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문학

2024년 노벨문학상수상 소설가 한강 시(詩) 4편

하얀모자 1 2024. 10. 15. 00:29

 

   서울의 겨울  12 / 시 한강

어느 날 어느 날이 와서
그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
내 가슴 온통 물빛이겠네, 네사랑
내 가슴에 잠겨
차마 숨 못쉬겠네
내가 네 호흡이 되어주지, 네 먹장 입술에
벅찬 숨결이 되어 주지, 네가 온다면 사랑아
올 수만 있다면
살얼음 흐른 내 빰에 너 좋아하던
강물소리
들려주겠네
 
 

얼음꽃/ 시 한강

오래 내리어 뻗어간
그들 뿌리의 몫이리라
하여 뿌리 여윈 나는 단
한 시절의 묏등도
오르지 못하였고 허깨비,
허깨비로 뒹굴다 지친 고갯마루에
무분별한 출분의 꿈만 움터놓았다
모든 미어지는 가슴들이
그들 몫의 미어지는 가슴들이
그들 몫의 미어지는 꽃이라면 
꽃이라면 아아
세상의 끝까지 가리라 했던
죽어, 죽어서라도
보리라 했던 저 숲 너머의 하늘
무엇이 꿈이냐 무엇이
시간이냐 푸르름이냐 빛이냐 나무여,
나무여
잠깐의 참회를 배우기 위해
그토록 많은 세월을 죄지었던가
알 수 없다 알 수
있는 것은 다만 이 목마름을 건너
저 버려진 잡목숲 사이로
몸 번져야 할 일
몸 번져 오래 울어야 할 일
좋다 계절이여 오라
눈발이여
퍼부어라, 이 불타는 수액을
뒤덮어다오, 그 위에
찬란히
춤추어도 좋으니.

(1993년 발표)
  
 
유월/ 시 한강

그러나 희망은 병균 같았다
유채꽃 만발하던 뒤안길에는
빗발이 쓰러뜨린 풀잎, 풀잎들 몸
못 일으키고
얼얼한 것은 가슴만이 아니었다
발바닥만이 아니었다
밤새 앓아 정든 위胃장도 아니었다
무엇이 나를 걷게 햇는가, 무엇이 
내 발에 신을 신기고
등을 떠밀고
맥없이 엎어진 나를
일으켜 세웠는가 깨무는
혀끝을 감싸주었는가
비틀거리는 것은 햇빛이 아니었다,
아름다워라 산천 山川, 빛나는
물살도 아니었다
무엇이 내 속에 앓고 있는가, 무엇이 끝끝내
떠나지 않는가 내 몸은
숙주이니, 병들대로 병들면
떠나려는가
발을 멈추면 
휘청거려도 내 발 대지에 묶어줄
너, 홀씨 흔들리는 꽃들 있었다
거기 피어 있었다
살아라, 살아서
살아 있음을 말하라
나는 귀를 막았지만
귀로 들리는 음성이 아니었다 귀
막을 수 있는 노래가
아니었다 

(1993년 발표 시)
 
 
괜찮아/ 시 한강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
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
배고파서도 아니고 어디가
아파서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해질녘부터 밤까지 꼬박 세 시간

​거품같은 아이가 꺼져버릴까 봐
나는 두 팔로 껴안고
집 안을 수없이 돌며 돌았다
왜 그래.
왜 그래.
왜 그래.
내 눈물이 떨어져
아이의 눈물에 섞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말해봤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거짓말처럼
아이의 눈물이 그치진 않았지만
누그러진 건 오히려
내 울음이었지만, 다만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 그래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