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황청심환
- 박완서 -
가까스로 잠이 좀 오려는데 또 그놈의 소리가 났다.
주우지 니집뿐, 주우지 니집뿐…….
"몇 시라는 소리유?"
노파가 물었다. 남궁씨는 되는 대로 대답했다.
기계로 합성한 음향이면서도 일본 말 특유의
교성(여자의 간드러지는 목소리)이 알려주는 시각은
어차피 지금 이 지점의 시간과는 무관할 터였다.
노파의 시계가 친절을 다해 가르쳐 주는 시간이
노파가 떠나온 여행지의 시간인지,
한국의 시간인지도 그는 알아보려 하지 않았다. 나는 비행기 속이었다.
노파는 태엽을 누르면 현재의 시간을 말로 알려주는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다.
백내장 수술 후 시력이 밤낮이나 가릴 정도로 떨어지고 나서
아들이 일본에서 사다준 거라고 했다.
시간을 알려주는 소리도 물론 일본 말이었다.
못 봄을 못 알아들음으로 바꿔가지고 으스대는 노파가 남궁씨는 지겨웠다.
말하는 시계에 관심을 보이기가 잘못이었다.
남궁 씨는 판촉물을 개발도 하고 납품도 하는 회사의
고용 사장(월급 받고 일하는 사장)이었다.
아이디어가 기발하다 싶은 상품에 대한 유별난 관심은,
그러니까 그의 직업의식이었다.
남궁씨가 시계의 목소리를 처음 듣고 불현듯 호기심이 동해
노파의 흐물흐물한 손을 끌어당겨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했을 때,
노파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앙칼진 힘으로 손목을 빼내면서 말했었다.
" 괜히 만지지 말아요.
고장나면 우리나라에선 고칠 수도 없는 귀한 물건이라우.
일본에서도 엄청 비싼 거라던데."
그제서야 비로소 남궁씨는 자신의 직업의식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배반감과 싫증을 느꼈다.
그의 유럽 여행은 명색이 포상 여행이었다.
그러나 속내는 퇴직을 부드럽고 명예롭게 하기 위한
위로 여행이란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밀려난다는 것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억울한 일이었다.
은행에서 밀려날 때도 그랬었다.
부하 행원의 부정을 책임질 상급자가 차장선이었다.
신문에 날 만한 큰 부정이었으면 아마 좀더 높은 상급자가
책임을 졌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때 남궁씨는 겨우 차장이었다.
하필 자식들 학비 부담이 피크에 달했을 때라
아내와 더불어 장삿길로 들어섰다.
돈벌이가 여의치 않아 몇 번씩 업종을 바꿀 때마다
그는 밀려난다는 서글픔과 억울함을 맛보아야 했다.
막내까지 대학을 졸업시키자 문방구와 비디오테이프 대여를 겸한
구멍가게 하나가 달랑 남았다.
아내는 야간 상고 다니는 소녀 하나를 거느리고
주인 노릇을 하고 싶어했다.
그는 서글픈 내색 한번 제대로 못 해 보고 또다시 스르르 밀려났다.
마침 그 무렵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상을 당했다.
그 친구는 생전에 조그만 회사 사장이었는데,
남궁씨는 그의 상속자인 외아들로부터 선친의 회사 경영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회사는 친구의 생전의 씀씀이와 사무실 규모로
미루어 짐작하던 것보다 훨씬 취약했다.
판촉물이나 기념품 답례품을 납품하는 사업은 사무실이나 공장 없이
발과 입심만으로도 가능한 영세한 장사였다.
가내 공업 규모의 공장이 있다고 해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수금과 재고를 합쳐도 기천만 원에 불과했다.
다행히 빚은 없었고 공장과 사무실로 쓰는 건물이 제 집이었다.
게다가 아들은 효자인 듯했다.
건물을 임대하면 훨씬 편하게 수입을 올릴 수 있지만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이니 살려보고 싶다고 했다.
그렇다고 과감한 투자로 회생시켜 보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랬더라면 남궁 씨가 그렇게 쉽게 그 일을 승낙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거기서 이익금을 챙길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현재의 미수금과 재고를
밑천으로 한번 일어나보든지 다 들어먹든지 마음대로 해 보라는 조건이
되레 소심한 마음을 사로잡았다.
아내는 남궁 씨가 고용 사장이 된다니까 처음엔 재벌급 회사인 줄 알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다가 실상을 알고나서는 한심해하다 못해
차라리 경멸했다.
"이 철없는 양반아, 창피한 줄도 좀 아슈.
그렇게 사장 소리가 듣고 싶으면요,
우리 가게에서 비디오든지 문방구든지 하나 뚝 떼어 드리리다."
그러나 연대가 맞았달까.
세상 풍조가 마침 조그만 가게 하나를 개업해도 고사떡을 돌리는 대신
기념품을 돌리게 변하면서 매상을 급신장시킬 수가 있었다.
외판 조직과 손발도 잘 맞았거니와 문방구점을 하면서 생긴 눈썰미를
가미해서 인기를 끈 제품도 적지 않았다.
그의 아이디어가 히트를 친 판촉물들은 거의가 다 상품으로도 살아남아
꾸준히 주문이 오고 있었다.
오년 만에 연간 순이익을 억 단위로 셈할 만한
알토란같은 회사로 키워놓자
친구의 아들은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남궁 씨의 그간의 노고를 치하한다며, 해외여행을 시켜 주었다.
그는 지난날의 거물 정객(정치를 일삼아 하는 사람)처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 땅을 벗어나는 비행기를 탔다.
처음 삼 주는 관광팀에 끼여서 돌고 나서
나중 한 달은 혼자 파리에 처졌다.
출가한 딸이 해외 근무하는 남편을 따라 파리에 살고 있었다.
딸네 집에서의 한 달간은 참으로 지루하고 힘들었다.
딸은 아마 더했을 것이다. 아버지 산책이라도 좀 하세요.
제 소녓적 소원이 뭔 줄 아세요?
파리에 가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달만 시내를 정처 없이
어슬렁거리며 지내 보는 거였다구요.
그런 짜증스러운 말투에서 남궁 씨는 노골적인 구박을 참을 수 있는
맥시멈(최대한도, 최대량)을 한 달쯤으로 잡고 있었다.
그가 견딜 수 있는 한계 역시 그 근처였다.
하루가 여삼추(몹시 긴 시간) 같기가 징역살이와 진배없는 딸네집살이를
견디면서까지 남궁 씨가 해외 여행을 한 달씩 연장한 것은
젊은 회사 주인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경영에 재미를 붙이든 곤란을 겪든 해볼 만큼 해본 연후에 나타나야
피차 후회 없는 결정을 내릴 수가 있을 것 같았다.
남궁 씨가 정말 바라는 것은 물론 그가 객지에서 하루하루 지루함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동안 젊은 주인 역시
그가 아쉽고도 아쉬워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비명을 겨우겨우 참으며
그를 기다려주는 거였다.
"자매님, 마리아 자매님이 또 가슴이 울렁거리고 손발이 비틀린데요.
말도 더듬거리구."
노파의 일행 중 빨간 점퍼를 입은 중노인이
통로에서 창가에 앉은 노파쪽으로 윗몸을 휘면서 미안한 듯이 말했다.
남궁 씨는 중노인의 물렁물렁한 젖가슴의 부피를
이마에 느끼기가 싫어서 고개를 잔뜩 뒤로 젖혔다.
노파의 일행은 성지순례단이었다.
근 삼십 명은 돼 보이는 일행의 좌석은 일련 번호로 붙어 있었는데
노파가 창가에 앉고 싶어한다고 가이드인 듯 싶은 청년이
창가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바꿔 앉혔기 때문에
노파만 일행으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시력이 형편없다면서 남의 신세를 져가면서까지 창가에 앉고 싶어할 만큼
노파는 응석이 심한 편이었다.
"아, 직효약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유."
노파가 발 밑을 고이고 있던 배낭을 한 손으로 들썩거리면서
남궁 씨를 빤히 쳐다보았다.
시력과는 상관없이 말똥말똥한 눈동자는 명령조였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몰랐다.
그래서 남궁 씨는 그 배낭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고 있었다.
배낭엔 어이없게도 반 말 들이 물통이 들어 있었다.
성지 루르드에서 길어오는 기적수라고 했다.
젊은 사람도 들기엔 힘겨운 무게인데도
순례단은 거의 그런 배낭을 메고 있었다.
물은 화물칸에 실어주지 않아서 들고 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남궁 씨는 낑낑대며 노파의 배낭을 그의 무릎 위로 들어올려
익숙하게 지퍼를 열고 물통 옆에 든 약주머니를 꺼내
노파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해 본 장단의 능숙함에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배낭 속엔 그동안 기내식에 곁들여 나오는 포도주까지 추가가 되어
더욱 무거워져 있었다.
"그 동안에 인이 백였나, 이게 벌써 몇 번째래요? 그 귀한 걸."
"걱정 말라니까.
우리 아들이 이럴 줄 알고 넉넉히 챙겨주었으니까
아픈 자매님 있으면 참지 말고 지딱지딱(서둘러서 되는 대로)
먹으라고 해요."
노파가 주머니끈을 풀고 그 안에서 우황청심환을 꺼냈다.
노파는 그걸 꼭 정육각형의 갑째 건네주지 않고 밀랍으로 포장된
동그란 내용물을 꺼내 손바닥으로 한번 궁글려보고 나서 내놓았다.
"우황청심환은 뭐니뭐니 해도 중국 본 바닥 거라야지 요새 나온 국산은
믿을 게 못 돼요."
노파의 말투로 보아 그게 국산이 아니란 걸 스스로 확인해 보면서
대견스러워하고 싶어 그러는 것 같았다.
노파가 차곡차곡 배낭 속에 챙겨넣은 것만큼의 포도주를
마셔댔기 때문일까.
남궁 씨는 수치감 같기도 하고 쓸쓸함이나 슬픔 같기도 한
참을 수 없는 느낌으로 까딱하면 울 것 같았다.
그건 어쩌면 뿌리 깊은 열등감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중풍으로 사 년이나 자리 보존하고 있다가 돌아갔다.
처음엔 중태였다. 누가 보기에도 못 깨어나고 임종을 맞든지
식물인간으로 남을 줄 알았다.
그래도 남궁 씨 내외는 단념하지 않고 한방과 병원 치료를 겸해
정성을 다한 끝에 의식을 회복하고 불편한 대로 자식과 손자들의 효도를
누리다가 돌아갔건만도 그동안 원망이 자자했다.
어머니보다 몇 년 앞서 큰어머니가 고혈압으로 쓰러진 적이 있는데
회복이 감쪽같았다.
어머니는 그런 기적은 쓰러지던 맡에 그 자리에서 자식들이
진짜 우황청심환을 씹어서 환자의 입으로 흘려넣었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노인 모시는 집은 딴 건 몰라도
그 중국 우황청심환만은 갖춰놓고 살 거더란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해 왔다.
큰집 조카들은 툭하면 해외 출장도 잘 가고 선물도 잘 들어와
그런 귀한 약도 영신환처럼 흔한데 내 집 자식은 우물 안 개구리에다가
주변머리까지 없어서 에미 소원 하나 못 풀어준다고
노골적인 경멸도 서슴지 않았다.
그때부터 우황청심환은 남궁 씨에겐 귀에 박인 못이 아니라
자존심에 붙박인 못이 되었다.
앞을 내다본 푸념이었던지 어머니는 그 후 여봐란 듯이 쓰러졌지만,
그는 그때까지도 여봐란 듯이 씹어서 어머니 입안에 넣어드릴
우황청심환이 준비돼 있지 않았다.
의식을 회복한 어머니는 육신의 반쪽이 마비된 걸 알자
제일 먼저 우황청심환을 먹었나 못 먹었나부터 물었다.
남궁 씨 내외는 정직했기 때문에 그 후 어머니가 돌아갈 때까지
지치지도 않고 되풀이되는 원망과 멸시의 말을 들어야 했다.
어머니의 소원이 오로지 우황청심환인데도
그거 하나 못 구해다 드릴 만치
남궁 씨가 가난했던 것도 불효했던 것도 아니다.
다만 시기를 놓쳤을 뿐이었다.
마지막 사 년 동안 남궁 씨는 어머니의 머리맡에 각종 청심환을
즐비하게 늘어놓고 수시로 만져보게도 하고,
조금만 기분이 언짢아도 잡수시도록 했지만 한 번 맺힌 어머니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순 없었다.
물론 그 신기하다는 약효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점점 노망기까지 생긴 어머니는 아들이 구해 온 청심환은 다 가짜고
큰집 아들들이 홍콩에서 사온 것은 진짜일 거라고 우겨서
남궁 씨의 마음을 사정없이 할퀴었다.
다시 한 번 어머니가 쓰러졌을 때,
소원 풀어드리는 셈치고 청심환 중에서도 가장 진짜스러워보이는
밀랍으로 포장한 중공제를 씹어서 직접 입에서 입으로 흘려넣으면서도
마음속 깊이에서는 소생을 바라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남궁 씨에게도 비로소 우황청심환을 선물로 받아보는 일이 생겼다.
역시 은행에 다질 적이었는데 큰돈을 대부받은 고객으로부터였다.
사무적인 절차의 심부름 외에는
그가 대부를 위해 힘쓴 바는 전혀 없었다.
그때도 그럴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고,
사직할 때까지도 그럴 만한 지위에 있어 본 적이 없는 남궁 씨였다.
그만한 액수의 대부라면 대개 어느 선에서 결정이 나게 된다는 걸
알고 있는 정도가 고작 그의 관록이었다.
그런데도 그 고객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중국산 우황청심환
열 개들이 한 상자를 선물로 놓고 갔다.
사무적인 수고에 대한 가벼운 인사치레로 적당한 물건이라고
여긴 듯했다.
그때만 해도 국산 청심환에 대한 신뢰도도 높고,
외국 나들이 다녀오는 사람도 부쩍 늘어나
중국산이 별로 귀물이 아닐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궁 씨는 거액의 뇌물을 받은 것처럼
음흉하게 가슴을 울렁거렸다.
그 후에도 그 고객만 나타나면 뭔가 편의를 봐 주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으로 비굴하게 웃으며 허둥대던 생각을 하면
아직도 남궁 씨는 진저리가 쳐지면서 닭살이 돋곤 했다.
방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비행기도 쉬면서 승무원을 교체하고 급유를 받을 모양이고,
탑승객도 두어 시간 땅을 밟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기내 방송은 연착을 했으므로 방콕까지의 손님만 내리고
계속 여행할 손님은 기내에 머물러 있으라고 했다.
남은 여비를 물건값이 싸다는 방콕 면세점에서 털어 버리려고
잔돈까지 샅샅이 뒤져내 갖고 벼르던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웅성대며
불평을 터뜨렸다.
방콕에서 내린 탑승객들이 거의 외국인이었으므로
서울행 에어프랑스에 남은 손님은 한국인이 대부분이었다.
청소원들이 들어와 닫힌 공간에 여럿이 십여 시간을
붙어 앉아 먹고 마시고 잔 어수선한 자국을 신속하게 지워갔다.
자리가 많이 비어 남궁 씨는 노파의 옆자리를 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시간이나 남았수?"
노파가 고개를 빼고 두리번대는 남궁 씨의 소매를 당기면서 물었다.
남궁 씨는 못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괜히 움찔했다.
"글쎄올시다. 두세 시간이면 땅을 밟게 되겠죠. 지루하셨죠?"
"아이구, 아녜요. 하나도 안 지루해요.
연착할 거 없이 이왕이면 무슨 사고나 나서
오던 길을 되짚어 간다구 해도 끄떡없다우."
노파가 고른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남궁 씨는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비행기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할 것처럼
무턱대고 땅이 밟고 싶었다.
비행기 바퀴가 땅에 닿아 있다는 것과는 상관없이
갈증처럼 다급하게 발바닥에 땅을 느끼고 싶었다.
남궁 씨는 방콕에서 내릴 수 없다는 것을
자기 혼자서 너무 견딜 수 없어한다고 생각하면 막막한 외로움을 느꼈다.
노파의 옆자리를 면하긴 틀린 것 같았다.
탑승한 승객이 꾸역꾸역 빈자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승무원도 교체가 되어 한국인 스튜어디스가
이제부터 여러분을 서울까지 편안히 모시겠다고 인사를 했다.
"저 계집앤 틀렸어."
노파가 표독하게 말했다. 남궁 씨는 노파의 그런 말투가 싫었지만
그 새로운 스튜어디스가 마음에 안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특별한 밉상도 아닌데 이상한 일이었다.
평균치의 우리 나라 여자들보다 오히려 정돈된 이목구비와 아담한 몸매를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승객을 귀찮아하는 마음이
여실히 드러난 표정을 보자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다들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것을 남궁 씨는 파리로부터
일행과 자리를 가까이하면서 은연중 생긴 공감대를 통해
감지하고 있었다.
스튜어디스가 칸막이 뒤로 사라지자 누군가가 하품하는 소리로 말했다.
"저 여자 보니까 한국 다 온 실감나네, 제기랄."
다들 옳소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파에게 우황청심환을 가지러 왔던 빨간 잠바가 다시 통로 쪽에서
남궁 씨의 어깨를 짓누르면서 노파에게 속삭였다.
"아까 그 서양 남자는 인물도 좋고 인심도 좋더니만
어쩌면 수인사 한마디 없이 없어져 버렸을까요? 서운하네요, 자매님."
"한국땅 다 왔으니 슬슬 구박맞을 준비를 해야지 어쩌겠수."
귀국할 날을 앞두고 딸이 비행기를 에어프랑스로 예약했다고 했을 때
남궁씨는 암말 안 했지만 속으로는 여간 괘씸하지가 않았다.
그 동안 주리 참듯 참던,
빨리 내 나라 땅을 밟고 내 식으로 퍼지고 싶은 욕망은
우선 내 나라 비행기만 타도 반은 충족될 것 같았다.
타기만 하면 당장 내 나라 같을 우리 비행기 놔두고 에어프랑스라니,
같잖은 것 같으니라구.
그는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딸을 고깝고 아니꼽게 여기면서도
촌스러워 보일 것 같아 애써 내색하진 않았다.
타고 보니 기내 서비스를 맡은 승무원이 아주 잘생긴 백인 미남이었다.
성지 순례단을 비롯해서 함께 무리를 지어 모여 앉은
한국 사람들의 대부분은 외국 여행에 익숙지 않아 뵈는 노년층이었다.
기내 방송도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 비행기를 탄 긴장감이랄까,
조심성 같은 걸 남궁 씨도 이심전심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남궁 씨는 혹시 우리 동포가 무시당하는 꼴을 보게 될까 봐
조마조마했지만, 미남 승무원의 친절은 참으로 완벽했다.
처음 기내식이 나왔을 때,
마실 것을 뭐로 하겠느냐를 물을 적에도
일일이 적포도주, 백포도주, 맥주, 생수 등을 들어서 보여 주면서
환한 미소로 의견을 물었다.
할머니들이 알콜 음료를 천부당만부당 하다는 듯이 도리질을 하며
거부하고 맹물을 청하는 모습은
남자들의 술자리에 낀 새침데기 처녀가 맥주 한 잔도 못 마시는 척
질겁을 할 때처럼 귀엽기조차 해서
남궁 씨는 백포도주를 즐기며 비죽비죽 미소짓곤 했다.
그럴 것 없다고 제일 먼저 아는 척을 한 것은 바로 남궁 씨 옆자리의
노파였다. 노파는 기회 있을 때마다 해외 나들이가 처음이 아니라는 걸
비치고 싶어했는데,
그때도 혼자만 포도주를 청해 마시지 않고 뒀다가 배낭 속에 챙기면서
그렇게 해도 상관없다는 시범을 보였다.
다음 식사때부터는 너도나도 그대로 했다.
병마게를 따지 말고 그냥 달라고 청할 수 있을 만큼 할머니들은
미남 승무원과 쉽게 친해졌다.
포도주를 챙기는 김에 잼이나 버터,
심지어는 일회용 식사도구까지 가방에 쑤셔넣은 이도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처음엔 황송해 하던 백인 미남의 서비스를 마음껏 즐겨보려는
분위기까지 감돌기 시작했다.
자주 물을 청하기도 하고 베개나 담요를 더 달라기도 했다.
뭐가 없어졌다고 손짓 발짓으로 흉내를 내어
그로 하여금 발밑을 더듬게 하기도 했다.
남궁 씨가 아슬아슬해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 미남 백인의 태도는
한결같이 귀부인에 봉사하는 기사처럼
우러나는 기쁨과 공손함으로 일관했다.
부르지 않아도 잠든 할머니만 보면 흘러내린 고개를 바로잡아 주고
담요를 양어깨 밑으로 꼭꼭 여며 주는 모습은
아기를 돌보는 어머니처럼 거짓없이 자애롭고도 완벽하게 아름다워서
남궁 씨는 제발, 그만 그만하라니까 하는 비명을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곤 했다.
남궁 씨는 자신이 참을 수 없는 게 동포들이 주책없는 주접스러움인지
백인의 지고지순한 봉사정신인지도 잘 분간이 안 되었다.
다만 죽자구나 엉겨붙고 싶어하면서도 밥의 뉘처럼
단호하게 고립된 자신을 느낄 뿐이었다.
그렇게 안 오던 잠이 문득 남궁 씨를 엄습했다.
자신의 코고는 소리에 놀라 고쳐 앉길 거듭하면서
그 사이사이에 악몽을 꾸었다. 악몽은 집요하게 연결이 되었다.
노파가 그를 흔들어 깨웠다.
좌석벨트를 매라는 기내 방송이 들려오고 있었다.
노파가 기창 밖을 내려다보면서 다 왔다고 환성을 질렀다.
남궁 씨도 우리의 산천을 눈으로 확인했다.
그러나 곧 산천은 바다로 변했다. 노파도 정말 산천을 본 것일까.
같이 오면서 쭉 궁금해하던 생각이 또 있다.
노파의 시력이 겨우 밤낮이나 가릴 수 있을 정도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자주 했다.
뒤에서 웅성웅성 짐을 챙기면서 스튜어디스를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방콕에서 써 버리지 못한 돈을 기내 쇼핑으로 쓸 요량으로
그녀에게 도움을 청한 듯했다.
기다리라고만 해 놓고 코빼기도 안 비치다가 나중에서야 물건이
거의 다 팔렸다고 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잘못도 아니련만은 모두들 동족에게 무시당했다고
분개하는 걸 들으며 남궁 씨는 그간의 부질없는 긴장과 날들이
풍선처럼 쭈그러드는 걸 느꼈다.
"그러게 내 뭐랍니까? 내 관상은 못 속인다니까."
노파가 일행쪽을 돌아다보면서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남궁 씨는 속이 근질근질하면서도 내 관상도 한번 봐 달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할머니, 하고 부르자마자 그런 충동은 없어졌지만
할머니는 의아한 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순례단 중에서도 최고령자답게 백발에 쪼그라든 얼굴이었지만
눈만은 의안처럼 부조화스럽게 홀로 말똥말똥했다.
사물을 제대로 분간 못하기 때문에 더 그럴 수도 있겠고,
사물을 제대로 분간 못한다는 게 거짓말일 수도 있으리라.
아무려면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남궁 씨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기 얼굴을 뚫을 듯이 바라보는
노파의 눈길이 섬칫했다.
만약 시력이 형편없다는 게 정말이라면 지금 노파의 눈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애매한 윤곽 속에 이목구비가 두루뭉수리하게 함몰된
괴물의 형상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악몽 속에서도 그렇게 생긴 괴물에게 쫓기느라 소리나지 않는 절규로
목구멍을 짐승처럼 헐떡인 생각이 났다.
공항엔 아내와 맏아들 내외가 마중 나와 있었다.
남궁씨는 곁눈질로 열심히 출영객들을 살폈다.
뭘 꾸물대냐고 아내가 핀잔을 주었다.
회사에선 아무도 마중 나와 있지 않았다.
하긴 제멋대로 연장한 여행이니 귀국 날짜를 알 리가 없지.
그러나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만약 회사에서 그동안 그가 아쉬웠으면 집으로 얼마든지 연락을
취해볼 수 있는 일이었다.
남궁 씨는 울 것처럼 그게 허전하고 쓸쓸했다.
빨리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한다면서 아들도 남궁 씨가 머뭇대지 못하게
재촉을 했다. 그놈의 자가용 좀 얻어타려고
아내가 억지로 아들을 마중 나오게 했으리라고 남궁 씨는 짐작했다.
아들의 운전 솜씨는 신경질적이었다.
전에도 자주 느낀 일이었지만 꼭 푸대접만 같아서 고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그는 막연히 뭔가를 기다리며 차창 밖을 감회 없이 내다보았다.
비행기에선 뛰어내려도 좋다고까지 여길 만큼 밟고 싶어했던 땅이었다.
마침내 돌아왔다는 느낌은 상상한 것과는 딴판으로 삭막했다.
가슴이 울렁거리기는커녕 무겁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식구들하고도 아무런 교감이 어루어지지 않은 채
붙어 앉아 있다는 것은 숨이 답답한 일이었다.
남궁 씨는 차창 유리를 조금 내렸다. 바람이 뜻밖에 찼다.
입고 있는 엷은 베이지색 잠바가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이 땅은 옷이 여러 가지 필요한 고장이었다.
사람들마다 따뜻하고 짙은 색깔 옷을 입고 있었다.
같은 기온에서도 봄과 가을 옷이 사뭇 달랐다.
지금은 가을이 깊어 가는 중이로구나.
남궁 씨는 낯선 나라에 처음 발을 디딘 것처럼 그렇게 생각했다.
"참, 당신 안 계신 동안에 큰손님들이 왔다우!"
아내는 갑자기 생각난 듯이 말했지만 참고 있다가 내뱉는 말투였다.
"나한테?"
앞자리의 며느리가 짧게 웃는 소리가 남궁 씨 귀에 거슬렸다.
"그럼 당신한테지 누구한테겠수. 당신이 초청했다면서요.
왜 있잖아요? 재작년인가부터 연락이 닿기 시작한
당신하고는 육촌인가 팔촌인가 된다는 그 연변 동포 말예요.
초청을 하시려거든 저하고 의논이라도 한마디 하시든지,
갑자기 들이닥치게 하면 어떡해요. 당신도 안 계신 사이에."
남궁 씨는 할아버지를 뵌 적이 없다. 그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고,
할아버지에겐 형님이 한 분 계시다는 것도
아버지로부터 들어 알고 있는 정도지 뵌 적은 없다.
그래도 친할아버지보다는 종조부(할아버지의 형제)에 대해서
더 궁금해 하기도 하고 의미 부여를 하고 싶어한 것은,
청년 시절 나라를 빼앗기는 걸 보고 울분을 참지 못해
독립운동을 하러 중국으로 갔다고 전해들은
그분의 이색적인 생애 때문이었다.
남궁 씨의 아버지가 그 일을 그닥 좋게 말한 건 아니었다.
당대의 풍습대로 조혼을 한 종조부에겐
그때 이미 처자식이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에겐 사촌형뻘이 되는 그 아이가 장성하지 못하고 일찍 죽자,
집나간 남편을 원망하기보다는 남기고 간 혈육을 제대로 키우지 못한
죄 많은 팔자만을 심히 부끄러워하며 시들시들 말라가던
그 애 어머니도 삼십을 넘기지 못하고 아들 뒤를 따라간 모양이었다.
어린 나이지만 큰집이 그렇게 흔적도 없이
무후(無後, 대를 이어 갈 자손이 없음)해지는 걸 지켜본 아버지는
그분이 원망스럽기도 했을 것이고 경외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분에 대한 아버지의 평가는 들쭉날쭉했다.
해방 후 한때는 아버지도 선대에나 당대에 별로 이렇다할 인물을
배출하지 못한 가문을 그 분 덕으로 빛내 볼 생각이 없지 않았던 듯하다.
툭하면 그 분을 대단한 독립운동가인 양 자랑을 하고 싶어했지만,
남궁 씨는 어려서부터 솔직히 말해 그 양반이 독립운동을 하러 갔는지,
아편 장사를 하러 갔다가 얼어죽었는지 알 게 뭐냐는 식의
아버지의 폭언을 들어왔기 때문에 그닥 믿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남궁 씨의 어렸을 적 기억이고 남궁 씨 역시 소년 시절에
아버지를 여의어서 종조부의 생사나 정체까지 궁금해할 만큼
편안한 세월을 보내지 못했다.
그러나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가족사 속에 한두 사람의 의인이나
지사쯤 있는 게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으로
더러 자식들 앞에서 그 어른을 적당히 각색해 울궈먹은 적도 있지만
다 지난 일이었다.
귀담아 듣지 않는 얘기를 무슨 재미로 각색을 하겠는가.
남궁 씨 또한 자신이 각색한 얘기는 물론 아버지의 엇갈린 주장이
다 종조부의 진짜 모습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허상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런 종조부가 만주에 정착해 살면서 퍼뜨린 자손들이
고국의 친척을 찾아 여러 갈래의 통로로 수소문한 끝에
마침내 당도한 게 남궁 씨였다.
당초의 뜻은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나중에 종조부는 독립운동가도 아편장수도 아니었다보다.
만주에서 만난 조선 처녀와 혼인해서 아들 딸 낳고 농사짓고
고희의 수까지 누렸다고 한다.
그러나 고향에 남긴 일점혈육에 대해선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한 듯
임종할 때도 자식들에게 언제고 고국땅과 왕래할 수 있는 날이 오거든
제일 먼저 큰형을 찾아가 우의를 나누도록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언을 받든 자식들은 다들 늙어 죽고,
손자들이 늙어갈 무렵에나 겨우 고향땅과 소식을 주고받고
더러 왕래도 할 수 있을 만큼 길이 트였다.
그들이 바로 종조부의 직계인 남궁 씨의 육촌들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애타게 찾은 국내 친척은
그들의 큰아버지나 그 후손이었으나 그 집안이 절손 상태이고 보니
마침내 남궁 씨한테까지 이른 것이었다.
국내에선 누가 수고를 하고 수소문을 해서 육촌까지 찾아내게 되었는지
그 경로까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아무튼 삼대까지 거슬러 올라간 자세한 자기 소개와 함게
친척을 찾은 벅찬 감격으로 다소 흥분한 육촌의 편지를 받은 게
재작년이었다. 연변으로부터였고 한문을 섞어 쓴 한글은
유려한 달필이었다. 직업이 의사라고 했다.
한의사인지 양의인지는 밝히고 있지 않았지만 괜히 한의사일 것 같았다.
최초의 편지에는 남궁 씨도 만감이 교차하여 즉각 회신을 보냈으나
다음부터 피차 할 말도 없어지고 하여 일 년에 두세 번씩
안부나 주고 받았었다.
그 쪽 역시 할 말이 없어서였겠지만 편지 사연은
죽기 전에 고국땅 한번 밟아보고 싶다는 절절한 소원으로 일관했다.
남궁 씨도 자연히 언제든지 오기만 하면 환영한다는 의례적인
답장을 쓴 적은 있어도 정식으로 초청장을 보낸 적은 없었다.
그 쪽에선 그 정도의 편지가 초청장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일까,
남궁 씨는 속으로 의아했지만 초청한 일이 없다고 말하기도 싫었다.
발뺌 같아서였고 연변 친척을 별로 달가워 않는 것 같은
식구들의 냉담한 태도가 울컥 밉살스럽기도 해서였다.
"언제 왔는데?"
"한 달포는 됐을 걸요."
"그럼 왜 나한테 연락을 안 했소. 내가 영애네 가 있을 적인데."
"연락했으면요? 연락했으면 생전 처음 나간 외국여행 걷어치고
달려오실려구요? 정성이 하늘에 닿았구랴."
아내의 말투는 비꼬는 투였고, 또 몹시 공격적이었다.
남궁 씨는 자기가 없는 동안 식구들이 마음껏 친척들을 푸대접한 게
눈에 보이는 듯해 와락 역정이 치밀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고약하게 하는 거요?
생전 시집 식구 치다꺼리라고는 모르고 살더니만
버르장머리하고는 ……."
남궁 씨는 며느리하고 함께라는 것도 잊고 언성을 높였다.
아들과 나란히 앞에 앉은 며느리가 어깨가 흔들릴 정도로 킬킬댔다.
"내가 시집 식구 치다꺼리를 안 했다구? 아이구 기가 막혀."
할말이 너무 많아 되레 말문이 막혀 입술만 떠는 아내를 바라보면서
남궁 씨는 비로소 아차, 싶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아내야 사 년 동안이나 노모의 뒤를 받아낸 시집살이를 생각하고
분개하고 있는 게 뻔했지만,
남궁 씨는 우황청심환으로 하여 겪은 모멸감이 먼저 떠올랐다.
"아버님, 우리도 하느라고 했어요.
어머님은 저녁 초대도 하고 여관에 김치도 해 나르시고,
아범도요 바쁜 사람이 일요일도 못 쉬고
롯데월드랑 육삼빌딩이랑 모시고 다닌걸요.
차가 있으니 어쩌겠어요."
단지 차 때문이라는 말투였다.
이까짓 똥차 하나 굴린다고 유세하는 말투가 마뜩찮아
남궁 씨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화살은 만만한 아내 쪽으로 돌렸다.
"아니 그럼 그 먼 데서 온 친척을 여관에서 묵게 내 버려뒀단 말이오?"
"그래요. 그러니 어쩔 테요. 당신이 이렇게 공 모르는 사람이란 걸
모르고 나도 처음엔 집으로 모실려고 했다우.
그 쪽에서 마답디다. 한두 식구라야죠.
당신 육촌이 달고 온 식구가 도대체 몇인 줄이나 아슈?"
"그럼 육촌 혼자가 아니란 말이요?"
남궁 씨의 언성이 슬그머니 누그러졌다.
"마나님하고 동부인을 한데다가 처제에다 처조카까지
안동(길을 갈 때, 사람을 데리고 함께 감)을 하고 왔습디다.
무슨 살판이 날 줄 아는지, 자그마치 네 식구예요."
몽매(잠을 자며 꿈을 꿈)에도 그리던 조국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어떻게 저런 말투를 쓸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남궁 씨가 뭐라고 하기 전에 며느리가 먼저 참견을 하고 나섰다.
"어머님, 지금 그 식구들이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래 네 말이 맞다. 이 양반이 하도 남의 화를 돋우니까
초점이 흐리게 되지 뭐냐? 그 사람들이 여럿인 건 문제도 아니라구요.
그 여럿이 제가끔 얼마나 큰 한약 보따리를 들고 왔는지 알아요.
우황청심환만 해도 네 사람 걸 한데 모아놓은 게
이불 보따리만 합니다."
남궁 씨는 우황청심환 소리에 정신이 번쩍 났다.
중국을 찾은 한국 관광객이 그걸 몽땅 쓸어 사는 바람에
지방에 따라서는 품귀현상까지 빚고 있다는 걸
신문에서 읽은 생각이 났다.
그 좋은 게 저절로 굴러 들어왔는데 모두들 귀찮아하는 걸
남궁 씨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황청심환이라면 현금과 마찬가질 텐데 무슨 걱정이란 말이요?"
"그랬으면 오죽이나 좋겠수, 이 답답한 양반아.
글쎄 중국산 우황청심환이 함량 미달의 가짜라는 게 밝혀졌지 뭐유.
우리 기술로 분석한 결과 그렇게 밝혀졌다고 신문에서 떠들고 나자
청심환 인기가 뚝 떨어질밖에요.
하필 고때를 맞추어 그 사람들이 들이닥칠 게 뭐람."
아내의 말에 추연한(처량하고 구슬픈) 동정심이 어렸다.
요는 우황청심환이 문제지,
아내가 그 사람들을 특별히 귀찮아하는 것은 아닌 듯했다.
그 사이에 그런 변화가 있었던가?
용궁의 사흘이 이 세상에선 삼십 년이더라는 옛날이야기 속을
들어갔다 나왔으면 모를까, 남궁 씨는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현실에 적응하려고 애썼다.
"안 팔리면 도루 가져가면 될 거 아뉴?
절대로 가짜일 리는 없으니 우리라도 좀 팔아 주든지."
"좀 팔아줘서 될 일이 아니라니까요.
이 기회에 생전 살 걸 벌어보자고 작정을 한 사람들 같더라구요."
"그럴 리가 있겠소, 의사라던데.
사회주의 나라니 노후 걱정은 안 해도 될 테고."
"사회주의가 물욕에 눈뜬 건 더 못 봐 주겠더라구요.
어머니 말씀이 맞아요. 약장사 한탕 잘하면 팔자를 고치는 걸로
소문이 나 있고, 실제로 초기에 다녀간 동포들은
생전 벌어도 못 만져 볼 큰 돈을 번 것도 사실이고요.
그러니 너도 나도 올려고 안 하겠어요?
그쪽 정부에서도 나가서 요령껏 딸라 좀 벌어 오라고
부추기는 인상이거든요.
여행은 허락하면 여비는 한푼도 못 갖게 나가게 하고
물건은 얼마든지 괜찮다니 음성적인 수출 장려지 뭐예요.
거의가 다 빚을 얻어서 그렇게들 약재를 사 온다니
정부나 개인이나 그런 식으로 딸라에 환장을 해서 어쩌겠다는 건지,
참 그 사람들 큰일이에요."
처음으로 운적석의 아들이 참견을 했다. 냉정한 말투였다.
결혼 날짜를 받아 놓고, 너는 맏이니까 그런 생각이 없을 줄 안다만
우린 아직 젊고 앞으로 결혼시킬 애들도 남아 있으니
일 년만 같이 살고 내보내 주겠다고 크게 인심 쓰듯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아들은 망설이지 않고 딱 잘라 말했었다.
우린 처음부터 나가 살겠습니다. 그때도 그렇게 냉정한 말투였다.
남궁 씨는 그때 오만정이 떨어지던 걸 어제 일처럼 떠올리면서
일부러 입을 꽉 다물고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뭐가 큰일이냐? 이까짓 똥차 하나 유지하려고
삭신을 혹사하는 너는 뭐가 좀 낫냐? 하고 비꼬고 있었다.
"아버님도 이제 만나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 사람들 어쩌면 그렇게 후진지요.
꼭 우리의 오십 년대 말 같은 궁상이라니까요."
며느리의 이런 말에도 남 궁씨는 속으로만, 본데없는 것 같으니라고,
시집 어른들한테 그 사람들이 뭐냐?
그래도 들은 풍월은 있어서 뭐 오십 년대말?
넌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어. 너 따위가 그 시절의 의미를 뭘 안다구.
이러면서 자기만이 오십 년대를,
그 신산한(세상살이의 고된) 세월을 부둥켜안은 것처럼 느꼈다.
아들 내외는 문지방도 안 넘고 집앞까지만 데려다 주고 돌아갔다.
아들은 회사로 급히 들어가야 한다고 했고,
며느리는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라고 했다.
남궁 씨는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트렁크를 메다꽂으면서
아내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걔들은 왜 불렀소? 그까짓 자가용 얻어 타자고?
공항엔 버스도 택시도 동났답디까? 도대체 영감을 어떻게 보고,
외국 한번 나가는 걸 무슨 벼슬인 줄 알고
공항엔 꼭 자가용으로 들락거리고 싶어하는 족속 취급을 하는게요?
남도 아니고 자식한테 그까짓 똥차 한 번 얻어타고
이런 수모를 겪게 하니."
"걔들이 뭘 어쨌다고 그러세요? 그리구 똥차 아녜요.
이번에 새로 뺐어요. 쏘나타루다.
보태 준 거 없이 그만큼 사는 걸 대견해 해야지 어쩌겠수."
아내가 불붙는데 키질을 삼가고 심란한 목소리로 다둑거렸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아이구, 얼마나 기다렸으면 때도 잘 맞추네.
보나마나 연변 동폴 걸. 이렇게 중얼거리며 수화기를 들었다.
"예, 예, 방금 들어오셨어요. 예, 예, 바꿔드릴게요."
얼떨결에 수화기를 받아든 남궁 씨는 여봅쇼, 아, 성님이요?
나요 나, 령이가 왔소, 날래 보십시다. 하는 소리가 하도 우렁차서
수화기를 약간 떼면서 자기도 모르게 피곤한 목소리가 나왔다.
장장 스무 시간을 비행기만 탔다는 얘기와 그 동안에
거의 눈을 붙이지 못했으니 지금 누우면 내일까지 못 깨어날 것 같다는
변명을 두서없이 하면서 아내를 향해 곱지 않은 눈을 떴다.
도착할 시간을 그렇게 정확하게 가르쳐 줄 게 뭐였을까 싶어서였다.
남궁 씨는 자기도 연변 동포를 귀찮아하고 있다는 걸
상대방이 눈치 챌까 봐보다는 아내가 알까봐 더 신경이 써졌다.
래일이요? 래일두 일 없구 말구요.
육촌 아우뻘 되는 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명랑하고 씩씩했다.
건강하고 감정이 섬세하지 않을 것 같은 목소리에
남궁씨는 친화감을 느꼈다.
아내가 밥상을 차리는 것 같았다.
구뜰한(변변하지 아니한 음식이 맛은 구수하여 먹을 만한) 된장국 냄새가
났다. 딸네 집에서도 우리 식으로 먹었지만 아내의 된장국 맛은
그의 집에서만 볼 수 있는 맛이었다.
만 하루를 기내식으로만 견딘 속은 그득한데도 식욕이 동했다.
그러나 남궁 씨는 토라진 마음 때문에 꾹 참고 오로지
잠이 급한 것처럼 자리 먼저 깔고 길게 누웠다.
허리와 사지를 마음껏 뻗는 쾌감이 에구구,
소리가 절로 나게 황홀했지만 잠은 생각처럼 쉽게 오지 않았다.
"주무시우? 아마 못 주무실 거유. 시차라는 게 그렇답디다."
아내가 머리맡에서 이렇게 운을 떼고 나서 계속해서 구시렁거렸다.
또 연변 동포들 얘기였다. 남궁 씨는 못 듣는 척했지만,
수면을 갈망하면서도 잠들지 못할 때의 불유쾌한 각성 상태를
아내의 목소리는 마냥 끌고 갔다.
차내에서 못다 한, 연변동포들이 얼마나 못 살고
조야(거칠고 천함)하고 억척스럽다는 얘기를
아내는 지치지도 않고 하고 싶어했다.
가짜로 판명이 난 청심환을 진짜라고 우기면서 연줄을 통해
억지로 떠맡기는 것도 한계에 달한 동포들이
직접 거리로 나앉아서 덕수궁 돌담길이
중국산 약종상(약재를 파는 장사, 또는 그런 장수)길로 변했다는
얘기도 했다. 설마 그럴리가.
남궁 씨는 두 달도 안 되는 사이에 세상이 그렇게 변했다는게
믿어지지가 않아 제 집, 제 잠자리로 돌아왔다는
실감까지 잡치는 걸 느꼈다. 아내도 이상했다.
남궁 씨의 친척을 꼭 집어 지칭하지 않고 일반론처럼 말하면서도
아내의 말투엔 지나친 관심과 혐오감이 배어 있었다.
다음 날 아내가 가르쳐 준 대로 찾아간 여관은
광화문 근처의 중심가였지만 재개발 지역이라 환경이 구질구질했다.
그 금싸라기 땅에 빈집도 더러 눈에 띄었다.
여관은 버젓한 오층 건물이었지만 마지막날까지 제 몸 안 아끼고
돈만 버느라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접객업소의 무신경이 못마땅하여 남궁 씨는 적당히
거만하게 삼백오호실 손님에게 인터폰을 넣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아, 그 연변서 온 사람들 말이죠. 올라가 보슈. 그냥 올라가봐요."
꾸역꾸역 밥을 먹고 있던 주인이 퍼질러 않은 채 턱주걱으로
이층으로 난 계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남궁 씨는 그런 불손한 태도에서도 주인이 연변 동포를 얼마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지 짐작할 수가 있었다.
우중충하고 눅눅한 복도 구석방이었다.
노크를 하면서 문을 밀어봤더니 쉽게 열렸다.
남궁 씨보다 훨씬 늙어 보이면서도 낙천적인 동안의 남자가 누구냐고
확인도 하지 않고 아이고, 성님 하면서 와락 달려들더니
남궁 씨를 껴안고 볼을 비볐다. 완전 서양식이었다.
그이 힘찬 가슴의 박동을 가슴으로 느끼면서 남궁 씨는 비로소
감동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한편 그가 울까 봐 겁이 나기도 했다.
그때 하필 친척 아니라도 동포만 만났다 하면 눈물을 철철 흘린다는
이북 사람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남궁 씨는 그것만은 따라할 자신이 없었다.
우리 친척 중에 저런 웃음을 웃을 수 있는 이가 있다니,
싶을 만큼 눈부시고 너그럽고 대륙적인 웃음이었다.
하긴 의인 아니면 기인이었을 종조부의 직계 후손이니까.
그는 소년처럼 종조부의 혈통이 자랑스러워지면서
아직도 속에서 복대기던(답답하고 거북하게 느껴지던)
소인스러운 오만가지 잡념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늙은 여자 중 한 사람이 아이고 아지바니, 하면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정식으로 뵙기요, 하면서 남편에게 눈짓을 했다.
남궁 씨더러 먼저 자리에 앉길 권했지만 엉거주춤하고 서 있다가
그들의 절에 맞절로 답했다.
육촌 계수하고 생긴거나 연령이 비슷해 보이는 부인이 처제라고 했다.
식구들한테 들은 처조카는 보이지 않았다.
"한 분 더 계시다고 들었습니다만."
남궁 씨는 그이들과 금세 친밀감을 느낄 수 있어서 마음이 놓였으나
역시 할말은 없어서 그것부터 물었다.
"련희 말인갑다. 글시 갸아가 어제 남대문 시장 귀경 갔다가
기름튀기가 먹음직하다고 한 보따리를 사다가 밤새 쉬엄쉬엄
다 처먹드니만 리질(이질, 설사병)을 만났나,
저리 뒷간을 들락들락해싸니."
처제라는 노부인이 말했다.
물 내리는 소리가 나고 화장실 문이 열리면서
한창 나이에 활짝 핀 아가씨가 상냥하게 인사를 하면서 나타났다.
방에 화장실이 딸렸다는 게 여간 다행스럽게 여겨지지 않았다.
젊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아가씨는 얼굴도 곱고 아무렇게나 입은 평상복도 세련돼 보였다.
남궁 씨는 비로소 긴장을 풀고 방 안을 살펴보았다.
장판 비닐이 주글주글 낡은 방은 부모자식 간이라 해도
네 식구씩이나 기거하기엔 협소한 방이었다.
게다가 한쪽 벽엔 우황청심환을 비롯한 각종 약재가
장롱 하나 부피는 되게 쌓여 있었고
그 위에는 녹용이 한 대 통째로 우아하고도 신비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궁 씨 눈엔 우황청심환만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가족사속의 한 기인이 만들어낸
불가사의한 거리를 뛰어 넘어 간신히 상봉한 후손들의 감회를,
우황청심환의 값어치가 떨어진 것만큼의 무게가 짓누르는 것처럼 느꼈다.
처량하고도 고약한 느낌이었다.
만약 저 아우가 한낱 환약 따위의 값어치에 따라 인격까지 격하시키는
이 땅의 인심을 안다면 어떤 마음일까
자괴하면서 그런 느낌을 극복할 수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서로 기억의 족보를 대조도 하고 오르락내리락하기도
하면서 남궁가의 틀림없는 후손이고 육촌간이라는 걸 확인하는 절차를
끝내자마자 육촌은 약 얘기를 꺼냈다.
"운수가 나빴든기라요.
집 떠난 건 구월인데 남들은 일주일 만에 받는 비자를
우리는 미운 털이 박혔는지 차일피일하는 바람에 홍콩에서 한 달이나
지체를 했으니, 하필 그동안에 여기서 그 가짜 소동이 나지 않았겠소.
날은 자꾸 추워지고 반값에라도 후딱후딱 파는 게 수라고
어찌나 성화들을 하는지,
래일부터라도 당장 거리로 나앉아 딴 동포들처럼 좌판을 벌이고 싶은데
그전에 성님하고 의논을 하게 됐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오."
"내가 무슨 힘이 있어야 말이지."
"도와달라는 게 아니야요. 성님한테도 리(이익)가 될 것 같아
하는 소리지요. 정말 반값이라니까요.
우린 그저 본전치기나 하자는 게지요.
금세 오를 테니 두고 보시라우요.
앞으론 들어오는 량이 줄 건 뻔한 리치구요."
육촌이 돈 아쉬운 사람다운 궁기(궁한 기색)나 조바심을
전혀 나타내지 않고 느긋하고 명랑하게 그런 말을 하는 게
남궁 씨 보기엔 매우 신기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쉽게 달고 쉽게 식는 이쪽 풍토를 충분히 알고 있다는 태도도
조금도 냉소적이거나 업수히 여기는 투가 아니고 마냥 너그러워 보였다.
"사회주의 나라에서 온 자네가 더 장삿속에 밝으니 놀랍구만.
여기서 눌러 살아도 한밑천 잡고 살겠어."
남궁 씨는 그런 말로 완곡한 거절을 대신했다.
"아이구 성님, 누가 죽을 때까지 호강을 시켜준대도 여긴 못 살뎁디다."
"왜요? 왜 못 살아요?"
여기가 마음에 들었음이 역력한 계수가 처닿듯이 물었다.
"웬 왜야, 그 소리를 어케 믿고 살아, 살긴."
이렇게 핀잔을 주고 나서 여편네들은
시장으로 백화점으로 쏘다니는 재미에
세월 가는 줄 모른다고 남궁 씨에게 설명을 했다.
남궁 씨도 그 기회에 여자들에게 말로 수인사를 치렀다.
"어렵고 먼 길을 오셨는데 이런 누추한 데 계시게 해서
면목이 없습니다.
식구들 불찰도 있지만 제 힘이 워낙 딸려서요."
"성님도, 이 호텔이 어드래서요. 우린 려행사 잘 만나서
얼마나 호강인지 몰라요.
몰아다가 짐짝처럼 부려만 놓고 나몰라라 해서
당장 잠자리 때문에 고생하는 동포가 얼마나 숱하다구요."
듣고 보니 여행사가 초청장은 물론 어떤 약재를 들여오면
가장 수지가 맞는다는 정보까지 제공해 주면서
적극적으로 여행 알선을 한 만큼 여관비 등 최소한의 경비는
조달할 수 있도록 약재 판매에도 어느 정도 관여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럴 리야 없지만 자기가 정식 초청자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남궁 씨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못 말릴 소심증이었다.
방값만 내면 식사는 방에서 지어먹는다고 했다.
현관서부터 여관 전체에 음식 냄새가 배어 있었다.
여인숙과 민박을 혼합한 것 같은 더러운 여관방을 꼬박꼬박 호텔이라
부르는 아우에게 남궁 씨는 연민을 느꼈다.
개운치 않은 연민이었지만 아무튼 그런 느낌의 연장선상에
돌연 생겨난 우월감 때문에 남궁 씨는 적지 않은 양의
우황청심환을 팔아보겠다고 떠맡았다.
거리에 나선 남궁 씨는 촌스러운 보자기 사이로 비죽비죽 비져나오는
청심환갑을 내려다보면서 왜 하필 하고많은 약재 중에서
우황청심환이었을까? 하고 자신의 미련한 선택에 쓴웃음을 지었다.
갈 데가 없었다. 집에 가긴 싫었다.
연변 친척에 대한 아내의 혐오감만 돋울 일은 피하고 싶었다.
그는 용기는 내서 회사로 향했다. 그까짓거 이판사판이었다 싶었다.
그동안 회사에선 집으로 아무 연락이 없었다고 한다.
출근해 봤댔자 자신의 입지가 남아 있으리라는 희망은 없었다.
그러나 오백만 원도 안 되는 포상여행비만 받고
떨어질 순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공로를 그렇게 과소평가 당할 수 없다는 생각은
소심한 그로서는 파격적인 생각이었고,
전엔 감히 꿈도 못 꿔 보던 생각이었다.
그 동안 사장실을 어찌나 잘 꾸며놨는지
한때 자신이 몸담고 있었던 데라는 느낌이 조금도 안 났다. 다행이었다.
그 대신 뒤쪽으로 조그맣게 회장실이란 구석방이 하나 새로 생겨난 게
눈에 띄었지만 안은 집기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그가 거기라도 붙어 있으려는 눈치면 그때 가서 책상 하나 걸상 하나
놔주려는 속셈이 뻔했다.
그는 보따리를 놓고 사장실에 버티고 앉아
출타중인 젊은 주인을 기다렸다.
돌아온 사장은 그를 깍듯이 대접했고
그는 덕택에 좋은 구경 많이 한 사례와 앞으로는 슬슬 여행이나 하면서
지낼 생각이라는 사의를 동시에 표현했다.
"회장님으로 모실 생각이었습니다만 …."
젊은 사장이 말끝을 흐렸다. 자네 호의는 받은 셈 치겠네,
하면서 남궁 씨는 약보따리를 끌렀다.
자초지종을 간략하게 설명하고나서,
"하필 가짜라고 소문난 물건을 가져와서 안됐네만
속내 아는 자네가 갈아줘야지 어쩌겠나?"
"가짜는요. 그건 사회주의 나라의 경제 체제를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이
하는 소리지요. 공장이 다 국영인데 어떻게 가짜를 만듭니까.
함량 기준이 우리하고 좀 다르다고 가짜라고 단정을 해 버리니,
국교를 목말라하면서 그런다는 건 암만 생각해도 경솔한 짓이에요."
이렇게 적극 청심환을 두둔하면서 그걸 몽땅 인수해주었다.
"고맙긴 하네만 그걸 다 어따 쓰려구?"
"두고두고 해외에 나갔다 올 적마다 선물로 쓰죠 뭐.
나갈 때마다 선물 챙기기도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내친 김에 하나 더 청을 하겠네. 꼭 들어줘야 하네.
안 들어주면 퇴직금 달라고 데모할지도 모르니 알아서 하게."
"설마 제가 퇴직금 안 드릴까 봐 이리 엄포를 놓으십니까?
말씀해 보세요."
남궁 씨는 녹용을 사달라는 부탁을 했고,
그는 가져와보라고 반승낙을 했다.
남궁 씨에겐 연변 아우에게 여기선 보통 부자가 어느 만큼 사나
보여주고 싶다는 허영심이 있었고,
젊은 사장에겐 골치 아픈 공로자를 몰인정하지 않게
제거하고 싶다는 아량이 있었다. 만사가 그들의 뜻대로 형통하여,
아우는 녹용을 통째로 삼백만 원에 팔고,
돈으로 처바른 육십 평짜리 아파트 속도 샅샅이 구경할 수가 있었다.
이제 그만큼 해줬으면 흡족한 마음으로 남은 약보따리를 걸머지고
돌아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시청 지하도로 쫓겨들어 간 거리의 약방을 따라
남궁 씨의 친척 네 식구도 좌판을 벌였다.
날은 하루하루 추워지고 있었다.
그들의 얇은 초가을옷과 아무리 도와줘도 채워지지 않는 그들의 욕심이
보기 싫어 모르는 척하려도 갈 데가 없어진 남궁 씨의 발길은
매일 그곳으로 출근을 하다시피 했다.
평화 시장에서 싸고 보기 좋은 두툼한 겨울옷을 사다가
그들의 어깨에 슬그머니 걸쳐주기도 하고,
유행 지난 옷을 아내와 며느리에게 구걸을 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눈에 쌍심지를 돋우고 그들의 궁상에
욕지거리를 퍼붓곤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친척들 곁에 우두커니 앉아서
흥정에 끼어들기도 하고 말동무도 하면서 소일을 했다.
자연히 점심이나 저녁을 같이 할 적도 많았다.
아우도 계수도 소주를 좋아했다. 화장품이랑 꽤 괜찮은 옷이랑
잔뜩 갖다 준 날이었다.
마누라가 아무리 좋은 걸 줘도 감지덕지할 줄 모르고
넓죽넓죽 받기만 하는 게 미안했던지
아우가 거나한 술김에 이렇게 말했다.
"성님도 자식 길러봤으니 부모 맘이 어드렇다는 걸 알죠.
북조선도 가 보고 여기도 와보니까 꼭 부모 맘을 닮아갑디다.
자식 중에 못사는 자식이 있으믄 그저 개져다 보태주고 싶구,
잘사는 자식한테는 조금이라도 덕을 보고 싶은 리기심(이기심)이
생기구. 성님이 리해하시라우요."
그러고 나서 그들이 북조선에 처가 친척을 만나러 갔을 때 얘기를 했다.
마누라는 준비해 가지고 간 것을 다 털어주고도 신고 간 신,
입고 간 옷까지 동생의 헌 것하고 바꿔 입고 왔다고 했다.
그럼 그들의 기죽을 줄 모르는 뻔뻔스러움은
부모 의식의 당당함이었단 말인가.
남궁 씨는 어처구니 없으면서도 그들이 싫어지거나 미워지지 않았다.
체류 기간을 연장하면서까지 그들은 가져온 걸 다 처분하고서야 떠났다.
아내는 앓던 이가 빠진 것보다 더 시원하다고 했다.
그러나 남궁 씨는 이제부터 혼자 뭘로 소일을 하나,
끈 떨어진 뒤웅박(의지할 데가 없어진 처지)처럼 막막했다.
그날 밤 자리에서였다.
아내가 조용히 눈물로 베개를 적시고 있다는 걸 알아 차렸다.
아내는 자주 그랬고 또 왜 그런다는 걸 남궁 씨는 알고 있었지만
근래에 그런 눈치를 보인 건 처음이었다.
아내가 그 버릇을 고친 게 아니라 그동안 연변 친척한테
정신이 빠져 아내의 설움에 너무 소홀했었나 보다.
그는 하던 버릇대로 아내를 돌아눕혀 조용히 안아주려고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와락 돌아누우며 그의 가슴을 마구 두들겼다.
격렬한 오열 사이사이로 아내가 울부짖었다.
"현이 자식 나쁜 자식. 망할 놈의 새끼야.
그 새낀 정말. 아아, 당신 말짝으로 그 새낀
망종(아주 몹쓸 종자란 뜻으로, 행실이 아주 못된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야. 고작 그게 사회주의라니?
그 거렁뱅이 근성이. 그 자식은 그게 뭐가 좋다고 신세를 망치고.
엉, 엉, 엉."
아내는 막무가내로 울부짖었다.
남궁 씨는 비로소 그동안 그들 부부가 사이에 끼고
엇갈린 게 연변 동포가 아니라 둘째 아들 현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연변 동포에 대한 미움도 호의도 실은 그들의 실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낯선 친척을 보는 시각의 차이는 현이로부터 비롯되고 있었다.
현이는 대학 일학년 때부터 운동권이었다.
아무리 타일러도 소용이 없었다.
남궁 씨는 자신의 소년 시절을 엉망으로 밟고 지나간 6·25의 기억으로
운동권은 다 좌익으로 보았고, 좌경의 소치라면 이를 갈았다.
집안 망칠 망종 취급을 했다.
아내는 그가 말끝마다 아들을 망종이라고 부르는 것을
제일 듣기 싫어했다.
이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을 테니 들어보고 이해해 주자고
아무리 애걸을 해도 남궁 씨한테는 먹혀들지 않았다.
아들 또한 아버지하고는 한자리에서 입을 어울리기도 싫어했다.
부자지간은 점점 원수처럼 돼 갔고,
현이는 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때려치우고
노동의 현장에 직접 뛰어들겠다며 아주 집을 나가 버렸다.
가끔 옷도 가지러 오고 전화로 안부도 묻고,
즈이 에미하곤 그런 대로 연락이 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남궁 씨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내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올 겨울엔 어떻게 된 게 옷도 안 가지러 오고 전화도 없구.
엉 엉 엉. 어디 가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엉 엉 엉."
어떻게 아내를 위로할 것인가.
남궁 씨는 첫 포옹처럼 가만가만 아내를 안았다.
그리고 가슴을 열고 서로의 상처를 조심스럽게 맞댔다.
나에게도 같은 상처가 있다오.
그걸 확인시켜주는 것밖에 위로의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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