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문학

추사 글씨 - 김용준 -

하얀모자 1 2025. 5. 4. 02:29

 

 

                          추사 글씨
                                                         - 김용준 -
어느 날 밤에 대산이
 
 "깨끗한 그림이나 한 폭 걸었으면."
 
하기에 내 말이
 
 "여보게, 그림보다 좋은 추사 글씨를 한 폭 구해 걸게."
 
했더니 대산은 눈에 불을 번쩍 켜더니
 
 "추사 글씨는 싫여. 어느 사랑에 안 걸린 데 있나."
 
한다.
과연 위대한 건 추사의 글씨다.
쌀이며 나무 옷감 같은 생활 필수품 값이 올라가면
소위 서화니 골동이니 하는 사치품 값은 여지 없이 떨어지는 법인데
요새같이 서점에까지 고객이 딱 끊어졌다는 세월에도
추사 글씨의 값만은 한없이 올라간다.
추사 글씨는 확실히 그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하필 추사의 글씨가 제가(諸家)의 법을 모아
따로이 한 경지를 갖추어서 우는 듯 웃는 듯 춤추는 듯 성낸 듯
세찬 듯 부드러운 듯 천변만화의 조화가 숨어 있다는 걸
알아서 맛이 아니라
시인의 방에 걸면 그의 시경이 높아 보이고
화가의 방에 걸면 그가 고고한 화가 같고
문학자, 철학자, 과학자 누구누구 할 것 없이 갖다 거는 대로
제법 그 방 주인이 그럴듯해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상점에 걸면 그 상인이 청고한 선비 같을 뿐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상품들까지도 돈 안 받고 거저 줄 것들만 같아 보인다.
근년에 일약 벼락 부자가 된 사람들과
높은 자리를 차지한 분들 중에도
얼굴이 탁 틔고 점잖은 것을 보면
필시 그들의 사랑에는 추사의 진적이
구석구석에 호화로운 장배로 붙어 있을 것이리라.
추사 글씨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재미난 사건 하나가 생각난다.
진 군은 추사 글씨에 대한 감식안이 높을 뿐 아니라
일반 서화 고동에는 대가로 자처하는 친구다.
그의 사랑에는 갖은 서화를 수없이 진열하고,
 
"차라리 밥을 한 끼 굶었지 명서화를 안 보고 어찌 사느냐."
 
  하는 친구다.
양 군도 진 군 못지 않게 서화 애호의 벽이 대단한데다가
금상첨화로 손수 그림까지 그리는 화가인지라
내심으로는 항상 진 군의 감식안을 은근히 비웃고 있는 터였다.
벌써 5, 6년 전엔가 진 군이 거금을 던져
추사의 대련을 한 벌 구해 놓고 장안 안에는
나만한 완당서를 가진 사람이 없다고 늘 뽐내고 있었다.
그런데 양 군 말에 의하면 진 군이 가진 완서는 위조라는 것이다.
이 위조란 말도 진 군을 면대할 때는 결코 하는 것이 아니니,
 
"진 형의 완서는 일품이지."
 
하고 격찬을 할지언정 위조란 말은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진이 그 소식을 못 들을 리 없다.
기실 진은 속으로는 무척 걱정을 했다.
자기가 가진 것이 위조라? 하긴 그럴지도 몰라.
어쩐지 먹빛이 좋지 않고
옳을 가(可)자의 건너 그은 획이 이상하더라니…….
감식안이 높은 진 군은 의심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후 이 글씨가 누구의 사랑에서 호사를 하고 있는지 몰랐는데,
최근에 들으니까 어떤 경로를 밟아 어떻게 간 것인지는 모르나
진 군이 가졌던 추사 글씨는 위조라고 비웃던 양 군의 사랑에
버젓하게 걸려 있고 진 군은 그 글씨를 도로 팔라고
매일같이 조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추사 글씨란 아무튼 대단한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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