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문학

봄과 따라지 - 김유정 -

하얀모자 1 2024. 1. 15.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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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과 따라지
                                                                                            - 김유정 -
 
지루한 한 겨울동안 꼭 옴츠러졌던 몸뚱이가 이제야 좀 녹고 보니
여기가 근질근질 저기가 근질근질. 등어리는 대구 군실거린다.
행길에 삐쭉 섰는 전봇대에다 비스듬히 등을 비겨대고 쓰적쓰적
비벼도 좋고. 왼팔에 걸친 밥통을 땅에 내려놓은 다음 그 팔을 뒤로
젖혀올리고 또 바른팔로 다는 그 팔꿈치를 들어올리고 그리고 긁죽긁죽
긁어도 좋다. 본디는 이래야 원 격식은 격식이로되 그러나 하고 보자면
손톱 하나 놀리기가 성가신 노릇. 누가 일일이 그러고만 있는가.\
장삼인지 저고린지 알 수 없는 앞자락이 척 나간 학생복 저고리.
허나 삼 년간을 내리 입은 덕택에 속껍데기가 꺼칠하도록 때에 절었다.
그대로 선 채 어깨만 한번 으쓱 올렸다. 툭 내려치면 그뿐.
옷에 몽클거리는 때꼽은 등어리를 스을쩍 긁어주고 나려가지 않는가.
한번 해보니 재미가 있고 두 번을 하여도 또한 재미가 있다.
조그만 어깻죽지를 그는 기계같이 놀리며 올렸다 내렸다, 내렸다. 올렸다.
그럴 적마다 쿨렁쿨렁한 저고리는 공중에서 나비춤, 지나가던 행인이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눈을 둥글린다.
한참 후에야 비로소 성한 놈으로 깨달았음인지 피익 웃어던지고
다시 내걷는다.
어깨가 느런하도록 수없이 그러고 나니 나중에는 그것도 흥이 지인다.
 
그는 너털거리는 소매등으로 코밑을 쓱 훔치고 고개를 돌려 위아래로
야시를 훑어본다. 날이 풀리니 거리에 사람도 풀린다.
싸구려 싸구려 에잇 싸구려, 십오 전에 두 가지 십오 전에 두 가지씩.
인두 비누를 한손에 번쩍 쳐들고 젱그렁젱그렁 신이 올라 흔드는 요령 소리.
땅바닥에 널따란 종잇장을 펼쳐놓고 안경잡이는 입에 게거품이 흐르도록
떠들어댄다. 일 전 한 품을 내놓고 일 년 동안의 운수를 보시오.
먹지를 던져서 칸에 들면 미루꾸 한갑을 주고 금에 걸치면 운수가 나쁘니까
그냥 가라고. 저편 한구석에서는 코먹은 바이올린이 닐리리를 부른다.
신통방통 꼬부랑통 남대문통 씨러기통 자아 이리 오시오,
암사둔 숫사둔 다 이리 오시오. 장기판을 에워싸고 다투는 무리.
그 사이로 일쩌운 사람들은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발 가는 대로
서성거린다. 짝을 짓고 산보로 나온 젊은 남녀들, 구지레한 두루마기에
뒷짐 진 갓쟁이. 예제없이 가서 덤벙거리는 학생들도 있고
그리고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구경을 나온 어머니.
아들은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잡아채이며 뭘 사내라고 부지런히 보챈다.
배도 좋고 사과 과자도 좋고.
또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국화 만주는 누가 싫다나.
 
그놈의 김을 이윽히 바라보다 그는 고만 하품인지 한숨인지 분간 못할
날숨이 길게 터져오른다.
아침에 찬밥덩이 좀 얻어먹고는 온종일 그대로 지친 몸.
군침을 꿀떡 삼키고 종로를 향하여 무거운 다리를 내어딛자니
앞에 몰려선 사람 떼를 비집고 한 양복이 튀어나온다.
얼굴에는 꽃이 잠뿍 피고 고개를 내흔들며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목로에서 얻은 안주이겠지 사과 하나를 입에 들이대고 어기어기 꾸겨넣는다.
이거나 좀 개평 뗄가. 세루 바지에 바짝 붙어서서 같이 비틀거리며
나리 한 푼 줍쇼 나리. 이 소리는 들은 척만 척 양 복은 제멋대로 갈 길만
비틀거린다. 에따 이거나 먹어라 하고 선뜻 내주었으면 얼마나 좋으랴만
에이 자식두. 사과는 쉬지 않고 점점 줄어든다.
턱살을 치켜대고 눈독은 잔뜩 들여가며 따르자니 나중에는 안달이 난다.
나리 나리 한 푼 주세요, 하고 거듭 재우치다 그래도 괘가 그르매
나리 그럼 사과나 좀.
모어 이 자슥아 남 먹는 사과를 좀. 혀 꼬부라진 소리가 이렇게 중얼거리자
정작 사과는 땅으로 가고 긴치 않은 주먹이 뒤통수를 딱.
금세 땅에 엎디어질 듯이 정신이 고만 아찔했으나 그래도 사과 사과다.
얼른 덤벼들어 집어 들고는 소맷자락에 흙을 쓱쓱 씻어서
한 입 덥석 물어뗀다. 창자가 녹아내리는 듯 향깃하고도 보드라운
그 맛이야. 그러나 세 번을 물어뜯고 나니 딱딱한 씨만 남는다.
다시 고개를 들고 그담 사람을 잡고자 눈을 희번덕인다.
큰길에는 동무 깍쟁이들이 가로 뛰며 세로 뛰며 낄낄거리고 한창 야단이다.
밥통들은 한 손에 든 채 달리는 전차 자동차를 이리저리 호아가며
제깐에 술래잡기, 봄이라고 맘껏 즐긴다.
이걸 멀거니 바라보고 그는 저절로 어깨가 실룩실룩하기는 하나
근력이 없다. 따스한 햇볕에서 낮잠을 잔 것도 좋기는 하다마는
그보담 밥을 좀 얻어먹었다면 지금쯤은 같이 뛰고 놀고 하련만.
큰길로 내려서서 이럴까 저럴까 망설일 즈음 갑자기 따르르응 이 자식아.
이크 쟁교로구나 등줄기가 선뜩해서 기겁으로 물러서다가
얼결에 또 하나 잡았다.
 
이번에는 트레머리에 얕은 향내가 말캉말캉 나는 뾰족구두다.
얼뜬 보아한 즉 하르르한 비단 치마에 옆에 낀 몇 권의 책 그리고
아리잠직한 그 얼굴. 외모로 따져보면 돈푼이나 좋이 던져줄 법한
고운 아씨다. 대뜸 물고나서며 아씨 한 푼 줍쇼 아씨 한 푼 줍쇼.
가는 아씨는 암만 불러도 귀가 먹은 듯. 혼자 풍월로 얼마를 따르다 보니
이제는 하릴없다. 그다음 비상수단이 아니 나올 수 없는 노릇.
체면 불구하고 그 까마귀발로다 신성한 치맛자락을 덥석 잡아챈다.
홀로 가는 계집쯤 어떻게 다루든 이쪽 생각. 한번 더 채여라.
아씨 한 푼 줍쇼. 아씨도 여기에는 어이가 없는지 발을 멈추고 말뚱히
바라본다. 한참 노리고 보고 그리고 생각을 돌렸는지 허리를 구부리어
친절히 달랜다.
내 지금 가진 돈이 없으니 집에 가 줄게 이거 놓고 따라오너라.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기쁠뿐더러 놀라운 은혜이다.
따라만 가면 밥이 나올지 모르고 혹은 먹다 남은 빵조각이 나올는지도
모른다. 이건 아마 보통 갈보와는 다른 예수를 믿는 착한 아씬가 보다.
치마를 놓고 좀 떨어져서 이번에는 점잖이 따라간다.
우미관 옆 골목으로 들어서서 몇 번이나 좌우로 꼬불꼬불 돌았다.
아씨가 들어간 집은 새로 지은 그리고 전등 달린 번뜻한 기와집이다.
잠깐만 기다려라 하고 아씨가 들어갈 제 그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기대가 컸다. 밥이냐 빵이냐 잔치를 지내고 나서 먹다 남은 떡 부스러기를
처치 못하여 데리고 왔을지도 모른다.
팥고물도 좋고 전여도 좋고 시크무레 쉰 콩나물, 무나물,
아무거나 되는대로. 설마 예까지 데리고 와서 돈 한 푼 주고 가라진 않겠지.
허기와 기대가 갈증이 나서 은근히 침을 삼키고 있을 때
대문이 다시 삐꺽 열린다. 아마 주인서방님이리라. 조선옷에 말쑥한 얼굴로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네가 따라온 놈이냐 하고 한 손으로
목덜미를 꼭 붙들고 그러더니 벌써 어느 틈에 네 번이나 머리를
주먹이 우렸다. 그러면 아구 아파 소리를 지른 것은 다섯번째부터요
눈물은 또 그담에 나온 것이다.
악장을 너무 치니까 귀가 아팠음인지 요 자식 다시 그래봐라,
대릴 꺾어놓을 테니. 힘 약한 독사와 도야지는 맞대항은 안된다.
비실비실 조 골목 어귀까지 와서 이제야 막 대문 안으로 들어가려는
서방님을 돌려대고 요 자식아 네 대릴 꺾어놀 테야 용용 죽겠니.
엄지가락으로 볼따귀를 후벼보이곤 다리야 날 살리라고 그냥 뺑소니다.
 
다리가 짧은 것도 이런 때에는 한 욕일지도 모른다.
여남은 칸도 채 못 가서 벽돌담에 가 잔뜩 엎눌렸다.
그리고 허구리 등어리 어깻죽지 할 것 없이 요모조모 골고루 주먹이
들어온다. 때려라 때려라, 그래도 네가 차마 죽이진 못하겠지.
주먹이 들어올 적마다 서방님의 처신으로 듣기 어려운 욕 한마디씩 해가며
분통만 폭폭 찔러논다. 죽여봐, 이 자식아. 요런 챌푼이같으니.
네가 애펜쟁이지 애펜쟁이. 울고불고 요란한 소리에 근방에서는 쭉 구경을
나왔다. 입때까지는 서방님은 약이 올라서 죽을 둥 살 둥 몰랐으나
이제 와서는 결국 저의 체면 손상임을 깨달은 모양이다.
등 뒤에서 애펜쟁이 챌푼이, 하는 욕이 빗발치듯 하련만 서방님은
돌아다도 안 보고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섭지 않다는 증거로 침 한번
탁 뱉고는 제 집 골목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되면 맡아놓고 깍쟁이의 승리다.
그는 담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울고 있으나 실상은 모욕당했던 깍쟁이의
자존심을 회복시킨 데 큰 우월감을 느낀다. 염병을 할 자식,
하고 눈물을 닦고 골목 밖으로 나왔을 때엔 얼굴에 만족한 웃음이 떠오른다.
 
야시에는 여전히 뭇사람이 흐르고 있다.
동무들은 큰길에서 밥통을 뚜드리며 날뛰고 있고.
우두커니 보고 섰다가 결리는 등어리도 잊고 배고픈 생각도 스르르
사라지니 예라 나두 한몫 끼자.
불시로 기운이 뻗쳐 야시에서 큰 길로 내려선다.
달음질을 쳐서 전찻길을 가로지르려 할 제 맞닥뜨린 것이 마주 건너오던
한 신여성이다. 한 손에 대여섯 살 된 계집애를 이끌고
야시로 나오는 모양. 이건 키가 후리후리하고 걸찍하게 생긴 것이
어딘가 맘세가 좋아 보인다. 대뜸 손을 내밀고 아씨 한 푼 줍쇼.
얘 지금 돈 한 푼 없다. 이렇게 한마디 하고는 이것도 돌아다보는 법 없다.
야시의 물건을 흥정하며 태연히 저 할 노릇만 한다.
이내, 치마까지 꺼들리게 되니까 그제야 걸음을 딱 멈추고
눈을 똑바로 뜨고 노려본다. 그리고 소리를 지르되 옆의 사람이나
들으란 듯이 얘가 왜 이리 남의 옷을 잡아다녀.
오가던 사람들이 구경이나 난 듯이 모두 쳐다보고 웃는다.
본 바와는 딴판 돈푼커녕 코딱지도 글렀다.
 
눈꼴이 사나워서 그도 마주대고 벙벙히 쳐다보고 있노라니 웬 담배가
발 앞으로 툭 떨어진다. 매우 기름한 꽁초.
얼른 집어서 땅바닥에 쓱쓱 문대어 불을 끄고는 호줌에 넣는다.
이따는 좁쌀친구끼리 뒷골목 담 밑에 모여 앉아서 번갈아
한 모금씩 빨아가며 잡상스러운 이야기로 즐길 걸 생각하니 미리 재미롭다.
적어도 여남은 개 주워야 할 텐데 인제서 겨우 꽁초 네 개니.
요즘에는 참 댐배 맛도 제법 늘어가고 재채기하던 괴로움도 훨신 줄었다.
이만하면 영철이의 담배쯤은 감히 덤비지 못하리라.
제따위가 앉은자리에 꽁초 일곱 개를 다 피울 텐가. 온 어림없지.
열 살 밖에 안 되었건만 이만치도 담배를 잘 필 수 있도록 훌륭히 됨을
깨달으니 또한 기꺼운 현상, 호춤에서 손을 빼고 고개를 들어보니
계집은 어느덧 멀리 앞섰다. 벌에 쐤느냐 왜 이리 달아나니.
이것은 암만 따라가야 돈 한 푼 막무가낼 줄은 번연히 알지만 소행히 밉다.
에라 빌어먹을 거 조곰 느므러나 주어라.
힝하게 쫓아가서 팔꿈치로다 그 궁둥이를 퍽 한 번 지르고는
아씨 한 푼 주세요. 돌려대고 또 소리를 지를 줄 알았더니 고개만 흘낏
돌려보고는 잠자코 간다. 그럼 그렇지 네가 어데라구 깍쟁이에게 덤비리.
또 한 번 질러라. 바른편 어깨로다 이번에 넓적한 궁둥이를 정면으로
들이받으며 아씨 한 푼 주세요. 그래도 아무 반응이 없다.
이 계집이 행길바닥에 나가자빠지면 그 꼴이 볼만도 하련만
제아무리 들이받아도 힘을 들이면 들일수록 이쪽이 도리어 튕겨서 나올 뿐
좀체로 삐끗없음에는 예라 빌어먹을거. 치맛자락을 닁큼 집어다
입에 들이대고는 질겅질겅 씹는다. 으흐흥 아씨 돈 한 푼.
그제야 독이 바싹 오른 법한 표독스러운 계집의 목소리가
이 자식아 할 때는 온몸이 다 짜릿하고 좋았으나 난데없는 고라 소리가
벽력같이 들리는 데는 정신이 고만 아찔하다.
뿐만 아니라 그 순간 새삼스레 주림과 아울러 아픔이 눈을 뜬다.
머리를 얻어맞고 아이쿠 하고 몸이 비틀할 제 집게 같은 손이 들어와
왼편 귓바퀴를 잔뜩 찝어든다.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끌리는 대로 따라만
가면 고만이다. 붐비는 사람 틈으로 검불같이 힘없이 딸려가며
그러나 속으로는 하지만 뭐. 처음에는 꽤도 겁도 집어먹었으나 인제는
하도 여러 번 겪고 난 몸이라 두려움보다 오히려 실없는 우정까지
느끼게 된다. 이쪽이 저를 미워도 안 하련만 공연스레 제가 씹고 덤비는 걸
생각하면 짜정 밉기도 하려니와 그럴수록에 야릇한 정이 드는 것만은
사실이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을 시키려는가. 유리창을 닦느냐, 뒷간을 치느냐.
타구쯤 정하게 부셔주면 그대로 나가라 하겠지.
하여튼 가자는 건 좋으나 온체 잔뜩 찝어당기는 바람에 이건 너무 아프다.
구두보담 조금만 뒤졌다가는 갈데없이 귀는 떨어질 형편.
구두가 한 발을 내걷는 동안 두발, 세발, 잽싸게 옮겨놓으며 통통걸음으로
아니 따라갈 수 없다. 발이 반밖에 안 차는 커다란 운동화를
칠떡칠떡 끌며 얼른 얼른 앞에 나서거라. 재쳐라 재쳐라 얼른 재쳐라.
그러자 문득 기억나는 것이 있으니
그 언제인가 우미관 옆 골목에서 몰래 들창으로 들여다보던 아슬아슬하고
인상 깊던 그 장면.
위험을 무릅쓰고 악한을 추격하되 텀블링도 잘하고 사람도 잘 집어세고
막 이러는 용감한 그 청년과 이때 청년이 하던 목 잠긴 그 해설.
그리고 땅땅 따아리 땅땅 따아리 띵띵 띠이 하던 멋있는 그 반주.
봄바람은 살랑살랑 불어오는 큰 거리.
이때 청년이 목숨을 무릅쓰고 구두를 재치는 광경이라 하고 보니
하면 할수록 무척 신이 난다. 아아 아구 아프다.
재쳐라 재쳐라 얼른 재쳐라 이때 청년이
 땅땅 따아리 땅땅 따아리 띵띵 띠이 띵띵 띠이
 
 
      (신인문학.  1936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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