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문학

뫼비우스의 띠 - 조세희 -

하얀모자 1 2024. 1. 29. 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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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뫼비우스의 띠

                                                                                                  - 조세희 -

수학 담당 교사가 교실로 들어갔다.
학생들은 그의 손에 책이 들려 있지 않은 것을 보았다.
학생들은 교사를 신뢰했다.
이 학교에서 학생들이 신뢰하는 유일한 교사였다.

그가 입을 열었다.
제군, 지난 1년 동안 고생 많았다. 정말 모두 열심히들 공부해주었다.
그래서 이 마지막 시간만은 입학 시험과 상관이 없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는 몇 권의 책을 뒤적여보다가 제군과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은 것을
발견했다. 일단 내가 묻는 형식을 취하겠다.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했다. 한 아이는 얼굴이 새까맣게 되어 내려왔고,
또 한 아이는 그을음을 전혀 묻히지 않은 깨끗한 얼굴로 내려왔다.
제군은 어느 쪽의 아이가 얼굴을 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학생들은 교단 위에 서 있는 교사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잠시 후에 한 학생이 일어섰다.
 
얼굴이 더러운 아이가 얼굴을 씻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교사가 말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학생이 물었다. 교사는 말했다.

한 아이는 깨끗한 얼굴, 한 아이는 더러운 얼굴을 하고 굴뚝에서 내려왔다.
얼굴이 더러운 아이는 깨끗한 얼굴의 아이를 보고
자기도 깨끗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반대로 깨끗한 얼굴을 한 아이는
상대방의 더러운 얼굴을 보고 자기도 더럽다고 생각할 것이다.

학생들이 놀람의 소리를 냈다. 
한 번만 더 묻겠다. 교사가 말했다.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했다. 한 아이는 얼굴이 새까맣게 되어 내려왔고,
또 한 아이는 그을음을 전혀 묻히지 않은 깨끗한 얼굴로 내려왔다.
제군은 어느 쪽의 아이가 얼굴을 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똑같은 질문이었다. 이번에는 한 학생이 얼른 일어나 대답했다.
 
저희들은 답을 알고 있습니다. 얼굴이 깨끗한 아이가 얼굴을 씻을 것입니다.
 
학생들은 교사의 말을 기다렸다. 교사는 말했다.
 
그 답은 틀렸다.
 
왜 그렇습니까?
 
더 이상의 질문을 받지 않을 테니까 잘 들어주기 바란다.
두 아이는 함께 똑같은 굴뚝을 청소했다.
따라서 한 아이의 얼굴이 깨끗한데 다른 한 아이의 얼굴은 더럽다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교사는 분필을 들고 돌아섰다. 그는 칠판 위에다 뫼비우스의 띠 라고 썼다.
 
제군이 이미 교과서를 통해서 알고 있는 것이지만,
이것 역시 입학 시험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주기 바란다.
면에는 안과 겉이 있다. 예를 들자. 종이는 앞뒤 양면을 갖고
지구는 내부와 외부를 갖는다. 평면인 종이를 길쭉한 직사각형으로 오려서
그 양끝을 맞붙이면 역시 안과 겉 양면이 있게 된다.
그런데 이것을 한번 꼬아 양끝을 붙이면 안과 겉을 구별할 수 없는,
즉 한쪽 면만 갖는 곡면이 된다.
이것이 제군이 교과서를 통해서 잘 알고 있는 뫼비우스의 띠이다.
여기서 안과 겉을 구별할 수 없는 곡면을 생각해보자.
 
 
앉은뱅이는 콩밭으로 들어갔다.
아직 날이 저물기 전이어서 잘 여문 콩대를 몇 개 골라 꺾을 수 있었다.
콩밭에 잡초가 너무 많았다. 앉은뱅이는 꺾은 콩대를 가슴에 까고
밭고랑 사이를 기었다. 조용해서 잡초의 씨앗 떨어지는 소리까지
그는 들을 수 있었다. 말이 콩밭이지 잡초밭이나 마찬가지였다.
앉은뱅이는 황톳길을 나와 콩대를 빼었다.
나무 타는 냄새가 좋았다. 날은 금방 저물기 시작했다.
그가 콩밭으로 들어가기 전에 불을 붙여놓은 나무들이 빨갛게 타들어 갔다.
그는 깨어진 철판을 불 위에 놓고 콩을 까넣었다.
바짝 마른 나무는 연기 한 줄기 내지 않고 잘 탔다.
그 나무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꼽추네 마루로 깔려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꼽추네 집을 무너뜨렸다.
쇠망치를 든 사나이들이 한쪽 벽을 부수고 뒤로 물러서자
북쪽 지붕이 거짓말처럼 내려앉았다.
그들은 더 이상 꼽추네 집에 손을 대지 않았고,
미루나무 옆 털여뀌풀 위에 앉아 있던 꼽추는 일어서면서 하늘만 보았다.
그의 부인은 네 아이와 함께 종자로 남겨두었던 옥수수를 땄다.
 
쇠망치를 든 사나이들은 다음 집으로 건너가기 전에
꼽추네 식구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아무도 덤벼들지 않았고,
아무도 울지 않았다. 이것이 그들에게 무서움을 주었다. 
 
주위가 어두워왔다. 앉은뱅이는 먹이를 찾아나선 몇 마리의 쏙독새가
들판에 낮게 나는 날개 소리를 들었다.
그는 철판 위에 계속 콩을 까넣었다. 나무 타는 냄새와 콩 익는 냄새가
좋았다. 호수 건너편으로 한 떼의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파트 공사장 인부들이었다.
앉은뱅이는 호숫가 들판을 가로지른 그들의 실루엣이 버스 정류장 쪽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꼽추의 발짝 소리를 기다리면서 철판을 불 위에서 끌어내렸다.
꼽추의 발짝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꼽추의 부인, 큰아이, 작은 아이
모두 잘 참았다. 그는 익은 콩을 입 안에 넣고 씹었다.
꼽추네 마루는 아주 잘 탔다. 동네 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쇠망치를 든
한 사나이들에게 울면서 달라붙었다.
 
사람들은 집단 행동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들은 쇠망치를 든 한 사나이를 끌어내어 치고 받았다.
그는 몇 분 뒤에 피를 흘리며 일어나 한쪽 팔을 흔들더니
입에 물고 있던 피를 확 뱉어냈다. 부러진 앞니들이 피에 섞여 나왔다.
 
앉은뱅이는 쇠망치를 든 사나이들이 다가오자 코스모스가 한창인 길옆으로
비켜 앉으며 집을 가리켰다. 앉은뱅이네 식구들은 꼽추네 식구들보다
대가 약했다. 부인은 펌프대 뒤쪽에 쪼그리고 앉더니
때묻은 치마를 올려 얼굴을 감쌌다.
아이들은 그 옆에서 연신 두 눈을 쓸어내렸다.
지붕과 벽은 순식간에 내려앉고 먼지만 올랐다.
 
앉은뱅이는 꼽추가 다가오는 발짝 소리를 들었다.
꼽추는 들고 온 플라스틱 통을 불기가 닿지 않을 곳에 놓았다.
통에 휘발유가 가득 들어 있었다. 꼽추는 이 무거운 통을 들고
어두운 십리 벌판길을 걸어왔다.
그 벌판 끝 공터에는 약장수들이 은박지에 싼 산토닌을 팔고 있었다.
 
그들은 폐차장에서 망가진 승용차를 사 몰고 다녔다.
차 안에는 나왕 각목, 단단한 돌, 맥주병, 긴 못,
숫돌에 날카롭게 간 장검들을 실었다.
사범이라는 사람이 사용하는 도구였다. 그는 손으로 돌과 맥주병을 깨고,
나왕 각목을 부러뜨리고, 나무에 박아 끝을 구부린 긴 못으로 이를 뽑았다.
그가 날카로운 장검을 손아귀에 넣어 나일론 끈으로 묶고,
그 칼끝을 배에 대어 눌러 뺄 때 사람들은 온몸 피부 조직이 칼날 밑에서
짓이겨지는 착각을 느끼고는 했다.
 
사범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의 힘은 무서웠다.
꼽추는 그에게서 휘발유를 얻었다. 승용차의 구조도 자세히 살펴보았다.
앉은뱅이는 꼽추가 어둠 속에 잠겨 있는 동네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꼽추가 주저앉자
그는 철판을 밀어주었다. 꼽추는 콩을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낮게 물었다.
 
 무슨 소리지? 
 
 응? 
 
 무슨 소리가 났어. 
 
두 사람은 잠깐 숨소리를 죽였다.
 
 새가 날아다니는 소리야. 

앉은뱅이가 말했다.

 쏙독새가 먹이를 찾아 날고 있어. 
 
 밤에? 

 낮엔 잠을 잔다구. 나무에 혹처럼 붙어서 잠을 자는 새야. 
 
꼽추는 입으로 가져가던 콩을 철판 위에 놓았다.
앉은뱅이는 꼽추가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피워 무는 것을 보았다.
 
 왜 그래? 
 
앉은뱅이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냐. 
 
꼽추가 말했다.
 
 겁이 나서 그래? 
 
 무서울 건 없어.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들어가. 
 
꼽추는 고개를 저었다. 꼽추네 아이들은 천막 안에서 잠을 잤다.
그 아이들은 잠들기 전에 천막 앞에다 불을 피웠다.
앉은뱅이네 아이들이 저희 집 부엌 문짝을 가져와 불 위에 놓았다.
다 부서져 팔 수도 없는 것이었다. 
 
천막 안은 캄캄했다. 불 앞에 모여 섰던 동네 사람들이 흩어져가자
집들이 들어섰던 어수선한 땅은 어둠에 싸였다.
어른들은 한 줄기 부연 불빛을 따라갔다.
 
방범 초소 앞 공터에 승용차가 서 있었고, 사나이는 차 안에서
몇 사람이 건네준 종이쪽지와 인감증명을 들여다보았다.
사나이는 밖으로 돈을 내밀었다.
 
사람들은 차 앞에 쪼그리고 앉아 돈을 세었다.
 
앉은뱅이는 철판을 다시 불 위에 올려놓고 콩을 까넣었다.
그는 꼽추가 콩이라도 먹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는 꼽추가 지난 며칠 동안 무엇을 먹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나올 때가 됐잖아? 
 
꼽추가 물었다. 그의 담배는 바짝 타들어가 두 손가락 끝에 걸려 있었다. 
 
 됐어. 
 
앉은뱅이가 말했다.
 
 그자가 날 죽이지만 않게 해줘. 살이 피둥피둥 찐 친구야.
 그 몸무게로 눌러오면 난 숨도 한번 제대로 못 쉬고 뻗을 거야. 
 
 그러면서 날더러 들어가래? 
 
 자네가 들어가면 다른 방법을 써야지. 
 
 다른 방법? 

   묻지 마. 

앉은뱅이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야를 아파트 건물들이 가렸다.
벌판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잔뜩 들어선 아파트의 골조들이
시꺼먼 모습으로 서 있었다.
꼽추가 두 손으로 모래흙을 퍼 불 위에 뿌렸다.
앉은뱅이는 철판을 끌어내렸다.
그는 꼽추가 불을 다 끌 때까지 묵묵히 보고만 있었다.
마지막 한 점의 불까지 덮어버리자 주위는 어둠에 싸였다. 
 
 불을 켰어. 
 
꼽추가 말했다. 앉은뱅이는 동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승용차의 불빛이 밤하늘을 몇 번 휘둘러 젓더니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먹어. 
 
앉은뱅이가 철판을 밀어놓으며 말했다. 꼽추는 철판을 콩밭으로 차버렸다.
그는 휘발유가 든 플라스틱 통을 들고 앞서 걸었다.
앉은뱅이는 급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길이 움푹 파인 곳에 물이 괴어 있었다.
물 가운데 디딤돌이 두 개 놓여 있어 꼽추는 어림짐작으로
그것들을 밟고 건너뛰었다. 그는 앉은뱅이를 기다렸다.
앉은뱅이는 물웅덩이를 피해 길가 잡초 위로 기어
꼽추가 서 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길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반듯이 앉았다.
그리고 양쪽 주머니에 꼭꼭 감아 넣었던 전깃줄을 꺼내 친구에게 보였다.
꼽추는 고개를 끄덕이고 바른쪽 콩밭으로 들어가 숨었다.
앉은뱅이는 사방이 너무 조용해 겁이 났다. 그래서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시세 알아봤어? 
 
 응. 
 
꼽추는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려왔다.
 
 얼마래? 
 
 삼십팔만 원. 
 
앉은뱅이는 더 이상 말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앞을 봐. 
 
꼽추가 콩밭 속에서 말해왔다.
앉은뱅이는 두 줄기의 불빛이 밤하늘을 휘저으며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불빛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밝은 불빛은 앉은뱅이의 망막에 진한 어둠만 남겼다.
그는 꼼짝을 하지 않았다.
완충기가 그의 턱을 밀어붙이더니 승용차는 멎었다.
욕을 퍼부어대는 사나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꼽추는 바른쪽 콩밭에서 몸을 찰싹 붙였다. 사나이가 문을 열고 나왔다.
앉은뱅이는 옆으로 몸을 들더니 눈이 부신 얼굴로 사나이를 올려다보았다.
 
 이봐, 왜 그래? 
 
사나이가 외쳤다. 앉은뱅이가 작은 목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사나이는 허리를 굽히며 물었다.
 
 뭐라구? 
 
 죽고 싶다구. 
 
앉은뱅이가 말했다.
 
 내 위로 차를 몰아가. 나를 상관하지 말구. 
 
그 목소리가 아주 작아 사나이는 앉은뱅이 옆에 쭈그리듯 앉았다.
 
 이유나 알자.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나를 알겠어? 
 
 알잖구. 나에게 입주권을 팔았잖아. 
 
 그래, 당신이 십육만 원에 사갔지. 
 
 나를 원망할 건 없어. 나는 시에서 주는 이주 보조금보다 만 원이나
 더 준거야. 
 
 아무도 원망하진 않아. 
 
앉은뱅이가 말했다.
 
 우린 그 돈으로 전세 들었던 사람을 내보낼 수 있었어. 
 
 이봐, 길을 비키게. 
 
사나이가 말했다. 앉은뱅이는 얼굴을 돌렸다.
 
 전세돈 빼주니까 끝이야. 
 
 아파트 입주 능력이 없어서 팔아버린 것 아냐?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이야길 하는 거야? 
 
 집이 헐린 걸 봤지? 
 
 봤어. 
 
사나이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우리집이 없어졌어. 
 
앉은뱅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작았다.
 
 당신은 나에게 이십만 원을 더 줘야 돼. 
 
 뭐라구?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럴 수가 있어? 삼십 팔만 원짜리를
 십육 만 원에 사다 이십 이만 원씩이나 더 받고 넘긴다는 건 말이 안 돼.
 나에게 이십만 원을 줘도 이만 원의 이익을 보는 것 아냐?
 더구나 당신은 우리 동네 입주권을 몰아 사버렸지? 
 
 비켜! 
 
사나이가 몸을 일으켰다.
 
 비키지 않으면 집어던질 테야. 
 
 마음대로 해. 
 
아주 짧은 순간 앉은뱅이는 정신을 잃었었다.
사나이의 구둣발이 그의 가슴을 차버렸던 것이다. 앉은뱅이는 너무 약했다.
사나이는 앉은뱅이의 얼굴을 큰주먹으로 몇 번 쥐어박더니 번쩍 들어
풀숲으로 내던졌다.
그는 거꾸로 처박히듯 내던져진 앉은뱅이가 길 위로 기어 나오려고
곰지락거리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섰다.
방해물이 기어 나오기 전에 빨리 지나가야 했다.
그는 승용차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굽혔다. 순간,
검은 그림자가 그의 명치 밑을 힘껏 차왔다.
사나이의 큰 몸이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콩밭에 숨어 있던 꼽추가
차 안으로 들어가 있다 죽을 힘을 다해 사나이를 차버렸던 것이다.
 
 돈을 줄게! 
 
사나이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꼽추가 그의 입에 큰 반창고를 붙인 뒤였다. 몸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몸은 전깃줄로 꽁꽁 묶여 있었다.
사나이는 꼽추가 앉은뱅이를 차 앞으로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
불빛에 드러난 앉은뱅이의 얼굴은 피투성이였다.
꼽추가 그의 얼굴을 씻어주었다. 앉은뱅이는 울고 있었다.
 
 내가 뻗는 꼴을 보고 싶었지? 
 
앉은뱅이가 말했다.
 
 그렇지 않다면 좀더 빨리 나왔어야 했어.
 자넨 내가 뻗는 꼴을 보고 싶었던 거야. 
 
 그만둬. 
 
꼽추가 몸을 돌려 걸으며 말했다.
 
 저자를 차에 태워야 돼. 그리고 가방을 찾아야지. 
 
 태워. 
 
앉은뱅이가 따라오며 말했다. 사나이는 온몸을 뒤틀다 지쳐
조용히 누워 있었다.
 
꼽추가 차 안으로 들어가 밤하늘을 일직선으로 가르며 커져 있던
두 줄기의 불을 꺼버렸다. 엔진도 껐다.
그는 운전석 밑에서 검정색 가방을 찾았다.
밖에서는 앉은뱅이가 사나이의 등을 받쳐 밀어 앉혔다.
꼽추가 나와 허리를 끼어안아 일으켰다.
두 친구는 사나이의 몸을 떠받치듯 밀어 운전석으로 올려 앉혔다.
 
 나를 저자 옆에 앉혀줘. 
 
앉은뱅이가 말했다. 꼽추가 그를 안아 바른쪽 좌석에 앉혀주었다.
자신은 뒤쪽으로 들어가 검정색 가방을 열었다. 사나이는 보기만 했다.
 
 돈과 서류야. 
 
꼽추가 말했다.
 
 보여줘. 
 
앉은뱅이가 말했다.
사나이는 앉은뱅이와 꼽추가 자기의 모든 것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건 벌써 팔아버렸어. 
 
앉은뱅이가 가방 안을 뒤적이면서 말했다. 사나이는 두 눈만 껌벅거렸다.
 
 잘 봐. 
 
 우리 이름이 이 공책에 적혀 있어. 그런데 연필로 그어버린 거야.
 이건 팔았다는 뜻이야. 
 
앉은뱅이가 쳐다보자 사나이가 고개만 끄덕였다.
 
 삼십 팔만 원에? 
 
사나이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돈을 세어봐. 
 
꼽추가 말했다. 앉은뱅이가 돈을 세기 시작했다.
그는 꼭 이십만 원씩 두 뭉치의 돈만 꺼냈다.
 
 이건 우리 돈야. 
 
앉은뱅이가 말했다. 사나이는 다시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앉은뱅이가 뒷좌석의 친구에게 한 뭉치의 돈을 넘겨주는 것을 보았다.
앉은뱅이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꼽추의 손도 마찬가지로 떨렸다.
두 친구의 가슴은 더 떨렸다.
 
앉은뱅이는 앞가슴을 풀어헤쳐 돈뭉치를 넣더니
단추를 잠그고 옷깃을 여몄다. 꼽추는 윗옷 바른쪽 주머니에 넣었다.
꼽추의 옷에는 안주머니가 없었다.
돈을 챙겨 넣자 내일 할 일들이 머리에 떠올랐다.
앉은뱅이의 머리에도 내일 할 일들이 떠올랐다.
아이들은 천막 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통은 가져와. 
 
앉은뱅이가 말했다. 그의 손에는 마지막 전깃줄이 들려 있었다.
밖으로 나온 꼽추는 콩밭에서 플라스틱 통을 찾았다.
그는 친구의 얼굴만 보았다. 그 이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그는 승용차 옆을 떠나 동네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유난히 조용한 밤이었다. 그는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앉은뱅이가
기어오는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앉은뱅이는 승용차 안에서 몸을 굴려 밖으로 떨어져 나올 것이다.
그는 문을 쾅 닫고 아주 빠르게 손을 놀려 어둠 깔린 황톳길 위를
기어올 것이다.
꼽추는 자기의 평상 걸음과 손을 빠르게 놀렸을 때의 앉은뱅이의 속도를
생각하면서 걸었다. 
동네 입구로 들어선 꼽추는 헐린 외딴집 마당가로 가
펌프의 손잡이를 눌렀다. 그는 두 손으로 물을 받아 입을 축였다.
그 손을 윗옷 바른쪽 주머니에 대어보았다.
앉은뱅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기어오고 있었다.
꼽추는 앞으로 다가가 앉은뱅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앉은뱅이의 몸에서는 휘발유 냄새가 났다.
꼽추가 펌프를 찧어 앉은뱅이의 얼굴을 씻어주었다.
앉은뱅이는 얼굴이 쓰라려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런 아픔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가슴 속에 들어 있는 돈과 내일 할 일들을 생각했다.
그가 기어온 황톳길 저쪽 끝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그는 일어서려는 친구를 잡아 앉혔다.
 
쇠망치를 든 사람들이 왔을 때 꼽추네 식구들은 정말 잘 참았다.
앉은뱅이네 식구는 꼽추네 식구들보다 대가 약했다.
앉은뱅이는 갑자기 일어서려고 한 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폭발 소리가 들려 왔을 때는 앉은뱅이도 놀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뿐이었다. 불길도 자고 폭발 소리도 자버렸다. 
어둠과 침묵이 두 사람을 싸고 있었다. 꼽추가 앞서 걸었다.
앉은뱅이가 그 뒤를 따랐다.
 
 살 게 많아. 
 
그가 말했다.
 
 모터가 달린 자전거와 리어카를 사야 돼. 그 다음에 강냉이 기계를 사야지.
 자네는 운전만 하면 돼. 내가 기어다니는 꼴을 보지 않게 될 거야.
 
앉은뱅이는 친구의 반응을 기다렸다. 꼽추는 말이 없었다.
 
 왜 그래? 
 
앉은뱅이는 급히 따라가 꼽추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이봐, 왜 그래? 
 
 아무것도 아냐. 
 
꼽추가 말했다.
 
 겁이 나서 그래? 
 
앉은뱅이가 물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꼽추가 말했다.
 
 묘해. 이런 기분은 처음야. 
 
 그럼 잘됐어. 
 
 잘된 게 아냐. 
 
앉은뱅이는 이렇게 차분한 친구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나는 자네와 가지 않겠어. 
 
 뭐! 
 
 자네와 가지 않겠다구.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일 삼양동이나 거여동으로 가자구.
 그곳엔 방이 많아. 식구들을 안정시켜놓고
 우린 강냉이 기계를 끌고 나오면 되는 거야.
 모터가 달린 자전거를 사면 못 갈 곳이 없어.
 갈현동에 갔었던 일 생각나? 몇 방을 튀겼었는지 벌써 잊었어?
 밤 아홉시까지 계속 돌려댔었잖아. 그들은 강냉이를 먹기 위해
 튀기러 오는 게 아냐. 옛날 생각이 나서 아이들을 앞세우고 올 뿐야.
 그런 델 찾아다니면 돼. 우린 며칠에 한 번씩 집에 돌아가
 여편네가 입을 벌릴 정도의 돈을 쏟아 놓아줄 수가 있다구.
 그런데 자네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사범을 따라갈 생각야. 
 
 그 약장수? 
 
 응. 
 
 미쳤어? 그 나이에 무슨 약장사를 하겠다는 거야? 
 
 완전한 사람은 얼마 없어. 그는 완전한 사람야. 죽을 힘을 다해 일하고
 그 무서운 대가로 먹고 살아. 그가 파는 기생충약은 가짜가 아냐.
 그는 자기의 일을 훌륭히 도와줄 수 있는 내 몸의 특징을 인정해 줄 거야.
 
꼽추는 이렇게 말하고 한마디 덧붙였다.
 
 내가 무서워하는 것은 자네의 마음야. 
 
 그러니까, 알겠네. 
 
앉은뱅이가 말했다.
 
 가. 막지 않겠어.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어쨌든. 
 
꼽추가 돌아서면서 말했다.
 
 무슨 해결이 나야 말이지. 
 
어둠이 친구를 감싸 앉은뱅이는 발짝 소리밖에 듣지 못했다.
조금 있자 발작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아이들이 잠든 천막을 찾아 기어가기 시작했다.
울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흐르는 눈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이 밤이 또 얼마나 길까 생각했다.
 
 
교사는 두 손을 교탁 위에 얹었다. 그는 제자들을 향해 말했다.
 
 끝으로 내부와 외부가 따로 없는 입체는 없는지 생각해보자.
 내부와 외부를 경계지을 수 없는 입체, 즉 뫼비우스의 입체를 상상해 보라.
 우주는 무한하고 끝이 없어 내부와 외부를 구분할 수 없을 것 같다.
 간단한 뫼비우스의 띠에 많은 진리가 숨어 있는 것이다.
 내가 마지막 시간에 왜 굴뚝 이야기나 하고, 띠 이야기를 하는지
 제군은 생각해주리라 믿는다. 차차 알게 되겠지만 인간의 지식은
 터무니없이 간사한 역할을 맡을 때가 많다.
 제군은 이제 대학에 가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제군은 결코 제군의 지식이 제군이 입을 이익에 맞추어 쓰여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는 제군을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
 사물을 옳게 이해할 줄 아는 사람으로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이제 나의 노력이 어떠했나 자신을 테스트해볼 기회가 온 것 같다.
 다른 인사말은 서로 생략하기로 하자.
 
 차렷!
 
반장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경례!
 
교사는 상체를 굽혀 답례하고 교단에서 내려왔다. 그는 교실에서 나갔다.
겨울 해는 이미 기울어 교실 안이 어두워 왔다.
 
             (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19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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