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문학

한강 첫 글 '깃털' 노벨문학상 이후

하얀모자 1 2024. 10. 17. 10:42

 

 

 
                    깃털 / 한강
 
문득 외할머니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다.
사랑이 담긴 눈으로 지그시 내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손을 뻗어 등을 토닥이는 순간.
그 사랑이 사실은 당신의 외동딸을 향한 것이란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등을 토닥인 다음엔 언제나 반복해 말씀하셨으니까.
엄마를 정말 닮았구나. 눈이 영락없이 똑같다.
 
외갓집의 부엌 안쪽에는 널찍하고 어둑한 창고 방이 있었는데,
어린 내가 방학 때 내려가면 외할머니는 내 손을 붙잡고
제일 먼저 그 방으로 가셨다.
찬장 서랍을 열고 유과나 약과를 꺼내 쥐어주며 말씀하셨다.
어서 먹어라.
내가 한입 베어무는 즉시 할머니의 얼굴이 환해졌다.
내 기쁨과 할머니의 웃음 사이에
무슨 전선이 연결돼 불이 켜지는 것처럼.
 
외할머니에게는 자식이 둘뿐이었다.
큰아들이 태어난 뒤 막내딸을 얻기까지 십이 년에 걸쳐
세 아이를 낳았지만 모두 다섯 살이 되기 전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늦게 얻은 막내딸의 둘째 아이인 나에게,
외할머니는 처음부터
흰 새의 깃털 같은 머리칼을 가진 분이었다.
 
그 깃털 같은 머리칼을 동그랗게 틀어올려 은비녀를 꽂은 사람.
반들반들한 주목 지팡이를 짚고 굽은 허리로 천천히 걷는 사람.
대학 1학년 여름방학에
혼자 외가로 내려가 며칠 머물다 올라오던 아침,
발톱을 깎아드리자 할머니는 '하나도 안 아프게 깎는다…
(네 엄마가) 잘 키웠다'고 중얼거리며 내 머리를 쓸었다.
헤어질 때면 언제나 했던 인삿말을 그날도 하셨다.
아프지 마라.
엄마 말 잘 듣고.
 
그해 10월 부고를 듣고 외가에 내려간 밤,
먼저 내려와 있던 엄마는 나에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 얼굴 볼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손을 잡고 병풍 뒤로 가 고요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유난히 흰 깃털을 가진 새를 볼 때,
스위치를 켠 것같이 심장 속 어둑한 방에 불이 들어올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