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탑 아래에서
- 윤흥길 -
1.
“대미를 장식헐 만헌 순애보라고 내 입으로 말허기는
약간 거시기헌 구석이 있지마는…….”
인테리어 전문점을 운영하는 최건호였다.
묵비권이라도 행사하듯 내내 잠자코 앉아 남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그가 뜻밖에도 자진해서 마지막 이야기 순번을 떠맡고 나서자
그에게도 입이 달려 있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좌중은 깜짝 반가워했다.
“반세기가 지나가드락 영 잊혀지지 않는 소녀가 있다면
혹시 순애보 계열에 턱걸이로라도 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묵적보살처럼 입이 천근이기로 소문난 최건호가 절대로 허튼소리를
할 리 없다고, 최건호가 순애보라 주장하면 그건 백발백중 순애보임이
틀림없다고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떠들어 댔다.
순애보 여부를 판별하는 첫 번째 기준은
아무래도 발화자의 과묵성인 듯했다.
“열 살짜리 머시매, 지지배가 사랑을 알면은 뭣을 얼매나 알 것이냐.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허고는 애시당초 거리가 먼 얘기라서
혹시라도 낭중에 실망허지 않을까 겁난다.”
고백 성사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최건호의 표정은 그지없이 진지해 보였다.
그 진지한 태도로 미루어, 본론을 들어보나마나 벌써 순애보가
틀림없는 줄 알겠다고 한바탕 또 떠들어 댔다.
순애보 여부를 판별하는 두 번째 기준은
아무래도 발화자의 진지성인 듯했다.
모처럼 어렵게 입을 연 최건호가 일껏 꺼낸 이야기를 도로 주워 담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게끔 좌중은 온갖 발림으로 충동질했다.
“낭중에라도 순애보가 기네, 아니네, 허고 우리 건호한티 시비 거는 놈이
나타났다 허면 당장 내가 가만 안 놔둔다!”
동창생들의 전폭적인 성원에 힘입어 최건호가 마침내 이야기를
풀어 내기 시작했다.
“만세 주장 근방에서 살 적에 있었던 일인디…….”
2
만세 주장 뒷골목에 살고 있었다.
유명한 술도가를 옆구리에 끼고 산다 해서 특별히 득 볼 것도,
해될 것도 없었다. 날만 궂을라치면 주장 건물 전체가
모주망태로 흠씬 취해서 문뱃내를 펑펑 풍기듯 찌든 막걸리 냄새를
사방에 퍼뜨리는 바람에 비위가 많이 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집에 따로 유감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지에밥이었다.
볕이 좋은 날 만세 주장에서는 도로 가에 멍석을 여러 개 나란히 펴 놓고
술밑으로 쓸 엄청난 양의 지에밥을 말리곤 했다.
입에 넣고 씹기 딱 알맞을 만큼 꼬들꼬들 마른 상태에서
단내를 확확 풍기는 그 고두밥이 배곯는 아이들을 환장하게끔
만드는 것이었다. 멍석 근처에 가까이 다가갈 적마다
뱃속에서 회가 동하는 바람에 참말이지 미칠 지경이었다.
목구멍 안쪽에서 마구 고무래질하는 것 같은 유혹을 견디다 못한 아이들이
학교를 오가는 길에 한 줌씩 지에밥을 슬쩍하다가
주장 일꾼인 짝눈이 아저씨한테 들켜 경을 치기 일쑤였다.
나 역시 짝눈이 아저씨한테 붙잡혀 두 차례나 혼띔을 당했다.
서로 빤히 얼굴을 아는 이웃지간이라서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더 불리한 처지였다.
지에밥을 멍석 위에 고루 펼 때 사용하는 고무래 자루를 휘두르며
세상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라도 그악스레 뒤쫓아 올 성싶은
그 성미 고약한 일꾼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는
다른 아이들보다 더 영악스러워질 필요가 있었다.
짝눈이 아저씨가 짝눈을 한껏 지릅뜨고 주로 감시하는 쪽은
학교가 파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이었다.
주장을 사이에 두고 학교와는 반대 방향에서 하굣길의 아이들 행렬을
거슬러 움직이며 기회를 엿보는 것이 고무래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려면 학교에서 집으로 향할 때 부러 가까운 길을 두고
시내 쪽으로 먼 길을 에돌아가는 수고를 감수해야만 했다.
내가 그 계집애를 맨 처음 본 것은 봄볕이 다냥하게 내리쬐는 한낮이었다.
아침에 등교하면서 길가에 멍석을 펴는 짝눈이 아저씨를 봤기 때문에
나는 그날도 하굣길에 일부러 네거리 하나를 더 지나
먼 길을 에돌아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경찰서 앞을 지난 다음 시청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시청 담벼락을 따라 길게 잇대어 세워 놓은 게시판이 큼지막한 벽보들로
더덕더덕 도배되어 있었다.
벽보에는 최근의 전황들이 주먹 덩이만 한 붓글씨로 짤막짤막하게
적혀 있어 지나가던 행인들을 게시판 앞에 한참씩 붙들어 세우곤 했다.
‘국군 1사단 평양 입성’,
‘국군과 유엔군 청천강 도하,
압록강 향해 진격 중’,
‘중공군 참전 사실 밝혀져’
따위 새로운 소식들을 내가 차례로 접하게 된 것도 그 게시판을 통해서였다.
만세 주장 고두밥을 훔쳐 먹기로 작정한 날은 덤으로,
최근의 전황에 접하는 날이기도 했다.
최전방에서는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가 한창이었다.
국군 또는 유엔군 몇 사단이 무슨 고지 전투에서
북괴군 몇 개 연대를 섬멸했고, 무슨 고지 전투에서 중공군 몇 개 사단을
궤멸시켰다는 등등의 내용을 담은 벽보들이 게시판에
어지럽게 나붙어 있었다.
1·4 후퇴를 거쳐 전쟁은 처음 시작되었던 그 자리로
얼추 되돌아와 삼팔선을 사이에 두고 오랫동안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빼앗아 새로 차지한 땅은 거의 없는 셈인데
국군과 유엔군은 날마다 승승장구하는 반면 북괴군과 중공군은 날마다
무더기로 죽어 나자빠진다는 내용만 벽보에 적히는 그 속내를
나는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낡은 양복 차림에 중절모를 눌러쓴,
꽤 유식해 뵈는 아저씨가 곁에서 소리 내어 벽보를 읽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그 아저씨에게, 섬멸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았다.
몽땅 씨를 말린다는 뜻이라고 아저씨가 시원스레 대답했다.
그럼 궤멸은 또 무슨 뜻이냐고 다시 물었다.
아저씨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만, 겨우 씨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조리 다 때려잡는 거라고 일러 주었다.
언젠가 벽보에 자주 등장하는 그 말들의 뜻을
아버지한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다짜고짜 화부터 버럭 내면서,
쥐방울만 한 녀석이 그런 건 알아서 얻다 쓰려고 묻느냐고,
욕설이나 다름없는 상스러운 말이니까 굳이 알 필요도 없다고
사정없이 윽박지르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매번 그런 식이었다.
시청 앞을 떠나 시공관 네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돌면
곧바로 익산 군청이었다.
나는 군청 입구에서 길바닥에 떨어진 나뭇개비를 찾느라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다음 차례가 익산 군수 관사이기 때문이었다.
관사 정원과 도로 사이에 담장 대신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철책이 쳐져 있었다.
철책에 나뭇개비를 대고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힘껏 달리면
따발총같이 타타타타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곤 했다.
관사 철책에 나뭇개비를 막 갖다 대려다 말고 나는 갑자기
손놀림을 멈칫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무 몇 그루와 잔디밭만 휑하니 드러내 보이던
정원에서 인기척이 났다. 나하고 동갑 또래로 보이는 계집애였다.
화사한 꽃무늬 원피스 차림에 정갈하게 단발머리를 한 계집애가
한 손에 하얀 고무공을 쥔 채 양팔을 앞으로 나란히 뻗은
괴상야릇한 자세로 도로 쪽을 향해 소리 없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계집애가 황금빛 잔디밭 위로 하얀 공을 도르르 굴리면서 말했다.
“나비야! 나비야!”
공은 잔디밭과 철책이 만나는 지점에서 정확히 구르기를 멈추었다.
내가 철책 틈새로 손을 집어넣으면 충분히 공에 닿을 만한 자리였다.
뜬금없이 웬 나비 타령인가 의아해서 나는 계집애의 행동거지를
주의 깊게 살폈다.
그때였다. 얼룩 고양이 한 마리가 정원수 가지에서 잔디밭 위로
햇솜 뭉치처럼 사뿐히 내려앉더니만 공을 향해 달려왔다.
고양이는 철책 너머에 버티고 서 있는 웬 낯선 사람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갑자기 달음질을 멈추었다.
녀석은 노란 눈동자에 잔뜩 경계의 빛을 담아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뾰족한 근거도 없으면서 옷차림과 용모만으로 계집애를 대뜸
서울 아이라고 단정해 버렸다.
그리고 서울내기들은 제아무리 똑똑한 척해 봤자 모르는 게 너무 많아
탈이라고 속으로 비웃었다. 멀쩡한 고양이를 나비라 부르다니,
그렇다면 팔랑팔랑 공중을 날아다니는 진짜배기 나비는 대관절
무슨 이름으로 불러야 옳단 말인가?
“거기 누구…….”
뭔가 수상쩍은 낌새를 챘는지 계집애가 내 쪽을 멀뚱멀뚱 건너다보며
위 아랫입술을 연방 달막거렸다.
계집애의 행동을 훔쳐보다 들킨 것이 창피해서 나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계집애의 눈길이 내 움직임을 제때제때 따라잡지 못했다.
“거기 누구?”
내가 처음 서 있던 그 자리에 아직도 눈길을 고정한 채
계집애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나는 손에 든 나뭇개비를 아무렇게나 땅바닥에 팽개치면서
담박질을 놓기 시작했다.
당달봉사다! 집 쪽을 향해 정신없이 뛰면서 나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계집애가 눈뜬장님이란 사실을 최초로 알아차리던 순간의 놀라움이
나로 하여금 만세 주장 지에밥을 훔쳐 먹으려던 애초의 계획을
깜빡 잊도록 만들었다.
그날 밤이 깊도록 서울 계집애의 그 희고도 곱상한 얼굴이,
그 화사한 옷맵시가, 어딘지 모르게 굼뜨고 어설퍼 보이던
그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내 머릿속에서 줄곧 떠나지 않았다.
이튿날 나는 학교가 파하기 무섭게 곧장 익산 군수 관사로 달려갔다.
관사 정원에서는 전날과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계집애는 양팔을 앞으로 나란히 뻗은 부자연스런 자세로
거리를 재기 위함인 듯 몇 발짝 조심스레 걷다가는
공을 잔디밭 위로 도르르 굴렸다.
“나비야! 나비야!”
아마도 철책 너머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 때문인 듯
나비란 놈은 정원수 가지들 사이에 몸을 숨긴 채 꼼짝도 않고
냐옹냐옹 울어 대기만 했다.
공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잔디밭과 철책이 만나는 지점에
거의 정확히 멎어 있었다. 나는 통탕거리는 가슴을 애써 누르면서
철책 틈새로 손을 넣어 공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계집애를 향해 던져 주었다.
공이 발치 가까이에 떨어지는 순간 계집애의 얼굴에는 놀라움인지
반가움인지 모를 괴상야릇한 표정이 떠올랐다.
“거기 누구?”
“사람이여.”
“아, 어제 바로 그 애!”
계집애는 말 한마디로 상대방을 단박에 알아맞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난 널 알아. 나이는 나랑 비슷해. 키는 나보다 조금 더 커.
그리고 얼굴이 아주 못생긴 애야.”
마치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것처럼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얼굴 못생긴 것까지 정확히 알아맞히는 바람에
나는 가슴 복판이 뜨끔 쑤셨다.
계집애가 내 앞으로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양팔을 앞으로 나란히 뻗지 않은 정상적인 자세로 걷느라고
철책까지 다다르는 데 반나절은 족히 걸리는 듯했다.
“못생겼다고 해서 미안해. 그냥 괜히 해 본 소리야.”
못생긴 게 사실이라고 나는 하마터면 실토정할 뻔했다.
생기다 만 얼굴 같다고 모두들 나를 놀려 대곤 했으니까.
“느그 아부지가 군수냐?”
얼굴 문제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나는 엉뚱한 데로 말머리를 돌렸다.
“군수가 뭔데?”
“니가 익산 군수 딸이냔 말여.”
“익산 군수가 뭔데?”
군수 관사에 살면서 군수가 뭔지도 모르다니.
역시 서울내기들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은
무지렁이들이라고 생각했다.
서울내기들한테는 잠자리면 무조건 다 그냥 잠자리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실잠자리, 기생잠자리, 비단잠자리, 고추잠자리, 된장잠자리, 쌀잠자리,
보리잠자리, 밀잠자리, 말잠자리, 호랑잠자리 등등
가지각색의 수많은 잠자리가 세상에 있는 줄 꿈에도 모르는 버꾸들이었다.
“난 그런 거 잘 몰라. 외갓집 식구들이 가자는 대로
그냥 여기까지 따라왔을 뿐이야.”
계집애가 심드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으쩌다가 그러코롬 당달봉사는 되야 뿌렀다냐?”
나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간밤부터 줄곧 품어 나온 의문을
입 밖으로 불쑥 털어 냈다.
“당달봉사가 뭔데?”
역시 서울내기라서 별수가 없었다.
나는 당달봉사가 어떤 건지 설명해 주려고 철책에 바싹 달라붙었다.
그 순간 뭔가 이상한 낌새가 퍼뜩 느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돌려 관사 쪽을 살펴보았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파가 유리창 안쪽에서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는 중이었다.
어마 뜨거라 하고 나는 전날처럼 또 담박질을 놓기 시작했다.
얘, 얘, 하고 다급히 부르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지만
나는 뒤도 안 돌아다보고 진둥한둥 줄행랑을 놓았다.
이튿날은 군수 관사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 이튿날도 마찬가지였다.
관사 쪽을 외면한 채 지낸 그 이틀 동안에는 만세 주장 앞길
멍석 위에 널린 지에밥을 봐도 뱃속의 회가 전혀 동하지 않았다.
서울 계집애의 그 새하얀 낯꽃이 끊임없이 눈에 밟히는 바람에
그러잖아도 재미를 못 붙여 애를 먹던 학교 공부가 한결 더 부실해졌다.
이틀 동안이 내 인내심의 한계였다.
좀이 쑤셔서 더 버티지 못하고
나는 사흘 만에 또다시 군수 관사를 찾아갔다.
정원에는 아무도 안 보였다. 나비란 놈도 안 보였다.
하얀 고무공 하나만이 잔디밭 한가운데 동그마니 놓여 있을 따름이었다.
한참 더 기다려 보다가 관사 안에 아무런 기척도 없음을
거듭 확인하고 나서 무척이나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 내 퇴로를 우뚝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아차렸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파였다.
내가 또 달아나려 하자 노파가 갑자기 내 팔을 덥석 붙들었다.
“널 혼내 주려는 게 아니다. 아가, 겁낼 것 없다.”
할머니는 몬존한 말씨로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우리 명은이, 지금 병원에 있다.
그저께 밤부터 갑자기 신열이 끓고 헛소리가 우심해서
병원에 입원시켰다.”
노파한테 단단히 붙들려 있던 내 팔이 갑자기 자유로워졌다.
“나는 명은이 외할미다. 우리 명은이 말동무가 돼 줘서 고맙구나.
명은이는 아마 내일쯤 퇴원할 게다.”
일단 되찾은 팔을 또다시 뺏길까 봐 나는 뒷짐을 진 채
명은이 외할머니의 말에 무턱대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너는 어디 사는 누구냐? 집이 어디냐?”
나는 대충 만세 주장께를 어림하고는 턱짓으로 그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명은이 외할머니가 대뜸 앞장을 섰다.
“나랑 같이 가 보자.”
집까지 가는 동안 명은이 외할머니는 별의별 시시콜콜한 것들을 다 물었다.
이름은? 나이는? 부모님은? 형제자매는?
전쟁 때문에 혹시 불행을 당한 가족이나 일가친척은?
“건호야, 학교 끝나면 우리 관사에 자주 놀러 와도 괜찮다.
그 대신 너한테 신신당부할 게 있다.
우리 명은이 듣는 데서는 절대로 입 밖에 꺼내지 말아야 될 말들이
있단다.”
첫째, 부모 이야기.
둘째, 사람이 죽고 사람을 죽이는 이야기.
셋째, 장님 이야기.
“더군다나 당달봉사 같은 말은 아주 좋지 않은 말이니까
우리 명은이 앞에서 다시는 꺼내지 않도록 단단히 입조심해야 된다.
알겠냐?”
나는 홧홧 달아오른 낯꽃을 들키지 않으려고 부러 두어 발짝 뒤로 처져서
걸었다. 명은이 외할머니는 만세 주장 뒷골목까지 나랑 동행해서
기어이 우리 집을 확인한 다음에야 발길을 돌렸다.
“건호야!”
대문간에 막 발을 들여놓으려는 나를 명은이 외할머니가
등 뒤에서 큰 소리로 다시 불러 세웠다.
“우리 명은이, 참 불쌍한 아이다.
제 엄마 아빠가 한꺼번에 처참하게 죽는 꼴을 두 눈 번히 뜨고
지켜본 아이다. 그날부터 제 눈엔 아무것도 안 보인다면서,
저는 아무것도 못 봤다면서 하루아침에 장님이 되는,
아주 몹쓸 병에 걸려 버렸단다.
의사도 못 고치고 약으로도 못 낫는, 아주 고약한 병이란다.”
눈물 구덩이에 퐁당 빠져 허우적대는 눈동자로 명은이 외할머니는
내 얼굴을 간신히 건너다보았다.
때깔이 고운 한복 차림에 기품이 넘쳐 나던 명은이 외할머니의 모습이
한순간에 와르르 허물어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마땅히 그래야만 될 성싶어 나는 덮어놓고 고개를 끄덕이는 동작만
되풀이했다. 명은이 외할머니가 내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우리 명은이한테 말동무라고는 세상천지
달랑 고양이 새끼 한 마리밖에 없었단다.
앞을 못 보게 된 뒤로 우리 명은이가 고양이 말고
사람을 말동무로 삼은 건 건호, 니가 맨 처음이란다.”
명은이의 퇴원이 예정된 날은 때마침 주일이었다.
우리 식구들은 서울에서 피란 내려온 막내 이모의 전도 덕분에
수복 직후부터 신광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교회 사찰인 딸고만이 아버지가 힘차게 울려 대는 종소리에 이끌려
나는 주일 아침에 신광 교회로 향했다.
주일 학교 반사의 지시에 따라 나는 예배 도중 죄를 고백하는
기도를 드렸다. 이북 피란민 출신으로 중앙 시장에서 철물점을 경영하는
홀아비 반사는 매주 공과 공부가 끝날 때마다 한 주일 동안 저지른 죄를
모조리 고백할 것을 어린 제자들에게 강요하곤 했다.
전에는 만세 주장 지에밥을 훔쳐 먹은 죄와
어쩌다 길에서 주운 돈을 주전부리에 사용한 죄 따위가
내 고백 기도의 주된 내용이었는데,
명은이를 만난 후 당달봉사라는 나쁜 말을 사용한 죄 하나가
내 기도 속에 덧붙여졌다.
나는 주일 학교를 마치기 무섭게 신광 교회에서 곧장 시청을 향해 달려갔다.
명은이에게 건넬 선물을 장만하기 위해서였다.
전황에 대한 새로운 소식은 앞 못 보는 명은이에게
의미 있는 선물이 될 뿐만 아니라 내가 결코 시골뜨기라고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님을 서울내기 계집애한테 일깨워 주는
확실한 증거물이 될 것이었다.
아무도 없는 정원 내부를 기웃거리며 철책 앞에서 서성거리는 참인데
관사 현관문이 빠끔히 열렸다. 명은이 외할머니가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나는 난생처음 익산 군수 관사 안으로 주뼛주뼛 발을 들여놓았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낯선 구조의 양옥집 거실을 통과하는 나를
액자 속의 이승만 대통령이 근엄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명은이가 들어 있는 작은 방으로 안내되었다.
명은이 머리맡을 지키고 있던 나비란 놈이
나를 보더니만 냐옹 소리와 함께 냉큼 책상 위로 튀어 오르면서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명은이는 얇고 보드라운 차렵이불로 턱밑까지 가린 채
반듯한 자세로 드러누워 있었다. 며칠 사이에 눈에 띄게 야윈 모습이었다.
그래서 전보다 더욱 새하얗고 전보다 더욱 예뻐 보였다.
멋쩍고 쑥스러운 나머지 나는 괜스레 히죽히죽 웃기부터 했다.
명은이는 보이지 않는 눈을 내 얼굴에 맞추려고
내 웃음소리를 좇아 머리를 움직거렸다.
“재미있는 얘기 나누면서 천천히 놀다 가거라.”
명은이 외할머니가 잣알이 동동 뜬 수정과 그릇과 과자가 수북이 담긴
쟁반을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명은이 외할머니가 방에서 나가기를 기다려 나는 준비해 온
선물 보따리를 다짜고짜 풀어 놓기 시작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 원수를 유엔군 총사령관 직에서 해임한 소식부터
먼저 전했다.
연이어 의정부 전투에서 국군 1사단과 미군 3사단이 연합 작전으로
북괴군 1군단을 포위해서 1개 연대를 섬멸한 소식을 숨차게 전했다.
“명은이 너, 섬멸이 무신 말인지 알어? 몰르지?
몽땅 씨를 말린다는 뜻이여.”
초점을 잃은 채 내 얼굴 근처를 헤매던 명은이의 눈이 갑자기 회동그라졌다.
명은이의 그같은 반응을
이를테면 저보다 훨씬 아는 게 많은 상대에 대한 우러름의 표시로
받아들이면서 나는 더욱더 신떨음에 고부라졌다.
내친김에 나는 미군 9군단이 ‘철의 삼각지’ 전투에서
중공군 대부대를 궤멸시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명은이 너, 궤멸이 무신 뜻인지 알어? 몰르지?
씨만 빼놓고 몽땅 다 때려잡는다는 뜻이여.”
“과자 안 먹니?”
“뭣이라고?”
“과자나 먹으라고!”
명은이는 핼쑥하게 핏기가 가신 입술을 바르르 떨면서 눈꺼풀을 아래로
착 내리깔았다. 명은이가 눈을 꼭 감자 그때껏 숨어 있던 속눈썹이
기다랗게 드러났다.
명은이의 권유를 받아들여 나는 아무 눈치코치도 없이
쟁반 위의 과자들을 마구 입안으로 걸터들이기 시작했다.
명은이는 끝내 과자에 손도 대지 않았다.
명은이는 단 하루 사이에 놀라우리만큼 기력을 되찾아
이튿날 또다시 정원에서 나비와 함께 공놀이를 시작했다.
나를 피해 정원수 위로 숨어 버린 나비를 대신해서 얼른 공을 집어
명은이에게 돌려준 다음 나는 득의에 찬 목소리로 그날 치의 선물을 전했다.
“영국군 29여단 글로스터 대대가 60여 시간 사투 끝에 중공군을 무찌르고
적성 고지를 사수혔디야.”
시청 앞 게시판에서 공들여 외워 온 벽보 내용을 뜻도 모르는 채
앵무새처럼 고스란히 옮기면서 나는 명은이의 반응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명은이의 손아귀에서 스르르 힘이 풀리면서
공이 잔디밭으로 굴러떨어졌다.
명은이의 그런 반응을 나는 일종의 감동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서울내기 계집애를 감동시킨 내 솜씨에 자부심을 느끼면서
나는 곧장 다음 소식으로 넘어갔다.
“중부 전선 임진강 전투에서 우리 국군이 중공군 63군 3개 사단을
격퇴허고 대승을 거두었디야.”
“듣기 싫단 말야! 제발 그만두란 말야!”
명은이가 쇠꼬챙이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갑자기 잔디밭에 퍼더버리고 앉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 사태에 별안간 어안이 벙벙해져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꼴도 보기 싫어! 가 버려! 가란 말야!”
제 손으로 제 머리칼을 마구 쥐어뜯으며 명은이는
거푸 쇠꼬챙이 소리를 질러 댔다.
명은이 외할머니가 해끔하게 놀란 표정으로 관사 안에서 허둥지둥
달려 나왔다. 가라니까 가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아직도 영문을 모르는 채로 나는 부리나케 관사를 빠져나왔다.
무엇이 서울 계집애의 성깔머리를 그토록 버르집어 놓았는지
당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내 호의가 무시당한 관사 근처엔 앞으로 두 번 다시 얼씬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나는 길바닥의 돌멩이를 발부리로 힘껏 걷어차 버렸다.
명은이 외할머니의 신신당부를 기억에서 언뜻 되살려 낸 것은
집에 거반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사람이 죽고 사람을 죽이는 이야기는 절대로 입 밖에 꺼내지 말 것.
세 가지 당부 가운데서 나도 모르게 두 번째 당부를 어긴 셈이었다.
시청 앞 게시판을 기웃거리는 버릇이 내게서 영영 떠나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그때 퍼뜩 예감할 수 있었다.
혼자서 다짐했던 대로 나는 하루 동안 관사 근처에 얼씬하지 않았다.
그러나 집 안에 머물러 지내는 동안에도 내 마음은 관사 언저리를
줄곧 배회하고 있었다.
꼴도 보기 싫다고 명은이가 지르던 쇳소리가
내 귓바퀴를 끊임없이 맴돌았다.
더는 참을 수가 없어 나는 결국 다음 날 해 질 녘에 관사를
또다시 찾아가고 말았다.
저녁놀에 물든 발그레한 낯꽃으로 명은이는 정원 한복판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손에 공이 쥐여 있고 곁에 나비란 놈도 알짱거리고 있었지만
공놀이는 아예 시작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릴없이 먼산바라기가 되어 언제까지고 꼼짝도 하지 않는 명은이 모습을
나는 철책 밖에서 한참이나 몰래 지켜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종소리가 데엥, 하고 묵중하게 울렸다.
한번 울리기 시작한 종소리는 짧은 쉴 참을 거친 후
뎅그렁 뎅, 뎅그렁 뎅, 연달아 기세 좋게 울렸다.
명은이는 느닷없는 종소리에 움찔 놀라는 기색이었다.
종소리가 들려오는 신광 교회 쪽을 향해 명은이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저녁놀에 함빡 젖은 채 종소리에 다소곳이 귀를 기울이는 명은이 모습에서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리만큼 묘한 감동을 받았다.
“삼일 종이여.”
나는 철책 밖에 내가 와 있다는 사실을 그예 큰 소리로 기별하고 말았다.
명은이가 화들짝 놀라는 몸짓을 취했다.
“나비야! 나비야!”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는 듯이, 마치 내가 나타나기 전까지
줄곧 나비와 함께 공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처럼
명은이는 공을 잔디밭 위로 도르르 굴리면서 부산을 떠는 시늉을 했다.
겨냥이 지나쳐 공은 철책 밑을 통과해서 내 발치까지 데굴데굴 굴러 왔다.
나는 공을 주워 철책 안으로 던졌다.
“왔으면 얼른 들어와야지 왜 거기 서 있니?”
거기 누구, 하고 묻는 대신 명은이는 나를 책망하는 척했다.
때맞춰 관사 현관문이 활짝 열렸다.
명은이 외할머니가 꾸짖음 반 반가움 반의 어정쩡한 기색으로
나를 맞아들였다.
잔뜩 낯꽃을 붉힌 채 나는 관사 내부를 빠른 걸음으로 통과해서
정원으로 나갔다.
“삼일 종이 뭔데?”
“수요일에 치는 종이여.
교회 사람들은 수요일 저녁 예배를 삼일 예배라고 불러.
저것은 초종이여. 한참 있다가 재종을 칠 거여.”
명은이한테 미안해하던 참에 나는 도롱테 굴리듯 빠른 말씨로
한바탕 정신없이 지껄였다.
“어머나, 건호 너 교회 다니니?”
“엉. 딸고만이 아부지가 시방 초종을 치고 있는 중이여.
명은이 너, 딸고만이 아부지가 누군지 몰르지?
딸고만이 아부지는…….”
야트막한 언덕 위 신광 교회 종탑 밑에서 종 줄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허공 속을 연방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신 나게 종을 치고 있을
사찰 아저씨의 앙바틈한 모습을 머리에 떠올리니까 절로 웃음이 비어졌다.
다섯 번째로 또 딸을 낳고 나서 지어 준 이름이 딸고만이였다.
“딸내미 이름을 그러코롬 엉터리없이 지어 놓으면
요 담번엔 틀림없이 아들을 낳게 된디야.”
명은이는 한바탕 기분 좋게 깔깔거렸다.
아, 명은이가 웃는다! 내가 서울내기 지지배를 웃게코롬 맨들었다!
나는 득의양양해서 넋이야 신이야 하며 마구잡이로 떠벌렸다.
“딸고만이 아부지가 종 치는 걸 보면 너도 아매 배꼽을 잡고 웃을 거여.
얼매나 괴상허게 생겼는지 알어?
키는 나보담 쬐꼼 더 크고, 머리는 훌러덩 벳겨지고…….”
말을 하다 말고 나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명은이가 앞을 못 본다는 점에 뒤늦게 생각이 미친 까닭이었다.
종소리의 꼬리 부분이 긴 여운을 끌면서 저녁 하늘 속으로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딸고만이 아버지 얘길 계속해 봐.”
명은이가 잔디밭 위에 아무렇게나 퍼벌하고 앉으면서 재촉했다.
나도 덩달아 명은이 앞에 퍽석 주저앉았다.
딸고만이 아버지는 정말 괴짜였다.
교회 종을 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같았다.
종을 치지 않을 때는 우리에게 놀림감이 되지만
종을 치는 동안만큼은 언제나 존경의 대상이 되곤 했다.
마치 종 줄의 일부분인 양 앙바틈한 몸집이 굵은 밧줄 끝에 매달려
발바닥이 땅에 닿을 새가 없으리만큼 위로 솟구쳤다
아래로 곤두박질치기를 되풀이하면서 힘차게 종소리를 울려 대는 동안
그는 얼굴이 온통 시뻘겋게 상기한 채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을 짓곤 했다.
종 치는 일이 거반 끝나 갈 무렵쯤 되면
그는 자기 주위로 새까맣게 몰려들어 찬탄 어린 눈빛으로 구경하는
조무래기들 가운데서 딱 한 명만 골라 딱 한 차례만
종 줄을 잡아당기는 영광을 안겨 주곤 했다.
그악스레 뒤쫓아 다니며 딸고만이 아버지라고 놀려 먹은 적이 없는
착한 아이한테 대개 특혜를 베푸는 것이었다.
“딸고만이 아버지를 한번 봤으면 좋겠다.”
“나랑 같이 교회 가면 얼매든지 볼 수 있어.”
말을 주고받다 보니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앞을 못 보는 명은이가 무슨 재주로 딸고만이 아버지를 본단 말인가?
“눈엔 안 보여도 마음으로는 얼마든지 볼 수 있어.”
내 속마음을 읽었는지 명은이가 얼른 어른스럽게 말했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우리는 주일 저녁에 함께 신광 교회에 가기로
약속을 정했다.
주일 저녁이 오기까지 시간은 굼벵이 걸음처럼 더디 흘러갔다.
외할머니의 허락을 받고 명은이와 나는 딸고만이 아버지가
초종을 울릴 시간에 맞추어 관사를 출발했다.
명은이 손을 잡고 조심조심 길을 인도하는 탓에
관사에서 신광 교회까지 평상시보다 곱절 이상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먼 길을 걷는 동안 나는 전에 주일 학교 반사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재탕해서 명은이에게 들려주는 일로 시간을 때웠다.
옛날 어느 성에 용감한 기사와 바람처럼 빨리 달리는 백마가 살고 있었다.
기사는 사랑하는 백마를 타고 전쟁터마다 다니며 번번이 큰 공을 세워
성주로부터 푸짐한 상을 받곤 했다. 전쟁이 끝났다.
세월이 흘러 백마는 늙고 병들게 되었다.
그러자 기사는 자기와 오랫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한 백마를 외면한 채
전혀 돌보지 않았다. 늙고 병든 백마는 성내를 이리저리 떠돌다가
어떤 종탑 앞에 이르렀다.
누구든지 종을 쳐서 억울한 사연을 호소할 수 있게끔
성주가 세워 놓은 종탑이었다.
백마의 눈에 종탑을 휘휘 감고 올라간 칡넝쿨이 보였다.
배고픔에 못 이겨 백마는 칡넝쿨을 뜯어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 종 줄을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그만 종소리를 울리고 말았다.
종소리를 들은 성주가 무슨 사연인지
자세히 알아보도록 부하에게 지시했다.
그리하여 백마의 억울한 사연을 알게 된 성주는
은혜를 저버린 기사를 벌주고 백마를 죽을 때까지 따뜻이 보살펴 주었다.
“억울한 사람은 누구든지 종을 칠 수 있다고?”
느슨히 잡고 있던 내 손을 갑자기 꽉 움켜쥐면서 명은이가 물었다.
나는 괜스레 우쭐해진 나머지 얼김에 말갈망도 못할 허세를 부리고 말았다.
“그렇다니깨. 아무나 다 종을 침시나 맘속으로 소원을 빌으면은
그 소원이 죄다 이뤄진디야.”
마침내 신광 교회 입구로 들어섰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우리 말고 다른 교인들 모습은
교회 근처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하늘로 오르는 사닥다리인 양 높고 가파른 돌계단이 우리 앞을 떡하니
막아섰다. 발을 헛디디지 않게끔 명은이를 단단히 부축한 채
천천히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돌계단을 다 오르자 비낀 저녁 햇살을 듬뿍 받아 아름답게 빛나는
웅장한 석조 교회당이 시야를 그득 메웠다.
우리는 종탑 앞에서 손을 맞잡은 채 때가 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에 교회당 뒤편 사택 쪽에서 딸고만이 아버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딸고만이 아부지다.”
나는 명은이에게 귀엣말로 가만히 속삭였다.
길게 뻗은 교회당 건물 옆구리를 따라 통로에 깔린 자갈을 밟으며
딸고만이 아버지가 걸어왔다.
명은이는 몹시 긴장한 자세로 저벅저벅 다가오는 발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저녁 햇살을 함빡 뒤집어쓴 딸고만이 아버지의 민머리가
알전구처럼 반짝거렸다. 나는 최대한 허리를 굽혀 예바르게 꾸뻑 인사를
올렸다. 딸고만이 아버지는 나를 금세 알아보았다.
그러나 낯선 얼굴인 명은이 쪽에 짤막한 눈길을 던졌을 뿐,
여느 때와 딴판으로 모범생처럼 구는 나를 거들떠도 안 보면서
그는 되우 뻐겨 대는 걸음걸이로 종탑에 다가섰다.
그는 몸에 익은 솜씨로 종탑 쇠기둥을 타고 뽀르르 위로 기어오른 다음
아이들 손이 닿지 않을 높직한 자리에 매어 놓은 종 줄을
밑으로 풀어 내렸다.
그가 굵은 밧줄을 힘차게 아래로 잡아당기자
종탑 꼭대기 그 까마득한 높이에 매달려 있던 거대한 놋종이
한쪽으로 휘우뚱 기울어졌다.
또 한차례 줄을 잡아당기자 이번에는 반대편으로 놋종이 휘우뚱 넘어갔다.
오른쪽, 왼쪽, 번차례로 기울어지기를 두 번, 세 번…….
“인제 종소리가 울릴 차례여.”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데엥, 하고 첫 번째 종소리가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갑자기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둔중한 종소리에 놀라
명은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잽싸게 손바닥으로 귀를 막았다.
종소리가 차츰 빨라지기 시작했다.
딸고만이 아버지의 앙바틈한 몸집은 어느새 종 줄과 한 몸을 이루어
쉴 새 없이 허공을 오르락내리락하느라
발바닥이 땅에 닿을 겨를도 없을 지경이었다.
뎅그렁 뎅, 뎅그렁 뎅, 기세 좋게 울리는 종소리가 귀싸대기를 사정없이
갈겨 댔다. 나는 명은이 손바닥을 붙잡아 귀에 붙였다 뗐다 하는 동작을
되풀이했다.
기다란 종소리의 중동을 뚝 잘라 동강을 내었다가 다시 이어 붙이기를
되풀이하는 그 장난이 명은이 얼굴에 발갛게 꽃물이 배게끔
핏기를 돋우었다.
건공중에 둥둥 떠 있던 딸고만이 아버지의 발바닥이
어느새 슬그머니 땅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종 치는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종 줄 잡아당기는 힘을
적당히 조절하는 중이었다.
나는 실오라기 같은 희망을 품은 채 딸고만이 아버지가 아닌 사찰 아저씨를
향해 최대한 존경의 눈빛을 띄워 보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는 아첨이었다.
사찰 아저씨 아닌 딸고만이 아버지는 결국 나로 하여금 마지막 순간에
딱 한 차례 종 줄을 잡아당기게 하는 그 특혜를 베풀지 않은 채
매정하게 종 치기를 끝내 버렸다.
주일마다 뒤꽁무니를 밟고 다니며 딸고만이 아버지라고 그악스레 놀려 댄
지난날들이 여간만 후회되는 게 아니었다.
아쉬움을 달랠 요량으로 나는 얼른 고무신을 벗어 들었다.
여태껏 늘 해 왔던 방식에 따라 나는 바야흐로 저녁 하늘 저 멀리
사라지려는 마지막 종소리를 고무신짝 안에 양껏 퍼 담았다.
그런 다음 잽싸게 고무신짝을 명은이 귓바퀴에 찰싹 붙여 주었다.
그러자 명은이 얼굴에 해맑은 미소가 가득 번져 나기 시작했다.
어미 종은 이미 움직임을 멈추었지만 고무신짝 안에는 새끼 종이 담겨
아직도 작은 움직임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 종이 꿀벌처럼 잉잉거리면서 대고 명은이 귀를 간질이고 있을 것이었다.
왔던 길과는 달리 돌아가는 길은 호사스런 감동의 보자기에 감싸여 있어서
관사까지 걷는 시간이 조금 전보다 절반 이하로 짧게 느껴졌다.
명은이는 흥분한 기색을 여간해서 감추지 못했다.
관사 앞에서 헤어지기 직전에 명은이는 나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깍쟁이 서울 계집애 입에서 고맙다는 인사가 나오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건호야.”
일껏 내 이름을 불러 놓고도 명은이는 한참이나 더 뜸을 들인 다음에야
가까스로 뒷말을 이었다.
“네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 내 손으로 한번 만져 보고 싶어.”
참으로 난처한 순간이었다.
틀림없이 집 안 어느 구석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명은이 외할머니를
의식하면서 나는 잠시 망설였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나는 결국 명은이 손을 끌어다 내 얼굴에 대 주었다.
그리고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촉촉이 땀에 젖은 손이 내 얼굴 윤곽을 천천히 더듬어 나가기 시작했다.
명은이는 내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차례차례 신중히 어루만졌다.
“얼굴이 아주 잘생겼구나. 나한테 얼굴을 보여 줘서 고마워.”
난생처음 잘생겼다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홧홧 달아오르는 낯꽃을 주체할 수가 없어 도망치다시피
관사 앞을 떠나 버렸다.
관사로부터 멀어지자 나는 겅중겅중 뜀걸음을 놓기 시작했다.
비록 서투른 솜씨나마 휘파람을 후익후익 날리면서
나는 신 나게 집으로 향했다.
명은이가 내게 무리한 부탁을 해 온 것은 신광 교회 종탑에서
색다른 경험을 한 바로 그다음 날이었다.
다시 만나자마자 명은이는 나를 붙잡고 엉뚱깽뚱한 소리를 했다.
“건호야, 날 다시 교회로 데려가 줘. 내 손으로 종을 쳐 보고 싶어.”
“그랬다간 큰일 나! 딸고만이 아부지 손에 맞어 죽을 거여!”
나는 팔짝 뛰면서 그 청을 모지락스레 거절했다.
하지만 명은이는 나한테 검질기게 달라붙으면서 계속 비라리치고 있었다.
“제발 부탁이야. 딱 한 번만 내 손으로 직접 종을 쳐 보고 싶어.”
“종은 쳐서 뭣 헐라고?”
“그냥 그래! 내 손으로 울리는 종소리를 듣고 싶을 뿐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명은이의 진짜 속셈이 무엇인가를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동화 속의 늙고 병든 백마를 흉내 내고 싶은 것이었다.
버림받은 백마처럼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성주에게 호소하고 싶은 것이었다.
다름 아닌 눈을 뜨고 싶다는 소원을 하나님에게 전할 속셈임이 틀림없었다.
누구든지 종을 치면서 소원을 빌면 다 이루어진다고
명은이 앞에서 공연히 허튼소리를 지껄인 일이 새삼스레 후회되었다.
대관절 무슨 재주로 딸고만이 아버지 허락도 없이
교회 종을 무단히 울린단 말인가?
“알었다고. 알었다니깨.”
연방 도리머리를 하는 내 마음과는 딴판으로
내 입에서는 승낙의 말이 잘도 흘러나왔다.
끝끝내 명은이의 간청을 뿌리칠 재간이 내게 없다는 사실을
나는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다.
“일요일은 절대로 안 돼야. 수요일도 절대로 안 돼야.”
“그럼 언제?”
보이지도 않는 눈을 반짝 빛내면서 명은이가 대답을 재촉했다.
예배 모임이 없는 평일이라면 어찌어찌 가능할 것 같기도 했다.
“목요일 밤중이라면 혹간 몰라도…….”
목요일 아침이 밝았다. 목요일 낮이 지나갔다.
마침내 목요일 밤이 찾아왔다.
명은이는 시내 산보를 구실 삼아 외할머니한테 밤마을을 허락받았다.
어둠길을 나서는 우리를 명은이 외할머니가 관사 밖 길가까지 따라 나와
걱정스런 얼굴로 배웅했다.
앞 못 보는 외손녀를 걱정하는 백발 노파의 마음이
신광 교회까지 줄곧 우리와 동행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명은이 손을 잡고 신광 교회 돌계단을 오르는 동안 내 온몸은 사뭇 떨렸다.
지레 흥분이 되는지, 아니면 두려움 때문인지
땀에 흠씬 젖은 명은이 손 또한 달달 떨리고 있었다.
명은이가 소원을 이룰 수만 있다면 딸고만이 아버지한테 맞아 죽어도
상관없다고 각오를 다지면서 나는 젖은 빨래를 쥐어짜듯 모자라는 용기를
빨끈 쥐어짰다.
신광 교회는 어둠 속에 고자누룩이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부터 우리가 저지르려는 엄청난 짓거리에 어울리게끔
주변에 아무런 인기척이 없음을 거듭 확인하고 나서
나는 종탑 가까이 명은이를 잡아끌었다.
괴물처럼 네 개의 긴 다리로 일어선 철제의 종탑이 캄캄한 밤하늘을 향해
우뚝 발돋움을 하고 있었다.
깊은 물속으로 자맥질하기 직전의 순간처럼
나는 까마득한 종탑 꼭대기를 올려다보며 연거푸 심호흡을 해 댔다.
그런 다음 딸고만이 아버지가 항상 하던 방식대로 종탑 쇠기둥을 타고
뽀르르 위로 기어올라 철골에 매인 밧줄을 밑으로 풀어 내렸다.
“꽉 붙잡고 있어.”
명은이 손에 밧줄 밑동을 쥐여 주고 나서 나는 양팔을 높이 뻗어
밧줄에다 내 몸무게를 몽땅 실었다.
그동안 늘 보아 나온 딸고만이 아버지의 종 치는 솜씨를 흉내 내어
나는 죽을힘을 다해 밧줄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종탑 꼭대기에 되똑 얹힌 거대한 놋종이 천천히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첫 느낌이 밧줄을 타고 내 손에 얼얼하게 전해져 왔다.
마치 한 풀줄기에 나란히 매달려 함께 바람에 흔들리는
두 마리 딱따깨비처럼 명은이 역시 밧줄에 제 몸무게를 실은 채
나랑 한통으로 건공중을 오르내리는 동작에
어느새 눈치껏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어둠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내 코끝에 훅훅 끼얹히는
명은이의 거친 숨결에 섞인 단내로 미루어
명은이가 시방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너끈히 짐작할 수 있었다.
“소원 빌을 준비를 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데엥, 하고 첫 번째 종소리가 울렸다.
그 첫 소리를 울리기까지가 힘들었다.
일단 첫 소리를 울리고 나니 그다음부터는 모든 절차가 한결 수월해졌다.
뎅그렁 뎅, 뎅그렁 뎅, 기세 좋게 울려 대는 종소리에
귀가 갑자기 먹먹해졌다.
“소원을 빌어! 소원을 빌어!”
종소리와 경쟁하듯 목청을 높여 명은이를 채근하는 한편
나도 맘속으로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명은이가 소원을 다 빌 때까지 딸고만이 아버지를 잠시 귀먹쟁이로 만들어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명은이와 내가 한 몸이 되어 밧줄에 매달린 채 땅바닥과 허공 사이를
절굿공이처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온몸으로 방아를 찧을 적마다
놋종은 우리 머리 위에서 부르르부르르 진저리를 치며 엄청난 목청으로
울어 댔다.
사람이 밧줄을 다루는 게 아니라 이젠 탄력이 붙을 대로 붙어 버린 밧줄이
오히려 사람을 제멋대로 갖고 노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창 종 치는 일에 고부라져 있었던 탓에
딸고만이 아버지가 달려오는 줄도 까맣게 몰랐다.
되알지게 엉덩이를 한방 걷어채고 나서야 앙바틈한 그의 모습을
어둠 속에서 겨우 가늠할 수 있었다.
기차 화통 삶아 먹은 듯한 고함과 동시에 그가 와락 덤벼들어
내 손을 밧줄에서 잡아떼려 했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더 기를 쓰고 밧줄에 매달려 더욱더 힘차게
종소리를 울렸다.
주먹질과 발길질이 무수히 날아들었다.
마구잡이 매타작에서 명은이를 지켜 주기 위해 나는 양다리를 가새질러
명은이 허리를 감싸 안았다.
한데 엉클어져 악착스레 종을 쳐 대는 두 아이를
혼잣손으로 좀처럼 떼어 내기 어렵게 되자 나중에는 딸고만이 아버지도
밧줄에 함께 매달리고 말았다.
결국 종 치는 사람이 셋으로 불어난 꼴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기운차게 느껴지는 종소리가 어둠에 잠긴 세상 속으로
멀리멀리 퍼져 나가고 있었다.
명은이 입에서 별안간 울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때때옷을 입은 어린애를 닮은 듯한 그 울음소리를 무동 태운 채
종소리는 마치 하늘 끝에라도 닿으려는 기세로 독수리처럼 높이높이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뎅그렁 뎅 뎅그렁 뎅 뎅그렁 뎅…….
3.
“아니, 벌써 다 끝난 거여?”
나서기 좋아하는 나 서방이었다.
최건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중에 순애보가 기네, 아니네,
시비 거는 놈은 가만 안 놔두겠다고 엄포를 놓던
바로 그 나기형이 되레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고 나섰다.
“그것도 순애보 축에 든다고 여태까장 읊어 댔단 말여, 시방?”
“미안혀. 실망시켜서…….”
“내 복에 무신 얼어 죽을 순애보!”
희붐히 터오는 갓밝이 속에서 홍성만이 끄응 소리와 함께
앵돌아앉는 시늉으로 자기가 느끼는 실망의 크기를 드러냈다.
이를테면 그것은 자신이 바로 앞 순번으로 이야기를 끝마친,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그 문화 영화 제목 같은,
소매치기와 창녀의 사랑이 보다 더 순애보에 가깝다고 주장하는
시위인 셈이었다.
“어째피 순애보는 벌써 물 건너간 꼴이니깨 어쩔 수 없다 치고,
한 가지만 물어보자.
그 명은이란 지지배는 종소리 울려서 소원을 빈 덕택으로
결국 눈을 떴냐, 못 떴냐?”
나기형은 계속 검질기게 최건호를 물고 늘어졌다.
“잠깐만!”
최건호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미술 교사 이진원이 손을 번쩍 들어 대답을 중간에서 가로채 버렸다.
“진짜 순애보란 게 가물에 콩 나딧기 귀헌 세상에서
우리가 그 이상 뭘 더 바래?
내 기준으로는 오늘밤 요 자리를 통틀어서 건호가
기중 아름다운 사랑 얘기를 들려준 게 틀림없어.
순애보라 불러도 전연 손색이 없다고 믿어.
다만, 그 순진무구헌 애들끼리 주고받은 동화적인 사랑을
우리가 왈칵 순애보로 받어들이지 못허는 이유는
반백년 세월이 흘러가는 사이에 우리가 늙고 감정이 메마르고
세상 때가 많이 묻어 버린 탓에 우리네 심미안에 녹이 슬고
그만침 가치관이 멍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오냐, 진원이 너 참말로 잘났다!
오냐, 니 똥 굵은지 다 안다!
칠십 미리 총천연색 씨네마스코프다!”
작년에도 멍청했고 금년에도 여전히 멍청하다고 핀잔을 듣는
황만근이 또다시 빠드득 이를 가는 시늉으로 좌중을 웃기려 했다.
“좌우지간 건호는 입을 열면 못써.”
이진원이 다시 한 번 손을 들어 최건호가 답변할 기회를 가로막았다.
“건호 입에서 사실 여부가 밝혀지는 순간 아름다운 동화는
밋밋헌 다큐멘터리로 변질되고 말어.
명은이가 눈을 떴는지 못 떴는지 그 문제는 각자가 자기 마음속에
여백으로 냉겨 두고 그 위에다 자기 상상력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게코롬 내비 두는 것이 좋아.”
이진원의 주장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것으로 순애보 여부를 둘러싼 시비는 일단락된 셈이었다.
죽사산 기슭 어디쯤에서 목청 좋은 수탉들이 잇달아 새날이 밝았음을
기운차게 고했다.
모기들이 슬금슬금 자취를 감추기 시작할 무렵에 맞추어
모깃불의 생명을 연장해 줄 생초목도 얼추 동이 나 버린 상태였다.
“제발 잠 좀 자자. 늙다리 첨지들이라고 인자는 잠도 다 없어졌냐?”
못 자게끔 누가 곁에서 밤새도록 발바닥에 불침이라도 놓은 듯이
이덕주가 불퉁거렸다.
“맞다. 고만 자러 들어가자. 나는 아직도 젊어서 그런지
하루 밤샘 고스톱을 치고 나면 사흘을 내리뻗는 체질이다.”
삼군 소년단에 들어갈 자격을 얻으려는 일념으로
억지 전쟁 고아가 되고자 했다던 조만형이 연방 하품을 꺼가며
땅바닥에 뻗어 버리는 시늉을 했다.
야전 지휘관 격인 김교장이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만
엉덩이에 붙은 모래알들을 툭툭 털었다.
“이 시각 이후부텀 재향 동기놈들이 떼로 몰려와서
기상나팔 불 때까장 전원 무제한 취침을 실시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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