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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당 벽 화
- 정한숙 -
목탁(木鐸)소리가 비늘진 금빛 낙조(落照) 속에 여운(餘韻)을 끌며
울창한 수림을 헤치고 기복(起伏)진 구릉(丘陵) 밑으로 흐르고 있다.
무성한 숲과 숲 사이에 스며드는 습기에 오늘도 돌바위의 이끼는
어제련 듯 푸르고, 암과 수가 짝지어 어르는 사슴의 울음은,
남국적인 정서로 이국의 향수를 돕는 듯하다.
담징(曇徵)은 바위에 앉은 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서녘 하늘은 젖빛 구름 속에 붉은 빛을 금긋는가 하면,
자줏빛 구름이 솟구쳐 흐르고, 그것이 퍼져, 다시 푸른 바탕으로 변하면
하늘은 자기 재주에 겨워 회색 빛으로 아련히 어두워 간다.
돌바위에 기대앉은 담징은, 한순간도 쉬지 않고 서녘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그의 동광(瞳光)은 하늘빛을 닮은 듯 듬뿍 부풀어 올랐던 희열의 빛이
잦아들며, 몽롱한 꿈 속에 잠기는 듯 흐려졌다.
기지개를 펴며 자리를 옮겨 앉은 담징은 묵묵히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
고국의 향수에 못이겨 나그네의 신세를 슬퍼하는 것은 아니다.
애를 만들어 이 땅의 사람들을 경탄케 한 것도,
벌써 이삼 삭(朔) 전 일이었다.
그러나 담징의 사명은 그것에 있지 않았다.
생각하면 고국을 등진 지 삼 년.
보시(布施)의 길을 떠나 백제땅을 거쳐 신라에 머물다 도왜(渡倭)한지도
지금엔 어언 이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름이 종교적인 보시였지,
사실 담징에겐 수학(修學)의 길이나 다름 없었다.
준엄한 산악...... 그리고 북방 오랑캐들의 침범에 의한
끊임없는 전란...... 담징은 고국의 땅 고구려에선 편안히 화필을
부여잡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말하자면 자기의 예술적 포부를 마음대로 발휘할 수 없었던 까닭에,
종교적인 보시라는 명목 밑에, 수학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고국을 떠나 백제에 놀고, 백제를 거쳐 신라에 배운 담징은
때마침 왜국(倭國)의 초빙에 응하였던 것이다.
왜국의 청에 응하면서도 담징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수문제(隨文帝)의 원정(遠征) 이후 북방의 풍운은 날로 거칠어 갔으니
어느 때건, 다시 한 번 우레는 번개로 터지지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오늘에 양제(煬帝) 이백만 대군을 수륙 양군으로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범하려 한다는 소식이 남단 신라에까지 번져 왔을 때,
바로 담징이 왜국의 초빙을 받고 신라 땅을 떠나려던 무렵이었다.
조국의 운명이 풍전 등화(風前燈火)의 위험에 휩쓸려 들려는 이때,
조국을 영원히 등진다는 것은 하나의 도피(逃避)에 틀림없었다.
보시의 생활을 하면서도 고구려인의 긍지를 잃지 않았던 떳떳한 조국이었다.
지금 그 조국의 북방이, 오랑캐들의 발굽 아래 휩쓸려 들려는 순간,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조국을 등지려 하는 담징으로선
견딜 수 없는 고민이 없을 수 없었다.
담징은 단연 도왜를 단념하고, 발길을 북방으로 달리려 했었지만,
부득이한 사세는 그것조차 허락치 않았다.
불전(佛典)에 서면 승(僧)이요, 화필을 잡으면 속(俗)으로 돌아가
화공(畵工)이었지만, 조국의 품에 안길 땐 조국의 방패여야 할 몸이였다.
말하자면 담징은 승속(僧俗)의 세계를 오고가는 종교 예술가이며,
조국의 아들이다.
어이 조국을 등질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모든 것을 초탈한 순순한
고구려 청년으로서의 기백과 번민이기도 했다.
그러나 주위와 환경은 담징의 이런 기백과 열정으로서만 처리할 순 없었다.
조국에 대한 국민적인 의무도 중했지만,
조국의 국제적인 신의(信義)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떠나진 않았다 해도, 이미 언약한 후였던 까닭이다.
오늘날까지 화필을 잡지 못한 것도, 조국의 안위(安危)를 염려하는 그것도
그것이었지만, 기실 자책의 뉘우침에 하염없이 세월을 보내온 것이다.
메아리같은 사슴의 어르는 울음소리도 이젠 들리지 않는다.
뿌연 안개만이 담징이 앉아 있는 돌뿌리 밑으로 번져오를 따름이다.
어둠 스치고 지나가는 은하(銀河)의 잔별들은 총총히 빛나건만,
담징의 가슴 속에 흐르는 회상(回想)과 전망(展望)의 꿈은
경경 각각(頃頃刻刻)으로 흐터져 오르내리기만 했다.
금당(金堂) 벽화를 그리기로 언약한 지도 벌써 칠팔삭이 지났지만,
담징은 성큼 손이 붓에 쥐어지질 않았다.
무위 도식하다시피 하는 담징의 태도에 왜승(倭僧)들의 쑥덕거림도
모르는 바도 아니다.
승적(僧籍)에도 없는 자라는둥 화공을 가장한 부랑배라는둥,
갖은 욕이 떠돌고 있음에도 귀익혀 들은 말이었다.
그러나 담징은 일언 반구도 이에 응하지 않았다.
벌써 채색(采色)의 정제(精製)를 해놓은 지도 오래였다.
그러나 붓을 들고 벽면(壁面)을 향하면 구슬같이 아롱진
열반(涅槃)의 환상은 고사하고, 피비린내 풍기는 조국의 현실만이
떠오를 따름이었다.
거센 산맥의 좁다란 등허리에 매달려 땅을 일으키고 산을 파내며
악착같이 살아가려는 동족 앞에 몰려든 어지러운 국난......
담징은 들었던 붓도 던진 채, 그대로 벽면을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숨가쁜 순간이었다.
그럴 때마다 담징의 이마엔 땀이 배잦아 오르곤 했다.
“휘유......”
한숨도 내뿜어야 하는 담징은 걷잡을수 없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라도
절 뒤 펑퍼진 들판을 방황해야만 했다.
그는 몇 번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이 절 주지에게 간청하다시피 했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주지는 허락은커녕 펄쩍 뛰는 눈치였고,
그런대로 붓을 들 수 있는 시기까지 기다려 달라는 말뿐이었다.
담징으로선 그것마저도 이젠 미안스러웠고 송구스럽기만 했다.
오늘도 담징은 일찌감치 금당으로 들어가 붓을 가다듬어 보려고 했었지만,
코 끝에 서려 드는 살생(殺生)의 피비린내에 얼굴을 들지 못했다.
담징은 그냥 금당 마룻바닥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동포들의 신음소리가 가슴을 두들겨 놓았고,
오랑캐들의 말발굽이 등허리를 밟는 것 같았던 까닭이다.
합장한 손끝엔 눈물이 젖어들었다.
아 ― 조국의 현실이......
조국의 진통......
조국에의 고민......
담징은 도저히 자기로선
금당 벽화를 착공(着工)할 도리가 없을 것만 같았다.
붓을 던지다시피 하고 뜰로 나온 담징은 진종일 바위에 앉은 채
하루해를 보낸 것도 결국 이 모든 괴로움을 잊어 버리려는 생각에서였지만,
잊혀지기는 고사하고 또렷또렷한 별 그림자 속엔
조국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고달픈 얼굴들만이 떠올랐다.
저기 북녘 끝 외로이 떨어져 있는 북극성 모양
지금 이 바위에 앉아 있는 자기 모습이 더욱 외로웠고,
조국에 대한 뉘우침만이 컸다.
눅눅한 밤이슬이 옷깃에까지 번져 들었다.
담징은 바위에서 일어났으나 발길이 옮겨지질 않았다.
얽힌 나뭇가지 사이로 스치는 바람에 잎들이 우수수 흔들린다.
담징이 발걸음을 옮기지 못함은 다름이 아니었다.
이백만의 대군을 몰고 조국의 변두리를 침범해 왔다는
오랑캐들의 말굽소리 같은 착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담징의 전신엔 피가 역류하듯 불끈 힘줄이 뻗혔고,
그 눈에선 살생의 불길이 솟아오르는 듯 뜨거웠다.
오늘날까지 닦아온 자비(慈悲)의 불심(佛心)은 이 순간에 물거품같이
사라졌다.
불끈 쥔 의분(義憤)의 주먹은 펴지질 않는다.
비록 불도에 어긋난다 해도 담징은 조국을 버릴 수 없었고,
살생의 죄로 불심(佛心)에서 버림을 받는다 해도 조국의 멸망을
보고 있을 순 없었다.
하늘녘을 응시하고 있는 담징의 눈앞엔, 오랑캐를 쫓아 허허벌판을 다렸다.
지금 막 꼬리를 길게 끌며 사라지는 유성의 그림자에
담징의 눈살은 절로 찌푸러져 갔다.
불길한 징조인 듯 싶었던 까닭이다.
명장(名將)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있다 해도, 중과 부적(衆寡不敵)일 때는
어이할 것인가?
을지문덕 장군을 믿지 못함이 아니라 조국의 위기를 도피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가책이 앞섰던 까닭이다.
육모 방망이를 든 왜승들에게 쫓기어 담징은 어둠 속을 달음질치고 있었다.
죽여 버려라는 함성이 어둠 속에 요란하였다.
어둠속이라 다행히 그들은 담징을 쉬 찾아 내지들을 못하는 것 같았다.
횃불 치켜든 그들은 샅샅이 훑으며 그를 찾으려고 했다.
언덕 밑으로 쫓기던 담징은 이젠 기진하여 발목을 가눌 기력조차 없었다.
왜승들의 고함소리가 횃불 모양 또다시 어둠 속에 피어올랐다.
대자 대비(大慈大悲)의 부처님을 생각할 시간적 여유조차 갖지 못한 담징은
죽음을 각오하며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런 변을 당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치욕이기도 했지만
솟구치는 분길을 참을 순 없었다.
주먹을 움켜쥔 담징은 이를 가로 물었다.
맞아 쓰러지는 한이 있다 해도 그냥 쓰러질 수 없는 일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
왜승들의 방망이에 맞아 쓰리질지언정 정신을 잃지 않으려는 악바지에,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굶주린 쥐가 굉이에게 덤벼들 만한 용기는 나지 않았다.
생각하면 조국을 배반한 죄과인 것 같기만 했다.
당연히 받아야 할 형벌이라 생각하는 순간,
담징의 어깨쭉지는 푹 늘어지도록 힘이 빠지는 듯하였다.
눈앞에 번뜩이는 것은 왜승들의 불빛에 들어난 육모방망이 뿐이다.
개중엔 낯익은 놈들도 있으련만, 그들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서
분간할 수가 없었다.
어느 놈의 어느 몽둥인지 의식 못해도 정통으로 얻어맞은 담징은
번개불같은 불꽃을 쏟으며 그냥 쓰러지고 말았다.
왜승들의 고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피가 흐르는지, 이마와 목덜미가 축축히 젖어들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담징은 아직도 자기가 살아 있다는 의식을 잃지 않았다.
심한 갈증이 났지만, 소리 지를 수가 없었다.
한 눈을 살며시 떠보았다.
횃불 그림자도 뵈질 않았다. 총총한 별 그림자뿐만이 어렴풋이 흘렀다.
머리의 상처를 더듬으려는 순간, 담징은 벌떡 잠에서 깨어났다.
이마에 흐르는 것은 피가 아니라 구슬같은 땀방울이다.
대를 짐작할 순 없었지만, 어둠만이 사창(沙窓)을 가로막고 있었다.
숨길을 길게 돌리고 난 담징은 머리맡을 쓰다듬어
백팔염주(百八念珠)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어둠만이 한층더 짙어가는 것으로 보아 동이 트려는 무렵이 확실했다.
느긋한 바람이 땀에 젖어든 앞가슴 속으로 스며든다.
담징은 절로 얼굴이 달아오는 것 같았다.
비록 꿈일망정 신세를 끼치고 있는 주지에게 미안하였고,
부덕(不德)한 자기 수도(修道)가 뉘우치는 부끄러움이
가슴팍을 찌르는 것이었다.
생각하면, 요즈음 지나치게 속된 생활 속에 불공(佛供)을 게을리한
가책도 없지 않았다.
삼라 만상(森羅萬象)은 어둠 속에 잠들어 각기의 꿈에 잠기는 즈음,
금당으로 간 담징은 불당 앞에 불을 밝히고 주위를 정히 가다듬었다.
합장(合掌)하고 단좌한 담징의 손끝이 너울거리는 불빛 밑에
선인장(仙人掌)같이 뻗어올랐다.
몸을 도사리고 있는 배암모양 장심(掌心) 밖으로 감겨져 있는
염주의 알알이 불빛에 빛난다.
불상의 자비하신 얼굴을 담징은 감히 우러러 쳐다볼 수가 없었다.
흉중(胸中)에 오르내리는 잡념(雜念)을 가시게 하려고
그는 열심히 불경을 외우고 있다.
생각하면 꿈일 망정 자신을 비방하는 왜승들을 미워한 것만은 사실이다.
지금 담징으로선, 도저히 그럴 처지가 못 되었다.
허다한 세월을 두고두고 그들의 신세를 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무엇보다 불도에 어그러지는 일이었다.
어둠을 몰아가는 바람이 추녀 끝에 부딪치고, 다시 불당 안으로 꼬리쳐,
켜놓았던 불을 불어 꺼 버린다.
합장한 채 눈을 감고 앉아 있는 담징으로서
그런 것에 개의할 바가 아니었다. 호심(湖心)같이 잔잔하던 그의 얼굴에
주름이 잡히며 찡그러졌다.
그는 갑작스레 숨길이 가빠져 휘우 모두 숨을 내뿜었다.
염불을 할수록 꼬리를 치며 일어나는 잡념을 누를 길이 없었다.
부처의 자비도 열반의 즐거움도 추녀 끝에 부딪칠 바람이
어둠을 몰아가듯 담징의 가슴 속으로부터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어금니에 힘을 주는 순간, 담징의 합장한 손끝이 풍에 걸린 듯
부루루 떨어 올랐다.
살생의 피비린내가 코 끝에 스며들고 멀리 조국의 땅을 침범한
오랑캐의 말발굽 같은 소리뿐만이 귓가에 웅성거리는 것이었다.
담징은 더 참고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장심을 감고 있던 염주가 불당 앞에 떨어졌다.
주먹을 움켜쥔 담징은 벌떡 일어서 버리고 말았다.
동이 훤하게 텄다.
메아리 같은 사슴의 울음소리가 들려 오고 목탁 소리가 울리건만
담징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눈자위엔 살기가 떠돌아 충혈하여 벌겋게 핏빛이 갔다.
금당 밖으로 나오던 담징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느틈엔지 법릉사(法陵寺) 주지가 서 있었던 까닭이다.
생불(生佛)이라 위엄을 받는 그였다.
담징은 자기도 의식 못한 채 합장을 했다.
그도 맞받아 합장을 하며, 꿇어 앉았다 일어선다.
“기뻐하소서...... 양제의 이백만 대군이 을지문덕 장군의 한 칼 밑에
가랑잎같이 부서지고 말았나이다.
대사가 금당 벽화를 착공할 때가 왔나 보오이다.”
담징은 다시 한번 크게 놀라며 눈을 뜨고 일어섰다.
주지는 말없이 보살(菩薩)같은 미소를 띄우며 다시 합장 배례하고
총총한 걸음으로 금당 앞 돌층계를 내려갔다.
이심 전심(以心傳心)의 비법(秘法)이랄까......
이 절 주지만은 오늘날까지 자기가 화필을 잡지 못하고 있었던 이유를
알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담징은 그지없이 고마웠다.
주지의 뒷그림자를 멀리 바라보면서 그는 꿇어앉아 합장한 채
일어서질 않는다.
버얼겋게 물든 동녘 하늘의 아침 기운이 울창한 수목들을
물들어 비치고 있다.
목탁 소리도 그쳤다.
불당 앞으로 돌아온 담징은 떨어뜨렸던 염주를 주워들고
다시 합장 배례한다.
아침 이슬이 풀잎에 굴러 스며들 듯 염주 한알 한알이
그의 엄지손가락을 타고 장심속으로 굴러내리고 있다.
푸른 빛은 아침 볕을 받아 더욱 빛나고 있다.
황홀찬란한 이 모든 빛에 눈부셔, 담징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가슴에 북받쳐 오르는 희열(喜悅)......
조국에 대한 끝없는 감사의 염(念)
북녘 하늘을 향하여 몇 번이나 합장·재배 해도 받쳐 오는 환희(歡喜)는
가라앉을 줄 몰랐다.
그제야 비로소 담징은 합장한 손끝에서 불심의 자비도 느낄 수 있었다.
담징은 다시 금당 벽면을 향하여 섰다.
벽면엔 아침 햇빛이 훤히 들이비치고 있다.
정제해 두었던 채색통을 날라 놓게 하고, 다음은 우거진 숲 사이에
흐르는 샘터로 가서 속세의 때를 베끼려는 듯 깨끗이 닦고 닦았다.
어쩔 수 없이 터져오르는 환희를 경건(敬虔)한 불심으로 바꾸어
벽화를 착공하려는 마음에서였다.
붓을 든 담징의 손길이 무학(無學)같이 벽 앞에 나는 가 하면,
진한 빛이 용(龍)의 초리(꼬리)같이 벽면을 스쳤다.
격곡한 골법(骨法)이여!
그 오고가는 선(線)엔 북방 고구려(高句麗) 남아(男兒)의
의연(毅然)한 기상이 맺혔고......
부드러운 색조(色調)여......
땅에 젖었던 백제(百濟)의 다사로운 꿈이 깃든 속에
남국적(南國的)인 정열의 풍윤(豊潤)함이 어렸도다.
동방을 제패(制覇)한 조국 고구려의 환희는 관음상(觀音像)의 미소를
자아내게 하고 담징의 싱싱한 예술적 포부는
여기 무르익어 관음상의 불룩한 유방(乳房) 위에 구슬같이 맺혔다.
이른 봄같이 다사로운 감촉이 숨은 보살의 손 끝에
지금 악에 멸망당한 수많은 오랑캐들의 죽음을 조상하는
불심의 자비가 흘렀다.
목에 걸린 구슬이여......
소식조차 아득한 조국땅에 남아 있을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의 얼굴이련가......
알알이 빛나고 줄이어 맺었으니, 국난을 막기 위한 단결된
그들의 정성이 여기 있도다.
담징은 비로소 붓을 놓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었다.
붓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선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화면을 바라본다.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건만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것 같았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서 있다.
굶주린 금욕의 세계여......
한순간 조국땅에 두고 온 이름 모를 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담징은 다시 눈을 크게 뜨고 화면을 들여다 보았다.
마음 속의 영상이 더 뚜렷해질 뿐이다.
담징은 몹시 괴로웠다.
그것은 열반의 세계를 구현(具現)한 것이 아니라,
사파를 모방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다시 붓을 든 담징은 한 걸음 물러섰다 앞으로 나간다.
그대로 화면을 지워 버리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담징은 다시 주춤 서 버린다.
초생달같은 아미(娥眉)
열반의 세계가 그 속에 있어야 하겠고, 속세의 거칠음도,
그 가운데 있는 듯 싶었던 까닭이다.
넓은 듯 좁은 그 미간(眉間)은 그리운 여인의 마음인 듯 하였다.
여자의 마음이 너그러움은 헤픈 것을 말하는 것 같아 담징에겐 싫었다.
담징은 속세에 대한 마지막 미련인 듯 그 미간에다 일점(一點)을 찍어
자기의 정성을 다했다.
헤프지 말라는 뜻에서가 아니라 다시는 자기의 의식의 세계에서
그런 생각을 버리려는 생각에서였다.
붓을 놓고 그는 빙그레 웃으며, 다시 화면을 쳐다보았다.
범할 수 없는 관음상이여......
그리운 사람의 환상(幻想) 마저 잊으려는 담징의
각고(刻苦)의 노력에 의하여 열바의 상징 보살이 이룽졌도다.
벽면엔 저녁 노을이 물들기 시작한다.
담징의 등 뒤에 서 있던 주지가 구현된 지상열반의 세계에 도취하여,
그만 합장한 채 꿇어 엎드렸다.
담징을 비방하던 모든 왜승들도 주지의 옆과 뒤에 꿇어 엎드린 채
합장을 하고 있다.
조국의 국난이 없었던들...... 조국의 승전의 쾌보를 받지 못했던들......
금당 벽화는 한낱 승 담징의 관념의 표백에 끝이었을런지도 모른다.
윤(潤)에 흐르는 생기(生氣)여!
그것은 조국에 대한 담징의 충혼이 깃들어 있었다.
화면을 쳐다보고 서 있던 담징도 그냥 버티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붓 대신 염주를 든 그도 뭇승들과 같이 합장하며 꿇어앉아 버렸다.
누가 피워 놓은 향불이 피어오르고 있다.
오고가는 숨길에 떠오르던 진세(塵世)의 타취(唾臭)도
향불 속에 가라 앉는것만 같다.
가사(袈裟)를 둘러맨 주지가 어느새 맨앞에 앉아 목탁을 두들기면
뒤에서 누구인지가 법고(法鼓)를 울린다.
뭇승들은 그때마다 일제히 일어섰다 앉으며 배례를 한다.
자기 손에 이루어진 관음상이건만 지금 담징에겐 그것이
자기 의식의 세계는 아닌 것만 같았다.
벽면엔 관음상의 염화 시중의 미소가 빛나고
타오르는 향불 속에 목탁과 법고가 울리며 뭇승들의 합창 배례가
그칠 줄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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