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문학

혈의누(血─淚, 상) - 이인직 -

하얀모자 1 2023. 3. 30.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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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혈의누(血─淚, 상)
                                                                                - 이인직 -
  
일청전쟁(日淸戰爭)의 총소리는 평양 일경이 떠나가는 듯하더니,
그 총소리가 그치매 사람의 자취는 끊어지고
산과 들에 비린 티끌뿐이라.
 
평양성의 모란봉에 떨어지는 저녁볕은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저 햇빛을 붙들어 매고 싶은 마음에 붙들어 매지는 못하고, 숨이 턱에
닿은 듯이 갈팡질팡하는 한 부인이 나이 삼십이 될락 말락하고,
얼굴은 분을 따고 넣은 듯이 흰 얼굴이나 인정 없이 뜨겁게 

내리쪼이는 가을볕에 얼굴이 익어서 선앵둣빛이 되고,
걸음걸이는 허둥지둥하는데 옷은 흘러내려서 젖가슴이 다 드러나고,
치맛자락은 땅에 질질 끌려서 걸음을 걷는 대로 치마가 밟히니,
그 부인은 아무리 급한 걸음걸이를 하더라도
멀리 가지도 못하고 허둥거리기만 한다.
 
남이 그 모양을 볼 지경이면 저렇게 어여쁜 젊은 여편네가,
술 먹고 한길에 나와서 주정한다 할 터이나,
그 부인은 술 먹었다 하는 말은 고사하고 미쳤다,
지랄한다 하더라도 그따위 소리는 귀에 들리지 아니할 만하더라.
 
무슨 소회가 그리 대단한지 그 부인더러 물을 지경이면
대답할 여가도 없이 옥련이를 부르면서 돌아다니더라.
 
"옥련아, 옥련아 옥련아 옥련아, 죽었느냐 살았느냐.
 죽었거든 죽은 얼굴이라도 한번 다시 만나 보자. 옥련아 옥련아,
 살았거든 어미 애를 그만 쓰이고 어서 바삐 내 눈에 보이게 하여라.
 옥련아, 총에 맞아 죽었느냐, 창에 찔려 죽었느냐,
 사람에게 밟혀 죽었느냐. 어리고 고운 살에 가시가 박힌 것을 보아도
 어미 된 이 내 마음에 내 살이 지겹게 아프던 내 마음이라.
 오늘 아침에 집에서 떠나올 때에 옥련이가 내 앞에 서서
 아장아장 걸어 다니면서,
 어머니 어서 갑시다 하던 옥련이가 어디로 갔느냐."
 
하면서 옥련이를 찾으려고 골몰한 정신에,
옥련이보다 열 갑절 스무 갑절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잃고도
모르고, 옥련이만 부르며 다니다가 목이 쉬고 기운이 탈진하여
산비탈 잔디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가, 혼자말로 옥련 아버지는
옥련이 찾으려고 저 건너 산 밑으로 가더니 어디까지 갔누 하며
옥련이를 찾던 마음이 홀지에 변하여 옥련 아버지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사람은 아니 오고, 인간 사정은 조금도 모르는 석양은
제 빛 다 가지고 저 갈 데로 가니, 산빛은 점점 먹장을 갈아붓는 듯이
검어지고 대동강 물소리는 그윽한데, 전쟁에 죽은 더운 송장
새 귀신들이 어두운 빛을 타서 낱낱이 일어나는 듯
내 앞에 모여드는 듯하니, 규중에서 생장한 부인의 마음이라,
무서운 마음에 간이 녹는 듯하여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앉았는데,
홀연히 언덕 밑에서 사람의 소리가 들리거늘,
그 부인이 가만히 들은즉 길 잃고 사람 잃고 애쓰는 소리라.
 
"에그, 깜깜하여라. 이리 가도 길이 없고 저리 가도 길이 없으니
 어디로 가면 길을 찾을까. 나는 사나이라 다리 힘도 좋고 겁도 없는
 사람이언마는, 이러한 산비탈에서 이 밤을 새고 사람을 찾아다니려
 하면 이 고생이 이렇게 대단하거든, 겁도 많고 다녀 보지 못하던
 여편네가 이 밤에 나를 찾아다니느라고 오죽 고생이 될까."
 
하는 소리를 듣고 부인의 마음에,
난리중에 피란 가다가 부부가 서로 잃고 서로 종적을 모르니
살아 생이별을 한 듯하더니,
하늘이 도와서 다시 만나 본다 하여 반가운 마음에 소리를 질렀더라.
 
"여보, 나 여기 있소. 날 찾아다니느라고 얼마나 애를 쓰셨소."
 
하면서 급한 걸음으로 언덕 밑으로 향하여 내려가다가
비탈에 넘어져 구르니, 언덕 밑에서 올라오던 남자가 달려들어서
그 부인을 붙들어 일으키니, 그 부인이 정신을 차려 본즉
북두갈고리 같은 농군의 험한 손이 내 손에 닿으니
별안간에 선뜩한 마음에 소름이 끼치면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겁결에 목소리가 나오지 못한다.
 
그 남자도 또한 난리중에 제 계집 찾아다니는 사람인데,
그 계집인즉 피란갈 때에 팔승 무명을 강풀 한 됫박이나 먹였던지
장작같이 풀 센 치마를 입고 나간 터이요, 또 그 계집은 호미자루,
절굿공이, 다듬잇방망이, 그러한 셋궂은 일로 자라난 농군의 계집이라, 

그 남자가 언덕에서 소리하고 내려오는 계집이 제 계집으로 알고
붙들었는데, 그 언덕에서 부르던 부인의 손은 명주같이 부드럽고
옷은 십이승 아랫질 세모시 치마가 이슬에 눅었는데,
그 농군은 제 평생에 그 옷 입은 그런 손길을 만져 보기는 고사하고
쳐다보지도 못하던 위인이러라.
 
부인은 자기 남편이 아닌 줄 깨닫고 사나이도 제 계집 아닌 줄
알았더라. 부인은 겁이 나서 간이 서늘하고 남자는 선녀를 만난 듯하여

 흥김, 겁김에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숨소리는 크고
목소리는 아니 나온다. 그 부인의 마음에 아까는 호랑이도 무섭고
귀신도 무섭더니, 지금은 호랑이나 와서 나를 잡아먹든지
귀신이나 와서 저놈을 잡아가든지 그런 뜻밖의 일을 기다리나,
호랑이도 아니 오고 귀신도 아니 오고, 눈에 보이는 것은
말 못 하는 하늘의 별뿐이요, 이 산중에는 죄 없고 힘없는
이 내 몸과 저 몹쓸 놈과 단 두 사람뿐이라.
 
사람이 겁이 나다가 오래 되면 악이 나는 법이라.
겁이 날 때는 숨도 크게 못 쉬다가 악이 나면 반벙어리 같은 사람도
말이 물 퍼붓듯 나오는 일도 있는지라.
 
"여보, 웬 사람이오. 여보, 대답 좀 하오.
 여보 남을 붙들고 떨기는 왜 그리 떠오. 여보, 벙어리요 도둑놈이오?
 도둑놈이거든 내 몸의 옷이나 벗어 줄 터이니 다 가져가오."
 
그 남자가 못생긴 마음에 어기뚱한 생각이 나서 말 한마디 엄두가
아니 나던 위인이 불 같은 욕심에 말문이 함부로 열렸더라.

"여보, 웬 여편네가 이 밤중에 여기 와서 있소?
 아마 시집살이 마다고 도망하는 여편네지. 도망군이라도 붙들어다가
 데리고 살면 계집 없느니보다 날 터이니 데리고 갈 일이로구.
 데리고 가기는 나중 일이어니와…… 내가 어젯밤 꿈에
 이 산중에서 장가를 들었더니 꿈도 신통히 맞힌다."
 
하면서 무지막지한 놈의 행위라 불측한 소리가 점점 심하니,
그 부인이 죽어서 이 욕을 아니 보리라 하는 마음뿐이나,
어느 틈에 죽을 겨를도 없는지라.
 
사람이 생목숨을 버리는 것은 사람이 제일 설워하는 일인데,
죽으려 하여도 죽지도 못하는 그 부인 생각은,
어떻다 형용할 수 없는 터이라.
 
빌어 보면 좋을까 생각하여 이리 빌고 저리 빌고 각색으로 빌어 보니
그놈의 귀에 비는 소리가 쓸데없고 하릴없을 지경이라.
언덕 위에서 웬 사람이 소리를 지르는데 무슨 소린지는 모르나
부인은 그 소리를 듣고 죽었던 부모가 살아온 듯이 기쁜 마음에
마주 소리를 질렀더라.
 
"사람 좀 살려 주오……"
 
하는 소리가, 아무리 부인의 목소리라도 죽을힘을 다 들여서 지르는
밤 소리라 산골이 울리니 언덕 위의 사람이 또 소리를 지른다.
언덕 위와 언덕 밑이 두 간 길이쯤 되나 지척을 불변하는 칠야에
서로 모양도 못 보고 또 서로 말도 못 알아듣는 터이라,
언덕 위의 사람이 총 한 방을 놓으니 밤중의 총소리라,
산이 울리면서 사람이 모여드는데 일본 보초병들이러라.
누구는 겁이 많고 누구는 겁이 없다 하는 말도 알 수 없는 말이라.
세상에 죄 있는 사람같이 겁 많은 사람은 없고,
죄 없는 사람같이 다기있는 것은 없다. 부인은 총소리에도 겁이 없고
도리어 욕을 면한 것만 천행으로 여기는데,
그 남자는 제가 불측한 마음으로 불측한 일을 바라던 차이라,
총소리를 듣고 저를 죽이러 온 사람으로 알고 달아난다.
밝은 날 같으면 달아날 생각도 못하였을 터이나, 깜깜한 밤이라 

옆으로 비켜서기만 하여도 알 수 없는고로 종적 없이 달아났더라.
보초병이 부인을 잡아서 앞세우고 가는데 서로 말은 못 하고
벙어리가 소를 몰고 가듯 한다.
 
계엄중(戒嚴中) 총소리라 평양성 근처에 있던 헌병이 모여들어서
총 놓은 군사와 부인을 데리고 헌병부로 향하여 가니,
그 부인은 어딘지 모르고 가나 성도 보이고 문도 보이는데,
정신을 차려 본즉 평양성 북문이라.
 
밤은 깊어 사람의 자취도 없고 사면에서 닭은 홰를 치며 울고
개는 여염집 평대문 개구멍으로 주둥이만 내어놓고 짖는다.
닭소리 개소리에 부인의 발이 땅에 떨어지지 못하여 걸음을 멈추고
섰는데, 오장이 녹는 듯하고 눈물이 앞을 가린다.
개는 명물이라 밤사람을 알아보고 반가와 뛰어나오다가
헌병이 칼을 빼어 개를 차려 하니 개가 쫓겨 들어가며 짖으나
사람도 말을 통치 못하거든 더구나 짐승이야…….
 
"개야, 너 혼자 집을 지키고 있구나. 우리가 피란 갈 때에

너를 부엌에 가두고 나왔더니 어디로 나왔느냐.

너와 같이 집에 있었더면 이러한 일이 생기지 아니하였을 것을

 살 곳 찾아가느라고 죽을 길 고생길로 들어갔다.
나는 살아와서 너를 다시 본다마는 서방님도 아니 계시다,
너를 귀애하던 옥련이도 없다, 내가 너와같이 다리 힘이 좋으면
방방곡곡이 찾아다닐 터이나, 다리 힘도 없고 세상에 만만하고
불쌍한 것은 여편네라 겁나는 것 많아서 못 다니겠다.
닭도 주인 없는 집에서 혼자 울고, 개도 주인 없는 집에서 혼자
짖는구나. 개야, 이리 나오거라. 나는 어디로 잡혀가는지
내 발로 걸어가나 내 마음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헌병이 소리를 질러가기를 재촉하니
부인이 하릴없이 헌병부로 잡혀가는데 개는 멍멍 짖으며 따라오니
그 개 짖고 나오던 집은 부인의 집이러라.
 
그날은 평양성에서 싸움 결말나던 날이요,
성중의 사람이 진저리내던 청인이 그림자도 없이 다 쫓겨나가던
날이요, 철환은 공중에서 우박 쏟아지듯 하고 총소리는 평양성 근처가
다 두려빠지고 사람 하나도 아니 남을 듯하던 날이요,
평양 사람이 일병 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일병은 어떠한지,
임진 난리에 평양 싸움 이야기하며 별 공론이 다 나고 별 염려 다하던
그 일병이 장마통에 검은 구름 떠들어오듯
성내 성외에 빈틈없이 들어와 박히던 날이라.
 
본래 평양성중 사는 사람들이 청인의 작폐에 견디지 못하여
산골로 피란 간 사람이 많더니, 산중에서는 청인 군사를 만나면
호랑이 본 것 같고 원수 만난 것 같다.
어찌하여 그렇게 감정이 사나우냐 할 지경이면, 청인의 군사가
산에 가서 젊은 부녀를 보면 겁탈하고, 돈이 있으면 빼앗아가고,
제게 쓸데없는 물건이라도 놀부의 심사같이 장난하니,
산에 피란 간 사람은 난리를 한층 더 겪는다. 그러므로
산에 피란 갔던 사람이 평양성으로 도로 피란 온 사람도 많이 있었더라.
 
그 부인은 평양성 북문 안에 사는데, 며칠 전에 산에 피란도 갔다가
산에도 있을 수 없고, 촌에 사는 일가집으로 피란 갔다가
단간방에서 주인과 손과 여덟 식구가 이틀 밤을 앉아 새우고 하릴없어
평양성 내로 도로 온 지가 불과 수일 전이라.
그때 마음에 다시는 죽어도 피란가지 아니한다 하였더니,
오늘 새벽부터 총소리는 천지를 뒤집어 놓고,
사면 산꼭대기들 가운데에 불비가 쏟아지니 밝기를 기다려서 

피란길을 떠났는데,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젊은 내외와 어린 딸 옥련이와 단 세 식구 피란이라.
 
성중에는 울음 천지요, 성 밖에는 송장 천지요, 산에는 피란군 천지라. 

어미가 자식 부르는 소리, 서방이 계집 부르는 소리,
계집이 서방 부르는 소리, 이렇게 사람 찾는 소리뿐이라.
어린아이를 내버리고 저 혼자 달아나는 사람도 있고,
두 내외 손을 맞붙들고 마주 찾는 사람도 있더니, 석양판에는
그 사람이 다 어디로 가고 없던지 보이지 아니하고,
모란봉 아래서 옥련이 부르고 다니는 부인 하나만 남아 있더라.
 
그 부인의 남편 되는 사람은 나이 스물아홉 살인데,
평양서 돈 잘 쓰기로 이름 있던 김관일이라. 피란길 인해 중에
서로 잃고 서로 찾다가, 김관일은 저의 집으로 혼자 돌아와서
그날 밤에 빈집에 혼자 있다가, 밤중에 개가 하도 몹시 짖거늘
일어나서 대문을 열고 보려 하다가 겁이 나서 열지는 못하고
문틈으로 내다보기도 하였으나 벌써 헌병이 그 부인을 앞세우고 가니,
김관일은 그 부인이 헌병에게 붙들려 가는 줄은 생각 밖이요,
그 부인은 그 남편이 집에 있기는 또한 꿈도 아니 꾸었더라.
 
김씨는 혼자 빈집에 있어서 밤새도록 잠들지 못하고 별생각이 다 난다.

 북문 밖 넓은 들에 철환 맞아 죽은 송장과 죽으려고 숨넘어가는
반송장들은, 제각각 제 나라를 위하여 전장에 나와서 죽은 장수와
군사들이라. 죽어도 제 직분이어니와, 엎드러지고 곱들어져서

봄바람에 떨어진 꽃과 같이, 간 곳마다 발에 밟히고 눈에 걸리는

피란군들은 나라의 운수련가. 제 팔자 기박하여 평양 백성 되었던가.
땅도 조선 땅이요 사람도 조선 사람이라.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남의 나라 싸움에
이렇게 참혹한 일을 당하는가. 우리 마누라는 대문 밖에
한걸음 나가 보지 못한 사람이요, 내 딸은 일곱 살 된 어린아이라
어디서 밟혀 죽었는가. 슬프다, 저러한 송장들은 피가 시내 되어
대동강에 흘러들어 여울목 치는 소리 무심히 듣지 말지어다.
평양 백성의 원통하고 설운 소리가 아닌가.
무죄히 죄를 받는 것도 우리나라 사람이요 무죄히 목숨을
지키지 못하는 것도 우리나라 사람이라.
이것은 하늘이 지으신 일이런가, 사람이 지은 일이런가.
아마도 사람의 일은 사람이 짓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제 몸만 위하고 제 욕심만 채우려 하고,
남은 죽든지 살든지, 나라가 망하든지 흥하든지 제 벼슬만 잘하여
제 살만 찌우면 제일로 아는 사람들이라.
 
평안도 백성은 염라대왕이 둘이라.
하나는 황천에 있고 하나는 평양 선화당에 앉았는 감사이라.
황천에 있는 염라대왕은 나이 많고 병들어서 세상이 귀치 않게 된
사람을 잡아가거니와, 평양 선화당에 있는 감사는
몸 성하고 재물 있는 사람은 낱낱이 잡아가니, 인간 염라대왕으로
집집에 터주까지 겸한 겸관이 되었는지, 고사를 잘 지내면 탈이 없고
못 지내면 온 집안에 동토가 나서 다 죽을 지경이라.
제 손으로 벌어 놓은 제 재물을 마음 놓고 먹지 못하고, 천생 타고난
제 목숨을 남에게 매어 놓고 있는 우리나라 백성들을 불쌍하다
하겠거든, 더구나 남의 나라 사람이 와서
싸움을 하느니 지랄을 하느니, 그러한 서슬에 우리는 패가하고
사람 죽는 것이 다 우리나라 강하지 못한 탓이라.
 
오냐, 죽은 사람은 하릴없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나 이후에 이러한 일을 또 당하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 제일이다. 제 정신 제가 차려서 우리나라도 남의 나라와
같이 밝은 세상 되고 강한 나라 되어
백성 된 우리들이 목숨도 보전하고 재물도 보전하고,
각도 선화당과 각도 동헌 위에 아귀 귀신같은 산 염라대왕과 산 터주도 

못 오게 하고, 범 같고 곰 같은 타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감히
싸움할 생각도 아니하도록 한 후이라야 사람도 사람인 듯싶고
살아도 산 듯싶고, 재물 있어도 제 재물인 듯하리로다.

처량하다. 이 밤이여. 평양 백성은 어디 가서 사생중에 들었으며,
아귀 같은 염라대왕은 어느 구석에 박혔으며,
우리 처자는 어떻게 되었는고. 우리 내외 금슬이 유명히 좋던 사람이요,

옥련이를 남다르게 귀애하던 가정이라.
그러하나 세상에 뜻이 있는 남자 되어 처자만 구구히 생각하면
나라의 큰일을 못 하는지라. 나는 이 길로 천하 각국을 다니면서
남의 나라 구경도 하고 내 공부 잘한 후에 내 나라 사업을 하리라
하고 밝기를 기다려서 평양을 떠나가니,
그 발길 가는 데는 만리타국이라.
 
그 부인은 일본군 헌병부로 잡혀 갔으나, 규중에서 생장한 부인이
그러한 난리 중에 그러한 풍파를 겪었다 하는 말을 듣는 자
누가 불쌍타 하지 아니하리요. 통변이 말을 전하는 대로 헌병장이
고개를 기울이고 불쌍하다 가이없다 하더니,
그 밤에는 군중에서 보호하고 그 이튿날 제 집으로 돌려보내니,
부인은 하룻밤 동안에 세상 풍파를 다 지내고 본집으로 돌아왔더라.
 
아침 날 서늘한 기운에 빈집같이 쓸쓸한 것은 없는데
그 부인이 그 집에 들어와 보더니 처창한 마음이 새로이 나서
이 집구석에서 나 혼자 살아 무엇하리 하면서 마루 끝에 털썩
 걸터앉더니 정신없이 모으로 쓰러졌다.
 
어젯날 피란 갈 때에 급하고 겁나는 마음에 밥도 먹지 아니하고
나섰다가 하룻날 하룻밤에 고생한 일은 인간에 나 하나뿐인가
싶은 마음에 배가 고픈지 다리가 아픈지 모르고 지냈더니,
내 집으로 돌아오니 남편도 소식 없고 옥련이도 간 곳 없고,
엉성한 네 기둥과 적적한 마루 위에 덧문 척척 닫힌 방을 보고,
이 몸이 앉은 채로 쓰러져 없었으면 좋으련마는,
그렇지 아니하면 무슨 경황에 내 손으로 저 방문을 열고
내 발로 저 방으로 들어갈까 하는 혼자말을 다 마치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더라.
 
평시절 같으면 이웃사람도 오락가락하고 방물장수 떡장수도
들락날락할 터인데, 그때는 평양성중에 살던 사람들이 이번 불소리에
다 달아나고 있는 것은 일본 군사뿐이라.
그 군사들이 까마귀떼 다니듯하며 이집 저집 함부로 들어간다.
 
본래 전시국제공법(戰時國際公法)에,
전장에서 피란가고 사람 없는 집은 집도 점령하고 물건도 점령하는
 법이라. 그런고로 군사들이 빈집을 보면 일삼아 들어간다.
 
김씨 집에 들어와서 보는 군사들은 마루 끝에 부인이 누웠는 것을 보고 

도로 나갈 뿐이라. 아마도 부인을 구하여 줄 사람은 없었더라.
만일 엄동설한에 하루 동안을 마루에 누웠으면 얼어 죽었을 터이나,
다행히 일기가 더운 때라, 종일 정신없이 마루에 누웠으나
관계치 아니하였더라.
 
밤이 되매 비로소 정신이 나기 시작하는데,
꿈 깨고 잠 깨이듯 별안간에 정신이 난 것이 아니라 모란봉에
안개 걷듯 차차 정신이 난다. 처음에 눈을 떠서 보니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고, 다시 눈을 둘러보니 우중충한 집에 나 혼자 누웠으니
이곳은 어디며 이집은 뉘 집인지,
나는 어찌하여 여기 와서 누웠는지 곡절을 모른다.
 
차차 본즉 내 집이요, 차차 생각한즉 여기 와서 걸터앉았던
생각도 나고 어젯밤에 일본 헌병부로 가던 생각도 나고,
총소리에 사람 모여들던 생각도 나고, 도둑놈에게 욕을 볼 뻔하던
생각이 나면서 새로이 소름이 끼친다.
 
정신이 번쩍 나고 없던 기운이 번쩍 나서 벌떡 일어앉았으니,
 새로 남편 생각과 옥련이 생각만 난다.
 
안방에는 옥련이가 자는 듯하고, 사랑방에는 남편이 있는 듯하다.
옥련이를 부르면 나올 듯하고, 남편을 부르면 대답을 할 것 같다.
어젯날 지낸 일은 정녕 꿈이라 내가 악몽을 꾸었지,
지금은 깨었으니 옥련이를 불러 보리라 하고 안방으로 고개를 두르고
옥련아, 옥련아, 옥련아, 부르다가 소름이 죽죽 끼치고
소리가 점점 움츠러진다. 일어서서 안방 문앞으로 가니,
다리가 덜덜 떨리고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방문을 왈칵 잡아당기니
방 속에서 벼락치는 소리가 나며
 부인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주저앉았더라.
 
어제 아침에 이 방에서 피란 갈 때에는 방 가운데 아무것도
늘어놓은 것 없었더니, 오늘 아침에 김관일이가 외국에 가려고
결심하고 나갈 때에 무엇을 찾느라고 다락 속 벽장 속에 있는 세간을
낱낱이 내어놓고 궤문도 열어 놓고, 농문도 열어 놓고,
궤짝 위에 농짝도 놓고 농짝 위에 궤짝도 얹었는데,
단정히 놓인 것도 있지마는 곧 내려질 듯한 것도 있었더라.
방문은 무슨 정신에 닫고 갔던지,
 방 안의 벽장문·다락문은 열린 채로 두었더라.
 
강아지만한 큰 쥐가 다락에서 나와서 방 안에서 제 세상같이 있다가,
방문 여는 소리를 듣고 궤 위에서 방바닥으로 내려 뛰는데,
그 궤가 안동하여 떨어지니, 그 궤는 옥련의 궤라 조개껍질도 들고,
서양철조각도 들고 방울도 들고 유리병도 들었으니,
그 궤가 떨어질 때는 소리가 조용치는 못하겠으나
 부인이 겁결에 들은즉 벼락치는 소리같이 들렸더라.
 
부인이 정신을 차려서 당성냥을 찾으려고 방 안으로 들어가니,
발에 걸리고 몸에 부딪히는 것이 무엇인지 무서운 마음에
도로 나와서 마루 끝에 앉았더라. 이 밤이 초저녁인지 밤중인지
샐 녘인지 모르고 날새기만 기다리는데, 부인의 마음에는
 이 밤이 샐 때가 되었거니 하고 동편 하늘만 바라보고 있더라.
 
두 날개 탁탁 치며 꼬끼요 우는 소리는 첫닭이 분명한데
이 밤새우기는 참 어렵도다. 그렇게 적적한 집에 그 부인이 혼자 있어서

 하루 이틀 열흘 보름을 지낼수록 경황없고 처량한 마음이 조금도 

감하지 아니한다. 감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날이 갈수록 심란한 마음이
깊어가더라. 그러면 무슨 까닭으로 세상에 살아 있는고.
 한 가지 일을 기다리고 죽기를 참고 있었더라.
 
피란 갔던 이튿날 방안에 세간이 늘어 놓인 것을 보고, 남편이 왔던
자취를 알고 부인의 마음에는 남편이 옥련이와 나를 찾아다니다가
찾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서 보고 또 찾으러 간 줄로 알고,
그 남편이 방향 없이 나서서 오죽 고생을 할까 싶은 마음에
가이없으면서 위로는 되더니, 그날 해가 지고 저무니 남편이 돌아올까
기다리는 마음에 대문을 닫지 아니하고 앉아 밤을 새웠더라.
그 이튿날 또 다음날을, 날마다 밤마다 때마다 기다리는데
사람의 소리가 들리면 뛰어나가 보고, 개가 짖으면 쫓아가서 본다.
 
고대하던 마음은 진하고 단망하는 마음이 생긴다.
어느 곳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다 하는 소문이 있으면 남편이 거기서
죽은 듯하고 어느 곳에서는 어린아이 죽었다는 말이 들리면
 내 딸 옥련이가 거기서 죽은 듯하다.
 
남편이 살아오거니 하고 고대할 때는 마음을 붙일 곳이 있어서
살아 있었거니와, 죽어서 못 오거니 하고 단망하니 잠시도
 이 세상에 있기가 싫다.
 
부인이 죽기로 결심하고 대동강 물에 빠져 죽을 차로 밤 되기를 기다려 

강가로 향하여 가니, 그때는 구월 보름이라 하늘은 씻은 듯하고
달은 초롱같다. 은가루를 뿌린 듯한 백사장에 인적은 끊어지고
 백구는 잠들었다. 부인이 탄식하여 가로되,
 
"달아 물어 보자, 너는 널리 보리로다. 낭군이 소식 없고 

옥련은 간 곳 없다. 이 세상에 있으면 집 찾아왔으련만 일거 무소식하니
북망객 됨이로다. 이 몸이 혼자 살면 일평생 근심이요,
이 몸이 죽었으면 이 근심 모르리라. 십오 년 부부정과 일곱 해
모녀정이 어느 때 있었던지 지금은 꿈같도다. 꿈같은 이내 평생
 오늘날뿐이로다. 푸르고 깊은 물은 갈 길이 저기로다."
 
이러한 탄식을 마치매 치마를 걷어잡고 이를 악물고
두 눈을 딱 감으면서 물에 뛰어내리니, 그 물은 대동강이요 그 사람은
김관일의 부인이라. 물 아래 뱃나들이에 한 거룻배가 비꼈는데,
그 배 속에서 사공 하나와 평양성내에 사는 고장팔이라 하는 사람과
단둘이 달밤에 밤윷을 노는데, 그 사공과 고가는 각 어미 자식이나
성정은 어찌 그리 똑같던지, 사공이 고가를 닮았는지,
고가가 사공을 닮았는지, 벌어먹는 길만 다르나 일만 없으면
 두 놈이 함께 붙어 지낸다.
 
무엇을 하느라고 같이 붙어 지내는고. 둘 중에 하나만 돈이 있으면
서로 꾸어 주며 투전을 하고, 둘이 다 돈이 없으면
담배내기 밤윷이라도 아니 놀고는 못 견딘다.
하루 밥을 굶어라 하면 어렵게 여기지 아니하나
하루 노름을 하지 말라 하면 병이 날 듯한 놈들이라.
그 밤에도 고가가 그 사공을 찾아가서 단둘이 밤윷을 놀다가
물 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나 윷에 미쳐서 정신을 모르다가,
물 위에서 웬 사람이 떠내려 오다가 배에 걸려서 허덕거리는 것을 보고 

급히 뛰어내려서 건진즉 한 부인이라. 

본래 부인이 높은 언덕에서 뛰어 내렸더면 

물이 깊고 얕고 간에 살기가 어려웠을 터이나,
모래톱에서 물로 뛰어 들어가니 그 물이 한두 자 깊이가 될락 말락한
물이라, 물이 낮아 죽지 아니하였으나 부인은 죽을 마음으로 빠진고로
얕은 물이라도 죽을 작정만 하고 드러누우니 얼른 죽지는 아니하고
물에 떠서 내려가다가 배에 있던 사람에게 구원한 것이 되었더라.
 
화약 연기는 구름에 비 묻어 다니듯이 평양의 총소리가
의주로 올라가더니 백마산에는 철환 비가 오고
 압록강에는 송장으로 다리를 놓는다.
 
평양은 난리 평정이 되고 의주는 새로 난리를 만났으니
가령 화재 만난 집에서, 안방에는 불을 잡았으나 

건넌방에는 불이 붙는 격이라. 안방이나 건넌방이나 집은 한집이언만, 

안방 식구는 제 방에만 불 꺼지면 다행으로 안다. 

의주서는 피비 오는데 평양성중에는
차차 웃음소리가 난다. 피란 가서 어느 구석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차차 모여들어서 성중에는 옛 모양이 돌아온다.

집집의 걸어 닫혔던 대문도 열리고,
골목골목에 사람의 자취가 없던 곳도 사람이 오락가락하고,
개 짖고 연기 나는 모양이 세상은 평화 된 듯하나, 북문 안의 

김관일의 집에는 대문이 닫힌 대로 있고 그 집 문간엔 사람이 와서 

찾는 자도 없었더라. 하루는 어떠한 노인이 부담말 타고 오다가

김씨 집 앞에서 말께 내리더니, 김씨 집 대문을 흔들어 본즉

문이 걸리지 아니하였거늘 안으로 들어가더니

나와서 이웃집에 말을 묻는다.
 
"여보, 말 좀 물어 봅시다. 저 집이 김관일 김초시 집이오?"
 
"네, 그 집이오, 그 집에 아무도 없나 보오."
 
"나는 김관일의 장인 되는 사람인데, 내 사위는 만나 보았으나
내 딸과 외손녀는 피란 갔다가 집 찾아왔는지 아니 왔는지 몰라서 

내가 여기까지 온 길이러니,
지금 그 집에 들어가서 본즉 아무도 없기로 궁금하여 묻는 말이오."
 
"우리도 피란 갔다가 돌아온 지가 며칠 되지 아니하였으니
 이웃집 일이라도 자세히 모르겠소."
 
노인이 하릴없이 다시 김씨 집에 들어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사람은 난리를 만나 도망하고 세간은 도둑을 맞아서 빈 농짝만
남았는데, 벽에 언문 글씨가 있으니,
그 글씨는 김관일 부인의 필적인데,
 대동강 물에 빠져 죽으려고 나가던 날의 세상 영결하는 말이라.
 
노인이 그 필적을 보고 놀랍고 슬픈 마음을 진정치 못하였더라.
 
그 노인은 본래 평양성내에서 살던 최주사라 하는 사람인데
이름은 항래라. 십 년 전에 부산으로 이사하여 크게 장사하는데,
그때 나이 오십이라. 재산은 유여하나 아들이 없어서 양자하였더니
양자는 합의치 못하고, 소생은 딸 하나 있으니 그 딸은 편애할 뿐
아니라 그 딸을 기를 때에 최주사는 애쓰고 마음 상하면서
 길러 낸 딸이요, 눈쌀맞고 자라난 딸인데.
 
최씨가 그 딸 기를 때의 일을 말하자 하면,
 소진(蘇秦=중국전국시대(戰國時代) 설객(說客))의 혀를 두 셋씩 이어
놓고 삼사월 긴긴 해를 몇씩 포개 놓을지라도 다 말할 수 없는
일이러라. 그 부인의 이름은 춘애라. 일곱 살에 그 모친이 돌아가고
계모에게 길렸는데, 그 계모는 부인 범절에는 사사이 칭찬 듣는
사람이나 한 가지 결점이 있으니, 그 흠절은 전실 소생 춘애에게
몹시 구는 것이라. 세간 그릇 하나라도 전실 부인이 쓰던 것이면
무당 불러서 불살라 버리든지 깨뜨려 버리든지 하여야 속이
시원하여지는 성정이라. 그러한 계모의 성정에 사르지도 못하고
깨뜨리지도 못할 것은 전실 소생 춘애라. 최씨가 그 딸을 옥같이
사랑하고 금같이 귀애하나 그 후취 부인 보는 때는 조금도 귀애하는
모양을 보이면 춘애는 그 계모에게 음해를 받을 터이라.
그런고로 최주사가 그 딸을 칭찬하고 싶은 때도 그 계모 보는 데는
 꾸짖고 미워하는 상을 보이는 일도 많다.
 
그러면 최주사가 그 후취 부인에게 쥐여 지내느냐 할 지경이면
 그렇지도 아니하다.

그 후취 부인은 죽어 백골 된 전실에게 투기하는 마음 한 가지만
아니면 아무 흠절이 없으니, 그러한 부인은 쇠사슬로 신을 삼아 신고
그 신이 날이 나도록 조선 팔도를 다 돌아다니더라도
그만한 아내는 얻기가 어렵다 하는 집안 공론이다.
최씨가 후취 부인과 금슬도 좋고 전취 소생 춘애도 사랑하니,
춘애를 위하여 주려 하면 후실 부인의 뜻을 맞추어 주는 일이
상책이라.
 
춘애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눈치 빠르기로는
어린아이로 볼 수가 없다.
계모에게 따르기를 생모같이 따르면서 혼자 앉으면 눈물을 씻고
죽은 어머니를 생각하더라. 춘애가 그러한 고생을 하고 자라나서
김관일의 부인이 되었는데, 최씨는 딸을 출가한 딸로
여기지 아니하고 젖 먹이는 딸과 같이 안다.
 
평양의 난리 소문이 다른 사람 듣기에는 이웃집에 초상났다는 소문과
같이 심상히 들리나, 부산 사는 최항래 최주사의 귀에는 소름이
끼치도록 놀랍고 심려되더니, 하루는 그 사위 김관일이가
부산 최씨 집에 와서 난리 겪은 말도 하고, 외국으로 공부하러
가고자 하는 목적을 말하니, 최씨가 학비를 주어서 외국에 가게하고,
최씨는 그 딸과 외손녀의 생사를 자세히 알고자 하여 평양에 왔더니,
그 딸이 대동강 물에 빠져 죽을 차로 벽상에 그 회포를 쓴 것을 보니,
그 딸 기를 때의 불쌍하던 마음이 새로이 나서,
일곱 살에 저의 어머니 죽을 때에 죽은 어미의 뺨을 대고 울던 모양도
눈에 선하고, 계모의 눈살을 맞아서 조접이 들던 모양도 눈에 선하고,
내가 부산갈 때에 부녀가 다시 만나 보지 못하는 듯이 낙루하며
작별하던 모양도 눈에 선한 중에 해는 점점 지고
빈집에 쓸쓸한 기운은 날이 저물수록 형용하기 어렵더라.
 
최씨가 데리고 온 하인을 부르는데 근력 없는 목소리로,
 
"이애 막동아, 부담 떼서 안마루에 갖다 놓아라."
 
"말은 어데 갖다 매오리까?"
 
"마방집에 갖다 매어라."
 
"소인은 어디서 자오리까?"
 
"마방집에 가서 밥이나 사서 먹고 이 집 행랑방에서 자거라."
 
"나리께서도 무엇을 좀 사다가 잡숫고 주무시면 좋겠습니다."
 
"나는 술이나 먹겠다. 부담에 달았던 술 한 병 떼어 오고
  찬합만 끌러 놓아라. 혼자 이 방에 앉아 술이나 먹다가 밤 새거든
  새벽길 떠나서 도로 부산으로 가자.
  난리가 무엇인가 하였더니 당하여 보니 인간에 지독한 일은
  난리로구나. 내 혈육은 딸 하나 외손녀 하나뿐이려니 와서 보니
  이 모양이로구나. 막동아, 너같이 무식한 놈더러 쓸데없는 말
  같지마는 이후에는 자손 보존하고 싶은 생각 있거든
  나라를 위하여라. 우리나라가 강하였더면
  이 난리가 아니 났을 것이다.
  세상 고생 다 시키고 길러 낸 내 딸자식 나 젊고 무병하건마는
  난리에 죽었구나. 역질 홍역 다 시키고 잔주접 다 떨어 놓은
  외손녀도 난리중에 죽었구나."
 
"나라는 양반님네가 다 망하여 놓셨지요.
  상놈들은 양반이 죽이면 죽었고, 때리면 맞았고, 재물이 있으면
  양반에게 빼앗겼고, 계집이 어여쁘면 양반에게 빼앗겼으니,
  소인 같은 상놈들은 제 재물 제 계집 제 목숨 하나를
  위할 수가 없이 양반에게 매였으니, 나라 위할 힘이 있읍니까.
  입 한번을 잘못 놀려도 죽일 놈이니 살릴 놈이니,
  오금을 끊어라 귀양을 보내라 하는 양반님 서슬에 상놈이
  무슨 사람값에 갔읍니까. 난리가 나도 양반의 탓이올시다.
  일청전쟁도 민영춘이란 양반이 청인을 불러왔답니다.
  나리께서 난리 때문에 따님아씨도 돌아가시고 손녀아기도 죽었으니
  그 원통한 귀신들이 민영춘이라는 양반을 잡아갈 것이올시다."
 
하면서 말이 이어나오니,
본래 그 하인은 주제넘다고 최씨 마음에 불합하나,
이번 난리중 험한 길에 사람이 똑똑하다고 데리고 나섰더니 이러한
심란중에 주제넘고 버릇없는 소리를 함부로 하니 참 난리난 세상이라.
난리중에 꾸짖을 수도 없고 근심중에 무슨 소리든지 듣기도 싫은고로
돈을 내어주며 하는 말이, 막동아 너도 나가서 술이나 싫도록 먹어라.
홧김에 먹고 보자 하니 막동이는 밖으로 나가고,
최씨는 혼자 술병을 대하여 팔자 한탄하다가 술 한 잔 먹고,
세상 원망하다가 술 한 잔 먹고, 딸 생각이 나도 술 한 잔 먹고,
외손녀 생각이 나도 술 한 잔 먹고, 술이 얼근하게 취하더니
이 생각 저 생각 없이 술만 먹다가 갓 쓴 채로 목침 베고
드러누웠더니 잠이 들면서 꿈을 꾸었더라.
모란봉 아래서 딸과 외손녀를 데리고 피란을 가다가 노략질군 도둑을
만나서 곤란을 무수히 겪다가 딸이 도둑을 피하여 가느라고
높은 언덕에서 떨어져 죽는 것을 보고 최씨가 도둑놈을 원망하여
도둑놈을 때려 죽이려고 지팡이를 들고 도둑을 때리니,
도둑놈이 달려들어 최씨를 마주 때리거늘, 최씨가 넘어져서
일어나려고 애를 쓰는데 도둑놈이 최씨를 깔고 앉아서 멱살을 쥐고
칼을 빼니 최씨가 숨을 쉴 수가 없어 일어나려고 애를 쓰니
 최씨가 분명 가위를 눌린 것이다.
 
곁에서 사람이 최씨를 흔들며 아버지 여기를 어찌 오셨소,
아버지, 아버지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깨치니 남가일몽이라.
눈을 떠서 자세히 본즉 대동강 물에 빠져죽으려고
벽상에 회포를 써서 붙였던 딸이 살아온지라, 기쁜 마음에
 정신이 번쩍 나서 생각한즉 이것도 꿈이 아닌가 의심난다.
 
"이애, 네가 죽으려고 벽상에 유언을 써서 놓은 것이 있더니
어찌 살아왔느냐. 아까 꿈을 꾸니 네가 언덕에서 떨어져 죽었더니
지금 너를 보니 이것이 꿈이냐, 그것이 꿈이냐? 이것이 꿈이어든
 이 꿈을 이대로 깨지 말고 십 년 이십 년이라도 이대로 지냈으면
 그 아니 좋겠느냐."
 
하는 말이 최씨 생각에는 그 딸 만나 보는 것이 정녕 꿈같고 

그 딸이 참 살아온 사기는 자세히 모른다.
 
원래 최씨 부인이 물에 빠져 떠내려갈 때에 뱃사공과 고장팔에게
구한 바이 되었는데, 장팔의 모와 장팔의 처가 그 부인을 교군에
태워서 저희 집으로 모시고 가서 수일을 극진히 구원하였다가
그 부인이 차차 완인이 되매 그날 밤 들기를 기다려서
부인이 장팔의 모를 데리고 집에 돌아온 길이라.
장팔의 모는 길가에서 무엇을 사가지고 들어온다 하고 뒤떨어졌는데,
그 부인은 발씨 익은 내 집이라 앞서서 들어온즉 안마루에 부담 상자도
있고 안방에는 불이 켜서 밝은지라.
이전 마음 같으면 부인이 그 방문을 감히 열지 못하였을 터이나
별 풍상 다 지내고 지금은 겁나는 것도 없고 무서운 것도 없는지라,
내 집 내 방에 누가 와서 들어앉았는가 생각하면서 서슴지 아니하고
방문을 열어 보니 웬 사람이 자다가 가위를 눌려서
애를 쓰는 모양인데, 자세히 본즉 자기의 부친이라.
부인이 그때에 부친을 만나니 반가운 마음에 아무 말도 아니하고
 나오느니 울음뿐이라.
 
뒤떨어졌던 고장팔의 모가 들어 달아오면서 덩달아 운다.
 
*본 소설은 광무 10년 7월 22일부터 10월 10일까지 50회에 걸쳐
 [만세보]에 연재된 이인직의 처녀장편소설로서
 신소설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에그, 나리마님이 이 난리중 여기 오셨네.
 알 수 없는 것은 세상일이올시다. 나리께서 부산으로 이사 가실 때에
 할미는 늙은 것이라 살아서 다시 나리께 뵙지 못하겠다 하였더니
 늙은 것은 살았다가 또 뵈옵는데 어린 옥련 애기와 젊으신 서방님은
 어디 가서 돌아가셨는지 나리 오신 것을 못 만나 뵈네."
 
하는 말은 속에서 솟아나오는 인정이라.
 그 노파가 그 인정이 있을 만도 한 사람이다.
 
고장팔의 모가 본래 최씨집 종인데 삼십 전부터 드난은 아니하나
최씨의 덕으로 살다가 최씨가 이사 갈 때에 장팔의 모는
상전을 따라가고자 하나 장팔이가 노름군으로 최씨의 눈 밖에
난 놈이라 최씨를 따라가지 못하고 끈떨어진 뒤웅박같이
평양에 있었더니, 이번에는 노름 덕으로 대동강 배 속에서
밤잠 아니 자고 있다가 최씨 부인을 구하여 살렸으니,
 장팔이 지금은 노름하는 칭찬도 들을 만하게 되었더라.
 
최씨 부인이 그 부친에게 남편 김씨가 외국으로 유학하러 갔다는 말을
듣고 만리의 이별은 섭섭하나 난리중에 목숨을 보전한 것만 천행으로
여겨서, 부친의 말하는 입을 쳐다보면서 눈에는 눈물이 가득하나
 얼굴에는 기쁜 빛을 띠우더라.
 
"이애 김집아, 네 집은 외무주장하니
 여기서 고단하여 살 수 없을 것이니 나를 따라 부산으로 내려가서
 내 집에 같이 있으면 좋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물에 빠져 죽으려 하기는 가장이 죽은 줄로 생각하고 나 혼자
 세상에 살아 있기가 싫은고로 대동강에 빠졌더니,
 사람에게 건진 바이 되어 살아 있다가 가장이 살아서 

외국에 유학하러  갔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나는 이 집을 지키고 있다가
 몇해 후가 되든지 이 집에서 다시 가장의 얼굴을 만나 보겠으니
 아버지께서는 딸 생각 말으시고 딸 대신 사위의 공부나 잘하도록
 학비나 잘 대어 주시기를 바랍나이다. 나는 이 집에서 장팔의 어미를
 데리고 박토 마지가에서 도지섬 받는 것 가지고 먹고 있겠소.
 그러나 옥련이가 있었더면 위로가 되었을걸,
 허구한 세월을 어찌 기다리나."
 
하는 소리에 최주사가 흉격이 막히나 다사(多事)한 사람이
오래 있을 수 없는고로 수일 후에 부산으로 내려가고 최씨 부인은
장팔의 어미를 데리고 있으니, 행랑에는 늙은 과부요 안방에는
젊은 생과부가 있어서 김씨를 오기만 기다리고 세월 가기만 기다린다.
밤에는 밤이 길고 낮에는 낮이 긴데 그 밤과 그 낮을 모아 달 되고
해 되니, 천하에 어려운 것은 사람 기다리는 것이라.
부인의 생각에는 인간의 고생이 나 하나뿐인 줄로 알고 있건마는,
그보다 더 고생하는 사람이 또 있으니, 그것은 부인의 딸 옥련이라.
 
당초에 옥련이가 피란갈 때에 모란봉 아래서 부모의 간 곳 모르고
어머니를 부르면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난데없는 철환 한 개가
넘어 오더니 옥련의 왼편 다리에 박혀 넘어져서 그날 밤을 그 산에서
목숨이 붙어 있었더니, 그 이튿날 일본 적십자 간호수가 보고
야전병원으로 실어 보내니, 군의(軍醫)가 본즉 중상은 아니라.
철환이 다리를 뚫고 나갔는데 군의 말이,
만일 청인의 철환을 맞았으면 철환에 독한 약이 섞인지라 맞은 후에
하룻밤을 지냈으면 독기가 몸에 많이 퍼졌을 터이나,
옥련이가 맞은 철환은 일인의 철환이라 치료하기 대단히 쉽다 하더니,
과연 삼 주일이 못되어서 완연히 평일과 같은지라.
그러나 옥련이는 갈 곳이 없는 아이라 병원에서 옥련의 집을 물은즉
평양 북문 안이라 하니, 병원에서 옥련이가 나이 어리고 또한 정경을
불쌍케 여겨서 통사를 안동하여 옥련의 집에 가서 보라 한즉,
그때는 옥련의 모친이 대동강 물에 빠져 죽으려고 벽상에 

그 사정 써서 붙이고 간 후이라, 통변이 그 글을 보고 

옥련을 불쌍히 여겨서
도로 데리고 야전병원으로 가니, 군의 정상 소좌(井上少佐)가 옥련의
정경을 불쌍히 여기고 옥련의 자품을 기이하게 여겨 통변을 세우고
 옥련의 뜻을 묻는다.
 
"이애, 너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디로 간지 모르냐?"
 
"……"
 
"그러면 네가 내 집에 가서 있으면 내가 너를 학교에 보내어
 공부하도록 하여 줄 것이니, 네가 공부를 잘하고 있으면 아무쪼록
 너의 나라에 탐지하여 너의 부모가 살았거든
  너의 집으로 곧 보내주마."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살아 있는 줄을 알고 나를 도로 우리집에
 보내 줄 것 같으면 아무데라도 가고 아무것을 시키더라도 하겠소."
 
"그러면 오늘이라도 인천으로 보내서 어용선을 타고 일본으로 가게
  할 것이니, 내 집은 일본 대판이라. 내 집에 가면 우리 마누라가
  있는데, 아들도 없고 딸도 없으니 너를 보면 대단히 귀애할 것이니
  너의 어머니로 알고 가서 있거라."
 
하면서 귀국하는 병상병(病傷兵)에게 부탁하여 일본 대판으로 보내니,
옥련이가 교군 바탕을 타고 인천까지 가서 인천서 유선을 타니,
 등뒤에는 부모 소식이 묘연하고 눈앞에는 타국 산천이 생소하다.
 
만일 용렬한 아이가 일곱 살에 난리 피란을 가다가 부모를 잃었으면
어미 아비만 생각하고 낯선 사람이 무슨 말을 물으면 눈물이
비죽비죽하고 주접이 덕적덕적하고 묻는 말을 대답도 시원히
못할 터이나, 옥련이는 어디 그러한 영리하고 숙성한 아이가 있었던지
혼자 있을 때는 부모를 보고 싶은 마음에 죽을 듯하나
사람을 대할 때는 어찌 그리 천연하던지, 부모 생각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더라.
옥련의 얼굴은 옥을 깎아서 연지분으로 단장한 것 같다.
 
옥련의 부모가 옥련 이름 지을 때에 옥련의 모양과 같이 아름다운
이름을 짓고자 하여 내외 공론이 무수하였더라.
옥같이 희다 하여 옥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옥련이 모친이요,
연꽃같이 번화하다 하여 연화라고 부르는 사람은 옥련의 부친이라.
 
그 아이 이름 짓던 날은 의논이 부산하다가 구화담판되듯
옥자, 련자를 합하여 옥련이라고 지은 이름이라.
부모 된 사람이 제 자식 귀애하는 마음에 혹 시꺼먼 괴석 같은 것도
옥같이 보는 일도 있고, 누렁퉁이나 호박꽃같이 생긴 것도 연꽃같이
보이는 일도 있기는 있지마는, 옥련이 같은 아이는
옥련의 부모의 눈에만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어떠한 사람이든지

 칭찬 아니하는 사람이 없고, 또 자식 없는 사람이 보면 빼앗아
갈 것같이 탐을 내서 하는 말에, 옥련이를 잡아가서 내 딸이 될 것
 같으면 벌써 집어갔겠다 하는 사람이 무수하였더라.
 
그러하던 옥련이가 부모를 잃고 만리타국으로 혼자 가니,
배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은 소일조로 옥련의 곁에 모여들어서
말 묻는 사람도 있고, 조선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행중에서
과자를 내어주니, 어린아이가 너무 괴롭고 성이 가실 만 하련마는
 옥련이는 천연할 뿐이라.
 
만리창해에 살같이 빠른 배가 인천서 떠난 지 나흘 만에
대판에 다다르니, 대판에서 내릴 선객들은 각기 제 행장을 수습하여
삼판에 내려가느라고 분요하나 옥련이는 행장도 없고 몸 하나뿐이라
 혼자 가만히 앉았으니, 어린 소견에도 별생각이 다 난다.
 
"남은 제 집 찾아 가건마는 나는 뉘 집으로 가는 길인고.
남들은 일이 있어서 대판에 오는 길이거니와 나 혼자 일없이 타국에
가는 사람이라. 편지 한 장을 품에 끼고 가는 집이 뉘 집인고.
이 편지 볼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며, 이내 몸 위하여 줄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 딸을 삼거든 딸노릇하고, 종을 삼거든 종노릇하고,
고생을 시키거든 고생도 참을 것이요,
 공부를 시키거든 일시라도 놀지 않고 공부만 하여 볼까."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생각만 하느라고 시름없이 앉았더니,
평양서부터 동행하던 병정이 옥련이를 부르는데 말을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고로 눈치로 알아듣고 따라 내려가니, 그 병대는 평양 싸움에
오른편 다리에 총을 맞고 옥련이와 같이 야전병원에서 치료하던
사람인데, 철환이 신경맥을 상한고로 치료한 후에 그 다리가 불편하여
몽둥이에 의지하여 겨우 걸어다니는지라.
그 병대는 앞에 서서 내려가는데, 옥련이가 뒤에 서서 보다가
하는 말이, 나도 다리에 총 맞았던 사람이라.
내가 만일 저 모양이 되었더라면 자결하여 죽는 것이 편하지
살아서 쓸데 있나, 하는 소리를 옥련의 말 알아듣는 사람이 없으니,
그런 말은 못 듣는 것이 좋건마는, 좋은 마디는 그뿐이라.
옥련이가 제일 답답한 것은 서로 말 모르는 것이라.
벙어리 심부름하듯 옥련이가 병정 손짓하는 대로만 따라간다.
 
옥련의 눈에는 모두 처음 보는 것이라. 항구에는 배 돛대가 삼대
들어서듯 하고, 저자거리에는 이층 삼층집이 구름 속에 들어간 듯하고,

 지네같이 기어가는 기차는 입으로 연기를 확확 뽑으면서
배에는 천동지동하듯 구르며 풍우같이 달아난다.
넓고 곧은 길에 갔다왔다하는 인력거 바퀴 소리에 정신이 없는데,
병정이 인력거 둘을 불러서 저도 타고 옥련이도 태우니 그 인력거들이
살같이 가는지라. 옥련이가 길에서 아장아장 걸을 때에는 인해중에
넘어질까 조심되어 아무 생각이 없더니,
 인력거 위에 올라앉으매 새로이 생각만 난다.
 
"인력거야, 천천히 가고지고. 이 길만 다 가면 남의 집에 들어가서
  밥도 얻어 먹고 옷도 얻어 입고, 마음도 불안하고 몸도 불편할
  터이로구나. 인력거야, 어서 바삐 가고지고. 궁금하고 알고자
  하는 일은 어서 바삐 눈으로 보아야 시원하다.
  가품 좋고 인정 있는 사람인지, 집안에서 찬 기운나고 사람에게서
  독기가 똑똑 떨어지는 집이나 아닌지. 내 운수가 좋으려면 그 집
  인심이 좋으련마는
  조실부모하고 만리타국에 유리하는 내 운수에……."
 
그러한 생각에 눈물이 비오듯 하며 흑흑 느끼어 우는데 인력거는
벌써 정상 군의 집 앞에 와서 내려놓는데, 옥련이가 인력거 그치는
것을 보고 이것이 정상 군의 집인가 짐작하고 조심되는 마음에
 작은 몸이 더욱 작아진 듯하다.
 
슬픈 생각도 한가한 때를 타서 나는 것이다.
눈물이 뚝 그치고 아니 나온다. 옥련이가 눈을 이리 씻고 저리 씻고
부산히 씻는 중에 앞에 섰던 인력거군이 무슨 소리를 지르매 계집종이
나와서 문간방에 꿇어앉아서 공손히 말을 물으니 병정이 두어 말 하매
종이 안으로 들어가더니 다시 나와서 병정더러 들어오라 하니,
 병정이 옥련이를 데리고 정상 군의 집안으로 들어갔다.
 
병정은 정상 부인을 대하여 군의 소식을 전하고 옥련의 사기를 말하고
전지(戰地)의 소경력(小經歷)을 이야기하는데,
 옥련이는 정상 부인의 눈치만 본다.
 
부인의 나인 삼십이 될락말락하니 옥련의 모친과 정동갑이나 아닌지,
연기는 옥련의 모친과 그렇게 같으나 생긴 모양은 옥련의 모친과
반대만 되었다. 옥련의 모친은 눈에 애교가 있더라.
정상 부인은 눈에 살기만 들었더라.
옥련의 모친은 얼굴이 희고 도화색을 띠었더니 정상 부인의 얼굴이
희기는 하나 청기가 돈다. 얌전도 하고 쌀쌀도 한데,
군의의 편지를 받아 보면서 옥련이를 흘끔흘끔 보다가 병정더러
무슨 말도 하는 것은, 옥련의 마음에는 모두 내 말 하거니 하고
단정히 앉았는데 병정은 할 말 다 하였는지 작별하고 나가고,
옥련이만 정상 군의의 집에 혼자 떨어져 있으니
 옥련이가 새로이 생소하고 비편한 마음뿐이라.
 
"이애 설자야, 나는 딸 하나 났다."
 
"아씨께서 자녀간에 없이 고적하게 지내시더니 따님이 생겼으니
  얼마나 좋으십니까.
  그러나 오늘 낳으신 아기가 대단히 숙성하오이다."
 
"설자야, 네가 옥련이를 말도 가르치고 언문도 잘 가르쳐 주어라.
  말을 알아듣거든 하루바삐 학교에 보내겠다."
 
"내가 작은아씨를 가르칠 자격이 되면
  이 댁에 와서 종 노릇을 하고 있겠습니까."
 
"너더러 어려운 것을 가르쳐 주라 하는 것이 아니다.
  심상 소학교(尋常小學校) 일년급 독본이나 가르쳐 주라는 말이다.
  네 동생같이 알고 잘 가르쳐 다고. 말을 능통히 알기 전에는
  집에서 네가 교사 노릇 하여라. 선생 겸 종 겸 어렵겠다.
  월급이나 많이 받으려무나."
 
"월급은 더 바라지 아니하거니와 연희장(演戱場) 구경이나
  자주 시켜 주시면 좋겠습니다."
 
"설자야, 우리 옥련이 데리고 잡점에 가서 옥련에게 맞는
  부인 양복이나 사서 가지고 목욕집에 가서 목욕이나 시키고
  조선 복색을 벗기고 양복이나 입혀 보자."
 
정상 부인은 옥련이를 그렇게 귀애하나 말 못 알아듣는 옥련이는
정상 부인의 쓸쓸한 모양에 죽 기가 도야 고역치르듯 따라다닌다.
 
말 못 하는 개도 사람이 귀애하는 것을 알거든, 하물며 사람이야.
아무리 어린아이기로 저를 사랑하는 눈치를 모를 리가 없는고로
수일이 못 되어 옥련이가 옹그리고 자던 잠이 다리를 쭉 뻗고 잔다.
 
정상 부인이 갈수록 옥련이를 귀애하고
옥련이는 날이 갈수록 정상 부인에게 따른다.
 
옥련의 총명재질은, 조선 역사에는 그러한 여자가 있다고
전한 일은 없으니, 조선 여편네는 안방 구석에 가두고 아무것도
가르치지 아니하였은즉, 옥련이 같은 총명이 있더라도 세상에서
몰랐든지,
이렇든지 저렇든지 옥련이는 조선 여편네에게는 비할 곳 없더라.
 
옥련의 재질은 누가 듣든지 거짓말이라 하고 참말로는 듣지 아니한다.
일본 간 지 반 년도 못되어 일본말을 어찌 그렇게 잘하던지,
정상 군의 집에 와서 보는 사람들이 옥련이를 일본 아이로 보고
조선 아이로는 보지를 아니한다.
정상 부인이 옥련이를 가르치며 저 아이가 조선 아이인데
조선서 온 지가 반 년밖에 아니된다 하는 말은 옥련이를 자랑코자
하여 하는 말이나, 듣는 사람은 정상 부인의 농담으로 듣다가
설자에게 자세한 말을 듣고 혀를 홰홰 내두르면서 칭찬하는 소리에
옥련이도 흥이 날 만하겠더라.
 
호외(號外), 호외, 호외라고 소리를 지르며 대판 저자 큰길로
달음박질하여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둘씩 셋씩 지나가니
옥련이가 학교에 갔다 오는 길에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여보, 어머니 저것이 무슨 소리요?"
 
"네가 온갖 것을 다 알아듣더니 호외는 모르는구나.
그러나 무슨 큰일이 있는지 한 장 사보자. 이애 설자야,
 호외 한 장 사오너라."
 
"네, 지금 가서 사오겠습니다."
 
하면서 급히 나가니 옥련이가 달음박질하여 따라나가면서,
이애 설자야, 그 호외를 내가 사오겠으니 돈을 이리 달라 하니,
설자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 누구든지 먼저 가는 사람이 호외를 산다
하고 달아나니 설자는 다리가 길고 옥련이는 다리가 짧은지라,
설자가 먼저 가서 호외 한 장을 사가지고 오는 것을
옥련이가 붙들고 호외를 달라 하여 기어이 빼앗아 가지고 와서
 하는 말이,

"어머니 이 호외를 보고 나 좀 가르쳐 주오."
 
정상 부인이 웃으며 받아 보니《대판매일신문》호외라.
한 줄쯤 보고 깜짝 놀라더니 서너 줄쯤 보고 에그 소리를 하면서
호외를 던지고 아무 소리 없이 눈물이 비오듯 한다.
 
"어머니, 어찌하여 호외를 보고 울으시오. 어머니 어머니……."
 
부인은 대답 없이 눈물만 흘리니, 옥련이가 설자를 부르면서
눈에 눈물이 가랑가랑하니, 설자는 방문 밖에 앉았다가
부인의 낙루하는 것은 못 보고 옥련의 눈만 보고 하는 말이,
 
"작은아씨가 울기는 왜 울어. 갓 낳은 어린아이와 같이."
 
"설자야, 사람 조롱 말고 들어와서 호외 좀 보고 가르쳐 다고.
  어머니께서 호외를 보고 울으시니 호외에 무슨 말이 있는지
  왜 울으시는지 자세히 보아라. 어서 어서."
 
"아씨, 호외에 무슨 일이 있읍니까.
   아씨께서만 보셨으면 좀 보겠읍니다."
 
설자가 호외를 들고 보다가 쌍긋 웃더니 그 아래는
 자세히 보지 아니하고 하는 말이,
 
"아씨, 이것 좀 보십시오. 요동반도가 함락이 되었읍니다.
  아씨, 우리 일본은 싸움할 적마다 이기니 좋지 아니하옵니까.
  에그, 우리나라 군사가 이렇게 많이 죽었나. 아씨, 이를 어찌하나.
  우리 댁 영감께서 돌아가셨네. 만국공법(萬國公法)에,
  전시에서 적십자기(赤十字旗) 세운 데는 위태치 아니하다더니
  영감께서는 군의시언마는 돌아가셨으니 웬일이오니까."
 
"무엇,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옥련이는 소리쳐 울고 부인은 소리없이 눈물만 떨어지고
설자는 부인을 쳐다보며 비죽비죽 우니 온 집안이 울음 빛이다.
 
호외 한 장이 온 집안의 화기를 끊어 버렸더라.
정상 군의는 인간의 다시 오지 못하는 길을 가고,
 정상 부인은 찬 베개 빈 방에서 적적히 세월을 보내더라.
 
조선 풍속 같으면 청상과부가 시집가지 아니하는 것을 가장 잘난 일로
알고 일평생을 근심중으로 지내나, 그러한 도덕상의 죄가 되는
악한 풍속은 문명한 나라에는 없는고로, 젊어서 과부가 되면
시집가는 것은 천하만국에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정상 부인이 어진 남편을 얻어 시집을 간다.
 
"이애 옥련아, 내가 젊은 터에 평생을 혼자 살 수 없고
  시집을 가려 하는데 너를 거두어 줄 사람이 없으니
  그것이 불쌍한 일이로구나……."
 
옥련의 마음에는 정상 부인이 시집 가는 곳에 부인을 따라가고 싶으나,

부인이 데리고 가지 아니할 말을 하니
옥련이는 새로이 평양성 밑 모란봉 아래서 부모를 잃고 발을 구르며
울던 때 마음이 별안간에 다시 난다.
옥련이가 부인의 무릎 위에 푹 엎디며 목이 메어 하는 말이,
 
"어머니, 어머니가 가시면 나는 누구를 믿고 사나."
 
"오냐, 나는 죽은 셈만 치려무나."
 
"어머니 죽으면 나도 같이 죽지.“
 
그 소리 한마디에 부인 가슴이 답답하여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더라.
그때 부인이 중매더러 말하기를, 내 한 몸뿐이라 하였는데,
남편 될 사람도 그리 알고 있으니 이제 새로이 딸 하나 있다 하기도
어렵고, 옥련이가 따르는 모양을 보니
차마 떼치기도 어려운 마음이 생긴다.
 
"이애 옥련아, 울지 말아라. 내가 시집가지 아니하면 그만이로구나.
  내가 이 집에서, 네 공부나 시키고 있다가 십 년 후에는
  내가 네게 의지하겠으니 공부나 잘하여라."
 
"어머니가 참 시집 아니 가고 집에 있어서 날 공부시켜 주시겠소?"
 
"오냐, 염려 말아라. 어린아이더러 거짓말하겠느냐."
 
옥련이가 그 말을 듣고 기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여인의 무릎 위에
앉아서 뺨을 대고 어리광을 하더라.
 
그 후로부터 옥련이가 부인에게 따르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학교에 가면 집에 돌아오고 싶은 마음만 있다가 하학 시간이 되면
달음박질하여 집에 와서 부인에게 안겨서 어리광을 한다.
그 어리광이 며칠 못되어 눈치꾸러기가 된다.
 
부인이 처음에는 옥련이의 어리광을 잘 받더니, 무슨 까닭인지
옥련이가 어리광을 피면 핀잔을 주고 찬 기운이 돈다.
날이 갈수록 옥련이가 고생길로 들고 근심 중으로 지낸다.
 
본래 부인이 시집가려 할 때에 옥련의 사정이 불쌍하여 중지하였으나
젊은 부인이 공방에서 고적한 마음이 있을 때마다
옥련이가 미운 마음이 생긴다. 어디서 얻어온 자식 말고 제 속으로
나온 자식일지라도 귀치 아니한 생각이 날로 더하는 모양이다.
 
옥련이가 부인에게 귀염 받을 때에는 문밖에 나가기를 싫어하더니,
부인에게 미움 받기 시작하더니 문 밖에 나가며 들어오기를 싫어하더라.
 
부인이 옥련이를 귀애할 때에는 옥련이가 어디 가서 늦게 오면
문에 의지하여 기다리더니, 옥련이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더니
 옥련이가 오는 것을 보면,
 
"에그, 저 원수의 것이 무슨 연분이 있어서 내 집에 왔나!"
 
하면서 눈살을 아드득 찌푸리더라.

옥련이가 앉아도 그 눈살 밑, 서도 그 눈살 밑, 밥을 먹어도
그 눈살 밑, 잠을 자도 그 눈살 밑, 눈살 밑에서 자라나는 옥련이가
눈치만 늘고 눈물만 흔하더라. 하루가 삼추 같은 그 세월이 삼 년이
되었는데, 옥련이는 심상 소학교 입학한 지 사 년이라.
옥련의 졸업식을 당하여 학교에서 옥련이가 우등생이 된 고로
사람마다 칭찬하는 소리가 옥련의 귀에는 조금도 기뻐 들리지 아니한다.

 기뻐 들리지 아니할 뿐 아니라 귀가 아프고 듣기 싫더라.

듣기 싫은 중에 더구나 듣기 싫은 소리가 있으니 무슨 소리런가.

"저 아이는 정상 군의 양녀지. 군의는 요동반도 함락될 때에 죽었다지. 

 그 부인은 그 양녀 옥련이를 불쌍히 여겨서 시집도 아니 가고 있다지.

  에그, 갸륵한 부인일세. 저 철없는 옥련이가 그 은혜를 다 알는지.
 알기는 무엇을 알아. 남의 자식이라는 것이 쓸데없나니 참 갸륵한
 일일세. 정상 부인이 남의 자식을 길러 공부를 시키려고 젊은 터에
 시집을 아니 가고 있으니 드문 일이지."

졸업식에 모인 사람들이 옥련이 재주 있는 것을 추다가
옥련의 의모(義母)되는 부인의 칭찬을 시작하더니,
받고 차기로 말이 끊어지지 아니하니,
옥련이는 그 소리를 들을 적마다 남모르는 설움이 생기더라.

옥련이가 집에 돌아와서 문 열고 들어오면서,

"어머니, 나는 졸업장 맡았소."

"이제는 공부 다 하였으니 어미를 먹여살려라. 공부를 네가 한 듯하냐? 

 내가 시키지 아니하였으면 공부가 다 무엇이냐.
 네가 조선서 자랐으면 곧 공부하는 구경도 못하였을 것이다.
 네 운수 좋으려고 일청전쟁이 난 것이다. 

네 운수 좋았으나 내 운수만  글렀다. 

너 하나 공부시키려고 허구한 세월에 이 고생을 하고 있다."

부인이 덕색의 말이 퍼부어 나오니 옥련이가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생각한즉, 겨우 소학교 졸업한 계집아이가 제 힘으로는
정상 부인을 공양할 수도 없고, 정상 부인의 힘을 또 입으면서
공부하기도 싫고 한 가지 생각만 난다.
이 세상을 얼른 버려 정상 부인의 눈에 보이지 말고 하루바삐 황천에
가서 난리 중에 죽은 부모를 만나리라 결심하고 천연한 모양으로
부인에게 좋은 말로 대답하고, 
그날 밤에 물에 빠져 죽을 차로 대판 항구에로 나가다가
항구에 사람이 많은 고로 사람 없는 곳을 찾아간다.

어스름 달밤은 가깝게 있는 사람을 알아볼 만한데,
이리 가도 사람이 있고 저리로 가도 사람이라.
옥련이가 동으로 가다가 돌쳐서서 서쪽으로 향하다가 도로 돌쳐서서
머뭇머뭇하는 모양이 대단히 수상한지라.

등뒤에서 웬 사람이 이애 이애 부르는데, 돌아다본즉 순검이라.
옥련이가 소스라쳐 놀라 얼른 대답을 못하니 순검이 더욱 의심이 나서
앞에 와 서서 말을 묻는다. 옥련이가 대답할 말이 없어서
억지로 꾸며 대답하되, 권공장(勸工場)에 무엇을 사러 나왔다가
집을 잃고 찾아다닌다 하니, 순검이 다시 의심 없이 옥련의 집 통수를
묻더니 옥련이를 데리고 옥련이 집에 와서 정상 부인에게
옥련이가 집 잃었던 사기를 말하니, 부인이 순검에게 사례하여
작별하고 옥련이를 방으로 불러 앉히고 말을 묻는다.

"이애, 네가 무슨 일이 있어서 이 밤중에 항구에 나갔더냐.
 미친 사람이 아니어든 동으로 가다 서으로 가다 남으로 북으로
 온 대판을 헤매더라 하니 무엇하러 나갔더냐.
 너 같은 딸 두었다가 망신하기 쉽겠다. 신문 거리만 되겠다."

그러한 꾸지람을 눈이 빠지도록 듣고 있으나 옥련이는 한 번
정한 마음이 있는 고로 설움이 더할 것도 없고 내일 밤 되기만
기다린다.

그날 밤에 부인은 과부 설움으로 잠이 들지 못하여 누웠다가 일어나서
껐던 불을 다시 켜고 소설 한 권을 보다가 그 책을 놓고
우두커니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하는 모양이라.

윗목에서 상직(上直) 잠 자던 노파가 벌떡 일어나더니 하는 말이,

"아씨, 왜 주무시다가 일어나셨읍니까?"

"팔자 사납고 근심 많은 사람이 잠이 잘 오나."

"아씨께서 팔자 한탄하실 것이 무엇 있읍니까. 지금도 좋은 도리를
 하시면 좋아질 것이올시다. 이때까지 혼자 고생하신 것도
 작은아씨 하나를 위하여 그리하신 것이 아니오니까."

"글쎄 말일세. 남의 자식을 위하여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
  내가 병신이지."

"그러하거든 작은아씨가 아씨를 고마운 줄이야 알면 좋지마는,
  고마워하기는 고사하고 아씨 보면 곁눈질만 살살 하고
  아씨를 진저리를 내는 모양이올시다."

"글쎄 말일세. 내가 저 하나를 위하여 가려 하던 시집도 아니 가고
 삼 년 사 년을 이 고생을 하고 있으니 아무리 어린것일지라도
 나를 고마운 줄 알 터인데 고것 그리 발칙하게 구네그려.
 오늘 밤 일로 말하더라도 이상한 일이 아닌가. 어린 것이 이 밤중에
 무엇 하러 항구에를 나갔단 말인가. 물에나 빠져 죽으려고 갔던지
 모르겠지마는, 내가 제게 무엇을 그리 몹시 굴어서 제가 설운 마음이
 있어 죽으려 하였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하여도 모를 일일세.
 만일 죽고 보면 세상 사람들은 내가 구박이나 한 줄로 알겠지.
 그런 못된 것이 있나."

"죽기는 무엇을 죽어요. 죽을 터이면 남 못 보는 곳에 가서 죽지.
 이리 가다가 저리 가다가 대판 바닥을 다 다니다가 순검의 눈에
 띄겠읍니까. 아씨의 몹쓸 흠만 드러낼 마음으로 그러한 것이올시다.
 아씨께서는 고생만 하시고 댁에 계셔도 쓸데없읍니다.
 아씨께서 가시려면 진작 가셔야지, 한 나이라도 젊으셨을 때에
 가셔야 합니다. 할미는 나이 오십이 되고 머리가 희뜩희뜩하여
 생각하면 어느틈에 나이를 이렇게 먹었던지 세월같이 무정하고
 덧없는 것은 없읍니다."

"남도 저렇게 늙었으니 낸들 아니 늙고 평생에 이 모양으로만 있겠나.
 어디든지 내 몸 하나 가서 고생 아니할 곳이 있으면
 내일이라도 가고 모레라도 가겠다."

부인과 노파는 옥련이가 잠이 든 줄 알고 하는 말인지,
잠이 들었든지 아니 들었든지 말을 듣든지 말든지 관계없이 하는
말인지, 부인이 옥련이를 버리고 시집 가기로 결심하고 하는 말이다.

옥련이는 그날 밤에 물에 빠져 죽으러 나갔다가 죽지도 못하고
순검에게 붙들려 들어와서 정상 부인 앞에서 잠을 자는데,
소리를 삼키고 눈물을 흘리다가 정신이 혼혼하여 잠이 잠깐 들었는데
일몽(一夢)을 얻었더라.

옥련이가 죽으려고 평양 대동강으로 찾아 나가는데 걸음이 걸리지
아니하여 대동강이 보이면서 갈 수가 없어서 애를 무수히 쓰는데
홀연히 등뒤에서 옥련아 옥련아 부르는 소리가 들리거늘 돌아다보니
옥련의 어머니라. 별로 반가운 줄도 모르고 하는 말이,
어머니는 어디로 가시오. 나는 오늘 물에 빠져 죽으러 나왔소 하니,
옥련의 모친이 하는 말이 이애 죽지 말아라,
너의 아버지께서 너 보고 싶다 하는 편지를 하셨더라.

하는 말끝을 마치지 못하여, 정상 부인의 앞에서
노파가 자다가 일어나면서, 아씨 왜 주무시다가 일어났읍니까,
하는 소리에 옥련이가 잠이 깨었는데, 그 잠이 다시 들어서 그 꿈을
이어 꾸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하나
정상 부인과 노파가 받고 차기로 옥련이 말만 하니,
정신이 번쩍 나고 잠이 다 달아나서 그 꿈을 이어 보지 못할지라.

불빛을 등지고 드러누웠는데, 귀에 들리나니 가슴 아픈 소리라.
노파는 부인의 마음 좋도록만 말하니, 부인은 하룻밤 내에
노파와 어찌 그리 정이 들었던지, 노파더러 하는 말이,

"여보게, 내가 어디로 가든지 자네는 데리고 갈 터이니
   그리 알고 있으라."

하니 노파의 대답이,

"아씨께서 가실 것은 무엇 있읍니까. 서방님이 이 댁에로 오시지요.
  아씨는 시댁 간다 하지 말고 서방님이 장가오신다 합시오.
  아씨께서 재물도 있고 이러한 좋은 집도 있으니,
  서방님 되시는 이가 재물은 있든지 없든지 마음만 착하시면
  좋겠읍니다. 작은아씨는 어디로 쫓아 보내시면 그만이지요.
  할미는 죽기 전에 아씨만 모시고 있겠으니 구박이나 맙시오."

부인이 할미더러 포도주 한 병을 가져오라 하면서 하는 말이,

"자네 말을 들으니 내 속이 시원하고 내 근심이 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네. 내가 아무리 무정한들 자네 구박이야 하겠나.
 술이나 먹고 잠이나 자세."

하더니 포도주 한 병을 둘이 다 따라 먹고 드러눕더니
부인과 노파가 잠이 깊이 드는 모양이더라.
자명종은 새로 세시를 땅땅 치는데 노파의 코고는 소리는 반자를
울린다. 옥련이가 일어나서 한참을 가만히 앉아서
노파의 드러누운 것을 흘겨보며 하는 말이,

"이 몹쓸 늙은 여우야, 사람을 몇이나 잡아먹고 이때까지 살았느냐.
  나는 너 보기 싫어 급히 죽겠다.
  너는 저 모양으로 백 년만 더 살아라."

하더니 다시 머리 들어 정상 부인을 보며 하는 말이,

"내 몸을 낳은 사람은 평양 아버지 평양 어머니요,
 내 몸을 살려서 기른 사람은 정상 아버지와 대판 어머니라.
 내 팔자 기박하여 난리중에 부모 잃고, 내 운수 불길하여 전쟁중에
 정상 아버지가 돌아가니, 어리고 약한 이내 몸이 만리 타국에서
 대판 어머니만 믿고 살았소.
 내 몸이 어머니의 그러한 은혜를 입었는데, 내 몸을 인연하여
 어머니 근심되고 어머니 고생되면 그것은 옥련의 죄올시다.
 옥련이가 살아서는 어머니 은혜를 갚을 수가 없소.
 하루바삐, 한시바삐, 바삐 죽었으면 어머니에게 걱정되지 아니하고
 내 근심도 잊어 모르겠소. 어머니, 나는 가오.
 부디 근심 말고 지내시오."

하면서 눈물이 비오듯 하다가 한참 진정하여 일어나더니
 문을 열고 나가니 가려는 길은 황천이라.

항구에 다다르니 넓고 깊은 바닷물은 하늘에 닿은 듯한데,
옥련이 가는 곳은 저 길이라. 옥련이가 그 물을 바라보고 하는 말이,

"오냐, 반갑다. 오던 길로 도로 가는구나. 일청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그 전쟁은 우리집에서 혼자 당한 듯이 내 부모는 죽은 곳도 모르고,
 내 몸에는 총을 맞아 죽게 된 것을 정상 군의 손에
 목숨이 도로 살아나서 어용선을 타고 저 바다로 건너왔구나.
 오기는 물 위의 길로 왔거니와 가기는 물 속 길로 가리로다.
 내 몸이 저 물에 빠지거든 이 물에서 썩지 말고 물결 바람결에
 몸이 둥둥 떠서 신호마관(神戶馬關) 지나가서 대마도 앞으로
 조선해협 바라보며 살같이 빨리 가서 진남포로 들어가서
 대동강 하류에서 역류하여 올라가면 평양 북문 볼 것이니
 이 몸이 썩더라도 대동강에서 썩고지고. 물아 부탁하자,
 나는 너를 쫓아간다."

하는 소리에 바닷물은 대답하는 듯이 물소리가 솟아쳐서
천하가 다 물소리 속에 있는 것 같은지라. 옥련이가 정신이 아뜩하여
푹 고꾸라졌다. 설고 원통한 맺힌 마음에 기색을 하였다가 그 기운이
조금 돌면서 그대로 잠이 들어 또 꿈을 꾸었더라.

뒤에서 옥련아 옥련아 부르는 소리만 들리고 사람은 보이지 아니하는데

 옥련의 마음에는 옥련의 어머니라.
이애 죽지 말고 다시 한 번 만나보자 하는 소리에 옥련이가 대답하려고

말을 냅뜨려 한즉, 소리가 나오지 아니하여 애를 쓰다가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옥련이가 정신이 나서 눈을 떠보니 하늘의 별은 총총하고
물소리는 그윽한지라.
기색을 하였든지 잠이 들었든지 정신이 황홀하다.
옥련이가 다시 생각하되, 내가 오늘 밤에 꿈을 두 번이나 꾸었는데,
우리 어머니가 나더러 죽지 말라 하였으니, 우리 어머니가 살아 있는가

 의심이 나서 마음을 진정하여 고쳐 생각한다.

"어머니가 이 세상에 살아 있어서 평생에 내 얼굴 한번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늘이 감동되고 귀신이 돌아보아 내 꿈에 현몽하니
 내가 죽으면 부모에게 불효이라. 고생이 되더라도 참는 것이
 옳은 일이요, 근심이 있더라도 잊어버리는 것이 옳은 일이라. 오냐,
 일곱 살부터 지금까지 고생으로 살았으니 죽지 말고 살았다가
 부모의 얼굴이나 한번 다시 보고 죽으리라."

하고 돌쳐서서 대판으로 다시 들어가니, 그때는 날이 새려 하는 때라,
걸음을 바삐 걸어 정상 군의 집 앞에 가서 들어가지 아니하고
가만히 들은즉 노파의 목소리가 들리는지라.
 
                                                                    이어서 혈의누(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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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의누(血─淚, 하) - 이인직 -

혈의누(血─淚, 하) - 이인직 - "아씨 아씨, 작은아씨가 어디 갔읍니까?" "응 무엇이야, 나는 한잠에 내쳐 자고 이제야 깨었네. 옥련이가 어디로 가. 뒷간에 갔는지 불러 보게." "내가 지금 뒷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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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후의 암담한 모습으로 시작된 [혈의 누]는 

그 후 10년간을 한국과 일본과 미국을 무대로 

옥련의 기구한 운명과 함께 개화기의 시대상을 잘 묘사하고 있다.
 
1906년 7월 22일(연재 시작),
        1906년 10월 10일(연재 종료),
        1907년 3월(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