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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새에 관한 망상 - 김원일 -

도요새에 관한 망상 - 김원일 - 1 모든 강은 바다로 이어졌다. 강의 하구에는 흙과 모래가 쌓인 삼각주가 있었다. 연장 54킬로미터의 동진강은 동해 남단 바다와 닿았다. 강 하구는 물살이 완만했고 민물과 짠물이 섞였다. 수심 얕은 수초 사이가 산란에 적당하기에 물고기가 모였다. 새우 무리와 조개 무리, 민등뼈동물도 모여들었다. 철새와 나그네새도 삼각주에서 주린 배를 채우며 날개를 손질하곤 떠났다. 나는 강 하구의 얕은 언덕에 앉아 있었다. 삼각주와 바다가 잘 내려다보였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강 하구에서 갈매기들이 날아올랐다. 갈매기들이 날개깃을 쳐대자 그 수다로 조용하던 개펄이 소란해졌다. 갈매기들은 주..

한국단편문학 2025.06.28

눈길 - 이청준 -

눈길 - 이청준 - "내일 아침 올라가야겠어요. " 점심상을 물러나 앉으면서 나는 마침내 입 속에서 별러 오던 소리를 내뱉어 버렸다. 노인과 아내가 동시에 밥숟가락을 멈추며 나의 얼굴을 멀거니 건너다본다. "내일 아침 올라가다니. 이참에도 또 그렇게 쉽게? " 노인은 결국 숟가락을 상위로 내려놓으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묻고 있었다. 나는 이제 내친걸음이었다. 어차피 일이 그렇게 될 바엔 말이 나온 김에 매듭을 분명히 지어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 내일 아침에 올라가겠어요. 방학을 얻어 온 학생 팔자도 아닌데, 남들 일할 때 저라고 이렇게 한가할 수가 있나요. 급하게 맡아 놓은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고요. "..

한국단편문학 2025.06.21

2 - 숙향전(淑香傳) - 작자 미상

2 - 숙향전(淑香傳) - 작자 미상 파랑새는 약속한 듯이 세 번 울고서 옥 밖으로 날아가니라. 이날 밤 선은 고모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어쩐지 마음이 산란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울울불락(鬱鬱不樂마음이 답답하고 즐겁지 아니함) 하더니, 파랑새가 날아와서 누워 있는 선의 팔에 앉으므로, 이상히 여기고 본즉, 새 발목에 혈서의 편지가 매어 있더라. 풀어서 본즉 숙향의 위급하고 애처로운 사연이더라. 혼비백산한 선은 그 혈서를 고모에게 보이고, 낙양 감옥으로 달려가서 숙향을 구하려고 하매, 『놀라운 불행이지만 아직 경솔히 굴지 말고 이화정 노파에게 시녀를 보내서 사정을 알아 오도록 하라.』 하고, 한편으로 이상서 댁의 노복을 불러서 사건의 전말을 물어서 자세히 내막을 알게 되자 부인이 대노하니라...

한국단편문학 2025.06.16

1 - 숙향전(淑香傳) - 작자 미상

1 - 숙향전(淑香傳) - 작자 미상 중국 송(宋)나라 때에 천하제일의 명공(明公유명하거나 훌륭한 재상)이 있었으니, 성은 김(金)이요 이름은 전(佺)이라 하더라. 그의 집안은 대대로 명문거족(名門巨族이름이 난 큰 가문. 대대로 명성이 높고 소유한 권력과 재산이 큰 가문)이라, 부친 운수선생(雲水先生)은 도덕이 높은 선비로서, 공명(功名공을 세워 자기의 이름을 널리 드러냄)에 뜻이 없어 산중에 은거하여 세월을 보내었으니, 천자(天子하늘의 뜻을 받아 하늘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군주 국가의 최고 통치자를 이르는 말. 임금 또는 왕)가 그 소문을 들으시고, 신하를 보내어 이부상서(吏部尙書)의 벼슬을 주며 불렀으나 종시 조정에 나오지 않고 산중에서 일생을 마치니, 집안이 처량하더라..

한국단편문학 2025.06.15

겨울 나들이 - 박완서 -

겨울 나들이 - 박완서 -나는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기분 좋아하기 전에, 이 온천물이 진짜일까 가짜일까, 고작 이런 주접스러운 생각부터 했다. 2류여관 특실의 평범한 타일 욕조에 달린 냉수․ 온수 두 개의 수도꼭지와 샤워는 여느 허름한 목욕탕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빨간 동그라미 표시가 있는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더운 물이 수도물 데운 게 아니고 땅에서 솟은 진짜 온천물이란 증거가 어디 있냐 말이다. 꼭 온천물에 몸을 담가야 할 만한 특별한 지병(持病)이 있는 것도 아니요, 또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는 대로의 온천물의 효험 따위를 믿어온 바도 없거늘 나는 그런 트집이라도 잡아 나를 더더욱 처량하게 만들고 싶었다. ..

한국단편문학 2025.06.08

한 강 (국문.4) - '편지' 92년 연세문화상(윤동주 문학상: )

92년 연세문화상 (윤동주 문학상 : 한 강 (국문.4) '편지' ) 편지 한강 (국문과 4학년) 그동안 아픈 데 없이 잘 지내셨는지 궁금했습니다 꽃 피고 지는 길 그 길을 떠나 겨울 한번 보내기가 이리 힘들어 때 아닌 삼월 봄눈 퍼붓습니다 겨우내내 지나온 열 끓는 세월 얼어붙은 밤과 낮을 지나며 한 평 아랫목의 눈물겨움 잊지 못할 겁니다 누가 감히 말하는 거야 무슨 근거로 무슨 근거로 이 눈이 멈춘 다고 멈추고 만다고… 천지에, 퍼붓는 이… 폭설이, 보이지 않아? 휘어져 부러지는 솔가지들,… 퇴색한 저 암록빛이, 이, 이, 바람 가운데, 기댈 벽 하나 없는 가운데,..

한국단편문학 2025.06.02

너와 나만의 시간 - 황순원 -

너와 나만의 시간 - 황순원 - 벌써 이틀째다. 한결같이 눈에 뵈는 것은 골목진 산봉우리와 계곡의 연속이었다. 그 속에는 아무 것도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곤 없는 성싶었다. 바람도 없었다. 주대위의 몸은 양쪽에서 부축을 받고도 자꾸만 아래로 늘어지기 시작했다. 마냥 그것은 두 사람의 어깨에 매달려 끌려가는 셈이나 다름없었다. 허벅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있는 것이다. 요행 동맥과 신경은 건드리지 않아 우선 압박대로 지혈을 시켜놓고 간신히 적의 포위망을 빠져나왔던 것인데, 오늘 아침부터는 그것이 부패작용이라도 일으켰는지 마구 저리고 쑤셔댔다. 어디까지 가면 된다는 한정된 길도 아니었다. 그저 무턱대고 남쪽으로만..

한국단편문학 2025.06.01

장미공원 1

장미공원 2025년5월21일 늦은 오후에 1시간정도로 운동삼아 산책길을 나선다. 이쪽 길, 저쪽 길, 그때 그때마다 편한 길로 정 한다. 그 중에 산책길 중간 쯤에 장미공원이 있다. 장미가 필 때면 공원에 인파가 몰리고 성황을 이루는데 요즘이 그럴 때다. 나도 그 틈에 끼어 예쁘게 핀 장미를 보듬어 본다. 한송이 송이가 사발만하게 피어 이미지 모두가 증명 사진처럼 되었다. 숫자가 많아 설명 보다는 줄줄이 나열하는 것을 택했다. 갖가지 장미들의 모습들이다. 오늘 오신 손님좋은 날 되시고 활짝 웃는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들이 이야기 2025.05.28

관촌수필 - 이문구 -

관촌수필 - 이문구 - 시골을 다녀오되 성묘가 목적이기는 근년으로 드문 일이었다. 더욱이 양력 정초에 몸소 그런 예모(禮貌, 예절에 맞는 모양)를 찾고 스스로 치름은 낳고 첫 겪음이기도 했다. 물론 귀성 열차를 끊어 앉고부터 "숭헌(흉한)…… 뉘라 양력 슬(설)두 슬이라 이른다더냐, 상것들이나 왜놈 세력(歲曆)을 아는 벱여……." 세모(歲暮, 섣달 그믐께)가 되면 한두 군데서 들어오던 세찬(歲饌, 세모에 선사하는 물건)을 놓고 으레껀 꾸중이시던 할아버지 말씀이 자주 되살아나 마음 한켠이 결리지 않은 바도 아니었지만, 시절이 이러매 신정 연휴를 빌미할 수밖에 없음을 달리 어쩌랴 하며 견딘 거였다. 그러나 할아버지한테 결례(불효)를 저지르고 있다는 느낌을 나 자신에..

한국단편문학 2025.05.25

장마 - 윤흥길 -

장마 - 윤흥길 - 1 밭에서 완두를 거두어들이고 난 바로 그 이튿날부터 시작된 비가 며칠이고 계속해서 내렸다. 비는 분말처럼 몽근 알갱이가 되고, 때로는 금방 보꾹(지붕의 안쪽. 지붕 안쪽의 구조물을 가리키기도 하고 지붕 밑과 반자 사이의 빈 공간에서 바라본 반자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라도 뚫고 쏟아져 내릴 듯한 두려움의 결정체들이 되어 수시로 변덕을 부리면서 칠흑의 밤을 온통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고 있었다. 동구 밖 어디쯤이 될까. 아마 상여를 넣어두는 빈집이 있는 둑길 근처일 것이다. 어쩐지 거기라면 개도 여우만큼 길고 음산한 울음을 충분히 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한국단편문학 2025.05.17

꽃나무는 심어 놓고 - 이태준 -

꽃나무는 심어 놓고 - 이태준 - “자꾸 돌아봔 뭘 해. 어서 바람을 졌을 때 휑하니 걸어야지….” 하면서 아내를 돌아보는 그도 말소리는 천연스러우나 눈에는 눈물이 다시 핑그르르 돌았다. 이 고갯마루만 넘어서면 저 동리는 다시 보려야 안 보이려니 생각할 때 발도 천 근이나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이 고개, 집에서 오 리밖에 안 되는 고개, 나무를 해, 지고 이 고개턱을 넘어설 때마다 제일 먼저 눈에 띄곤 하던 저 우리 집, 집에서 연기가 떠오르는 것을 볼 때마다 허리띠를 조르고 다시 나뭇짐을 지고 일어서곤 하던 이 고개, 이 고개에선 넘어가는 햇빛에 우리 집 울타리에 빨아 넌 아내의 치마까지 ..

한국단편문학 2025.05.10

추사 글씨 - 김용준 -

추사 글씨 - 김용준 -어느 날 밤에 대산이 "깨끗한 그림이나 한 폭 걸었으면." 하기에 내 말이 "여보게, 그림보다 좋은 추사 글씨를 한 폭 구해 걸게." 했더니 대산은 눈에 불을 번쩍 켜더니 "추사 글씨는 싫여. 어느 사랑에 안 걸린 데 있나." 한다. 과연 위대한 건 추사의 글씨다. 쌀이며 나무 옷감 같은 생활 필수품 값이 올라가면 소위 서화니 골동이니 하는 사치품 값은 여지 없이 떨어지는 법인데 요새같이 서점에까지 고객이 딱 끊어졌다는 세월에도 추사 글씨의 값만은 한없이 올라간다. 추사 글씨는 확실히 그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하필 추사의 글씨가 제가(諸家)의 법을 모..

한국단편문학 2025.05.04

무진기행 - 김승옥 -

무진기행 - 김승옥 -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라는 이정비를 보았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내 뒷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시작된 대화를 나는 들었다. " 앞으로 십킬로 남았군요." " 예, 한 삼십분 후에 도착할 겁니다." 그들은 농사 관계의 시찰원들인 듯했다. 아니 그렇지 않은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여튼 그들은 색 무늬 있는 반소매 셔츠를 입고 있었고 데드롱직의 바지를 입었고 지나쳐오는 마을과 들과 산에서 아마 농사 관계의 전문가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관찰을 했고 그것을 전문적인 용어로 얘기하고 있었다. 광주에서 기차를 내려서 버스로 갈아탄 이래, 나는 그들..

한국단편문학 2025.04.28

떡 - 김유정 -

떡 - 김유정 - 원래는 사람이 떡을 먹는다. 이것은 떡이 사람을 먹은 이야기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즉 떡에게 먹힌 이야기렷다. 좀 황당한 소리인 듯싶으나 그 사람이라는 게 역시 황당한 존재라 하릴없다. 인제 겨우 일곱 살 난 계집애로 게다가 겨울이 왔건만 솜옷 하나 못 얻어입고 겹저고리 두렁이로 떨고 있는 옥이 말이다. 이것도 한 개의 완전한 사람으로 칠는지! 혹은 말는지! 그건 내가 알 배 아니다. 하여튼 그 애 아버지가 동리에서 제일 가난한 그리고 게으르기가 곰 같다는 바로 덕희다. 놈이 우습게도 꾸물거리고 엄동과 주림이 닥쳐와도 눈하나 끔벅 없는 신청부라 우리는 가끔 그 눈곱 낀 얼굴을 놀릴 수 있을..

한국단편문학 2025.04.22

돌의 미학(수필) - 조지훈 -

돌의 미학(수필) - 조지훈 - 돌의 맛ㅡ 그것도 낙목한천(落木寒天)22)의 이끼 마른 수석(瘦石)1)의 묘경을 모르고서는 동양의 진수를 얻었다 할 수가 없다. 옛사람들의 마당 귀에 작은 바위를 옮겨다 놓고 물을 주어 이끼를 앉히는 거라든가, 흰 화선지 위에 붓을 들어 아주 생략되고 추상된 기골이 늠연한 한 덩어리의 물체를 그려 놓고 이름하여 석수도(石壽圖)라고 바라보고 좋아하던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흐뭇해진다. 무미한 속에서 최상의 미(味)를 맛보고, 적연부동(寂然不動)한 가운데서 뇌성벽력을 듣기도 하고, 눈 감고 줄 없는 거문고를 타는 마음이 모두 이 돌의 미학에 통해 있기 때문이다. 동양화, 더구나 수묵화의 정신..

한국단편문학 2025.04.17

도도한 생활 - 김애란 -

도도한 생활                                                    - 김애란 -   학원에서 처음 배운 것은 도를 짚는 법이었다. 첫 번째 음이니까, 첫 번째 손가락으로 도. 내가 건반을 누르자 , 도는 겨우 도- 하고 울었다. 나는 조금 전의 도를 기억하려 한 번 더 건반을 눌러 보았다. 도는 다시 당황한 듯 다시 도- 하고 소리 낸 뒤 제 이름이 지나가는 동선을 바라봤다. 나는 음하나가 깨끗하게 사라진 자리에 앉아, 새끼손가락을 세운 채 굳어 있었다. 녹색 코팅지가 발린 유리 벽 사이론 오후의 볕이 탁하게 들어왔고. 피아노와, 그것을 처음 만진 나 사이로 정적이 흘렀다. 나는 신중하게 고른 단어를 내뱉듯 작게, 중얼거렸다. 도.......   건반에 손을 얹는 법..

한국단편문학 2025.04.11

노다지 - 김유정 -

노다지                                  - 김유정 -   그믐 칠야 캄캄한 밤이었다. 하늘에 별은 깨알같이 총총 박혔다. 그 덕으로 솔숲 속은 간신히 희미하였다. 험한 산중에도 우중충하고 구석배기 외딴 곳이다. 버석만 하여도 가슴이 덜렁한다. 호랑이, 산골 호생원!   만귀는 잠잠하다. 가을은 이미 늦었다고 냉기는 모질다. 이슬을 품은 가랑잎은 바시락바시락 날아들며 얼굴을 축인다.   꽁보는 바랑을 모로 베고 풀 위에 꼬부리고 누웠다가 잠깐 깜박하였다. 다시 눈이 띄었을 적에는 몸서리가 몹시 나온다. 형은 맞은편에 그저 웅크리고 앉았는 모양이다.    "성님, 인저 시작해 볼라우!"    "아직 멀었네, 좀 춥더라도 참참이 해야지……."   어둠 속에서 그 음성만 우렁차게, 그..

한국단편문학 2025.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