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선 3

고장난 문 - 이범선 -

고장난 문                                                            - 이범선 -     "자, 그럼 처음부터 찬찬히 이야기해봐. 거짓말은 하지 않는 편이 좋아. 우린 벌써 다 알고 있으니까."    열 여덟 살 만덕이게게는 아버지뻘이나 되어 보이는 중년 수사관이 볼펜을 거기 조서 위에 굴려 놓고 걸상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어 앉았다. 이미 조서는 꾸며졌으니 들으나마나 한 이야기지만 하도 애원을 하니까 한 번 더 들어 봐 준다는 그런 태도였다.    "형사님, 제가 왜 무엇 때문에 거짓뿌렁을 합니까.  정말 억울합니다! 제가 한 말은 다 사실입니다.  요만큼도 거짓뿌렁 없읍니다."    책상 모서리에 놓인 나무 걸상에 두 무릎을 모으고 단정하게 앉은 만덕은 ..

한국단편문학 2025.03.23

표구된 휴지 - 이범선 -

표구된 휴지                                                                         - 이범선 -  니무슨주변에고기묵건나.  콩나물무거라.  참기름이나마니처서무그라.   누렇게 뜬 창호지에다 먹으로 쓴 편지의 일절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피곤할 때면 화실 안쪽 벽에 걸린 그 조그만 액자의 편지를 읽는 버릇이 생겼다. 그건 매우 서투른 글씨의 편지다. 앞 부분과 끝 부분은 없고 중간의 일부분만인 그 편지는 누가 누구에게 보낸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다만 그 내용으로 미루어 시골에 있는 늙은 아버지  ( 어쩌면 할아버지일지도 모른다.)가 서울에 돈 벌러 올라온 아들에게 쓴 것으로 생각되는 까닭은 그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그보다더 더 그 편지의 종이나 글..

한국단편문학 2024.08.29

오발탄 - 이범선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오발탄 - 이범선 - 계리사(計理士) 사무실 서기 송철호(宋哲浩)는 여섯 시가 넘도록 사무실 한구석 자기 자리에 멍청하니 앉아 있었다. 무슨 미진한 사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장부는 벌써 집어치운지 오래고 그야말로 멍청하니 그저 앉아 있는 것이었다. 딴 친구들은 눈으로 시계바늘을 밀어 올리다시피 다섯 시를 기다려 후다닥 나가 버렸다. 그런데 점심도 못 먹은 철호는 허기가 나서만이 아니라 갈 데도 없었다. "송 선생은 안 나가세요?" 이제 청소를 해야 할테니 그만 나가달라는 투의 사환애의 말에, 철호는 다 낡아빠진 해군 작업복 저고리 호주머니에 깊숙이 찌르고 있던 두 손을 빼내어서 무겁게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나가야지." 하품 같은 대답이었다. 사환애는 저쪽 구석에서부터..

한국단편문학 2024.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