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문학

비오는 날 - 손창섭 -

하얀모자 1 2024. 12. 3. 00:16

 

 

                             비오는 날 
                                                                - 손창섭 -

 이렇게 비 내리는 날이면 원구(元求)의 마음은 감당할 수 없도록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동욱(東旭)남매의 음산한 생활 풍경이
그의 뇌리를 영사막처럼 흘러가기 때문이었다.
빗소리를 들을 때마다 원구는 으례 동욱과 그의 여동생 동옥(東玉)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그들의 어두운 방에 쓰러져 가는 목조 건물이
비의 장막 저편에 우울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비록 맑은 날일지라도 동욱이 오누이의 생활을 생각하면,
원구의 귀에는 빗소리가 설레이고 그 마음 구석에는
빗물이 스며 흐르는 것 같았다.
원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동욱과 동옥은 그 모양으로 언제나
비에 젖어있는 인생들이었다.
 
동욱의 거처를 왕방하기 전에 원구는 어느날,
거리에서 동욱을 만나 저녁을 같이한 일이 있었다.
동욱은 밥보다도 먼저 술을 먹고 싶어했다.
술을 마시는 동욱의 태도는 제법 애주가(愛酒家)였다.
잔을 넘어 흘러내리는 한방울도 아까워서 동욱은 혀끝으로 잔굽을 핥았다.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했을 뿐 아니라 몇몇 교회에서
다년간 찬양대를 지도해 온 동욱의 과거를 원구는 생각하며,
요즈음은 교회에 나가지 않느냐고 물어 보았다.
동욱은 멋 적게 씽긋 웃고 나서 이따마큼 한 번 씩 나가노라고 하고,
그런 때는 견딜 수 없는 절망감에 숨이 막힐 것 같은 날이라는 것이었다.
 
동욱은 소매와 깃이 너슬너슬한 양복 저고리에,
교회에서 구제품으로 탄 것이라는 ,바둑판처럼 사방으로 검은 줄이 죽 간
회색 즈봉을 입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구두가 아주 명물이었다.
개미 허리처럼 중간이 잘룩한 데다가 코숭이만 주먹만큼 몽툭 솟아오른
검정 단화를 신고 있었다.
그건 꼭 채플린이나 신음직한 괴이한 구두였기 때문에,
잔을 주고 받으면서도 원구는 몇번이나 동욱의 발을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그 동안 무얼 하며 지냈느냐는 원구의 물음에,
동욱은 끼고 온 보자기를 끌고 스크랩북을 펴 보이는 것이었다.
몇 장 벌컥벌컥 뒤는 데 보니,
서양 여자랑 아이들의 초상화가 드문드문 붙어 있었다.
그 견본을 가지고 미군 부대를 찾아다니며 초상화의 주문을
맡는다는 것이었다.
 
대학에서 영문과를 전공한 것이 아주 헛일은 아니었다고 하며
동욱은 닝글닝글 웃었다. 동욱의 그 닝글닝글한 웃음을
원구는 이전부터 몹시 꺼렸다.
상대방을 조롱하는 것 같은 그러면서도 자조적(自嘲的)이요,
어쩐지 친애감조차 느껴지는 그 닝글닝글한 웃음은,
원구에게 어떤 운명적인 중압을 암시하여 감당할 수 없이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대체 그림은 누가 그러느냐니까, 지금 여동생 동옥이와 둘이 지내는데,
동옥은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하더니 초상화를 곧잘 그린다는 것이다.
동옥이란 원구의 귀에도 익은 이름이었다.
소학교 시절에 동욱이네 집에 놀러 가면 그 때 대여섯 살밖에 안되는
동옥이가 귀찮게 졸졸 따라다니던 기억이 새로웠다.
동옥은 그 당시 아이들 사이에 한창 유행되었던,
종종 때때중 바랑 메고 어디 가나를 부르고 다녔다.
 
그 사이 이십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보니 동옥의 모습은
전연 기억도 남지 않았다.
동옥의 말에 의하면 지난번 1.4후퇴 당시 데리고 왔는데,
요새 와서는 짐스러워 후회될 때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남편은 못 넘어왔느냐니까,
뭘 입때 처년데 했다.
지금 몇 살인데 미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원구는 혼기가 지난 동욱이나 자기 자신도 아직 독신인 걸 생각하고
여자도 그럴 수가 있을 거라고 속으로 주억거리며 그는 입을 다물었다.
동옥의 나이가 지금 이십 오륙세가 아닐까 하고
원구는 지나간 세월과 자기 나이에 비추어서
속어림으로 따져 보는 것이었다.
 
술에 취한 동욱은 다짜고 원구의 어깨를 한 손으로 투덕거리며,
동옥이년이 정말 가엾어, 암만 생각해도 그 총기며 인물이 아까워,
그런 말을 되풀이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잔을 비우고 나서,
할 수 있나 모두가 운명인 걸하고 고개를 흔드는 것이었다.
 
동욱은 머리를 떨어뜨린 채 내가 자네람 주저없이 동옥이와 결혼할 테야,
암 장담하구 말구, 혼잣말처럼 그렇게도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종잡을 수 없는 동욱의 그런 말에 원구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면서,
암 그럴 테지 하는 동욱의 손을 쥐어 흔드는 것이었다.
동욱은 음식집을 나와 헤어질 무렵에 두 손을 원구의 양 어깨에 얹고
자기는 꼭 목사가 되겠노라고 했다.
그것이 자기의 갈 길인 것 같다고 하며
이제 새학기에는 신학교에 들어가겠다는 것이었다.
어깨가 축 늘어져서 걸어가는 동욱의 초라한 뒷모양을 바라보고 서서
원구는 또다시 동욱의 과거와 그 집안을 그려 보며,
목사가 되겠노라면서도 술을 사랑하는 동욱을
아껴 줘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 뒤, 원구가 처음으로 동욱을 찾아간 것은
사십 일이나 계속된 긴 장마가 시작된 어느 날이었다.
동래(東萊) 종점에서 전차를 내리자,
동욱이가 쪽지에 그려 준 약도를 몇번이나 펴보며,
진득진득 걷기 힘든 비탈길을 원구는 조심히 걸어올라갔다.
비는 여전히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받기는 했으나 비가 후려치고 흙탕물이 튀고 해서
정강이 밑으로는 말이 아니었다. 동욱이가 들어 있는 집은
인가에서 뚝 떨어져 외따로이 서 있었다. 낡은 목조 건물이었다.
한 귀퉁이에 버티고 있는 두 개의 토안무 기둥이 모로 기울어지려는 집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다.
기와를 얹은 지붕에는 두 세군데 잡초가 반 길이나 무성해 있었다.
나중에 들어 알았지만 왜정 때는 무슨 요양원(療養院)으로
사용되어 온 건물이라는 것이었다.
전면(前面)은 본시 유리 창문이었는데 유리는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들이치는 비를 막기 위해서 오른편 창문 안에는
가마니 때기가 드리워 있었다.
 
이 폐가와 같은 집 앞에 우두커니 우산을 받고 선 채,
원구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집에도 대체 사람이 살고 있을까?
아이들 만화책에 나오는 도깨비 집이 연상됐다.
금시 대가리에 뿔이 돋은 도깨비들이
방망이를 들고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이런 집에 동욱과 동옥이가 살고 있다니
원구는 다시 한번 쪽지에 그린 약도를 펴 보았다.
이 집임에 틀림이 없었다.
개천을 끼고 올라오다가 그 개천을 건너선 왼쪽 산비탈에는
도대체 집이라고는 이 집 한 채뿐이었다.
 
원구는 몇 걸음 다가서며 말씀 좀 묻겠습니다 하고 인기척을 냈다.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원구는 같은 말을 또 한 번 되풀이했다.
그래도 잠잠하다. 차차 거세가는 빗소리와 도랑물 소리뿐,
황폐한 건물 자체가 그대로 죽음처럼 고요했다.
원구는 좀더 큰소리로 안녕하십니까? 하고 불러보았다.
원구는 제 소리에 깜짝 놀랐다.
목에 엉켰던 가래가 풀리며 탁 터져 나오는 음성이
예상 외로 컸던 탓인지,
그것은 마치 무슨 비명처럼 들리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문 안에 친 거적 귀퉁이가 들썩하며,
백지에 먹으로 그린 초상화같은 여인의 얼굴이 나타난 것이다.
살결이 유달리 희고 눈썹이 남보다 검은 그 여인은 원구를 내다보며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저게 동옥인가 보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여기가 김동욱 군의 집이냐는 원구의 물음에 여인은
말없이 약간 고개를 끄덕여 보였을 뿐이다.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는 그 태도는 거만해 보이는 것이었다.
동욱 군 어디 나갔습니까? 하고, 재차 묻는 말에도
여인은 먼저처럼 고개만 끄덕했다.
그리고 나서 원구를 노려보는 듯하는 그 눈에는
까닭모를 모멸과 일종의 반항적 태도까지 서리어 있는 것이었다.
여인이 혹시 자기를 오해하고 있지 않나 싶어,
정원구라는 이름을 밝히고 나서 동욱과는 소학교에서 대학까지
동창이었다는 것과 특히 소학 시절에는 거의 날마다
자기가 동욱이네 집에 놀러가거나,
동욱이가 자기네 집에 놀러왔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그래도 여인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원구는 한층 더 부드러운 음성으로 혹시 동욱 군의 여동생이 아니십니까?
동옥이라구... 하고 물었다.
 
여인은 세번째 고개를 끄덕여 보인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그 얼굴에 조소를 품은 우울한 미소가
약간 어리는 것이었다.
동욱이 어디 갔느냐니까 그제야 모르겠는데요 하고 입을 열었다.
꽤 맑은 음성이었다. 그러면 언제 들어올지 모르겠군요 하니까,
이번에도 동옥은 머리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무례한 동옥의 태도에, 불쾌와 후회를 느끼면서
원구는 발길을 돌이키는 수밖에 없었다.
동욱이가 돌아오거든 자기가 다녀갔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이르고
돌아서는 원구에게, 동옥은 아무런 인사도 하지 않았다.
 
물탕에 젖어 꿀쩍거리는 신발 속처럼 자기의 머리는
어쩔 수 없는 우울에 잠뿍 젖어 있는 것이라고 공상하며
원구는 호박 덩굴 우거진 철둑길을 걸어 나갔다.
그 무거운 머리를 지탱하기에는
자기의 목이 지나치게 가는 것같이 여겨졌다. 그것은 불안한 생각이었다.
얼마쯤 가다가 원구는 별생각이 없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안개비 속으로 보이는 창연한 건물은 금방 무서운 비명과 함께
모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자기가 발길을 돌리자 아마 쓰러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제나 저제나하고 집을 지켜보고 섰던 원구는
흠칫 놀라듯이 몸을 떨었다.
창문 안에 드리운 거적을 캔버스 삼아 그림처럼 선명히 떠올라 있는
흰 얼굴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옥의 얼굴임에 틀림없었다.
어쩌자고 동옥은 비뿌리는 창문에 붙어 서서 저렇게 짓궂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어려서 들은,
여우가 사람을 홀린다는 얘기가 연상되어 전신에 오한을 느끼며
발길을 돌이키는 원구의 눈앞에
찢어진 지우산을 받고 다가오는 사나이가 있었다.
다행이도 그것은 동욱이었다.
찬거리를 사러 잠깐 나갔다가 오느라는 동욱은,
푸성귀며 생선 토막이 들어 있는 저자구럭을 한 손에 들고 있었다.
이 먼델 비맞고 왔다가 그냥 돌아가는 법이 있느냐고 하며
동욱은 원구의 손을 잡아 끄는 것이었다.
말할 기력조차 잃은 사람처럼 원구는 묵묵히 뒤를 따라갔다.
좀 전의 동옥의 수수께끼 같은 태도는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무거운 그림자가 되어 원구의 머리를 뒤집어 씌우는 것이었다.
동욱에게 재촉을 받고 방 안에 들어서는 원구를 동옥은 반항적인 태도로
힐끔 쳐다보는 것이었다. 물론 일어서거나 옮겨 앉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비오는 날인데다가 창문까지 거적대기로 가리어서
방 안은 굴속같이 침침했다.
다다미 여덟장 깔리는 방 안에, 다다미 위에다 시멘트 종이로
장판 바르듯한 것이었다.
한편 천장에서는 쉴 사이 없이 빗물이 떨어졌다.
빗물 떨어지는 자리에 바께쓰가 놓여 있었다. 촐랑촐랑 쪼르륵 촐랑,
빗물은 이와 같은 연속적인 음향을 남기며
바께쓰 안에 가 떨어지는 것이었다.
무덤 속 같은 이 방 안의 어둠을 조금이라도 구해 주는 것은
그래도 빗물 소리 뿐이었다.
그러나 그 빗물 소리마저 바께쓰에 차츰 물이 늘어 갈수록
우울한 음향을 변해 가는 것이었다.
 
동욱은 별로 원구와 동옥을 인사시키거나 소개하려 하지 않았다.
동욱은 젖은 옷을 벗어서 걸고 런닝셔츠와 팬츠바람으로
식사 준비를 할 테니 잠깐만 앉아 있으라고 하고
부엌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부엌이라야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는 옆방이었다.
다다미는 걷어서 벽 한구석에 기대어 놓아 장판뿐인 실내에는
여기적 빗물이 오줌발처럼 쏟아졌다.
거기에는 취사 도구가 너저분하니 널려 있는 것이었다.
연기가 들어간다고 사잇문을 닫아버리고 나서,
동욱은 풍로에 불일 피우노라고 부채질을 하며 야단이었다.
열시가 조금 지난 회중 시계를 사잇문 틈으로 꺼내 보이며
도대체 조반이냐 점심이냐는 원구의 질문에,
동욱은 닝글닝글하며 자기들에게는 삼시의 구별이 없다고 했다.
언제든 배고프면 밥을 끓여 먹고 밥 생각이 없는 날은
종일이라도 굶고 지낸다는 것이었다.
 
동욱이가 부엌에서 혼자 바삐 돌아가는 동안 동옥은 역시 한 자리에 앉아
꼼짝도 한지 않았다. 동옥은 가끔 하품을 하며 외국에서 온
낡은 화보를 뒤적이고 있었다.
그러한 동옥이와 마주 앉아 자기는 도대체 무엇을 생각해야 하며
또한 어떠한 포즈를 지속해야 하는가?
원구는 이런 무의미한 대좌(對坐)를 감당할 수 없어
차라리 부엌에 나가 풍로에 부채질이나마 거들어 줄까도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만한 행동도 이 상태로는
일종의 비약(飛躍)이라 적지아니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는 동안 원구는 별안간 엉덩이가 척척해 들어옴을 의식하였다.
바께쓰의 빗물이 넘어서 옆에 앉아 있는 원구의 자리로
흘러내린 것이었다.
원구는 젖은 양복바지 엉덩이를 만지며 일어섰다.
그제서야 동옥도 바께쓰의 물이 넘는 줄을 안 모양이다.
그러나 동옥은 직접 일어나서 제 손으로 치려고 하지도 않았다.
앉은 채 부엌을 향하여, 오빠 물 넘어, 했을 뿐이다.
동욱은 사잇문을 반쯤 열고 들여다보며 이년아, 네가 좀 치우지 못해?
하고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러자 자기가 나서기에 절호한 기회라고 생각한 원구는
내가 내다버리지 하고 한 손으로 바께쓰를 들어올렸다.
그러나 한 걸음은 내가 내다버리지 하고 한 손으로 바께쓰를 들어올렸다.
그러나 한 걸음도 미처 옮겨놓을 사이도 없이
바께쓰는 철거렁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옆이 떨어지며
물이 좌르르 쏟아졌다.
손잡이의 한쪽 끝갈퀴가 구멍에서 벗겨진 것이었다.
 
순식간에 방바닥은 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여지껏 꼼짝도 않고 앉아 있던 동옥도 그제만은 냉큼 일어나
한걸음 비켜서는 것이었다. 그 순간 동옥의 동작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원구에게 또 하나 우울의 씨를 뿌려주는 것이었다.
원피스 밑으로 드러난 동옥의 왼쪽 다리가
어린애의 손목같이 가늘고 짧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다리를 옮겨 디디는 순간, 동옥의 전신은 한쪽으로 쓰러질 듯이
기울어지는 것이었다.
동옥은 다시 한번 그 가늘고 짧은 다리를 옮겨 놓는 일 없이,
젖지 않은 구석자리에 재빨리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하다 못해 파랗게 질린 얼굴에 독이 오른 눈초리로
원구를 잡아먹을듯이 노려보는 것이었다.
동옥의 시선을 피하여 탁류의 대하 가운데 떠 있는 것 같은 공포에
몸을 떨며, 원구는 마지막 기력을 다하여 허위적 거리듯
두 발로 물 괸 방을 허위적거려 보는 것이었다.
 
그 뒤로는 비가 와서 가게를 벌일 수 없는 날이면
원구는 자주 동욱이네 집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불구인 신체와 같이 불구적인 성격으로 대해 주는 동옥의 태도가
결코 대견할 리 없으면서도,
어느 얄궂은 힘에 조종당하듯이
원구는 또다시 찾아가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었다.
침침한 방 안에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듣고 싶어서일까?
동옥의 가늘고 짧은 한쪽 다리가 지니고 있는 슬픔에 중독된 탓일까?
이도 저도 아니면 찾아갈 적마다
차츰 정상적인데로 돌아오는 동옥의 태도에 색다른 태도에 색다른 매력을
발견한 탓일까?
 
정말 동옥이의 태도는 원구가 찾아가는 횟수에 따라
현저히 부드러워지는 것이었다. 두 번째 찾아갔을 때 동옥은 원구를 보자
얼굴을 붉히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세 번째 찾아갔을 때는 원구를 보자 동옥은 해죽이 웃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것은 우울한 미소였다.
찾아갈 때마다 달라지는 동옥의 태도가 원구에게는 꽤 반가운 것이었다.
인사 불성에 빠졌던 환자가 제 정신으로 돌아올 때처럼 고마웠다.
첫 번째 불렀을 때는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반응도 없던 환자가,
두 번째 부르자 눈을 간신히 떴고,
세 번째 불렀을 때는 제법 완전히 눈을 떠서 좌우를 둘러보다가
물 좀 하고 입을 열었을 경우와 같은 반가움을
원구는 동옥에게서 경험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갔을 때에는 지난번 빗물 쏟아지던 자리에
바께쓰가 놓여있지 않았다. 그 자리에는 제창 떼꾼히 구멍이 뚫려 있었다.
충분히 두어 개나 드나들 만한 그 구멍은 다다미에서부터
그 밑의 널판까지 뚫려 있었다.
천장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은 그 구멍을 통과해
널판 밑 흙바닥에 둔탁한 음향을 남기며 떨어졌다.
기실 비는 여러 군데서 새는 모양이었다.
널빤지로 된 천장에는 사방에서 빗물 듣는 소리가 났다.
천장에 떨어진 빗물은 약간 경사진 한쪽으로 오다가 소 눈깔만한
옹이 구멍으로 새어 흐르는 것이었다.
 
그 날만 해도 원구와 동욱이가 주고받는 말에, 비교적 냉담한 동옥이었다.
그러나 세 번째 갔을 때부터는 원구와 동욱이가 웃을 때는
함께 따라 웃어주는 것이었다. 간혹 한두 마디씩은 말추렴에도 들었다.
그 날은 일찌감치 저녁을 얻어먹고 돌아오려고 하는데
비가 하도 세차게 퍼부어서 자고 오는 수밖에는 없었다.
한 손에 우산을 들고 선 채 회색 장막을 드리운 듯,
비에 뿌애진 창밖을 내다보며 망설이고 있는 원구의 귀에
고집 피우지 말고 자고 가라는 동욱의 말에 뒤이어,
이런 비에는 앞도랑이 물에 불어서 못 건너십니다,
하는 동옥의 음성이 들린 것이다.
 
그날 밤 비로소 원구는 가벼운 기분으로
동옥에게 말을 걸 수가 있었던 것이다. 언제부터 그림 공부를 했느냐니까,
초상화 따위가 뭐 그림인가요,
하고 그 우울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이었다.
원구는 동옥의 상처를 건릴 만한 말은 일절 꺼내지 않아다.
어렸을 때 얘기가 나와서 어딜 가나 강아지 새끼처럼 쫓아 다니는
동옥이가 귀찮았다는 말을 하고 중중 때때중을
자랑스레 부르고 다녔다니까
동옥의 눈이 처음으로 티없이 빛나는 것이었다.
갑자기 동욱이가 중중 때때중 하고 부르기 시작하자
동옥도 가느다란 소리로 따라 부르는 것이었다.
노래 소리가 그치고 나니 방 안에는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비가 들이치는 바람에 바깥벽 판장 틈으로
스며드는 물은 실내의 벽 한구석까지 적시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동옥을 대하는 동욱의 태도였다.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이년 저년하고 욕을 퍼붓는 것이었다.
부엌에서 들여보내는 음식 그릇을 한 손으로 받는다고 해서,
이년아 한 손으로 그러다가 또 떨어뜨리고 싶으냐, 하고 눈을 흘겼고
남포에 불을 켜는데 불이 얼른 댕기지 않아
성냥알을 두 개비째 꺼내려니까 저년은 밥 처먹구 불두 하나 못 켜,
하고 노려보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동옥은 말없이 마주 눈을 흘겼다.
빨래와 바느질만은 동옥의 책임이지만
부엌일은 언제나 동욱이가 맡아 한다는 것이었다.
동옥이가 변소에 간 틈에,
될 수 있는 대로 위로해 주지 않고 왜 그리 사납게 구느냐니까,
병신 고운 데 없다고 그년 맘 쓰는게 모두가 틀렸다는 것이다.
우선 그림 값만 하더라도 얼마 전까지는 받아 오면
반씩 꼭 나눠 가졌는데 근자에 와서는 동욱을 신용할 수가 없다고
대소에 따라 한 장에 얼마씩 또박또박 선금을 받고야
그려 준다는 것이었다.
생활비도 둘이 꼭 같이 절반씩 부담한다는 것이다.
동옥은 자기가 병신이기 때문에 부모 말고는 자기를 거두어 오래 돌봐 줄
사람이 없으리라는 것이다. 오빠도 언제든 자기를 버릴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기 때문에 자기는 자기대로 약간이라도 밑천을 장만해 두어야
비참한 꼴을 면하지 않겠느냐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동옥의 심중을 생각할 때 헤어져 있으면 몹시 측은하기도 하지만,
이상하게 낯만 대하면 왜 그런지 안 그러리라 하면서도
동욱은 다자꾸 화가 치민다는 것이다.

동옥은 불을 끄고는 외로워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다.
반대로 동욱은 불을 꺼야만 안심하고 잠을 들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동욱은 어둠만이 유일한 휴식이노라 했다.
낮에는 아무리 가만하고 앉았거나 누워 뒹굴어도 걸레처럼
전신에 배어 있는 피로가 가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동욱은 심지를 낮추어서 희미하게 켜놓은 불빛에도 화를 내어
이년아, 아주 꺼 버리지 못해 하고 소리를 질렀다.
동옥은 손을 내밀어 심지를 조금 더 낮추었다.
그리고 나서 누가 데려 오랬나,
차라리 어머니하고 거기 있을 걸 괜히 왔지
하고 쫑알대는 것이었다.
그러자 동욱은 벌떡 일어나며 이년 다시 한번 그 주둥일 놀려 봐라,
나두 너 같은 년 끌구 오구 싶지 않았다, 어머니가 하두 애원하시듯
다 버리구 가더라두 네년만은 데리구 가라구 하 조르기에
끌구와 이 꼴이다. 하고 골을 내는 것이었다.
 
동옥은 말없이 저편으로 돌아누웠다.
어렴풋이 불빛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둠이 가슴을 내리누르는 것 같아서
원구는 오랫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동욱도 잠이 안 오는 모양이었다.
동옥 역시 필경 잠이 들지않았으련만 죽은 듯이 가만하고 있었다.
후두둑 후두둑 유리 없는 창문으로 들이치는 빗소리를 들으며,
사십 주야를 비가 퍼부어서 산꼭대기에다 배를 붂어 둔
노아네 가족만이 남고 이 세상이 전멸을 해 버렸다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대홍수를 원구는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어렴풋이 잠이 들려고 하는 때였다.
커다란 적선으로 생각하고 동옥과 결혼할 용기는 없는가 하는
동욱의 음성이 잠꼬대같이 원구의 귀를 스쳤다.
원구는 눈을 떴다.
노려보듯이 천장을 바라보며 그는 반듯이 누워 있었다.
동욱의 입에서 다시 무슨 말이 흘러 나올지도 모른다는 긴장을 느끼면서.
그러나 동욱은 아무 말이 없었다.
빗물 떨어지는 소리만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을 뿐이었다.
 
원구가 또다시 간신히 잠이 들락 할 때였다.
발치 쪽에서 빠드득 하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원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귀를 재웠다.
뱀에게 먹히는 개구리 소리 비슷한 그 소리는
뒷벽 쪽에서 들리는 것이었다.
원구는 이번에는 상반신을 일으키고 않아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동욱이도 눈을 떴다.
 
저게 무슨 소리냐고 한 즉, 뒷방의 계집애가 자면서
이 가는 소리라는 것이다.
이 뒷방에도 사람이 사느냐니까 육순이 넘은 노파가
열두 살 먹은 손녀를 데리고 산다고 했다.
그 노파가 바로 이 집 주인인데 전차 종점 나가는 길목에
하꼬방 가게를 내고 담배, 성냥, 과일, 사탕같은 것들을 팔아서
근근히 생활해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뒷집 소녀는 잠만 들면 반드시 이를 간다는 것이었다.
동욱도 처음 며칠 밤은 그 소리에 골치를 앓았지만 요즘은 습관이 되어
괜찮노라고 했다.
이러한 방에서 빗물 떨어지는 소리와 이 가는 소리를 듣고 지나면
아무라도 신경 과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원구는 좀전에 동욱이가 잠꼬대 한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이었다.
 
사오 일 지나서였다.
오래간만에 비가 그치고 제법 날이 훤해져서 잡화를 가득 벌여 놓은
리어카를 지키고 섰노라니까,
다 저녁때 원구의 어깨를 툭 치는 사람이 있었다. 동욱이었다.
그는 역시 소매와 깃이 다 처진 저고리와 검은 줄이 간 회색 즈봉을 입고
있었다. 옷이라고는 그것밖에 없는 모양이라
비에 젖은 것을 그냥 짜서 말리곤 해서 여기저기 구김살이 있었다.
그보다도 괴이한 채플린 식의 검정 단화의 주먹같은 코숭이가
말이 아니었다. 장화 대용으로 진창을 막 밟고 다녀서 온통 흙투성이였다.
그러한 동욱의 꼴에 원구는 이상하게 정이 갔다.
 
리어카를 주인 집에 가져다 맡기고 와서 저녁을 같이하자고
원구는 동욱의 손을 끌었다.
동욱은 밥보다도 술 생각이 더 간절하다고 했다.
두 가지다 먹을 수 있는 집으로 원구는 동욱을 안내했다.
술이 몇 잔 들어가 얼근해지자 동욱은 초상화 ?주문도리?를 폐업했노라고
했다. 요즘은 양키들도 아주 약아져서
까딱하면 돈을 잘리거나 농락당하기가 일쑤라는 것이다.
거기에다 패스없는 사람의 출입을 각 부대가 엄중히 단속하기 때문에
전처럼 드나들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며칠 전에는 돈 받으러 몰래 들어갔다가 순찰 장교에게 걸려서
하룻밤 몽키 하우스의 신세를 지고 나왔다는 것이다.
 
더구나 요즘은 국민병 수첩까지 분실했으므로
마음놓고 거리에 나와 다닐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분실계를 내고 재교부 신청을 하라니까,
그 때문에 동회로 파출소로 사오 차나 쫓아다녀 봤지만,
까다롭게만 굴고 잘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까짓거 나중에는 산수 갑산엘 갈 망정 내버려 둘 테라고 했다.
그래 차라리 군에라도 들어가 버릴까 싶어, 마침 통역 장교를 모집하기에
그 원서를 타러 나왔던 길이노라고 했다.
어디 원서를 좀 구경하자니까 동욱은 능글능글 웃으며
수속이 하두 복잡하고 번거로워서 아예 단념 하구 말았다는 것이다.
 
동욱은 한동안 말이 없이 술잔을 빨고 앉았다가,
가끔 찾아와서 동옥을 좀 위로해 주라는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조소하고 멸시한다고만 생각하고 있는 동옥은,
맑은 날일지라도 일절 바깥 출입을 않고 두더지처럼
방에만 처박혀 산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반감을 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동옥도 원구만은 자기를 업신여기지 않고 자연스레 대하여 준다고
해서 자주 찾아와 주기를 여간 기다리지 않는다고 했다.
 
초상화가 팔리지 않게 된 다음부터는 동옥은 초조와 불안 속에서
한층 더 자신의 고독을 주체하지 못해 쩔쩔맨다는 것이었다.
동욱은 그러한 동옥이가 측은해 못 견디겠노라고 했다.
언젠가처럼,
내가 자네랑 동옥이와 결혼할 테야,
암 하구말구 하고 동욱은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이었다.
술집을 나와 동욱은 이번에도 원구의 손을 꼭 쥐고
자기는 기어코 목사가 되겠노라고 했다.
동옥을 위해서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나 그것만이 이 무거운 짐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 뒤에 한번은 딴 볼일로 동래까지 갔던 길에
동욱이네 집에 잠깐 들른 일이 있었다.
역시 그 날도 장마는 구질구질 계속되고 있었다.
우산을 접으며 마루에 올라서도 동욱만이 머리를 내밀고 맞아줄 뿐
동옥의 기척이 없었다.
방에 들어가 보니 동옥은 담요로 머리까지 푹 뒤집어 쓰고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었다.
이틀째나 저러고 자빠져 있다고 하며 동욱은 그 까닭을 설명했다.
동옥은 뒷방에 살고 있는 주인 노파에게 동욱이도 모르게
이만 환이나 빚을 주고 있었는데,
노파는 이 집까지도 팔아먹고 귀신같이 도주해 버렸다는 것이다.
어제 아침에 집을 산 사람이 갑자기 이사를 왔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았는데, 이게 또한 어지간히 감때 사나운 자여서
당장 방을 비워 내라고 위협하듯 한다는 것이다.
말을 마치고 난 동욱은 요 맹꽁이 같은 년아,
글쎄 이게 집이라구 믿고 돈을 줘 하고
발길로 동옥의 옆구리를 거더 찼다.
이년아, 이만 환이면 구화로 얼만 줄 아니, 이백만 환이야.
내 돈을 내가 떼였는데 오빠가 무슨 상관이냐구,
그래, 내가 없으면 네년이 굶어 죽지 않구 살 테냐?
너 같은 병신이 단 한 달을 독력으로 살아?
동욱은 다시 생각 해도 악이 받치는 모양이었다.
  
원구를 위해 동욱은 초밥을 만든다고 분주히 부엌으로 들락날락 했으나
원구는 초밥을 얻어먹자고 그러고 앉아 견딜 수는 없었다.
그보다도 동옥이 이틀 동안이나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저러고 누워 있다고 하니,
혹시 동욱이가 잠든 틈에라도 몰래 일어나 수면제 같은 것을 먹고
죽어 있지나 않는가 싶어 불안한 생각이 솟았다.
원구는 조금이라도 더 앉아 견디기가 답답해서 자리를 일어서며
아무래도 방을 비워 주어야 하겠거든
자기도 어디 구해 보겠노라고 하니까,
동옥이가 인가(人家) 많은 데를 싫어하기 때문에
이 근처에다 외딴 집을 구하는 수밖에 없다는 동욱의 대답이었다.
 
그 뒤로는 원구도 생활에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한 달 가까이나 장마로 놀고 보니 자연 시원치 않은 장사 밑천을
그럭저럭 축내게 된 것이다.
원구가 얻어 있는 방도 지리한 비에 습기로 눅눅해졌다.
벗어놓은 옷가지며 이부자리에까지도 곰팡이가 끼었다.
그의 마음 속에까지 곰팡이가 스는 것 같았다.
이런 날, 이런 음산한 방에 처박혀 있자니,
동욱과 동옥의 일이 자연 무겁고 우울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점심때가 되어서 원구는 퍼붓는 비를 무릎쓰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동욱이와 마주 앉아 곰팡이 슨 속을 씻어 내리며,
동옥이도 위로해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원구는 술과 통조림을 사들고 찾아갔다.
 
낡은 목조 건물은 전과 마찬가지로 금방 스러질 듯 빗속에 서 있었다.
유리 없는 창문에는 거적도 그대로 드리워 있었다.
그러나, 동욱이, 하고 원구가 불렀을 때
곰처럼 마루로 기어나오는 사나이는 동욱이가 아니었다.
이집에 살던 젊은 남녀는 어디 갔느냐는 원구의 물음에,
우락부락하게는 생겼으되 맺힌 데가 없이 어딘가 허술해 보이는
사십 전후의 그 사나이는,
아하 당신이 정(丁)뭐라는 사람이냐고 하고
대답 대신 혼자 머리를 끄덕끄덕하는 것이었다.
원구가 재차 묻는 말에 사나이는 자기가 이 집 주인이노라 하고 나서,
동욱은 외출한 채 소식 없이 돌아오지 않게 되었고,
그 뒤 동옥 역시 어디로 가 버렸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동욱이가 안 돌아오는 지는 열흘이나 되었고
동옥은 바로 이삼 일 전에 나갔다는 것이다.
 
원구는 더 무슨 말이 없이 서 있었다.
한 손에 보자기 꾸러미를 들고 한 손으로는 우산을 받고 선 채,
원구는 사나이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었다.
원구는 그대로 발길을 돌려 몇 걸음 걸어가다가 되돌아와
보자기에 싼 물건을 끌러
주인 사나이에게 주었다. 이거 원, 이거 원, 하며
주인 사나이는 대뜸 입이 헤벌어졌다.
그리고는 자기 여편네와 아이들이 장사 나갔기 때문에
점심 한 그릇 대접할 수는 없으나 좀 올라와 담배라도 피우고 가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무슨 재미로 쉬어가겠느냐고 하며, 원구가 돌아서려니까,
주인은 잠깐만 하고 불러 세우고 나서, 대단히 죄송하게 되었노라고 하며
사실은 동옥이가 정(丁)누구라고 하는 분이 찾아오면 전해 달라고
편지를 맡기고 갔는데,
그만 간수를 잘못해서 아이들이 찢어 없앴다는 것이다.
그래도 아무 말 않고 멍청히 서 있는 원구를
주인 사나이는 무안한 눈길로 바라보며,
동욱은 아마 십중팔구 군대에 끌려 나갔을거라고 하고,
동옥은 아이들처럼 어머니를 부르며 가끔 밤중에 울기에,
뭐라고 좀 나무랐더니,
그 다음날 저녁에 어디론가 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죽지나 않았을까, 자살을 하든 굶어 죽든......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돌아서는 원구의 등에다 대고,
중요한 옷가지랑은 꾸려 갖고 간 모양이니 자살을 할 의사는 없었음이
분명하고, 한편 병신이긴 하지만 얼굴이 고만큼 밴밴하고서야
어디 가 몸을 판들 굶어 죽기야 하겠느냐는 말에,
이상하게 원구는 정신이 펄쩍 들어 이놈 네가 동옥을 팔아먹었구나 하고
대들듯한 격분을 마음 속 한구석에 의식하면서도,
천근의 무게로 내리누르는듯한 육체의 중량을 감당할 수 없어
그는 말없이 발길을 돌이키었다.
 
이놈 네가 동옥을 팔아먹었구나 하는 흥분한 소리가
까마득히 먼 곳에서 자기를 향하고 날아오는 것 같은 착각에
오한을 느끼며,
원구는 호박 덩굴 우거진 밭두둑 길을 앓고 난 사람모양
휘청거리는 다리로 걸어나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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