗은 가지는 구름에 걸치고 그늘이 여러 무(畝)에 미치니,
이는 이 충무공이 소년 시절에 뛰고 달리기와 말타고 활쏘기를
익히던 곳이다. (아산현지 참고)
* 거제부(巨濟府)에 용사(龍沙)란 데가 있는데,
이 충무공이 일찍이 이곳에서 철을 캐서 칼을 만들었던바 매우 단단하고
날카로왔다고 한다. (거제부지 참고)
* 삼천포(三千浦)에 한 해구(海口)가 있는데,
이 충무공이 일찍이 왜적을 쫓아 항구 안으로 몰아넣고
그 입구를 막아버렸다. 기세가 크게 궁해진 왜적은 산을 뚫어서
길을 내고는 밤을 타서 도망치다가 서로 밟고 밟힌 나머지
죽은 시체가 산 같이 쌓이고 창검 등의 무기를 무수히 버리고 갔다.
후에 사람들이 이곳을 일컬기를 굴량(掘梁)이라 하였다. (위와 같음)
* 좌수영 앞바다의 무슬정(無膝頂)은 이 충무공이 크게 이긴 곳인데,
밭가는 농부들이 왕왕 그 땅에서 왜검 왜창 총탄 등속을 많이 얻는다고
한다. (호남기문[湖南記聞] 참고)
* 고금도(古今島)의 앞쪽은 해남도(海南島)고 뒤쪽은 우장곶(佑將串)이다.
이 충무공이 이 섬을 진무할 때,
우장곶에 깃발을 늘어 세워 군사의 위용을 거짓으로 꾸며 과장하고,
해남도에는 풀을 베어다 쌓아놔 군량을 쌓고 군사를 둔치는
형상을 만들었다. 왜적이 바다 멀리에서 이를 보고는 기습할 것을
모의하여 긴 대열을 끌고 내달아 오다가 암초에 배가 걸려 나아가지도
물러가지도 못하는 낭패를 당하게 된지라,
아군이 이를 덮쳐 크게 쳐부쉈다. (강진군지[康津郡志])
* 명량은 우수영으로부터 3리쯤 되는 곳에 있는데,
양쪽에 깎아지른 듯한 돌산이 서 있고 항구가 매우 좁아서
물살이 급하다. 이 충무공이 쇠줄로 그 입구를 매어 막아 놨더니,
적선이 이에 이르러 걸려 전복되는 게 부지기수였다.
양쪽 벼랑 바위 위에 못구멍이 지금까지 완연히 남아 있는데,
이 지방 사람들이 이를 이 충무공이 줄을 쳐서 왜를 잡은 곳이라고들
한다. (해남현지[海南縣志] 참고)
* 한산도에 한 항구가 있는데, 이 충무공이 왜적을 무찌르고
이 항구로 들어옴에 왜적이 크게 패하고 어쩔도리 없이 육지로 올라
도망하는 모양이 개미떼 같은지라,
후세 사람들이 이를 의항(蟻港)이라 이름지었다. (거제부지 참고)
* 이 충무공이 언제가 밤중에 적과 대치했을 때,
풀뗏목을 많이 만들어 횃불 세 개씩을 나누어 꽂고
곧장 엄습공격하는 형상을 보였다.
이에 왜적이 전선(戰船)으로 오인하고는 마구 총을 쏘아댔던바,
그 화살과 탄환이 다 떨어지기를 기다려 나아가 크게 쳐부쉈다.
(호남기문 참고)
(아래의 세 가지는 황당무계한 이야기에 가깝지만,
선대[先代] 선비들의 문집[文集] 중에 왕왕 실려 있곤 하므로
이에 그대로 옮겨 적어 본다)
* 하루는 이 충무공이 배 안에 있는데, 홀연 궤짝 하나가
바닷물에 떠내려 왔다면서 군졸들이 건져왔다. 보니까 금으로 된
자물쇠로 잠궜고 칠빛이 찬란하였다. 제장이 열어보기를 청하였지만,
허락치 않고 즉시 톱질하는 자를 불러 그 궤를 톱질해 자르는데,
궤 속에서 요동치며 울부짖는 소리가 나면서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궤가 완전히 잘라진 후에 보니까 한 자객(刺客)이 비수를 품은 채
허리 가운데로 토막나 죽어 넘어져 있었다. 제장이 이를 보고
일제히 놀라며 탄복하였다. (위와 같음)
* 하루는 달빛이 뱃머리에 가득한데 홀연 섬의 오른쪽 수풀 속에서
오리떼가 놀라 날아 올랐다. 이 충무공이 배 안에서 자던 중에
이 소리를 듣고 베개를 밀치고 일어나, 군중에 영을 내려 수면을 향하여
총을 난사하게 하였다. 날이 밝은 후에 나가 보니 허다한 왜군의 시체가
물에 떠내려 가고 있었다. 제장이 경이롭게 여겨
이순신이 내렸던 조치의 연유를 물은즉, 이순신이 당(唐)나라 사람이
시(詩)에서 읊었던바
"달은 어두운데 기러기 높이 나니 오랑캐가 밤길을 도망친다"는
구절을 외우고 나서 말하기를,
"밤중에 조용히 자던 오리떼가 어찌 아무 까닭없이
놀라 날 리가 있으리요? 이는 필시 왜병이 헤엄 잘 치는 자를 보내서
우리 배에 구멍을 내어 가라앉히고자 함일 것이라 생각하고
총을 쏘라 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해이서 참고)
* 김대인(金大仁)은 촌사람이라서 힘은 아주 세지만 겁이 많아서
북소리만 들어도 먼저 떨기부터 하여 한 걸음도 나아가지를
못하는 자였다. 이순신이 이 사람을 휘하에 두어 거느리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깜깜한 밤중에 불러서는 "내 뒤를 따르라" 하고,
단 둘이 앞뒤에 서서 산기슭 울창한 숲 속으로 잠행하였다.
별안간 나무 사이로 불빛이 새어 비치기에 그 불빛을 좇아 가보았더니,
두어 길쯤 떨어진 언덕바지 밑에 평지에서 왜병 수십명이
휴식을 취하면서 밥을 짓고 있었다.
이순신이 언덕 위에 서서 대인의 손을 잡고 이를 내려다보며
귓속말로 이르기를, "네가 한 번 힘을 써서 저들을 섬멸함이 어떠뇨?"
라고 물었다. 이에 대인이 부들부들 떨며 답하기를
"도저히 못하겠습니다"하니, 이순신이 노하여 말하기를,
"네가 이 일을 못하겠으면 죽는 것이 마땅하다"하고,
즉시 대인의 등을 밀어 언덕 밑으로 떨어뜨렸다.
그러자 왜병들이 놀라 일어나서는 대인을 둘러쌌는데,
일이 이 지경에 이름에 달아날 길은 없고 죽음의 길만
눈앞에 닥쳐온 셈이었다. 이에 대인도 돌연 큰 담력이 생겨나서
주먹을 휘둘러 왜병 하나를 쳐서 거꾸러뜨리고는 그 칼을 뺏더니,
뛰어오르고 큰 소리를 지르면서 좌충우돌 왜병을 찔러 죽이는데,
그 칼은 번개같이 나르고 그 소리는 산골짜기를 찢는 것 같았다.
잠깐 동안에 왜병 무리가 피를 낭자하게 흘리면서 다 죽고,
김대인 혼자 온몸에 피를 뒤집어 쓴 채 서있었다.
이순신이 뛰어내려가 대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자네가 이제부터는 정말 쓸 만한 인물이 되었구나!" 하고는
데리고 돌아왔다.
이후로는 김대인이 왜적을 만나기만하면 바람을 이르켜 싸움마다
앞장서서 용감하게 분전하고 많은 공을 세웠으므로
가덕첨사(加德僉使)를 제수하였다.
(호남지[湖南志] 및 유행리담[流行俚談] 참고)
* 이상, 이 장에다 기록한 것들은 여기저기서 조금씩 따온 것이라서
수집 채록함이 정밀하지를 못하고, 게다가 이 공의 남긴
자취 이하 부분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진실인지를 알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이들을 믿기 어려운 풍설로 제껴버릴 수도 없다
하겠다.
그러기에 여기에 붙여 싣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충무공이 성공한 원인은
이들 인재를 거두어 썼던 데만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들 여러 기발한 계책을 품었던 까닭인가?
둘 다 아니다.
이 충무공이 성공한 비결을 묻는다면 한 마디로 간단히 답할 수 있을지니,
그 한 마디란 무엇인가?
곧, 이 충무공이 왜적의 총탄과 화살이 비오듯 하는 속에 버티고 서서,
어깨를 움츠리고 피하려 드는 장졸들을 꾸짖어 물리치고
하늘을 가리켜 하던 말,
"내 명운(命運)은 저기에 있다"고 하던 그 한 마디가 바로 그것이다.
죽고 삶을 하늘에 맡기므로 시퍼런 칼날이라도 밟으며,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며, 호랑이 굴에도 들어가며,
용의 턱에 달린 구슬도 따는 것이다.
만일 이 관문(關門 : 즉, 생사의 관문)을 초월치 못하면,
비록 신묘한 방법을 갖추고 있을지라도 겁을 내어
제대로 운용치 못할 것이며, 정예의 훈련된 군대가 있을지라도
기가 죽어서 이를 지휘해 내지 못할 것이다.
가시덤불 하나, 돌모서리 하나에도 오히려 전전긍긍한다면
하물며 비오듯하는 총탄에는 어찌할 것이며, 씨름질 한 번,
발길질 하나에도 오히려 기어간다면 하물며 구름처럼 몰려드는
도적떼들은 어찌할 것인가?
오호라, 위인을 배우는 자는 반드시 이 관문을 먼저 초월할지라.
제 19 장 결 론
신사씨(新史氏)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이순신전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책상을 치고 큰 소리를 질렀다.
아아, 우리 민족이 외족과 경쟁하는 힘이 이렇게 감퇴한 시대에
공이 계셨으니 어찌 놀라운 바가 아니며,
우리 조정의 정치가 이처럼 부패한 시대에 공이 계셨으니
어찌 놀랄 만한 바가 아니며, 백성이 전쟁을 겪어보지 못하여
북소리만 들으면 놀라서 숨는 시대에 공이 계셨으니
어찌 기이한 바가 아니었던가. 또 조정 신하들간에 정쟁이 심하여
사사로운 싸움에는 용감하나 나라의 싸움에는 겁을 먹는 시대에
공이 계셨으니 어찌 이상하지 아니하며,
왕이 의주로까지 피난하여 인심이 흩어진 차에 공이 계셨으니
어찌 우러러 볼 만한 바 아니며, 바야흐로 일본이 강성해져
우리의 약한 틈을 타서 그 교만무도함이 비할데 없던 터에
공이 계셨으니 어찌 상쾌한 바 아니었더뇨?
이왕에 한국 중국 일본의 세 나라간에 우리 국민의 세력이 팽창하던
시절에 공이 계셨거나, 조선조 태종(太宗)·세종(世宗)이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에 대한 교화가 두루 뻗치던 시절에
공이 계셨거나, 아니면 나라가 부강하고 은성하여 우리는 강하고
적은 약했던 시절에 공이 계셨다면 오히려 마땅히 그럴 수 있으리라
하겠지만, 이제 이와 같이 어지러운 시대에 공 같은 이가 계셨으니
어찌 놀랄 만하고 기이하며 또 상쾌한 바가 아니겠는가.
이르지도 않고 뒤늦지도 않게 바로 이 시대에 나서 우리 민족을 살리며
우리 역사를 빛냈으니, 위대하도다 공이시여, 장하도다 공이시여!
내가 일찍 나라 안팎의 고금(古今)의 인물들을 들어 공과 비교해 보았다.
강감찬(姜邯贊)이 나라가 어지러웠을 때에 몸을 일으켜
큰 난을 평정했음이 공과 같지만, 그 적은 수의 군사로써
큰 무리를 치는 신묘한 지략은 공만 못하다.
정지(鄭地)가 해전에 능하여 왜구를 소탕했음이 공과 같지만,
그 나라 위해 몸 바치는 열성은 공만 못하다.
제갈량(諸葛亮)이 병이 날 정도로 몸과 마음을 다하여 충절을 바쳤음이
공과 같지만, 수십 년간 한(漢)나라의 재상으로 있으면서
정권과 군권(軍權)을 모두 장악하고도 옛 도읍을 되찾지 못하였으니,
공(功)을 이룸이 공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충무공은 필경 누구와 비슷한가?
근래에 선비들이 혹 영국의 해군 제독 넬슨을 들어 이 충무공과 짝짓고
말하기를, "고금을 통틀어 수군계의 동서 양대 위인이다"라고 하지만,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 과연 우열이 있는가 없는가를 내가 비교하여
한 번 평론코자 한다.
대체로 이 충무공의 역사가 넬슨과 같은 점이 많으니,
단지 그 해전의 생애만 같을 뿐 아니라 심지어 다음과 같이
세세한 역사까지 같은 바 많았다.
즉, 초년(初年)에 이름을 아는 자가 없던 점,
구구한 말단 무관으로 허다히 긴 세월 동안 묻혀 있던 점,
그 후 수군의 명장(名將)이면서도 첫 번째 공을 이룸은 육전(陸戰)으로
시작되었던 점, 한 차례 육전을 거친 후에는 수전으로 그 활약상을
마쳐 다시 육지로 올라가지 않았던 점,
여름철 원정에 더위를 먹어 열병(熱病)에 걸려 위험한 고비를 겪었던 점,
여러번 총알을 맞고서도 죽지 않았던 점,
끝내는 적함을 쳐부순 후 양양한 개선의 노랫소리 들리는 가운데
적탄에 맞아 눈을 감았던 점,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던 열성,
맹세코 도적과는 더불어 같이 살지 않겠다 하는 뜨거운 의분,
그들이 대항했던 적병(프랑스와 일본)의 악독함,
그들이 치러 낸 전쟁의 지리했던 점, 이런 점들에 기대어
이 충무공과 넬슨을 더불어 논함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넬슨 당시의 영국의 국세(國勢)라든지 군사의 힘,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에게주어진 권리,
싸워서 지켜낼 힘 등이 임진년 때의 우리 나라와 비교하면 어떠했던가?
저들은 수백년 동안을 열강과 경쟁했던 결과로 이런 점들에 힘쓰고
갈고 닦아 인민의 적개심이 풍부했을뿐더러,
그 뭉치는 정신이 넉넉하고 의지할 바가 두터워
영웅이 무용(武勇)을 발휘할 여지가 대단히 컸었다.
중앙 금고에는 수억만 원의 재화를 쌓아 둬서 장군의 군비(軍備)에
쓰이도록 하였으며, 기계공창(器械工廠)에서는 수천백 문(門)의 대포를
제조하여 장군이 군사작전에 쓰기를 기다렸고,
각 대(隊)의 수십만 명 되는 군사들은 앉아서 죽는 것을 참지 못하여
장군의 일전(一戰)을 축원하였으며, 각 항구의 수백천 톤 되는 거함은
값어치를 따지지 않고 장군이 한 번 시험하기를 기다렸고,
조정의 재상과 집권자들은 진실되고 사려깊게 마음과 힘을 다하여
장군의 요구와 쓰임새에 순응하였으며,
전국의 인민은 한 시도 마음을 놓지 않고 침식도 잊어버린 채
장군의 승리를 기도하였으니,
넬슨으로서는 하등의 깊은 책모와 멀리 내다보는 눈이 없이
단지 뱃머리에 우뚝 서서 휘파람이나 불고 있었을지라도
그야말로 넬슨이 되었을 것이다(큰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다).
이 충무공이 이 충무공 됨에 이르기는 이와 같지 않았으니,
군량이 고갈되었는데 준비해 놓지 않으면 누가 그것을 준비하며,
무기·장비가 무디고 낡았는데 제조해 놓지 않으면 누가 그것을 제조하며,
병력이 줄어들고 쇠잔해졌는데 새로 모집하지 않으면 누가 모집하며,
배의 운행이 그다지도 느리고 둔한데 개량하지 않으면
누가 개량할 것인가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한편으론 전쟁터에 나가 싸움을 지휘해 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밭을 일구게하여 군량을 비축하고 철을 캐어 무기를
만들게 하며 군사를 훈련시키고 함선을 건조하기에 바빠
한 시도 틈이 없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한편으로는 동료 중에
원균 같은 자의 시기와 질투를 받았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조정 신하들 가운데 이이첨(李爾瞻) 같은 자의 참소를
당하니, 내가 생각컨대도 넬슨으로 하여금 적병이 나라를 이미
쳐부순 때를 당하여 이와 같은 번뇌를 겪게 하였다면
과연 그 공을 이룰 수 있었을지? 이는 그렇다, 아니다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는 문제라 하겠거니와,
급기야는 원균이 큰 일을 그르쳐 이 충무공이 6, 7년을 노심초사하면서
길러낸 날랜 장수와 용맹한 군졸들이며 준비해 놓았던 군량과 선척들을
죄다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 후에, 10여 척 남은 보잘 것 없는 배와
160여 명의 새로 모집한 군졸로써 휘원(輝元)·수가·행장·청정 등에
맞서서 하늘과 바다를 뒤덮을 기세로 도도히 밀려오는
수천 척의 적함과 겨루게 되었다.
이때, 이 충무공이 조정에서 물러나오며 하는 말이,
"내가 있으면 비록 적선이 많다 하더라도 우리나라를 넘겨다보지는
못한다" 하였다. 그리고는 바다를 향하여 한 번 부르짖으니
고기와 용이 공의 위엄을 도우며 하늘과 해가 빛을 잃고
참담한 도적의 피로써 온바다를 붉게 물들게 한 것은
오직 이 충무공 뿐이었다.
이 충무공을 제외하고는 고금에 허다한 명장을 다 둘러 보아도
이 일을 능히 해낼 자 실로 없다고 할지라.
아아, 저 넬슨이 비록 무용(武勇)이 있다 하나,
만일 20세기 오늘에 이 충무공과 같이 살아 있고
해상에 풍운이 일어(즉, 해전이 벌어지게 되어) 무장을 갖추고
서로 만나게 된다하면
필경은 충무공의 아들이나 손자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보아라. 세계의 수군 위인을 말하게 되면 모두가 넬슨을
으뜸으로 꼽아, 영웅을 숭배하는 자는 반드시 넬슨상(像) 한 본(本)을
지니고 다니며, 역사를 읽는 자는 반드시 넬슨전(傳) 한 권을 입에 올리고
더욱이 군계(軍界)로 나가서 군인 자격을 길러 갖추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넬슨의 이름을 외우며 넬슨의 발자취를 흠모하고
넬슨이 한 말을 줏어 모으며 넬슨의 수염끄덩이라도 되기를 꿈꾸니,
살아서 잉글랜드 한 나라의 넬슨이 죽어서는 만국의 넬슨이 되며
살아서 유럽 한 주(州)의 넬슨이 죽어서는 육대주(六大洲)의 넬슨이
되었도다. 그런데 우리 충무공에 이르러서는
가까이는 중국의 역사책[명사(明史)]에나 그 싸움의 상황이
간략히 기록되었을 뿐이며, 멀리는 일본 아이들이 그 영웅다운 이름에
떨었을 뿐이고, 그 나머지는 본국의 나무 베고 소 치는
아이들의 노래에나 이름이 오를 뿐이며, 세계적으로 유포된 역사라야
철갑선을 제일 먼저 발명해 냈다는 한 가지에 불과하니,
아아, 이는 영웅의 명예란 항상 그 나라의 세력의 성쇠에 따라
높아지거나 낮아진다는 말이아닌가?
무릇 수군의 제일 위인을 낳았고 철갑선 창조의 비조(鼻祖)인
우리나라로서, 오늘에 이르러 저 해군력이 가장 강성한 나라와 견주기는
고사하고 드디어는 국가란 이름조차도 존재할까 말까 하는 비참한 지경에
빠졌으니 내가 저 수백 년 동안 내내 백성의 기상을 눌러 꺾으며
백성의 앎을 가로막고 문약사상(文弱思想)을 심어주기만 하던
비열한 정객(政客)들의남긴 독을 돌이켜 생각하면
한(恨)이 바닷물과도 같이 깊은 것이다.
이에 이순신전을 지어 고통에 빠진 우리 국민에게 내보내노니,
무릇 우리의 선남신녀(善男信女)들은 이를 본받으며 이 길을 걸어나가
가시밭길을 밟아 다지고 고해난관(苦海難關)을 뛰어 넘을지어다.
하늘이 20세기의 태평양을 내려다 보고 제 2의 이순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1908년 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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