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편지
그동안 아픈데 없이 잘 지내셨는지
궁금했습니다
꽃 피고 지는 길
그 길을 떠나
겨울 한번 보내기가 이리 힘들어
때 아닌 삼월 봄눈 퍼붓습니다
겨우내내 지나온 열 끓는 세월
얼어붙은 밤과 낮을 지나며
한 평 아랫목의 눈물겨움
잊지 못할 겁니다
누가 감히 말하는 거야 무슨 근거로
이 눈이 멈춘다고 멈추고 만다고··· 천지에,
퍼붓는 이··· 폭설이, 보이지 않아?
휘어져 부러지는 솔가지들,···
퇴색한 저 암록빛이, 이, 이, 바람가운데,
기댈 벽 하나 없는 가운데,
아아··· 나아갈 길조차 묻혀버린 곳, 이곳 말이야···
그래 지낼 만하신지 아직도 삶은
또아리튼 협곡인지 당신의 노래는
아직도 허물리는 곤두박질인지
당신을 보고난 밤이면 새도록 등이 시려워
가슴 타는 꿈 속에
어둠은 빛이 되고
부셔 눈 못 뜰 빛이 되고
흉몽처럼 눈 멀어 서리치던 새벽
동 트는 창문빛까지 아팠었지요.
··· ··· ···어째서···
마지막 희망은 잘리지 않는 건가
지리멸렬한 믿음
지리멸렬한 희망 계속되는 호흡 무기력한,
무기력한 구토와 삶,
오오, 젠장할 삶
악물린 입술
푸른 인광 뿜던 눈에 지금쯤은
달디 단 물들이 고였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한번쯤은
세상 더 산 사람들처럼 마주 보고
웃어보고 싶었습니다.
사랑이었을까···
잃을 사랑조차 없었던 날들을 지나 여기까지,
눈물도 눈물겨움도 없는 날들 파도와 함께 쓸려가지 못한 목숨,
목숨들 뻘밭에 뒹굴고
당신 없이도 천지에 봄이 왔습니다
눈 그친 이곳에 바람이 붑니다
더운 바람이,
몰아쳐도 이제는 춥지 않은 바람이 분말같은 햇살을 몰고 옵니다
이 길을 기억하십니까
꽃 피고 지는 길
다시 그 길입니다
바로 그 길입니다
<92년 연세문화상(윤동주 문학상: 한 강(국문.4)-'편지'>
2. 서울의 겨울 12
어느 날 어느 날이 와서
그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
그날에 네가 사랑으로 온다면
내 가슴 온통 물빛이겠네, 네 사랑
내 가슴에 잠겨
차마 숨 못 쉬겠네
내가 네 호흡이 되어주지, 네 먹장 입술에
벅찬 숨결이 되어주지, 네가 온다면 사랑아,
올 수만 있다면
살얼음 흐른 내 뺨에 너 좋아하던
강물 소리,
들려주겠네
「서울의 겨울 12」,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3.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거리 한가운데서 얼굴을 가리고 울어보았지
믿을 수 없었어, 아직 눈물이 남아 있었다니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선 채로 기다렸어, 그득 차오르기를
모르겠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쳐갔는지
거리 거리, 골목 골목으로 흘러갔는지
누군가 내 몸을 두드렸다면 놀랐을 거야
누군가 귀 기울였다면 놀랐을 거야
검은 물소리가 울렸을 테니까
깊은 물소리가 울렸을 테니까
둥글게
더 둥글게
파문이 번졌을 테니까
믿을 수 없었어, 아직 눈물이 남아 있었다니
알 수 없었어,더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니
거리 한가운데서 혼자 걷고 있을 때였지
그렇게 영원히 죽었어,내 가슴에서 당신은
거리 한가운데서 혼자 걷고 있을 때였지
그렇게 다시 깨어났어, 내 가슴에서 생명은
4.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5. 조용한 날들
아프다가
담 밑에서
하얀 돌을 보았다
오래 때가 묻은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아직 다 둥글어지지 않은 돌
좋겠다 너는,
생명이 없어서
아무리 들여다봐도
마주 보는 눈이 없다
어둑어둑 피 흘린 해가
네 환한 언저리를 에워싸고
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
무엇에게도
아프다가
돌아오다가
지워지는 길 위에
쪼그려 앉았다가
손을 뻗지 않았다
6.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하루가 끝나면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둔다
저녁이 식기 전에
나는 퇴근을 한다
저녁은 서랍 안에서
식어가고 있지만
나는 퇴근을 한다
하루의 무게를 내려놓고
서랍에 넣어 둔 저녁은
아직도 따뜻하다
나는 퇴근을 한다
저녁이 식기 전에
퇴근을 하면서
저녁을 꺼내어
따뜻한 한 끼를 먹는다
하루의 끝에서
퇴근을 하고
서랍에 넣어 둔 저녁을 꺼내면
하루의 무게가 가벼워진다
나는 퇴근을 한다
퇴근을 하면서
저녁을 꺼내어
따뜻한 한 끼를 먹는다
하루의 끝에서
7. 첫새벽
첫새벽에 바친다 내
정갈한 절망을,
방금 입술 연 읊조림을
감은 머리칼
정수리까지 얼음 번지는
영하의 바람, 바람에 바친다 내
맑게 씻은 귀와 코와 혀를
어둠들 술렁이며 포도(鋪道)를 덮친다
한 번도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한 텃새들
여태 제 가슴털에 부리를 묻었을 때
밟는다, 가파른 골목
바람 안고 걸으면
일제히 외등이 꺼지는 시간
살얼음이 가장 단단한 시간
박명(薄明) 비껴 내리는 곳마다
빛나려 애쓰는 조각, 조각들
아아 첫새벽,
밤새 씻기워 이제야 얼어붙은
늘 거기 눈뜬 슬픔,
슬픔에 바친다 내
생생한 혈관을, 고동소리를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2013 문학과지성사>
8. 파란 돌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투명한 물결 아래
희고 둥근
조약돌들 보았지
해맑아라,
하나, 둘, 셋
거기 있었네
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
그 돌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난 눈을 떴고,
깊은 밤이었고,
꿈에 흘린 눈물은 아직 따뜻했네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동안 주운 적 있을까
놓친 적도 있을까
영영 잃은 적도 있을까
새벽이면 선잠 속에 스며들던 것
그 푸른 그림자였을까
십 년 전 꿈에 본
그 빛나는 내(川)로
돌아가 들여다보면
아직 거기
눈동자처럼 고요할까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2013 문학과지성사>
9. 효에게 2002 겨울
(작가가 아들에게 쓴 편지)
바다가 나한테 오지 않았어.
겁먹은 얼굴로
아이가 말했다
밀려오길래, 먼 데서부터
밀려오길래
우리 몸을 지나 계속차오르기만 한 줄 알았나보다
바다가 너한테 오지 않았니
하지만 다시 밀려들기 시작할 땐
다시 끝없을 것처럼 느껴지겠지
내 다리를 끌어안고 다시 뒤로 숨겠지
마치 내가
그 어떤 것,
바다로부터조차 널
지켜줄 수 있는 것처럼
기침이 깊어
먹은 것을 토해내며
눈물을 흘리며
엄마, 엄마를 부르던 것처럼
마치 나에게
그걸 멈춰줄 힘이 있는 듯이
하지만 곧
너도 알게 되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억하는 일뿐이란 걸
저 번쩍이는 거대한 흐름과
시간과
成長,
집요하게 사라지고
새로 태어나는 것들 앞에
우리가 함께 있었다는 걸
색색의 알 같은 순간들을
함께 품었던 시절의 은밀함을
처음부터 모래로 지은
이 몸에 새겨두는 일뿐인 걸
괜찮아
아직 바다는 오지 않으니까
우리를 쓸어가기 전까지
우린 이렇게 나란히 서 있을 테니까
흰 돌과 조개껍질을 더 주울 테니까
파도에 젖은 신발을 말릴 테니까
까끌거리는 모래를 털며
때로는주저앉아 더러운 손으로
눈을 훔치기도 하며
한강-효에게.2002.겨울
10. 2월
나의 어머니, 쉰 두살, 윗입술이 잘 부르트시고,
반세기를 건너오시면서
도 웃을 때면 음조나 표정이 소녀같은, 아니 소년같은 분.
고즈넉한 저녁 딸과 마주앉아 마늘을 까신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풀피리
소리, 바람 찬 창으로 두리번거리던 딸은 소리의 주인공을 발견 못 한다.
이렇게 또 봄이 온다는 건가. 딸은 믿을 수가 없다.
구성진 가락은 다뉴브강의
푸른 물결, 윤심덕이 부른 노래.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좋은 날은 다 지나가버린 것 같아요 엄마
어머니 조용히 웃으신다
너도 지금 좋을 적 아니냐
이젠 저도 책임져야 될 나이가 된 걸요, 곧 졸업이에요
어머니 일어나 가스렌지 불을 줄이신다
느그 외할무니 하시던 말씀이 다 맞어야···비 피할라고 잠깐 굴에 들어갔
다 나온 것맨이로 그렇게 청춘이 가버린다고···
그렇게 청춘이 갔어요 어머니, 늪같은 청춘이 며칠 밤 목울음으로 다 새어
나가버렸어요
엄마 청춘도 그랬어요?
웃으며 딸이 짐짓 묻는다
글쎄,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야
어머니 조용히 밥을 푸신다
하나도 기억이 안나···
어머니, 무엇이 아픈 어머니의 머리를 떠돌고 있을지, 혼령같은, 무슨 통
곡같은
나는 다시 태어나믄 사람으로 안 태어나고 싶어야, 꽃이나아, 나무나아,
새나, 난 그런 것으로 태어나고 싶어야
엄마, 새는 고달퍼요 벌레도 잡아먹어야 하고 허공을 종일 날아야 하잖아
요 산탄총을 피해야하고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아야 해요
뭣은 그렇게 안 힘들다냐.
어머니 다시 조용히 웃으신다
엄마, 이왕이면 나무가 좋아요. 꽃은 금세 시들잖아요 흙 좋고 깊은 땅에,
아무도 베어가지 못할 곳에요·· 기껏 나무로 태어났는데 그리로 길이라도
나면 어떡해요. 국도가 나지않을 한것진 들에 큰 나무로요···
어머니 웃으시네 소녀처럼, 아니 소년처럼 어머니, 우리 어머니 소리내어
웃으시네
정말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라믄, 베어지면 또 딴걸로 태어날 거 아
니냐
····뭐가 걱정이냐
나의 어머니, 쉰 두살, 그렇게 다치시고도, 벌집이 되시고도 상처로 진물
흐르지 않는 분, 눈물만, 고즈넉히 맑은 물만 흐르는 분, 반세기의 毒 묻은
사랑, 슬픔으로만 오로지 슬픔으로만 번지는 분
냇가에 나갔더니 어머니, 온통 얼음인데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요
(한강 시인이 대학 4학년 때 과제로 쓴 시임)
11. 어깨뼈
사람의 몸에서
가장 정신적인 곳이 어디냐고
누군가 물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어깨라고 대답했어
쓸쓸한 사람은
어깨만 보면
알 수 있잖아
긴장하면 딱딱하게 굳고
두려우면 움츠러들고
당당할 때면
활짝 넓어지는 게 어깨지
당신을 만나기 전
목덜미와 어깨 사이가
쪼개질 듯 저려올 때면
내 손으로
그 자리를 짚어 주무르면서
생각하곤 했어
이 손이
햇빛이었으면
나직한 오월의
바람소리였으면
12. 휠체어 댄스
눈물은
이제 습관이 되었어요
하지만 그게
나를 다 삼키진 않았죠
악몽도
이제 습관이 되었어요
가닥가닥 온몸의 혈관으로
타들어오는 불면의 밤도
나를 다 먹어치울 순 없어요
보세요
나는 춤을 춘답니다
타오르는 휠체어 위에서
어깨를 흔들어요
오, 격렬히
어떤 마술도
비법도 없어요
단지 어떤 것도 날
다 파괴하지 못한 것뿐
어떤 지옥도
욕설과
무덤
저 더럽게 차가운
진눈깨비도, 칼날 같은
우박 조각들도
최후의 나를 짓부수지 못한 것뿐
보세요
나는 노래한답니다
오, 격렬히
불을 뿜는 휠체어
휠체어 댄스
<강원래의 공연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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