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문학

노벨문학상수상 소설가 한강 시(詩) 12편

하얀모자 1 2024. 10. 19. 18:18

 

 

 
                 1. 편지
  
그동안 아픈데 없이 잘 지내셨는지
궁금했습니다
꽃 피고 지는 길
그 길을 떠나
겨울 한번 보내기가 이리 힘들어
때 아닌 삼월 봄눈 퍼붓습니다
겨우내내 지나온 열 끓는 세월
얼어붙은 밤과 낮을 지나며
한 평 아랫목의 눈물겨움
잊지 못할 겁니다 
 
 누가 감히 말하는 거야 무슨 근거로
 이 눈이 멈춘다고 멈추고 만다고··· 천지에,
 퍼붓는 이··· 폭설이, 보이지 않아?
 휘어져 부러지는 솔가지들,···
 퇴색한 저 암록빛이, 이, 이, 바람가운데,
 기댈 벽 하나 없는 가운데,
 아아··· 나아갈 길조차 묻혀버린 곳, 이곳 말이야···
 
그래 지낼 만하신지 아직도 삶은
또아리튼 협곡인지 당신의 노래는
아직도 허물리는 곤두박질인지
당신을 보고난 밤이면 새도록 등이 시려워
가슴 타는 꿈 속에
어둠은 빛이 되고
부셔 눈 못 뜰 빛이 되고
흉몽처럼 눈 멀어 서리치던 새벽
동 트는 창문빛까지 아팠었지요.
 
 ··· ··· ···어째서···
 마지막 희망은 잘리지 않는 건가
 지리멸렬한 믿음
 지리멸렬한 희망 계속되는 호흡 무기력한,
 무기력한 구토와 삶,
 오오, 젠장할 삶
 
악물린 입술
푸른 인광 뿜던 눈에 지금쯤은
달디 단 물들이 고였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한번쯤은
세상 더 산 사람들처럼 마주 보고
웃어보고 싶었습니다.
 
  사랑이었을까···
 잃을 사랑조차 없었던 날들을 지나 여기까지,
 눈물도 눈물겨움도 없는 날들 파도와 함께 쓸려가지 못한 목숨,
 목숨들 뻘밭에 뒹굴고
 
당신 없이도 천지에 봄이 왔습니다
눈 그친 이곳에 바람이 붑니다
더운 바람이,
몰아쳐도 이제는 춥지 않은 바람이 분말같은 햇살을 몰고 옵니다
이 길을 기억하십니까
꽃 피고 지는 길
다시 그 길입니다
바로 그 길입니다
 
     <92년 연세문화상(윤동주 문학상: 한 강(국문.4)-'편지'>
 


     2. 서울의 겨울 12 

어느 날 어느 날이 와서
그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
그날에 네가 사랑으로 온다면
내 가슴 온통 물빛이겠네, 네 사랑
내 가슴에 잠겨
차마 숨 못 쉬겠네
내가 네 호흡이 되어주지, 네 먹장 입술에
벅찬 숨결이 되어주지, 네가 온다면 사랑아,
올 수만 있다면
살얼음 흐른 내 뺨에 너 좋아하던
강물 소리,
들려주겠네
 
 
  「서울의 겨울 12」,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3.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 
거리 한가운데서 얼굴을 가리고 울어보았지
믿을 수 없었어, 아직 눈물이 남아 있었다니
 ​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선 채로 기다렸어, 그득 차오르기를
 
​모르겠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쳐갔는지
거리 거리, 골목 골목으로 흘러갔는지
​ 
누군가 내 몸을 두드렸다면 놀랐을 거야
누군가 귀 기울였다면 놀랐을 거야
검은 물소리가 울렸을 테니까
깊은 물소리가 울렸을 테니까
둥글게
더 둥글게
파문이 번졌을 테니까
 
믿을 수 없었어, 아직 눈물이 남아 있었다니
알 수 없었어,더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니
 
거리 한가운데서 혼자 걷고 있을 때였지
그렇게 영원히 죽었어,내 가슴에서 당신은
​ 
거리 한가운데서 혼자 걷고 있을 때였지
그렇게 다시 깨어났어, 내 가슴에서 생명은
 
​ 
     4.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5. 조용한 날들
 
​아프다가
 
담 밑에서
하얀 돌을 보았다
 
​오래 때가 묻은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아직 다 둥글어지지 않은 돌
​ 
좋겠다 너는,
생명이 없어서
​ 
아무리 들여다봐도
마주 보는 눈이 없다
 
​어둑어둑 피 흘린 해가
네 환한 언저리를 에워싸고
 
​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
 
무엇에게도
 
 ​
아프다가
​돌아오다가
 
​지워지는 길 위에
쪼그려 앉았다가
  
​손을 뻗지 않았다
 
​ 
      6.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하루가 끝나면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둔다
저녁이 식기 전에
나는 퇴근을 한다
 
저녁은 서랍 안에서
식어가고 있지만
나는 퇴근을 한다
하루의 무게를 내려놓고
 
서랍에 넣어 둔 저녁은
아직도 따뜻하다
나는 퇴근을 한다
저녁이 식기 전에
 
퇴근을 하면서
저녁을 꺼내어
따뜻한 한 끼를 먹는다
하루의 끝에서
 
퇴근을 하고
서랍에 넣어 둔 저녁을 꺼내면
하루의 무게가 가벼워진다
나는 퇴근을 한다
 
퇴근을 하면서
저녁을 꺼내어
따뜻한 한 끼를 먹는다
하루의 끝에서
 
​ 
        7. 첫새벽
 
첫새벽에 바친다 내
정갈한 절망을,
방금 입술 연 읊조림을
 
감은 머리칼
정수리까지 얼음 번지는
영하의 바람, 바람에 바친다 내
맑게 씻은 귀와 코와 혀를
 
어둠들 술렁이며 포도(鋪道)를 덮친다
한 번도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한 텃새들
여태 제 가슴털에 부리를 묻었을 때
 
밟는다, 가파른 골목
바람 안고 걸으면
 
일제히 외등이 꺼지는 시간
살얼음이 가장 단단한 시간
박명(薄明) 비껴 내리는 곳마다
빛나려 애쓰는 조각, 조각들
 
아아 첫새벽,
밤새 씻기워 이제야 얼어붙은
늘 거기 눈뜬 슬픔,
슬픔에 바친다 내
생생한 혈관을, 고동소리를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2013 문학과지성사>
 
 
       8. 파란 돌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난 죽어 있었는데
죽어서 봄날의 냇가를 걷고 있었는데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
 
투명한 물결 아래
희고 둥근
조약돌들 보았지
해맑아라,
하나, 둘, 셋
 
거기 있었네
파르스름해 더 고요하던
그 돌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난 눈을 떴고,
깊은 밤이었고,
꿈에 흘린 눈물은 아직 따뜻했네
 
십 년 전 꿈에 본 파란 돌
 
그동안 주운 적 있을까
놓친 적도 있을까
영영 잃은 적도 있을까
새벽이면 선잠 속에 스며들던 것
그 푸른 그림자였을까
 
십 년 전 꿈에 본
 
그 빛나는 내(川)로
돌아가 들여다보면
아직 거기
눈동자처럼 고요할까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2013 문학과지성사>
  
 
       9. 효에게  2002  겨울
 
                             (작가가 아들에게 쓴 편지)
 
바다가 나한테 오지 않았어.
겁먹은 얼굴로
아이가 말했다
밀려오길래, 먼 데서부터
밀려오길래
우리 몸을 지나 계속차오르기만 한 줄 알았나보다
 
​바다가 너한테 오지 않았니
하지만 다시 밀려들기 시작할 땐
다시 끝없을 것처럼 느껴지겠지
내 다리를 끌어안고 다시 뒤로 숨겠지
마치 내가
그 어떤 것,
바다로부터조차 널
지켜줄 수 있는 것처럼
​ 
기침이 깊어
먹은 것을 토해내며
눈물을 흘리며
엄마, 엄마를 부르던 것처럼
마치 나에게
그걸 멈춰줄 힘이 있는 듯이
​ 
하지만 곧
너도 알게 되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억하는 일뿐이란 걸
저 번쩍이는 거대한 흐름과
시간과
成長,
집요하게 사라지고
새로 태어나는 것들 앞에
우리가 함께 있었다는 걸
​ 
색색의 알 같은 순간들을
함께 품었던 시절의 은밀함을
처음부터 모래로 지은
이 몸에 새겨두는 일뿐인 걸
 
괜찮아
아직 바다는 오지 않으니까
우리를 쓸어가기 전까지
우린 이렇게 나란히 서 있을 테니까
흰 돌과 조개껍질을 더 주울 테니까
파도에 젖은 신발을 말릴 테니까
까끌거리는 모래를 털며
때로는주저앉아 더러운 손으로
눈을 훔치기도 하며

              한강-효에게.2002.겨울
 
 
           10.  2월
 
나의 어머니, 쉰 두살, 윗입술이 잘 부르트시고,
반세기를 건너오시면서
도 웃을 때면 음조나 표정이 소녀같은, 아니 소년같은 분.
고즈넉한 저녁 딸과 마주앉아 마늘을 까신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풀피리
소리, 바람 찬 창으로 두리번거리던 딸은 소리의 주인공을 발견 못 한다.
이렇게 또 봄이 온다는 건가. 딸은 믿을 수가 없다.
구성진 가락은 다뉴브강의
푸른 물결, 윤심덕이 부른 노래.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좋은 날은 다 지나가버린 것 같아요 엄마
어머니 조용히 웃으신다
너도 지금 좋을 적 아니냐
이젠 저도 책임져야 될 나이가 된 걸요, 곧 졸업이에요
어머니 일어나 가스렌지 불을 줄이신다
느그 외할무니 하시던 말씀이 다 맞어야···비 피할라고 잠깐 굴에 들어갔
다 나온 것맨이로 그렇게 청춘이 가버린다고···
  
그렇게 청춘이 갔어요 어머니, 늪같은 청춘이 며칠 밤 목울음으로 다 새어
나가버렸어요
 
엄마 청춘도 그랬어요?
웃으며 딸이 짐짓 묻는다
글쎄,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야
어머니 조용히 밥을 푸신다
하나도 기억이 안나···
 
어머니, 무엇이 아픈 어머니의 머리를 떠돌고 있을지, 혼령같은, 무슨 통
곡같은
 
나는 다시 태어나믄 사람으로 안 태어나고 싶어야, 꽃이나아, 나무나아,
새나, 난 그런 것으로 태어나고 싶어야
 
엄마, 새는 고달퍼요 벌레도 잡아먹어야 하고 허공을 종일 날아야 하잖아
요 산탄총을 피해야하고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아야 해요
뭣은 그렇게 안 힘들다냐.
어머니 다시 조용히 웃으신다
엄마, 이왕이면 나무가 좋아요. 꽃은 금세 시들잖아요 흙 좋고 깊은 땅에,
아무도 베어가지 못할 곳에요·· 기껏 나무로 태어났는데 그리로 길이라도
나면 어떡해요. 국도가 나지않을 한것진 들에 큰 나무로요···
어머니 웃으시네 소녀처럼, 아니 소년처럼 어머니, 우리 어머니 소리내어
웃으시네
정말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라믄, 베어지면 또 딴걸로 태어날 거 아
니냐
····뭐가 걱정이냐
 
나의 어머니, 쉰 두살, 그렇게 다치시고도, 벌집이 되시고도 상처로 진물
흐르지 않는 분, 눈물만, 고즈넉히 맑은 물만 흐르는 분, 반세기의 毒 묻은
사랑, 슬픔으로만 오로지 슬픔으로만 번지는 분
 
냇가에 나갔더니 어머니, 온통 얼음인데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요
 
          (한강 시인이 대학 4학년 때 과제로 쓴 시임)
 
 ​
           11. 어깨뼈
 
사람의 몸에서
가장 정신적인 곳이 어디냐고
누군가 물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어깨라고 대답했어
 
쓸쓸한 사람은 
어깨만 보면
알 수 있잖아
 
긴장하면 딱딱하게 굳고
두려우면 움츠러들고
당당할 때면
활짝 넓어지는 게 어깨지
 
당신을 만나기 전
목덜미와 어깨 사이가
쪼개질 듯 저려올 때면
 
내 손으로
그 자리를 짚어 주무르면서
생각하곤 했어
 
이 손이
햇빛이었으면
나직한 오월의
바람소리였으면
 
 
         12. 휠체어 댄스
 
눈물은
이제 습관이 되었어요
하지만 그게
나를 다 삼키진 않았죠
 
악몽도
이제 습관이 되었어요
가닥가닥 온몸의 혈관으로
타들어오는 불면의 밤도
나를 다 먹어치울 순 없어요
 
보세요
나는 춤을 춘답니다
타오르는 휠체어 위에서
어깨를 흔들어요
오, 격렬히
 
어떤 마술도
비법도 없어요
단지 어떤 것도 날
다 파괴하지 못한 것뿐
 
어떤 지옥도
욕설과
무덤
저 더럽게 차가운
진눈깨비도, 칼날 같은
우박 조각들도
최후의 나를 짓부수지 못한 것뿐
 
보세요
나는 노래한답니다
오, 격렬히
불을 뿜는 휠체어
휠체어 댄스
 
          <강원래의 공연에 부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