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문학

난중일기 7 중 6 - 忠武公 이순신 -

하얀모자 1 2025. 3. 6. 02:28

 

 

                난중일기 7 중 6 - 忠武公 이순신 -
              
  정유년 (1597년)
 
   조선시대 군사계급
   https://blog.naver.com/udtssueod/90102541009
 
 목 차

1.1월 기록에 없음
2.2월 기록에 없음
3.3월 기록에 없음
4.정유년 4월 (1597년 4월)
5.정유년 5월 (1597년 5월)
6.정유년 6월 (1597년 6월)
7.정유년 7월 (1597년 7월)
8.정유년 8월 (1597년 8월)
9.정유년 9월 (1597년 9월)
10.정유년 10월 (1597년 10월)
11.정유년 11월 (1597년 11월)
12.정유년 12월 (1597년 12월)
 
1.1월 기록에 없음
 
2.2월 기록에 없음
 
3.3월 기록에 없음
 
4.정유년 4월 (1597년 4월)
 
4월 초1일 (신유) 맑음 [양력 5월 16일]
 
옥문을 나왔다.남문(숭례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 이르니,
조카 봉∙분(芬)과 아들 울(蔚)이 윤사행(尹士行)∙원경(遠卿)과 더불어
한 대청에 같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지사 윤자신(尹自新)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李純智)가 와서 봤다.
더해지는 슬픈 마음을 이길 길이 없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 밥을 먹은 뒤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윤기헌(尹耆獻)도 왔다.
정으로 권하며 위로하기로 사양할 수 없어 억지로 마시고서 몹시 취했다.
이순신(李純信)이 술병 채로 가지고 와서 함께 취하며 위로해 주었다.
영의정(류성룡)이 종을 보내고 판부사 정탁(鄭琢)
판서 심희수(沈禧壽)∙우의정 김명원(金命元)∙참판 이정형(李廷馨)
대사헌 노직(盧稷)∙동지 최원(崔遠)∙동지 곽영(郭嶸)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했다.취하여 땀이 몸을 적셨다.
 
4월 2일 (임술) 종일 비가 내렸다.[양력 5월 17일]
 
여러 조카들과 이야기했다.
방업(方業)이 음식을 매우 풍성하게 차려 왔다.
필공을 불러 붓을 매게 했다.
어두울 무렵 성으로 들어가 영의정과 밤 깊도록 이야기하다가
헤어져 나왔다.
 
4월 3일 (계해) 맑다.[양력 5월 18일]
 
일찍 남쪽으로 길을 떠났다.
금오랑 이사빈(李士贇)∙서리 이수영(李壽永)∙나장 한언향(韓彦香)은
먼저 수원부에 이르렀다.
나는 인덕원(의왕시 인덕원)에서 말을 쉬게 하고 조용히 누워서 쉬었다.
저물어서 수원에 들어가서, 경기체찰사의 수하에서 심부름하는
병졸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집에서 잤다.
신복룡(愼伏龍)은 나의 임시로 사는 집에 이르러
내 지나가는 걸 보고는 술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나를 위로했다.
순천부사 류영건(柳永健)이 나와서 봤다.
 
4월 4일 (갑자) 맑다.[양력 5월 19일]
 
일찍 길을 떠나, 독성(수원시 태안읍 양산리) 아래에 이르니,
반자(判刺) 조발(趙撥)이 술을 준비해 놓고 막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취하도록 마시고 길을 떠나 바로 진위구로(평택군 진위 면 봉남리)를
거쳐 냇가에서 말을 쉬게 했다.
오산에 이르러 황천상(黃天祥)의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황천상(黃天祥)이라는 사람은 내 짐이 무겁다고 말을 내어 실어 보내니,
고마울 뿐이다.
수탄을 거쳐 평택현 이낸손(李內隱孫)의 집에 투숙했는데,
주인이라는 사람이 대접이 매우 은근했다.
자는 방이 몹시 좁은데 따뜻하게 불까지 때어 땀이 흘렀다.
 
4월 5일 (을축) 맑다.[양력 5월 20일]
 
해가 뜨자, 길을 떠나 바로 선산(아산시 염치읍 백암리)에 이르렀다.
나무들은 두번이나 들불이 나서 불에 탄 꼴을 차마 볼 수 없었다.
무덤 아래에서 절하며 곡하는데 한참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 내려와 외가에 와서 사당에 절했다.
그 길로 조카 뇌의 집에 이르러, 조상의 사당에 곡하며 절했다.
남양 아저씨가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저물 무렵 우리집에 이르러 장인∙장모님의 신위 앞에 절하고
곧 작은 형님(堯臣)과 여필(禹臣)의 처 제수의 사당에 다녀 와서
잠자리에 들었다.마음이 좋지 않았다.
 
4월 6일 (병인) 맑다.[양력 5월 21일]
 
멀고 가까운 친구들이 모두 와서 모였다.
오랫동안 막혔던 정을 푹 풀고 갔다.
 
4월 7일 (정묘) 맑다.[양력 5월 22일]
 
금오랑(이사빈)이 아산현에서 오므로,
나는 나가 그윽히 대접했다.홍찰방∙이별좌∙윤효원(尹孝元)이 와서 봤다.
금오랑은 변흥백(卞興伯)의 집에서 잤다.
 
4월 8일 (무진) 맑다.[양력 5월 23일]
 
아침에 자리를 깔고 남양 아저씨를 곡하고 상복을 입었다.
저녁나절에 변흥백(卞興伯)의 집에 가서 이야기했다.
강설장(姜楔長)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므로 나는 가서 문상했다.
그 길로 홍석견(洪石堅)을 집에 들렀다.
저녁나절에 변흥백(卞興伯)의 집에 이르러 금부도사에게 접대했다.
 
4월 9일 (기사) 맑다.[양력 5월 24일]
 
동네 사람들이 술병 채로 가지고 와서 멀리 가는 길을 위로해 주므로
정의상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 마시니, 매우 취하여서 헤어졌다.
홍군우(洪君遇)는 노래부르고 이별좌도 노래불렀다.
나는 노래를 들어도 쬐끔도 즐겁지 않았다.
금부도사는 잘 마시면서도 실수함이 없었다.
 
4월 10일 (경오) 맑다.[양력 5월 25일]
 
아침밥을 먹은 뒤에 변흥백(卞興伯)의 집에 이르러
도사와 함께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홍찰방∙이별좌 형제∙윤효원(尹孝元) 형제가 와서 봤다.
이언길(李彦吉)∙허제(許霽)가 술을 가지고 왔다.
 
4월 11일 (신미) 맑다.[양력 5월 26일]
 
새벽 꿈이 매우 번거로워 다 말할 수가 없다.
덕(德)이를 불러서 대충 말하고 또 아들 울(蔚)에게 이야기했다.
마음이 몹시 불안하다.취한 듯 미친 듯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이 무슨 징조인가!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종을 보내어 소식을 듣고 오게 했다.
금부도사는 온양으로 돌아 갔다.
 
4월 12일 (임신) 맑다.[양력 5월 27일]
 
종 태문(太文)이 안흥량에서 들어와 편지를 전하는데,
 
"어머니께서는 숨이 곧 끊어질 듯해도
 초9일에 위∙아래 모든 사람이 모두 무사히
 안흥량(서산시 근흥면 안흥)에 도착하였다."
 
고 했다.법성포(영광군 법성면 법성리)에 이르러 배를 대어 잘 적에
닻이 끌려 떠내려 가서 배에 머물며 엿새나 서로 떨어졌다가
탈없이 만났다고 했다.
아들 울(蔚)을 먼저 바닷가로 보냈다.
 
4월 13일 (계해) 맑다.[양력 5월 28일]
 
일찍 아침을 먹은 뒤에 어머니를 마중가려고 바닷가로 가는 길에
흥찰방집에 잠깐 들러 이야기하는 동안
아들 울(蔚)이 종 애수(愛壽)를 보내면서
 
"아직 배오는 소식이 없다."
 
고 하였다.또 들으니,
황천상(黃天祥)이 술병을 들고 변흥백(卞興伯)의 집에 왔다.
고 한다.흥찰방과 작별하고 변흥백(卞興伯)의 집에 이르렀다.
조금 있으니, 종 순화(順花)가 배에서 와서 어머니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하늘이 캄캄했다.
곧 갯바위(아산시 염치읍 해암리)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애통함을 다 적을 수가 없다.뒷날에 대강 적다.
 
4월 14일 (갑술) 맑다.[양력 5월 29일]
 
홍찰방∙이별좌가 들어와 곡하고 관을 장만했다.
관의 재목은 본영에서 마련해 가지고 온 것인데,
조금도 흠난 곳이 없다고 했다.
 
4월 15일 (을해) 맑다.[양력 5월 30일]
 
저녁나절에 입관했다.오종수(吳終壽)가 점심으로 호상해 주니,
뼈가 가루로 될지언정 잊지 못하겠다.
관에 따른 것에는 아무런 유감이 없으니 이것만은 다행이다.
천안군수가 들어와 치행해 주고 전경복씨가 연일 마음을 다하여
상복 만드는 일 등을 돌보아 주니, 고마운 말을 어찌 다 하랴!
 
4월 16일 (병자) 궂은 비 오다.[양력 5월 31일]
 
배를 끌어 중방포 앞으로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을을 바라보니,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이야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집에 와서 빈소를 차렸다.
비는 퍼붓고, 나는 맥이 다 빠진데다가 남쪽으로 갈 날은 다가오니,
호곡하며 다만 어서 죽었으면 할 따름이다.
천안군수가 돌아갔다.
 
4월 17일 (정축) 맑다.[양력 6월 1일]
 
금오랑의 서리 이수영(李秀榮)이 공주에서 와서 가자고 다그친다.
 
4월 18일 (무인) 종일 비가 내렸다.[양력 6월 2일]
 
몸이 몹시 불편하여 머리를 내놓지 못하고,
다만 빈소 앞에서 곡만 하다가 종 금수(今守)의 집으로 물러 나왔다.
저녁나절에 계원들 중에서 나 있은 곳에 모여 와서
곗일을 논의하고서 헤어졌다.
 
4월 19일 (기묘) 맑다.[양력 6월 3일]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니 영전에 하직을 고하며 울부짖었다.
천지에 나 같은 사정이 어디 또 있으랴! 일찍 죽느니만 못하다.
조카 뇌의 집에 이르러 조상의 사당 앞에서 아뢰었다.
금곡(연기군 광덕면 대덕리)의 강선전의 집앞에 이르니
강정(姜晶)∙강영수(姜永壽)씨를 만나 말에서 내려 곡했다.
그 길로 보산원(연기군 광덕면 보산원리)에 이르니,
천안군수가 먼저 냇가에 와서 말에서 내려 쉬었다 갔다.
임천군수 한술(韓述)은 중시(重試)보러 서울로 가던 중에
앞 길을 지나다가 내가 간다는 말을 듣고 들어와 조문하고 갔다.
아들 회∙면∙울(蔚), 조카 해∙분(芬)∙완(莞)과 주부 변존서(卞存緖)가
함께 천안까지 따라 왔다.
원인남(元仁男)도 와서 보고 작별한 뒤에 말에 올랐다.
일신역(공주시 장기면 신관리)에 이르러 잤다.
저녁에 비가 뿌렸다.
 
4월 20일 (경진) 맑다.[양력 6월 4일]
 
아침에 공주 정천동에서 밤을 먹고,
저녁에 니산(공주시 노성면 읍내리)에 가니, 이 고을 원이 극진하다.
군청 동헌에서 잤다.
김덕장(金德章)이 나의 임시로 거처하는 집에 왔다가 서로 만났다.
금부도사가 와서 봤다.
 
4월 21일 (신사) 맑다.[양력 6월 5일]
 
일찍 떠나 은원(논산 은진면 연서리)에 이르니,
김익(金翼)이 우연히 오게 되었다고 한다.
임달영(任達英)이 곡식을 사러 배로 은진포(恩津浦)에 왔다고 하는데,
그 꼴이 몹시 궤휼(간사스럽고 교묘하다)하다.
저녁에 여산(익산군 여산면 여산리) 관노의 집에서 자는데,
한밤에 홀로 앉았으니, 비통한 생각에 견딜 수가 없다.
 
4월 22일 (임오) 맑다.[양력 6월 6일]
 
오전에 삼례역(완주군 삼례읍 삼례리)의 역장과 역리의 집에 이르렀다.
저녁에 전주 남문밖 이의신(李義臣)의 집에서 잤다.
판관 박근(朴勤)이 와서 봤다.부윤(府尹)도 후하게 접대했다.
판관이 비올 때 쓰는 기름 먹인 두꺼운 종이∙생강 등을 보내 왔다.
 
4월 23일 (계미) 맑다.[양력 6월 7일]
 
일찍 떠나 오원역(임실군 관천면 선천리)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었다.
저물어서 임실현에서 잤다.임실현감이 예에 따라 대우했다.
현감은 홍순각(洪純慤)이다.
 
4월 24일 (갑신) 맑다.[양력 6월 8일]
 
일찍 떠나 남원 시오리 쯤에서 정철(丁哲) 등을 만나서
남원부 오리 안까지 이르러 우리 일행과는 헤어지고
곧바로 십리 바깥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이희경(李喜慶)의 종의 집에 이르렀다.슬픈 회포를 어찌하랴! 어찌하랴!
 
4월 25일 (을유) 비가 많이 올 모양이다.[양력 6월 9일]
 
아침밥을 먹은 뒤에 길을 떠나
운봉(남원군 운봉면)의 박롱(朴 )의 집에 들어가니,
비가 많이 퍼부어 출두할 수가 없다.여기서 들으니,
원수(권율)가 벌써 순천으로 떠났다고 한다.
곧 사람을 금오랑 있는 곳으로 보내어 머물게 했다.
운봉현감(남한)은 병으로 나오지 않았다.
 
4월 26일 (병술) 흐리고 개지 않았다.[양력 6월 10일]
 
일찍 아침밥을 먹고 길을 떠나 구레현 금부 도사가 먼저 와 있었다.
(손인필의 집)으로 내려가니 손인필(孫仁弼)의 집에 이르니,
구례현감(이원춘)이 급히 나와 보고는 대접하는 것이 매우 은근하다.
금부도사(이사빈)도 와서 봤다.
나는 금부도사에게 술을 권하라고 원에게 청했더니
원이 아주 대접을 잘했다고 한다.
밤에 앉았으니 비통함을 어찌 다 말하랴!
 
4월 27일 (정해) 맑다.[양력 6월 11일]
 
일찍 떠나,
송치(松峙; 순천시 서면 학구리 바랑산 해발 619m)밑에 이르니
구례현감이 사람을 보내어 점심을 지어 보냈다.
순천 송원(松院: 순천시 서면 학구리 신촌)에 이르니,
이득종(李得宗)∙정선(鄭瑄)이 와서 기다렸다.
저녁에 정원명(鄭元溟)의 집에 이르니,
원수(권율)는 내가 온 것을 알고,
군관 권승경(權承慶)을 보내어 조문하고, 또 안부도 묻는데,
그 위로하는 말이 못내 간곡하다.
저녁에 순천부사가 와서 봤다.
정사준(鄭思竣)도 와서
원균(元均)의 망녕되고 전도된 상황을 많이 말했다.
 
4월 28일 (무자) 맑다.[양력 6월 12일]
 
아침에 원수가 또 군관 권승경(權承慶)을 보내어 문안하고서 말 하기를,
 
"상중에 몸이 피곤할 것이니, 기운이 회복되는 대로 나오라"
 
고 전했다.또 말하기를,
 
"통제사와 친한 군관이 있다 하니,
 편지와 공문을 보내어 나오게 하여 데리고 가서 돌보라"
 
고 하는 편지와 공문을 만들어 왔다.
부사의 소실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4월 29일 (기축) 맑다.[양력 6월 13일]
 
사과(司果) 신씨와 방응원(方應元)이 와서 봤다.
병마사(이복남)도 원수와 의논할 일이 있다고 하여
순천부로 들어왔다고 한다.신 사과와 함께 이야기했다.
 
4월 30일 (경인) 아침에 흐리고
 저물 무렵에 비가 내렸다.[양력 6월 14일]
 
아침 밥을 먹은 뒤에 신 사과와 함께 이야기하였다.
병마사에게 남아서 술을 마셨다고 했다.
병마사 이복남(李福男)이 아침밥 먹기도 전에 와서 보며,
원균(元均)에 대한 일을 많이 말했다.
감사도 원수에게 왔다고 군관을 보내여 편지로 안부를 물었다.
 
 
5.정유년 5월 (1597년 5월)
 
5월 초1일 (신묘) 비가 내렸다.[양력 6월 15일]
 
사과 신씨가 머물러서 이야기하였다.
순찰사와 병마사는 원수가 머물고 있는 정사준(鄭思竣)의 집에
같이 모여 술을 마시며 무척 즐겁게 논다고 하였다.
 
5월 2일 (임진) 저녁나절에 비내렸다.[양력 6월 16일]
 
원수(권율)는 보성으로 가고, 병마사(이복남)는 본영으로 갔다.
순찰사(박흥로)는 담양으로 가는 길에 와서 보고는 돌아갔다.
순천부사(우치적)가 와서 봤다.
진흥국(陳興國)이 좌영에서 와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원균(元均)의 일을 말했다.
이형복(李亨復)∙신홍수(申弘壽)도 왔다.
남원의 종 끝돌이가 아산에서 와서 어머니 영연이 평안하다고 한다.
또 변유헌(有憲)은 식구를 데리고 무사히 금곡에 도착하였다고 했다.
홀로 빈 동헌에 앉아 있으니, 비통함을 어찌 참으랴!
 
5월 3일 (계사) 맑다.[양력 6월 17일]
 
閱 신 사과∙응원(應元)∙진흥국(陳興國)이 돌아갔다.
이기남(李奇男)이 와서 봤다.
아침에 차남 울(蔚)을 열(荷)로 이름 고쳤다.
'열'자는 소리는 '기쁠 열(悅)'과 같고 뜻은 '움이 돋아나다,
초목이 무성하게 자란다'는 것으로 매우 좋은 글자이다.
저녁나절에 강소작지이 와 보고서 곡했다.
오후 네 시쯤에 비가 뿌렸다.저녁에 부사가 와서 봤다.
 
5월 4일 (갑오) 비가 내렸다.[양력 6월 18일]
 
오늘은 어머니 생신날이다.슬프고 애통함을 어찌 참으랴!
닭이 울 때 일어나 눈물만 흘릴 뿐이다.
오후에 비가 많이 내렸다.정사준(鄭思竣)이 오고,
이수원(李壽元)도 왔다.
 
5월 5일 (을미) 맑다.[양력 6월 19일]
 
새벽 꿈이 몹시 어수선했다.
아침에 부사가 와서 봤다.
저녁나절에 충청우후 원유남(元裕男)이 한산도에서 원균(元均)의
못된 짓을 많이 전하고,
또 진중의 장병들이 군무이탈하여 반역질을 하니,
장차 일이 어찌 될지 헤아리지 못하겠다고 한다.
오늘은 단오절인데,
멀리와 천리나 되는 땅의 끝 모퉁이에서 종군하느라고
어머니 영전에 예를 못하고 곡하며 우는 것도 내 뜻대로 못 하니
무슨 죄로 이런 보답을 받는고!
나 같은 사정은 고금을 통하여도 짝이 없을 것이다.
가슴이 갈갈이 찢어지누나! 다만 때를 못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5월 6일 (병신) 맑다.[양력 6월 20일]
 
꿈에 돌아가신 두 분 형님을 만났는데,
서로 붙들고 우시면서 하는 말씀이
 
"장사를 지내기 전에 천리 밖으로 떠나와 군무에 종사하고 있으니,
 대체 모든 일을 누가 주장해서 한단 말이냐.통곡 한들 어찌하리!"
 
라 하셨다.이것은 두 형님의 혼령이 천리 밖까지 따라 와서
근심하고 애달파함을 이렇게까지 한 것이니 비통할 따름이다.
또 남원의 추수를 감독하는 일을 염려하시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연일 꿈자리가 어지러운 것도 아마 형님들의 혼령이
그윽히 걱정하여 주는 탓이라 슬픔이 한결 더하다.
아침저녁으로 그립고 설운 마음에 눈물이 엉기어 피가 되건마는
아득한 저 하늘은 어째서 내 사정을 살펴주지 못하는고!
왜 어서 죽지 않는지.
저녁나절에 능성현령 이계명(李繼命)도 상제의 몸으로 기용된 사람인데,
와서 보고 돌아갔다.
흥양의 종 우롬금(禹老音金)∙박수매(朴守每)
조택(趙澤)과 순화(順花)의 처가 와서 인사했다.
이기윤(李奇胤)과 몽생(夢生)이 왔다.
송정립(宋廷立)∙송득운(宋得運)도 왔다가 곧 돌아갔다.
저녁에 정원명(鄭元溟)이 한산도에서 돌아와
흉물(원균?)의 하는 꼴을 많이 말했다.
또 부찰사(한효순)가 좌영으로 나와서 병이라 하여 조리한다고 했다.
우수사(이억기)가 편지를 보내 와 조문했다.
 
5월 7일 (정유) 맑다.[양력 6월 21일]
 
아침에 정혜사의 중 덕수(德修)가 와서 미투리를 바쳤다.
거절하며 받지 않으니, 재삼 간절히 받으라고 하므로
값을 주어서 보냈다.미투리(삼이나 노 따위로 짚신처럼 삼은 신)를
곧 정원명(鄭元溟)에게 주었다.
저녁나절에 송대기(宋大器)∙류몽길(柳夢吉)이 와서 봤다.
서산군수 안괄(安适)도 한산도에서 왔다.
음흉한 자(원균)의 일을 많이 말했다.
저녁에 이기남(李奇男)이 또 왔다.
이원룡(李元龍)은 수영에서 돌아왔다.
안괄(安适)이 구례에 갔을 때 조사겸(趙士謙)의 수절녀를
사통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놀랄 일이다.
 
5월 8일 (무술) 맑다.[양력 6월 22일]
 
아침에 승장(僧將) 수인(守仁)이 밥지을 중 두우(杜宇)를 데리고 왔다.
종 한경(漢京)이 일이 있어서 보성에 보냈다.
흥양의 종 세충(世忠)이 녹도에서 망아지를 끌고 왔다.
활장이 이지(李智)가 돌아갔다.
이 날 새벽꿈에 사나운 범을 때려 잡아서 가죽을 벗기고 휘둘렀다.
이건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조종(趙琮)이 이름을 연(堧)으로 고치고는 와서 봤다.
조덕수(趙德秀)도 왔다.
낮에 망아지에 안장을 얹어서 정상명(鄭詳溟)이 타고 갔다.
음흉한 원(元)이 편지를 보내어 조문한다.
이는 곧 원수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
이경신(李敬信)이 한산도에서 와서
원균(元均)의 흉악한 일을 많이 말했다.
또 그가 데리고 온 서리를 곡식을 사오라는 구실로 육지로 보내놓고
그 아내를 사통하려 했다.그러나 그가 기를 써도 따라주지 않고
밖으로 뛰처나가 고래고래 소리쳤다고 했다.
원(元)이란 자는 온갖 꾀로써 나를 모함하려하니 이 또한 운수로다.
말에 실어 보내는 짐이 서울길에 잇닿았으며,
그렇게 해서 나를 헐뜯는 것이 날이 갈수록 심하니,
그저 때를 못 만났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5월 9일 (기해) 흐리다.[양력 6월 23일]
 
아침에 이형립(李亨立)이 와서 봤다.곧 돌아갔다.
이수원(李壽元)이 광양에서 돌아왔다.
순천급제 강승훈(姜承勳)이 응모해 왔다.
순천부사가 좌수영에서 돌아왔다.종 경(京)이 보성에서 말을 끌고 왔다.
 
5월 10일 (경자) 궂은 비 내렸다.[양력 6월 24일]
 
오늘은 태종(太宗)의 제삿날이다.
옛날부터 이 날에는 비가 온다더니, 저녁나절에는 많은 비가 왔다.
박줄생(朴注叱生)이 와서 인사했다.
주인이 보리밥을 지어서 들여왔다.
장님 임춘경(任春景)이 운수를 봐 가지고 왔다.
부찰사도 조문하는 글을 보냈다.
녹도만호 송여종(宋汝悰)은 겸하여 삼 종이(麻紙) 두 가지를
부의로 보내 오고, 전라순찰사는 흰쌀∙중간 쌀 각 열 말과
콩과 소금도 얻어서 군관을 시켜서 보낸다고 말했다.
 
5월 11일 (신축) 맑다.[양력 6월 25일]
 
김효성(金孝誠)이 낙안에서 왔다가 곧 돌아갔다.
전 광양현감 김성(金惺)이 체찰사의 군관이 되었다.
화살대를 구하러 순천에 왔던 길에 왔다가 봤다.
소문을 많이 전하는데, 소문이란 것은 모두 흉물이 일이었다.
부찰사가 온다는 통지문이 먼저 왔다.장위(張渭)가 편지를 보냈다.
정원명(鄭元溟)이 보리밥을 지어서 내었다.
장님 임춘경(任春景)이 와서 운수 본 것을 말했다.
부찰사가 순천부에 도착했다.
정사립(鄭思立)과 양정언(梁廷彦)이 전하기를
 
"부찰사가 와서 만나 보자"
 
고 하는데, 내 몸이 불편하여 만나 보는 것을 거절했다.
 
5월 12일 (임인) 맑다.[양력 6월 26일]
 
이원룡(李元龍)이 보내어 부찰사에게 문안했다.
부찰사는 또 김덕린(金德 )을 보내어 문안했다.
저녁나절에 이기남(李奇男)∙기윤(奇胤)이 와서 보고는 아뢰고
도양장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아침에 아들 열을 부찰사에게로 보냈다.
신홍수(申弘壽)가 와서 보고 원영감(원균)의 점을 쳤는데,
첫 괘가
수뢰둔(상괘 坎,하괘 震:널리 형통하지만 기운은 최악으로험난함) 변하여
천풍구(상괘 乾,하 괘 巽:여자가 지나치게 거센 괘로서
흉사를 만나는 확률이 열에 아홉임)가 되니
이 쓰임은 본체를 이기는 것이라 크게 흉하다.
남해 원이 조문 편지를 보내고,
또 여러 가지 물건 - 쌀 둘, 참기름 둘, 꿀 다섯,
조 하나, 미역 둘 저녁에 향사당으로 가서 부찰사와 함께 이야기하고,
자정에야 숙소로 돌아왔다.
정사립(鄭思立)∙양정언(梁廷彦) 등이 왔다가 닭이 운 뒤에 돌아갔다.
 
5월 13일 (계묘) 맑다.[양력 6월 27일]
 
어젯밤에 부찰사의 말이
 
"상사가 보낸 편지에 영감에 대한 일을 많이 탄식했더라"
 
고 한다.저녁나절에 정사준(鄭思竣)이 떡을 만들어 왔다.
순천부사(우치적)가 노자를 보내왔다.너무 미안하다.
 
5월 14일 (갑진) 맑다.[양력 6월 28일]
 
아침에 순천부사가 와서 보고 돌아갔다.
부찰사는 부유(순천시 주암면 창촌리)로 향했다.
정사준(鄭思竣)∙정사립(鄭思立)∙양정언(梁廷彦)이 와서
모시고 가겠다고 한다.
아침밥을 일찍 먹고 길을 떠나
송치(솔티:순천시 서면 학구리 바랑산) 밑에 이르러 말을 쉬게 했다.
혼자 바위 위에서 한 시간이 넘도록 곤하게 잤다.
운봉의 박롱(朴 )이 왔다.
저물 무렵 찬수강(순천시 환전면과 구례 사이의 강)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걸어서 건넜다.
구례현의 손인필(孫仁弼)의 집에 이르니, 현감(이원춘)이 와서 봤다.
 
5월 15일 (을사) 개이다 비오다 하다.[양력 6월 29일]
 
주인 집이 너무 낮고 더러워 파리떼가 벌처럼 모여
사람이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동헌의 띠풀로 엮은 정자로 옮겨 왔더니 마파람이 바로 들어왔다.
구례현감과 함께 종일 이야기했다.거기서 그대로 잤다.
 
5월 16일 (병오) 맑다.[양력 6월 30일]
 
현감과 같이 이야기했다.저녁에 남원의 탐후인이 돌아와서 고하되,
 
"체찰사가 내일 곡성을 거쳐 이 구례현에 들어와 며칠 묵은 뒤에
 전주로 갈 것이다."
 
고 했다.원이 주물상(귀한 손님을 대접할 때, 간단하게 차려서
먼저 내오는 음식상)을 무척 융숭하게 차렸다.몹시 미안했다.
저녁에 정상명(鄭翔溟)이 왔다.
 
5월 17일 (정미) 맑다.[양력 7월 1일]
 
현감과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남원 탐후인이 돌아와서 전하여 말하기를,
 
"원수(권율)가 운봉 길로 가지 않고 명나라 총병 양원(楊元)을
 영접하는 일로 완산(전주)으로 달려갔다."
 
고 했다.내 여기 온 것이 헛걸음이라 민망스럽다.
 
5월 18일 (무신) 맑고 샛바람이 세게 불었다.[양력 7월 2일]
 
저녁에 김종려(金宗麗) 영감이 남원에서 곧바로 와서 봤다.
충청수영 영리 이엽(李燁)이 한산도에서 왔기로 집안에 편지를 부쳤다.
그러나 아침 술에 취해 미친듯 날뛰니 얄밉기만 하다.
 
5월 19일 (기유) 맑다.[양력 7월 3일]
 
체찰사가 이 구례현에 들어올 것이다.
성 안에 머물고 있기가 미안해서 동문 바깥 장세호(張世豪)의 집으로
옮겨 나갔다.명협정에 앉았는데 구례현감(이원준)이 와서 봤다.
저녁에 체찰사가 현으로 들어왔다.
오후 네 시쯤에 소나기가 쏟아지더니 오후 여섯 시에 개었다.
 
5월 20일 (경술) 맑다.[양력 7월 4일]
 
저녁에 첨지 김경로(金敬老)가 와서 봤다.
또 말하기를 무주장 박지리의 농토가 아주 좋다고 했다.
옥천에 사는 권치중(權致中)은
첨지 김경로(金敬老)의 서처남(庶妻男)인데
옥천 양산창 근처에 있다고 했다.
체찰사(李元翼)이 내가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공생(貢生)을 보내고 또 군관 이지각(李知覺)을 보내더니
조금 있다가 또 군관을 보내어 조문하기를,
 
"일찍 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가 이제야 비로소 듣고
 놀라 애도한다."
 
고 하고, 저녁에 만날 수 있는가를 물었다.나는 대답하기를
 
"저녁에 마땅히 가서 뵙겠다."
 
고 했다.어둘 무렵에 가서 뵈오니, 체찰사는 소복을 입고 접대한다.
조용히 일을 의논하고 체찰사가 개탄해 마지 않았다.
밤이 깊도록 이야기하는 중에 일찌기 임금의 분부가 있었는데
미안하다는 말이 많이 있었다는 바,
그 뜻을 알지 못하겠다고 하며,
또 흉물의 하는 짓이 몹시도 그럴 듯하게 속이고 있음에도
하늘이 이를 살피지 못하니 나랏일을 어찌할꼬!
나올 때에 남종사(南從事)가 사람을 보내어 문안했다.
나는 밤이 깊어서 나가 인사하지 못한다고 대답해 보냈다.
 
5월 21일 (신해) 맑다.[양력 7월 5일]
 
박천 류해(柳海)가 서울에서 내려와서는 한산도로 가서
공을 세우겠다고 한다.또 말하기를,
 
"은진현(논산군 은진면 연서리)에 이르니,
 은진 원이 뱃길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라"
 
고 했다.해가 또 말하기를,
 
"죄수의 우두머리 이덕룡(李德龍)을 고소한 사람이 옥에 갇히어
 세 차례나 형장을 맞고 다 죽게 될 판이라"
 
고 했다.놀랍고도 놀랍다.또 과천의 좌수 안홍제(安弘濟) 등이
이상공(李尙公)에게 말과 스무살짜리 계집종을 바치고
풀려 나오는 것을 보고 나갔다고 했다.
안홍제(安弘濟)는 본시 죽을 죄가 아닌데도 여러번 맞아
거의 죽게 되었다가 물건을 바치고서 석방이 되었다는 것이다.
안팎이 모두 바치는 물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죄의 경중이 달려있다고 하니,
이러다가는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야말로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는 것인가.
 
5월 22일 (임자) 맑다.마파람이 세게 불었다.[양력 7월 6일]
 
아침에 손인필(孫仁弼)의 부자가 와서 봤다.
박천 류해(柳海)가 승평으로 가서 그 길로 한산도로 간다 하므로,
전라∙경상 두 수 사에게 와 가리포 첨사 등에게 문안 편지를 써 보냈다.
늦게 체찰사의 종사관 김광엽이 진주에서 이 구례현으로 들어오고
배흥립(裵興立) 영감도 온다는 개인적인 편지도 왔다.
그 동안의 정 회를 풀 수 있겠다.다행이다.
혼자 앉았으니 비통하여 견디기가 너무 어렵다.
어두울 무렵
배흥립(裵興立) 동지와 이 구례현감 이원춘(李元春)이 와서 봤다.
 
5월 23일 (계축) [양력 7월 7일]
 
아침에 정사룡(鄭士龍)∙이사순(李士順)이 와서 봤다.
원공의 일을 많이 전했다.
저녁나절에 동지 배흥립(裵興立)이 한산도로 돌아갔다.
체찰사가 사람을 보내어 부르므로 가서 뵙고 조용히 의논하는데,
시국의 그릇된 일에 대하여 많이 분개하고
다만 죽을 날만 기다린다고 했다.내일 초계로 간다고 하면서,
체찰사가 영수증을 주면서 이대백(李大伯)이 모은 쌀 두 섬을 모아서
이를 성밖 주인 장세휘(張世輝)의 집으로 보냈다.
 
5월 24일 (갑인) 맑다.샛바람이 종일 세게 불었다.[양력 7월 8일]
 
아침에 광양의 고응명(高應明)의 아들 고언선(高彦善)이 와서 봤다.
한산도의 일을 많이 전한다.
체찰사가 군관 이지각(李知覺)을 보내어 안부를 묻고,
경상우도의 연해안 지도를 그리고 싶으나 도리가 없으니,
본대로 지도를 그려 보내주면 고맙겠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거절할 수가 없어서 지도를 대강 그려서 보냈다.
저녁에 비가 많이 왔다.
 
5월 25일 (을묘) 비가 내렸다.[양력 7월 9일]
 
아침에 길을 떠나려 하려다가 비에 막혀 가지 않다.
혼자 시골집에 기대어 있으니 회포가 그지없다.
슬프고 그리운 생각을 어찌 하랴!
 
5월 26일 (병진) 종일 많은 비가 내렸다.[양력 7월 10일]
 
비를 무릅쓰고 길을 막 떠나려 하려는데,
사량만호 변익성(邊翼星)이 문초받을 일로 체찰사 앞으로 왔는데
이종호(李宗浩)가 잡아 왔다.
잠시 서로 마주 보고는 그 길로 석주관(구례군 토지면 송정리)에 이르니,
비가 퍼붓듯이 쏟아진다.
말을 쉬게 했지만, 엎어지고 자빠지며
간신히 악양(하동군 악양면 정서리) 이정란(李廷鸞)의 집에 이르렀으나,
문을 닫고 거절당했다.
김덕령(金德齡)의 아우 김덕린(金德 )이 빌려 쓰는 집이다.
나는 아들 열로 하여금 억지를 대고서 들어가 잤다.
행장이 흠뻑 다 젖었다 .
 
5월 27일 (정사) 흐렸다가 개이다.[양력 7월 11일]
 
아침에 젖은 옷을 바람에 걸어 말렸다.
저녁나절에 떠나 두치 최춘룡(崔春龍)의 집에 이르렀다.
류기룡(柳起龍)이 와서 봤다.
사량만호 이종호(李宗浩)가 먼저 왔었다.
변익성(邊翼星)은 곤장 스무 대를 맞아 꼼짝도 못한다고 했다.
 
5월 28일 (무오)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양력 7월 12일]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하동에 이르니,
하동현감(신진)이 서로 만나 보는 것을 기뻐하며 성 안 별채로 맞아들여
매우 간곡한 정을 베푼다.
또 원(원균)의 하는 짓이 엄청 미쳤다고 말했다.
날이 저물도록 이야기했다.변익성(邊翼星)도 왔다.
 
5월 29일 (기미) 흐리다.[양력 7월 13일]
 
몸이 너무 불편하여 길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대로 머물러서 몸조리했다.
하동현감(신진)이 정다운 이야기를 많이 했다.
황생원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이가 일흔 살인데 하동에 왔는 데,
일찌기 서울에 있었으나 지금은 떠돌아 다닌다고 했다.
나는 만나지 않았다.
 
 
6.정유년 6월 (1597년 6월)
 
6월 초1일 (경신) 비 비가 내렸다.[양력 7월 14일]
 
일찍 떠나 청수역(하동군 옥종면 정수리) 시냇가 정자에 이르러
말을 쉬었다.
저물녁에 단성땅과 진주 접경지역에 있는 박호원(朴好元)이라는
농사짓는 종의 집에 투숙하려는데,
주인이 기꺼이 접대하기는 하나 잠잘 방이 좋지 못하여
겨우 겨우 밤을 지냈다.비가 밤새도록 내렸다.
유둔 하나, 장지 둘, 백미 하나, 참 깨 다섯, 들깨 셋, 꿀 다섯,
소금 다섯과 미지 다섯은 모두 하동 에서 보낸 것이다.
 
6월 2일 (신유) 비오다 개이다 한다.[양력 7월 15일]
 
일찍 떠나 단계 시냇가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저녁나절에 삼가에 이르니, 삼가현감이 산성으로 이미 가버려
빈 관사에서 잤다.
고을 심부름꾼이 밥을 지어 먹어라고 한 것을
먹지 말라고 종들에게 타일렀다.
삼가현 오리 밖에 홰나무 정자가 있어 거기 앉아 있는데,
근처에 사는 노순일(盧淳鎰) 형제가 와서 봤다.
 
6월 3일 (임술) 비가 내렸다.[양력 7월 16일]
 
아침에 떠나려다가 비가 이토록 오니 웅크리고 앉아
어떻게 할까 생각하고 있을 적에 도원수의 군관 류홍(柳泓)이
흥양에서 왔다.그와 같이 길 사정을 이야기했다.
비로 길을 떠날 수가 없어 그대로 묵었다.
아침에 고을 사람에게 밥을 얻어 먹었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종들에게 매를 때리고 밥쌀을 도로 주었다.
 
6월 4일 (계해) 맑다.[양력 7월 17일]
 
일찍 떠나려는데, 삼가현감(신효업)이 문안의 글을 보내면서
노자까지 보내왔다.
낮에 합천땅에 이르러 고을에서 십 리쯤 떨어진 홰나무 정자가
있는 곳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너무 더워서 한참 동안 말을 쉬게 하고, 오 리쯤 가니,
길이 쌍갈래이다.한 길은 곧바로 합천군으로 들어가는 길이요,
또 한길은 초계로 가는 길이다.그래서, 강을 건너지 않고 가다가,
거의 십리(4Km)쯤 가니, 원수(권율)의 진이 바라 보였다.
문보가 살고 있는 집에 들어가 잤다.
고개를 끼고 넘어 오는데, 기암절벽이 천 길이나 되고,
강물은 굽이 돌며 깊고, 길은 험하고, 다리는 위험하다.
만일 이 험한 곳을 눌러 지킨다면,
만명의 군사라도 지나가지 못하겠다. 모여곡이다.
 
6월 5일 (갑자) 맑다.하늬바람이 세게 불었다.[양력 7월 18일]
 
아침에 초계군수가 급히 달려왔다.곧 그를 불러 이야기했다.
식사를 한 뒤에, 중군 이덕필(李德弼)도 달려 왔으므로
옛 이야기를 했다.조금 있으니, 심준(沈俊)이 와서 보았다.
같이 점심을 먹고 잠자는 방을 도배했다.
저녁에 이승서(李承緖)가 와서 파수병과 복병이 도피했던 일을 말했다.
이 날 아침에 구례 사람과 하동현감이 보내온 종과 말을
아울러 되돌려 보냈다.
 
6월 6일 (을축) 맑다.[양력 7월 19일]
 
잠자는 방을 다시 발랐다.군관이 쉴 마루 두 칸을 만들었다.
저녁나절에 모여곡 주인 집의 이웃에 사는 윤감(尹鑑)∙문익신(文益新)이
와서 봤다.
종 경(京)을 이대백(李大伯)에게 보냈더니
담당 아전이 나가고 없어서 받지 못하고 그냥 왔다고 한다.
어두워서 집에 들어갔는데 과부는 다른 집으로 옮겨 갔다.
 
6월 7일 (병인) 맑다.몹시 더웠다.[양력 7월 20일]
 
원수(권율)의 군관 박응사(朴應泗)와 류홍(柳洪) 등이 와서 봤다.
원수의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므로
곧 사례하는 답장을 보냈다.안방으로 들어가 잤다.
 
6월 8일 (정묘) 맑다.[양력 7월 21일]
 
아침에 정상명(鄭翔溟)을 보내어 황 종사관에게 안부를 물었다.
저녁나절에 이덕필(李德弼)과 심준(沈俊)이 와서 봤다.
고을 원과 그 아우가 와서 봤다.
원수를 마중 갔는데 원수 일행 여나믄 명도 와서 봤다.
점심을 먹은 뒤에 오후에 원수(권율)가 진에 오므로 나도 나가 보았다.
종사관은 원수 앞에 있었고 원수와 함께 이야기했다.
한 시간쯤 지나서 원수가 박성(朴惺)이 써 올린
사직서 초고를 보여 주는데,
박성(朴惺)이 원수의 처사가 소탈 하다고 진술하니,
원수가 스스로 편안하지가 않아 체찰사(이원익)에게 글을 올렸다.
또 복병에 관한 일들을 낱낱이 아뢴 것을 보았다.
저물어서야 돌아왔다.몸이 매우 불편하므로, 저녁밥을 먹지 않았다.
 
6월 9일 (무진) 개이지 않았다.[양력 7월 22일]
 
저녁나절에 정상명(鄭翔溟)을 원수에게 보내어 문안했다.
다음에 종사관에게 문안했다.처음으로 노마료(보수)를 받았다.
숫돌을 캐어 왔는데
질이 연일석(경북 영일에 나는 고운 돌)보다 좋다고 했다.
윤감(尹鑑)∙문익신(文益新)∙문보 등이 와서 봤다.
이 날은 여필의 생일인데 혼자 수루터에 앉아 있으니 회포가 어떻겠노!
 
6월 10일 (기사) 맑다.[양력 7월 23일]
 
아침에 가라말∙가라워라말∙간자짐말∙유짐말 등의
네 편자가 떨어진 것을 갈아 박았다.
원수의 종사관이 삼척의 홍연해(洪漣海)를 보내어 문안하면서
좀 늦게 와서 보겠다고 한다.
홍연해(洪漣海)는 홍견(洪堅)의 삼촌 조카이다.
어려서 죽마고우 서철(徐徹)이 합천 땅 동면 율진에 사는데,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와서 봤다.
아이 때 이름은 서갈박지(徐乫朴只)인데 밥을 먹여 보냈다.
저녁에 원수의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와서 보고,
조용히 말하는 사이에 임진년에 왜적을 무찌른 일을
칭찬하지 않는 것이 없고,
또 산성에 험고한 요새를 쌓지 않은데 대한 한 탄과
당면한 토벌∙방비에 관한 대책이 허술한 것 등을 말하는 데,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돌아갈 것을 잊고서 이야기했다.
 
또 말하기를 "내일은 원수가 산성을 살펴보러 간다"고 했다.
 
6월 11일 (경오) 맑다.[양력 7월 24일]
 
중복날이라 쇠를 녹이고 구슬을 녹일 것처럼 땅이 찌는 듯하다.
저녁나절에 명나라 차관 경략군문(唐差官軍略軍門) 이문경(李文卿)이
와서 보므로, 부채를 선물로 보냈다.
엊저녁에 종사관과 이야기 할 때, 변홍백이 집안 편지를 가지고 와서
전하므로 어머니의 영연이 편한 줄은 알겠으나,
쓰라린 회포를 어찌 다 말하랴! 다만,
변흥백(卞興伯)이 나를 만나볼 일로 여기까지 왔다가
그냥 청도로 갔다고 하니, 참으로 한이 된다.
이 날 아침에 편지를 써서 변흥백(卞興伯)에게 보냈다.
아들 열이 토사로 밤새도록 신음했다.지짐 굽듯 말할 수 없이 답답하다.
닭이 울어서야 조금 덜하여 잠이 들었다.
이 날 아침에 한산도 여러 곳에 갈 편지 열네 장을 썼다.
경의 모친이 편지를 보냈는데 지내기가 몹시 어렵다고 했다.
도둑이 또 일어났다고 했다.
작은 워라말이 먹지 않으니 이것은 더위를 먹은 것이다.
 
6월 12일 (신미) 맑다.[양력 7월 25일]
 
종 경(京)과 종 인(仁)을 한산도 진으로 보냈다.
전라우수사(이억기)∙충청수사(최호)∙경상수사(배설)∙가리포첨사(이응표)
녹도만호(송여종)∙여도만호(김인영)∙사도첨사(황세득)
동지 배흥립(裵興立)∙조방장 김완(金浣)∙거제현령(안위)
영등포만호(조계종)∙남해현감(박대남)∙하동현감(신진)
순천부사(우치적)에게 편지를 했다.
저녁나절에 승장 처영(處英)이 와서 보고 부채와 미투리를 바치므로,
물건으로써 갚아 보냈다.
또 적의 사정을 말하고 또 원공(원균)의 일도 말했다.
낮에 중군장(이덕필)이 군사를 거느리고 적에게 갔다고 한다.
어떤 일인지 몰랐는데, 원수(권율)에게 가 보니,
우병사(김응서)의 보고에,
 
"부산의 적은 창원 등지로 떠나려 하고,
 서생포의 적은 경주로 진을 옮긴다."
 
고 했다.복병군을 보내어 길을 막고 적에게 위세를 뽐내려고
한 것이라고 했다.
병사의 우후 김자헌(金自獻)이 일이 있어 원수에게 뵈러 왔다.
나도 원수를 보았다.새벽 일찌기 돌아왔다.
 
6월 13일 (임신) 맑다.
  저녁나절에 가랑비가 뿌리다가 그쳤다.[양력 7월 26일]
 
저녁나절에 병마사의 우후 김자헌(金自獻)이 와서 봤다.
한 시간이나 넘도록 서로 이야기했다.점심을 먹여서 보냈다.
이 날 낮에 왕골을 쪄서 말렸다.
어두울 무렵 청주의 이희남(李喜男)의 종이 들어와서,
주인이 우병사의 부대에 들어갔기 때문에
지금 원수의 진 근처에 까지 왔는데 날이 저물어서 묵고 있다고 했다.
 
6월 14일 (계유)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양력 7월 27일]
 
이른 아침에 이희남(李喜男)이 들어와서 아산의 어머니 영연과
위∙아랫사람들이 두루두루 무사하다고 한다.
쓰리고 그리운 마음을 어이 다 말하랴!
아침밥을 먹은 뒤에 이희남(李喜男)이 편지를 가지고
우병사(김응서)에게 갔다.
 
6월 15일 (갑술) 맑고 흐리기가 반반이다.[양력 7월 28일]
 
오늘은 보름인데, 군중에 있으니,
어머니 영전에 잔을 올리어 곡하지 못하니,
그리운 마음을 어이다 말하랴! 초계 원이 떡을 마련하여 보냈다.
원수의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군관을 보내어 말하기를,
 
"원수가 산성으로 가려고 한다."
 
고 전했다.나도 뒤를 따라 가서 큰 냇가에 이르렀다가
혹시 다른 계획이 있을까 염려되어 냇가에 앉은 채로
정상명(鄭翔溟)을 보내어 병이라고 아뢰게 하고서 그대로 돌아왔다.
 
6월 16일 (을해) 맑다.[양력 7월 29일]
 
혼자 앉아 있었는데 아무도 들여다보는 이가 없었다.
아들 열과 이원룡(李元龍)을 불러 책을 만들어 변씨 족보를 쓰게 했다.
저녁에 이희남(李喜男)이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병마사는 보내지 않았다"
 
고 했다.변광조(卞光祖)가 와서 봤다.
아들 열은 정상명(鄭翔溟)과 함께 큰 내로 가서 전마를 씻고 왔다.
 
6월 17일 (병자)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양력 7월 30일]
 
서늘한 기운이 쓸쓸하다.밤 경치는 한없이 넓기만 한데
새벽에 앉았으니 쓰라린 그리움을 어찌 다 말하랴!
아침밥을 먹은 뒤에 원수(권율)에게로 가니,
원균(元均)의 정직하지 못한 짓을 많이 말했다.
또 비변사에서 내려온 공문을 보이는데, 원균(元均)의 장계에
수군과 육군이 함께 나가서 먼저 안골포의 적을 무찌른 연후에
수군이 부산 등지로 진군하겠다고 하니,
안골포의 적을 먼저 칠 수 없겠는가 하였다.
또 원수의 장계에는 `통제사 원(元)이라는 사람은
전진하려고는 아니하고 오직 안골포만 먼저 쳐야 한다.'고 하였다.
수군의 여러 장수들이 대개 딴 마음을 품고 있을 뿐더러
원(元)이라는 사람은 안으로 들어가 나가지 않으니,
절대로 여러 장수들과 대책을 합의하지 못할 것이라
일을 망쳐버릴 것이 뻔하다는 것이었다.
원수에게 이희남(李喜男)과 변존서(卞存緖)∙윤선각(尹先覺) 등에게
공문을 띄워 독촉하여 오게 했다.
올 때에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머물고 있는 곳에 들어가 앉아서
한 시간이 넘게 이야기하다가 나의 임시로 사는 집에 와서
곧 이희남(李喜男)의 종을 의령산성으로 보내고,
청도에는 파발로 공문을 보냈다.
초계 원을 보았더니 이른바 양심이 없다고 할만하다.
 
6월 18일 (정축)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양력 7월 31일]
 
아침에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종을 보내어 문안했다.
저녁나절에 윤감(尹鑑)이 떡을 만들어서 왔다.
명나라 사람 섭위(葉威)가 초계에서 와서 말하기를,
 
"명나라 사람 주언룡이 일찌기 일본에 사로잡혔다가
 이번에야 비로소 나왔는데,
 적병 십만 명이 벌써 사자마(沙自麻)나 대마도에 이르렀을 것이며,
 소서행장은 의령을 거쳐 곧장 전라도를 침범할 것이요,
 가등청정은 경주∙대구 등지로 옮겨 안동 등지로 갈 것이다."
 
고 했다.저물무렵 원수가
 
"사천에 갈 일이 있다."
 
고 알려 왔다.그래서 사복 정상명(鄭翔溟)을 보내어 물어보게 하였더니,
원수가
 
"수군에 관한 일 때문에 사천으로 간다."
 
고 하였다.
 
6월 19일 (무인) [양력 8월 1일]
 
새벽에 닭이 세 번 울 때 문을 나서서 원수의 진에 이르를 즈음에
동트는 빛이 벌써 밝았다.
진에 이르니 원수와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나와서 앉아 있었다.
내가 들어가 뵈었더니 원수는 원균(元均)에 관한 일을 내게 말하는데,
 
"통제사(원균)의 하는 일이 말이 아니다.
 흉물은 조정에 청하여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을 모조리 무찌른 뒤에
 수군이 나아가 토벌해야 한다고 한다.
 이게 무슨 무슨 뜻이겠소? 질질 끌고 나아가지 않으려는 뜻이다.
 그래서 내가 사천으로 가서 세 수사에게 독촉하겠다.
 통제사(원균)는 이를 지휘할 것이 없다고 했다"
 
고 했다.나는 또 조정에서 내려온 유지를 보니,
 
"안골포의 적은 가벼이 들어가 칠 것이 못 된다"
 
고 하였다.원수가 간 뒤에 황 종사관과 이야기했다.
조금 있으니 초계 원이 왔다.
작별하면서 초계 원에게 하는 말이
진찬순(陳贊順)에게 심부름시키지 말라고 했더니
원수부의 병방 군관과 원이 모두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내가 돌아올 때 사로잡혔다가 도망해 되돌아온 사람이 나를 따라 왔다.
이 날은 땅이 찌는 듯했다.저녁에 작은 워라말 풀을 적게 먹었다.
낮에 군사 변덕기(卞德基)∙변덕장(德章)∙변경완(卞慶琬)
변경남(卞敬男)이 와서 봤다.진사 이일장(李日章)도 와서 봤다.
밤에 소나기가 많이 쏟아져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6월 20일 (기묘) 종일 비오더니 밤에는 많이 내렸다.[양력 8월 2일]
 
늦은 아침 늦게 서철(徐徹)이 와서 봤다.
윤감(尹鑑)∙문익신(文益新)∙문보 등이 와서 봤다.
변유(卞瑜)가 와서 봤다.
오후에 종과 말의 보수를 받아 왔다.병들었던 말이 조금 나아졌다.
 
6월 21일 (경진) 비가 오락가락 하다.[양력 8월 3일]
 
새벽 꿈에 덕과 율온과 대가 꿈에 보였는데,
다들 나를 보고 좋아하고 뵙고자 하는 기색이 많았다.
아침에 영덕현령 권진경(權晉慶)이 원수께 뵈러 왔다가
원수가 이미 사천으로 갔으므로 나에게 와서 보고
좌도의 일을 많이 전했다.
좌병사 군관이 편지를 가져왔다.곧 회답편지를 써서 보냈다.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문안을 보냈다.
저녁에 변주부(卞主簿)∙윤선각(尹先覺)이 여기와서
들어와서 밤까지 이야기했다.
 
6월 22일 (신사) 비가 오락가락 하다.[양력 8월 4일]
 
아침에 초계군수가
연포국(무우∙두부∙다시마∙고기를 맑은 장에 끓인 국)을 마련하여 와서
권하기는 했지만 오만한 빛이 많이 있었다.
그 처사가 체모 없음을 말하여 뭣하랴!
저녁나절에 이희남(李喜男)이 들어왔다.우병사의 편지를 전했다.
낮에 정순신(鄭舜信)∙정사겸(鄭思謙)∙윤감(尹鑑)∙문익신(文益新)
문보 등이 와서 봤다.이선손(李先孫)이 와서 봤다.
 
6월 23일 (임오) 비오다가 개다가 하였다.[양력 8월 5일]
 
아침에 대전(大箭)을 다시 다듬었다.
저녁나절에 우병마사(김응서)에게 편지를 보내고,
겸하여 환도(環刀)의 크고 작은 것을 보냈다.
그러나 가지고 오는 사람이 물에 빠뜨려 장식과 칼집이 결딴나버렸으니
아깝도다.
아침에 나굉(羅宏)의 아들 나재흥(羅在興)이
그 아버지의 편지를 가지고 와서 봤다.
또 쪼들리는 데도 노자까지 보내어 주니 미안스럽다.
 
6월 24일 (계미) 이 날은 입추이다.[양력 8월 6일]
 
새벽에 안개가 사방에 자욱했다.골짜기를 분간할 수 없었다.
아침에 수사 권언경(權彦卿)의 종 세공(世功)∙종 감손(甘孫)이 와서
무우밭에 관한 일을 아뢰었다.
무우밭을 갈고 씨부침하는 일의 감독관으로 이원룡(李元龍)
이희남(李喜男)∙정상명(鄭翔溟)∙문임수(文林守) 등을 정하여 보냈다.
생원 안극가(安克可)가 와서 보고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오후에 합천군수가 조언형(曺彦亨)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더위가 찌는 듯했다.
 
6월 25일 (갑신) 맑다.[양력 8월 7일]
 
다시 무우씨를 부침하도록 시켰다.
아침을 먹기 전에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와서 보고는
해전에 관한 일을 많이 말하고,
또 원수가 오늘 내일 진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군사를 토론 하다가 저녁나절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저녁에 종 경(京)이 한산도에서 돌아왔다.
보성군수 안홍국(安弘國)이 적탄에 맞아 죽었다고 들었다.
놀라워 슬픔을 이길 수가 없다.놀랍고도 애석하며 놀라와 탄식했다.
한 놈의 적도 잡지 못하고 먼저 두 장수를 잃었으니
통탄하고 한탄할 일이다.
거제도 사람을 보내어 미역을 실어왔다.
 
6월 26일 (을유) 맑다.[양력 8월 8일]
 
새벽에 순천의 종 윤복(允福)이 현신하기에 곧 곤장을 쉰 대 때렸다.
거제에서 온 사람이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중군장 이덕필(李德弼)과 변홍달(卞弘達)
심준(沈俊) 등이 와서 봤다.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개벼루 강가의 정자로 갔다가 돌아갔다.
어응린(魚應 )과 박몽삼(朴夢三) 등이 와서 봤다.
아산 종 평세(平世)가 들어와서 어머니 영연이 평안하고,
집집이 위∙아랫 사람들이 다 평안하다고 했다.
다만 석달이나 가물어서 농사는 틀려 가망이 없다는 것이다.
장삿날은 7월 27일이나 또는 8 월 4일중에서 날잡는다고 했다.
그리운 생각에 슬픈 정회를 어찌 다 말하랴!
저녁에 우병마사(김응서)가 체찰사(이원익)에게,
 
"아산의 이방(李昉)과 청주의 이희남(李喜男)이 복병하기 싫어서
 원수(권율)의 진영 곁으로 피해 있다."
 
고 말하여, 체찰사가 원수에게 공문을 보내니,
원수는 무척 성내어 공문을 다시 작성하여 보냈다.
이 날에 작은 워라말이 죽어서 내다버렸다.
 
6월 27일 (병술) 맑다.[양력 8월 9일]
 
아침에 어응린(魚應 )∙박몽삼(朴夢三) 등이 돌아갔다.
희남(李喜男)과 이방(李昉)이 체찰사의 행차가 도착하는 곳으로 갔다.
저녁나절에 황여일(黃汝一)이 와서 보고 한참동안 이야기하였다.
오후 세시에 소나기가 많이 쏟아져
잠깐 사이에 물이 흘러 넘쳤다고 했다.
 
6월 28일 (정해) 맑다.[양력 8월 10일]
 
저녁나절에 황해도 백천에 사는 별장 조신옥(趙信玉)∙홍대방(洪大邦)
등이 와서 봤다.
초계 아전의 편지에, "원수가 내일 남원으로 간다." 고 하였다.
이 날 새벽 꿈이 몹시도 뒤숭숭하였다.
종 경(京)이 물건을 사러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6월 29일 (무자) 맑다.[양력 8월 11일]
 
변주부가 마흘방으로 갔다.종 경(京)이 돌아왔다.
이희남(李喜男)∙이방(李昉) 등이 돌아왔다.
중군장 이덕필(李德弼)과 심준(沈俊)이 와서 유격 심유경(沈惟敬)을
잡아가는데, 총병관 양원(楊元)이 삼가에 이르러
꽁꽁 묶어 보내더라고 전했다.
문림수(文林守)가 의령에서 와서 전하기를
체찰사가 벌써 초계역에 이르렀다고 한다.
새로 급제한 량간(梁諫)이 황천상(黃天祥)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변주부가 마흘방에서 돌아왔다.
 
6월 30일 (기축) 맑다.[양력 8월 12일]
 
새벽에 정상명(鄭翔溟)을 시켜 체찰사에게 문안했다.
이 날 몹시 더워 땅이 찌는 듯했다.
저녁에 흥양의 신여량(申汝樑)∙신제운(申霽雲) 등이 와서,
연해의 땅은 비가 알맞게 왔다고 전했다.
 
 
7.정유년 7월 (1597년 7월)
 
7월 초1일 (경인) 새벽에 비오다가 저녁나절에 개이다.[양력 8월 13일]
 
명나라 사람 세 명이 왔다가 부산으로 간다고 했다.
송대립(宋大立)과 송득운(宋得運)이함께 왔다.안각(安珏)도 와서 봤다.
저녁에 서철(徐徹) 및 방덕수(方德壽)와 그 아들이 와서 잤다.
이 날 밤 가을 기운이 몹시 서늘하여 슬프고 그리움을 어찌하랴!
그대로 송득운(宋得運)은 원수의 진에 갔다가 왔는데,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큰 냇가에서 피리를 불렀다고 하니
놀랍고 놀랄 일이다.오늘은 인종의 제삿날이기 때문이다.
 
7월 2일 (신사) 맑다.[양력 8월 14일]
 
아침에 변덕수(卞德壽)가 돌아왔다.
저녁나절에 신제운(申霽雲)과 평해에 사는 정인서(鄭仁恕)가
종사관의 심부름으로 문안하러 여기 왔다.
오늘이 곧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일인데,
멀리 천리 밖에 와서 군복을 입고 있으니 사람의 일이 어찌 이러냐!
 
7월 3일 (임오) 맑다.[양력 8월 15일]
 
새벽에 앉아 있으니 싸늘한 기운이 뼈속으로 스민다.
비통한 마음이 한층 더했다.제사에 쓸 유과와 밀가루를 장만했다.
저녁나절에 정읍의 군사 이량(李良)∙최언환(崔彦還)∙건손(巾孫) 등
세 사람을 심부름 시키라고 보내왔다.
저녁나절에 장준완(蔣俊琬)이 남해에서 와서 보고
남해 원의 병이 중하다고 전하였다.몹시 민망하다.
조금 있으니 합천군수 오운(吳澐)이 와서 보고,
산성의 일을 많이 말했다.
점심을 먹은 뒤에 원수의 진으로 가니, 황종사관과 이야기했다.
종사관은 전적(典籍) 박안의(朴安義)와 활을 쐈다.
이때 좌병마사의 군관이 항복한 왜놈 두 명을 잡아 왔는데,
가등청정의 부하라고 하였다.
날이 저물어서 돌아왔다.그 때 고령 원이 성주에 갇혔다는 말을 들었다.
 
7월 4일 (계미) 맑다.[양력 8월 16일]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정인서(鄭仁恕)를 보내어 문안했다.
저녁나절에 이방(李芳)과 류황(柳滉)이 스스로 군사를 모집하러 왔다.
흥양의 량점(梁霑)∙찬(纘)∙기(紀) 등이 왔다.
변여량(卞汝良)∙변회보(卞懷寶)∙황언기(黃彦己) 등이
모두 벼슬했다고 와서 봤다.
변사증(卞師曾)과 변대성(卞大成) 등도 와서 봤다.
점심을 먹은 뒤에 비가 뿌렸다.
아침밥을 먹을 때 안극가(安克可)가 와서 봤다.
어두어서 비가 많이 내리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7월 5일 (갑신) 비가 내렸다.[양력 8월 17일]
 
이른 아침에 초계원이 체찰사의 종사관 남이공(南以恭)이
경내를 지나간다고 하면서 산성에서부터 영문을 지나갔다.
저녁나절에 변덕수(卞德壽)가 왔다.
변존서(卞存緖)가 마흘방(馬訖坊)으로 갔다.
 
7월 6일 (을유) 맑다.[양력 8월 18일]
 
꿈에 윤삼빙(尹三聘)을 보았는데 나주로 귀양간다고 했다.
저녁나절에 이방이 와서 봤다.
홀로 빈방에 앉았으니 그리움과 비통함을 어찌 말로 다하랴!
저녁에 바깥채에 나가 앉았다.
변존서(卞存緖)가 마흘방에서 돌아왔다.그래서 안으로 들어갔다.
안각(安珏) 형제도 변흥백(卞興伯)을 따라 왔다.
이 날 제사에 쓸 중배끼 다섯 말을 꿀에다 반죽하여 시렁에 얹었다.
 
7월 7일 (병술) 맑다.[양력 8월 19일]
 
오늘은 칠석이다.슬픔과 그리움을 어찌하랴!
꿈에 원균(元均)과 같이 모였다.
내가 원균(元均)의 윗자리에 앉아 음식상을 받자 원균(元均)이
기쁜 빛이 있는 것 같았다.무슨 징조인지 알 수가 없다.
박영남(朴永男)이 한산에서 와서 그 주장의 잘못으로
대신 죄 받으러 원수에게 잡혔다고 했다.
초계 현감이 햇물건을 마련하여 보내왔다.
아침에 안각(安珏) 형제가 와서 봤다.
저물어서 흥양의 박응사(朴應泗)가 와서 봤다.
심준(沈俊) 등이 와서 봤다.
의령현감 김전(金銓)이 고령에서 와서
병마사의 잘못된 일을 많이 말했다.
 
7월 8일 (정해) 맑다.[양력 8월 20일]
 
아침에 이방(李芳)이 왔기에 밥을 먹여 보냈다.
그에게서 들으니, 원수가 구례에서 이미 곤양에 이르렀다고 했다.
저녁나절에 집주인 이어해(李魚海)와 최태보(崔台輔)가 와서 봤다.
변덕수(卞德壽)가 또 왔다.
저녁에 송대립(宋大立)∙류홍(柳洪)∙박영남(朴永男)이 왔다.
송과 류 두 사람은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7월 9일 (무자) 맑다.[양력 8월 21일]
 
내일 아들 열을 아산으로 내려 보내고자 한다.
제사에 쓸 과일을 봉하는 것을 살펴봤다.
저녁나절에 윤감(尹鑑)∙문보 등이 술을 가지고 와서
열과주부 변존서(卞存緖) 등에게 전별하고 돌아 갔다.
이 날 밤 달빛이 대낮 같았다.어버이를 생각하니,
슬퍼서 울면서 밤늦도록 잠을 못잤다.
 
7월 10일 (기축) 맑다.[양력 8월 22일]
 
열과 변존서(卞存緖)를 보내려고 앉아서 날새기를 기다렸다가
일찌기 아침밥을 먹는데 정회를 스스로 억누르지 못해 통곡하며 보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까지 되었는가!
구례에서 온 말을 타고 가니 더욱 걱정이 된다.
열 등이 막 떠나자 종사관 황여일(黃汝一)도 와서
한 시간이 넘게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서철(徐徹)이 와서 봤다.
정상명(鄭翔溟)이 싸움터에 나가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의를 종이로써 만들기를 마쳤다.
저녁에 홀로 빈 집에 앉았으니,
마음이 끓어 올라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도록 뒤척거렸다.
 
7월 11일 (경인) 맑다.[양력 8월 23일]
 
열이 어떻게 갔는지 생각하고 있으니 견딜 수 없다.
더위가 너무도 심하여 걱정 뿐이다.
저녁나절에 변홍달(卞弘達)∙신제운(申霽雲)∙림중형(林仲亨)이 와서 봤다.
홀로 빈 대청에 앉았으니 그리움을 어찌하랴! 너무도 비통하다.
종 태문(太文)과 종이가 순천으로 갔다.
 
7월 12일 (신묘) 맑다.[양력 8월 24일]
 
아침에 합천이 햅쌀과 수박을 보냈다.
점심밥을 지을 적에 방응원(方應元)∙현응진(玄應辰)∙홍우공(洪禹功)
림영립(林英立) 등이 박명현(朴名賢)이 있는 곳에서 와서
같이 밥을 먹었다.
종 평세(平世)는 열을 따라갔다가 돌아왔다.잘 갔다고 하니 다행이다.
그러나 슬퍼서 탄식함을 어찌 말로써 하랴!
이희남(李喜男)이
사철쑥(더위지기,생당쑥; 입추때에 베어 말려
 냉, 황달,습열,간장염 등의 한약재로 씀) 백 묶음을 베어 왔다.
 
7월 13일 (임진) 맑다.[양력 8월 25일]
 
아침에 남해현령이 편지를 보내고, 음식물도 많이 보냈다고 하고,
또 싸움말(戰馬)을 몰고 가라고 하였다.
저녁나절에 이태수(李台壽)∙조신옥(趙信玉)∙홍대방(洪大邦)이 와서 보고,
또 적을 토벌할 일을 말하였다.
송대립(宋大立)∙장득홍(張得洪)도 왔다.
장득홍은 스스로 마련한 것이라고 아뢰었다.
그래서 양식 두 말을 내주었다.
이 날 칡을 캐어 왔다.이방도 와서 봤다.
남해 아전과 심부름꾼 두 명이 왔다.
 
7월 14일 (계사) 맑다.[양력 8월 26일]
 
이른 아침에 정상명(鄭翔溟)과 종 평세(平世)∙종 귀인(貴仁)이
짐말 두 필을 남해로 보냈다.
정(상명)은 싸움말(戰馬)을 끌고 올 일로 보낸 것이다.
새벽 꿈에 나는 체찰사와 같이 어느 곳에 이르니,
송장들이 쫙 깔려 있었는데 혹은 밟기도 하고 혹은 목을 베게도 했다.
아침밥을 먹을 때 문인수가 와가채(모시조개 음식)와
동아선(동아를 기름에 볶아 잣가루를 묻혀 겨자를 찍어 먹는 술안주)을
가져 왔다.방응원(方應元)∙윤선각(尹先覺)∙현응진(玄應辰)
홍우공(洪禹功) 등과 함께 이야기했다.
홍이라는 사람은 제 아버지의 병으로 종군하고 싶지 않아
팔이 아프다고 핑계하니 엄청 놀랍다.
오전 열시쯤에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은 정인서(鄭仁恕)를 보내어
문안했다.
또 김해 사람으로 왜놈에게 부역했던 김억(金億)의 편지를 보이는데,
 
"초7일 왜선 오백 여 척이 부산에서 나오고,
 초9일 왜선 천 척이 합세하여
 우리 수군과 절영도(부산시 영도구 영도) 앞 바다에서 싸웠는데,
 우리 전선 다섯 척이 표류하여 두모포에 닿았고,
 또 일곱 척은 간 곳이 없다."
 
고 하였다.그 말을 듣고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곧 종사관 황여일(黃汝一) 이 군사 점호하는 곳으로 달려 나가서
황 종사관과 상의하였다.그대로 앉아서 활 쏘는 것을 구경했다.
조금있으니 내가 타고 간 말을 홍대방(洪大邦)더러
달려보라고 했더니 잘 달렸다.
날씨가 비올 것 같아 돌아와 집에 이르자마자 비가 마구 쏟아졌다.
밤 열시 쯤에야 맑게 개이니 달빛이 낮보다 훨씬 더 밝았다.
쌓이는 그리움을 말할 수 없다.
 
7월 15일 (갑오) 비가 오락가락 하다.[양력 8월 27일]
 
저녁나절에 조신옥(趙信玉)∙홍대방(洪大邦) 등과 여기 있는
윤선각(尹先覺)까지 아홉 명을 불러 떡을 차려 먹었다.
가장 늦게 중군 이덕필(李德弼)이 왔다.저물어서 돌아갔다.
그에게서 우리 수군 스무 여 척이 적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으로 분통이 터진다.
한스럽기 짝이 없는 것은 왜적을 막아낼 방책이 없다는 것이다.
어두워서 비가 많이 내렸다.
 
7월 16일 (을미) 비오다 걷혔다 하면서
  종일 흐리고 맑지 않았다.[양력 8월 28일]
 
아침밥을 먹은 뒤에 손응남(孫應男)을 중군(이덕필)에게 보내어
수군의 소식을 알아보게 했더니 돌아와서 중군의 말을 전하는데,
좌병사의 긴급보고로 보아 불리한 일이 많다고 하면서
갖추다 말하지 않았다고 하였다.탄식할 일이다.
저녁나절에 변의정(卞義禎)이란 사람이 수박 두 덩이를 가지고 왔다.
그 꼬락서니가 어리석고도 용렬하다.
두멧골에 묻혀 사는 사람인지라 배우지 못하고 가난하다보니
저절로 그렇게 되는가 보다.
이 역시 거짓없고 인정이 두터운 태도이다.
이 날 낮에 이희남(李喜男)에게 칼을 갈게 했더니,
너무 잘들어 괴수 맨머리로 깎을만 했다.
소나기가 갑자기 쏟아졌다.
아들 열이 가는 길을 많이 생각하니 씁쓰레하다.
마음 속으로만 빌 뿐이다.
저녁에 영암군 송진면에 사는 사삿집 종 세남(世男)이
서생포에서 알몸으로 왔다.그 까닭을 물으니,
 
"7월 초4일에 전 병마사의 우후가 탄 배의 격군이 되어
 초5일에 칠천도에 이르러 정박하고, 6일 옥포에 들어왔다가,
 7일에는 날이 밝기 전에 말곶을 거쳐 다대포에 이르니,
 왜선 여덟 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우리의 여러 배들이 곧장 돌격하려는데,
 왜놈들은 몽땅 뭍으로 올라 가고 빈 배만 걸려 있어,
 우리 수군이 그것들을 끌어 내어 불질러 버리고,
 그 길로 부산 절영도 바깥 바다로 향하다가,
 마침 적선 일천 여 척이 대마도에서 건너 와서 서로 맞아 싸우려는데,
 왜선이 흩어져 달아나서 끝까지 섬멸할 수가 없었다.
 세남(世男)이 탔던 배와 다른 배 여섯 척은
 배를 제어할 수가 없어 표류되어 서생포 앞바다에 이르러
 상륙하려다가 모두 모두 살륙 당하였다.
 요행히 세남(世男)만은 혼자 숲속으로 기어 들어가
 간신히 목숨을 보존하여 여기까지 왔다"
 
고 했다.듣고 보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우리 나라에서 미더운 것은 오직 수군 뿐인데,
수군마저 이와같이 희망이 없게 되었으니,
거듭 생각할수록 분하여 간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선장 이엽(李曄)이 왜적에게 묶여 갔다고 하니, 더더욱 원통하다.
손응남(孫應男)이 집으로 돌아갔다.
 
7월 17일 (병신) 가끔 비가 내렸다.[양력 8월 29일]
 
아침에 이희남(李喜男)을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에게 보내어
세남(世男)의 말을 전했다.
저녁나절에 초계원이 벽견산성에서 와서 보고 돌아갔다.
송대립(宋大立)∙류황(柳滉)∙류홍(柳弘)∙장득홍(張得弘) 등이 와서 보고
날이 저물어서 돌아갔다.
변대헌(卞大獻)∙정운룡(鄭雲龍)∙득룡(得龍)∙구종(仇從) 등은
초계 아전인데 어머니 쪽의 같은 파 사람들로서 와서 봤다.
큰비가 종일 내렸다.
이름을 적지 않은 사령장을 신여길이 바다 가운데서 잃어버린 일로
심문받으러 갔다.경상순변사가 그 기록을 가져 갔다.
 
7월 18일 (정유) 맑다.[양력 8월 30일]
 
새벽에 이덕필(李德弼)∙변홍달(卞弘達)이 전하여 말하기를,
 
"16일 새벽에 수군이 몰래 기습공격을 받아
 통제사 원균(元均)∙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충청수사(최호) 및
 여러 장수와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었고, 수군이 대패했다."
 
고 했다.듣자하니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조금 있으니,
원수(권율)가 와서 말하되,
 
"일이 이 지경으로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고 말하고, 오전 열 시가 되어도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나는
 
"내가 직접 연해안 지방으로 가서 보고 듣고난 뒤에
 이를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라고 말하니, 원수가 기뻐하여 마지 않았다.
나는 송대립(宋大立)∙류황(柳滉)∙윤선각(尹先覺)∙방응원(方應元)
현응진(玄應辰)∙림영립(林英立)∙이원룡(李元龍)∙이희남(李喜男)
홍우공(洪禹功)과 함께 길을 떠나 삼가현에 이르니,
삼가현감이 새로 부임하여 나를 기다렸다.한치겸(韓致謙)도 왔다.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7월 19일 (무술) 종일 비가 내렸다.[양력 8월 31일]
 
오는 길에 단성의 동산 산성에 올라가 형세를 살펴보니,
매우 험하여 적이 엿볼 수가 없을 것 같다.그대로 단성현에서 잤다.
 
7월 20일 (기해) 종일 비가 내렸다.[양력 9월 1일]
 
아침에 권문임(權文任)의 조카 권이청(權以淸)이 와서 봤다.
단성현감도 와서 봤다.
오정때에 진주 정개산성(定介山城) 아래 강정에 이르니,
진주목사가 와서 봤다.
굴동(옥종면 문암리)의 이희만(李希萬)의 집에서 잤다.
 
7월 21일 (경자) 맑다.[양력 9월 2일]
 
일찍 떠나 곤양군에 이르니, 군수 이천추(李天樞)가 군에 있고,
백성들도 많이 본업에 힘써, 혹 이른 곡식을 거두어 들이기도 하고,
혹 보리밭을 갈기도 하였다.
낮에 점심을 먹은 뒤에 노량에 이르니,
거제현령 안위(安衛)∙영등포만호 조계종(趙繼宗) 등 여나믄 명이 와서
통곡하였으며, 피하여 나온 군사와 백성들이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경상수사(배설)는 도망가 보이지 않고,
우후 이의득(李義得)이 와서 보므로 패하던 정황을 물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되,
 
"대장 원균(元均)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났다.
  여러 장수들도 힘써 뭍으로 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
 
는 것이었다.그것은 대장의 잘못을 말한 것인데
입으로는 형용할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도 씹어 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거제 배 위에서 자면서 거제현령 안위(安衛)와 함께 이야기했다.
밤 세 시(四更)가 되어도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그 바람에 눈병이 생겼다.
 
7월 22일 (신축) 맑다.[양력 9월 3일]
 
아침에 경상수사 배설(裵楔)이 와서 보고,
원균(元均)의 패망하던 일을 많이 말했다.
식사를 한 뒤에 남해현감 박대남(朴大男)이 있는 곳에 이르니,
병세가 거의 구할 수 없게 되었다.
싸움말을 서로 바꿀 일을 다시 이야기했다.
종 평세(平世)와 군사 한 명을 데리고 왔다고 했다.
오후에 곤양에 이르니, 몸이 불편하므로 잤다.
 
7월 23일 (임인) 비가 오락가락 하다.[양력 9월 4일]
 
아침에 노량에서 했던 공문을 송대립(宋大立)에게 부쳐
먼저 원수부에 갖다 주게 하고,
곧 뒤따라 떠나 십오리원(곤명면 봉계리)에 이르니,
백기 배흥립(裵興立)의 부인이 먼저 와 있었다.
말에서 내려 잠깐 쉬었다.
진주 굴동의 전에 묵었던 곳에 이르러 잤다.
백기 배흥립(裵興立)도 와서 잤다.
 
7월 24일 (계묘) 비가 그침없이 내렸다.[양력 9월 5일]
 
한치겸(韓致謙)∙이안인(李安仁)이 부찰사에게로 돌아갔다.
정씨의 종 예손과 손씨의 종이 같이 돌아갔다.
식사를 한 뒤에 이홍훈(李弘勛)의 집으로 옮겼다.
방응원(方應元)이 정개산성에서 와서,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정개산성에 이르렀다"
 
고 전하고, 연해안 사정을 듣고 본대로 전하더라는 것이다.
군량 스무 말, 말 먹이 콩 스무 말, 말 대갈 일곱 벌을 가져 왔다.
이 날 저녁에 조방장 배경남(裵慶男)이 와서 보기에 술로써 위로했다.
 
7월 25일 (갑진) 저녁나절에야 맑다.[양력 9월 6일]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편지를 보내어 문안했다.
조방장 김 언공이 와서 보고서는 그 길로 원수부로 갔다.
배수립(裵樹立)이 와서 보고, 이곳 주인 이홍훈(李弘勛)이 와서 봤다.
남해현령 박대남(朴大男)이 자기의 종 용산(龍山)을 보내어
내일 들어오겠다고 전했다.
저녁에 가서 백기 배흥립(裵興立)의 병을 보니,
고통이 극도로 심했다.걱정이다.
송득운(宋得運)을 보내어 황종사관에게 문안했다.
 
7월 26일 (을사) 비가 오락가락 하다.[양력 9월 7일]
 
일찍 밥을 먹고 정개산성 아래에 있는 송정 아래로 가서
종사관 황여일(黃汝一)과 진주목사와 함께 이야기했다.
날이 늦어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7월 27일 (병오) 종일 비가 내렸다.[양력 9월 8일]
 
이른 아침에 정개산성 건너편 손경례(孫景禮)의 집으로 옮겨 가서
머물렀다.
저녁나절에 동지 이천(李薦)과 판관 정제(鄭霽)가
체찰사에게서 와서 전령을 전했다.같이 저녁밥을 먹었다.
이 동지는 배 조방장에게 가서 잤다.
 
7월 28일 (정미) 비가 내렸다.[양력 9월 9일]
 
이희량(李希良)이 와서 봤다.
초저녁에 동지 이천(李薦) 및 진주목사와
소촌찰방 이시경(李蓍慶)이 와서 왜적과 맞싸울 대책을 논의했다.
밤에 이야기하다가 자정이 지나서 돌아갔다.
의논한 것은 모두 계책을 돕는 일이었다.
 
7월 29일 (무신) 비가 오락가락 하다.[양력 9월 10일]
 
아침에 이군거(李君擧:薦의 字) 영감과 함께 밥을 먹고
체찰사 앞으로 보냈다.
저녁나절에 냇가로 나가 군사를 점검하고, 말을 달리는데,
원수가 보낸 자들은 모두 말도 없고 또 활과 화살도 없으니,
아무 쓸 데가 없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
저녁에 돌아올 때 배 동지와 남해현령 박대남(朴大男)에게 들려 봤다.
밤 내내 큰비가 왔다.
찰방 이시경(李蓍慶)에게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8.정유년 8월 (1597년 8월)
 
8월 초1일 (기유) 큰비가 와서 물이 넘쳤다.[양력 9월 11일]
 
저녁나절에 소촌찰방 이시경(李蓍慶)이 와서 봤다.
조신옥(趙信玉)∙홍대방(洪大邦) 등이 와서 봤다.
 
8월 초2일 (경술) 잠시 개었다.[양력 9월 12일]
 
홀로 수루의 마루에 앉았으니 그리움을 어찌하랴! 비통할 따름이다.
이날 밤 꿈에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었다.
 
8월 3일 (신해) 맑다.[양력 9월 13일]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梁護)가 뜻밖에 교유서를 가지고 왔다.
명령은 곧 경삼도수군통제사의 임명이다.
숙배를 한 뒤에 다만 받들어 받았다는 글월을 써서 봉하고,
곧 떠나 두치(豆恥)로 가는 길로 곧 바로 갔다.
초저녁에 행보역(하동군 횡천면 여의리)에 이르러 말을 쉬고,
한밤 12시에 길을 떠나 두치에 이르니, 날이 새려했다.
남해현령 박대남(朴大男)은 길을 잘못 들어
강정(江亭: 하동읍 서해량 홍수통제소 서쪽 섬진강가)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 기다렸다가 불러와서, 쌍계동에 이르니,
길에 돌이 어지러이 솟아있고, 비가 와 물이 넘쳐 흘러 간신히 건넜다.
석주관(구례군 토지면 송정리)에 이르니,
이원춘(李元春)과 류해가 복병하여 지키다가 나를 보고
적을 토벌할 일을 많이 말했다.
저물어서 구례현에 이르니, 일대가 온통 쓸쓸하다.
성 북문(구례읍 북봉리) 밖에 전날의 주인 집으로 가서 잤는데,
주인은 이미 산골로 피난 갔다고 했다.
손인필(孫仁弼)은 바로 와서 볼겸하여 곡식까지 가져 왔다.
손응남(孫應男)은 올감(早柿)을 바쳤다.
 
8월 4일 (임술) 맑다.[양력 9월 14일]
 
□□을 보내 왔다.다시 들어와 관청을 보았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압록강원(곡성군 오곡면 압록리)에 이르러
점심밥을 짓고 말의 병을 고쳤다.
고산현감 최진강(崔鎭剛)이 군인을 교체 할 일로 와서
수군의 일을 많이 말했다.
낮에 곡성(곡성군 곡성읍 읍내리 713-2번지)에 이르니,
관청(곡성현감:崔忠儉)과 여염집이 한결같이 비어 있고,
사람사는 기척이 끊어졌다.
이 일대에는 온통 비어있고 말 먹일 풀도 구하기 어려웠다.
그 현청에서 잤다.
남해현령 박대남(朴大男)은 곧장 남원으로 갔다.
 
8월 5일 (계해) 맑다.[양력 9월 15일]
 
거느리고 온 군사를 인계할 곳이 없다고 하면서
이제 이원에 이르러 병마사가 경솔히 물러난 것을 원망하는 것이었다.
아침을 먹은 뒤에 옥과(곡성군 옥과읍) 땅에 이르니,
피난민이 길에 가득 찼다.남자와 여자가 부축하고 걸어가는 것이
차마 볼 수 없었다.
울면서 말하기를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우리들은 이제야 살았다'고 했다.
길가에 큰 홰나무 정자가 있기에 말에서 내려 타일렀다.
옥과현에 들어갈 때, 순천에서 이기남(李奇男)의 부자를 만나
함께 현에 이르니, 정사준(鄭思竣)∙정사립(鄭思立)이 와서 마중 했다.
옥과현감(홍요좌)은 병을 핑계 삼아 나오지 않았다.
잡아다 죄주려 하니 그제야 나와서 봤다.
 
8월 6일 (갑자) 맑다.[양력 9월 16일]
 
이 날은 옥과에서 머물렀다.
초저녁에 송대립(宋大立)이 적을 정탐하고 왔다.
 
8월 7일 (을축) 맑다.[양력 9월 17일]
 
일찍 길을 떠나 곧장 순천으로 갔다.
고을에서 십리쯤 되는 길에서 선전관 원집(元潗)을 만나
임금의 분부를 받았다.
길 옆에 앉아서 읽어보니 병마사가 거느렸던 군사들이
모두 패하여 돌아가는 길이 줄을 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 세 필과 활과 살을 약간 빼앗아 왔다.
곡성현 석곡 강정(석곡면 능파2구 능암리 3490번지 일대)에서 잤다.
 
8월 8일 (병인) [양력 9월 18일]
 
곧바로 부유창으로 가다가 중도에서 이형립(李亨立)을
병마사에게로 보냈다.
새벽에 떠나 부유창(순천시 주암면 창촌리)에서 아침밥을 먹는데,
이곳은 병마사 이복남(李福男)이 이미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불을 질렀다.다만 타다 남은 재만 있어 보기에도 처참하였다.
광양현감 구덕령(具德齡)∙나주판관 원종의(元宗義)∙옥구원(홍요좌) 등이
창고바닥에 숨어 있다가 내가 왔단 말을 듣고 배경남(裵慶男)과 함께
구치(鳩峙: 순천시 주암면 행정리 접치마을)로 급히 달아났다.
내가 말에서 내려 곧 전령을 내렸더니, 한꺼번에 와서 절을 하였다.
나는 피해 돌아 다니는 것을 들추어서 꾸짖었더니,
다들 그 죄를 병사 이복남(李福男)에게로 돌리었다.
곧 길을 떠나 순천에 이르니, 성 안팎에 사람 발자취가 하나도 없어
적막했다.오직 절에 있는 중 혜희(慧熙)가 와서 알현하므로
의병장의 사령장을 주었다.
저물어서 순천에 이르니 관사와 곳간의 곡식 및 군기 등
물건은 옛날과 같다.
병마사가 처치하지 않은 채 달아났다.참으로 놀랄 일이었다.
총통같은 것은 옮겨 묻고, 장전(長箭)과 편전(片箭)은
군관들이 져 나르게 하고, 총통과 운반하기 어려운 것들은
깊이 묻고 표를 세웠다.
그대로 순천부사가 있는 방에서 머물러 잤다.
 
8월 9일 (정묘) 맑다.[양력 9월 19일]
 
일찍 떠나 낙안군에 이르니,
오리까지나 사람들이 많이 나와 환영하였다.
백성들이 달아나고 흩어진 까닭을 물으니, 모두 하는 말이,
 
"병마사가 적이 쳐들어 온다고 퍼뜨리며 창고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
 그 때문에 이와같이 백성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고 했다.관청에 들어가니 적막하여 사람의 소리가 없었다.
순천부사 우치적(禹致績)∙김제군수 고봉상(高鳳翔) 등이 와서,
산골에서 내려와서, 병마사의 처사가 뒤죽박죽 이었다고 말하면서
하는 짓을 짐작했다고 하니, 패망한 것을 알만하다.
관청과 창고가 모두 다 타버리고 관리와 마을 사람들이
흐르는 눈물을 가누지 못하고서 말하였다.
점심을 먹은 뒤에 길을 떠나 십리쯤 오니,
길가에 동네 어른들이 늘어서서 술병을 다투어 바치는데,
받지 않으면 울면서 억지로 권했다.
저녁에 보성군 조양창(조성면 조성리)에 이르니,
사람은 하나도 없고, 창고에는 곡식이 묶여진 채 그대로였다.
그래서, 군관 네 명을 시켜 지키게 하고,
나는 김안도(金安道)의 집에서 잤다.
그 집 주인은 벌써 피난나가 버렸다.
 
8월 10일 (무진) 맑다.[양력 9월 20일]
 
몸이 몹시 불편하여 그대로 김안도(金安道)의 집에 머물렀다.
동지 배흥립(裵興立)도 같이 머물렀다.
 
8월 11일 (기사) 맑다.[양력 9월 21일]
 
아침에 박곡(朴谷) 양상원(梁山沅)의 집으로 옮겼다.
이 집 주인도 벌써 바다로 피란갔고 곡식은 가득 쌓여 있었다.
저녁 나절에 송희립(宋希立)∙최대성(崔大晟)이 와서 봤다.
 
8월 12일 (경오) 맑다.[양력 9월 22일]
 
아침에 장계를 초잡고 그대로 머물렀다.
저녁나절에 거제현령(안위)∙발포만호(소계남)가 들어와 명령을 들었다.
그들 편에 경상수사 배설(裵楔)의 겁내던 꼴을 들으니,
더욱 한탄 스러움을 이길 길이 없다.
권세 있는 집안에 아첨이나 하여 감당해내지도 못할 지위에까지 올라
나랏일을 크게 그릇치건마는 조정에서 살피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하랴,
어찌하랴. 보성군수가 왔다.
 
8월 13일 (신미) 맑다.[양력 9월 23일]
 
거제현령 안위(安衛) 및 발포만호 소계남(蘇季男)가 와서 인사하고
돌아갔다.수사(배설)와 여러 장수 및 피해 나온 사람들이
머무는 곳을 들었다.
우후 이몽구(李夢龜)가 전령을 받고 들어 왔는데,
본영의 군기를 하나도 옮겨 실어 오지 않은 죄로
곤장 여든 대를 쳐서 보냈다.
하동현감 신진(申 )이 와서,
 
"초3일에 내가 떠난 뒤에 진주 정개산성과 벽견산성도 풀어 흩어지니
 병마사가 바깥 진(外陣)을 제 손으로 불을 질렀다."
 
고 전하였다.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8월 14일 (임신) [양력 9월 24일]
 
아침에 각각으로 장계 일곱 통을 봉하여
윤선각(尹先覺)으로 하여금 지니고 가게 했다.
저녁에 어사 임몽정(任夢正)을 만나러 보성에 갔다가 열선루에서 잤다.
밤에 큰비가 쏟아지듯 내렸다.
 
8월 15일 (계유) 비 오다가 저녁나절에 맑게 개었다.[양력 9월 25일]
 
식사를 하고 난 뒤에 열선루 위에 앉아 있으니,
선전관 박천봉(朴天鳳)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그것은 8월 7일에 만들어진 공문이었다.
영의정은 경기 지방으로 나가 순시중이라고 했다.
곧 잘 받들어 받았다는 장계를 썼다.
보성의 군기를 검열하여 네 말에 나누어 실었다.
저녁에 밝은 달이 수루 위를 비추니 심회가 편치 않았다.
술을 너무많이 마셔 잠을 자지 못했다.
 
8월 16일 (갑술) 맑다.[양력 9월 26일]
 
아침에 보성군수와 군관 등을 굴암으로 보내어 도피한 관리들을
찾아 오게 했다.선전관 박천봉(朴天鳳)이 돌아갔다.
그래서 나주 목사와 어사 임몽정에게 답장을 부쳤다.
박사명(朴士明)의 집에 심부름꾼을 보냈더니,
박사명의 집은 이미 비어 있었다고 한다.
오후에 활장이 지이(智伊)와 태귀생(太貴生)∙선의(先衣)∙대남(大男)등이
들어왔다.김희방(金希方)∙김붕만(金鵬萬)이 뒤따라 왔다.
 
8월 17일 (을해) 맑다.[양력 9월 27일]
 
아침식사를 하고 나서,
장흥땅 백사정(장흥읍 원도리)에 이르러 말을 먹였다.
점심을 먹은 뒤에 군영구미(장흥군 안양면 해창리)에 이르니,
일대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어 버렸다.
수사 배설(裵楔)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
장흥의 군량감관과 색리가 군량을 맘대로 모조리 훔쳐 나누어 갈 적에
마침 그 때 이르러 잡아다가 호되게 곤장을 쳤다.
거기서 잤다.배설(裵楔)의 약속을 어기는 것이 괘씸하다.
 
8월 18일 (병자) 맑다.[양력 9월 28일]
 
늦은 아침에 곧바로 회령포에 갔더니,
경상수사 배설(裵楔)이 멀미를 핑계를 대므로 보지 않았다.
다른 장수는 보았다.회령포 관사에서 잤다.
 
8얼 19일 (정축) 맑다.[양력 9월 29일]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를 하는 데,
경상수사 배설(裵楔)은 받들어 숙배하지 않았다.
그 업신 여기고 잘난 체 하는 꼴을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너무도 놀랍다.
이방(吏房)과 그 영리(營吏)에게 곤장쳤다.
회령포만호 민정붕(閔廷鵬)이 그 전선(戰船)에서 받은 물건을
사사로이 피란인 위덕의(魏德毅) 등에게 준 죄로 곤장 스무 대를 쳤다.
 
8월 20일 (무인) 맑다.[양력 9월 30일]
 
앞 포구가 몹시 좁아서
진을 이진(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으로 옮겼다.
창고로 내려가니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음식도 먹지 않고 앓았다.
 
8월 21일 (기묘) 맑다.[양력 10월 1일]
 
날이 채 새기 전에 도와리가 일어나 몹시 앓았다.
몸을 차게 해서 그런가 싶어 소주를 마셨더니
한참동안 인사불성이 되었다.하마트면 깨어나지 못할 뻔했다.
토하기를 10여 차례나 하고 밤을 앉아서 새웠다.
 
8월 22일 (경진) 맑다.[양력 10월 2일]
 
도와리가 점점 심하여 일어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8월 23일 (신사) 맑다.[양력 10월 3일]
 
병세가 무척 심해져서 정박하여 배에서 지내기가 불편하므로
 배타는 것을 포기하고 바다에서 나와서 (뭍에서) 잤다.
 
8월 24일 (임오) 맑다.[양력 10월 4일]
 
아침에 도괘땅(刀掛浦)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었다.
낮에 어란 앞바다에 이르니, 가는 곳마다 텅텅 비었다.
바다 위에서 잤다.
 
8월 25일 (계미) 맑다.[양력 10월 5일]
 
그대로 어란포에서 머룰렀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당포의 보자기가 놓아둔 소를 훔쳐 끌고 가면서,
 "적이 쳐들어 왔다.적이 쳐들어 왔다." 고 헛소문을 내었다.
나는 이미 그것이 거짓말일줄 알고 헛소문을 낸 두 사람을 잡아다가
곧 목을 베어 효시하니, 군중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8월 26일 (갑신) 맑다.[양력 10월 6일]
 
그대로 어란 바다에 머물렀다.
저녁나절에 임준영(任俊英)이 말을 타고 와서 급히 보고하는데,
 
"적선(賊船)이 이진(梨津)에 이르렀다"
 
고 했다.전라우수사가 왔다.배의 격군과 기구를 갖추지 못했으니
그 꼬락서니가 놀랍다.
 
8월 27일 (을유) 맑다.[양력 10월 7일]
 
그대로 어란 바다 가운데 있었다.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이 와서 보는데, 많이 두려워하는 눈치다.
나는 불쑥
 
"수사는 어디로 피해 갔던게 아니오!"
 
라고 말하였다.
 
8월 28일 (병술) 맑다.[양력 10월 8일]
 
새벽 여섯시 쯤에 적선 여덟 척이 뜻하지도 않았는 데 들어왔다.
여러 배들이 두려워 겁을 먹고,
경상수사(배설)는 피하여 물러나려 하였다.
나는 꼼짝하지 않고 적선이 바짝 다가오자
호각을 불고 깃발을 휘드르며 따라 잡도록 명령하니,
적선이 물러갔다.뒤쫓아 갈두(葛頭: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까지 갔다가
돌아왔다.적선이 멀리 도망하기에 더 뒤쫓지 않았다.
뒤따르는 배는 쉰여 척이라 고 했다.
저녁에 진을 장도(노루섬)로 옮겼다.
 
8월 29일 (정해) 맑다.[양력 10월 9일]
 
아침에 건너왔다.벽파진(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대었다.
 
8월 30일 (무자) 맑다.[양력 10월 10일]
 
그대로 벽파진에서 머물렀다.정탐꾼을 나누어 보냈다.
저녁나절에 배설(裵楔)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그 관할 아래의 장수들이 찾기도 하고,
나도 그 속뜻을 알고 있지만, 딱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로서 할 도리가 아니므로 참고 있을 즈음에,
배설(裵楔)이 제 종을 시켜 솟장을 냈는데,
병세가 몹시 중하여 몸조리 좀 해야 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뭍으로 내려 몸조리하고 오라고 공문을 써 보냈더니,
배설(裵楔)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
 
 
9.정유년 9월 (1597년 9월)
 
9월 초1일 (기축) 맑다.[양력 10월 11일]
 
그대로 벽파진에 머물렀다.나는 내려가 벽파정위에 앉았는데,
점세(占世)가 탐라에서 나와서 소 다섯 마리를 싣고 와서 바쳤다.
 
9월 2일 (경인) 맑다.[양력 10월 12일]
 
오늘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裵楔)이 도망갔다.
 
9월 3일 (신묘) 아침에 맑았다가 저녁에 비가 뿌렸다.[양력 10월 13일]
 
밤에는 된바람이 불었다.
봉창아래에서 머리를 웅크리고 있으니 그 심사가 어떠하랴!
 
9월 4일 (임진) 맑은데, 된바람이 세게 불었다.[양력 10월 14일]
 
배가 가만히 있지 못해서 각 배들을 겨우 보전했다.천행이다.
 
9월 5일 (계사) 된바람이 세게 불었다.[양력 10월 15일]
 
각 배를 서로 보전할 수가 없었다.
 
9월 6일 (갑오) [양력 10월 16일]
 
바람은 조금 자는 듯 했으나, 물결은 가라앉지 앉았다.
추위가 엄습하니 격군들 때문에 걱정이다.
 
9월 7일 (을미) 맑다.바람이 비로소 그쳤다.[양력 10월 17일]
 
탐망군관 림중형(林仲亨)이 와서 보고하기를,
 
"적선 쉰다섯 척 가운데 열세 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도착했다.
 그 뜻이 우리 수군에 있는 것 같다."
 
고 했다.그래서 각 배들에게 엄중히 일러 경계하였다.
오후 네 시쯤에 적선 열세 척이 곧장 진치고 있는 곳으로
우리 배로 향해 왔다.
우리 배들도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 맞서서 공격하여 급히 나아가니,
적들이 배를 돌려 달아나 버렸다.뒤 쫓아 먼 바다에까지 갔지만,
바람과 조수가 모두 거슬러 흘러(逆流) 항해할 수가 없어
복병선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더 쫓아가지 않고 벽파진으로 돌아왔다.
이 날 밤에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며 말하기를,
 
"오늘 밤에는 반드시 아무래도 적의 야습이 있을 것 같아,
 여러 장수 들은 미리 알아서 준비할 것이며,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군법대로 시행할 것이라"
 
고 재삼 타일러 분명히 하고서 헤어졌다.
밤 열 시쯤에 적선이 포를 쏘며 기습으로 공격해 왔다.
우리의 여러 배들이 겁을 집어 먹는 것 같아 다시금 엄명을 내리고,
내가 탄 배가 곧장 적선 앞으로 가서 지자포를 쏘니 강산이 진동했다.
그랬더니 적의 무리는 당해 내지 못하고
네 번이나 나왔다 물러났다 하면서 포를 쏘아댔다.
밤 한시가 되니 아주 물러 갔다.
이들은 전에 한산도에서 승리를 얻은 자들이다.
 
9월 8일 (병신) 맑다.[양력 10월 18일]
 
적선이 오지 않았다.여러 장수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우수사 김억추(金億秋)는 겨우 만호깜이나 맞을까
대장으로 쓰일 재목은 못되는 데도 좌의정 김응남(金應南)이
서로 친밀한 사이라고 해서 억지로 임명하여 보냈다.
이러고서야 조정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다만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뿐이다.
 
9월 9일 (정유) 맑다.[양력 10월 19일]
 
오늘이 곧 9일(중양절)이다. 군대 전부에게도 좋은 명절이다.
나는 복재기(喪制)이지만 여러 장병들에게야 먹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제주에서 나온 소 다섯 마리를
녹도와 안골포 두 만호에게 주어서 장병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있는 데,
저녁나절에 적선 두 척이 어란포에서 바로 감보도(진도군 고군면)로
들어와 우리 배의 많은지 적은지를 정탐했다.
영등포만호 조계종이 끝까지 따라 갔더니,
적들은 어리둥절하여 배에 실었던 물건을
 몽땅 바다 가운데로 던져버리고 달아났다.
 
9월 10일 (무술) 맑다.[양력 10월 20일]
 
적선들이 멀리 달아났다.
 
9월 11일 (기해) 흐리고 비가 올 것 같다.[양력 10월 21일]
 
홀로 배 위에 앉았으니, 그리운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세상에 어찌 나같은 사람이 있겠는가!
아들 회는 내 심정을 알고 심히 언짢아 하였다.
 
9월 12일 (경자) 종일 비가 뿌렸다.[양력 10월 22일]
 
봉창 아래서 심회를 걷잡을 수가 없었다.
 
9월 13일 (신축) 맑은데 된바람이 세게 불었다.[양력 10월 23일]
 
배가 가만 있지를 못했다.꿈이 이상하다.
임진년에 대첩했을 때와 얼추 같다.이 징조를 모르겠다.
 
9월 14일 (임인) 맑다.[양력 10월 24일]
 
벽파정 맞은편에서 연기가 오르기에 배를 보내어 싣고 오니
바로 임준영(任俊英)이 육지를 정탐하고 와서 말하기를,
 
"적선 이백 여 척 가운데 쉰다섯 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들어왔다."
 
고 하였다.또 말하기를,
 
"적에게 사로잡혔던 김중걸(金仲乞)이 전하는데,
 이 달 6일에 달마산으로 피난갔다가 왜놈에게 붙잡혀 묶여서는
 왜선에 실렸습니다.
 김해에 사는 이름 모르는 한 사람이 왜장에게 빌어서
 묶인 것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 날 밤에 김해 사람이 김중걸(金仲乞)의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왜놈들이 모여 의논하는 말이,
 `조선 수군 열 여 척이 왜선을 추격하여 사살하고 불태웠으므로
 할 수 없이 보복해야 하겠다.극히 통분하다.
 각 처의 배를 불러 모아 조선 수군들을 모조리 죽인 뒤에
 한강으로 올라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는 것이었다.이 말은 비록 모두 믿기는 어려우나,
그럴 수도 없지 않으므로,
전령선을 우수영으로 보내어 피난민들을 타일러
곧 뭍으로 올라 가라고 하였다.
 
9월 15일 (계묘) 맑다.[양력 10월 25일]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벽파정 뒤에는 울돌목이 있는데 수가 적은 수군으로써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면서 이르되,
 
"병법에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고 했으며,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이라도 두렵게 한다'고 했음은
 지금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살려는 생각은 하지 마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면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조금이라도 너그럽게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 했다.이 날 밤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 고 일러 주었다.
 
9월 16일 (갑진) 맑다.[양력 10월 26일]   < 명량대첩 >
 
아침에 별망군이 나와서 보고하는데,
적선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울돌목을 거쳐
곧바로 진치고 있는 곳으로 곧장 온다고 했다.
곧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백서른세 척이 우리의 여러 배를 에워쌌다.
대장선이 홀로 적진 속으르 들어가
포탄과 화살을 비바람같이 쏘아대건만 여러 배들은 관망만 하고
진군하지 않아 사태가 장차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여러 장수들이 적은 군사로써 많은 적을 맞아 싸우는 형세임을 알고
돌아서 피할 궁리만 했다.
우수사 김억추(金億秋)가 탄 배는 물러나 아득히 먼 곳에 있었다.
나는 노를 바삐 저어 앞으로 돌진하여 지자총통∙현자총통 등
각 종 총통을 어지러이 쏘아대니, 마치 나가는 게 바람같기도 하고
우레 같기도 하였다.
군관들이 배 위에 빽빽히 서서 빗발치듯이 쏘아대니,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하곤 했다.
그러나 적에게 몇겹으로 둘러 싸여 앞으로 어찌 될지
한 가진들 알 수가 없었다.
배마다의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며 얼굴빛을 잃었다.
나는 침착하게 타이러면서,
 
"적이 비록 천 척이라도 우리 배에게는 감히
 곧바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다.
 일체 마음을 동요치 말고 힘을 다하여 적선에게 쏴라."
 
고 하고서, 여러 장수들을 돌아보니, 물러나 먼 바다에 있었다.
나는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자니 적들이 더 대어들 것 같아
나아 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호각을 불어서 중군에게 명령하는 깃발을 내리고
또 초요기를 돛대에 올리니, 중군장미 조항첨사 김응함(金應 )의 배가
차차로 내 배에 가까이 오고, 거제현령 안위(安衛)의 배가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몸소 안위(安衛)를 불러 이르되,
 
"안위(安衛)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너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해서 어디 가서 살것 같으냐?"
 
고 하니, 안위(安衛)가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했다.
또 김응함(金應 )을 불러 이르되,
 
"너는 중군장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한다."
 
고 하니, 두 배가 곧장 쳐들어가 싸우려 할 때,
적장이 그 휘하의 배 두 척을 지휘하여 한꺼번에 개미 붙듯이
안위(安衛)의 배로 매달려 서로 먼저 올라 가려고 다투었다.
안위(安衛)와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이 죽을 힘을 다하여
몽둥이로 치기도 하고, 긴창으로 찌르기도 하고,
수마석 덩어리로 무수히 어지러이 싸우니 배 위의 사람들은
기진맥진하게 된데다가,
안위(安衛)의 격군 일여덟 명이 물에 뛰어들어 헤엄치는데
거의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배를 돌려 곧장 쳐들어가 빗발치듯 어지러이 쏘아대니,
적선 세 척이 얼추 엎어지고 자빠지는데
녹도만호 송여종(宋汝悰)∙평산포대장 정응두(丁應斗)의 배가
줄이어 와서 합력하여적을 쏘아 한 놈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항복해온 왜놈 준사(俊沙)란 놈은 안골포의 적진에서 투항해온 자이다.
내 배위에서 내려다 보며,
 
"저 무늬 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놈이 적장 `마다시'다"
 
고 하였다.나는 김돌손(金乭孫)으로 하여금 갈구리를 던져
이물로 끌어 올렸다.그러니 준사는 펄쩍 뛰며,
 
"이게 마다시다"
 
고 하였다.그래서, 곧 명령하여 토막으로 자르게 하니,
적의 기운이 크게 꺾여 버렸다.
이 때 우리의 여러 배들은 적이 다시는 침범해오지 못할 것을 알고
일제히 북을 치며 나아가면서 지자총통∙현자총통 등을 쏘고,
또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그 소리가 바다와 산을 뒤흔들었다.
우리를 에워 싼 적선 서른 척을 쳐 부수자,
적선들은 물러나 달아나 버리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다.
그곳에 머무르려 했으나 물살이 무척 험하고 형세도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건너편 포구로 새벽에 진을 옮겼다가,
당사도(무안군 암태면)로 진을 옮기어 밤을 지냈다.
이것은 참으로 천행이다.
 
9월 17일 (을사) 맑다.[양력 10월 27일]
 
어외도(於外島:무안군 지도면)에 이르니,
피난선이 무려 삼백 여 척이 먼저 와 있었다.
임치첨사는 배에 격군이 없어 나오지 못한다고 했다.
나주진사 림선(林 )∙림환(林 )∙림업(林 ) 등이 와서 봤다.
우리 수군이 대첩한 것을 알고 서로 앞다투어 치하하고,
또 많은 양식을 가져와 군사들에게 주었다.
 
9월 18일 (병오) 맑다.[양력 10월 28일]
 
그대로 어외도에서 머물렀다.임치첨사가 왔다.
내 배에서는 순천감목관 김탁과 본영의 종 계생(戒生)이
탄환에 맞아 죽고, 박영남(朴永男)과 봉학(奉鶴) 및
강진현감 이극신(李克新)도 탄환에 맞았으나,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다.
 
9월 19일 (정미) 맑다.[양력 10월 30일]
 
일찍 떠나 출항했다.
바람도 순하고 물살도 순조를 타 무사히
칠산(七山: 영광군 낙월면) 바다를 건넜다.
저녁에 법성포(영광군 법성면) 선창에 이르니,
흉악한 적들이 육지로 해서 들어와 사람사는 집과 창고에 불을 질렀다.
해질 무렵에 홍농(弘農: 영광군 홍농면) 앞에 이르러,
배를 정박시키고 잤다.
 
9월 20일 (무신) 맑고 바람도 순조로왔다.[양력 10월 30일]
 
새벽에 출항하여 곧장 위도(蝟島: 영광군 위도면)에 이르니,
피난선이 많이 정박해 있었다.
황득중(黃得中)과 종 금이(金伊) 등을 보내어 종 윤금(允金)을 찾아서
잡아오라고 했더니, 과연 위도 밖에 있었다.
그래서 묶어다가 배 안에 실었다.
이광축(李光軸)∙이광보(光輔)가 와서 봤다.
이지화(李至和) 부자가 또 와서 봤다.날이 저물어서 잤다.
 
9월 21일 (기유) 맑다.[양력 10월 31일]
 
일찍 떠나 고군산도(옥구군 미면 선유도)에 이르니,
호남순찰사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배를 타고 급히 옥구로 갔다고 하였다.
저녁나절에 광풍이 세게 불었다.
 
9월 22일 (경술) 맑은데, 된바람이 세게 불었다.[양력 11월 1일]
 
그대로 머물렀다.
나주목사 배응경(裵應 )∙무장현감 이람(李覽)이 와서 봤다.
 
9월 23일 (신해) 맑다.[양력 11월 2일]
 
승첩한 장계의 초본을 수정했다.정희열(丁希悅)이 와서 봤다.
 
9월 24일 (임자) 맑다.[양력 11월 3일]
 
몸이 불편하여 신음했다.김홍원(金弘遠)이 와서 봤다.
 
9월 25일 (계축) 맑다.[양력 11월 4일]
 
이 날 밤에 몸이 몹시 불편하고, 식은 땀이 온 몸을 적셨다.
 
9월 26일 (갑인) 맑다.[양력 11월 5일]
 
몸이 불편하여 종일 나가지 않았다.
이 날 밤에는 식은 땀이 온몸을 적셨다.
 
9월 27일 (을묘) 맑다.[양력 11월 6일]
 
송한(宋漢)∙김국(金國)∙배세춘(裵世春) 등이 승첩장계를 가지고
뱃길로 올라 갔다.
정제(鄭霽)는 충청수사에게 부찰사로 보낼 공문을 가지고 같이 같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밤내내 아팠다.
 
9월 28일 (병진) 맑다.[양력 11월 7일]
 
송한(宋漢)과 정제(鄭霽)가 바람에 막혀 되돌아 왔다.
 
9월 29일 (정사) 맑다.[양력 11월 8일]
 
송한(宋漢) 등 계본(啓本)∙장달(狀達)을 가진 사람 및
판관 정제(鄭霽)는 바람이 순조로와 도로 올라갔다.
 
 
10.정유년 10월 (1597년 10월)
 
10월 초1일 (무오) 맑다.[양력 11월 9일]
 
아들 회(薈)를 보내서 제 어미를 보고 여러 집안의 생사(生死)를
알아 오게 하였다.심회가 몹시 안달나서 편지를 쓸 수 없었다.
병조(兵曹)의 역꾼이 공문을 가지고 내려 왔는 데,
 
"아산 고향의 한 집안이 이미 적에게
  불타 잿더미가 되어 남은 게 없다."
 
고 한다.
 
10월 2일 (기미) 맑다.[양력 11월 10일]
 
아들 회가 집안 사람들의 생사를 알아볼 일로 배를 타고 올라 갔으나,
잘 갔는지 못 갔는지 알 수가 없다.
내 심정을 어찌 다 말하랴.홀로 배 위에 앉았으니 심회가 만갈래였다.
 
10월 3일 (경신) 맑다.[양력 11월 11일]
 
새벽에 출항하여 변산을 거쳐 곧바로 법성포로 되돌아 가는데
바람은 부드러워 따뜻하기가 봄날 같았다.
저물어서 법성포 선창 앞에 이르렀다.
 
10월 4일 (신유) 맑다.[양력 11월 12일]
 
그대로 머물러 잤다.
림선(林 )∙업 등이 사로잡혔다가 적에게 빌어 임치로 돌아와서
편지를 보내왔다.
 
10월 5일 (임술) 맑다.[양력 11월 13일]
 
그대로 머물면서 마을집 아래로 내려가 잤다.
 
10월 6일 (계해) 흐렸다가 비가 뿌렸다.[양력 11월 14일]
 
눈비가 세차게 왔다.
 
10월 7일 (갑자) 바람이 고르지 않고
  비가 오락가락한다.[양력 11월 15일]
 
소문에 호남 안팎에는 적선이 없다고 한다.
 
10월 8일 (을축) 맑으며, 바람이 살랑거렸다.[양력 11월 16일]
 
출항하여 어외도에 이르러 잤다.
 
10월 9일 (병인) 맑다.[양력 11월 17일]
 
일찍 출항하여 우수영에 이르니, 성 밖에는 집에 사람이 살지 않고,
인적(人跡)이 하나도 없다.보이는 것은 참혹 뿐이었다.
그러나 저녁에, 해남에서 흉악한 적들이 진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초저녁에 김종려(金宗麗)∙정조(鄭詔)∙백진남(白振南) 등이 와서 봤다.
 
10월 10일 (정묘) 비가 뿌리고 된바람이 세게 불었다.[양력 11월 18일]
 
항해할 수가 없어 그대로 머물렀다.
밤 열 시쯤(二更)에 중군장 김응함(金應 )이 와서 전하는 데,
 
"해남에 있던 적들이 많이 물러 간 모양입니다.
 이희급(李希伋)의 부친이 적에게 사로잡혔다가
 빌어서 놓여 왔습니다고 했다."
 
고 한다.마음이 언짢아서 앉았다 누웠다 하다가 새벽이 되었다.
우우후 이정충(李廷忠)이 왔는 데, 배가 보이지 않은 것은
바깥 섬으로 달아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10월 11일 (무진) 맑다.[양력 11월 19일]
 
밤 두 시쯤에 바람이 자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닻을 올려 바다 가운데에 이르러,
정탐인 이순(李順)∙박담동(朴淡同)∙박수환(朴守還)∙태귀생(太貴生)을
해남으로 보냈다.해남에는 연기가 하늘을 찌른다고 한다.
이는 반드시 적의 무리들이 달아나면서 불을 지른 것이다.
오정에 안편∙발음도(安便發音島= 안창도∙팔금도)에 이르니,
바람도 좋고 날씨도 화창하다.
육상에 내려 산마루로 올라 가서 배 감출 곳을 찾아보니,
동쪽에는 앞에 섬이 있어 멀리 바라볼 수는 없고,
북쪽으로는 나주와 영암 월출산으로 뚫렸으며,
서쪽에는 비금도로 통하여 눈앞이 툭 터였다.
잠깐 있으니, 중군장과 우치적(禹致績)이 올라 오고,
조효남(趙孝南)∙안위(安衛)∙우수(禹壽)가 잇따라 왔다.
날이 저물어 산봉우리에서 내려와 언덕에 앉았으니,
조계종(趙繼宗)이 와서 왜적의 사실 형편을 말하고,
또 왜놈들이 우리 수군을 몹시 싫어한다고 했다.
이희급(李希伋)의 부친이 와서 알현하고 또 사로잡혔던 경위를 말하는데,
아픈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저녁에는 따뜻하기가 봄 같아 아지랑이가 하늘에 아른 거려
비올 징조가 많았다.
초저녁에 달빛이 비단결 같아 홀로 봉창에 앉았으니 심사가 만 갈래였다.
밤 열시쯤에 식은 땀이 몸을 적셨다.한밤에 비가 왔다.
이 날 우수사가 군량선에 있는 사람에게 장단지를 몹시 때렸다고 했다.
놀랄 일이다.
 
10월 12일 (기사) 비가 내렸다.[양력 11월 20일]
 
오후 한시에 맑게 개었다.
아침에 우수사가 와서 절하기에 하인의 장단지를 때린 죄를 용서했다.
가리포첨사(이응표)∙장흥부사(전봉) 등 여러 장수들이 와서 절하고
종일 이야기했다.
탐후선이 나흘이 지나도 오지 않으니 걱정이 된다.
아마 생각건대, 흉악한 적들이 멀리 도망가기에,
그 뒤를 쫓아가느라 돌아오지 않는 것이리라.
그대로 발음도에 머물렀다.
 
10월 13일 (경오) 맑다.[양력 11월 21일]
 
아침에 조방장 배흥립(裵興立)과 경상우후(이의득)가 와서 봤다.
조금 있으니, 탐망선이 임준영(任俊英)을 싣고 왔다.
그 편에 적의 소식을 들으니,
 
"해남에 들어와 웅거해 있던 적들은
 7 일에 우리 수군이 내려 오는 것을 보고,
 11일에 몽땅 도망가버렸는 데,
 해남의 향리 송언봉∙신용 등이 적속으로 들어가
 왜놈 들을 꾀어 내어 선비들을 죽였다."
 
고 했다.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곧 순천부사 우치적(禹致績)∙금갑도만호 이정표(李廷彪)
제포만호 주의수(朱義壽)∙당포만호 안이명(安以命)
조라포만호 정공청(鄭公淸) 및 군관 림계형(林季亨)
정상명(鄭翔溟)∙봉좌(逢佐)∙태귀생(太貴生)∙박수환(朴壽還) 등을
해남으로 보냈다.
저녁나절에 내려가 언덕에 앉아 윗자리에서
조방장 배흥립(裵興立)∙장흥부사 전봉(田鳳) 등과 함께 이야기했다.
이 날 우우후 이정충(李廷忠)이 뒤떨어진 죄를 다스렸다.
우수사의 군관 배영수(裵永壽)가 와서 아뢰기를,
 "수사의 부친이 외해에서 살아서 돌아왔다"고 했다.
 
이 날 새벽 꿈에 우의정을 만나 조용히 이야기했다.
낮에 선전관 네 명이 법성포에 이르러 내려 왔다는 말을 들었다.
저녁에 김응함(金應 )에게서 섬 안에 알지 못하는 어떤 사람이
산골에 깊숙히 숨어서 소와 말을 잡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황득중(黃得中)∙오수(吳守) 등을 보내어 염탐케 하였다.
이 날 밤 달빛은 비단결 같고 잔잔한 바람도 일지 않았다.
홀로 뱃전에 앉았으니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할 따름이다.
 
10월 14일 (신미) 맑다.[양력 11월 22일]
 
밤 두 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로 가는 데,
말이 발을 헛디디어 냇물 가운데로 떨어졌으나, 쓸어지지는 않고,
막내 아들 면이 끌어안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이었는데 깨었다.
이것은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저녁나절에 배 조방장과 우후 이의득(李義得)이 와서 봤다.
배 조방장의 종이 영남에서 와서 적의 형세를 전했다.
황득중(黃得中) 등은 와시 아뢰기를,
 
 "내수사의 종 강막지(姜莫只)라는 자가 소를 많이 기르기 때문에
 열두 마리를 끌고 갔다" 고 했다.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했다.
봉한 것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아찔하고 어지러웠다.
대충 겉봉을 뜯고 열(둘째 아들)의 편지를 보니,
겉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짐작했다.
어느새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 하지 못하는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너가 사는 것이 이치가 마땅하거늘,
 너가 죽고 내가 사니, 이런 어그러진 이치가 어디 있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은 것이냐?
 내 지은 죄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어본들 앞으로 누구에게 의지할꼬!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마는
 네 형∙네 누이∙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으니,
 아직은 참으며 연명이야 한다마는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 있어 울부짖을 따름이다.
 울부짖을 따름이다.하룻밤 지내기가 일년 같구나."
 
이 날 밤 열시쯤에 비가 왔다.
 
10월 15일 (임신) 비바람이 종일 불었다.[양력 11월 23일]
 
누웠다 앉았다 하면서 종일 이리뒤척 저리뒤척 했다.
여러 장수들이 와서 문안하니 얼굴을 들고 어찌 맞으랴!
림홍(林 )∙림중형(林仲亨)∙박신(朴信)이 적을 정탐하려고
작은 배를 타고, 흥양∙순천 등지의 바다로 나갔다.
 
10월 16일 (계유) 맑다.[양력 11월 24일]
 
우수사와 미조항첨사를 해남으로 보냈다.해남현감도 보냈다.
나는 내일이 막내 아들의 죽음을 들은지 나흘째가 된다.
마음 놓고 통곡할 수도 없으므로,
영 안에 있는 강막지(姜莫只) 집으로 갔다.
밤 열 시쯤에 순천부사∙우후 이정충(李廷忠)∙금갑도만호∙제포 만호 등이
해남에서 돌아왔다.
왜놈 열세 명과 투항했던 송원봉(宋元鳳) 등을 목 베고서 왔다.
 
10월 17일 (갑술) 맑은 날씨인데
 바람도 종일 세게 불었다.[양력 11월 25일]
 
새벽에 향을 피우고 곡을 하는데, 하얀 띠를 두르고 있으니,
비통함을 정말 참을 수가 없다.
우수사가 와서 봤다.
 
10월 18일 (을해) 맑다.[양력 11월 26일]
 
바람이 자는 것 같았으나 우수사는 배를 출항할 수 없어
바깥바다에서 잤다.
강막지(姜莫只)가 와서 알현했다.
림계형(林季亨)∙임준영(任俊英)이 들어왔다.
 
10월 19일 (병자) 맑다.[양력 11월 27일]
 
새벽 꿈에, 고향집의 종 진(辰)이 내려왔기에
나는 죽은 아들을 생각하여 통곡하였다.
저녁나절에 조방장과 경상우후가 와서 봤다.백 진사가 와서 봤다.
림계형(林季亨)은 와서 알현했다.
김신웅(金信雄)의 아내∙이인세(李仁世)∙정억부(鄭億夫)를 붙잡아 왔다.
거제∙안골∙녹도∙웅천∙제포∙조라포∙당포∙우우후가 와서 봤다.
적을 잡은 공문을 와서 바쳤다.
윤건(尹健) 등의 형제가 왜적에게 붙었던 두 명을 잡아 왔다.
어두울 무렵 코피를 되 남짓이나 흘렸다.
밤에 앉아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어찌 다 말하랴!
이승에서의 영령이라 마침내 불효가 여기까지 이를 줄을 이찌 아랴!
비통한 마음 찢어지는 듯하여 억누를 수가 없다.
 
10월 20일 (정축) 맑고 바람도 잤다.[양력 11월 28일]
 
이른 아침에 미조항첨사∙해남현감∙강진현감이
해남현의 군량을 운반할려고 여쭙고 돌아갔다.
안골포만호 우수(禹壽)도 여쭙고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김종려(金宗麗)∙정수(鄭遂)∙백진남(白振男)이 와서 보고,
또 윤지눌(尹志訥)의 못된 짓을 말하였다.
김종려(金宗麗)를 소음도(所音島) 등 열세 곳 섬의
염전의 감자도감검(監煮都監檢: 감독관)으로 정하여 보냈다.
영의 둔덕에서 일하는 사화(士化)의 모친이 배 안에서 죽었다고 했다.
그래서 곧 묻어버릴 일로 군관에게 시켰다.
남도포∙여도 두 만호가 와서 알현하고서 돌아 갔다.
 
10월 21일 (무인) 밤 두시쯤에 비오다 눈오다 했다.[양력 11월 29일]
 
바람이 몹시 추웠다.
뱃사공이 추워 얼까 걱정이 되어 마음을 잡지 못했다.
오전 여덟시부터 바람이 불고 눈이 펑펑 내렸다.
정상명(鄭翔溟)이 와서 아뢰기를
무안현감 남언상(南彦祥)이 들어 왔다고 했다.
남언상은 원래 수군에 소속된 관리인데,
사사로이 목숨만 보존할 꾀를 부려 수군에 오지 않고,
산골에 숨어서 달포쯤 관망하다가,
적이 물러간 뒤에는 무거운 형벌을 받을까 두려워
비로소 이제야 나타나니, 그 하는 꼬락서니가 참으로 꽤씸하다.
저녁나절에 가리포 및 배 조방장과 우후가 와서 절했다.
바람불고 눈이 종일 내렸다.장흥부사가 와서 잤다.
 
10월 22일 (기묘) 아침에 눈오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양력 11월 30일]
 
장흥과 같이 식사를 했다.
오후에 군기사장(軍器査長) 선기룡(宣起龍) 등 세 사람이
임금의 분부와 의정부의 방문을 가지고 왔다.
해남현감(유형)이 적에게 붙었던 윤해(尹海)∙김언경(金彦京)을 묶어서
올려 보내 왔다.그래서 나장이 있는 곳에 단단히 가두었다.
무안현감 남언상(南彦祥)은 가리포의 전선에 가두었다.
우수사가 황원에서 와서 말하기를,
 "김득남(金得男)이 처형되었다"고 했다.
진사 백진남(白振南)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10월 23일 (경진) 맑다.[양력 12월 1일]
 
저녁나절에 김종려(金宗麗)∙정수(鄭遂)가 와서 봤다.
배 조방장과 우후∙우수사우후도 와서 봤다.
적량∙영등포만호가 잇따라 왔다가 저녁에 돌아갔다.
이 날 낮에 윤해(尹海)∙김언경(金彦京)을 처형했다.
대장장이 허막동(許莫同)을 나주로 보낼려고
밤 아홉시에 종을 시켜 불렀더니 배가 아프다고 했다.
싸움말의 떨어진 편자를 갈았다.
 
10월 24일 (신사) 맑다.[양력 12월 2일]
 
해남에 있던 왜의 군량 삼백스무두 섬을 실어왔다.
초저녁에 선 전관 하응서(河應瑞)가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그것은 우후 이몽구(李夢龜)를 처형하라" 는 것이었다.
 
그 편에 들으니, "명나라 수군이 강화도에 이르렀다."고 한다.
 
밤 열시쯤에 병을 다스리려고 땀을 내니
등을 적시고 밤 한시에야 그쳤다.
밤 세 시에 또 선전관과 금오랑이 왔다고 한다.
날이 밝자 들어오는데, 선전관은 권길(權吉)이요,
금오랑(의금부도사 주부) 홍지수(洪之壽)였다.
무안현감(남언상)∙목포만호(방수경)∙다경포만호(윤승남)를 잡으러
여기 왔다.
 
10월 25일 (임오) 맑다.[양력 12월 3일]
 
몸이 몹시 불편했다.
윤련(尹連)이 부안에서 왔다.
종 순화(順花)는 아산에서 배를 타고 왔다.
집안의 편지를 받아 보니 심회가 불편하여 이리뒤척 저리뒤척이다가
혼자 앉아 있었다.
초저녁에 선전관 박희무(朴希茂)가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그것은 명나라 수군이 배를 정박하기에 알맞은 곳을 골라서
장계 하라는 것이었다.
량희우(梁希雨)가 장계를 가지고 서울로 갔다가 되돌아왔다.
충청우후가 편지를 보내고 또 홍시 한접을 보내 왔다.
 
10월 26일 (계미) 새벽에 비를 부렸다.[양력 12월 4일]
 
조방장 등이 와서 봤다.
김종려(金宗麗)∙백진남(白振南)∙정수(鄭遂) 등이 와서 봤다.
이 날 밤 열시에 자는데 식은 땀이 나서 몸을 적시었다.
온돌이 너무 따뜻한 탓이었다.
 
10월 27일 (갑신) 맑다.[양력 12월 5일]
 
영광군수(전협)의 아들 전득우(田得雨)가 군관이 되어 알현했다.
곧 그 부친이 있는 곳으로 돌려 보냈더니 홍시 백 개를 가지고 왔다.
밤에 비가 뿌렸다.
 
10월 28일 (을유) 맑다.[양력 12월 6일]
 
아침에 여러 가지 장계를 봉하여 피은세(皮銀世)에게 주어서 보냈다.
저녁나절에 강막지(姜莫只)의 집에서 대장선으로 옮겨 탔다.
저녁에 소금밭의 서원 도걸산(都巨叱山)이 큰 사슴을 잡아 바쳤다.
그래서 군관 등에게 주어 나누어 먹게 했다.
이 날 밤에는 잔잔한 바람도 일지 않았다.
 
10월 29일 (병술) 맑다.[양력 12월 7일]
 
밤 두 시쯤에 첫 나발을 불고 출항하여 목포로 향하는데
벌써 부터 비와 우박이 섞여 내리고 샛바람이 살살 불었다.
목포에 이르러 보화도(목포시 고하도)로 옮겨 정박하니,
된하늬바람을 막을 만하고 배를 감추기에 아주 알맞다.
그래서 뭍에 내려 섬 안을 둘러 보니, 형세가 매우 좋으므로,
(보화도에서) 진을 치고 집 지을 계획을 했다.
 
10월 30일 (정해) 맑으나 샛바람이 불고,
  꼭 비올 것 같다.[양력 12월 8일]
  
아침에 집 지을 곳으로 내려가 앉았으니, 여러 장수들이 와서 알현했다.
해남현감 류형(柳珩)도 와서 적에게 붙었던 사람들의 소행을 전했다.
일찍 황득중(黃得中)으로 하여금 자귀장이를 데리고
섬 북쪽 봉우리로 가서 집 지을 재목을 베어 오게 했다.
저녁나절에 해남에 있던 적에게 붙었던
정은부(鄭銀夫) 및 김신웅(金信雄)의 부인이 왜놈에게 지시하여
우리나라 사람을 죽인 자 두 명과,
선비 집 처녀를 강간한 김애남(金愛南)을 아울러 목 베어 효시하였다.
저녁에 량밀이 도양장의 벌레 먹은 곡식을 멋대로 나누어 준 일로
곤장 예순 대를 쳤다.
 
(** 다음은 날짜는 적혀 있지 않으나, 1597년(정유)(Ⅰ)
 10월 8일(乙丑) 뒷 장부터 모두 3 장으로 적혀 있는데
 그 앞의 한 장은 「讀宋史」 이다.)
 
"어허 이 때가 어느 때인데, 저 강(綱)은 가려고 하는가.
 가면 또 어디로 가려는가.무릇 신하된 자로서 임금을 섬김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요, 다른 길은 없다.
 그 때야말로 종사의 위태함이 마치 터럭 한 가닥으로
 천만 근을 달아 올림과 같아 정히 신하된 자는
 몸을 버려 나라의 은혜를 갚을 때인데 이어서 간다는 말은
 진실로 마음에 생각도 내지 못할 말이거늘,
 하물며 어찌 입 밖으로 낼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면 내가 강이라면 나는 어떻게 할까.몸을 헐어 피로써 울며,
 간담을 열어 젖히고서 사세가 여기까지 왔으니
 화친할 수 없음을 밝혀서 말할 것이요,
 아무리 말하여도 그대로 되지 않는다면 거기 이어 죽을 것이요,
 또 그렇지도 못한 다면, 짐짓 화친하려는 계획을 따라
 몸을 그 속에 던져 온갖 일에 낱낱이 꾸려가며,
 죽음 속에서 살 길을 구한다면,
 혹시 만에 하나라도 나라를 건질 도리가 있게 될 것이어늘,
 강의 계획은 이런데서 내지 않고 그저 가려고만 했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된 자로서 몸을 던져 임금을 섬기는
 의리라 할 수 있겠는가."
 
(** 다음은 위의 「독송사(讀宋史)」가 적힌 그 다음 장에
 두 장으로 적혀 있는 것이다.)
 
"새로 급제한 원경전(元景銓)∙한치겸(韓致謙)∙정복례(鄭福禮)는
 우병사의 진에, 남엽(南曄)∙정재순(鄭在淳)∙조형(趙珩)∙조완(趙琓)은
 진주 운곡에, 이홍훈(李弘勛) 주인집은 송곡에,
 창노의 우두 머리 봉환(鳳還)∙석운(石雲)∙뢰손(雷孫)은 백천 별장에,
 훈련정 조신옥(趙信玉)∙홍대방(洪大邦)은
 쌀 14∙콩 18∙파초 4∙콩 2 및 10, 대오미 2를,
 흥양 정병 김득상(金得尙)은 화살쏘기로,
 김덕방(金德邦)∙김윤복(金允福)은 처음 벼슬에 나왔고,
 처음 벼슬에 나온 조언해(趙彦海)∙주부 송상보(宋象甫)는 말이 없고,
 순천 이진(李珍)과 아산에서 처음 벼슬한 박윤희(朴允希)는
 지금 충청도 방어사의 진중에 있는데
 싸움말이 있어 적을 죽일 수 있다고 한다."
 
 
11.정유년 11월 (1597년 11월)
 
11월 초1일 (무자) 비가 내렸다.[양력 12월 9일]
 
아침에 얇은 사슴 가죽 두 장이 물에 떠내려 왔다.
그래서 명나라 장수에게 보내주기로 했다.기이한 일이다.
오후 두 시에 비는 개었으나 된바람이 몹시 불었다.
뱃사람들은 추위에 괴로워하며, 나는 선실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으니,
마음이 무척 불편했다.하루를 보내는 것이 일년 같았다.
비통함을 말할 수 없다.
저녁에 된바람이 세게 불어 밤새도록 배가 흔들리어
사람이 제대로 안정시킬 수가 없었다.
땀이 나서 몸을 적셨다.
 
11월 초2일 (기축) 흐렸는데 비는 오지 않았다.[양력 12월 10일]
 
일찍 우수사의 전선이 바람에 표류되어
암초에 걸려 깨졌다고 한 말을 들었다.참으로 통분하다.
병선의 군관 당언량(唐彦良)에게 곤장 여든 대를 쳤다.
선창에 내려가 앉아서 다리 놓는 일을 감독했다.
그 길로 새 집 짓는 곳으로 올라갔다가 어두워서야 배로 내려왔다.
 
11월 3일 (경인) 맑다.[양력 12월 11일]
 
일찍 새 집 짓는 곳으로 올라가 선전관 이길원(李吉元)이
배설(裵楔)을 처단할 일로 들어왔다.
배설(裵楔)은 벌써 성주 본집으로 갔는데,
그곳으로 가지 않고 곧장 본가로 왔다.
그 사정을 보아주는 (이길원의) 죄가 더 크다.
녹도의 배에 보냈다.
 
11월 4일 (신묘) 맑다.[양력 12월 12일]
 
일찍 새 집 지어 세우는 곳으로 올라갔다.이길원(李吉元)이 머물렀다.
진도군수 선의문(宣義問)이 왔다.
 
11월 5일 (임진) 맑다.[양력 12월 13일]
 
따뜻하기가 봄날 같다.새 집 짓는 곳으로 올라갔다가,
날이 저물어서 배로 내려왔다.
영암군수 이종성(李宗誠)이 밥을 서른 말이나 지어 일꾼들에게 먹이고,
또 말하되,
 
"군량미 이백 섬을 준비하고, 중간벼 칠백 섬을 마련하였다."
 
고 한다.이 날 보성 군수와 흥양현감으로 하여금
군량창고 짓는 것을 보살피게 했다.
 
11월 6일 (계사) 맑다.[양력 12월 14일]
 
일찍 새 집 짓는 곳으로 올라가 종일 어설렁거리니
해가 저무는 것도 몰랐다.새 집에 이엉으로 지붕을 이었다.
군량 곳간도 지었다.전라우우후가 나무 베어 올 일로 황원장으로 갔다.
 
11월 7일 (갑오) 맑도 따뜻하다.[양력 12월 15일]
 
해남 의병이 왜놈의 머리 하나와 환도 한 자루를 가지고 와서 바쳤다.
이종호(李宗浩)와 당언국(唐彦國)을 잡아왔다.
그래서 거제의 배에 가두었다.
저녁나절에 전 홍산현감 윤영현(尹英賢)∙생원 최집(崔潗)이 와서 보고,
또 군량에 쓸 벼 마흔 섬과 쌀 여덟 섬을 부쳐 왔다.
며칠 동안의 양식으로 도움이 될만하다.
본영의 박주생(朴注生)이 왜놈의 머리 두 개를 베어 왔다.
전 현령 김응인(金應仁)이 와서 봤다.
이대진(李大振)의 아들 순생(順生)이 윤영현(尹英賢)을 따라왔다.
저녁에 새 집의 마루를 다 놓았다.수사마다 와서 봤다.
이 날 밤 자정에 꿈에 면(葂)이 죽는 것을 보고 구슬프게 울었다.
진도군수가 돌아갔다.
 
11월 8일 (을미) 맑다.[양력 12월 16일]
 
밤 두시쯤 꿈에 물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았다.
이 날은 따뜻하고 바람도 없다.새방 벽에 흙을 발랐다.
이지화(李至和) 부자가 와서 봤다.
마루를 만들었다.
 
11월 9일 (병신) 맑다.[양력 12월 17일]
 
따뜻하기가 봄날 같다.우수사가 와서 봤다.강진현감이 현으로 돌아갔다.
 
11월 10일 (정유) 눈과 비가 섞여 오다.[양력 12월 18일]
 
된하늬바람이 세게 불었다.간신히 배를 구호했다.
이정충(李廷忠)이 와서 말하기를,
 
"장흥의 적들이 달아났다."
 
고 했다.
 
11월 11일 (무술) 맑으나 바람기는 약간 있었다.[양력 12월 19일]
 
식사를 한 뒤에 새 집 짓는 곳으로 올라갔다.
평산포의 새 만호가 도임장(부임명령서)을 바쳤다.
그는 하동현감(신진)의 형 신훤(申萱)이다.
전하는 말이 숭정으로 가자하는 것이 이미 발행되었다고 한다.
장흥부사와 배 조방장이 와서 봤다.
저녁에 우후 이정충(李廷忠)이 왔다가 초저녁에 돌아갔다.
 
11월 12일 (기해) 맑다.[양력 12월 20일]
 
이 날 저녁나절에 영암∙나주 사람에게 배메기를 못하게 했다고 하여
묶어서 왔다.
그래서 그 중 주모자를 가려서 처형하고
나머지 네 명을 각 배에 가두었다.
 
11월 13일 (경자) 맑다.[양력 12월 21일]
 
11월 14일 (신축) 맑다.[양력 12월 22일]
 
남해현감 류형(柳珩)이 와서 윤단중(尹端中)의 무리한 일을 많이 전했다.
또 말하기를,
 
"해남의 아전이 법성포로 피란갔다가 돌아올 때
 바람을 만나 배가 뒤집어지는데,
 바다가운데서 만나도 구조하기는 커녕
 도리어 배안의 물건을 빼앗아 갔다"
 
고 했다.그래서 중군선에 가두었다.
김인수(金仁守)를 경상도 수영의 배에 가두었다.
내일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제삿날이라 나들이는 하지 않아야겠다.
 
11월 15일 (임인) 맑다.[양력 12월 23일]
 
따뜻하기가 봄날 같다.새 집으로 올라갔다.
저녁나절에 림환(林 )과 윤영현(尹英賢)이 와서 봤다.
저녁에 송한(宋漢)이 서울에서 들어왔다.
 
11월 16일 (계묘) 맑다.[양력 12월 24일]
 
아침에 조방장∙장흥부사 및 진중에 있는 여러 장수가 아울러 와서 봤다.
군공마련기(軍功磨鍊記: 개인별 전공 조사 기록)를 하나씩 점고했더니
거제현령 안위(安衛)가 통정대부(정3품의 당상관)가 되고,
나머지도 차례차례 벼슬을 받고, 은 스무냥을 내게로 보냈다.
명나라 장수 경리 양호(楊鎬)는 붉은 비단 한 필을 보내면서,
 
 "배에 이 붉은 비단을 걸어 주고 싶으나, 멀어서 할 수 없다."고 했다.
 
영의정의 회답편지도 왔다.
 
11월 17일 (갑진) 비가 내렸다.[양력 12월 25일]
 
경리 양호(楊鎬)의 차관이
초유문(招諭文: 적이나 적에게 붙었던 자들을 너그러운 조건으로
포용한다는 포고문)과
면사첩(免死帖: 사형을 적용하지 않을 것을 보증하는 증서)을
가지고 왔다.
 
11월 18일 (을사) 맑다.[양력 12월 26일]
 
따뜻하기가 봄날 같다.윤영현(尹英賢)이 와서 봤다.
정한기(鄭漢起)도 왔다.땀이 났다.
 
11월 19일 (병오) 흐렸다.[양력 12월 27일]
 
조방장 배흥립(裵興立)과 장흥부사가 와서 봤다.
 
11월 20일 (정미)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었다.[양력 12월 28일]
 
임준영(任俊英)이 와서,
 
"완도를 정탐하니 적들이 없습니다."
 
고 전했다.
 
11월 21일 (무신) 맑다.[양력 12월 29일]
 
송응기(宋應璣) 등이 산의 일꾼을 거느리고
해남에 소나무 있는 데로 갔다.
이 날 저녁에 순생(順生)이 와서 잤다.
 
11월 22일 (기유) 흐렸다가 개다가 했다.[양력 12월 30일]
 
저녁에 김애(金愛)가 아산에서 돌아왔다.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이 달 초열흘 날에 아산에 들러 편지를 가져 왔다.
밤에 비가 오고 눈이 내렸으며 바람이 세게 불었다.
장흥에 있던 적들이 20일에 달아났다는 보고가 왔다.
 
11월 23일 (경술) 바람이 세고 눈이 많이 왔다.[양력 12월 31일]
 
이 날 승첩한 장계를 썼다.저녁에 얼음이 얼었다고 했다.
아산의 집으로 편지를 쓰자니 죽은 아들 생각에 눈물이 흘러
거둘 수가 없었다.
 
11월 24일 (신해) 눈과 비가 내렸다.[양력 1598년 1월 1일]
 
된하늬 바람이 계속 불었다.
 
11월 25일 (임자) 눈이 내렸다.[양력 1월 2일]
 
11월 26일 (계축) 비와 눈이 내렸다.[양력 1월 3일]
 
얼어서 막힌게 갑절이나 혹독했다.
 
11월 27일 (갑인) 맑다.[양력 1월 4일]
 
장흥의 승첩계본을 수정했다.
 
11월 28일 (을묘) 맑다.[양력 1월 5일]
 
장계를 봉했다. 무안에 사는 진사 김덕수(金德秀)가
군량에 쓸 벼 열다섯 섬을 가져와 바치었다.
 
11월 29일 (병진) 맑다.[양력 1월 6일]
 
유격 마귀(麻貴)의 차관 왕재(王才)가,
 
"물길을 따라 명나라 군사가 내려 온다"
 
고 했다.전희광(田希光)∙정황수(鄭凰壽)가 왔다.무안현감도 왔다.
 
 
12.정유년 12월 (1597년 12월)
 
12월 초1일 (정사) 맑다.[양력 1월 7일]
 
맑고 따뜻했다.아침에 경상수사 입부 이순신(李純信)이 진에 왔다.
나는 배가 아파서 저녁나절에야 수사를 보고,
그와 종일 이야기하며 대책을 의논했다.
 
12월 2일 (무오) 맑다.[양력 1월 8일]
 
날씨가 너무 따뜻하여 봄날 같다.
영암의 향병장 류장춘(柳長春)이 적을 토벌한 사유를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곤장 쉰 대를 쳤다.
홍산현감 윤영현(尹英賢)∙김종려(金宗麗)∙백진남(白振南)∙정수(鄭遂)등이
와서 봤다.
밤 열시쯤에 땀이 배어 젖었다.
된바람이 몹시 불었다.
 
12월 3일 (기미) 맑다.[양력 1월 9일]
 
바람이 세게 불렀다.몸이 불편하다.경상수사가 와서 봤다.
 
12월 4일 (경신) 맑다.[양력 1월 10일]
 
몹시 추웠다.
저녁나절에 김윤명(金允明)에게 곤장 마흔 대를 쳤다.
장흥 교생 기업(基業)이 군량을 훔쳐 실은 죄로 곤장 세 대를 쳤다.
거제현령 및 금갑도만호∙천성보만호는 배메기하는 데서 돌아왔다.
무안현감 및 전희광(田希光) 등이 돌아갔다.
 
12월 5일 (신유) 맑다.[양력 1월 11일]
 
아침에 공로를 세운 여러 장수들에게 상품과 직첩을 나누어 주었다.
봉제(奉 )가 김돌손(金乭孫)을 데리고 함평 땅으로 갔다.
보자기를 수색하는 정응남(鄭應男)이 점세(占世)를 데리고 진도로 갔다.
배를 새로 만들 때 나쁜 일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볼 일로
아울러 나갔다.
해남의 독동(禿同)을 처형했다.
전익산군수 고종후(高從厚)가 왔다.김억창(金億昌)이 왔다.
광주의 박자(朴仔)가 왔다.무안의 나덕명(羅德明)이 왔다.
도원수의 군관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
 
"이번 선전관 편에 들으니,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아직도 상제라 하여 방편을 따르지 않아
 여러 장수들이 민망히 여긴다고 한다.
 사정이야 비록 간절하지만, 나라 일이 한창 바쁘다.
 옛사람의 말에도 `전쟁에 나아가 용맹이 없으면,
 효가 아니다.'고 하였다.
 전쟁할 때의 용감이란
 소찬으로 기운이 없는 자는 해낼 수 없는 것이다.
 예기에도 `원칙과 방편'이 있으니,
 꼭 원칙대로만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다.
 경은 내 뜻을 짐작하여 소찬에 더하여 방편을 쫓도록 하라."
 
고 하면서 고기반찬을 하사하셨으니, 더욱 비통했다.
해남의 강간∙약탈한 죄인을 함평에서 자세히 다스렸다.
 
12월 6일 (임술) [양력 1월 12일]
 
나덕준(羅德峻)∙정대청(鄭大淸)의 아우 정응청(鄭應淸)이 와서 봤다.
 
12월 7일 (계해) 맑다.[양력 1월 13일]
 
12월 8일 (갑자) 맑다.[양력 1월 14일]
 
12월 9일 (을축) 맑다.[양력 1월 15일]
 
종 목년(木年)이 들어왔다.
 
12월 10일 (병인) 맑다.[양력 1월 16일]
 
조카 해∙아들 열 및
진원(珍原)이 윤간(尹侃)∙이언량(李彦良)과 함께 들어왔다.
 
12월 11일 (정묘) 맑다.[양력 1월 17일]
 
경상수사와 조방장이 와서 봤다.우수사도 와서 봤다.
 
12월 12일 (무진) 맑다.[양력 1월 18일]
 
12월 13일 (기사) 가끔 눈오다.[양력 1월 19일]
 
12월 14일 (경오) 맑다.[양력 1월 20일]
 
12월 15일 (신미) 맑다.[양력 1월 21일]
 
12월 16일 (임신) 맑다.저녁나절에 눈오다.[양력 1월 22일]
 
12월 17일 (계유) 눈바람이 몹시 섞여치다.[양력 1월 23일]
 
조카 해와 헤어졌다.
 
12월 18일 (갑술) 눈오다.[양력 1월 24일]
 
새벽에 해는 어제 취한 술이 깨지 않았는데도 오늘 새벽에 출항했다.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12월 19일 (을해) 종일 눈이 내리다.[양력 1월 25일]
 
12월 20일 (병자) [양력 1월 26일]
 
진원(珍原)의 어머니와 윤간(尹侃)이 올라갔다.
우후가 교서에 숙배했다.
 
12월 21일 (정축) 눈오다.[양력 1월 27일]
 
아침에 윤홍산이 목포에서 와서 봤다.
저녁나절에 배 조방장과 경상수사가 와서 보고 몹시 취하여 돌아갔다.
 
12월 22일 (무인) 눈비가 섞여 내리다.[양력 1월 28일]
 
함평현감(손경지)이 들어왔다.
 
12월 23일 (기묘) 눈이 세 치나 내렸다.[양력 1월 29일]
 
순찰사가 진에 온다는 기별이 먼저 왔다.
 
12월 24일 (경진) 눈이 오다 개이다 하다.[양력 1월 30일]
 
아침에 이종호(李宗浩)를 순찰사에게 보내어 문안했다.
오늘 밤 나덕명이 와서 이야기하는데,
머무르고 있는 걸 싫어한다는 것을 모르니 한심하다.
밤 열시에 집에 편지를 썼다.
 
12월 25일 (신사) 눈오다.[양력 1월 31일]
 
아침에 열이 돌아갔다.제 어머니 병 때문이었다.
저녁나절에 경상수사∙배 조방장이 와서 봤다.
오후 여섯시에 순찰사가 진에 왔으므로,
함께 군사에 관한 일을 의논하고,
연해안 열아홉 고을을 수군에 전속하게 하였다.
저녁에 방안으로 들어가 편안하게 이야기했다.
 
12월 26일 (임오) 눈오다.[양력 2월 1일]
 
방백과 함께 방에 앉아서 은밀히 군사 대책을 논의했다.
저녁 나절에 경상수사(이순신)와 조방장 배흥립(裵興立)이 와서 봤다.
 
12월 27일 (계미) 눈오다.[양력 2월 2일]
 
아침을 먹은 뒤에 순찰사가 돌아갔다.
 
12월 28일 (갑신) 맑다.[양력 2월 3일]
 
경상수사와 조방장 배흥립(裵興立)이 와서 봤다.
비로소 경상수사가 지니고 있던 물건이 왔다는 말을 들었다.
 
12월 29일 (을유) 맑다.[양력 2월 4일]
 
김인수(金仁秀)를 놓아 보냈다.
윤□□에게 곤장 서른 대를 치고서 놓아 보냈다.
영암좌수(座首)는 문초를 받고 놓아 주었다.
두우(杜宇)가 종이감으로 백지∙상지를 아울러
쉰(장...이 아래 글자가 지워져서 알아볼 수가 없음)을 가져왔다.
초저녁에 다섯 사람이 뱃머리에 왔다고 했다.
그래서 종을 보냈다.(이 아래 글자가 지워져 알 수 없음)
그것이 무슨 뜻 인지 알 수가 없다.
거제의 망령됨을 알만도 하다.(이 아래 글자가 지워져 알 수 없음)
다친 팔과 손가락을 물로 씻었다고 했다.
 
12월 30일 (병술) 입춘.눈보라가 몹시 휘날렸다.[양력 2월 5일]
 
□□□배 조방장이 와서 봤다.
여러 장수들이 와서 봤다.
평산포만호∙영등포만호는 오지 않았다.
부찰사의 군관이 편지를 가지고 왔다.
오늘밤이 일년의 마지막 날이 되는 그믐밤이라
비통한 생각이 한결 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