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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소리 - 김동리 -

까치소리 - 김동리 - 단골 서점에서 신간을 뒤적이다 『나의 생명을 물려 다오』하는 얄팍한 책자에 눈길이 멎었다. ‘살인자의 수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생명을 물려준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나는 무심코 그 책자를 집어 들어 첫장을 펼쳐 보았다. ‘책머리에’라는 서문에 해당하는 글을 몇 줄 읽다가 나도 어릴 때는 위대한 작가를 꿈꾸었지만, 전쟁은 나에게 살인자라는 낙인을 찍어 주었다는 말에 왠지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비슷한 말은 전에도 물론 얼마든지 여러 번 들어 왔던 터이다. 그런데도 이날 나는 왜 그 말에 유독 그렇게 가슴이 뭉클해졌는지, 그것은 나도 잘 모를 일이다. 위대한 작가를 꿈꾸었다는 말에 느닷없는 공감을 느꼈기 때문일까. 나..

한국단편문학 2025.08.12

후송(後送) - 서정인 -

후송(後送) - 서정인 - “성 중위님, 참모장님이 부르십니다.” 잘 닦아 번쩍이는 계급장을 단 상병이 삐걱거리는 판자바닥 위로 몇 걸음 걸어오면서 말했다. 콧날이 뾰죽하게 야윈 장교는 아무런 반응이 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사병은 자기의 말소리가 분명히 상대방에게 들릴 만큼 컸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장교의 눈 간 곳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퀀셋의 열려진 녹색의 창문이 있었고, 그 너머로는 텅 빈 높게 개인 가을 하늘뿐이었다. 사병이 다시 성 중위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 그는 천천히 업무일지와 만년필을 집어들면서 일어서고 있었다. 전갈 온 상병은 자기의 말이 전달되었음을 알아채고 덧붙였다. “약간 저기압인 거 같어요..

한국단편문학 2025.08.02

규중칠우쟁론기(閨中七友爭論記) - 작자미상 -

규중칠우쟁론기(閨中七友爭論記) - 작자미상 - 이른바 규중 칠우(閨中七友)는 부인내 방 가온데 일곱 벗이니 글하는 선배는 필묵(筆墨)과 조희 벼루로 문방 사우(文房四友)를 삼았나니 규중 녀잰들 홀로 어찌 벗이 없으리오. 이러므로 침선(針線) 돕는 유를 각각 명호를 정하여 벗을 삼을새, 바늘로, 세요 각시(細腰閣氏)라 하고, 척을, 척 부인(戚夫人)이라 하고, 가위로, 교두 각시(交頭閣氏)라 하고, 인도로, 인화 부인(引火夫人)이라 하고, 달우리(다리미)로, 울 랑자(熨娘子)라 하고, 실로, 청홍흑백 각시(靑紅黑白閣氏)라 하며, 골모(골무)로, 감토 할미라 하여, 칠우를 삼아 규중 부인..

한국단편문학 2025.07.26

날개 또는 수갑 - 윤흥길 -

날개 또는 수갑 - 윤흥길 - 회람. 조국위 번영과 사(社)의 발전을 외하여 오늘도 불철주야 산업 일선에서 분투 노력하시는 사우 각위. 일취월장하는 우리 동림산업의 기개를 대외에 과시함은 물론 사우간에 일체감을 조성하여 단결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데는 무엇보다 마땅히 제복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비등하여 왔던 바, 회사를 내 몸같이 아끼고 사랑하시는 동림가족 여러분의 충정 어린 권고와 건의를 그간 예의 검토하신 사장님께서는 금번 이를 십분 인정하시어 가칭 사복제정 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사우 여러분께서도 주지하다시피 사복이 그간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생산부에서는 이미 오래 전서부터 ..

한국단편문학 2025.07.19

탈향 - 이호철 -

탈향 - 이호철 -하룻밤 신세를 진 화차칸은 이튿날 곧잘 어디론가 없어지곤 했다. 더러는 하루 저녁에도 몇 번씩 이 화차 저 화차 자리를 옮겨 잡아야 했다. 자리를 잡고 누우면 그런대로 흐뭇했다. 나이 어린 나와 하원이가 가운데, 두찬이와 광석이가 양 가장자리에 눕곤 했다. 이상한 기척이 나서 밤중에 눈을 떠보면, 우리가 누운 화차칸은 또 화통에 매달려 달리곤 했다. “야야, 깨, 깨, 빨릿…….” 자다가 말고 뛰어내려야 했다. 광석이는 번번이 실수를 했다. 화차 가는 쪽으로가 아니라 반대쪽으로 뛰곤 했다. 내리고 보면 초량 제4부두 앞이기도 했고 부산진역 앞이기도 했다. 이 화차 저 화차 기웃거리며 또 다른 빈 화차를 찾아들어야 ..

한국단편문학 2025.07.12

명량한 밤길 - 공선옥 -

명량한 밤길 - 공선옥 - 비는 거칠게 그리고 지루하게 내렸다. 온 집안에서 습기 냄새가 진동했다. 장마가 시작된 지 일주일째다. 그 일주일 동안 비는 끊임없이 내렸다. …그래도 못 잊어 나 홀로 불러보네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훨훨 날아가자 내 사랑이 숨쉬는 곳으로… 나를 잠 못 들게 하는 사람아… 훨훨 훨훨 이 밤을 날아서… 나를 잠 못 들게 하는 사람아… 비오는 날이면 첫사랑이 생각나네요. 첫사랑이 생각날 때마다 마음이 괴로워요. 장마가 일찍 끝났으면 좋겠네요. 성심병원 수간호사… 수와진 파초… 불꽃처럼 살아야 돼 오늘도 어제처럼 저 들판에 풀잎처럼 우리 쓰러지지 말아야 해 모르는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행여나 돌아서..

한국단편문학 2025.07.05

도요새에 관한 망상 - 김원일 -

도요새에 관한 망상 - 김원일 - 1 모든 강은 바다로 이어졌다. 강의 하구에는 흙과 모래가 쌓인 삼각주가 있었다. 연장 54킬로미터의 동진강은 동해 남단 바다와 닿았다. 강 하구는 물살이 완만했고 민물과 짠물이 섞였다. 수심 얕은 수초 사이가 산란에 적당하기에 물고기가 모였다. 새우 무리와 조개 무리, 민등뼈동물도 모여들었다. 철새와 나그네새도 삼각주에서 주린 배를 채우며 날개를 손질하곤 떠났다. 나는 강 하구의 얕은 언덕에 앉아 있었다. 삼각주와 바다가 잘 내려다보였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강 하구에서 갈매기들이 날아올랐다. 갈매기들이 날개깃을 쳐대자 그 수다로 조용하던 개펄이 소란해졌다. 갈매기들은 주..

한국단편문학 2025.06.28

눈길 - 이청준 -

눈길 - 이청준 - "내일 아침 올라가야겠어요. " 점심상을 물러나 앉으면서 나는 마침내 입 속에서 별러 오던 소리를 내뱉어 버렸다. 노인과 아내가 동시에 밥숟가락을 멈추며 나의 얼굴을 멀거니 건너다본다. "내일 아침 올라가다니. 이참에도 또 그렇게 쉽게? " 노인은 결국 숟가락을 상위로 내려놓으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묻고 있었다. 나는 이제 내친걸음이었다. 어차피 일이 그렇게 될 바엔 말이 나온 김에 매듭을 분명히 지어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 내일 아침에 올라가겠어요. 방학을 얻어 온 학생 팔자도 아닌데, 남들 일할 때 저라고 이렇게 한가할 수가 있나요. 급하게 맡아 놓은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고요. "..

한국단편문학 2025.06.21

2 - 숙향전(淑香傳) - 작자 미상

2 - 숙향전(淑香傳) - 작자 미상 파랑새는 약속한 듯이 세 번 울고서 옥 밖으로 날아가니라. 이날 밤 선은 고모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어쩐지 마음이 산란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울울불락(鬱鬱不樂마음이 답답하고 즐겁지 아니함) 하더니, 파랑새가 날아와서 누워 있는 선의 팔에 앉으므로, 이상히 여기고 본즉, 새 발목에 혈서의 편지가 매어 있더라. 풀어서 본즉 숙향의 위급하고 애처로운 사연이더라. 혼비백산한 선은 그 혈서를 고모에게 보이고, 낙양 감옥으로 달려가서 숙향을 구하려고 하매, 『놀라운 불행이지만 아직 경솔히 굴지 말고 이화정 노파에게 시녀를 보내서 사정을 알아 오도록 하라.』 하고, 한편으로 이상서 댁의 노복을 불러서 사건의 전말을 물어서 자세히 내막을 알게 되자 부인이 대노하니라...

한국단편문학 2025.06.16

1 - 숙향전(淑香傳) - 작자 미상

1 - 숙향전(淑香傳) - 작자 미상 중국 송(宋)나라 때에 천하제일의 명공(明公유명하거나 훌륭한 재상)이 있었으니, 성은 김(金)이요 이름은 전(佺)이라 하더라. 그의 집안은 대대로 명문거족(名門巨族이름이 난 큰 가문. 대대로 명성이 높고 소유한 권력과 재산이 큰 가문)이라, 부친 운수선생(雲水先生)은 도덕이 높은 선비로서, 공명(功名공을 세워 자기의 이름을 널리 드러냄)에 뜻이 없어 산중에 은거하여 세월을 보내었으니, 천자(天子하늘의 뜻을 받아 하늘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군주 국가의 최고 통치자를 이르는 말. 임금 또는 왕)가 그 소문을 들으시고, 신하를 보내어 이부상서(吏部尙書)의 벼슬을 주며 불렀으나 종시 조정에 나오지 않고 산중에서 일생을 마치니, 집안이 처량하더라..

한국단편문학 2025.06.15

겨울 나들이 - 박완서 -

겨울 나들이 - 박완서 -나는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기분 좋아하기 전에, 이 온천물이 진짜일까 가짜일까, 고작 이런 주접스러운 생각부터 했다. 2류여관 특실의 평범한 타일 욕조에 달린 냉수․ 온수 두 개의 수도꼭지와 샤워는 여느 허름한 목욕탕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빨간 동그라미 표시가 있는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더운 물이 수도물 데운 게 아니고 땅에서 솟은 진짜 온천물이란 증거가 어디 있냐 말이다. 꼭 온천물에 몸을 담가야 할 만한 특별한 지병(持病)이 있는 것도 아니요, 또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는 대로의 온천물의 효험 따위를 믿어온 바도 없거늘 나는 그런 트집이라도 잡아 나를 더더욱 처량하게 만들고 싶었다. ..

한국단편문학 2025.06.08

한 강 (국문.4) - '편지' 92년 연세문화상(윤동주 문학상: )

92년 연세문화상 (윤동주 문학상 : 한 강 (국문.4) '편지' ) 편지 한강 (국문과 4학년) 그동안 아픈 데 없이 잘 지내셨는지 궁금했습니다 꽃 피고 지는 길 그 길을 떠나 겨울 한번 보내기가 이리 힘들어 때 아닌 삼월 봄눈 퍼붓습니다 겨우내내 지나온 열 끓는 세월 얼어붙은 밤과 낮을 지나며 한 평 아랫목의 눈물겨움 잊지 못할 겁니다 누가 감히 말하는 거야 무슨 근거로 무슨 근거로 이 눈이 멈춘 다고 멈추고 만다고… 천지에, 퍼붓는 이… 폭설이, 보이지 않아? 휘어져 부러지는 솔가지들,… 퇴색한 저 암록빛이, 이, 이, 바람 가운데, 기댈 벽 하나 없는 가운데,..

한국단편문학 2025.06.02

너와 나만의 시간 - 황순원 -

너와 나만의 시간 - 황순원 - 벌써 이틀째다. 한결같이 눈에 뵈는 것은 골목진 산봉우리와 계곡의 연속이었다. 그 속에는 아무 것도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곤 없는 성싶었다. 바람도 없었다. 주대위의 몸은 양쪽에서 부축을 받고도 자꾸만 아래로 늘어지기 시작했다. 마냥 그것은 두 사람의 어깨에 매달려 끌려가는 셈이나 다름없었다. 허벅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있는 것이다. 요행 동맥과 신경은 건드리지 않아 우선 압박대로 지혈을 시켜놓고 간신히 적의 포위망을 빠져나왔던 것인데, 오늘 아침부터는 그것이 부패작용이라도 일으켰는지 마구 저리고 쑤셔댔다. 어디까지 가면 된다는 한정된 길도 아니었다. 그저 무턱대고 남쪽으로만..

한국단편문학 2025.06.01

장미공원 1

장미공원 2025년5월21일 늦은 오후에 1시간정도로 운동삼아 산책길을 나선다. 이쪽 길, 저쪽 길, 그때 그때마다 편한 길로 정 한다. 그 중에 산책길 중간 쯤에 장미공원이 있다. 장미가 필 때면 공원에 인파가 몰리고 성황을 이루는데 요즘이 그럴 때다. 나도 그 틈에 끼어 예쁘게 핀 장미를 보듬어 본다. 한송이 송이가 사발만하게 피어 이미지 모두가 증명 사진처럼 되었다. 숫자가 많아 설명 보다는 줄줄이 나열하는 것을 택했다. 갖가지 장미들의 모습들이다. 오늘 오신 손님좋은 날 되시고 활짝 웃는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들이 이야기 2025.05.28

관촌수필 - 이문구 -

관촌수필 - 이문구 - 시골을 다녀오되 성묘가 목적이기는 근년으로 드문 일이었다. 더욱이 양력 정초에 몸소 그런 예모(禮貌, 예절에 맞는 모양)를 찾고 스스로 치름은 낳고 첫 겪음이기도 했다. 물론 귀성 열차를 끊어 앉고부터 "숭헌(흉한)…… 뉘라 양력 슬(설)두 슬이라 이른다더냐, 상것들이나 왜놈 세력(歲曆)을 아는 벱여……." 세모(歲暮, 섣달 그믐께)가 되면 한두 군데서 들어오던 세찬(歲饌, 세모에 선사하는 물건)을 놓고 으레껀 꾸중이시던 할아버지 말씀이 자주 되살아나 마음 한켠이 결리지 않은 바도 아니었지만, 시절이 이러매 신정 연휴를 빌미할 수밖에 없음을 달리 어쩌랴 하며 견딘 거였다. 그러나 할아버지한테 결례(불효)를 저지르고 있다는 느낌을 나 자신에..

한국단편문학 2025.05.25

장마 - 윤흥길 -

장마 - 윤흥길 - 1 밭에서 완두를 거두어들이고 난 바로 그 이튿날부터 시작된 비가 며칠이고 계속해서 내렸다. 비는 분말처럼 몽근 알갱이가 되고, 때로는 금방 보꾹(지붕의 안쪽. 지붕 안쪽의 구조물을 가리키기도 하고 지붕 밑과 반자 사이의 빈 공간에서 바라본 반자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라도 뚫고 쏟아져 내릴 듯한 두려움의 결정체들이 되어 수시로 변덕을 부리면서 칠흑의 밤을 온통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고 있었다. 동구 밖 어디쯤이 될까. 아마 상여를 넣어두는 빈집이 있는 둑길 근처일 것이다. 어쩐지 거기라면 개도 여우만큼 길고 음산한 울음을 충분히 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한국단편문학 2025.05.17

꽃나무는 심어 놓고 - 이태준 -

꽃나무는 심어 놓고 - 이태준 - “자꾸 돌아봔 뭘 해. 어서 바람을 졌을 때 휑하니 걸어야지….” 하면서 아내를 돌아보는 그도 말소리는 천연스러우나 눈에는 눈물이 다시 핑그르르 돌았다. 이 고갯마루만 넘어서면 저 동리는 다시 보려야 안 보이려니 생각할 때 발도 천 근이나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이 고개, 집에서 오 리밖에 안 되는 고개, 나무를 해, 지고 이 고개턱을 넘어설 때마다 제일 먼저 눈에 띄곤 하던 저 우리 집, 집에서 연기가 떠오르는 것을 볼 때마다 허리띠를 조르고 다시 나뭇짐을 지고 일어서곤 하던 이 고개, 이 고개에선 넘어가는 햇빛에 우리 집 울타리에 빨아 넌 아내의 치마까지 ..

한국단편문학 2025.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