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도둑
- 김소진 -
자전거에 도둑이 생겼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나 몰래 훔쳐 타는 얌체족이었다.
내 골반뼈 높이에 맞춰 놓은 자전거 안장이 엉덩이 밑선으로 밀려가
있었고 바퀴 틈새에는 방금 묻어난 것 같은 황톳물이
군데군데 배어 있곤 하는 게 바로 그 증거였다.
누군지는 몰라도 현관문 밖의 도시가스 연결 파이프에
쇠줄로 붙들어 매놓은 자전거의 자물쇠를 풀고 몰고 다닌 다음
내가 퇴근해 돌아오기 전에 얌전히 제자리에 갖다 놓곤 하는 모양이었다.
신문사 일이라는 게 저녁 늦게 끝나기가 일쑤인데다
퇴근 후 술자리를 워낙 좋아하는 나로서는
낮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도리가 없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전거를 산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전거를 고정시킬 쇠줄의 열쇠 하나를 잃어버렸다.
하지만 살 때부터 열쇠를 세 개씩이나 받아뒀기에
이내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지냈다.
나는 내 자전거를 훔쳐 타는 범인으로 일찌감치 이웃집 아이인
봉근이를 찍고 있었다.
맞벌이 부부인 그 집 부모는 하루종일 집을 비우기 일쑤였다.
봉근이 아버지는 공치는 날이 더 많은 도배공이었고 엄마는 봉제공이었다.
둘이서 벌어들이는 수입이 여간 쑬쑬치 않을 텐데
어찌나 무섭게들 움켜쥐는지 외아들인 봉근이가 그토록 졸라대는 눈치건만
헌 자전거 한 대 마련해 주질 않았다.
자존심까지 구겨 가며 다른 또래 아이들 자전거를 빌려 타거나
자기보다 힘이 약한 아이 같으면 종주먹을 들이대는 시늉을 해 뺏아 타는
그 애의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새도시에서는 자전거가 몹시 요긴했다.
곳곳에 자전거 전용도로가 잘 닦여 있어 운동기구로도
쓰임새가 좋을 뿐더러,
은행이나 할인 판매점 같은 편의시설들이 걷기도 차 타기도 어정쩡해
자전거가 없으면 허드레 다리품을 팔 일이 잦은 곳이 바로 새도시였다.
처음에는 새로 뺀 자동차 못지않게 걸레질도 가끔씩 해 가며
사뭇 귀염을 받던 자전거였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자 어느덧 그 자전거는 소박맞은 이처럼
문 옆에 다소곳이 먼지 답쌔기를 뽀얗게 뒤집어 쓴 채 서 있어야만 했다.
그러다가 출퇴근 때마다 후다닥 곁을 스치고 지나가는
나의 시큰둥한 눈길에 밟히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자전거를 건드리는 손은 봉근이가 아니었다.
어느 날 몸이 아파 신문사에 조퇴 보고를 하고 돌아온 날
그 의문은 우연찮게 풀렸다.
약방까지 자전거를 타고 갈까 싶었는데 이미 누군가 쇠줄을 풀고
한발 앞서 자전거를 끌고 나가버린 거였다.
나는 경의선과 나란히 뻗은 자전거 전용도로 쪽으로 나가보았다.
텔레비전 광고에 나오는 모델의 방금 샴푸한 것처럼 하늘하늘한 머리채와
몸에 착 달라붙는 하얀 옷자락을 휘날리며 유유자적하게
자전거를 모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누굴까?
나는 먼 거리에서도 그 자전거가 새로 장만한 내 자전거임을 알 수 있었다.
내 자전거 위에 허락도 없이 올라탄 사람은 뜻밖에도 젊은 여자였다.
까만 타이즈 바지 차림에 흰 남방셔츠를 입고 있어
늘씬한 몸매가 훤히 드러났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엉덩이와 허벅지의 굴곡에 탄력이 붙어 보였다.
멀찍이서긴 했지만 난 내 앞을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그 아가씨의 얼굴이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온 지 얼마되지 않아
아파트 관리업체지정 변경에 관한 결의를 한다고 해서 불려나간
반상회 자리였을 것이다.
나중에 아주머니들이 수군거리는 말을 얼핏 귀동냥하니
문촌마을 스포츠센터에서 에어로빅 강사를 한다는 거였다.
바로 내 위인 꼭대기층에 산다고 들었다.
어쩐지 이따금씩 거실에서 에어로빅 연습을 하는지 콩콩거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리곤 했다.
흐흠, 자전거 도둑이라!
그날 저녁 난 묘한 흥분감에 사로잡혔다.
손깍지로 머리를 감싸고 거실 바닥을 뒹굴던 나는
불현듯 2차 세계대전 종전 뒤에 유럽을 휩쓸었던 네오리얼리즘 운동의
대표적 영화로 꼽히는 이탈리아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자전거 도둑"에 나오는 장면들을 떠올렸다.
그러다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오늘밤도 그 비디오를 한 번 더 볼까?
나는 테이프를 손가락으로 콕콕 찍으며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가 어느새 반나마 남은 발렌타인 십칠 년짜리 병목을 휘어잡았다.
잔속에서 빛나고 있는 육면체의 투명한 얼음조각들 위로
사십도의 뜨거운 원액을 끼얹고는 허겁지겁 빈속으로 쏟아부었다.
젠장, 난 이 영화 앞에서 왜 이리 갈피를 못 잡는 걸까.
위잉.......... 철커덕.
2차 대전이 끝나고 폐허로 변한 로마.
오랫동안 직업을 구하지 못해 헤매다니던 안토니오 리치는
어느 날 일자리를 구하게 된다.
길거리에 포스터를 붙이는 일이다.
그 일에는 자전거가 필수적이다.
오랜만에 일자리를 구하게 돼 당당히 아내 마리아 앞에 선 안토니오는
그녀를 설득해 몇 안 되는 헌 옷가지를 전당포에 맡기고
드디어 자전거를 구한다.
어린 아들 브루노는 출근하는 아버지를 따라나선다.
그러나 어느 모퉁이에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누가 자전거를 훔쳐 타고 달아난다.
안토니오는 쫓아가다 실패하고 경찰에 신고하지만
경찰은 그런 하찮은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어디있냐는 듯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허탈해진 안토니오는 자전거포를 뒤지다 어느 젊은이가
자기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것을 목격한다.
기를 쓰고 쫓아가지만 또 허사이다.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자전거를 훔친 젊은이의 집을 기어코 찾고야 만다.
하지만 안토니오는 빈민가에 있는 그 젊은이의 허름한 집을 보고
절망에 빠진다.
자신처럼 가난한데다 젊은이는 그를 보자 충격을 받았는지
간질을 일으키며 길가에 나뒹굴어 버둥거린다.
경찰이 왔으나 딱 부러지는 증거도 없다.
안토니오의 우유부단한 태도에 실망한 아들이 그와 다투다 없어진다.
안토니오는 강가에서 어린애가 빠졌다는 얘기를 듣고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황급히 아들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아들은 다친 데 없이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난다.
........... 스쳐 지나가려는데 경기장에서는 축구경기가
한창 무르익고 있다.
안토니오의 눈에는 경기장 밖에 즐비하게 세워놓은 자전거들이
한가득 클로즈업돼 들어온다.
아들 부르노에게 먼저 집에 가 있으라고 이르고는
자전거 한 대를 잽싸게 훔쳐 달아나지만 곧 주인에게 붙잡힌다.
어디선가 경찰이 온다.
아들의 면전에서 봉변을 당하는 안토니오의 처지를 가련하게 여긴
자전거 주인이 선처를 베푸는 바람에 안토니오는
철창신세를 면하고 풀려난다.
긴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석양의 거리를 아들은 뒤따르고
안토니오는 어깨가 축 늘어진 허탈한 모습으로 하염없이 걸어간다.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난 무엇보다 외로움을 느꼈다.
아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권위를 깡그리 무시당한
안토니오의 무너진 등이 견딜 수 없어 콧등이 시큰해졌고,
그보다는 무너져 내리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목격해야 하는,
그럼으로써 평생 씻을 수 없는 내면의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갈
어린 아들 브루노 때문에 나는 혀를 깨물어야 했다.
왜? 왜냐고? 그건 빌어먹을, 내가 바로 또다른 브루노였으니깐.
이 망할 놈의 기억, 저 비디오테이프를 찢어 버려야 하는 건데.
나는 다시 거칠게 발렌타인의 병목을 잡아챘다.
한 평도 채 안 되는 구멍가게는 중풍으로 쓰러져
정상적 건강상태가 아니었던 아버지의 유일한 수입원이자 생존 이유였다.
때문에 그 구멍가게에 대한 아버지의 몰두와 자존심은 각별했다.
한번은 내가 아버지가 가게를 잠깐 비운 사이에
겉에 허연 인공 설탕가루를 묻힌 '미키대장군'이라는 카라멜을 하나
아무 생각없이 널름 집어먹은 적이 있었다.
하나에 이 원, 다섯 개에 십 원이었다.
잠시 뒤에 돌아온 아버지는 단박에 그 사실을 알아채고는
불같이 화를 내며 내 목덜미에 당수를 한 대 세게 내려꽂는 것이었다.
그 카라멜 곽 안에 미키대장군이 몇 개 들어 있는지조차
훤히 꿰차고 있는 아버지였다.
이런 민한 종간나래! 얌생이처럼 기러케 쏠라닥질을 허자면
이 가게 안에 뭐이가 하나 제대로 남아나겠니, 응?
그러고 나서는 좀 머쓱했는지 입이 한 발쯤 튀어나와
뾰로통해서 서 있는 내게 미키대장군 네 개를 집어 내미는 거였다.
어차피 짝이 맞아야 파니까니, 하면서 억지로 내 손아귀에 쥐어주었다.
나는 그 무허가 불량식품인 카라멜 네 개가 끈끈하게 녹아내릴 때까지
먹지 않고 쥔 채 서 있었다.
뉠큼 털어넣지 못하겠니, 으잉?
목덜미에 아버지의 가벼운 당수를 한 대 더 얹은 다음에야
한입에 털어넣고 돌아서 나왔다.
아버지도 가게 일을 수월하게 보려면 잔심부름꾼인 나를 무시하고는
아쉬울 때가 많을 터였다.
워낙 짧은 밑천으로 가게를 꾸려가자니
아버지는 물건 구색을 맞추느라 하루에도 많을 때는 세 번까지
시장통 도매상으로 정부미 포대를 거머쥐고 종종걸음을 쳐야 했고,
막내인 나는 빈번히 아버지의 뒤로 팔을 늘어뜨린 채
졸졸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땐 그게 죽도록 싫었다.
하마 시장통에서 야구 글러브를 끼거나
조립용 신형무기 장난감 상자를 든 반 친구를 만나거나,
심지어 과외나 주산학원을 가는 여자아이들을 만나는 날에는
정말 그 자리에서 혀를 빼물고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더군다나 아버지가 주로 물건을 떼오곤 하는
수도상회의 혹부리염감의 손녀는 이 학년인가, 삼 학년 땐가
우리 반 부반장을 지냈던 나미라는 여자아이여서
서로 안면이 없지도 않았다.
어쩌다 그 애가 헐렁한 동냥자루 같은 포대를 손아귀에 틀어쥐고
멀뚱히 계산대 옆에 서 있는 내 앞으로 모른 체하며 스쳐 지나갈 때면
나는 사팔뜨기인 양 뒤틀어진 눈을 아래로 깔아야 했다.
그렇잖아도 머리통만 몸집에 비해 컸다 뿐이지
선병질적인데다 깡마른 내가 엄마가 군데군데 왕바늘로 기워줄 만큼
낡은 정부미 포대에 잡동사니 같은 물건들을 쓸어 담아
어깨에 늘어뜨린 채 동화 속의 당나귀처럼 혀를 빼물고
헉헉거리며 가파른 산동네 길을 오르는 정경을 떠올릴 때면
지금도 처연한 감정을 모면할 길이 없었다.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와 나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그 정부미 자루를 날라왔다.
그런데 집에 도착해 한숨을 돌린 뒤 자루를 풀고 물건을 정리해 보니
스무 병이 와야 할 진로소주가 두 병이 모자란 채
열 여덟 병만 온 것이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맞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금세 하얗게 질렸다.
왜냐하면 그 덜 온 두 병을 빼고 나면 나머지 것들을 몽땅 팔아봤자
결국 본전치기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내 등을 떼밀어 물건을 받아 온 수도상회의 혹부리영감한테
내려보냈다. 아버지는 말주변도 말주변이었지만
중풍 후유증 때문에 약간의 언어장애가 있어 일부러 나를 보냈던 것이다.
뭐 하러 왔네?
가게 안에 북적거리는 손님들에게 셈을 치러 주느라 몇 번이고 주판알을
고르는 데 바쁜 혹부리영감의 눈길을 잡아두는 데 성공한 나는
더듬더듬 자초지종을 말했다.
그러나 귓등에 연필을 꽂은 채 심술이 덕지덕지 모여 이뤄진 듯한
왼쪽 이마빡의 눈깔사탕만한 혹을 어루만지며 듣던 혹부리영감은
풍기 때문에 왼쪽으로 힐끗 돌아간 두터운 입술을 떠들쳐
굵은 침방울을 내 얼굴에 마구 튀겼다.
애초 자기 눈 앞에서 까보이지 않은 것은 인정할 수 없다며 막무가내였다.
나중엔 아버지까지 함께 내려가서 하소연을 해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정 그렇게 우기면 거래를 끊겠다는 협박성 경고뿐이었다.
거래가 끊긴다면 아버지한테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혹부리 영감은 아버지한테 무슨 큰 특혜를 내려주듯이
거래를 터준다고 허락을 놓았었다.
같은 함경도 동향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하긴 혹부리영감한테는 매번 소주 열 병 안짝에다 새우깡 열 봉지,
껌 대여섯 개, 빵 예닐곱 개 등 일반 소매가격 구매자보다
더 많은 물건을 떼어가지도 않으면서 부득부득 도매값으로 해 달라고
통사정을 해쌓는 아버지 같은 사람 하나쯤
거래를 끊어도 장부상 거의 표가 나지 않을 것이었다.
결국 아버지는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의 자그마한 구멍가게로 돌아와 나머지 열 여덟 병의 진로소주를
넋나간 사람처럼 쓰다듬던 아버지는 기어코 아들인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아! 아버지! 한 닷새쯤 지났을까,
아버지와 나는 다시 그 수도상회로 물건을 떼러 갔다.
아버지는 또 고만고만한 물건들로 구색을 맞춰 골랐고
혹부리영감은 일일이 헤아린 다음 우리 부자가 가져온 정부미 자루에
집어넣으라고 손짓을 했다.
아버지와 나는 허겁지겁 물건들을 자루에 휩쓸어 담았다.
평소와 달리 아버지의 손은 약간 떨려서 헛손질을 많이 해
일부러 나한테 훼방질을 놓는 사람 같았다.
내가 그 이유를 모를 리가 있겠는가.
아버지는 그 혹부리영감의 눈을 속여 미리 진로 소주 두 병을
은밀히 자루에 더 넣어두었던 것이다.
셈을 치르고 문턱을 가까스로 나서려는 순간,
이게 무슨 운명의 조화런가, 혹부리영감이 우리를 불러 세우는 것이었다.
거 영감, 이보우다. 그 포대 좀 풀어 다시 한 번 헤아려 봅세.
계산이래 안 맞아.
나는 그때 겁에 질린 송아지처럼 눈에 흰자위가 유난히 많아진
아버지의 눈동자를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인 내가 무슨 구세주라도 돼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눈으로 내 얼굴을 쳐다봤던 것 같았다.
그러나 난들 달리 뾰족한 수가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결국 혹부리영감은 두 병이 더 들어간 것을 밝혀냈고
아버지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나는 내가 희생양이 돼야 함을 느꼈다.
예, 맞아요. 그건 말예요. 제가 영감님 몰래 넣은 건데요,
왜냐하면 접때접때 우리 집에서 사실 두 병을 빠뜨리고 갔기 때문에 응,
쌤쌤이어서요.
나는 이상하게도 맘이 편하고 당당했다.
나도 모르게 입가로 번져 나온 미소를 단속하느라
손바닥으로 입을 몇 번인가 틀어막기도 했다.
혹부리영감은 얼굴에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단 직접적 책임을 모면한 아버지는 헤설픈 표정으로 날 쳐다 볼 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혹부리 영감이 당신과는 이제 거래 끝이야 하고
선언할까봐 전전긍긍하는 얼굴이었다.
아버지처럼 이북 출신인 그 영감은 시장통에서 신용 하나는
보증수표나 다름없었지만 성질이 불같고 매몰차기로 소문이 자자한
위인이었기에 그런 상황은 쉽게 상상해 볼 수 있었다.
내레 이까짓 걸루 다 당신하고 거래를 끊지는 않갔어.
다 물정 모르는 아이들이 저지른 짓인데 으잉?
아유, 고맙습네다. 영감님.
그저 어떻게 헤헤 우리 아이가 평소에는 그렇게 민한 애가 아닌데
어쩌다.....
단.....
혹부리 영감이 아버지의 말끝을 가로챘다.
내 앞에서 저 아이를 호되게 가르치는 꼴을 봬 주라우.
내가 그깟 술 두 병이 아까워서 기러는 게 아니야.
하지만 기렇게 따끔하게 가르치는 건 바로 자식에게 말이야,
부모된 도리를 다하는 것 아니갔슴매? 내 이 자리서 이녁이 하는
깜냥을 두고보고서리 까짓것 그 술 두 병은 거저라두 주갔어.
내 이제껏 남한테 콩알 반쪼가리도 거져 준 적은 없지만서두,
이건 경우가 다르다우 아암.
호되게라믄 어떠케?
쯔쯧, 이녁도 함경도 아바이 출신이믄 부랄값도 못하는 자식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어드러케 다루는지는 알 만하잖소?
그걸 왜 내게 묻소 으응? 아안 그렇소?
야! 간나야, 니 다시는 이런 민한 짓이래, 하겠니, 안 하겠니?
어서 말 좀 해보라우.
짐짓 호령을 하는 아버지의 손이 부들부들 떨며 허공 높이 허우적거렸다.
단 한 대에 내 뺨은 무섭게 부풀어오르며 감각을 잃어갔다.
길티 기게 바로 진짝 교육이야.
혹부리영감의 격려를 받은 아버지는 고개를 돌려 그에게 굽신거린 다음
또 한 차례 내 뺨을 기세좋게 올려붙였다.
그러나 이 지독한 연극을 지켜보면서
나는 아픔을 거의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머리속에서 뭔가가 맑아지는 느낌뿐이었다.
그리고 투시해버리고 말았다. 어린 나이에도.
아버지의 눈 속에 흐르지도 못하고 괴어 있는 눈물을.
차라리 죽는 한이 있어도 애비라는 존재는 되지 말자.
아마도 나는 그때 그런 끔찍한 다짐을 했는지도 모른다.
"저 혹시 위층 천이백사호에 사시지 않으세요?
경의선 서울역발 막차를 타고 오던 나는 능곡역을 지날 때쯤
읽고 있던 신문을 주섬주섬 챙긴 다음
앞에 앉은 아가씨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바로 그 에어로빅 강사를 한다는 여자였다. 퇴근길인 모양이었다.
창가 쪽에서 눈길을 거둔 그녀가 씨익 웃어보였다.
"예. 저도 뵌 적이 있어요. 인사가 늦었네요."
"헤헤, 그렇죠 뭐, 다들 바쁘니깐."
"어딜 다녀오세요?"
"주부들 좀 가르치는데,
여기 말고 신촌에서도 저녁에 한 타임 뛰고 있어요."
"요즘도 에어로빅 많이들 허긴 허죠."
나는 갑자기 목이 컬컬해졌다.
백마역에서 내려 고개를 숙인 채 또박또박 마을버스 쪽으로 걸어가는
그녀에게 다가섰다.
"저, 어떠세요? 실례가 아니라면, 간단히 목이나 축이며 인사나 나누죠?"
역 광장 둘레로 불을 환히 밝힌 포장마차가 서너 군데 눈에 띄었다.
여자가 느닷없이 킥 하며 웃음을 참는 시늉을 하는 바람에
난 긴장이 확 풀리고 말았다.
"그러지죠, 뭐."
"여기 우선 맥주 두 병부터 주시고요, 골뱅이 하나 무쳐주세요."
"맵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주머니?"
"정식인사도 드리기 전인데, 이런 말씀 드려도 어떨는지 모르겠네요."
"?"
"다름이 아니고, 자전거를 아주 잘 타신다고요, 헤헤."
여자가 얼른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벌어진 손가락 틈새로 가지런한 잇바디(치열)가 비쳤다.
"호호, 고맙네요. 인사가 늦었어요. 자전거 도둑 서미혭니다."
"아, 서미혜 씨요? 아무튼 이거 반갑습니다. 전 김승호라고 합니다."
"범인이 뜻밖이라서 놀라셨겠다?
제가 오후에 강습을 나가느라고 빈 시간대에 잠깐잠깐
허락도 맡지 않고 그동안 실례를 했어요.
언짢으셨다면 늦었지만 용서를 구할게요."
"아유, 용서라뇨? 천만에요. 이거 너무 기분이 좋더라구요.
이런 미인이 제 자전거를 길들이고 계실 줄이야.
제가 참, 자전거가 못된 게 그렇게 유감이더라구요."
"어머, 보기보담 유머를 잘 하시네요. 기자시라며요?"
"제가 써 붙이고 다녔나요?"
"말투를 들어보니 그런 것 같고 또 아파트 사람들이 다 알고 있던데요 뭐."
"말투가 어때서요?"
"왜 그런 것 있잖아요? 말꼬리가 왠지 암튼,
이 자전거가 맘에 쏙 들었는데 당분간 제가 좀 더 길들여도 되겠죠?"
나는 그녀의 호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암요. 감히 바라던 바죠. 전 자전거 도둑을 좋아하거든요.
원래, 내가 좋아하는 비디오 중에 자전거 도둑이라는 제목이 있어요.
아마 언제 한 번 보시면 재밌을 거예요."
나는 순간 그녀가 얼굴 한구석에서 낯빛을 고쳐잡는 걸 놓치지 않았다.
"이거 자전거 도둑이 된 제 입장에선 아주 흥미로운 제목인데요.
꼭 보여주실 거죠?"
"물론입니다. 그리고 제 것은 새 자전거니깐 길을 아주 순하게
잘 들여주세요."
"첨엔 아주 늙수그레한 아저씬 줄 알았어요.
맨날 허겁지겁 역으로 뛰어나 다니고."
"이것 땜에요?"
나는 벗겨진 내 이마를 장난스레 손바닥으로 훑어내렸다.
"하지만 내가 딴 사람보다 머리숱이 적은 게 아니라구요.
보시다시피 머리 면적이 넓다 보니 밀도가 떨어져서
듬성듬성해 보일 뿐이거든요.
그렇게 이해하시는 편이 훨씬 쉽고 논리적일 걸요?"
여자의 하얗고 고른 잇바디가 또 드러났다.
자전거 도둑 나왔나요?
현관 바닥에 떨어진 메모가 뒤늦게 눈에 띄었다.
나는 메모지를 주워 읽은 다음 손아귀에서 구깃구깃 둥그렇게 뭉쳐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대충 씻고 나온 다음 라면이라도 끓여 먹으려고 냄비 따위를
덜그럭거리던 참이었다.
거실 한가운데 바짓주머니에 두 손을 쑤셔 넣은 채
입맛을 쩍쩍 다시며 우두커니 서 있다가 후다닥 운동화를 꿰찼다.
딩동, 딩동디잉.
초인종을 눌렀는데도 한 십여 초간 응답이 없었다.
사람을 불러놓고 어딜 갔나?
나는 뒤돌아서서 백마역 쪽으로 서서히 진입을 하는
경의선 막차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냥 갈까?
마침 안에서 슬리퍼를 찍찍 끄는 소리가 들렸다.
신발 끄는 소리가 그쳤다.
아마 올빼미눈처럼 뚫린 외부 감시구멍으로 보는 모양이었다.
나는 일부러 그 구멍 앞에서 양볼에 바람을 잔뜩 넣고
눈동자를 부릅뜬 장난기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에서 킥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오셨어요? 아유, 내 정신 좀 봐.
손님을 초대해 놓곤 집 안이 이렇게 엉망이어서"
"이거 참 다음에 다시 올까요?"
"아뇨! 잠깐만 기다리..... 아니 일단 들어오셔요."
서미혜는 연습중이었는지 몸에 착 달라붙는 에어로빅 옷차림에다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식사는 어떻게 ?"
"아 예, 대충 그럭저럭"
"아직 안 드셨을 것 같아, 제가 생태찌개를 끓여 놨는데."
"아 뭐, 그렇다면야 염치불구하고."
나는 뒤통수를 긁적긁적하며 계면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와우, 거울 한번 되게 크네요?"
공기밥을 비우고 난 뒤 거실 벽 한 면을 차지한 유리 앞에 다가서며
내가 탄성을 지르자,
"밑에서 좀 콩콩거리는 소리가 들려 신경쓰이시죠?
제가 집에서 가끔 연습을 하거든요."
"괜찮아요. 수면제 삼아 들으니까요, 뭐."
"어머, 무덤덤하신 성격인가봐. 술도 한 잔 하실래요?"
"한 잔? 좋죠. 와우 발렌타인 십칠 년짜리네요. 쩝쩝.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이거."
"접대용이에요. 근데 그건 뭐죠?"
"아, 이거요? 저번에 얘기한 자전거 도둑 비디오테이프요.
관심이 많은 것 같아서 봬 드리려고요."
"아, 드디어 빌리셨군요."
"빌린 건 아니고...... 얼음 많이 넣지 마세요.
밍밍한 칵테일은 질색이거든요.
이런저런 이유로 제가 하나 장만한 거예요.
세계 영화사의 십대 명화 중 하나로 꼽히거든요."
"어느 나라 거죠?"
"전후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이라고."
"네오 리얼리즘? 러브 스토린가 보죠?"
"그런 건 아니구요. 뭐랄까? 사회성이 짙은 고발주의 영화라고나 할까요."
"고발주의요? 에이 따분하겠네요.
하지만 승호 씨가 골랐다니 한 번 봐야지요.
예의상으로라도 말예요. 커튼 칠까요?"
"좋을 대로요."
비디오를 보기 전부터 난 얼근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목덜미에. "자전거 도둑"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이리 처음 보는 영화처럼 설레고 있을까?
내가 테이프를 비디오 안에 밀어 넣고 화면을 처음으로 돌려놓는 사이에
미혜는 옷을 갈아입고 나오겠다며 얼른 안방으로 들어갔다.
거실 한구석에 멀쑥하게 서 있는 스탠드등에 볼그족족한 불이 들어왔다.
안방에서 나오는 미혜는 삐에로처럼 두리벙한 옷차림이었다.
나는 내 곁으로 다가오는 그녀를 향해 도발적인 눈길을 던졌다.
"이상해요?"
"뭘 ?"
"아니, 그냥. 그럼 됐어요."
소파에 비스듬히 몸을 누이고 발렌타인 십칠 년짜리 황금빛 원액이
그득히 담긴 칵테일잔을 기울이다 말고 입술을 뗀 나는
들릴락말락한 짧은 신음을 터뜨렸다. 카학.
미혜는 과일을 담은 큰 쟁반을 들고 다가와서는
내 옆에 나란히 다소곳이 앉았다.
나는 물어보지도 않은 채 리모콘의 플레이 스위치를 힘주어 눌렀다.
흑백화면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 머리 속은 내내 혼란스러웠다.
무슨 함정이 있는 건 아닐까?
나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려 방 구석을 둘러봤지만 걸리는 게 없었다.
스탠드와 비디오 겸용 텔레비전 한 대,
그리고 이인용 소파가 전부였다.
미혜가 졸린 듯한 자세로 옆이마를 가만히 내 어깨 위로 포개왔다.
누군가가 떨고 있었다. 내 어깨가 아니면 그녀의 관자놀이인 듯했다.
화면에서는 도둑맞은 자전거를 뒤쫓던 안토니오가
범인으로 찍은 빈민가의 젊은이가 길가에 쓰러져 몸을 비틀고 있었다.
"재미없죠?"
미혜는 대답없이 고개를 빤히 쳐들고 내 눈을 바라본 다음 빙긋이 웃었다.
"재미없죠?"
나는 또 뜸을 들이다가 건성으로 물어봤다.
왜냐하면 그건 너도 다 본 것이잖아.
이 말이 목젖까지 치솟았지만 발렌타인 원액을 따라
식도를 타고 흘러내려갔다. 나는 갈수록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왜냐하면 난 화면을 보면서 딴 생각에 몰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딴 생각이란.
혹부리영감에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그의 손녀딸 나미가 떠올랐다.
피부가 투명하리만큼 희고 티 한 점 없이 깨끗한 얼굴.
내가 아버지와 함께 혹부리영감한테서 그 된경을 치르는 사이에
그 애는 마당으로 난 쪽문을 열고 나와서
힐끗 아버지와 날 번갈아 쳐다본 다음 고개를 홱 돌리고는
진열장에서 초콜릿인가 카라멜인가를 집어들고는
다시 그 쪽문을 통해 다람쥐처럼 뛰어들어갔다.
그렇게 빨리 사라져준 것이 그때는 얼마나 고마웠는지.
죽이고 말겠어!
나는 혹부리영감에 대해 그렇게 이를 갈았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재촉하는 데 일조를 하고 말았다.
"재밌군요."
이번엔 미혜가 코맹녕이 소리로 물어왔다.
나는 그녀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의외로 맞춤하게 품안에 들어왔다.
"난 저 영화를 보면서 꼭 누구를 생각하거든."
나는 어느새 미혜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그녀도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헤어진 애인이라고 있으세요?"
"이런, 저기 무슨 여자들이 나온다고 그래?"
"그럼요?"
"내가 어렸을 적에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이 있었지.
혹부리영감이라고."
"예에?"
나는 일부러 장난기를 얹어 말했을 뿐인데 그녀는 몸을 후드득 떨며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그 바람에 그녀의 어깨 위에 얹혀진 내 팔에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감촉이 좋았다.
"왜죠?"
"왜, 내가 사람을 죽였다니깐 무서워져?"
"그게 아니라요 왠지 궁금하잖아요.
그럴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사람인데."
"사람 죽이긴, 생각하기 나름인데."
나는 피곤한 듯이 엄지와 검지로 두 눈두덩을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내가 그 혹부리영감에게 복수를 하는 방법은 딱 한 가지가 있을 뿐이었다.
그 영감탱이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수도상회를
분탕질내는 수밖에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의심 많은 혹부리영감은 가게로 들어가는 모든 출입문에는
자물쇠를 두세 개씩 걸어놓았다.
더군다나 그 수도상회는 바로 파출소 앞에 있어서 한밤중이라고 해서
함부로 문짝을 뜯거나 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여차직하면 파출소에서 순경들이 빳다 방망이를 들고 뛰어나올 판이었다.
그러나 나는 수도상회의 급소를 알고 있었다.
혹부리영감이 번게탄이며 목탄창고를 짓느라고 원래 가게의 처마 밑으로
자그마하게 의지간을 한 칸 들여놓았다.
그 밑으로 바로 하수도 맨홀이 지나가고 있었다.
학교 앞 도랑물이 인수천으로 흘러들도록 연결된 맨홀이었다.
그 입구는 물론 학교 뒷문 문방구점 앞에 있었다.
그 길이는 장장 사오십 보는 족히 되었다.
그러나 그걸 마다할 내가 아니었다.
하수구 통과에 관한 한 몸집 작고 참을성 많은 나는 챔피언감이었다.
아직도 동네에서 나보다 더 깊숙히 하수구 안으로 들어갔다. 나온 아이는
전체 학년을 통틀어도 없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던가!
나는 라면상자 같은 협소한 공간에 들어가
어떨 땐 반나절씩 꼼짝 않고 참는 연습을 했다.
왠지 하수구 안은 공기가 부족할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칠흑처럼 어두운 밤
팬티만 남기고 옷을 홀라당 벗어 봉지에 넣은 다음
문을 닫은 문방구집 대문 쓰레기통 옆에 놓았다.
그리고는 머리 위로 비닐 정부미 포대를 뒤집어쓰고 으슥한 밤을 택해
아가리를 잔뜩 벌리고 있는 학교 뒷문쪽 하수구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기어들자마자 거미줄이 얼굴을 덮치는 바람에
등짝으로 소름이 쫙 훑고 지나갔다.
고개를 두 무릎 사이로 한껏 쑤셔 박고 오리걸음으로 한 발짝씩 떼었다.
악취가 코를 찔렀고 바닥은 생각보다 미끈덩거렸다.
하지만 내 입가에는 야릇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급히 꺾어지는 길목인 것으로 보아 천우약국 앞쯤으로 짐작되는 곳에서
쓰레기하고 토사물들이 두텁게 쌓여 있어 직접 손으로 헤쳐내고
엉금엉금 기어나가야 했다.
술취한 몇 사람인가가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머리 위를
저벅저벅 밟고 지나갔다. 답답했다.
속이 차츰 메스꺼워지면서 이마가 어지러워졌다.
어쩌면 이 안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쳤다.
그러자 그동안 자신만만하던 복수심 대신에
시커멓고 덩치 큰 공포심이 밀려들었다.
몇 번이고 본능적으로 머리를 쳐들다가
둔중한 시멘트 맨홀에 머리를 찧었다.
아버지와 함께 그 숯탄 창고에 드나들 때 보니 그곳을 지나는
대여섯 개의 시멘트 맨홀 중 하나가 두터운 합판과 비닐장판으로
뒤덮여 있는 걸 보았었다.
나는 손을 머리 위로 쳐들고 자꾸 휘저어 보았다.
드디어 딱딱한 시멘트 대신 몰캉한 판대기가 감촉됐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수도상회 안에 가득 쟁여 있는 물건들이 무방비 상태로 가지런히 놓인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속에서 뭔가가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 터였다.
나는 내가 생각해봐도 믿기지 않을 만큼 차분하고 침착했다.
조금만 무슨 일이 닥쳐도 얼굴이 빨개지고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새가슴이었지만 웬일인지 가슴조차 평온한 맥박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혹부리영감이 허군한 날 깔고 앉는
얄팍한 꽃무늬 방석을 집어 올렸다.
그리고는 방석을 덮어씌운 채 병따개를 이용해 진로소주는 물론이고
이상하게 생긴 양주병 마개들을 소리나지 않게 따거나
비튼 다음 진열장 위아래 가릴 것 없이 부어댔다.
그렇게 한 십 분간 소리나지 않게 돌아다닌 것으로
수도상회 물건의 대부분이 절단이 났다.
이제는 다시 도망쳐야 할 시간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왠지 성이 차지 않았다.
아랫배에서는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연달아 났다.
나는 진열대에 발을 올려놓고 대들보에 매달려 있는
'수도상회'라고 쓰인 한글 간판을 끄집어 내렸다.
그 간판은 혹부리영감이 월남을 하기 전에 자신의 고향에서
역시 대물림으로 벌이던 잡화점을 꾸릴 때 쓰던
전통있는 간판이라는 말을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영감탱이가 애지중지하는 물건은 다 작살을 내야만 했다.
나는 떼어낸 간판을 하수구 안으로 깊숙히 내던졌다.
생각같아서는 그 자리에서 뽀개버리고 싶었지만
그러자면 그 소리 때문에 영감탱이네 식구가 잠을 깰지도 몰랐다.
막 돌아서려는 내 눈에 혹부리영감이 맨날 보물단지처럼 끌어안고 사는
시커먼 돈궤가 눈에 들어왔다.
물론 당일 벌어들인 그 안의 돈들은 이미 영감이 다 계산을 마치고 나서
텅텅 비어 있었다.
나는 꾸르륵거리는 아랫배를 움켜쥐고 그 궤 쪽으로 다가섰다.
그리고는 한동안 참았던 굵직한 대변을 그 위에 질펀하게 싸질렀다.
하수구 냄새 때문에 잠깐 감각을 잃었던 내 코였지만
어린애답지 않게 굵게 늘어진 똥줄기에서는 몹시 구린 냄새가 진동했다.
하수구를 되짚어 나와 학교 뒷문 개구멍을 통해
수위 아저씨들이 가끔씩 사용하는 비품창고 안으로 들어간 나는
세면대에서 몸을 대충 씻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수돗가에서 계속 비누칠을 해대며
살갗을 수세미로 빡빡 문질렀다.
혹시나 남아 있을 하수구 냄새를 걱정해서였다.
아버지가 내 등멱소리에 선잠이 달아났는지 부엌 앞 나무의자에 나와 앉아
담배를 빼물었다.
더위를 물었니?
!
중복 되기 전에 인절미라도 해먹였어야 하는데 후유,
주무세요, 아부지.
내일 비라도 오려나, 하수구 냄새가 솔솔 코끝을 스치니.
!
그 다음날부터 시장통이 한바탕 난리를 겪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사람들은 모였다 하면 수도상회가 절단난 얘기를 주고받았다.
평소 주위 사람들에게 곰살궂게 대하지 못해서 그런지
혹부리영감이 당한 것에 대해 고소해 하는 사람들도 꽤 되었다.
물건에 손을 하나도 대지 않았다는대두.
글쎄 어떤 놈 성깔인지 똥이 한바가지였데 낄낄.
뭔 조홧속이런가 잉?
그 영감 얼굴이 충격깨나 받았는지 축이 가서 말이 아니더라구.
한편으로 그 고린 영감 잘코사니고,
쾌재도 나지만 당하고 나니까 안쓰럽데 거.....
열흘 남짓 문을 닫고 있던 수도상회가 다시 문을 열었지만
그 걸걸한 혹부리영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그런지
가게에 활기가 돌아 보이지 않았다.
마침 펌프장 돌아 교회 올라가는 모퉁이에 수퍼마켓인가 하는
커다란 가게가 새로 생겨 플라스틱 바가지며 비누통을 공짜로 사람들에게
나줘주고 값도 허턱(허청) 싸게 매겨버리는 바람에
더욱 그러했는지도 몰랐다.
장사에 뜻이 없어 놀고먹는 아들한테 맡긴 가게가
시원찮게 돌아가자 얼마만에 혹부리영감이 다시 가게에 나오긴 했지만
예전보다 입이 더 돌아가고 눈에 총기도 사라지고
가끔씩 계산도 틀리게 한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혹부리영감이 며칠 자리보전을 하다 돌아간 이후
아예 문을 닫고 말았다.
"정말이에요? 정말 차암, 재밌다. 그치?"
여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화면은 꺼져 있었다.
"........"
나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여자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걷잡을 수 없는 기분이 돼버렸다.
술기운이 일시에 목덜미로 뻣뻣하게 밀려들고 있었다.
그때 내 손아귀 안으로 도톰한 살덩이가 한가득 미끄러져 들어왔다.
나는 짧은 숨을 토하며 고개를 천천히 옆으로 돌렸다.
"무슨 생각을 하지?"
나는 땀기운이 솟은 등을 지고 돌아누운 자세로 물어보았다.
"승호 씨, 그 청년 생각나?"
"누구 ?"
"그 꼬마의 아버지가 뒤쫓아갔을 때 길가에서 간질병으로 나뒹굴던
창백한 청년"
"으응, 그 자전거 도둑? 그런데?"
"많이 닮았다 울 오빠."
"오빠를 ?"
그녀의 목소리가 축축히 젖어가고 있었다.
"오래 전에 죽었어요. 아니 죽였지, 내가."
"..........."
미혜는 자신의 오빠에 대해서 내가 듣던 말던 주저리주저리 엮어 갔다.
손이 귀한 집안이라서 오빠가 태어나자
온 집안이 경사났다고 법석을 떨었다고 하더군요.
사진 봤죠? 민석 오빠 사진. 아직도 내 수첩 속에 소중히 들어 있는 거.
귀엽고 눈빛이 초롱한 아이였는데,
학교 들어가서 얼마 안돼 간질이 도졌대요 그만.......
집안엔 그런 내력이 없는데
옥수수 튀긴 강냉이를 잘못 집어먹고 그랬다는 말도 있고,
유전이라는 말도 있고 그때부터 집안에는
내내 음울한 기운이 떠나질 않았어요.
오빤 어릴 적부터 아버지 자전거를 무척이나 잘 탔어요.
짐칸 달린 묵직한 자전거 있죠? 어린 날 태우고도 잘 달렸으니까.
한번은 안장을 두 손으로 붙잡고 자전거 뒤에 매달려 가는데
오빠가 자꾸 부들거리면서 이상해지는 거예요.
고개를 뒤로 깔딱 젖혀 마치 나를 보려고 하는 듯하다가도
술먹은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페달을 밟고.
그게 간질발작 징후인지는 나중에 알았죠.
오빤 갑자기 자전거 핸들을 놓쳤고 나는 길가에 나둥그러졌어요.
사람들이 몰려들고 입에 버글버글 게거품을 문 오빠는
사지를 죽어가는 개구락지처럼 비틀고, 아주 끔찍했거든요.
나는 어쩔 줄 몰라 구경꾼처럼 서 있기만 했어요.
팔꿈치하고 무릎이 다 까졌지만 난 아픈 줄도 몰랐어요.
누군가 오빠의 입에다 손수건을 갖다 물리더군요. 혀 깨물지 말라고.
그게 발작의 시초였고,
이후로 어머닌 남부끄럽다며 오빠를 다락 속에 몰아넣고 키웠어요.
자라면서 가위를 많이 눌렸어요.
벽장 속에서 온몸에 털난 짐승이 기어나와 내 목을 조르는 꿈이었거든요.
물론 그 짐승은 민석 오빠였죠.
아마 무의식에 그렇게 자리잡았을 거예요.
학교 다니면서 반 친구 아이들을 집에 데리고 온 적이 없어요.
뒤뜰이 넓어 여름철에 평상을
나무 그늘 속에 갖다놓고 둘러앉아 얘기하면 정말 좋은 곳인데.
밤중에 벽지를 사그락사그락 긁는 소리 있죠?
아버진 그 소리에 신경이 닳아 끊어져 술을 가까이 하시다
결국 오래 못 사셨어요.
그 다락 속의 오빠는 콜라만 보면 기가 넘어가도록 환장을 했어요.
콜라는 바깥세상의 맛을 다 뭉쳐놓은 것 같았나 봐요.
톡 쏘는 그 맛 때문이었을 거예요.
엄마는 기가 승해지면 더 발작을 해, 안 된다고
반찬에다 일체 자극적 양념을 하지 않은 상을 봐서 하루에 두 끼씩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의 양만 올려 보냈지요.
오빤 밥도 콜라에 말아먹고 어쩔 땐 며칠씩 콜라만 비운 채
상을 벽장 밖으로 몰리곤 하더라구요.
스무 살이 넘었지만 성장을 멈춘 것 같은 민석 오빠는
웅크리고 앉으면 꼭 어린애 같았어요.
하루에 한 번씩 휠체어를 타고 뒤뜰을 천천히 돌면서
햇빛 구경을 하거든요. 어쩔 땐 그 휠체어의 뒤를 내가 밀었어요.
뒤뜰에 있는 우물을 그냥 지나치려면 난리를 떨었어요.
우물 앞에서 고개를 숙여 한동안 우묵한 속을 들여다보곤 했죠.
질질 새는 침이 우물 속으로 빠지는 모습을 지켜보자면
그냥 휠체어를 우물 속으로 밀어넣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나이에 따른 몸의 호르몬 작용은 속일 수 없었나 봐요.
이성에 대한 그리움 같은 감정도 없진 않았을 테고
아마 다락 틈새로 눈을 박고 그랬을 거예요.
그날은 학교에서 돌아온 내가 체력장 때문에 너무 피곤해서
가방을 방에 내던진 채 그대로 잠이 들었나 봐요.
꿈결인지 어쩐지 자꾸 숨이 가빠져서.
눈을 떠보니 그 오빠의 일그러진 얼굴이 바로 코 앞에서 떠오르는 거예요.
깜짝 놀라 와락 밀치고 일어나보니
내 몸에는 벌써 실오라기 하나 얹어 있지 않았거든요.
그때의 그 수치심이란 나는 내 발가벗은 몸뚱아리를 훑어보며
몸을 비비 꼬고 있던 민석 오빠에게 물건을 닥치는 대로 집어 던지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어요.
오빠도 그제서야 제 정신이 돌아왔는지 얼굴이 빨개져
허겁지겁 다락으로 기어올라가려 했지만
번번히 미끄러지면서 버둥거리는 거예요.
마침내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온 엄마한테 함께 죽고 말자며
휘둘러대는 다듬이 방망이질에 늑신나게 얻어맞고
며칠간은 곡기마저 끊고 지냈어요.
하루는 엄마가 친정일로 고향에 가시면서 오빠 밥을 잘 차려주라고
신신당부를 했어요. 무서우면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자라고 하더군요.
다락문을 잠그는 자물쇠와 열쇠를 건네주면서,
밥을 줄 때를 빼고는 절대 열어주지 말라고 했어요.
나는 밥 때뿐만 아니라 한 번도 다락문을 열어주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친구를 불러 와서 잔 게 아니라 내가 아예 친구네집에 가서
일주일을 보냈거든요.
민석 오빠는 하루에 한 번쯤은
마당에 나가 햇볕을 쬐야지만 살 수가 있는데.
일주일 뒤에 돌아온 엄마가 다락문을 열어보니
걸레처럼 축 늘어진 민석 오빠가 뒹굴어져 나왔어요.
아직 숨이 끊어지진 않았지만 며칠 못 갔어요.
내가 죽인 거나 다름이 없죠 뭐.
다락 벽지 안쪽이 손톱에 긁혀 남김없이 거덜나 있었어요.
그 이후로 난 그 집이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가출을 시작했죠.
"듣고 있어요?"
"으응."
"졸린가봐"
"아냐 나 가볼게. 내일 아침까지 넘겨야 할 기사가 있어서. 미안해."
도망치듯 서둘러 빠져나온 뒤론 거진 달포쯤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사건이 많이 터져 신문사 일에도 바빴고 왠지 그녀를 찾고 싶은 마음이
생기질 않았다. 그때 들은 오빠 얘기 때문인지,
자꾸만 그녀가 나에게 함정을 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어느 일요일 아침 내 자전거 안장에 손가락을 한번 그어보았더니
먼짓덩어리가 새까맣게 묻어나는 거였다.
나는 새까매진 손가락 끝을 입김으로 몇 번 분 다음
바지가랑이에 쓱쓱 문질렀다. 자전거 길들이기가 끝났나?
철로변 자전거 전용도로 쪽으로 눈길을 줬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마침 그녀가 그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페달을 힘차게 밟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나는 발끝으로 바닥을 톡톡 쪼며 바지춤을 한껏 추스려 올렸다.
나는 자전거 전용도로의 경계석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가
그녀가 나타나는 순간 몸을 일으켰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그녀가 가까이 오면 손을 흔들며 인사말을 건넬 요량이었다.
미혜, 오랜만이야.
아냐! 너무 싱거워. 좀 야하게 할까.
섹시한 아침이군! 낄낄.
그런데 그녀가 날 발견하지 못한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갑자기 청맹과니라도 됐다면 몰라도.
내가 분명히 손까지 번쩍 들었는데.
그녀는 분명 나를 봤지만 아주 차가운 눈길로,
아니 차갑다기보다는 낯선 사람을 대하는 눈길로 스쳐갔다. 실수였을까?
그러나 난 그녀가 타고 스쳐간 자전거에 물끄러미 눈길이 닿는 순간
퍼뜩 깨달았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나와 그녀를 향해 움직이려다
중동무이(하던 일이나 말을 끝내지 못하고 중간에서
흐지부지 그만두거나 끊어 버림)로 멈춰 버린
내 오른손바닥을 뒤집어 맥없이 바라봤다.
자꾸 헛웃음이 나오려 했다. 아하! 그렇구나.
그녀에게 또 다른 자전거가 생겼구나. 그렇지!
다른 자전거를 훔치는 도중이군. 내가 그걸 왜 몰랐을까.
나는 서둘러 허둥지둥 자전거 전용도로를 벗어나 달아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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