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 / 한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한강, 시집<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 지성사, 2013) 中 ‘서시’
(작품: 아제아제바라아제)를 쓰신 소설가 한승원씨는
소설가 한강씨의 부친 이십니다.
딸의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딸을 평 하시는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 강이의 문장은 우리들이 흉내 낼 수가 없어요.
왜 흉내 낼 수가 없냐하면
굉장히 서정적이고 여린 상처 입은 영혼의 실존 이랄까
그런 것들을 심감하게 묘사해 내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 흉내는 우리 세대의 사람들이
아무리 탁월해도 흉내 낼 수가 없어요. "
"우리 딸은 문장이 아주 섬세하고
아름답고 슬퍼요.
심사위원들이 그 아름다운 문장이라든지
아름다운 세계를 포착했기 때문에
그 후세대(4세대작가)에게 상을 줬다
한림원의 심사위원들이 사고를 친거다. "
라고 하십니다.
두분 다 대단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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