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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자(異端者)
- 이무영 -
3
네로의 포악성에 준은 걷잡을 수 없는 흥분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폈다 하고 있었다. 섰다앉았다
한 것도 몇 번인지 모른다. 일어서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그는 자기 뒤에 수백 명 관중이 앉아 있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양쪽 팔꿈받이를 짚고 엉거주춤 선 채였었다. 뒤에서 앉으라고 소리를
친다. 그는 그 소리를 듣고야 주저앉던 것이었다.
그러나 잘못했다는 의식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앉으라는 고함소리가
나니까 무섭게 찔금해서 주저앉는 것을 보면, 그가 자기의 행동에 대한
판단력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았다.
그러나 인식한 것은 아닌 것이 네로의 포악성이 도를 더할 적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또 궁둥이를 들먹이던 것이다. 네로의 포악이
그 절정에 달했을 때는 준은 전신의 피가 머리로 끓어올라왔다.
얼굴이 확 단다. 숨도 가빴다. 손이, 아니 전신이 부르르 떨고 있었다.
‘인간이 발광을 하는 순간이 이럴 것이다 ─ ’
준은 이런 생각까지도 하며 흥분하는 대로 자신을 내어맡기고 있었던
것이었다. 영화 「쿼바디스」를 보면서였다. 그러나 준이가 놀라고 있는
것은 이 도를 벗어난 흥분에서가 아니다. 그 흥분의 성격에 있다.
‘선’이든 ‘악’이든 그 어떤 격정이 인간에게 육박해올 때는 인간은
누구나가 흥분을 하는 것이 상정일 것이었다. 더욱이 이 영화는 무서운
박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규모도 컸다. 칠백만불이라는 제작비는
어쨌든간에 제작 기간이 십오 년에, 동원 인원이 삼만 명이라는
선전에서 받은 선입감 때문이 아니라 실로 준이가 지금까지 본 영화에서
보지 못한 격정을 일으켜주고 있었다.
가슴이 터지는 것 같은 감격이었다. 흥분이었다.
이 흥분은 포악에 대한 무서운 반항이었을 것이다.
‘악’에 대한 ‘선’의 발악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그것은 또 그랬어야
할 것이었다. 준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믿고 있었다. 아니 이 흥분의
성격은 비판해볼 여지조차도 없는 것이라 했었다. 이 무서운 포악 앞에
항거하고 도전한다는 것은 선량한 인간의 공통된 권리이기 때문이다.
이 무서운 폭력과 악 앞에서도 항거할 줄을 모른다는 것은 비굴 이외의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지나친 비굴은 악과 통한다는 말을 시인한다면
이 악에의 무저항은 그 자체가 곧 악일 것이었다.
네로의 포악을 시인한다는 것은 네로보다도 더 무서운 포악성을 가진
사람이리라. 준도 그 자신 네로와 동렬에 놓여지는 인간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아니 그 자신 요순과 같은 계열의 인간이라 믿어왔었다.
적어도 요순을 존경해온 사람이었다. 탕제를 저주하고 연산군을
증오함으로써 그는 자기란 인간의 위치에 만족해온 사람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준이가 이 흥분을 표현한 말은 실로 뜻밖의 말이었다.
그것은 실로 의외였다. 그 자신 예기치도 못한 용어다.
용납할 수도 없는 표현이었던 것이다. 준은 네로의 포악성이 그 실감을
더해갈 때마다 “잘한다!”를 연발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잘한다! 잘해”
무서운 착오였다. 물론 무의식중이다.
그러나 무의식중인 것이 큰 문제다. 의식하고 판단함이 없는 것을
본능이란다면, 지금까지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 감격은
그의 본능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네로의 포악에의 긍정은 아니,
뇌동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다만 인간이 이렇게도 포악성의
인종이었던가? 준은 갈가리 찢겨 죽은 자기 자신의 시신을 발견하고
놀라던 어떤 외국 소설의 주인공의 경악에 자기를 비해 보면서 인간이
생긴 이대로 최대의 폭군이었다는 네로의 포악성을 밟고 올라선 저기
자신을 응시하고 있던 것이다. 몸서리가 쪽 치인다. 아무리 변명해도
그것은 악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 포악과 파괴에서 느끼는 쾌감이었었다.
준은 어린것의 둔종 수술에 입회한 일이 있었다.
어린것은 며칠을 두고 잠을 못 잤었다. 둔종을 발견한 것은 의사의
꾸지람을 듣도록 뒤늦은 때였었다.
어린것이 아직 말도 못할 때의 일이다. 벌써 이십 년 전이었다.
외과의는 예리한 칼을 들고 왔었다.
밤이기도 했었지만 그 예리한 칼에서 반사하는 섬광은 그대로 하이얀
공포였었다. 칼로 사람의, 그것도 말조차 못하는 어린것의 볼기짝을
가르는 이 무서운 ‘악’이 ‘선’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일주일을 두고 띠잉띠잉 곪은 종기에서는 피고름이 분수처럼
터져나왔었다. 위대한 악은 위대한 선으로 돌변했었다.
그 순간에 경험한 감격을 인류문화에 극치를 다한 대로마와, 수만의
인간을 그대로 불바다로 만들어버리는 네로의 위대한 악 앞에서 또한
느끼고 있는 준이었다.
‘이것이 나란 인간의 본자태인지도 모른다.’
준의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요순을 우러러보고, 요순을 닮자 하고,
어떤 때는 나 자신을 요순과 선에 비하고 했던 것은 모두가 자기
기만이요, 위선이었던지도 모른다. 네로와 같은 악의, 아니 네로의
포악성을 딛고 올라설 수 있는 나 자신의 악을 은폐하기 위한
위선이었던지도 모른다!’
준은 지금 왜정 말기에 B 29를 예찬한 국민학교의 교장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팔월초였고 보니 악이 선한테 무자비한 응징을 받고
있을 때였다. B 29는 매일, 아니 하루에도 몇 차례씩 날아와서
악과 악의 소굴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런 어느 날 아침이었다.
열시는 되어서였을 것이다. 준은 학교 뒷산으로 올라갔었다.
마침 교장이 산마루턱에 앉아 있었다. 그때 폭음이 들려왔다. B 29였다.
수리산을 넘어오는 것을 보면 경인 지구의 왜의 군수 공장이거나
군사시설을 폭격하고 기지로 돌아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에 약 오천 미터 높이로 뜬 B 29는
쪽빛 바다에 뜬 하얀 여객선처럼 고와 보였다.
두 줄기 비행운(飛行雲)은 실로 장관이었다.
“참, 이쁘군요! 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다운가!”
교장이 말한 감격이었다. 물론 그는 일인이었다.
‘미영축생’(米英畜生) 교육의 본거인 교장의 입에서 이런 말이
툭 튀어나왔던 것이다. 그는 무의식중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그 말을 하고 나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더욱이 상대방이 ‘센징’인
준이었고 또 무지막지한 농군이 아니라 지식인이었던 것이다.
그 준이 앞에서 ‘미영축생’의 비행기를 감격으로 예찬한 것이다.
“저런 죽일 놈들!”
이렇게 저주했어도 부족했을 그가 곱다고 한 것이다. 이쁘지 않느냐고
동의까지 구했던 것이다. 그러니 낭패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교장은 금방 이렇게 정정했던 것이다.
“허지만 밉군요!”
이런 경우의 나중 말은 아무런 효과도 못 내는 말이다. 자기의 위치를
검토하고서의 비판이었다. 적어도 무의식에서 풀쑥 튀어나온 이쁘다는
감동보다는 인위적이요, 또 위선과 통할 수 있는 말이었었다.
그리고 그는 이 나중 말이 위선이었다는 것을 그 자신이 증명해주기까지
했었다. 해방이 되자 그는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고 말았었다.
공산당은 아니지만 반제국주의자였다는 것이 수원 지방에서 지하 운동을
한 M에 의하여 입증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M한테 금전까지 제공해온
심퍼였었다. 이 일인 교장의 무의식의 감탄은, 그대로 지금의
준의 무의식과 통하는 것이었다. 준은 또 한번 진저리가 치어졌었다.
극은 전진하고 있었다.
한 인간의 조그만 가슴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흥분과 격정의
선풍을 일으키면서 네로의 포악성은 고조되어 갔고 발전해가고 있었다.
극의 전진에 따라서 준은 네로의 횡포에 완전히 동화되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린것의 둔종에서 피고름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던 때의 그 감격이었고 쾌감이었다. 대로마가 불바다가
된 장면이 스크린의 전부를 채우자 준은 몸부림이 치어졌었다.
몸이 비이비이틀린다. 길길이 뛰며 고함을 치고 싶었다.
아니 그런 격정이 그의 가슴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의 가슴속은 폭포의 물확처럼 뒤집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성인이었었다. 지성인이기도 했다.
그 지성의 제재를 받아야만 했다. 이 자연스럽지 못한 지성의 본능에
그는 몸부림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무서운 화염이다. 스크린 전체가 불이다. 스크린 자체가 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었다. 이 무서운 화염 속에서 일체가 소멸하고 있었다.
문화도, 선도 그리고 악도, 미도, 연애도, 질서도, 모략도, 중상도,
아첨도, 포옹도, 키스도, 지위도, 명예도…
준은 이 무서운 장면이 바뀔까 겁을 내고 있었다.
좀더 오래 계속되었으면 했다. 그는 일체의 문화와 야만과 선과 미가
악과 위선이 붕괴되고, 파멸되고, 소진되고, 멸망해가는 자태를
더 오래 즐기고 싶었다. 자기만의 영달을 위해서 감행한 갖은 악의
최후를 좀더 오래 망견하고 싶었다. 독사의 혀끝같은 화염 끝에서
강정이 되는 악의 실태를 그는 보고 있었다.
어느새 그럴 때마다 그는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잘한다!”
그는 외치고 있었다.
“신이 난다! 신바람이!”
그런데 여기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 것이었다. 이 천년의 세월이 뛰어
로마가 서울이 된 것이었다. 서울의 S극장이 되었고
그 자신이 앉아 있는 이층 중앙으로 변한 것이었다.
결코 그것은 환각이 아니었었다. 굳건한 아주 확실한 의식이었다.
그는 그의 주위에 흐트러져 있는 ─ 어떻게 하면 자기만이 잘살고
편하고 호화로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놈을 모략해서 내가
그 자리에 가고, 그자를 지옥의 불가마 속에다 거꾸로 집어넣을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뇌물을 더 많이, 아주 단시간에 받아서 지폐 위에
올라앉아서 서울 장안을 내려다보고 한번 커다랗게 웃어볼 수가
있을까 ─ 이렇게 도사리고 앉아서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로 환각이 아니었다. 그 도둑고양이 그대로의 상판의
잔주름살까지를 준은 역력히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오십 년 동안 살아오면서 본 갖은 악의 화신들은 하나씩 둘씩
불꽃 끝에서 최후의 춤을 추고는 없어지고 없어지고 하는 것이었다.
진물이 지일지일 흐르고 그 진물이 도는 살을 뚫고 나온 구더기가 죽은
굼벵이 시체에 엉겨든 불개미떼처럼 덕지덕지 붙은 송장을 볼 때보다도
더 추악한 상판들이었다. 처음 한동안 그가 목격한 그 상판들은 그가
오십 년 동안에 보아온 얼굴이 대부분이었다.
그를 고문해서 까무러치게 했던 왜정 때의 곰보 형사도 있었다.
겨울이었었다. 그것도 새벽 한시다. 동대문의 곰보라면 독하기로 이름이
난 자였었다. 그는 발가벗겨졌었다. 사루마다까지도. 그리고 격검대로
내려치던 것이다. 대와 대 사이에 살이 끼었었다. 그것을 비틀면 살점이
척척 묻어났다. 격검대에도 볼기짝에도 살점이 너털거렸다.
그러면 손으로 뚝뚝 잡아떼어 팽개를 치며 때리던 독종이었다.
견디다 못해서 변절한 그 자신의 상판대기도 목격되었었다. 왜정 말기에
무엇이 그렇게도 아까운 인생이라고 왜말로 소설을 써서 양심있는
모든 작가들이 콧물만 초올초올 흘리고 앉았을 때 광화문통이 좁다고
어깨를 젖히고 다니던 그 자신의 보기 추한 꼬락서니였다.
조선 민족은 위대한 소련의 연방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공산주의자의 수많은 얼굴도 보였었다. 간에 가 붙고 쓸개에 가 붙고
한 박쥐들의 생쥐 같은 낯짝들도 보였고 해방 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팔면서 쥐꼬리만한 영어로 군정청의 악질 관리 꽁무니를
따라다니어 치부를 한 장로도 있었다. 6·25 때는 대한민국의 욕을
직사하게 하고서 9·28이 되니까 제일 앞잡이로 나서서 자기의 정체를
알 만한 친구들을 모조리 빨갱이로 몰아넣던 낯짝도 보였었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서 순금상에 금주전자를 장만했다는
말까지 떠돌게 하던 관리도 있었다.
대통령께는 농촌에서는 요순시대처럼 격양가만 부른다고 거짓말만 하고
백성들한테는 비료를 준다. 싸게 준다, 언제 준다, 때맞추어 준다,
갖은 허위 서명만 뻔질나게 발표하다가 쫓겨난 고관들이 보기에 추한
개기름 흐르는 상판들도 끼여 있었다. 그밖에는 이름도 모를 사람들이
횃불 끝에 재주를 넘고 타죽어 버리는 날벌레처럼 소진되고 소멸하던
것이었다. 이천 년 전 대로마를 불사른 불길이 이 땅을 좀먹고 있는
악을 소진시켜주고 있던 것이었다. 대로마가 타버린 잿더미 위에 오늘
이십세기 문명의 개화를 본 것이다.
이 불길은 오늘날의 우리 민족을 좀먹는 갖은, 아니 일체의 악을
불사르고 새로운 그리고 위대한 대한민국이 설 지반을 닦아주고 있는 것
같은 환각이었었다. 탈 바에는 모든 것이 다 타버려야 한다 했다.
썩은 기둥 위에 기와를 얹을 수는 없다 했다. 모래 위에 성을 쌓아서
무엇을 하랴. 악이 남아서 좋은 일이란 있을 수 없지 않으냐.
일체의 악이, 일체의 모략이, 그리고 일체의 비굴이 다 타버려야 한다.
아편처럼 민족을 좀먹고 있는 통속소설을 써 먹고 사는 그 자신도
이통에 잿강정이 되어야 한다 했었다. 아니 이런 모든 민족의암은 지금
타고 있던 것이다. 준은 화면이 갈릴까봐 안타까웠다.
탈 것이 ─ 타야만 했다. 탈 것이 다 타기도 전에 화면이 없어질까
초조했었다. 어째서 불길은 저렇게도 약한가 했다.
어째서 스크린 안에서만 타고 있는 것일까. 스크린의 면적만이 아니고
스크린이 붙은 벽 전면에 어째서 불길은 퍼지지 못하나 했다 .
아니 이 극장 자체가 어째서 불덩이가 되지 못하나. 이 안에는 아직도
수많은 민족의 암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었었다. 현재 이 극장 어느
구석에도 무서운 악은 민족에게 끼친 돈으로 점심을 먹었고
또 그 돈으로 표를 사가지고 왔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던 것이었다.
준은 「선풍」이라는 단편을 읽었었다. 나이 사십이 넘은 중년 부인인
형수가 열다섯 먹은 시동생과 성행위를 향락하는 그런 이야기였다.
그러나 시동생한테는 또 딴 애인이 있었다. 부리는 계집애다.
복희라는 이름이었다. 이 복희를 끼고 자는데 형수가 나타나서 질투를
하는 이야기다. 이런 내용이라야 팔렸고 잡지사에서 좋아했었다.
이런 악도 불살라져야만 한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준은 확실히 그것을 실은 잡지가 화염 끝에 둔갑을 치며 타는 것을
목격했었다. 정말 후련했다. 기뻤다. 가슴이 뻐근하다.
통쾌한 일이었었다.
그때 장면이 홱 바뀌고 말았었다.
준은 꺼림칙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뒤를 보고 밑을 못 씻던 때 같은 꺼림칙이다.
빈방 안에 다 타가던 촛불을 그대로 두고 온 때 같은 불안이다.
책상 위에는 종이가 흐트러져 있다. 그 옆에는 휘발유도 있다.
그것을 끈다 끈다 하면서 어쩌다 그대로 와버린 때의 그런 꺼림칙이다.
이천 년 전 대로마를 불사른 불길은 이천 년 후 서울 한복판에서
연소되어 이 나라 이 민족의 일체의 악을 불살랐을 것이었었다.
악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선이 멸망했다는 말일 것이다.
악과 선은 물과 기름일 것이요, 불과 물처럼 상극일 것이었다.
네로의 학정이 용인되었다는 것은 악이 선보다 우세했음을
의미함이었으리라. 그러나 대로마가 불바다가 되었다는 사실을 반드시
악의 개가 라고마는 해석할 수도 없지 않을까.
대로마에 불을 지른 것은 폭군 네로였었다. 이것으로써 악이 이겼다고만
단정한다는 것은 역시 경솔한 판단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네로가 대로마에 불을 지른 동기는 ‘선’의 소각에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더 많이 탄 것은 선보다는 악일 것이다. 악이 불을지를 수
있었다는 것은 그 당시의 대로마는 그 자체 안에 선보다도 악이 더
득세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그렇다, 하나의 선을 소각하기
위해서 아홉의 악이 탄 것이었다. 네로는 그저 폭군이요
악의 화신이라고만 인정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 준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보고 앉아 있다.
준은 대로마는 다 타버리고 없다 했다.
일체가 다 타버린 로마에는 새것이 나리라. 새싹이, 선의 새싹이.
준은 그 새봄을 보았다고 생각했었다. 정녕 보았었다. 네로의 폭소에서.
그리고 그의 비명에서 ─ 그 비명은 잿더미를 헤치고 풀쑥 솟아오른
새싹 앞에 굴복하는 비명이었었다. 그것은 선의 개가였다.
이 새싹을 바라본다는 것은 위대한 환희였다. 기쁨이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소리를 치며 기뻐해야 할 그의 기쁨에 뿌우연 연막을 치는 것이
있었다. 처음에는 환각인가 했었다. 그러나 아니다. 분명히 뿌옇다.
옥에 티같은 존재였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고 준은 화면을 뒤지는
것이었다. 분명히 화면을 흐리게 하고 있다. 새로 세워지는 대로마의
전모를 선명하게 관찰할 수 없게 하는 연막이었다. 준은 그것의 정체를
찾느라고 애를 썼다. 초초하니 화면을 살펴보았다. 없다.
가슴속을 헤쳐 보았다. 없다. 머릿속을 들거울렀다. 없다. 다시 보았다.
역시 없었다. 역시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단념이 가지 않던 것이었다.
절대로 그의 착각이 아니다. 환각도 아니었다. 정녕코 보았었다.
다만 그것의 위치를 찾지 못할 뿐이었다. 정말 꺼림칙하다. 불만했다.
옆을 보았다. 없다. 모르겠다. 뒤를 돌아다보았다. 역시 모르겠다.
그러면서 그의 의식은, 지각은 절대로 보았다는 사실을 고집하는
것이었었다. 준은 다시 앞으로 머리를 돌렸다. 있다.
기어코 그는 발견하고야 말았었다.
잿더미가 된 대로마 뒤에 오는 장면은
위대한 창조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일체의 악이 소진해버린 터에 선한
새싹이 부쩍부쩍 자라 올라오는 대견한, 아니 가슴 뻐근한 신생의
기쁨이었을 것이었었다.
이 위대한 재생의 모습에 연막을 쳐서 잘 보이지 않게 하는 또 하나의
악을 준이는 발견해냈던 것이다.
그것은 오늘의 악을 기러낸 싹이었었고 대로마 이후 모락모락 자란
싹이었었다.그 싹에서 많은 악의 꽃이 피었었고 열매를 맺게 한 싹이다.
연산군도 그 열매의 하나였고 카이제르와 히틀러와 도오죠(東條)가 역시
그랬다. 이 악의 열매의 하나를 준은 지금 또 발견한 것이었었다.
이 악의 열매는 그로부터 불과 몇 피트 전면에 있었다.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의 회담으로 해방이 된 이 민족을 오늘과 같이
동강난 불행한 민족으로 만들어놓은 악의 화신이 바로 그가 앉은
자리로부터 셋째 앞 의자에 버티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삼십대까지도 아직 가지 못했음직한 젊은 녀석이었다.
애인인지도 모른다. 아내인지도 모른다.
데리고 노는 기생인지도 모른다. 남편 몰래 뒷구멍으로 도둑고양이처럼
젊은 사내들의 입술을 핥고 다니는 궐녀인지도 모른다.
그 악의 또 하나의 열매는 이 젊은 여자와 같이 온 고양이였다.
대리석처럼 흰 여자였다. 그 여자는 연상 재잘거리면 악의 열매를 보고
웃고 한다. 잘강잘강 껌을 씹으면서였다. 착살맞게도 잘강거린다.
좋아서 얄을 떤다는 것이 사나이의 귀나 물어뜯고 할퀴고 암내난
짐승처럼 깨우거릴 그런 체신의 여자다.
그런 여자일 것을 연상케 하는 껌 씹는 소리다.
‘저 인간을 어떻게 처치하면 속이 시원할꼬?’
준은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버렸었다.
그는 벌써 영화를 보고 있지 않았었다. 오직 이 생각뿐이다.
결론은 벌써 내려져 있었다. 이런 악의 열매는 이 민족으로부터
제거해야 한다는 결론이었었다. 따버려야 했다. 그대로 버리면 또 싹이
틀지 모르니까 아주 소멸시켜야 한다 했다. 그 소멸시키는 방법에는
준은 골몰하고 있던 것이다.
준은 집채만큼 쌓아올린 장작더미를 상상해보고 있다.
거기에 기름을 붓는다. 전국에 방을 돌린다. 세게 각국에 참관자들을
초대한다. 그러나 그는 아차 했다. 그 많은 ─ 어쩌면 몇 천만이 될지
몇 억이 될지도 모르는 인간들이 이 광경을 볼 수 있게 하는 장치도
고려해야겠다는 생각에서다. 남산도 생각해보았었다.
그러나 키대로 서지 않는 이상 이 많은 사람이 다 볼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많은 계단 장치를 할 수는 없다.
‘남산 꼭대기에다 장작을 쌓지!’
준은 이렇게 결정을 지었었다.
시일은 팔월 십오일 정오 정각으로 했다.
이 민족이 네로의 후예인 히틀러와 도오죠한테서 사슬이 풀리던 이날
이 순간이 가장 의의가 깊다고 생각한다.
다음에는 이 사나이를 발가벗긴다. 그래서 장작더미 위에다 앉히고
전국 아니 전세계에서 들을 수 있도록 중계 방송을 한다.
‘우리 나라에도 텔레비전이 있다면 오죽 좋을꼬? 전세계가 앉아서
볼 수 있을 것인데 ─’
그러나 그까짓 것은 어쨌든 좋다 싶다. 이 나라에 아직 없는 것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다만 문제는 이 사나이의 죄상을 어떻게
성문화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했다. 장작더미에 불을 지르기
전에 전국민한테 이자의 죄상을 공포해야만 한다 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젊은 사람이 저지른 죄가 그렇게 큰죄라고
시인해주지 않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형이란다면
인간이 만든 형벌 중에 가장 가혹한 형벌이다. 극장 안에서 담배 좀
피웠기로 사형은 과하지 않느냐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형에도 종류가 있다. 기름 장작 위에다 올려놓고 태워 죽인다?
그것은 과하다. 대체로 극장에서 담배 좀 피웠기로 사형을 한다는 것은
유사 이래로 없던 일이요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권유린 정도가 아니다. ‘이것은 광적이다 ─’
이렇게 반기를 들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준의 공상은 이 무죄론자들로 하여금 대중이 모인 극장 안에서
담배를 피운 이 청년이 사형을 받는 데 대해서 조그만 이의도 갖지
않도록 설복할 의무가 느끼고 이의 논고문을 작성해보는 것이다.
‘우리 국민이나 외국에서 오신 여러분의 대부분이 이 청년이
범한 죄상 ─ 즉 극장 안에서 담배를 피웠다는 죄상만으로써는 그의
사형 집행이 지나친 처사라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만 본관의 견해는
다른 것입니다 ─ 물론 그렇게도 생각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극장에서 담배 좀 피웠기로니 사형은 과하다. 그러나 아닙니다.
본관은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지 않는 것이 이 청년이
범한 죄는 여러분 말씀대로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 민족을
불행하게 한 악의 씨입니다. 극장 안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도록
국법에 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어기었습니다. 극장은 공중이
모이는 장소입니다. 자기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자리입니다. 이 공중 집회 장소에서 이 청년은 담배를 피웠습니다.
연기가 스크린과 공기를 흐리게 했습니다. 불과 두 시간 남짓한 시간을
참지 못해서 자기가 아닌 많은 사람들께 피해를 준 것입니다.
마이크에서 자꾸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도 그는 피웠습니다. 이런 것이 ─ 국법을 무시할 수 있고 여러
사람을 희생시키어서라도 자기 하나만 편하고 잘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마음, 아니 그것이 무슨 특권인 것처럼 되레 자랑을 삼으려는
그 심사 ─ 이 생각이 바로 우리 민족과 국가를 좀먹는 악의 열매인
것입니다. 이 생각이 크고 자라서 공산당이 되었고 탐관오리가 되고,
모리배가 되고, 간상이 되고, 밀수를 하고, 중립화를 꾀하고,
학원 모리를 하고, 받지 않으면 도장을 안 찍어주고, 남을 모해하고,
한푼도 없는 예금에 잔고 증명을 해주고서 액면의 일할 이자를 꼬박꼬박
받아먹고, 탈세를 하고, 첩을 두고, 간음을 하고, 아편을 빨고,
젖꼭지 소설을 일삼고, 우리의 강토를 소련놈한테 팔아먹을 공작을 하고
국가 원수를 속이고 백성을 배반하고 ─
그래서 결국은 우리 국가와 민족을 멸망케 하는 가장 근본적인 죄악의
온상이 되는 것입니다. 극장 안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사람의
도리요, 국민의 도의요, 국법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용인한다는 것은 곧 탐관오리를 용인하는 것이요, 간상, 모리를
묵인하는 것이요, 국토를 팔겠다는 공산당원을 조장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냉정히 비판해야 될 것입니다. 해방 후 우리가 통일이
못 되고 이 박사께서 그렇게 한데 뭉치자 호소했어도 갈리고 그래도
결국은 국토가 반동강이 난 채 십 년이 되었다는 것도 이 그릇된 심보의
연장이었던 것입니다. 이 그릇된 생각과 통하는 모든 사실 중의 어느 한
가지라도 좋습니다. 극장이나 버스 안에서 피우지 말라는 담배를
안 피우게 됐다거나, 단 한 사람이라도 받지 않고는 도장을 안 찍어주는
사람이 우리 대한민국에서 찾아볼 수 없이 됐다고 한다면 그 순간이
바로 우리 나라가 낙토가 된 순간이요, 통일이 된 순간일 것입니다.
이 청년이 범한 죄는 이렇게 큰 것입니다. 이 범죄가 곧 공산당과
통하는 생각입니다. 본관은 단언하는 바입니다. 이런 청년 ─ 극장에서
담배를 뻐억뻐억 빨고 앉아서도 뉘우치기는커녕 되레 잘났느니라 뻐기는
위인이 우리 나라에서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이 된 그 순간이 바로
양단되었던 우리 국토가 통일되는 ─’
준의 공상은 여기서 탁 끊기고 말았다.
영화가 끝이 난 것이었다.
“대체로 요새의 당신의 정신상태는 정상적이 못 되셔요. 좀 쉬셔야 해.
내게 대한 불평이란 것은 그때문이오. 단지 셋밖에 없던 친구들께
절연장을 보낸다든가, 아침에 장님을 만났다구 해서 왼종일 자동차
사고로 치여 죽지나 않나 하는 불안에 옆에서 보기에도 딱할 만큼 벌벌
떤다든가. 그럴 아무런 이유도 없으면서 혼자 이불 속에서
느껴 운다든가, 모두가 당신의 정신 상태가 정상적이 아니라는 증거지
뭐야요? 제삼자가 보면 정말 우습거든. 웃을 꺼야요.
당신의 절교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지금 픽픽 웃고 있을 껄요?
지금이 어느 세상인데 이해 관계 없이 살도 베어먹일 그런 우정을
남한테 요구해요? 이 사람이 정신 분열증이 생겼나 ─
그러구 모여앉아서 껄껄 대구 웃고 있을 께요. 지금쯤은 ─ 접때만 해두
그렇죠. 버스에 너무 사람을 많이 태운다고 차장 아이를 어떻게 하느니,
버스간에서 담배 피운 녀석이 보기 싫다고 도로 들어오신다든가,
터무니없는 찻값을 달란다고 택시 운전사의 등에다 북을 메워가지구
서울 장안에 맴을 돌리면 한다든가 ─ 그것도 홧김에 한마디 해버릴 순
있죠. 허지만 요새의 당신은 그것이 아니거든요! 그런 조그만 일에
노심을 하거든! 내무장관한테 편지를 쓴다든가, 대통령께 진정을 해서
바로잡게 한다든가 ─ 이런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니 정상적이 아니지
뭡니까. 버스 안에서 담배 피웠다고 내무장관한테 데리고 가보셔요.
아마 순경들이 당신을 정신병원으로 태워갈 껍니다.
지금 얘기만 해두 그렇죠. 그래 극장에서 담배를 피웠다고 남산 위에다
장작을 쌓아놓구, 이단적야요, 그러니까 ─”
“입 닥쳐!”
준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내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자신 이 잔졸한 몸 어디서 그렇게 큰 소리가 나왔는지 놀랐을
정도였었다. 이 한마디 소리를 치는데 그의 몸은 잠시 허공에 부웅
뜨기도 했던 것이었다.
아내는 몹시 놀란 모양이었다. 놀람이 가라앉더니 눈물이 흐른다.
그러면서도 극진히 남편을 아끼는 아내는.
“정말 좀 푸욱 쉬셔야겠어요. 아무것도 읽도 쓰도 말구, 당분간 자시구
싶은 것 자시구, 가구 싶은 데 가시구… 남처럼 연애라두 좀 하시구려.
그러면 좀 기분 전환이 되겠지.”
“나가 있어요.”
준은 이번에도 조용히 말을 하고 있었다.
“안 쓰고 단 한 달이라도 살 수 있는 팔자가 되어보았으면 좋겠소.
약두 먹구, 당신 말마따나 젊은 여자들과 몰켜두 다니구.
버스나 극장에서 담배 피우는 꼴도 안 보구, 젊은 학생 녀석들이
노인이나 어린애 업은 부인들이 들어가도 떠억 버티고 앉아 있는 꼴두
안 보구. 한 달만 그런대두 살이 찔 것 같소.”
“세상이 그런 걸 안 보구 살 수가 있수, 보구두 못 본 체해야지.
세상이 그렇거니, 그런 게 정상이거니, 그런 것이 정상적인 게
사실이거든요. 그런 것에 신경을 쓰시는 당신이 정상적이 ─”
“제발, 그만 정도로 나가주오. 그런 팔자두 못 되는 사람보구 쉬라느니
어쩌니 하지 말구 내 말에 거슬리지나 말아주오.
그게 날 쉬게 하는 거야. 인간이 정한 법을 일부러 안 지키려 드는
인간이 있다는 것이 어째서 정상적이란 말인지 나는 도저히 모르겠소.
단번에 오십 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였으면서도 만원이 아니라 곱절씩
사람을 태우는 버스가 정상적이오? 이것을 보고도 본체만체하는 것이
정상적이고,
이것을 그르다 하는 나는 정신이상이 생긴 사람이란 말이겠지?”
“사리는 그렇지만.”
“그렇지만?”
“지나치게 신경을 쓴단 말이지요.”
“그런 인간들의 뺨싸대기 한 대 못 때리고 사는 인간인데 ─
어쨌든 나가주오, 내 비윌 거스르지 말아줘요.
그것이 쉬게 해주는 거야. 나 봄엔 내가 정상적이 아닌 게 아니라
당신이 변했소, 당신이 ─ 요 반년 동안 당신이 계를 한다구 돌아다닌
후부터 당신이 변했어요. 내 예언이 맞은 거요. 그렇게 될까봐 그렇게
말린 게요. 그런 것을 나도 모르게 시작했지.
왜 남들이다 계를 떼어먹을 때 뒤늦게 그런 데 발을 들여 놔가지구 ─
변한 건 당신야. 정상적이 아닌 걸 정상적이라구 생각하게쯤 됐다는 게
벌써 변했다는 증좌지. 자, 나가주오, 나 좀 쉬겠소. 쉬게 해주오.
그게 내게 인삼 녹용이오.”
아내는 더 말이 없이 일어나 나간다.
혼자가 되니 준은 해방이 된 기분이었다.
아내란 인간이 이렇게까지 싫어진 것도 최근의 한두 달 전부터다.
정말 이 기분이 그대로 연장이 되어간다면 아내와도 헤어져야만 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었다.
준은 이 반년 동안에 세 사람의 친구를 잃었었다. 셋이 다 극진히
아끼던 친구였었다. 그리고 그 셋이 삼십 년간의 서울생활에서 얻은
친구의 전부이기도 했던 것이다. 하나는 M이었다. 평론가다.
또 하나는 Y다. 시인이었다. 하나는 C였다. 정말 동생처럼 아꼈고
또 형처럼 아껴주던 친구들이었다. 준은 Y와의 어떤 사건을 계기로
이 세 친구들의 우정을 시험해보았던 것이다.
“우정을 저울질해본다는 그 자체가 진실한 우정이 아니지요.
애정이란 맹목적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대가를 바라지 않는 애정,
그것이 진정한 애정이겠지요.”
아내의 말이었다. 아내의 말도 옳았었다.
그러나 준은 불순한 줄 알면서도 우정을 시험해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있었다.
Y와의 사건이란 이런 것이었다.
비가 푸슬거리던 날이다. 준,Y,R 이렇게 셋이서 저녁을 먹으러 갔었다.
그에게는 그날 돈이 없었다. Y도 돈이 없던 차에 인세의 나머지가
들어와서 몰려갔던 것이다. 준은 돈천환만 Y보고 달라 했었다.
Y와는 삼십 년래의 친구였다. 그러나 그의 기억으로는 단 한 번도 서로
손을 벌려본 기억이 없는 터였다.
“아아니, 내가 말을 통 않으니까 내가 여유가 있는 줄 아나? 내 사정도
기가 막혀. 이 사람, 못하겠어, 미안하지만.”
농담이라 했었다. 그러나 농담치고는 너무 정색이었다.
그래도 농이거니 믿었었다. 그래서 얼마 후 또 한마디 했었다.
“그러지 말구 천환만 주게.”
농담이 아니었다. 무서운 증오의 눈이었었다. 돈 들어온 것을 보고 금방
그 자리에서 손을 내어미는 야마리없는 손에 대한 증오였었다.
말은 같은 말이었다. R은 초면과도 같은 사이여서 준은 피부까지
새하얘지는 것 같은 무안을 느꼈었다. 준은 아편쟁이가 아니었고 보니
아무한테나 손을 벌리지도 않았었다. 또 언제나 용돈에 손을 벌리도록
쪼들리기만 하는 그렇게 처량한 처지는 아니기도 했던 것이다.
술맛도 가시었다. Y도 너무 지나쳤다고 후회가 났던 모양이었다.
밖에 나와서 그의 주머니에 천환 한 장을 억지로 넣어주며 갈리었다.
준은 그 돈이 쓰여지지가 않았다. 지프차가 있는 회사에 얼마간 근무한
버릇으로 술기만 있어도 차를 타는 버릇이 생기어 있던 것이다.
그래야만 곧장 집으로 가지. 아니면 또 참을 대기 때문이었다.
택시를 타자던 돈이었지만 그는 보슬비를 맞으며 혜화동까지를 걸었던
것이다. Y도 무슨 기분나쁜 일이 있었던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심했다. 무서운 증오의 눈이 아니던가? 돈을 보더니
그 자리에서 손을 내밀어 ─ 이런 눈이 아니냐. 집에 들어서는 길로
오십이 된 준은 어린애처럼 책상에 엎디어 울어버리고 말았었다.
물병이 쓰러졌던 모양이다. 요가 흥건해진 것을 알고도 그대로 울기만
한 준이었다. 제삼자가 들으면 실소할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린애 싸움이라 할 것이었다. 그도 그랬다. 그러면서도 두고두고
울어지는 것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남은 두 친구도 그렇게 우정이
시험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때는 그의 주머니도 그만 돈은 있었던 것이다.
아내와의 균열이 생긴 것도 그 사건과 관련이 있었다.
며칠 후였다. 이 슬픈 이야기(준에게는 부모가 돌아갔다는 사실보다도
슬프고 슬픈 이야기였다! 울어도 울어도 시원치 않은 그런 슬픈
이야기였다!)에 코웃음을 친 것이었다. 정상적이 아니요
이단적이라는 것이었다.
“아아니, 세상이 그런 게지. 그런 것을 이제 새삼스럽게 슬퍼한다는
그 자체가 우습잖아요? 이 세상에 당신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또 어디
있어요! K씨 때만 해두 그렇죠. 이십 년 전의 삼백원이면 어디예요?
당신 월급이 육십원일 때거든. 일원 육십전짜리 어머님 간이보험료를
못 물어서 무효를 만든 이가 어쩌자구 판권을 둘이나 판돈을 몽땅
내주고서 신문사에 맡겨두었다구 내게 일년을 속이더니 ─
K씨가 그림 한장을 들구 와서 그때 당신이 앓고 누웠을 적에 미안하다고
이야기를 해서야 알았지만,
겨우 선심쓰듯 돈 오원을 가져온 것이 다였죠?”
K는 정말 섭섭하게 했었다. 월북한 화가였다.
그러나 전에는 이렇게 준을 구박주던 아내가 아니었다.
그 아내가 구박을 주는 것도 정상적인 아닌 것을 순수하게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생리가 변한 것이 눈에 뜨인 것이다.
Y가 옳고 그것을 슬퍼하는 준이가 그르다는 것이었다. 이해 관계가
없는데 우정을 바라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이다. 우정의 비중은 이해와
정비례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정상적이란다.
무서운 말이었다. 말 자체도 그랬지만 아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이 더 무서웠었다. 즉각적으로 머리에 온 것이 계였다. 고리대금을
하지 않고는 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 계를 아내가 모은 것이었다.
계만 들면 이혼한다고까지 선언을 했건만, 그것을 무시하고 아내는 준도
몰래 계를 모았던 모양이다. 말쌀을 팔아야 하는 형편이니
아내의 초조를 나무라기만 할 수는 없다. 그것을 안 것도 먼저 계를
타먹은 사람이 나자빠져서 비로소 탄로가 났고, 그 계금을 물기 위해서
그는 또 하나 계를 모으게 됐던 것이다. 날마다 계주가 기소된 사건이
신문에 보도될 때이기도 했다. 소심한 준이었다.
오십만환이란 죽을 때까지 써도 단번에 들어와 볼 수 없는
대금인 것이다. 준은 매일 아내가 잡혀가지 않나 불안했었다.
며칠에 한 번씩은 여자들이 와서 고발한다고 으르딱딱대기도 했었다.
아내는 잡혀가고 준은 경찰에 불려가고─이런 꿈도 몇 번인가 꾸었었다.
아내는 이십오 년간 그와 결혼생활을 해오고 있었다.
이 이십오 년 동안, 아내는 그의 월급과 원고료와 인세 이외에는 단돈
십전의 가욋돈을 모르고 살아오고 있다. 준 자신이 그런 주변이었다.
그러니 어디 가서 딴 돈을 만져볼 재간이 있을 리 없다.
정말 가늘게 먹고 가늘게 살아온 이십오 년이다.
그 아내가 이 반년간 곗돈을 만지더니 통이 커진 것이다.
전에는 만환이면 끔찍하게 알던 아내다. 뱀 개구리 녹이듯, 옷장
저 밑에다 넣어 존존히 썼었다. 그 아내가 만환은 돈으로 안 알게 되어
있었다. 원고료만으로 십여 명 살림에다 여섯이나 되는 아이들의 학비에
하도 따분해서 취직이라도 하면 하는 말을 낼라치면,
“거 쓸데없는 공상 말아요. 취직취직 하지만, 당신은 방안 취직이
젤이야요. 주면 얼마나 주우! 한 장에 똠방똠방 이백환씩이니 그보다
더한 취직이 어딨다우. 대장 부인두 그럽디다. 나다니면 돈만 쓴다구
영감쟁이 다리를 꼭 붙들어매어 집안에 가둬두라구.”
이렇게 말하던 아내다. 대장이란 준이가 위의 세 친구 이외에 글과
관련이 없는 오직 하나의 친구 부부다. 지금 준의 우인록에 남아 있는
오직 한 사람이기도 한 것이었다.
통이 커졌다 해서 돈이 생긴 것도 아니다. 오십만환을 몽땅 떼이고서
딴 계를 모아서 두 계의 계금을 물어가자니 이악하게 한대도 준의
원고료에서 반은 보태주어야 했다. 그것이 억울해서는 아니다.
아내는 정말 이악해진 것이다. 단돈 천환에도 꼭 이자 생각을 한다.
돈 계산의 단위가 이자로 변해버리고 말았었다. 어쩌다 곗돈 들어온
데서 아이들 잔돈이고 살림에다가 쓰는 일이 있어도,
“모두 사천환 썼어요. 이할이니까 그런 줄이나 아시라구요.”
소름이 쪽 끼치었다. 이할 아니라 십할이라도 물 돈이면 물어야
할 것이요, 또 물기로 든다면 원고료에서 나갔지 아내가 어디서 갖다
무는 것도 아니다. 이십오 년간 단 한 번도 주고받아 본 일이 없는
대화였었다. 준도 그랬지만 아내도 그랬었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의 수입이 빠안했고 아내의 수입이
십 년 가야 일전 한푼 없는 터에 준이가 단 한 번도 다른 여성과 점심
한 끼 먹어본 적이 없이 살아온 이십오년이었고 보니 준이의 주머니
속은 의심해볼 아내도 아니었었다.
“저 아무개넨 부부가 서로 딴 주머닐 차구 있으니
그러구야 무슨 재미루 살으우?”
이런 말을 하면 희한해한 아내다.
그 아내가 계를 시작한 뒤로부터 딴 주머니를 찬 것이었다.
실상은 아무 실속도 없는 주머니였다. 언제나 떼인 돈이자 물어줄
금액과 날짜가 적혀있는 종이쪽밖에 들어가보지 못하는 그런
딴 주머니다. 신주머니 값에도 못가는 딴 주머니였지만 준이는 실속이
있든 없든 그 딴 주머니라는 것이 불쾌해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은 빚문서밖에 들어가 보지 못하지만 딴 주머니 찬 이상 언제든지
들어가게 되면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요, 또 그렇게 되기를 바라서의
딴 주머니이기도 할 것이었다. 아내한테 전남편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처녀로 그와 결혼했다.
뒤늦게 젊은 사내를 끼고 돌 것도 아니요 친정도 이북이다.
원고료가 샐까봐서는 아니다. 그 자체가 준이는 생리적으로 싫었다.
그것은 아내도 잘 안다. 이십오 년간 같이 살았으니 방귀 소리도
알만하다. 그러면서도 계를 했고 ‘계’식으로 돈을 계산하려 드는
것이다. 과거 이십오년 동안에는 싸움도 많이 했고 때리고 한 일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헤어진다든가 소위 말하는 ‘위기’라는 것은
생각해본 일조차도 없는 준이었다. 준도 나이 오십이다.
위기는 벌써 갔을 것이었다. 아내도 사십이 넘어섰다.
이 나이에 준은 뒤늦게나마 아내와는 헤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대로 간다면, 계가 더 계속되고, 아내의 계산법이
계원들의 그런 태를 못 벗는다면 준은 아내가 억만금을 벌어다
뉘어놓고 먹인대도 동거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다.
준은 그런 의미의 말을 아내한테도 정중하게 했던 것이다.
그 반응은커녕 그러한 준을 아내는 되레 정상적이 못 된다고 했고
지금 이 세상에서 이해를 떠난 우정이란 있을 수 없다.
바란다면 어리석다, 이렇게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또 한 장 절연장을 써야만 하는가?’
준은 벌써 몇 개짼지도 모르면서 또 담배에 불을 붙여 무는 것이었다.
어떻게든지, 무슨 일이 있든지간에 이 위기만은 극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친구한테 절연장을 쓴 이후로는 거의 매일 밤 술을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무도 허전했다. 너무도 슬펐다.
친구를 잃었다는 슬픔보다도 그의 편지를 받고 피익피익 웃었다는
이야기는 정말 준을 슬프게 했다. 그래도 뒤를 둔 절연장이었다.
‘그건 자네 오해다, 오해를 시킨 점 나도 사과한다, 우리가 그럴 수가
있느냐 ─’ 이런 화답을 은근히 기다리며 쓴 절연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친구들은 모여앉아서 피익피익 웃었다는 것이다.
이 지금의 준한테서 아내와 자식까지 뺏는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비극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한대도 이 위기를 극복할 자신은 준에게는 없었다.
그것이 정상적이냐 아니냐는 둘째 문제다.
부부는 친구의 경우와도 달랐었다. 친구는 안 보면 쓸쓸했지만
안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한집에서 같은 솥밥을 먹는 부부로서
물심 양면으로 딴 주머니를 찰 수는 없다 했다.
역시 어느 쪽이고 주머니를 떼어버려야만 한다 했다.
주머니를 뗄 수 없다면 사람이 떼어져야만 한다 했다.
첫째 이런 계산에 대한 관념의 차이 앞에서 아이들은 방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닷새나 지났다.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열흘이, 또 열흘이, 한 달이 또 갔다. 그래도 준의 생각은 변해지지
않는 것이었다. 아내의 계산 기준도 그 자신 조심을 하면서도 역시
고쳐지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인제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생리가 그것을 준한테 허락지 않았었다.
준은 결심을 했다. 역시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준은 그날 밤은 지독하게 술을 마시었다. 그랬건만, 눈을 붙인 지
한 시간 만에 잠이 깨이던 것이었다. 술도 함께 깨었었다.
한시부터 새벽 다섯시까지에 겨우 준은 아내에게 주는 마지막 편지를
썼었다. 아이가 여섯이나 딸린 늙은 홀아비한테 와줄 여자는
이 세상에는 없다는 생각을 되새기고 되새기고 하면서 쓴 편지였다.
준은 이 편지를 책상에 놓고 당분간 집을 떠나자는 것이다.
아내도 세 친구들처럼 편지를 보면서 피익 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면서 쓴 편지이기도 했던 것이다.
마지막 편지이면서도 역시 세 친구들에게처럼 한 번 더 여유를 둔 것은
아내한테 대한 미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만 미련쯤을 가진다고
그것이 그대로 비굴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이런 편지를 쓰는 그 자체가 이단적인 태도인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쓰지 않을 수 없어 쓴 편지이기도 했던 것이었다.
준은 천천히 편지를 봉해 책상 위에 놓고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현대문학」6호, 195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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