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문학

독백 - 이효석 -

하얀모자 1 2023. 2. 22. 08:59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독백 
                                                                         - 이효석 -
 
아침에 세수할 때 어디서 날아왔는지 버들잎새 한 잎
대야물 위에 떨어진 것을 움켜드니 물도 차거니와 누렇게 물든 버들잎의
싸늘한 감각! 가을이 전신에 흐름을 느끼자 뜰 저편의 여윈 화단이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장승같이 민출한 해바라기와 코스모스 ⎯ 
모르는 결에 가을이 짙었구나. 제비초와 애스터와 도라지꽃 ⎯
하늘같이 차고 푸르다. 금어초, 카카리아, 샐비어의 붉은빛은
 가을의 마지막 열정인가.

로탄제 ⎯ 종이꽃같이 꺼슬꺼슬하고 생명 없고 마치 맥이 끊어진 처녀의
살빛과도 같은 이 꽃이야말로 바로 가을의 상징이 아닐까.
반쯤 썩어져 버린 홍초와 글라디올러스,
양귀비의 썩은 육체와도 같은 지저분한 진홍빛 열정의 뒤꼴,
가을 화초로는 추접하고 부적당하다 ⎯ 가을은 차고 맑다.
마치 바닷물에 젖은 조개껍질과도 같이.

나의 두 귀는 조개껍질이 아니나 그리운 바다 소리가
너무나 또렷이 들려온다. 이것도 가을 하늘이 지나쳐 맑은 탓이겠지.
화단을 어정거릴 때에나 방에 누웠을 때에나, 그 무엇을 생각할 때에나,
한결같이 또렷이 울려오는 바다 소리 ⎯ 
궂은 비 같은 바다 소리 ⎯ 
느껴 우는 울음과도 같은 바다 소리 ⎯ 
가을 바다는 소리만 들어도 처량해.

어저께 저녁 바닷가 모래밭을 거닐 때에도 등에 업은 어린것만 아니라도
처량한 소리에 이끌려 그대로 푸른 바다 속에
걸어 들어갈 뻔하지 않았던가. 그렇지 않아도 산란하고 뒤숭숭한 심사가
바다 소리를 들으면 그대로 미쳐버릴 듯도 하다.
그러면서도 날마다 바다를 찾는 가을의 모순된 마음.

어지러운 마음을 꿰뚫고 한 줄기 곧게 뻗치는 추억의 실마리.
그 추억의 실마리에 조개껍질을 무수히 끼어서 그에게 보냈건만 ⎯ 
소포 속에 조개껍질을 포기포기 싸서 멀리 그에게 차입하여 보냈건만
국한된 네 쪽의 육중한 벽 안에 갇혀 있는 그가 
그것을 받았는지 어쨌는지.
받았으면 조개껍질을 귀에 대고 오죽이나 바다 소리를 그리워할까.
손바닥만한 높은 창으로 좌향달은 별을 치어다보면서
오죽이나 ‘고향’을 그리워할까.

서대문에서 묵은 지 두 해요,
서대문에서 다시 대전으로 넘어간 지 반년이다.
서울에 있어서 차입시중을 들던 나는 대전까지 좇아갈 수는 없어서
그가 그리로 떠난 다음날 하는 수 없이 반대의 방향인
 이 고향으로 내려온 것이다.

얼크러진 실뭉치같이 어수선하던 사건과 마음.
 그 속에서 모든 것이 꿈결같이 흘렀다.

지금 와서는 뒤숭숭한 마음속으로 삼년 동안이나 손가락 하나 대어 보지
못한 남편의 육체에 대한 열정이 송곳같이 날카롭게 솟아오를 뿐이다.
모든 분한과 원망이 한 줄기의 육체적 열정으로 환원된 듯도 하다.
싸늘한 가을임에 불구하고 마음의 불길은 뜨겁게 타오른다.
화단에 피어 있는 새빨간 샐비어 ⎯ 이것의 표정이 나의 마음을 그대로
번역하여 놓은 것이 아닐까. 조개같이 방긋이 벌어진 떨기 사이로
불꽃같이 피어오르는 한 송이의 붉은 꽃 ⎯ 
이것이 곧 나의 마음의 상징인 것이다.
이것도 모두 남편과 나와의 육체적 거리가 가져온 것임을 생각할 때
마음은 더한층 안타깝게 뒤끓는다.

가을이 짙을수록
꿈자리가 어지럽고 머리가 띵하고 전신에 뜨겁게 열이 솟는다.
골을 동이고 자리에 누우면 가슴이 죄여지고 모르는 결에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난다. 대낮에 홀연히 잠이 들었다가 부끄러운 꿈을 꾸고
얼굴을 붉히며 깜짝 놀라 깨나는 때가 많다.
복받치는 열을 식히려 하는 수 없이 날마다 바다로 향한다.
바다로 가는 길에 종묘장을 지나게 되고 종묘장을 지날 때에 반드시
도야지우리의 그것이 눈에 뜨이는 것이다.
이 무례한 도야지우리의 풍속 ⎯ 이것이 마치 마법사와도 같이
 나의 민첩한 마음을 활활 붙여 준다.

사실 타오르는 나의 마음의 동요가 모두 이 야릇한 도야지우리의 풍속의
죄가 아닌가도 생각한다. 거기에는 원시의 욕망 이외의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 원시의 자태가 사람의 일면과 흡사함을 볼 때에 나는 일부러
면을 쓰는 사람의 꼴을 더 밉게 생각할 때조차 있다.
우리 밖에는 날마다 씨돋을 끼고 여러 마리의 도야지가
네 귀로 짠 말뚝에 매었다. 육중한 씨돋은 울고 고함치는 도야지 사이로
 돌아다니면서 기관차와도 같이 한 마리씩 엄습하였다.

힘과 부르짖음과 ⎯ 거기에는 생활의 최고 노력의 표현이 있는 것이다.
그 금단의 풍경을 나도 모르게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고 섰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나는 황당하게 그곳을 떠나는 것이다.
그 꼴을 누에게 들키지나 않았을까 하고 한참 동안은 얼굴을 푹 숙인 채
종종걸음으로 재게 걷는다.
붉어진 얼굴이 쉽사리 꺼지지 아니하고 전신이 불같이 탄다.
바닷가까지 허둥허둥 한달음에 내걷는다. 도장같이 가슴속에 찍힌 새빨간
풍경이 생생한 꽃같이 살아서 바닷바람에도 쉽게 꺼지지 않았다.
그리고 타는 몸 ⎯ 바닷물에 빠지기 전에는 그것이 식을리 없다.
번번이 왜 그것을 보았던가 하고 후회하면서 결국 또 보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마술이다. ⎯ 이렇게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오늘 그곳을 지날 때에도 나는 역시 그 풍경에 눈을 감지 않았던 것이다.
바다에 이르니 마음이 산란하고 추억이 날카로웠다.
모래 위에 발자취가 어지럽고 상기된 눈동자에 바다가 무더웠다.
벌판을 휘돌아 집에 돌아왔을 때까지 몸은 식지 않았다.
대야에 물을 떠놓고 그 속에 주워 온 조개와 손을 담았으나
아침의 싸늘하던 대야의 감각은 먼 옛날의 기억과도 같이
 아득하게 사라져 있지 않은가.

저물어가는 뜰 한구석에서는 깻잎냄새가 진하게 흘러왔다.
그 높은 향기 또한 가지가지의 추억을 품고 있는 것이다.
허전허전 걸어가서 (그 맥없고 휘뚱휘뚱한 꼴이야 마치 도깨비나
허수아비의 그것과도 같지 않았을까) 깻잎을 뜯어 주먹 위에 얹고
손바닥으로 치니 부드럽고 둥글둥글한 음향이 저녁의 적막을 깨트렸다.
이 깻잎의 음향 역시 가지가지의 옛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깻잎 으끄러진 냄새가 콧속을 화끈 찔렀다. 그 냄새에 더운 몸이 더한층
무덥고 괴롭다. 이 고요한 저녁에 네 쪽의 벽 속에 웅크리고 앉은 남편의
회포인들 오죽할까. 더구나 서울 있을 때에는 별것을 다 차입해 달라고
청하던 그가 아니던가. 그의 청대로 차입하는 책갈피에 몸의 털을 두어
오리 뽑아서 넣었더니 태워먹었는지 삼켜 버렸는지.
지금의 나의 감정 같아서는 안된 생각조차 난다.
동무들이 이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나를 비웃고 꾸짖을까.
그러나 이것은 거짓 없는 참된 마음인 것이다.

나는 지금 어색한 투갑을 입은 영웅되기보다도
한 사람의 천한 지어미됨에 만족하는 것이다.
그리운 남편에게도 이것을 원하는 것이다. 어색한 영웅과 천한 지아비 ⎯ 
어느 것이 더 뜻있고 값있는 것인가는 다른 문제이다.
뜻과 값의 문제를 떠나서 지금의 나의 심회는
솔직하게 똑바로 솟아오른다.
사람이란 진실을 말하기가 하늘의 별을 따기보다도 어렵다.
마음속과 입 밖에 내놓는 말과의 사이에는 항상 먼 거리가 있다.
이제 천한 지어미에 만족하는 나의 고백은 한 점의 티끌도 거짓도 없는
새빨간 마음 그대로이다. 영웅의 투갑을 버릴 때에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까지 진실하게 됨은 그러나 대체 무슨 까닭인고.

높은 창에 비끼는 별을 바라보면서 괴롭게 몸을 뒤틀고 앉았을
남편의 꼴을 생각하니 이 마음 쓰리고 안타깝다.
별이라니 벌써 가을 하늘에 별이 총총 돋았네. 저것이 ‘오리온’인가.
빛이 제일 청청하고 밝으면서도 일상 청승맞고 처량한 것이 저 별이야.
견우와 직녀성 ⎯ 긴 강을 사이에 두고 오늘밤에는 왜 저리 흐리고
슬픈 꼴을 지니고 있는가 ⎯ 서로 빤히 건너다보면서도 해를 두고 서로
 보지도 못하는 이 땅 위의 인간은 어쩌란 말인고.

아니 방에 누인 어린것이 몹시 울고 있네. 어느 틈에 깨어 났노.
아비를 알 나이에 아비의 얼굴조차 모르고 지내는 어린것의 꼴이
울 때에는 더한층 측은히 생각된다. 젖도 벌써 이렇게 지었네.
 가난한 젖이나 먹고 무럭무럭 자라기나 하여라.

별안간 요란한 이 벌레소리!
가을벌레는 무슨 까닭으로 또 이렇게 청승맞게 우노.
모르는 결에 내린 이슬에 전신이 촉촉이 젖었네.
이슬이 눅고 하늘이 맑고 밤이 차건만 나의 몸은 아직도 덥다.
화단 위의 샐비어는 밤기운에 오므라졌건만 나의 마음의 붉은 꽃은
아직까지도 조개같이 방긋이 열린 채 닫혀지지 않는구나. 익을 대로 익은
능금송이 같은 새빨간 별이 열린 조개 틈으로 엿보고 있네.
 그가 그 밑에 잠들어 있을 먼 남쪽하늘이 붉게 타오르누나.
 그렇게 맑던 하늘이, 아니 그것이 정말인가, 나의 눈의 착각인가.
 왜 이리 정신이 어지러운가. 이러다가 미치지 않을까.
 머리 속이 어질어질한 품이 크게 병들 것도 같다.
 괴로운 이 밤을 또 어떻게 새우노.……

 

❋ 삼천리 1933월 12월 「가을의 서정」으로 발표.
 1941년 박문서관 간행

『이효석단편선』에서 「독백」으로 개제(改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