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만세전(萬歲前) - 하 -
- 염상섭 -
6
기차가 김천역에 도착하니까,
지금쯤은 으레 서울집에 있으려니 하였던 형님이 금테모자에다 망토를
두르고 마중을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혹시 아는 사람이나 있을까
하고 유리창 바깥을 내다보며 앉았던 나는 깜짝 놀라 일어나서
창을 올리고 인사를 하려니까, 형님은 웃으며 창 밑으로 가까이 오더니
어떻든 내리라고 재촉을 한다. 어찌할까 하고 잠깐 망설이다가 형님이
그 동안에 내려와서 있는 것을 보든지 웃는 낯을 보든지
병인이 그리 급하지는 않은 모양이기에, 나는 허둥지둥 짐을 수습하여
가방을 창 밖으로 내주고 내려왔다.
뒤미처서 양복쟁이 하나도 창황히 따라 내리었다.
형님은 짐을 들려 가지고 가려고 심부름꾼 아이까지 데리고 나왔었다.
출구 앞에 섰던 아이놈에게 가방을 내주고 우리들이 나가려니까,
그 밑에 바짝 다가섰던 헌병보조원이 내 뒤로 내린 양복쟁이와
수군수군하다가 형님을 보고,
“계씨가 오셨어요? 오늘 저녁에 떠나시나요?”
하며 묻는다. 형님은 웃는 낯으로,
“네, 대개 밤차로 올러갑니다.”
하고 거진 기계적으로 오른손이 모자의 챙에 올라가 붙었다.
부자연하고 서투른 그 모양이 나에게는 우습게 보이면서도 가엾었다.
어떻든 형님 덕에 나는 별로 승강이를 아니 당하고 무사히 빠져나왔다.
형님은 망토 밑으로 들여다보이는 도금을 물린 검정 환도 끝이 다리에
터덜거리며 부딪는 것을 왼손으로 꼭 붙들고 땅이 꺼질 듯이 살금살금
걸어 나오다가, 천천히 그 동안 경과를 이야기하여 들려 준다.
“네게 돈 부치던 날 아침은 아주 시각을 다투는 것 같았으나 낮부터
조금씩 돌리기 시작하여 그저께 내가 내려올 때에는 위험한 고비는
넘어선 모양이지만, 지금도 마음이야 놓겠니.
워낙이 두석 달을 끌었으니까.
그러나 곧 떠나지 않은 모양이로구나?
나는 어제쯤 올 줄 알고 이틀이나 정거장에 나왔지!”
하고 형님은 차근차근한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전보 받던 날 밤에 떠났죠마는
오다가 신호에서 하룻밤을 묵었지요.”
나는 꾸며 댈까 하다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답을 하였다.
“무슨 급한 볼일이 있기에 돈을 들여 가며 노중에서 묵었단 말이냐?”
벌써부터 형님의 말소리는 차차 거칠어 갔다.
“별로 볼일은 없지만,
몸도 아프고 완행이 되어서 여간 지리하여야지요.”
“웬만하면 그대로 내친 길에 올 게지. 너는 그저 그게 병통야.”
하며 형님은 잠깐 눈살을 찌푸리는 듯하였다.
이 형님이라는 사람은 한학으로 다져 만든 촌생원님이나 신학문에도
그리 어둡지는 않을 뿐 아니라, 우리집에는 없으면 안 될 사람이다.
부친이 합방 전후에 거진 정치열, 명예광에 달떠서 경향으로
동분서주하며 넉넉지 않은 가산을 흐지부지 축을 내어 놓은 분수로
보아서는, 지금쯤 내가 유학을 하기는 고사하고 밥을 굶은 지가 벌써
오랜 일이었겠지마는, 얼마 아니 남은 것을 이 형님이 붙들고 앉아서
바자위게 꾸려 나가기 때문에 이만치라도 부지를 하게 된 것이다.
다른 것은 그만두고라도 보통학교 훈도쯤으로 이천여 원 돈이나
모은 것을 보면 규모가 얼마나 짜인 사람인가를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존경하면서도 성미가 맞을 수는 없었다.
생각하면 우리 삼부자같이 극단으로 다른 길을 제각기 걸어 나가는
사람들은 없다. 세상에는 정치밖에 없다는 부친의 피를 받았으면서
보수적, 전형적 형님과 무이상(無理想)한 감상적, 유탕적 기분이
농후한 내가 태어났다는 것이 세상도 고르지 못한 아이러니다.
“그래 학교의 시험은 어떻게 되었단 말이냐?”
형님은 한참 있다가 또 물었다.
“보다가 두고 왔지요.”
나는 또 무슨 소리가 나올까 보아서 우물쭈물할까 하다가
역시 이실직고를 하고 말았다.
“그럴 줄 알았더면 전보를 다시 놓을 걸 그랬군!”
하며 시험을 중도에 폐하고 온 것을 매우 애석해하는 모양이나,
나는 전보를 다시 아니 놓아 준 것이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잠자코 따라 걸었다.
“그래 추후 시험이라도 봐야 하겠구나? 언제도 추후 시험인가 본다고
일찍이 나와서 돈만 들이고 성적도 좋지 못한 적이 있었지 않었니?
어떻든 문학이니 뭐니 하구 공연히 그까짓 건 하구 난대야
지금 세상에 얻다가 써먹는단 말이냐?”
이런 소리는 일년에 한 번이나 두어 번 귀국할 때마다 꼭 두 번씩은
듣는다. 형님한테 한 번, 아버님한테 한 번이다.
그러나 어떠한 때에는 아버님에게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을 때가
있다. 처음에는 열심으로 반대도 하여 보았다. 교육이라는 것은
‘사람’을 만들자는 것이요 기계를 제조하는 것이 아니니까,
학문을 당장에 월급푼에 써먹자고 하는 것도 아니요,
‘똥테’(나는 어느 때든지 금테를 똥테라고 불렀다) 바람에 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도 하여 드리고, 개성은 소중한 것이니까 제각기 개성에
따라서 교육을 하여야 한다는 문제를 들추어 가지고 늘 변명을 하여
왔다. 그러나 결국은 단념하는 수밖에 없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세계와 자기의 세계에는 통로가 전연히 두절된 것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마치 무덤 속과 무덤 밖이 판연히 다른 딴세상임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후부터는 부자나 형제로서 할 말 이외에는,
그리고 학비 이야기 이외에는 아무 말도 입을 벌리지 않기로 결심을
하였다. 모친이나 자기 처나 누이동생에게 하듯이만 하면 집안에
큰소리가 없을 줄 알았다. 되지 않은 이론이니 설명이니 사상발표니
하기 때문에 감정이 상하고 충돌이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까 자기의 주위가 어쩐지 적막하여진
것 같고, 가정이란 것은 밥이나 먹고 잠이나 재워 주는 여관 같았다.
여관 중에도 제일 마음에 맞지 않는 여관 같았다.
지금도 일년 만에 만나는 첫대바기에 형님에게 또 새판으로 그러한
소리를 들으니까 불쾌하지 않을 수 없는 동시에
작년 여름에 나왔을 때에 학교 문제로 삼부자가 한참 논쟁을 하다가
‘집구석이라고 돌아오면 이렇게들 사람을 귀찮게 굴 테면
여관으로라도 나간다’
하고 이틀 사흘씩 친구의 집으로 공연히 떠돌아다니던 생각을 하여
보면서 잠자코 말았다.
어쩐지 마음이 쓸쓸하여지고 섭섭한 생각이 든다.
우리는 한참 동안 잠자코 걷다가, 형님 집으로 들어가는 동구까지
와서 전에 보지 못하던 일본 사람의 상점이 길가로 하나 생기고
골목 안으로 들어서서도 두 집 문에
일본 사람의 문패가 붙은 것을 보고,
“그 동안에 꽤 변하였군요!”
하며 형님을 쳐다보니까, 형님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듯이
태연무심히 고개만 끄덕끄덕하였다.
나는 앞장을 선 형님을 따라 들어가며
작년보다도 한층더 퇴락한 대문을 쳐다보고,
“거진 쓰러지게 되었는데 문간이나 좀 고치시지?”
하며 혼자말처럼 한마디 하였다.
“얼마나 살라구! 여기두 좀 있으면 일본 사람 거리가 될 테니까
이대로 붙들고 있다가 내년쯤 상당한 값에 팔아 버리랸다.
이래봬도 지금 시세루 여기가 제일 비싸단다.”
형님은 칠팔 년 전에 살 때와 비교하여서 거진 두세 곱이나
시세가 올랐다고 매우 좋아하는 모양이다.
나는 오늘 아침에 부산에서 본 광경을 생각하며,
“그야 다른 물가는 따라서 오르지 않었나요.
전쟁 이후에 어떤 것은 삼배 사배나 올랐는데요.”
하고 대꾸를 하며 안으로 쫓아 들어갔다.
형수와, 작은아버지 오신다고 깡총깡총 뛰는 일곱 살짜리 딸년이
안방에서 나와서 맞았다. 작년에 보던 것과는 다른 상스럽지 않은
노파도 하나 있었다. 나는 안방으로 들어가서 귀찮은 맞절을 형수와
하고 나서 조카딸의 절도 받았다. 동경에서 가져온 과자를 절값으로
내놓으니 계집애년은 겅중겅중 뛴다. 인사가 끝난 뒤에
형님은 무슨 생각을 하는 눈치로 벙벙히 앉았다가,
“건넌방에서두 나와 보라지!”
하며 형수를 쳐다본다. 형수는 아무 말 아니 하고 섰더니,
“얘! 너 가서, 건넌방 어머니 오라구 해라.”
하며 딸을 시키었다. 나는 어리둥절하며,
“건넌방 어머니가 누구예요?”
하며 형수를 쳐다보았으나 머리에는 즉각적으로 어느 생각이 떠올랐다.
형수는 애를 써서 헛웃음을 입가에 띄며 잠자코 말았다.
“네게는 이야기를 한다면서도 우환두 있구 해서 자연
이때껏 알리지를 못하였다만, 작은형수가 하나 생겼단다.”
하며 형님이 웃는다. 단 형제가 사는 집안에 작은형수라는 말도
우습지만, 나는 대개 짐작하면서도,
“작은형수라니요?”
하고 되물으니까, 윗목에 섰던 형수가,
“그 동안에 난 죽었답니다.”
하며 풀없는 웃음을 일부러 보인다.
형수는 그 동안에 완연히 늙은 것 같았다. 눈가가 유난히 퍼래지고
이마와 눈귀에 주름이 현연히 보이었다.
형수의 말을 받아서 형님이 무어라고 입을 벌리려 할 제,
건넌방 형수가 들어오는 바람에 답쳐 버렸다. 분홍 저고리에
왜반물치마를 입고 분을 하얗게 바른 시골 새악시가,
아까 눈에 띄던 늙은 부인이 열어 주는 방문으로 살짝 들어왔다.
고작해야 열아홉 살쯤 되어 보이는 조촐한 색시다.
이맛전이 넓고 코가 펑퍼짐한 듯하고, 이 집에서 상성이 난 아들깨나
날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보아서 그러한지 뻣뻣한 치마가 앞으로
떠들썩한 것이 벌써 무에 든 것 같고, 얼굴에는 윤광이 돌아 보인다.
큰형수와 느런히 세워 놓고 보면 고식(姑息)이라 하는 것이 알맞을 것
같다. 나는 형님의 소원대로 상우례를 하였다.
두 사람의 맞절이 끝나니까 형수는 앞장을 서서 휙 나가 버렸다.
새 형수도 뒤미처 나갔다. 큰형수는 마루에 앉아서 짐을 지고 들어온
아이더러 무엇을 사오라고 분별을 하고, 새 형수와 마누라는 뜰로
내려가서 나를 위하여 점심을 차리는 모양이다.
머리도 안 빗은 조그만 늙은 아씨가 마루 끝에서 왔다갔다하는 것이
창에 붙은 유리 밖으로 마주 내어다보일 제, 시들어 가는 강국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라 왔다. 어쩐지 가엾어 보이었다.
‘그래도 세 식구가 구순하게 사는 것이 희한한 일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벙벙히 앉았으려니까,
형님은 무슨 말을 꺼낼 듯 꺼낼 듯하다가,
“넌 지금 일년 만에 나오지?”
하며 딴소리를 붙인다.
“올 여름방학에는 안 나왔지요.”
“응, 그래…… 너도 혹 짐작할지 모르겠다만,
청주 읍내에서 살던 최참봉이라면 알겠니?”
하며 형님은 목소리를 한층더 낮추었다.
“알지요.”
“그 집이 지금 말이 아니 되었지.
웬만큼 가졌던 것은 노름을 해서 없앴겠니마는, 최씨가 작고하기
전에 벌써 다 까불려 버렸지. 지금 데려온 저것이
그이의 둘째딸이란다. 어렸을 젠 너두 보았을걸?”
“네에!”
하며 나는 무심코 웃었다. 최참봉이라면 내가 어렸을 때에는
우리집하고 격장에서 살던, 청주 일군은 고사하고 충청도 원판에서도
몇째 안 가는 재산가이었다. 술 잘 먹기로도 유명하고 외입깨나
하였지마는 보짱 크기로도 유명하였다. 작은형수라는 사람은
내가 소학교에 들어갈 때에 지금 마루에서 뛰어다니는 형님의
딸년만하였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여 보니까,
부엌에서 음식을 차리고 있는 노부인이 낯이 익은 법하기도 하고
일편 반갑기도 하여서 혼자 웃으며,
“그럼 저 마님이 최참봉의 부인이 아녜요?”
하고 물어 보았다. 형님은 반색을 하면서,
“응, 참 너는 그 집에 늘 드나들며 놀지 않았니?”
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어쩐지 가슴이 선뜩하면서 몸이
근질근질한 것 같았다. 최참봉 마누라라는 이는 딸 형제밖에는 낳아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내가 어려서 놀러 가면, ‘내 아들 왔니!’
하기도 하고, ‘내 사위 왔구나!’ 하기도 하며 퍽 귀여워하였었다.
“금순아, 금순아! 넌 어디루 시집가련?
저 경만이(내 아명) 집으로 가지?”
하면, 지금의 저 형수는 똥그란 눈으로 나를 말똥말똥 쳐다보다가,
어떤 때에는 ‘응!’ 하기도 하고, 나는 시집 안 간다고 짜증을 내어
보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지금 학교에 다니는 내 누이동생과는 한 살이
위든가 하기 때문에 나보다는 두 살이 아래일 것이다.
나는 우리 남매하고 돌아다니던 십사오 년 전의 어렴풋한 기억을
머릿속에 그려 보면서 제풀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깨달았다.
어렸을 적 일이니까 당자도 잊어버렸을 것이요, 누이도 모르겠지마는,
저 마누라는 나를 알아볼 것이요, 실없는 소리라도 사위니 아들이니
하는 말을 하였던 것을 생각하여 본다면 마주 대면하기가 피차에
어떠할까 하고 지금부터 내가 도리어 얼굴이 간지러운 것 같다.
아무튼지 이상한 연분이다.
물론 그때만 해도 반상(班常)의 별을 몹시 차리던 시절이니까 두 집의
부모끼리는 왕래가 별로 없었고, 더구나 저편에서는 나를 데리고
실없는 소리를 하였을 뿐이지 감히 내 딸을 누구의 몫으로
데려가시오 라고는 못 하였었다.
하지만, 지금 형님의 장모요 그때의 금순 어머니는 혹시 정말 나를
사위로 삼았으면 하는 공상이 있었던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기어코 우리집으로 들여보내고야 만 그 어머니의 심사는
알 수 없는 것이다. 형님은 잠깐 동을 떼어서 다시 입을 벌렸다.
“그래 우리집이 서울로 이사한 뒤에는 최참봉이 실패하고
울화에 떠서 연전에 죽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게까지 참혹하게
된 줄은 몰랐었더니, 올 여름에 산소〔墓地〕일절로 해서 청주에
들어갔다가 최씨의 큰사위를 만나니까, 장모하고 처제가 자기 집에
들어와서 사는데, 저 역시 실패를 하고 지금은 자동차깨나
부리지마는, 그것도 근자에는 세월이 없어 지탱을 해갈 수가 없는
터이요, 혼기가 넘은 처제를 처치할 가망조차 없다면서,
어떻게 한밑천을 대어 주었으면 좋을 듯이 말을 비추기에,
집에 올라가서 무슨 말 끝에 우연히 그런 이야기를 하였더니…….”
“최참봉 큰사위라면 그때 우리 살 때에 혼인한 김현묵이 말씀이죠?”
나는 어려서 보던 조그만 초립둥이를 머리에 그려 보며 듣다가
형님 말의 새치기로 물었다.
“옳지 그래! 그때는 열두어 살밖에 안 되었지만,
지금은 퍽 건강해지기두 하고 위인이 착실해서 조치원에서는 상당한
신용이 있지. 그래 아버지께서두 얼마간 밑천을 대어 주는 것도
좋겠지마는, 그보다도 그 처제애를 데려오는 것이 어떠냐고 하시기에
들을 때뿐이요 흐지부지하였었지.
그런데, 그 후에 아버지께서 내려오셨던 길에 김현묵이를
만나 보시고, 우리 집안이 절손이 될 지경이니 우리집으로 데려오고
싶은즉, 저편 의향을 들어 보라고 별안간 일을 버르집어 놓으시니까,
현묵이야 어떻든 인연을 맺어 놓기로만 위주니라 물론 찬성이요,
그 집안에서들도 유처취처라는 것을 매우 꺼리는 모양이나 우리 집안
내력도 알고, 그보다도 자기네 형편이 매우 급하니까
결국은 승낙을 한 모양이지.”
형님은 장황히 변명삼아 설명을 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큰아주머니만 불평이 없으시다면 잘 되었습니다그려.
어머니께서도 좋게 생각하시겠죠?”
나는 구태여 잘잘못을 말할 일도 아니기에 좋도록 대꾸를 하였다.
“아버지께서는 원래 큰형수를 미흡하게 여기시니까 말씀할 것도
없지만, 어머니께서는 처음에는 반대를 하시다가,
역시 손주새끼를 보겠다고 첩을 얻어 들이는 것보다는 낫다고
하시고, 당자도 인제는 자식이라고는 나볼 가망도 없구 하니까
아무려나 하라기에, 되어 가는 대로 내버려두었지.”
나는 잠자코 듣기만 하였다. 그러나 아들자식이란 그렇게도 낳고 싶은
것인지 나에게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무후(無後)한 것이 조상에 대한 죄라거나 부모에게 불효가 된다는
말부터 나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낳은 자식은 죽일 수 없으니까 남과 같이 길러
놓기는 하여야 하겠지마는, 그렇게 성화를 하면서 부친까지 나서서
서두르고 애를 쓸 것이 무엇인지? 사람이란 의외의 호사객이라고
생각하였다. 나이 먹으면 생각이 달라질지는 모르지마는,
아들자식을 낳아서 공을 들여 길러 논다기로 그것이 어떻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요행 장수하여서 자기보다 앞서지 않을 지경이면
삿갓가마나 타고 상여 뒤에 따르리라는 것만은 분명히 예기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그 다음 일이야 누가 알 일인가. 위인이 착실할 지경이면
부모가 남겨 주고 간 땅뙈기나 파서 먹다가 뒤따라 땅 속으로 굴러
들어가 버릴 것이요, 그렇지도 못하면 그나마 다 까불리고 제 몸뚱어리
하나도 추스르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거기에 매달린 처자의 운명까지 잡쳐 놓을지도 모른다.
기껏 잘났대야 저 혼자 속을 썩이다가 발자취도 없이 스러질 것이며,
자칫하면 제 목숨까지가 성이 가시다고 낳아 준 부모를 원망할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종족을 연장하려는 것이 생물의 본능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종족의 보전이나 연장이라는 의식으로 사람은
결혼을 원하는 것인가. 그보다도 한층 더한 충동이 더 굳세게 사람의
마음속에서 움직이지는 않는 것일까.
자식이 주줄이 있어도 첩 얻지 않던가? 그는 고사하고 절손이 무섭고
자기가 돌아간 뒤에 술 한잔이라도 부어 놓을 맏손주를 생전에
보겠다고 애를 부득부득 쓰는 부친이
가엾고, 의외로 완고인 데에 놀랐다.
사람의 관념이란 무서운 것이라고 새삼스럽게 생각되는 것이었다.
“서울집에 있는 것이나 데려다가 기르셨더면 좋았죠.
에미두 죽게 되구, 저는 있는 게 도리어 귀찮을 지경인데.”
하며 형님의 눈치를 보았다. 나는 자기 소생을 형님에게 떼어맡겼으면
짐이 덜리어서 시원스럽겠다는 말이나, 듣는 사람에게는 양자라도
할 수 있는데 왜 유처취처까지 해서 남 못 할 일을 하였느냐고
나무라는 것같이 들린 모양이다.
“글쎄 그두 그렇지마는 너두 앞일을 생각하면 그럴 수야 있니.
그뿐 아니라 저편 처지가 말못되었으니까,
사람 하나 구하는 셈치고 어떻든 데려온 것이지.”
하고 형님은 변명을 하였다. 나는 그 이상 더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사람 하나 구한다는 말이 귀에 거슬리기에,
밖에서 듣지 않도록 일본말로 반대의 의사를 늘어놓았다.
“그건 형님 잘못 생각이세요. 설혹 결혼을 하여서 한 사람이
구하여졌다 하더라도 형님은 그것을 자기의 공으로 아실 것도
못 되거니와, 처음부터 구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결혼을 하셨다는
것은 형님이 자기를 과대평가하신 것이죠. 또 사실상 그러한 것은
둘째, 셋째로 나오는 문제이겠지요. 누구든지 저 사람을 행복스럽게
할 사람은 이 넓은 세상에는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좋은 일 같지마는 다른 한편으로 보면 불완전한
‘사람’로서는 너무 지나친 자긍이겠지요.”
형님이 잠자코 앉았는 것을 보고 나는 또다시 입을 벌렸다.
“진정한 사랑은 그 사람의 행복을 비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요,
그 사람의 생활을 지배하고 운명의 진로까지를 간섭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구(救)한다는 것은 이기적 충동을 떠나서 자기를\
다소간 희생하게 될 것인데,
형님은 아들 낳겠다는 욕심으로 한 결혼이 아닙니까? 하하하.”
나는 아니 하여도 좋을 말을 오금을 박듯이
입바른 소리를 하고 말았다. 형님은 잠자코 듣고 앉았다가,
“구한다는 사실이 이 세상에 없다 하면 너부터 굶어죽을라?
그는 고사하고 여기 어린아이가 우물로 기어들어가면
너두 쫓아가서 붙들겠구나?”
하며 형님은 웃으면서도 덜 좋은 기색이었다.
“그건 구제가 아니라 의무지요.”
나는 구하지 않으면 너부터 굶어죽으리라는 말에 불끈해서
한마디 한 뒤에 다시 뒤를 이었다.
“의무라 하면 당연히 할 일, 또는 하지 않아서는 안 될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자식을 나서 교육을 시키든지,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붙들어 낸다는 것을 자선적 행위라고야
할 수 없겠지요. 그는 그만두고 지금 자살하려는 사람을
붙들어 냈다 하기로 그 행위가 자선도 아니요,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한 것도 아니죠. 다시 말하면 목숨이라든지
산다는 데에, 공통한 처지에서 자기는 사는 것을 긍정하기 때문에
생(生)을 부정하는 자를 자기의 의견에 동화시키려고 하는 행위가
즉 자살을 방지하는 노력이외다그려. 하고 보면 결국은 자기를
중심으로 하고 하는 일이 아닌가요? 하여간 소위 구제니 자선이니
하는 것을 향기 있고 아름다운 말이나 행위로 알지만,
실상은 사회가 병들었다는 반증밖에 아니 되고,
그 어느 구석에든지 이기적 충동이 있다고 보이는데요…….”
무에나 반항적 태도로 자기 의견을 한마디 꺼내 놓고야 마는 이맘때의
나로는 형님이 어떻게 듣거나 말거나 한바탕 주워섬기고 말았다.
형님은 내 이론이 되고 안 된 것을 별양 탄하고도 싶지 않고,
그저 못마땅하나
먼 데서 온 아우를 불쾌케 아니 하려는 듯이 웃으면서,
“너같이 극단으로 나가면 이 세상에 살아갈 수 있겠니?
그래도 상호부조의 정신두 있어야 하고
인생의 이상이니 목적이라는 것은 없어 안 될 거요…….”
하고 온화한 낯빛으로 입을 다물었다. 아까 문학은
배운대야 써먹을 데가 없다고 눈살을 찌푸리던 때보다는 달라졌다.
“인생의 이상이란 것은 나는 생각해 본 일도 없습니다마는,
구태여 말하자면 자기를 위하여 산다 할까요.
하지만 결코 천박한 이기주의로 하는 말은 아닙니다.”
내가 이렇게 대답을 하니까 형님은 나를 잠깐 쳐다보는 양이,
‘너야말로 이기주의자로구나?’
하고 핀잔을 주고 싶은 것을 참아 버리는 모양이다.
부산히 차려 들여온 점심을 형제가 겸상을 하여 먹은 뒤에
나는 아랫목에 잠깐 누웠었다. 어쩐둥 잠이 들어 한잠 늘어지게 자고
나서 눈을 떠보니까, 흐린 날이 저물어 들어가는지 방 안이 한층
더 우중충하여졌다. 아까 식후에 학교에 다시 갔다가 온다던 형님은
벌써 돌아와서 건넌방에 들어가 앉았는 모양이다.
내가 일어나서 양치질을 하는 소리를 듣고 형님은 안방으로 건너와서,
“눈이 올지 모르는데 술이나 한잔 먹고 떠나랸?”
하며 밖에다 대고 술상을 차리라고 일렀다.
형님이 나에게 술을 권하는 것은 여간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학교에서 오다가 자기는 먹을 줄도 모르는 일본 청주를 사들고
온 것이라 한다. 나는 이것이 혼인상 대신인가?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여 보며 속으로 웃었다.
형님도 대작을 하기 위하여 억지로 몇 잔 한다.
“그런데 이번에 올러가거든 좀 집에 붙어앉아서 약 쓰는 것두
다잡아 살펴보구, 모든 것을 네가 거두어 줄 도리를 차려라.”
형님은 두 잔째 마시고 나서 이런 소리를 들려 주었다.
나는 잠자코 말았다. 사실 내가 약 쓰는 묘리를
알 까닭이 없는 일이다. 형님은 또 화두를 돌렸다.
“나두 며칠 있다가 형편 되는 대루 곧 올러가겠지만,
아버님께 산소사건은 아직도 사오 일은 더 있어야 낙착이
날 듯하다고 여쭈어라.
역시 공동묘지의 규정대로 하는 수밖에 없을 모양이야.”
나의 귀에는 좀 이상하게 들리었다.
내 처가 죽을 것은 기정의 사실이라 치더라도 죽기도 전에 들어갈
구멍부터 염려들을 하고 있는 것은, 아들을 낳지 못하여서 성화가
난 것보다도 구성없는 짓이요 일없는 사람의 헛공사라고
생각 않을 수 없다.
“죽으면 묻을 데가 없을까 봐서 그러세요. 공동묘지는 고사하고
화장을 하든 수장을 하든 상관없는 일이 아닌가요?
아버지께서는 공연히 그런 걱정을 하시지만,
이 살기 어렵고 바쁜 세상에 그런 걱정까지 하는 것은
생각해 볼 일이지요.”
나는 이렇게 핀잔을 주듯이 역시 반대의 의사를 표시하였다.
“공연히가 무에 공연히란 말이냐?”
형님은 눈을 똑바로 뜨고 나를 꾸짖고 나서 말을 이었다.
“너두 지각이 났으면 생각을 해보렴. 총독부에서 공동묘지 제도를
설정한 것은 잘 되었든 못 되었든 하는 수 없이 쫓어간다 하더라도,
대대로 내려오는 자기의 선산이 남의 손에 들어가게 되고
게다가 앞길이 멀지 않으신 늙은 부모가 계신데,
불행한 일이 있는 날에는 어떻게 한단 말이냐?
그래 아버님 어머님을 공동묘지에다가 모신단 말이 될 말이냐?
자식 된 도리는 그만두고라도 남이 부끄러워서 어떡한단 말이냐.
계수만 하더라도 만일에 불행한 경우를 당하면
어떻든 작은산소 아래다가 써야지 여기저기 뿔뿔이 흐트러져 있으면
그게 무슨 꼬락서니란 말이냐?”
형님은 매우 화가 난 모양이다.
그러나 내게는 그리 다급히 들리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 어떡하신단 말씀예요?”
다만 산판이나 묘위전(墓位田)이 남의 손에 들어갔다는 데에는
나도 잠자코 있을 수가 없었다.
“어떻든지 간에 충북 도장관과는 아버님께서도 안면이 계시고
나도 아주 모르는 터는 아니니까, 아버님 대만이라도 작은산소에
모시도록 지금부터 허가를 맡아 두고 계수도 사람의 일을 모르니까
이번에 아주 자리를 잡아 놓아 두자는 말이야. 그런데 그보다도
더 시급한 것은 큰산소하고 가운데 산소의 제절 앞의
산판을 물러 가지고 식목이라도 다시 하자는 것인데,
뭐 아주 말이 아니야, 분상이 벌거벗은 셈이요…….”
분상이 벌거벗었다는 말에 나는 속으로 웃었다.
“그 문제가 이때껏 낙착이 안 났어요?”
하며 나는 또 한 잔 들었다.
“낙착이 다 무어냐. 뼛골은 뼛골대로 빠지고 일은 점점 안 돼가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지금 붙들어다가 징역을 시킨달 수도 없고…….”
하며 형님은 눈살을 찌푸린다.
산소 문제라는 것은 셋쨋집 종형이 문서를 위조해서 팔아먹은 것이다.
우리집이 종가는 아니나 실권은 여기서 잡고 있는,
말하자면 우리 문중 소유로 만들어 놓은 것인데, 몇 평이나 되는지
노름에 몰려서 두 군데의 분상만 남겨 놓고 상당히 굵은 송림째 얼러서
불과 백여 원에 팔아먹은 모양이나, 워낙 헐가로 산 것이기 때문에
당자가 좀처럼 물러 주지 않는 터이라 한다.
제절 앞에 거름을 하고 논을 풀든 밭을 갈든 그는 고사하고
이해관계로라도 물러야 할 것은 물론이다.
“어떻든 무를 수는 있겠죠?”
공동묘지에 성화가 나서 하는 것은 코웃음치는 나도 조상의 산소를
팔아먹은 데에는 분개하고 있는 터이다.
“글쎄, 셋째아버지께서만 증인으로 스셨으면 아무 말 없이 본전에
찾겠지마는, 번연히 자기가 관계를 하시고 내용까지
자세히 아시면서 모른다고만 하시니까
무사히 될 일두 이렇게 말썽만 되지 않겠니?”
“그럼 셋째아버지도 공모를 하셨던가요?”
“그러게 망령이 나셨단 말이지. 그나 그뿐이라던! 자식을 잘못 둬서
그랬기루서니 어찌하란 말이냐고 되레 야단만 치시니
기막히지 않니?”
“그럼 당자를 붙들어 내면 될 게 아녜요?”
“당자야 벌써 어디룬지 들구 튀었다 하더라만,
아마 요새는 들어와 있나 보더라. 일전에두 갔더니 셋째아버지가
앞장을 서서 우는 소리를 하시며 자식 하나 없는 셈 칠 테니
그놈을 붙들어다가 징역을 시키든 목을 돌려 놓든 마음대로 하고,
인제는 그 문제로 우리집에는 와야 쓸데가 없다고 하시는 것을 보면,
어디 갔다는 말은 공연한 소리요, 모두 부동이 되어서
귀찮게만 굴자는 수작 같애서 실없이 화가 나지만…….”
셋째삼촌이라는 이는 집의 아버지와 이복인데다가,
분재한 것을 몇 부자가 다 까불려 버린 뒤로는 한층더 말썽이
많아졌다. 언젠지 나더러도,
“네 형두 딱하지, 그예 징역을 시키고 나면 무에 시원할 게 있니?
돈푼 더 주고 무르면 고만 아니냐? 고까짓 것쯤 더 쓰기로
얼마나 더 잘살겠니?”
하며 갉죽갉죽 꼬집는 소리를 한 일이 있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머릿속까지 지끈지끈한 나는,
“내야 뭘 압니까. 그런 이야기는 형더러 하시죠.”
하며 피해 버렸었다. 원체 나는 적서(嫡庶)의 차별 관념이란
꿈에도 없건마는 머릿살 아픈 일이다.
“아무쪼록 구순하게 하시구려.”
하고 나는 말을 끊어 버렸다. 그러나 형님으로서 생각하면
단 형제뿐인데 내가 집안일에 탐탁히 의논 한마디라도 거들지
않는 것이 불만인 모양이다.
실쭉한 저녁을 조금 뜨고 나서, 캄캄히 어둔 뒤에 다시 짐을 지워
가지고 형님과 같이 정거장으로 나왔다.
드문드문 전등불이 반짝이는 큰길가에는 인적도 벌써 드물어 가고,
모진 바람이 쌀쌀히 부는 대로 가다가다 눈발이 차근차근하게
얼굴에 끼치었다.
“오늘 밤에는 꽤 쌓이겠다!”
형님은 이런 소리를 하며 앞서간다. 정거장 안에 들어서니까,
순사보 한 사람이 형님하고 인사를 하며 나를 아래위로 한번
훑어보았으나, 별로 조사를 하자고는 아니 한다. 지워 가지고 온 짐을
받아 가지고 형님과 아는 일본 사람 사무원이 들어오라고 권하는 대로
우리는 사무실로 들어가서 난로 앞에 불을 쬐고 섰었다.
이삼 사무원이 우리를 돌아다보며 앉은 채 묵례를 한다.
우리들더러 들어오라고 한 사무원은,
“매우 춥지요? 동기방학에 나오시는군요.”
하며 나의 옆에 와서 말을 붙이며 불을 쬔다. 이러한 경우에
일본 사람이 조선 사람보다 친절한 때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였다.
순사나 헌병이라도 조선인보다는 일본인 편이 나은 때가 많다.
일본 순사는 눈을 부르대고 그만둘 일도, 조선 순사는 짓궂이 뺨을
갈기고 으르렁대고서야 마는 것이 보통이다.
계모시하에서 자라난 자식과 같은 몹쓸 심보다.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만나면 피차에 동정심이 날 때도 있지마는,
자기 자신의 처지에 스스로 불만을 가지고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가
심하면 심할수록 자기와 똑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더 밉고
보기 싫어서 그런가 보다.
혹시는 제 분풀이를 여기다가 하는 것일 것이다.
조선 사람에게 대한 조선인 관헌의 태도가 그러한 심리에서
나오는 것인지? 혹은 일본 사람은 뒤로 물러서고 시키니까 그러는지?
하여간 조선인 순사나 헌병 보조원이 더 미우면서도 불쌍도 하다.
사무원은 내가 일본서 왔다는 데에 흥미를 가지고 이야기를 자꾸 건다.
한참 주거니받거니 하며 섰으려니까, 외투에 모자우비까지
푹 뒤집어쓴 젊은 조선 사람 역부가 똥그란 유리등을 들고
창황히 들어오며 일본말로,
“불이 암만해도 안 켜져요.”
하고 울상이다. 역부의 외투에 쌓였던 하얀 눈이 훈훈한 방 안 온기에
금시로 녹아서 조그만 이슬이 반짝거리며 뚝뚝 듣는다.
“빠가! 안 켜지면 어떡한단 말이야. 시간은 다 되었는데.”
이때까지 웃는 낯으로 나하고 이야기를 하고 섰던 사무원이
눈을 부르대며 소리를 지르고 나서 저쪽 구석으로 향하더니,
“이서방, 오소오소, 같이 가서 켜고 와요!”
하며 조선말로 이서방에게 명한다. 나는 사무원의 살기가 등등한
뚱뚱한 얼굴을 바라보고 외면을 하였다. 두 역부는 다른 등에 또 불을
켜들고 허둥허둥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가는 것을 보고 사무원은 픽 웃으며,
“허는 수 없어!”
하며 무책임한 이 꼴을 좀 보라는 듯이 혀를 차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따라서 웃어 보였으나, 머리로는 눈보라가 치는 속에서
신호등으로 기어올라가서 허둥거리는 두 역부의 검은 그림자를
그려 보며 익숙지 않은 일에 가엾은 생각도 난다.
조금 있으려니까 땡땡 하는 소리가 몇 번 난 뒤에 역부들이 들어왔다.
불은 켜지고 차는 조금 있다가 들어왔다.
눈이 푹푹 내리는 속을 나는 형님과 헤어져서 차에 올랐다.
석유불을 드문드문 켠 써늘한 기차 속은 몹시 우중충하고 기름 냄새가
코를 찌른다. 외투를 벗어서 눈을 털었으나 몸은 구중중하고,
컴컴한 석유불을 볼수록 조선은 이런 덴가 싶어
새삼스레 을씨년스럽다. 하여간 난로 앞에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아 보니
찻간에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끄레발에 갈모를 우그려 쓴 촌사람
오륙 인하고 양복쟁이 서너 사람이 난로 가까이 앉고,
저편으로 떨어져서 대구에서 탔는 듯싶은 기생 같은 젊은 여자가 양색
왜증인지 보라인지 검붉은 두루마기를 입고 이리로 향하여 앉은 것이
그중에 반가워 보였다. 나는 심심파적으로 잡지를 꺼내 들었으나
불이 컴컴하여 몇 장 보다가 덮어 버렸다.
저편으로 중앙에 기생에게 등을 두고 앉은 사십 남짓한 신사를
바라보다가 나는 무심코 우리집에 다니는 김의관 생각이 났다.
기생하고 동행인지 혼자 가는지는 모르나 수달피 댄 훌륭한 외투를
입고 금테안경을 쓰고 버티고 앉았는 것이 돈푼 있어 보이기도 하나,
안경 너머로 이사람 저사람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는 작은 눈은
교활하여 보였다.
기차가 추풍령에 와서 닿으니까, 일본 사람의 사냥꾼 한 떼가 개를
두 마리나 데리고 우중우중 들어와서 기다란 총을 여기저기다가 세우고
탄환 박힌 혁대를 끌러 논 뒤에 난로 앞으로 모여든다.
객차에 산 짐승은 아니 태우는 법인데 이 행차는 특대우인 모양이다.
하여간 개가 싫어서 나는 자리를 피하여 저편으로 가서 앉았다.
촌사람들도 비실비실 피하여서 이리저리 흩어졌다.
“아, 영감! 이거 웬일이쇼?”
누구인지 이렇게 소리를 버럭 지르는 바람에
나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방한모를 우그려 쓴 얼금얼금한 사냥꾼
하나가 손가락 사이에는 반쯤 타다가 남은 여송연에 불을 붙이며
난로를 등을 지고 섰는 자의 말소리다. 헌 양복에 각반을 치고
일본 버선에 조선 짚신을 신은 꼴이 손에 든 여송연과는 어울리지
않으나, 동행하는 일본 사람이 난로 앞에 설 자리를
사양하는 것을 보면 일행 중에서는 지위가 높은 모양이다.
“그러나, 영감은 웬일이슈?”
수달피털을 붙인 외투를 입고 앉았던 금테안경이 앉은 채 인사를 하며
묻는다. 이 자도 그만큼 버틸 힘이 있기에 이러한
‘똥테’ 두 동달이쯤은 되는 영감을 앉아서 인사하는 것일 거라.
“군청에서들 산에 가자기에 나섰더니 인제야 눈이 오시는구려.”
하며 얼금뱅이가 웃었다.
“이 바쁜 세상에 사냥은 너무 호강이신걸, 허허허.
공무 태만으로 감봉이나 되면 어쩌려우?”
김의관 같은 안경잡이가 한층 내려다보는 수작을 한다.
“영감같이 돈이나 벌려면은 세상도 바쁘지만 시골 구석에
엎뎠으니까 만사태평이외다. 한데 지금 어딜 다녀오슈?”
“대구에를 갔다 오는데, 이때까지 장관에게 붙들려서…….”
“에? 그래 그건 어떡하셨소?”
“그거라니?”
안경잡이는 딴청을 붙이는 말눈치다.
“아, 저 토지사건 말씀요.”
얼금뱅이는 주기가 도는 뻘건 얼굴이 한층더 붉어지는 듯하며
여전히 난로를 등지고 서서 묻는다.
“그러지 않아도 그 일절로 내려온 것인데, 계약은 성립이 되었지만
내 일이 낭패가 돼서…… 연이틀을 붙들고 놓아 주어야지.
매일 기생에 아주 멀미를 대었소.
술 잘 먹고 놀기 좋아하고 참 노당익장(老當益壯)야…….”
경북 도장관이라면 일본 사람이거니와, 도장관을 칭송을 하는 것인지
긴하게 보인 자랑이 더 긴해서 떠드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에! 에!”
하며 얼금뱅이는 감탄하는 듯 부러운 듯하게 대꾸를 하다가,
“그래 지금 인천으로 가시는 길인가요?”
하며 또 묻는다. 금테안경은
또 한번 눈살을 잠깐 찌푸리는 듯하더니 다시 얼굴빛을 고치며,
“내야 원래 관계 있소. 저 사람이 죄다 하니까.
한데, 영감하고 이야기하던 것은 아주 틀리는 모양이오?
어떻게 과히 무엇 하지도 않겠고, 영감 체면도 상하지 않게
할 터이니 잘 해보시구려.”
하며 한층 소리를 낮춰서 다정한 듯이 웃어 보인다.
“글쎄 나중에 기별하지요마는 어떻든 반승낙은 받았으니까
그쯤만 알아 두시구려.”
얼금뱅이는 이렇게 대답을 하고 좌우를 한번 휙 돌아보았다.
이야기는 뚝 끊기고 얼금뱅이는 그 옆에 빈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의 수작은 어쩐지 암호를 써가며 하는 수수께끼 같으나
누가 듣든지 반짐작은 할 것이다. 첫눈에 벌써 김의관 같은 위인이라고
대중을 댄 것이 틀림없었던 것이 한편으로 유쾌도 하지마는
불하운동(拂下運動)을 다니는 놈을 도장관이 한박 먹였다는 것은
이 자의 허풍이기도 하겠지마는 사실이면 까닭수가 있는 것이리라.
김의관이라면, 나는 진고개 헌병사령부에 쫓아가 보던 생각을
어느 때든지 잊지 않고 있다. 우리집이 아직 시골에 있을 때에
나는 소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와서 김의관의 집에서 중학교에 통학을
하였었다. 첩의 집에만 들어박혔던 김의관이 그때는 돈에 꿀려서
본집에 와서 있었던지, 나 있는 방과 마주 보이는 건넌방에 있었다.
그게 그해 팔월 스무날께쯤 되었었는지 빗방울이 뚝뚝 듣는 초가을날
오후이었다. 학교에서 막 돌아와서 문간에 들어서려니까
김의관 마누라가 울상을 하고 뛰어나와서 책보를 받으면서,
“경식이 아버지가 지금 뉘게 붙들려 가셨는데
이리 나간 모양이니 좀 쫓아가 봐주게.”
하며 그렇게 못마땅해하던 영감이건마는 허겁지겁이었다.
나도 깜짝 놀라서 가리키는 편으로 골목을 빠져서 달음박질을 하여
가노라니까, 양복쟁이 두 사람에게 옹위가 되어 가는 모시두루마기를
입은 김의관의 뒷모양이 눈에 띄었다. 나는 가슴이 두근두근하나
사오 간통이나 떨어져서 살금살금 쫓아갔었다.
김의관이 붙들려 가는 것을 쫓아가 본 일이 이번째 두 번이다.
몇 달 전에 내가 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아니 되어서다.
그때가 아마 첩과 헤어지자고 싸우고 본집으로 기어든 지
며칠 안 되던 때인 듯싶다. 어느 날 순검이 와서 위생비든가
청결비든가를 내라고 독촉을 하니까,
“없는 것을 어떻게 내란 말요?
이 몸이라두 가져갈 테거든 가져가구려.”
하고 소리소리 질러 가며 순검에게 발악을 하다가 그예 순검이
가자고 끌어내니까 문지방에 발을 버티고 아니 나가려고
한층더 발악을 하며,
“이놈, 이놈, 사람 죽이네. 어구, 사람 죽이네…….”
하고 순검에게 멱살을 붙들린 김의관은 순검보다도 더 야단을 치다가
그예 붙들려 가고야 말 제, 나는 가는 곳을 알려고 뒤쫓아 나섰었다.
그때에 나는 김의관이 이 세상에서 제일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었다. 나는 시골 구석에서 순검이라면, 환도 차고 사람 치고
잡아가는 이 세상의 제일 무서운 사람으로 알고 자라났다.
그런데 김의관은 그 제일 무서운 사람더러 이놈 저놈 하며
할 말을 다 하고 하인 부리듯이,
“이놈! 거기 섰거라. 누가 잘못했나 해보자!”
하며 안으로 들어와서 문지방에서 벗겨진 정강이에다가 밀타승을
기름에 개어 바른다, 옷을 갈아입는다, 별별 거레를 다 하고 나서
의기양양하게 순검보다 앞장을 서서 나가는 것을 보고
나는 어린 마음에 유쾌도 할 뿐 아니라 제일 무서운 사람이
제일 못나 보이고, 제일 우습던 김의관이 제일 잘나 보였던 것이다.
더구나 쫓아가서 교번소에 들어가더니 거기 앉았던 일본 순검더러
무어라 무어라 몇 마디 하고 웃으며 나오는 김의관을 볼 제,
나는 이 늙은이가 이렇게도 권리가 좋은가 하고 혼자 놀랐었다.
그러나 이번에 붙들려 가는 것을 보니, 아무 말도 없이 올가미를
씌운 개새끼처럼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두 양복쟁이에게 끌리어가더니,
병정이 좌우에서 파수를 보고 섰는 커다란 퍼런 문으로 들어가서
자취가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가던 길을 휘더듬어 급히 돌아와서 집안 식구더러
이러저러한 데더라고 가르쳐 주었었다.
그날 저녁부터 경식이와 행랑 아범은 하루 세 끼 밥을 나르기에
골몰하였었다. 그러더니 한 보름쯤 지나니까 한일합병이 반포되고
뒤미처서 김의관은 해쓱한 얼굴로 별안간 풀려 나왔다.
그때의 김의관은 조금도 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 줄은 나도 짐작하였었다. 그런데 반 달쯤 갇혔다가
나온 김의관은 금시 발복이 되었는지 늙은이가 양복을 몇 벌씩
새로 장만을 하고, 헤지었던 첩을 다시 불러다가 큰마누라하고 한집에
살게 하며, 매일 나가서는 술이 취하여 들어오기도 하고,
나이가 아깝게 새 양복을 찢어 가지고 들어오는 때도 있었다.
그러한 지 한 달쯤 되더니, 시골에다가 집과 땅을 장만하였으니
내려가자 하고 처첩을 다 데리고 낙향을 하여 버렸다.
그때서야 제일 무서운 사람에게도 발악을 쓰던 김의관이,
두어 달 전에, 올가미 쓴 개새끼처럼 유순히 끌려가던 까닭을
더 분명히 알게 되었었다.
김의관은 내가 일본에 가기 전에는 자기 시골에서 학교를 세워 가지고
교장 노릇도 하고 장거리에 나와서는 정미소를 한다는
소문도 들었으나, 그 후에 나와서 들으니까 그것도 인천 가서
미두(米豆)에 다 까불리고 지금은 남의 집의 협포에 들어서 다른 첩과
산다고 한다. 지금 이 좋은 외투에 몸을 싸고 금테안경을 쓴 신사도
인천을 가느니 토지의 계약을 하였느니 하는 말을 들으면,
이전에 붙들려 가보기도 하고 낙향도 하고 정미소도 하여 보다가
인천 미두에 다니지나 않는가 하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다가 호상차지나 하러 다니고……?’
나는 이렇게 생각을 하여 보고 혼자 속으로 웃으며
금테안경을 또 한번 돌려다보았다.
기차가 영동역에 도착하니까
사냥꾼의 일행은 내리고 승객의 한 떼가 몰려 올라왔다.
“눈이 이렇게 몹시 왔다가는 내일 어디 장이 서겠나?
오늘두 얼매 손인지 알 수가 없는데…….”
“공연히 우는 소리 말게, 누가 뺏어 가나? 허허허.”
하며 장꾼 같은 일행이 들어와서 자리들을 잡느라고 어수선하게
쿵쾅거리며 주거니받거니 제각기 떠들어 댄다.
정거장에 도착할 때마다 드나드는 순사와 헌병보조원이 차례차례로
한 번씩 휘돌아 나가자 기차는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내 앞에는 역시 갓에 갈모를 쓰고 우산에 수건을 매어 든 삼십 전후의
촌사람이 들어와서 앉았다. 곰방담뱃대에 엽초를 부스러뜨려서 힘껏
담고 나더니 두루마기 속에 손을 넣어서 이 주머니 저 주머니를
한참 뒤적거리다가, 내 옆에 성냥이 놓인 것을 보고,
“이것 잠깐만…….”
하며 내 얼굴을 뚫어지게 들여다본다. 갓쟁이로는 구격이 맞지 않게
손끝과 머리를 끄덕하며 빠르게 나의 눈치를 보는 것이,
분명히 내가 일본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미심쩍고 겁이 나는 눈치다.
나는 웃으며 성냥통을 집어 주었다.
담배를 붙이고 난 장꾼은 또 한번 고개를 끄덕하며 나에게 성냥갑을
도로 주고 나서, 인제는 안심하였다는 듯이
싱글싱글 웃으며 나의 얼굴을 멀거니 쳐다보다가,
“우리 인사하십시다.”
하며 번잡스럽게 말을 붙인다.
나는 몹시 덜렁대는 위인이라고 생각하고 웃으며 하자는 대로 하였다.
인사를 한 뒤에 매캐하고 독한 연기를 훅훅 뿜으며,
“어디로 오시나요?”
하고 묻는다. 내가 사방모를 쓴 것을 보고 일본에서 오나 싶어
이야기가 하고 싶은 눈치다.
“김천서요.”
나는 마주 앉은 자의, 광대뼈가 내밀고 두꺼운 입술을
커다랗게 벌린 시커먼 얼굴을 쳐다보며 대답을 하였다.
“고향이 거기신가요?”
“네에.”
“말소리가 다르신데요?”
부전부전한 친구라고 생각하며 나는 웃어만 버렸다.
“어떤 학교에 다니시나요? 일본서 오시지 않으시는가요?”
무료한 듯이 잠자코 앉았다가 또다시 묻는다.
“어떻게 아슈?”
나는 웃으며 되물었다.
“아, 일본 갔다 오시는 분은 모두 그런 양복을 입으십디다그려.”
하며 궐자는 외투 위로 내다보이는 학생복 깃에 달린 금글자를
바라보고 웃었다. 일본 유학생이 더구나 합병 이후로는 신시대,
신지식의 선구인 듯이 쳐다보이는 때라, 이 촌청년도 부러운 눈으로
나를 자꾸 쳐다보며 이것저것 묻고 싶으나
무얼 물을지 몰라서 망설이는 모양 같다.
“당신은 무엇을 하슈?”
나는 대답 대신에 딴소리를 하였다.
“네에, 갓〔笠〕장사를 다니는 장돌뱅이입니다.”
그는 자비(自卑)하듯이 웃지도 않으며 자기 입으로 장돌뱅이라 한다.
“갓이오? 그래 요새두 갓이 잘 팔리나요?”
“그저 그렇지요. 촌에서들은 그래두 여전히 갓을 쓰니까요.”
나는 좀 의외로 생각하였다.
두 사람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러나 당신부터 왜 머리는 안 깎으우? 세상이 바뀌었을 뿐 아니라
귀찮고 돈도 더 들지 않소?”
“웬걸요, 촌에서 머리를 깎으려면 더 폐롭고 실상 돈도 더 들죠.
게다가 머리를 깎으면 형장네들 모양으로 ‘내지어(內地語)’도
할 줄 알고 시체학문(時體學問)도 있어야지 않겠나요.
머리만 깎고 내지 사람을 만나도 말대답 하나 똑똑히 못 하면
관청에 가서든지 순사를 만나서든지 더 성이 가신 때가 많지요.
이렇게 망건을 쓰고 있으면 요보라고 해서 좀 잘못하는 게 있어도
웬만한 것은 용서를 해주니까 그것만 해도
깎을 필요가 없지 않아요.”
하며 껄껄 웃어 버린다.
“그두 그럴듯하지마는 같은 조선 사람끼리라도 머리만 깎고
양복을 입고 개화장(開化杖)을 휘두르고 하면 대접이 다른 것같이,
역시 머리라도 깎는 것이 저 사람들에게 천대를 덜 받지 않소.
언제까지든지 함부로 훌뿌리는 대로 꿉적꿉적하고
요보란 소리만 들으려우?”
나는 궐자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동정은 하면서도,
무어라고 하나 들어 보려고 이렇게 물었다.
“훌뿌리거나 요보라고 하거나 천대는 받을 때뿐이지마는,
머리나 깎고 모자를 쓰고 개화장이나 짚고 다녀 보슈.
가는 데마다 시달리고 조금만 하면 뺨따귀나 얻어맞고
유치장 구경을 한 달에 한두 번쯤은 할 테니!
당신네들은 내지어나 능통하시지요? 하지만 우리 같은 놈이야
맞으면 맞았지 별수 있나요!”
천대를 받아도 얻어맞는 것보다는 낫다! 그도 그럴 것이다.
미친 체하고 떡목판에 엎드러진다는 셈으로 미친 체하고 어리광
비슷한 수작을 하거나, 스라소니 행세를 하거나 하여, 어떻든지
저편의 호감을 사고 저편을 웃기기만 하면 목전에 닥쳐오는 핍박은
면할 것이다. 속으로는 요놈 하면서라도 얼굴에만 웃는 빛을 띠면
당장의 급한 욕은 면할 것이다. 공포(恐怖), 경계(警戒), 미봉(彌縫),
가식(假飾), 굴복(屈服), 도회(韜晦), 비굴(卑屈)……
이러한 모든 것에 숨어 사는 것이
조선 사람의 가장 유리한 생활방도요, 현명한 처세술이다.
실상 생각하면 우리의 이러한 생활철학은 오늘에 터득한 것이 아니요,
오랫동안 봉건적 성장과 관료전제 밑에서 더께가 앉고 굳어빠진
껍질이지마는, 그 껍질 속으로 점점더 파고들어가는 것이
지금의 우리 생활이다.
“어떻든지 그저 내지인과 동등한 대우만 해주면
나중엔 어찌 되든지 살아갈 수 있겠죠.”
청년은 무엇에 쫓겨 가는 사람처럼 차 안을 휘휘 돌려다보고 나서
목소리를 한층 낮추어서 다시 말을 잇는다.
“가령 공동묘지만 하더라도 내지에도 그런 법률이 있다 하면
싫든 좋든 우리도 따라가는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우리에게는 또 우리의 유풍이 있지 않습니까?
대관절 내지에도 그런 법이 있나요?”
의외에 이 장돌뱅이도 공동묘지 이야기를 꺼낸다.
나는 아까 형님한테 한참 설법을 듣고 오는 길에
또 이러한 질문을 받고 보니, 언제 규정이 된 것이요 어떻게
시행하라는 것인지는 나로서는 알고 싶지도 않고, 그까짓 것은
아무렇거나 상관이 없는 일이지마는, 아마 요사이 경향에서
모여 앉으면 꽤들 문젯거리, 화젯거리가 되는 모양이다.
나는 한번 껄껄 웃어 주고 싶었으나 그리할 수는 없었다.
“일본에도 공동묘지야 있다우.”
나 역시 누가 듣지나 않는가 하고 아까부터 수상쩍게 보이던
저편 뒤로 컴컴한 구석에 금테를 한 동 두른 모자를 쓴 채 외투를
뒤집어쓰고 누웠는 일본 사람과, 김천서 나하고 같이 오른 양복쟁이
편을 돌려다보았다. 나의 말이 조금이라도 총독정치를 비방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중에서 무슨 오해가 생길지
그것이 나에게는 염려되는 것이었다.
“정말 내지에도 공동묘지가 있에요?
하지만 행세하는 사람야 좀 다르겠죠?”
“그야 좀 다르겠지마는, 어떻든지 일본에서는 주로 화장을 지내기
때문에 타고 남은…… 아마 목구멍뼈라든가를 갖다가 묻고 목패든지
비석을 세운다우. 그러지 않어도 살아 있는 사람도 터전이 좁아서
땅조각이 금조각 같은데, 죽는 사람마다 넓은 터전을 차지하다가는
이 세상에는 무덤만 남고 말지 않겠소, 허허허.”
나는 이러한 소리를 하면서도 묘지를 간략하게 하여 지면을 축소하고
남는 땅은 누구의 손으로 들어가고 마누 하는 생각을 하여 보았다.
“그리구서니 자기의 부모나 처자를 죽었다구 금세루 살라야 버릴 수가
있습니까? 더구나 대대로 내려오는 제 집 산소까지를.”
이 사람은 나의 말이 옳다는 모양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도
그래도 반대를 한다.
“화장을 지낸다기루 상관이 뭐겠소. 예전에 애급이라는 나라에서는
왕후 장상의 시체는 방부제를 쓰고 나무관에 넣은 시체를
다시 석관까지에 튼튼히 넣어서 피라미드라는 큰 굴 속에
묻어 두었지만, 지금 와서는 미이라밖에는 되지 않고 만 것을 보면
죽은 송장에게 능라주의(綾羅紬衣)를 입히고
백 평, 천 평 되는 땅에다가 아무리 굳게 파묻기로
그것이 무엇이란 말이오. 동상을 세우면 무얼 하고
송덕비를 세우면 무엇에 쓴다는 말이오.”
내 앞에 앉았는 장꾼은 무슨 소리인지
귀에 자세히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녜에, 그런 것이 있에요?”
하고 멀거니 앉았다.
“하여간 부모를 생사장제(生事葬祭)에 예(禮)로써 받들어야 할 거야
더 말할 것 없지마는, 예로 하라는 것은 결국에 공경하는 마음이나
정성을 말하는 것 아니겠소? 그러니 공동묘지 법이란
난 아직 내용도 모르지마는, 그것은 별문제로 치고라도,
그 근본정신은 생각지 않고 부모나 선조의 산소 치레를 해서
외화(外華)나 자랑하고 음덕(蔭德)이나 바란다는 것도
우스운 수작이란 것을 알아야 할 거 아니겠소.
지금 우리는 공동묘지 때문에 못살게 되었소?
염통 밑에 쉬스는 줄은 모른다구, 깝살릴 것 다 깝살리고 뱃속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도 죽은 뒤에 파묻힐 곳부터 염려를 하고
앉았을 때인지? 너무도 얼빠진 늦둥이 수작이 아니오? 허허허.”
나는 형님에게 하고 싶던 말을
장돌뱅이로 돌아다니는 이 자를 붙들고 한참 푸념을 하였다.
이야기를 하고 나니까 어쩐지 열적었다. 그러나 내가 한참 떠드는
바람에 여러 사람의 시선은 이리로 모인 모양이다.
저편에 앉았는 기생아씨도 몸을 틀고 돌려다보며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이야기를 열심으로 듣는 모양이다.
“나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래 형장께서도 양친이 계시겠지요?
어떻게 하실 텐가요?”
갓장수는 내 말은 어찌 되었든지 불평이 있으니만치 시비조로 덤빈다.
“되어 가는 대로 합시다.”
하며 나는 웃고 입을 답쳤다.
“그래두 누구나 부모나 조상을 위하는 것은 똑같겠죠?”
나는 더 말해야 쓸데가 없다고 생각하며 아무 말 아니 하려다가,
그래도 오해를 사면 안 되겠기에 또 대꾸를 하여 주었다.
“글쎄 공동묘지가 좋으니 부모를 그리 모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그보다도 더 절급한 문제가 하도 많다는 말 아니오?
그 절급한 문제는 내버려두고―---
산 사람 문제는 내버려두고 왜 죽은 뒤의 문제부터 기가 나서
법석이냔 말요. 아버지, 어머니가 굶어 돌아가도 공동묘지에만
장사를 안 지내면 되겠소? 당신은 몇 대조까지나 선영(先塋)을
찾는지 모르겠지마는, 가령 십 대조 이상의 묘지를 못 찾는다면
그것은 공동묘지기 때문이란 말요…….”
하고 나는 화를 버럭 내다가 목소리를 낮추면서,
“그러니까 공동묘지가 좋다는 것이 아니라 근본 문제,
앞으로의 문제, 자식의 문제를 생각하여 놓고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오.”
하고 나는 농쳐 버렸다.
“나는 모르겠습니다.”
하며 갓장수는 픽 웃어 버린다. 나는 잠자코 말았으나 어쩐지
불유쾌하였다. 갓장수 따위를 데리고 그러한 논란을 한 것이 점잖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남이 들으면 웃을 것 같아서 혼자 부끄러웠다.
두 사람이 잠자코 앉았으려니까 차는 심천(深川) 정거장엔지
도착한 모양이다. 새로운 승객도 별로 없이 조용한 속에 순사가
두리번두리번하고 뚜벅 소리를 내며 들어와서 저편 찻간으로 지나간
뒤에 조금 있으려니까, 누런 양복바지를 옹구바지로 입고 작달막한
키에 구두 끝까지 철철 내려오는 기다란 환도를 끌면서 조선 사람의
헌병보조원이 또 들어왔다. 여러 사람의 눈은 또 긴장해지며 일시에
구랄 만한 누렁저고리를 입은 조그마한 사람에게로 모이었다.
이 사람은 조그만 눈을 똥그랗게 뜨고 저편서부터 차츰차츰 한 사람씩
얼굴을 들여다보며 이리로 온다. 누구를 찾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공연히 가슴이 선뜩하였으나, 이 찻간에는 나를 미행하는 사람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니까 안심이 되었다.
찻간 속은 괴괴하고 현병보조원의 유착한 구둣소리만 뚜벅뚜벅 난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가슴은 컴컴한 남포의 심짓불이 떨리듯이
떨리었다. 한 사람, 두 사람 낱낱이 얼굴을 들여다보고 지나친 뒤의
사람은, 자기는 아니로구나, 살았구나! 하는 가벼운 안심이 가슴에
내려앉는 동시에 깊은 한숨을 내쉬는 모양이 얼굴에 완연히 나타났다.
헌병보조원의 발자취는 점점 내 앞으로 가까워 왔다.
나는 등을 지고 돌아앉았고, 내 앞의 갓장수는 담뱃대를 든 채
헌병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앉았다. 헌병보조원은 내 곁에 와서
우뚝 선다. 나는 가슴이 뜨끔하여 무심코 쳐다보았다.
그러나 헌병보조원은 나를 본체만체하고 내 앞에 앉았는 갓장수를
한참 내려다보고 섰더니 손에 들었던 종잇조각을 펴본다.
내 가슴에서는 목이 메게 꿀떡 삼키었던 토란만한 것이 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찻간은 고작 헌병보조원―---
어린 조선 청년 하나의 한마디로 괴괴하여졌다.
“당신, 이름이 뭐요?”
헌병보조원은 갓장수더러 물었다.
“나요? 김××예요.”
하며 허둥지둥 일어선다.
“당신이 영동(永同)서 갓을 부쳤소?”
“녜, 녜.”
“그럼 잠깐 내립시다.”
찻간 속은 쥐죽은 듯한 공포에서 겨우 벗어났다.
여기저기서 수군수군하는 소리가 난다.
나의 앞에 앉아서 이때까지 노닥거리던 말동무는
헌병보조원의 앞을 서서 허둥지둥 차에서 내렸다.
그러나 문 밖으로 나간 뒤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내 앞에는 수건으로 질끈 동인 헌 우산 한 개가 의자의 구석에 기대어
섰다. 나는 유리창을 올리고 캄캄한 밖을 내다보며 소리를 쳤으나
벌써 간 곳이 없었다. 난로에 석탄을 넣으러 들어온 역부에게
그 우산을 내주면서 물어 보니,
주는 우산은 받으면서도 이편 말은 못 알아들은 듯이,
“나니(무엇이야)? 나니?”
하며 여전히 못 알아들은 체하고 일본말로 묻는 데에는 어이가 없었다.
발길로 지르고 싶었다.
자정이나 넘은 뒤에 차는 대전에 와서 닿았다. 김의관 같은 금테안경
채비의 하이칼라 신사는 커다란 가죽가방에 담요를 비끄러매어서 옆에
놓았던 것을 앞에 앉았던 사람에게 들려 가지고 내려갔다.
그러나 기생은 내리지 않는다.
얼마나 정거하느냐고 소제하는 역부더러 물어 보니까,
삼십 분 동안이라고 멱따는 소리를 꽥 지르고 달아난다.
나는 하도 심심하기에 모자를 집어 쓰고 차에서 내려서 플랫폼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갔다. 그 동안에 눈이 서너 치나 쌓인 모양이다.
지금은 뜸하나, 뼈에 저린 밤바람이 모가지를 자라목처럼
오그라뜨리었다. 맨 끝에 달린 찻간 앞까지 오니까 불을 환하게 켠
차장실 속에 얼굴이 해끄무레한 두 청년이 검정 방한모에 소매통이
좁은 옥색 두루마기를 입고, 누런 양복을 입은 헌병과 마주 서서
웃으며 이야기를 하는 것이 환히 보이었다.
얼굴 모습이 같은 것을 보면 두 청년은 형제 같고, 헌병 가슴에 권총을
단 줄이 늘어진 것을 보면 보조원이 아니요 이것이 분명하다.
나는 창 밑으로 가까이 가보니까 세 사람은 여전히 웃으며 무어라고
속살거린다. 그러나 그 청년들의 어설프게 웃는 낯빛과 입술이
경련적으로 위로 뒤틀린 것은 공포 그것 같았다.
‘스파이는 아니군!’
하는 가벼운 생각으로 나는 발길을 돌이켜 목책으로 막은 입구 앞으로
가서 내 손으로 열고 나갔다. 아무도 막지 않고 좌우편으로 눈발이
쳐들어 오는 휑뎅그레한 속으로 한가운데에 난로랍시고 놓고
그 가에 옹기종기 사람들이 모여 섰다.
‘대합실도 없이 이런 벌판에 세워 둘 지경이면
어서 찻간으로 들여보낼 일이지!’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난로 옆을 흘끗 보려니까 결박을 지은 범인이
댓 사람이나 오르르 떨며 나무의자에 걸터앉고, 그 옆에는 순사가
셋이서 지키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무심코 외면을 하였다.
그 중에는 머리를 파발을 하고 땟덩이가 된 치마저고리의 매무시까지
흘러내린 젊은 여편네도 역시 포승을 지어서 앉아 있다.
부끄럽지도 않은지 나를 부러워하는 듯한 눈으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인다. 자세히 보니 등뒤에는 쌕쌕 자는 아이가 매달렸다.
여자의 이런 꼴을 처음 보는 나는 가슴이 선뜩하며 멀거니 얼이 빠져
섰었다. 나는 흉악한 꿈을 꾸며 가위에 눌린 것 같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한참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쳤다.
정거장 문 밖으로 나서서 눈을 바삭바삭 밟으며 큰길 거리로 나가니까
칠 년 전에 일본으로 달아날 제, 오정때 대전에 내려서
점심을 사먹던 그 집이 어디인지 방면도 알 수 없이 시가가 변하였다.
길 맞은편으로 쭉 늘어선 것은 빈지를 들였으나 모두가 신축한 일본
사람 상점이다. 우동을 파는 구루마가 쩔렁쩔렁 흔드는 요령 소리만이
괴괴한 거리에 처량하다. 열네다섯쯤에 말도 모르고 단신 일본으로
공부 간다는 데에 호기심이 있었던지 친절히 대접을 해주던,
그때의 그 주막집 주인 내외가 그립다.
다시 돌쳐 들어오며 보니, 찻간에서 무슨 대수색을 하는지 승객들은
아직도 아니 들여보내고, 결박을 지은
여자는 업은 아이가 깨어서 보채니까 일어서서 서성거린다.
‘젖이나 먹이라고 좀 풀어 줄 일이지.’
하는 생각을 하니 곁에 시퍼렇게 얼어서 앉은 수사가 불쌍하다가도
밉살맞다. 목책 안으로 들어오며 건너다보니까 차장실 속에 있던
두 청년과 헌병도 여전히 이야기를 하고 섰다.
나는 까닭 없이 처량한 생각이 가슴에 복받쳐 오르면서
한편으로는 무시무시한 공기에 몸이 떨린다.
젊은 사람들의 얼굴까지 시든 배춧잎 같고 주눅이 들어서 멀거니
앉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빌붙는 듯한 천한 웃음이나 ‘헤에’ 하고
싱겁게 웃는 그 표정을 보면 가엾기도 하고,
분이 치밀어 올라와서 소리라도 버럭 질렀으면 시원할 것 같다.
‘이게 산다는 꼴인가? 모두 뒈져 버려라!’
찻간 안으로 들어오며 나는 혼자 속으로 외쳤다.
‘무덤이다! 구더기가 끓는 무덤이다!’
나는 모자를 벗어서 앉았던 자리 위에 던지고 난로 앞으로 가서 몸을
녹이며 섰었다. 난로는 꽤 달았다. 뱀의 혀 같은 빨간 불길이
난로 문 틈으로 날름날름 내다보인다.
찻간 안의 공기는 담배연기와 석탄재의 먼지로 흐릿하면서도 쌀쌀하다.
우중충한 남폿불은 웅크리고 자는 사람들의 머리 위를 지키는 것
같으나 묵직하고도 고요한 압력으로 지그시 내리누르는 것 같다.
나는 한번 휘 돌려다보며,
‘공동묘지다! 공동묘지 속에서 살면서
죽어서 공동묘지에 갈까 봐 애가 말라하는 갸륵한 백성들이다!’
하고 혼자 코웃음을 쳤다.
‘공동묘지 속에서 사니까 죽어서나 시원스런 데 가서 파묻히겠다는
것인가? 그러나 하여간에 구더기가 득시글득시글하는 무덤 속이다.
모두가 구더기다. 너도 구더기, 나도 구더기다.
그 속에서도 진화론적 모든 조건은 한 초 동안도 거르지 않고
진행되겠지! 생존경쟁이 있고 자연도태가 있고 네가 잘났느니
내가 잘났느니 하고 으르렁댈 것이다.
그러나 조만간 구더기의 낱낱이 해체가 되어서 원소가 되고
흙이 되어서 내 입으로 들어가고 네 코로 들어갔다가,
네나 내나 거꾸러지면 미구에 또 구더기가 되어서 원소가 되거나
흙이 될 것이다. 에잇! 뒈져라! 움도 싹도 없이 스러져 버려라!
망할 대로 망해 버려라! 사태가 나든지 망해 버리든지 양단간에
끝장이 나고 보면 그 중에서 혹은 조금이라도 쓸모 있는
나은 놈이 생길지도 모를 것이다.’
나는 차가 떠나기 전에 자기 자리로 와서 드러누웠다.
어느덧 난로 옆으로 등 너머에 와서 누운 기생의 머리에서 가끔가끔
끼쳐 오는 머릿내와 향긋한 기름내, 분내를 코로 은은히 맡아 가며
눈을 감고 누웠었다.
‘이것도 구더기 썩는 냄새이기는 일반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여 보면서도 코를 막으려고는 아니 하였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어느덧 잠이 소르르 왔다.
몇 번이나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편치 못한 잠을 잔 둥 만 둥하고
눈을 떠보니까 긴긴밤도 흐지부지 훤히 밝았다.
으스스하기에 난로 앞으로 가서 불을 쪼이며 옆사람더러 물어 보니
시흥(始興)에서 떠났다 한다.
인제는 서울도 다 왔구나!고 생각하니, 그래도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영등포를 지나서 한강 철교를 건널 때에는
대리석으로 은구를 놓은 듯한, 사람 그림자라고는 없는 빙판을
바라보고 무심코 기지개를 켜며 두 다리를 쭉 뻗었다.
용산역에까지 오니까 뒤의 기생이 일어나서 매무시를 만적거리고
곧 내릴 사람같이 나를 유심히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차가 떠나려고 호각을 부는 소리를 듣고서 그대로 앉아 버렸다.
서울이 처음 길이라 마음이 불안해서 무엇을 물어 보려고 그리하는지
수상하다. 내가 자기 자리로 와서 선반에서 짐을 내려놓고
내릴 채비를 차리는 동안에도 일거일동을 눈으로 좇으면서
무슨 말을 붙일 듯 붙일 듯하다가 입을 벌리지 못하고 마는 모양이다.
서울에 내려서 찾아갈 길을 묻자든지 무슨 까닭이 있는 것 같아서
이편에서 먼저 입을 벌리고 싶었으나,
대학 제복 제모에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모른 척해 버렸다.
기차는 남대문에 도착하였다.
집에서 나온 큰집 종형님과 짐을 나누어 들고 나와서 인력거를 타다가
보니, 그 기생은 길 잃은 아이처럼 길체로 비켜 서서 우두커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걱정 아니 하여도 저 찾아갈 데로
찾아가겠지마는, 어떤 사정인지 이 추운 아침에 가엾어 보였다.
7
온밤 새도록 쏟아진 눈은 한 자 길이는 쌓였을 거라.
인력거꾼은 낑낑 매며 끄나 바퀴가 마음대로 돌지를 않는다.
북악산에서 내리지르는 바람은 타고 앉았는 사람의 발끝 코끝을 쏙쏙
쑤시게 하고, 안경을 쓴 눈이 어른어른하도록 눈물을 핑 돌게 한다.
남문 안 ‘신창’으로 나가는 술집 더부살이 같은 것이 굴뚝에서
기어나온 사람처럼 오동이 된 두루마기 위로 치룽을 짊어지고 팔짱을
끼고 충충충 걸어가는 것이 가다가다 눈에 띌 뿐이요, 아직 거리에는
사람 자취도 별로 없다.
불이 나가지 않은 문전의 외등(外燈)은 졸린 듯이 뽀얗게 김이 어리어
보인다. 인력거꾼은 여전히 허연 입김을 헉헉 뿜으며 다져진 눈 위로
꺼불꺼불하며 달아난다.
나는 일년 반 만에 보는 시가를 반가운 듯이 이리저리 돌려다보고
앉았다가, 어느덧 머릿속에 아내의 가죽만 남은
하얗게 센 얼굴이 떠올랐다.
‘이래도 남편이라고 기다리고 있을 테지?’
나는 이런 생각도 하여 보았다.
그러나 가엾은 생각이라고는 아니 난다.
도리어 별안간 아까 정거장에서 섭섭한 듯이 바라보고 섰던
대구 기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갸름하고 감숭한 얼굴, 무슨 불안을 호소하려는 듯한 그 눈.
‘지금쯤 어디를 헤매누? 말을 좀 붙여 보았더라면 좋았을걸!’
나는 추운 생각도 잊어버리고 멀거니 이런 생각을 하고 앉았다가,
우리집에 들어가는 동리를 지나쳤다. 인력거꾼의 꾸지람을 들어 가며
두어 간통이나 되짚어 내려와서 내렸다.
집안 식구들은 벌써 일어나서 세수까지 하고 앉아서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다.
“공부두 중하지만 그렇게도 좀 아니 나온단 말이냐.”
하며 어머님은 벌써부터 우는 목소리다.
“그래두 눈을 감기 전에 만나라도 보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하고 또 우신다. 과부가 된 뒤로 본가살이를 하는 큰누이도
훌쩍훌쩍하고 섰다. 작은누이도 덩달아서 눈을 부빈다.
뜰에서 멀거니 바라보고 섰던 큰집 사촌형수도 까닭 없이 돌아서며
행주치마로 콧물을 씻는 눈치다. 그래도 아버지만은
벌써 안방에 들어와 앉으셔서 잠자코 절을 받으셨다.
“아, 무엇 때문에 이렇게들 우셔요?”
나는 모친 앞에서도 여러 아낙네에게 핀잔을 주었다.
해마다 오면 어머니의 울고 맞아 주는 것이 귀찮다. 그러한 때에는
내 처도 으레히 제 방으로 피해 들어가서 홀짝거리었다.
반갑다고 우는 것이겠지마는, 아내에게 있어서는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나는 혼자서 눈물이 핑 돌 때가 없지 않지만,
남이 우는 것을 보면 도리어 웃어 주고도 싶고
무어라고 위로할 수도 없었다.
“좀 어떤 셈예요?”
인사가 끝난 뒤에 어머니에게 물으니까,
“그저 그렇지. 어서 들어가 보렴.”
하며 어머니가 안방에서 나와서 건넌방으로 앞장을 서서 들어갔다.
“아가 아가! 서방님 왔다. 얘, 얘, 일본서 서방님 왔어.”
혼수상태에 있던 병인은 눈을 슬며시 뜨고 시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다보고 나서 곁에 앉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까맣게 탄
입술을 벌리고 생그레 웃는 듯하더니, 깔딱 질린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하여지며 외면을 한다.
두꺼운 이불을 덮은 가슴이 벌렁거리며 괴로운 듯이 흑흑 느낀다.
“우지 마라, 우지 마라, 인제 낫는다.”
어머니는 이렇게 달래면서도 역시 훌쩍거리며 나가 버리신다.
병풍으로 꼭꼭 막고 오줌똥을 받아 내는 오랜 병인의 방이라 퀴퀴한
냄새에 약내가 섞여서, 밤차에 피로한 사람의 비위를
여간 거스르는 게 아니지마는, 그래도 금시로 나가 버릴 수가 없어서
그 옆에 앉았었다.
“울지 말아요, 병에 해로우니.”
나는 겨우 한마디 하고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좋을지 몰라서
벙벙히 앉았었다.
“중기(重基), 중기 보셨소?”
병인은 눈물을 씻으며 겨우 스러져 가는 목소리로 한마디를 하고
나를 쳐다본다. 곁에 앉았던 계집애년이 집어 주는 수건을 받는 손을
볼 제, 나는 비로소 가엾은 생각이 났다.
가죽이 착 달라붙고 뼈가 앙상한 손이 바르르 떨리었다.
‘저 손이, 이 몸에 닿던 포동포동하고 제일 귀여워 보이던
그 손이던가?’
하는 생각을 하여 보니 어쩐지 마음이 아프고 실쭉하여졌다.
“……난, 나는 죽는 사람이에요. 하, 하지만 저 중기만은…….”
하며 또 기운 없이 입을 벌리다가 목이 메고 말았다.
그저 그 소리지마는 시원하게 울고 싶어도
기운이 진하여서 눈물만 쏟아지는 모양이다.
“그런 소리 말아요, 죽기는 왜 죽어.
마음을 턱 놓고 있으면 나아요.”
“인제는 더 살구 싶지두 않어요, 어떻든 저것만은 잘 맡으세요.”
또다시 흑흑 느끼다가,
“저것을 생각하니까, 하, 하루라두 더 살려는 것이지.”
하며 엉엉 목을 놓고 우나,
가다가다 목이 메어서 모기 소리만큼 졸아들어 갔다.
나는 무어라고 대꾸를 하여야 좋을지 망단하였다.
죽어 가면서도 자식 생각을 하는 것이 불쌍하기도 하고,
부질없는 일 같기도 하다. 오래 앉았으면 점점더 울 것 같고,
또 사실 더 앉았기도 싫기에 나는 울지 말라고 달래면서 안방으로
건너와서, 아랫목에 깔아 놓았던 조선옷과 갈아입었다.
정거장에 나왔던 사촌형이 들어와서,
“사랑에서 부르시네.”
하며 이르고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이 형님은 종가(宗家)의 장남으로
태어난 덕에 일평생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우리집에서 사십 년을
지내 왔다. 그러나 이 형님에게 자식이 없는 것이
집안의 또 큰 걱정거리란다.
사랑에 나가서 깜짝 놀란 것은 김의관이 아버님 옆에 앉았는 것이다.
‘언제부터 또 와서 있누?’
하며 어제 차 속에서 보던 금테안경을 생각하고
들어가서 인사를 하니까,
“잘 있었나? 내환이 위중해서 얼마나 걱정이 되나?”
하며 한층더 점잔을 빼고, 양복은 입었으나 장죽을 물고 앉았다.
아랫목에 도사리고 앉으셨던 아버님은,
“거기 앉어라.”
하며 그 동안 병세의 경과를 소상히 이야기하며 무슨 탕(湯)을
몇 첩이나 썼더니 어떻게 변하고, 무슨 음(飮)을 몇 첩을 써보니까
얼마나 효험이 있었고, 무엇이 어떻게 걸리어서 얼마나 더치었다는
이야기를 기다랗게 들려 주셨으나 나에게는 무슨 소리인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가만히 듣고 앉았다가,
“그 유종(乳腫)은 총독부 병원에 가서
얼른 파종을 시켰더면 좋았을걸요?”
하며 한마디 하니까,
“요새 양의가 무어 안다던? 형두 그 따위 소리를 하기에 죽여도
내 손으로 죽인다고 하였다만…….”
하며 역정을 내셨다. 나는 잠자코 말았다.
안에 들어와서 급히 차려 주는 조반을 먹다가,
“김의관은 왜 또 와 있에요?”
하고 어머니께 물어 보았다.
“집을 뺏기구 첩허구 헤어진 뒤에 벌써부터 와 있단다.”
“그럼 큰집은 어떡하구요?”
“큰집은 있기야 있지만, 언제는 안 돌아다니나 보던.
더구나 셋방으로 돌아다니는 터에! 매일 술타령이요,
사람이 죽을 지경이다.”
하며 어머니는 눈살을 찌푸리셨다.
“그, 왜 붙여요?”
김의관에 대한 숭배심을 잃은 나는 그 반동으로 보기가 싫었다.
“왜 붙이는 게 뭐냐? 아버지께서는 이 세상에 김의관만한 사람이
없다고, 누가 무어라고만 하면 야단이시구,
꼭 겸상해서 잡숫다시피 하시는데.”
김의관은 합방통에 무슨 대신(大臣)으로 합방에 매우 유공한
서자작(徐子爵)의 일긴(一緊)으로서 그 서씨의 집을 얻어 들었는데,
서씨가 올 여름에 죽은 뒤에는 집까지 뺏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으로 서자작이 하던 사업―---이라야 별다른 게 아니라
귀족들의 초상집 호상차지하는 것이지만,
이것만은 대를 물려받아서 한다는 소문이다.
“그건 고사하고, 여보, 김의관이 유치장에 들어갔다가
그저께야 나왔다우. 모닝코트를 입구, 하하하.”
시험이 며칠 아니 남았다고 책상머리에 앉아서 무엇인지를
꼼지락꼼지락하고 앉았던 누이동생이 돌려다보며 말참견을 한다.
“응? 허허, 그거 걸작이다! 헌데 무슨 일루?”
나는 김의관이 예전에 두 번이나 붙들려 가는 것을 따라가 본 일이
있느니만큼 유치장이란 말에 커닿게 웃었다.
“누가 아우. 밤중에 요릿집에서 부랑자 취체에 붙들려 들어갔다가
이 주일 만에 나왔다우, 하하하…….”
“허허허…….”
나는 합병통에 헌병사령부에 가던 일을 생각해 보고,
“이번에는 누가 쫓아갔던?”
하며 또 한번 웃었다.
“아, 참 너두 밤출입 하지 마라. 요새는 부랑자 취체도
퍽 심한 모양인데…….”
어머니는 곁에서 주의를 시킨다.
“왜 내가 부랑잔가요?
그런데 김의관이 유치장에서 나와서 무어라구 해?”
하며 누이더러 물어 보았다.
“아버지께서는 누가 먹어 내기 때문에 들어갔다구 하시지만,
큰집 오빠가 그러는데, 요릿집에서 취체를 당하니까,
물론 독립운동자를 잡으려는 것인데, 김의관이 호기 좋게
정무총감(政務總監)에게 전화를 걸 테라구 법석을 하기 때문에
형사들은 더 아니꽈서,
웬 되지 않은 놈이 이 기승이냐고 곯려 주었나 보다던데요.”
“넌 뭘 안다구 어른들 이야기를 그렇게 하니!”
어머니는 누이를 잠깐 꾸짖고 나시더니, 아랫방에서 중기가 깨었다고
안고 나오는 것을 받아 가지고 들어오신다.
“자아, 너 아범 봐라. 너 아범 왔다. 좀 봐라! 왜 인제 오셨소?”
어머니는 겨우 핏덩어리를 면한 조그만 고깃덩어리를 얼러 가며
나에게로 데미셨다. 처네에 싸인 바짝 마른 아이는 추워서 그러는지
두 팔을 오그라뜨리고 바르르 떨면서, 핏기 없는 앙상한 얼굴을
이리로 향하고 말끄러미 나를 쳐다보다가
으아 하며 가냘픈 목소리로 운다.
“그, 왜, 그 모양이에요?”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왜 어떠냐? 모습이 너 닮아 이쁘지 않으냐? 인제 석 달쯤 된 게
그렇지. 그러나 나면서 어디 에미 젖이라군 변변히 먹어 봤니.
유모를 한 달쯤 댔다가 나가 버린 뒤로는 똑 우유로만 길렀는데.”
울음을 시작한 어린아이는 좀처럼 그치지를 안고 점점더 발악을 한다.
파랗게 질리어서 두 발을 뻗드딩거리고 배를 발딱발딱 쳐들어 가며
방 안을 발깍 뒤집어놓는다.
“에그, 이게 웬 야단이야?”
하며 누이는 보던 책을 덮어 놓고 눈살을 찌푸리며 마루로
홱 나가 버렸다. 나도 상을 밀어 놓고 총총히 일어났다.
사랑으로 나가서 건넌방에 들어가 담배를 피우며 누웠으려니까,
낯 서투른 청년이 하나 찾아왔다. 동경의 소할(所轄)경찰서에서
지금 종로서로 인계를 하여 왔는데 다시 떠날 때까지
자기가 미행을 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얼마 아니 계실 테지요? 늘 쫓아다니지는 않겠습니다.
가끔가끔 올 테니 그 대신에 문 밖이나 시골을 가시거든
요 앞 교번소로 통기를 좀 해주슈.”
하며 매우 생색이나 내는 듯이 중언부언하고 가버렸다.
마음대로 하라고 하였다.
8
삼사 일은 집구석에서 그럭저럭 세월을 보냈다.
아버지는 무슨 일이 그리 분주하신지 매일 아침만 자시면 김의관하고
나가셨다가 어슬어슬해서야 약주가 취하여 들어오시기도 하고
친구를 한 떼씩 몰아 가지고 들어오시기도 하였다.
큰집 형님한테 들으니,
요사이 동우회의 연종 총회가 있어서 그렇다 한다.
“그런 데 관계를 마시래도 한사코 왜 다니신단 말요?
모두 반미친놈들이 모여서 협잡질들이나 하고 남한테 시빗거리만
장만하면서…… 공연히 김의관이 들쑤셔 내서 엄벙뗑하고
돈푼이라두 갉아먹으려고 그러는 것을 그걸 왜 짐작을 못 허셔?”
“내가 아나? 평의원이라는 직함 바람에 다니시는 게지, 허허허.
그런데 중추원 부찬의라두 하나 생길 줄 아시는지도 모르지.”
큰집 형님은 이런 소리를 하며 웃었다.
“중추원 부찬의는 벌써 철겨운 지가 언젠데? 설령 그게 된다기루
그건 왜 하지 못해 애를 쓰신답디까? 참 딱한 일이야.”
“그래두 김의관은 무엇이든지 하나 운동해 드리마던데, 하하하.”
“미친 소리! 저두 못 하는 것을 누구를 시키구 말구. 흥,
또 유치장에나 들어가구 싶은 게로군?”
“그래두 김의관 말은 자기가 총독이나 정무총감하고
제일 긴하다는데, 하하하.”
“서가의 집을 뺏겼으니까, 아버지께 알랑알랑하고 집이나 한 채
얻어 들려는 거지.”
“허허허, 그런 집 있으면 나부터 줍시사 하겠네.”
사실 이 큰댁 형님을 집 한 채 주어 세간을 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동우회라는 것은 일선인(日鮮人)의 동화(同化)를 표방하고
귀족 떨거지들을 중심으로 하여 파고다공원패보다는 조금 나은
협잡배들이 모여서 바둑, 장기로 세월을 보내고 저녁때면 술추렴이나
다니는 회이다. 회의 유일한 사업은 기생연주회의 후원이나
소위 지명지사(知名之士)가 죽으면 호상차지나 하는 것이다.
“나는 요새 좀 바뻐서 약 쓰는 것도 자세히 볼 수 없고 하니,
낮에는 들어앉아서 잘 살펴보아라.”
내가 도착하던 날 아침에 아버지께서 이렇게 이르시기도 하였고,
또 나간대야 급히 찾아가 볼 데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들어엎드려서
큰집 형님하고 저녁때면 술잔 먹고 사랑구석에서 버둥거리고
있었지마는, 알고 보니 다니신다는 데라야 고작 동우회뿐이다.
병인은 하루 한 번이고 두어 번 들여다보아야 더 나은 것 같지도 않고
더친 것 같지도 않고, 의사가 와서 맥인가 본 뒤에 방문을 내면
큰집 형님이 쫓아가서 약봉지를 받아다가 끓여 디밀면 먹는지 마는지
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어머니께서만은 여전히 혼자 애를 쓰시나,
인제는 병구완에 지치시고 집안 사람들의 마음도 심상하여져서 일과로
약시중만 하면 그만인 모양이다. 나부터 병구완을 해본 일이 없으니
어떻게 되어 가는지 대중을 모르겠다.
“그 망한놈의 횐지 무언지 좀 그만두고 어떻게 다잡아서
약이나 잘 쓸 도리를 하셨으면 아니 좋을까.”
하며 어머니께서 부친을 원망을 하시는 소리도 들었다.
“오늘두 또 나가우? 어젯밤부터는 좀 이상한 모양이던데.”
며느리를 들여다보고 나오시는 아버지를 쳐다보며,
어머니께서 책망하듯이 물으시니까,
“오늘은 좀 늦을지도 모를걸! 그리 다를 것은 없군.”
하시고 나가시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더하다는 날도 그 모양이요 낫다는 날도 제턱이다.
또 며칠 음산한 날이 계속하였다.
‘어서 끝장이나 났으면!’
하는 생각이 불쑥 날 때에는,
정자의 생각이 반드시 뒤미처 머리에 떠올라 왔다.
‘지금쯤 무얼 하고 있누? 경도로나 가지 않았나?’
하고 엽서를 띄운 것은, 서울 온 지 일주일이나 지난 뒤이었다.
정자에게 엽서를 부치던 날 저녁때에, 을라는 그 동안 나왔나?
하고 인사 겸 병화(炳華)의 집을 찾아가 보았다.
병화는 동경 유학시대에는 나의 감독자 행세를 하였을 뿐 아니라
비교적 정답게 지냈지만, 을라의 문제가 있은 후로는 그럭저럭 나하고
데면데면하여지기도 하고, 만나면 어쩐지 이렇다할 표면적 별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마는 피차에 겸연쩍게 되었다.
더구나 이 사람 역시 지금 집에 있는 큰집 형님의 이복동생이기
때문에 형제간 자별하지도 못하려니와
우리집에는 한 달에 한 번쯤 들를 뿐이다.
나는 동대문 밑에서 전차를 내려서 아직도 눈에 녹은 땅이 질척거리는
길을 휘더듬어 들어가며, 눈에 익은 거리가 오래간만에 반가운 듯이
여기저기를 휘 돌아보았다.
작년 여름에는 여기를 날마다 대어 섰었다.
그때 을라는 천안(天安) 자기 집에는 가끔 다니러만 가고 서울 와서
이 집에 묵고 있었다. 나는 하루가 멀다고 이 집에 와서는,
밤이고 낮이고 을라와 형수를 데리고 문안을 헤매기도 하고,
달밤에 병화 내외와 을라를 따라서 탑골 승방까지 가본 것도 그때였다.
밤이 늦었다고 붙들면
마지못하는 척하고 묵은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었다.
‘그러나 그때는 나도 참 단순하였어!’
나는 발자국 난 데를 따라서 마른 곳을 골라 디디며 속으로
그때 재미있게 놀던 것을 생각하여 보았다. 김장을 다 뽑아 낸 밭에는
눈이 길길이 쌓이고 길가로 막아 놓은 산울〔生籬〕은 말라빠진
가지만 앙상하게 남았고 얽어맨 새끼도 꺼멓게 썩어 문드러졌다.
‘그때에는 여기에 퍼런 호박덩굴,
외덩굴이 쫙 깔리고 누런 꽃이 건들거리었것다.’
벽돌담을 쌓은 어떤 귀족의 별장인가 하는 것을 지나서 좁은 길을
한 마장쯤 걸어가려니까, 오른편은 낭떠러지가 된다.
‘응, 저기가 자던 날 아침이면 나와서 세수도 하고,
달밤에 나와서 을라와 수건을 잠가 놓고 물튀기를 하던 데로군.’
하며 바위 밑을 내려다보니까, 물이 말랐는지 얼음눈이 허옇게
뒤집어씌워 있다. 병화 집에는 마침 주인도 돌아와 들어 있었다.
“언제 나왔나? 나왔다는 말은 들었지만.
한번 간다면서 자연 바뻐서…….”
하며 양복을 입은 병화는 방에서 튀어나왔다.
지금 막 들어온 모양이다.
“아씨는 좀 어떠세요?”
하며 형수도 반가운 듯이 어린아이를 안고 나와서 인사를 한다.
“명이 길면 살겠지요. 하나를 낳아 놓으니까
신진대사로 하나는 가야지요.”
하고 나는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에그, 흉한 소리두 하십니다.”
“아, 참, 좀 차도가 있으신 모양인가? 처음부터 양의를 대어 가지고
수술을 한 뒤에 한약을 들이댄다든지 하였더면 좋았을걸.
언젠가 그런 말씀을 하였더니 아버지께서는 펄쩍 뛰시는
모양이시기에 시키지 않은 참견은 하기가 싫어서 그만두었지만.”
“나 역시 하시는 대루 내버려두지. 지금 어쩌니어쩌니 한들
쓸데두 없구, 제 계집이니까 어쩐다구 하실까 봐서
되어 가는 대루 내버려두지. 하지만 며칠 못 갈 듯싶어.”
“그래서 어쩝니까?”
형수가 웃으면서 눈살을 찌푸린다.
한참 병인의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생각난 듯이,
“아, 그런데 을라 오지 않었에요?”
하고 형수를 쳐다보았다.
“아뇨, 왜, 나왔대요?”
하고 형수는 나의 얼굴을 살피듯이 쳐다본다.
병화는 못 들은 체하고 일어나서 양복을 벗기 시작한다.
“아뇨, 글쎄, 나왔는가 하구요.”
“아뇨.”
하며 형수는 생글생글 웃다가 끼고 앉은 어린애를 들여다보고 말았다.
나는 어쩐지 온 것을 속일 것은 무언구? 하며 불쾌하였다.
“오는 길에 신호에 들렀더니, 부득부득 같이 가자는 것을 떼어 버리고
왔는데, 이삼 일 후에는 떠나겠다 했으니까 벌써 왔을 텐데요.”
하며 숨길 것이 무어냐는 듯이 불쾌한 내색을 보였다.
“네에, 하지만 바쁘신 길인데 거기는 어째 들르셨에요?”
하고 형수는 책망하듯이 묻는다.
“심심하기에 들렀다가 형님께 소식이라두 전해 드리려구요.”
하며 나는 슬쩍 웃어 버렸다. 형수도 기가 막힌 듯이 웃어 버린다.
“미친 소리로군. 내가 을라 소식 알겠다던가?”
병화는 옷을 갈아입고 자기 자리로 와서 앉으며,
“그 무어 없지? 무얼 좀 사오라구 하지.”
하며 아내와 대접할 의논을 한다.
“아, 난 곧 갈 테에요…… 그런데 작년 생각 하십니까?”
하며 나는 짓궂이 종형수에게 을라의 이야기를 꺼냈다. 형수는 얼굴이
발개지며 픽 웃고 말았다. 나도 상기가 되는 것 같았다.
“자네두 퍽 변하였네그려?”
병화는 을라가 하던 말과 똑같은 소리를 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전 같으면 을라하고 아무 까닭은 없어도 누가 을라란 을자만 물어
보아도 얼굴이 발개지던 사람이 되짚어서 을라의 이야기를 태연히 하고
앉았는 것이 병화에게는 다소 불쾌하기도 하고 이상쩍은 모양이다.
종형수는 일년 전에 무슨 실수가 생길까 보아 두 틈바구니에 끼여서
혼자 마음만 졸이고 있던 일을 머리에 그려 보는지
한참 말없이 앉았다가,
“그래, 공부는 잘 해요?”
하고 묻는다.
“그저 여전하더군요. 무어 노자 오기를 기다리고 있나 보던데
보내 주셨나요?”
하며 모자를 들고 일어서려니까,
“조금만 앉었어. 좋은 술이 한 병 생겼으니 한잔 하구 가란 말이야.
어디 나가서 할까?”
“술이 웬 거요? 아, 참 올 가을에 한 동 올랐답디다그려?
그러지 않아도 한턱 해야 하지 않소?”
하고 내가 웃으니까, 병화는 매우 유쾌한 듯이 따라 웃다가,
“어쨌든 앉어요. 누가 양주를 한 병 선사를 하였는데…….”
하며 묻지도 않은 말을 끌어낸다. 아닌게아니라 한 동 올라간 덕에
그런지 집안 세간도 그전보다는 는 모양이다.
윗목에 양복장도 들여 놓고 조끼에는 금시계줄도 늘이었다.
아버지가 보내 주시던 넉넉지 않은 학비를 가지고, 한 칸 방에
들어엎드려서 구운 감자를 사다 놓고 혼자 몰래 먹던 옛날을 생각하면
여간한 출세가 아니다. 나는 더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나,
늦으면 귀찮기에 병인 핑계를 하고 나와 버렸다.
해가 거진 다 떨어진 뒤에 집에 들어와 보니,
사랑에는 벌써 영감님들이 채를 잡고 앉아서 술상이 벌어졌다.
그럴 줄 알았다면 좀 늦게 들어올걸―--- 하며 안으로 들어가 보니까
저녁밥 때에 술 치다꺼리가 겹쳐서 우환 있는 집 같지도 않게
엉정벙정하고 야단이다.
“사랑에 누가 왔니?”
나는 마루로 올라오며 약두구리를 올려 놓은 화로에 부채질을 하고
앉았는 누이더러 물으니까,
“누가 아우? ‘차지’가 또 왔단다우.”
하며 깔깔 웃는다.
“뭐, 그게 무슨 소리냐?”
“자네 차지도 모르나? 일본 가서 그것도 모르다니,
헷공부했네그려, 허허허.”
술이 얼근하게 취해서 축대 위에 섰던 큰집 형이 놀리듯이
웃으며 쳐다보았다. 여편네들도 깔깔 웃었다.
“차지라니 누구 집 택호(宅號)요? 내 차지(次知) 네 차지 말요?”
“그건 조선 차지지. 버금차(差)자하고 지탱지(支)자의
차지(差支)를 몰라?”
하며 또 웃는다. 나는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그래 일본 차지가 어떡했어?”
하고 덩달아 웃었다.
“일본말로 붙여 보시구려.”
이번에는 누이가 웃는다.
“사시쓰카에(差支)란 말이지?”
“잘 알았네!”
하고 또들 웃는다.
지금 사랑에 온 손님이 김의관의 ‘봉’인데, 처음에 찾아왔을 때에
방으로 들어오라니까 들어가도 관계없느냐는
말을 가장 일본말이나 할 줄 안다는 듯이,
“차지 없습니까?”
고 한 것을 큰집 형이 옆에서 듣고 앉았다가 나중에 김의관더러
물어보니까, 그것이 일본말로 이러저러한 뜻이라고 설명을 하여
준 것을 듣고, 안에 들어와서 흉을 보기 때문에
어느덧 ‘차지’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이라 한다.
집안에서들은 코빼기도 못 보고 이름도 모르면서 ‘차지 차지’ 하고
부르는 모양이다.
“미친 영감쟁이로군! 무얼 하는 사람인데 그래?”
나는 다 듣고 나서 큰집 형더러 물어 보았다.
“지금 세상에 오십이 넘어서 하긴 무얼 한단 말인가?\
김의관한테 빨리러 다니는 위인이지.
그는 그렇다 하고 한잔 안 하겠나?”
하며 큰집 형은 자기가 한잔 내듯이
아내더러 술상을 보라고 분부를 한다.
“또 먹어요? 형님이나 자슈.”
“자네야 언제 먹었나? 나는 한잔 했지만.”
나는 먹고도 싶지만 조선에 돌아오면 술이 금시로 느는 것이
걱정이었다. 조선 와서 보아야 술이나 먹고 흐지부지하는 것밖에는
사실 할 일이 없다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 같기도 하지마는,
생각하면 조선 사람이란 무엇에 써먹을 인종인지 모르겠다.
아침에도 한잔, 낮에도 한잔, 저녁에도 한잔, 있는 놈은 있어 한잔,
없는 놈은 없어 한잔이다.
그들이 이렇게 악착한 현실 앞에서 눈을 감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노력이요, 그리하자면 술잔밖에 다른 방도와
수단이 없다. 그들은 사는 것이 아니라 목표도 없이 질질 끌려가는
것이다. 무덤으로 끌려간다고나 할까?
그러나 공동묘지로는 끌려가지 않겠다고 요새는 발버둥질을 치는
모양이다. 하여간 지금의 조선 사람에게서 술잔을 뺏는다면
아마 그것은 그들에게 자살의 길을 교사(敎唆)하는 것일 것이다.
부어라! 마셔라! 그리고 잊어버려라―---
이것만이 그들의 인생관인지 모르겠다.
“그럼 한잔 하십시다.”
하며 나도 끌리고 말았다. 큰집 형을 안방으로 청하여
저녁상을 마주 받고 앉으니까, 어머니께서 다가앉으시면서,
“아까 김의관의 친구가 천(薦)이라면서 용한 시골 의원이 있다고
해서 들어와 보았는데, 또 약을 갈아 대면 어떻게 될는지?”
하며 못 믿겠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셨다.
“김의관의 친구가 누구예요?”
“차지 말일세.”
잔이 나기를 기다리고 앉았던 큰집 형님이 대신 대답을 하였다.
“차지라는 소리나 하고 다니는 위인이면, 그까짓 게 무얼 안다구?”
하며 내가 눈살을 찌푸리니까,
“글쎄 말일세.
김의관이나 차지가 진권(進勸)한 것이 된 게 있을 리가 있나?”
“어떻든 나는 모르니까 아버님께 잘 여쭈어 보구 하십쇼그려.”
“난 모른다면 누가 안단 말이냐? 아버지는 밤낮 저 모양으로
돌아다니시거나 술로 세월을 보내시고.”
어머니는 나는 모르겠다는 말이
매우 귀에 거슬리고 화증이 나시는 모양이다.
“글쎄 내야 무얼 알아야죠.
그래 지금 그 의원이란 자를 대접하는 것이에요?”
“그건 그런 게 아니란다네.
김의관이 일전에 유치장에 들어갔었다지 않았나?”
하며 큰집 형이 대답을 한다.
“글쎄 그랬다는군요.”
“그런데 잡혀가던 날이 바로 차지가 한턱을 내던 날인데,
그러한 횡액에 걸려서 미안하게 되었다고, 나오던 이튿날 차지가
또 한턱을 내었다나. 그래서 오늘은 김의관이 베르고 베르다가
어디 가서 돈을 만들었는지 일금 오 원야라를 내놓고 지금 한턱
쓰는 모양이라네. 그런데 의원이란 자는 말하자면 곁두리지.”
“차진가 무언가 하는 자는 무엇 하는 자길래
두 번씩이나 턱을 내어 가며 그렇게 김의관을 떠받치더람?”
“그게 다 김의관의 후림새지. 자세한 것은 몰라두 저희끼리
숙덕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군수나 하나 얻어 하든지, 하다못해
능참봉(陵參奉)이라도 하나 얻어걸릴까 하구 연해 돈을 쓰며
따라다니나 보데. 그런 놈이 내게두 하나 얻어걸렸으면
실컷 빨아먹구 훅 불어세겠구먼…… 하하하.”
큰집 형은 이 따위 소리를 하고 취흥에 겨워 웃었다.
옆에 앉으셨던 어머님은,
“그것두 입담이 좋다든지 재주가 있어야지 아무나 되는 줄 아는군.”
하며 웃으셨다.
“응! 그래서 일본말 하는 체를 하고 차지를 휘두르며 다니는 군마는
김의관 주제에…… 군수, 참봉은 땅에 떨어졌던가!”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이렇게 한마디 하고 술잔을 내주며,
“그래 그 틈에 아버지께서두 끼셨나요?”
하며 물으니까,
“아닐세, 천만에. 김의관이 그런 일야 변변히 이야기나 한다던가.
먹을 자국야 혼자 끼구 돌지. 또 그러나 지금 세상에 협잡꾼 아니구
술 한잔이나 입에 들어간다던가? 김의관만 나무라면 뭘 하겠나?”
하고 큰집 형은 매우 김의관의 생화가 부럽기도 한 모양이다.
술이 취하여 가니까 독한 것이 비위에 당기어서 어머니께서 그만 먹고
어서 밥을 뜨라시는 것도 안 듣고 나는 차 속에서 먹다가 남겨 가지고
온 위스키를 가져오라고 해서 따랐다.
“얘는 병구완하러 오지 않구 술만 먹으러 왔나.
죽어 가는 병인은 뻗어뜨려 놓고 안팎에서 술타령들만 하구, 응!”
하며 어머니께서는 한숨을 쉬시고 밥상을 받으셨다.
생각하면 그도 그렇지마는 하는 수 없는 일이다.
“참, 아까 병화형한테 갔더니 양주가 생겼다구 붙드는걸.”
나는 양주를 보니까 생각이 나서 이런 말을 꺼냈다.
“응! 잘들 있던가? 그놈 주임대우(奏任待遇)인지 뭔지 했다면서
돈 한푼 써보란 말도 없구.”
얼쩡하여진 큰집 형은 또 아우의 시비를 꺼내려는 모양이기에 나는,
“맽겼습디까. 주면 주나 보다 안 주면 안 주나 보다 할 뿐이지,
시비는 왜 하슈. 저도 살아가야지.”
하며 말을 막아 버렸다.
“그래 아우에게 얻어먹어야 하겠나?
삼촌이나 사촌에게 비럭질을 해야 하겠나?”
“형편 되어 가는 대로 하는 거 아니겠소.”
“계집은 둘씩이나 데리구,
그래 명색이 형이라면서 모른 체해야 옳단 말인가?”
하며 소리를 빽빽 지른다.
“계집이 둘이라니요?”
“아, 그 을라라던가 하는 미친년의 학비를 대어 주나 보던데!
그저껜가 잠깐 들렀더니 벌써 불러내 왔나 보더군.”
“녜, 와 있에요?”
나는 놀랄 것도 없으나 아까 병화댁이 웃기만 하고 말을 시원히
안 하던 것을 생각하면 역시 불쾌하다. 그러나 그 집 형수가
나와 을라가 교제하는 것을 은근히 막으려는 것은 작년부터의 일이다.
한때는 오해도 없지 않았지마는 일전 을라의 말을 들으면,
그 집 형수가 그런 태도를 취하는 데는 여러 가지로 생각되는 점이
없지도 않다. 지금 이 형님의 말을 들으면 병화와 벌써 전부터 그렇지
않은 사이 같기도 하지마는, 을라의 말 같아서는
병화댁은 친한 동무지마는 이씨 집에 들어오게 하고 싶지 않다는
단순한 의미로 막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더구나 작년만 해도 아내가
시퍼렇게 살아 있으니 으레 그랬을 것이다. 또 이번은 내가 신호에
들러서 만나고 왔다니까 한층 더 경계를 하느라고 만나지도 못하게
하려는 눈치인 듯도 싶다. 혹은 아내가 죽게 되었으니까 딴생각을 먹고
신호까지 찾아갔는가 하는 의심이 있어 그러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저러나 나의 을라에 대한 향의는 작년에 멋모르고 덤비던
첫 서슬과는 지금은 딴판이다. 문제도 아니 되는 것이다.
“그래 정말 학비를 대나요? 박봉 받아 가지고 웬 돈이 자랄라구요?”
을라에게 전부터 학비를 대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을
나도 짐작하는 터이기에 채쳐 물었다.
“글쎄 자세한 내용야 누가 아나마는,
안에서들 그런 이야기들을 하기에 말일세!”
나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생각을 하였다. 안에서들 공연히
그러는 것이지, 다른 것은 몰라도 그 점만은 을라의 말이
진담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이튿날이던가, 병화댁이 병 위문 오는 길에 을라를 데리고 왔었다.
“어제 저기 오셨더라지요. 오늘 아침차에 들어와서 동무 집에
짐을 두고 놀러 갔다가 잠깐 뵈러 왔습니다.”
하고 묻기도 전에 발뺌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구태여 변명을 듣자는 것도 아니요,
무슨 흥미를 느끼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병화댁이나 을라나
제각각 그 무엇을 변명하려고 하는 눈치는 나도 잘 알아차렸다.
9
민주를 대면서도 하루바삐 납시사고 축원을 하고 축원을 하면서도
민주를 대던 병인은 그예 숨이 넘어가고 말았다.
김의관이나 차지가 댄 의원의 약이 맞지를 않아서 그랬던지 죽을 때가
된 뒤에 횡액에 걸려드느라고 그 의원이 불쑥 뛰어들었던지는
모르지마는, 그 약을 쓴 지 이틀 만에 죽고 말았다. 누구보다도
어머니께서 가엾어하시고 섧게 우셨다. 사람의 정이란 서로 들면
저런 것인가? 하여 보았다. 어머니 말씀마따나 시집이라고 왔어야
나하고 살아 본 동안이 날짜로 따져도 몇 달이 못 될 것이다.
내가 열셋, 당자가 열다섯에 비둘기장 같은 신랑방을 꾸몄으니까,
십 년 동안이나 시집살이를 한 셈이나
내가 열다섯 살에 일본으로 달아난 뒤로는 더구나 부부라고 말뿐이다.
섣달 그믐날에 시집온 새색시가 정월 초하룻날에 앉아서 시집온 지
이태나 되었다는 셈밖에 아니 된다.
“그러나 하는 수 없지 않아요. 그것도 제 팔자니까.”
어머니께서 불쌍하다고는 우시고 우시고 할 때마다,
나는 냉정히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죽던 날 밤중이었다.
사랑 건넌방에서 널치가 되어서 한잠이 깊이 들어 가는 판에
‘여보게 여보게’ 하며 깨우는 바람에 눈을 떠보니까,
큰집 형이 얼굴이 해쓱하고 두 눈이 똥그래져서 아무 말 않고,
“일어나게, 어서 일어나 안에 좀 들어가 보게.”
하며 앞에 섰었다.
나는 ‘인젠 그른 게로구나!’ 하며 옷을 걸치고 따라나섰다.
저편 방에서 주무시던 아버님도 창황히 나오셨다.
안으로 들어가서 건넌방을 들여다보니 온 집안 식구가 조그만 방에
그득히 들어섰다. 어머니는 염주를 돌려 가며 나무아미타불을
중얼중얼 외시며 자리를 비켜 주시고 병인의 얼굴 앞으로 가라고
손짓을 하셨다. 아무도 입을 벌리는 사람은 없이
무슨 장숙(莊肅)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로부터 시작되려는
보지 못하던 일을 구경이나 하듯이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우중우중
늘어섰다. 나는 하라는 대로 병인 앞으로 가서 앉으면서
그저 숨을 쉬나? 하고 손을 코에다가 대어 보니까
따뜻한 김이 살짝 힘없이 끼치었다.
“언제부터 그래?”
하며 아버님도 잠깐 문을 열고 들여다보시는 기척이었다.
병인의 목은 점점 재어지게 발랑거린다. 감았던 눈을 실만큼 떠서
옆에 앉은 내게로 향하더니, 별안간 반짝 뜨며 한참 노려보다가
다시 감는다. 나는 머리끝이 쭈뼛하고 가슴이 선뜩하였다.
나를 원망하는 것이나 아닌가 하며 정이 떨어졌다.
누운 사람은 당장 숨이 콕 막히는 것 같더니 방긋이 벌린 입가에
이번에는 생긋 하는 웃음빛이 보이는 것을 보고
나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나는 어머님이 이르시는 대로 지금 데워서 들여온 숭늉 같은 미음을
한술 떠서 열린 둥 만 둥한 입술에 흘려 넣었다.
병인은 또 한번 눈을 힘없이 뜨더니 곧 다시 감는다.
또 한 술 떠서 넣었다. 병인은 한 숟가락 반의 미음이 흘러들어가던
입을 반쯤이나 벌리더니, 가죽만 남은 턱을 쳐들면서 입에 문 것을
삼키려는 듯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두어 번이나 연거푸 안간힘을 쓴다.
목에서는 담이나 걸린 듯이 가랑가랑하는 소리가 모기 소리만큼 났다.
여러 사람들은 눈을 한층더 크게 뜨며 고개를 앞으로 내미는 듯하고
들여다보았다. 어머님은 여전히 염불을 부르시면서 베개 위로
넘어가려는 머리를 쳐들어 놓으셨다. 베개를 만지시던 어머님의 손이
떨어지자 깔딱 하는 소리가 겨우 들릴 만치 숨소리도 없는 환한 방에
구석구석이 잔잔하게 파동을 치며 문틈으로 흘러나갔다.
이것이 모든 것이었다. 이 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나는 이상할 뿐이었다. 대관절 이것이 죽음이라는 것인가 하며
눈을 꼭 감은 하얀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앉았었다.
가엾은지 슬픈지 아무 생각도 머리에 떠오르지는 않았으나,
나를 쳐다보던 그 눈! 방긋한 화평스러운 그 입이 머릿속에서
오락가락하는 일편에, 내 손으로 미음을 떠넣어 준 것만이
무슨 큰일이나 한 것같이 유쾌하였다. 어머님은 윗입술을 쓰다듬어서
입을 닫게 하여 주시고 가만히 들여다보시더니,
염주를 들고 눈물을 뚝뚝 흘리셨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사랑으로 나왔다. 책상머리에 기대어 담배를
피워 물고 앉았으려니까 큰집 형님이 데리고 온 양의(洋醫)가
허둥지둥 들어왔다. 마침 아는 의사이기에 들어와서 녹여 가라고
하였더니,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부정이나 타는 듯이 뺑소니를 쳐
가버린다. 사망진단서니 뭐니 성이 가신 일이나 맡을까 보아서 그런지,
의사도 주검이란 싫어서 그런지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튿날 어둔 뒤에 김천 형님 내외가 딸까지 데리고 올라온 뒤에는
나도 모든 것을 쓸어 맡기고 사랑에 나와서 담배만 피우며 가만히
누웠었다. 미음 한 술 떠넣어 주려 나왔던가 생각하면 공연히 온 것
같았다. 그러나 시체를 청주까지 끌고 내려간다는 데에는 절대로
반대하였다. 오일장이니 어쩌니 떠벌리는 것도 극력 반대를 하여
삼 일 만에 공동묘지에 파묻게 하였다.
처가 편에서 온 사람들은 실쭉해하기도 하고 내가 죽은 것을
시원히나 아는 줄 알고 야속해하는 눈치였으나,
나는 내 고집대로 하였다.
그러나 초상중에 또 한 가지 나의 고통은 눈물이 아니 나오는 울음을
울라는 것이었다. 이것도 처가붙이끼리라든지 집안식구들까지
뒷공론을 하는 모양이나,
파묻고 들어올 때까지 나는 눈물 한 방울을 흘릴 수가 없었다.
“팔자가 사납거던 계집으로 태어날 거야.
어쩌면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누?”
하며 과부댁 누이가 마루에서 나더러 들어 보라는 듯이
한마디 하니까, 김천 형수가,
“남편네란 다 그렇지. 두구 보시구려.
달이 가시기도 전에 여학생을 끌어들이실 거니.”
하며 소곤거리는 것을 나는 안방에서 혼자 밥을 먹으며 들었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너도 내년 봄이면 졸업이지? 인젠 어떻게 할 셈이냐?
곧 나와서 무어라두 붙들 모양이냐? 더 연구를 하련?”
장사 지낸 지 이틀 만에 사랑에서 아침을 같이 먹다가,
조용한 틈을 타서 형님은 불쑥 이런 소리를 꺼냈다.
“글쎄, 되어 가는 대로 하죠.
하지만 무어든지 내 일은 내게 맡겨 두시는 게 좋겠죠.”
나는 이렇게 우선 한마디 해놓고 나의 계획을 대강 말하였다.
그리하여 자식은 요행히 잘 자라면 김천 형님이 데려가거나,
만일 김천 형님이 아들을 낳게 되면 큰집 형님이 데려가는 대신에,
내 앞으로 오는 것이 다소간 있을 것이니,
그 반분은 양육비와 교육비로 제공하되 장성할 때까지 김천 형님이
보관하기로 김천 형님과만 내약을 하여 두었다.
간단한 일이지마는 이렇게 수편하게 끝이 나니까,
한시름 잊은 것 같고 새삼스럽게 자유로운 천지에 뛰어나온 것 같았다.
그 동안 청명한 겨울날이 계속하더니 오늘은 또 무에 좀 오려는지,
암상스런 계집이 눈살을 잔뜩 찌푸린 것처럼 잿빛 구름이 축 처지고
하얗게 얼어붙은 땅이 오후가 되어도 대그락거리었다.
사랑은 무거운 침묵과 깊은 잠에 잠긴 것같이 무서운 증이 날 만큼
잠잠하다. 김의관은 자기가 칭원이나 들을까 보아서 제풀에 미안하여
그러는지, 그저께 발인 때 잠깐 눈에 띈 뒤로는 보이지를 않는다.
우중충한 사랑방에 온종일 혼자 가만히 드러누웠으려니까 무슨 무거운
돌멩이나 납덩어리로 가슴을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
상처를 하였다 해서 별안간 섭섭하거나 설운 생각이 나서 그런 것도
아니요, 아이들이 없어서 조용한 집안이 초상 뒤에 한층더
쓸쓸하여진 것 같아서 그런 것도 아니다. 혹시는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상은 떠들썩하며 무슨 새로운 희망에 타오르는 것 같건마는,
조선만은 잠잠히 쥐죽은 듯이 들어엎디어서 그저 파먹기나 하며
버둥버둥 자빠져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무슨 무거운 뚜껑이
꽉 덮여 있는 것 같아서 답답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또다시 생각하면 아내가 죽어 가는 꼴을 마주 앉아
보았으니만치 어느 때까지 그것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고
지난 일이 곰곰 생각이 나서, 가엾은 추회(追懷)가 새삼스럽게 머리에
떠올라서 기분이 무거운 것도 사실이었다. 살아 있을 때에는
죽거나 말거나 될 대로 되라고 냉담하였지마는, 파묻고 들어와 보니
역시 한구석이 허전한 것 같고 지난 일이 뉘우쳐지는 것도
있는 것이었다. 아내가 살아 있을 때에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가엾은 생각이, 동정하는 마음이
유연히 마음속에 괴어 오르는 것을 깨달았다.
‘에잇, 하여튼 한시바삐 빠져 달아나자!’
나는 부친과 형님이 들어오시면 오늘 저녁차로라도 떠나 버릴 작정으로
건넌방으로 건너가서 가방 속을 정리하고 앉았으려니까,
어느 틈에 왔던지 안에서 병화댁과 을라가 인사를 나왔다.
“얼마나 섭섭하시구 언짢으십니까?”
을라는 위문이라느니보다도 젊은 남편의 상처란 그저 그런 거라는
듯이 생긋 웃으며 다시 장가갈 치하를 하는 듯한 어조다.
“죽은 사람이야 가엾지만, 생자필멸이니 하는 수 없지요.”
나는 금방 비로소 죽은 아내가 가엾다는 생각을 하고 난 끝이라
도리어 정중히 이렇게 대거리를 하며, 사랑에 올라올 리는 없지마는
인사로 올라오라고 하였다.
“그래두 섭섭하시겠죠?”
을라는 이런 소리를 하며 말똥히 나의 기색을 살피려는 눈치다.
‘그래두 섭섭’이란, 인사답지 않은 인사지마는, 나는 웃고 말았다.
“언제 떠나십니까? 이번엔 꼭 같이 가세요.”
인사를 온 것이 아니라 동행하자고 맞추러 온 것 같은 수작이다.
“오늘 저녁이라두 떠날까 하는데 함께 나서시겠나요?
동행을 해주시면 심심치도 않고 매우 좋기야 하겠지만.”
나는 실없이 웃어 보였다.
“아, 그렇게 서두르실 게 뭐예요?”
을라가 놀라는 소리를 하려니까
한걸음 뒤처져 안에서 나온 병화가 다가오며,
“뭐, 오늘 떠나?”
하고 알은체를 하다가, 오늘 떠나든 말든
자기 집으로 가서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발론을 한다.
“아무려면 오늘 떠나시게 되겠에요? 아무것도 없지만 잠깐 가시죠.”
병화댁도 옆에서 권한다. 자기네끼리 오늘 나를 찾아 인사도 하고
위로삼아 저녁 대접을 하려고 의논이 된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한가로운 기분이 나지를 않았다.
또 그것이 병화 내외로서는 을라에 대한 자기네끼리의 입장을 명백히
하려는 기회를 만들려는 뜻인지도 모르겠고, 을라는 을라대로
딴생각이 있는지 모르나, 나는 그런 것이 도리어 성가신 생각이 났다.
하여간 이 사람들의 이러한 눈치로만도 나는 작년 이래로 지나치게
오해였던 것이 풀린 것은 기쁘고 마음이 거뜬하여진 것 같았다.
마루 끝에서 실랑이를 하다가 이 사람들을 돌려보낸 뒤에
나는 짐을 다시 싸기 시작하였다. 서류를 정리하다가 가방 속에서
나온 정자의 편지를 다시 한번 펴보았다.
이것은 초상중에 온 것을 대강 보고 집어넣어 두었던 것이다.
……과장(誇張) 없는 말씀으로, 저는 이제야 겨우 악몽에서 깨어나서
흐리터분하고 어리둥절하던 제정신이 반짝 든 듯싶습니다.
오랜 방황에서 이제야 제 길을 찾아든 것도 같습니다.\
그렇다고 무슨 신앙을 붙든 것도 아니요, 생활의 도표(道標)를 별안간
잡은 것은 아닙니다마는, 언젠가 말씀처럼 고민은 역시 제 길,
저 살 길을 열어 주고야 말았는가 합니다.
반년 동안 레스토랑의 경험은 컴컴하고 끈적끈적한 생활이었습니다마는
그래도 저는 그 생활 속에서 새 길을 찾았는가 싶습니다.
인간 수양, 세간 수양이 조금은 되었는가 합니다.
만일 내가 지금 지향(志向)하는 길로 나갈 수 있다면
M헌에서의 반년 동안 얻은 문견이 무슨 보토가 될지도 모르겠지요.
그러나 그보다도 그 동안에 당신을 만나 뵈었다는 것은
저의 일생에 잊지 못할 새로운 기록이었겠지요.
정자의 편지는 저번 내가 부친 엽서의 답장이나, 매우 희망과 감격에
찬 기분으로 씌었다. 동경역에서 헤어질 때 경도로 갈 듯하다더니
역시 설〔正初〕전으로 M헌을 하직하고, 경도 고모 집으로 갈
작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고모 집에를 가면 소원대로
이번 신학년부터는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 여자부에 입학할 예정이라
한다. 아마 저의 본집과도 양해가 되어 학비도 나오게 되고,
제 자국에 다시 들어설 눈치인지 모르겠다. 저의 집이 경도, 대판에서
뱃길〔船路〕로 대여섯 시간이면 건너서는
사국(四國) 고송(高松)이라는 데에서 해물상을 한다는 말은
들었지마는, 경도에 가서 동지사대학에 들어갈 준비를 할 터이라는
말을 듣고 보니, 나는 동경서 떠나 올 제 목도리를 사다가 함부로
허리춤에 찔러 주고 온 것을 생각하고, 혼자 속으로 찔끔하는 생각이
들며 혼자 얼굴이 뜨뜻해 왔다. 물론 보통 카페 걸로 여긴 것은
아니지마는 좀 너무 함부로 한 것 같아야 열적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저의 집이 얼마나 잘살거나 그거야 알 바 아니지마는 대학까지 가려는
생각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인생은 오뇌로 쌓아 올라가는 것인가 봅니다.
아니 번민, 오뇌로 쌓아 올라가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인가 합니다.
왜 이 말씀을 하는고 하니, 당신이 너무나 인생 문제와 사회 문제에
대하여 자기의 불만불평보다는 더 큰 것을 위하여 애쓰시는 것이
가엾어 그럽니다. 민족의 운명에 대해서 번민하시고 오뇌하시기
때문에―---또 저는 거기에 경의를 느끼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그런 속된 말로가 아니라
괴로움을 알아야 사람은 거듭나는가 합니다. 일본의 남자들은 너무나
괴로움을 모릅니다. 역시 대륙적이라 할지? 괴로움을 꾹 참고
딱 버티고 섰는 거기에 깊이 있는 생활이 있는가 싶습니다.
이런 말도 씌어 있다. 다감하고 예민한 계집애가 연애에 실패하고
집안에서는 쫓겨나고 하니까 보통 여자와는 다르겠지마는,
어떻게 생각하면 자기 나라 남성―---일본 남성에게 반기를 들고
내게로 오겠다는 사연인가도 싶다.
끝에는 동경으로 가는 길에 부디 경도로 전보를 미리 치고 자기에게
들러 달라고 고모 집 번지수까지 씌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만나면 전과는 달라서 퍽 여러 가지 이야기할 것도
많을 것 같지마는 한편으로는 어색도 하고 겁도 나는 것이었다.
‘이번에 만나면 어떤 얼굴로 만날꾸?’
혼자 상상을 하여 보고는 큰 기대도 있고 큰 흥미도 있으리라고
궁리가 많았다. 갑갑하고 화가 나는 김에, 어서 가서 정자나 만나면
이 무거운 기분이 조금은 나을 것도 같다.
가방을 꾸려 놓고 어머님께 오늘 밤차로 떠나겠다고 여쭈러 안으로
들어가니까, 출입하였던 큰형님이 뒤미처 들어왔다.
“얘가 오늘 저녁으루 떠나겠다는구나! 내 이런 주책없는 애가 있니?”
모친으로서 생각하면은 딸자식이 죽은 것과는 다르다 하여도
둘째며느리를 열다섯부터 앞에서 키운 정이 있으니, 집이 한구석
텅 빈 것 같은데 아들마저 초상을 치르자마자 훌쩍 가버리겠다니
어이가 없는 것이다.
“별안간 이것은 무슨 소리냐? 가자면 나부터 가야지. 네가 왜 먼저
서두르느냐? 나는 아이들을 놀려 놓고 온 터 아니냐?”
하고 큰형님은 역정을 낸다. 나는 이 말에 찔끔하였다.
사실 경우가 틀렸다.
“너는 너무 기분주의야. 어쨌든 나는 내일 떠나야 하겠지만,
방학 동안은 좀 들어앉었으렴. 어머니께서 섭섭해 안 하시니.”
나는 떠나는 것을 무기 연기하기로 하였다.
사람이 죽어 나간 건넌방에는 안에서들 들어가 자기를 싫어하는
모양이기에 내가 자기로 하였거니와, 형님이 떠난 뒤로는 더구나
혼자 드러누워서 이생각 저생각에 전전반측(輾轉反側)하며 잠을 못
이루는 날이 많았다. 곰곰 생각하면 날이 갈수록 죽은 사람에게
역시 미안한 생각이 간절하였다.
더 산대야 하나 날 자식을 두셋 더 낳았을 것밖에 별수야 없겠지마는
좀더 따뜻이 해주었더면 하는 후회도 난다. 그러나 생각하면
이런 뉘우침도 결국에는 자기가 당장 고적하고 아쉬우니까
그런가 보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 애인이라도 있다면 이생각 저생각
없이 뛰어 달아났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 어린것을 기를 걱정은 없다
하여도 조만간―---삼사 삭 후에 졸업하고 나오면
역시 혼자는 어려우니 장가는 들어야 할 것이나 누구를 고를까?
마음에 맞는 사람이 있기로 누가 선뜻 와줄까?
이런 걱정도 머리에 떠오른다.
‘을라……?’
나는 코웃음을 쳤다. 정자? 더구나 안 될 말이다.
공부를 시작한다는 것은 말 말고라도 인제 겨우 부모의 노염도 풀려
가는 눈치인데, 또다시 나 같은 사람과 문제가 새판으로 생긴다면
피차에 비극을 되풀이할 것이다.
그것은 고사하고 정자 같은 사람은 우리집에 들어와서
살 수 없는 일이요, 장래를 생각하거나 민족적 감정으로나
문제도 아니 된다. 이것저것 실제 문제를 생각하면 그래도 아내가
더 살아 주었더면 내 몸 하나는 편하였던걸 하는 생각도 든다.
죽으면 죽으라지 또 계집이 없을까 하는 방자한 생각이
뉘우쳐지기도 하였다.
그는 하여간에 정자의 열심으로 써 보내 준 편지에 어느 때까지
모른 척하고 내버려두기도 안되어서 이튿날 이런 답장을 써 부치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이 해결되어 가고 학교에 들어가시게 되었다 하오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습니다. 과거 반년간의 쓰라린 체험이 오늘의
신생(新生)을 위한 커다란 준비시기 이셨던 것을 생각하면,
그 동안 나의 행동이 부끄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마는, 한편으로는
내 생애에 있어서도, 다만 젊은 한때의 유흥기분만에 그치지
아니하였던 것을 감사하며 기뻐합니다.
그러나 뒷날에 달콤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할 뿐이라면 이렇게 섭섭한 일도 없고, 당신은 또 자기를
모욕하였다고 노하실지도 모르나, 언제까지 그런 기쁨과 행복에 잠겨
있도록 이 몸을 안온하고 자유롭게 내버려두지 않으니 어찌하겠습니까.
나도 스스로를 구하지 않으면 아니 될 책임을 느끼고,
또 스스로의 길을 찾아가야 할 의무를 깨달아야 할 때가 닥쳐오는가
싶습니다. 지금 내 주위는 마치 공동묘지 같습니다.
생활력을 잃은 백의(白衣)의 백성과,
백주에 횡행하는 이매망량(魑魅魍魎) 같은 존재가 뒤덮은 이 무덤 속에
들어앉은 나로서 어찌 ‘꽃의 서울’에 호흡하고 춤추기를
바라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이 하나나 내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고 용기와 희망을 돋우어 주는 것은 없으니,
이러다가는 이 약한 나에게 찾아올 것은 질식밖에 없을 것이외다.
그러나 그것은 장미꽃송이 속에 파묻히어 향기에 도취한 행복한 질식이
아니라, 대기(大氣)에서 절연된 무덤 속에서 화석(化石)되어 가는
구더기의 몸부림치는 질식입니다.
우선 이 질식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소학교 선생님이 사벨(환도)을 차고 교단에 오르는 나라가 있는 것을
보셨습니까? 나는 그런 나라의 백성이외다. 고민하고 오뇌하는 사람을
존경하시고 편을 들어 주신다는 그 말씀은 반갑고 고맙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내성(內省)하는 고민이요 오뇌가 아니라,
발길과 채찍 밑에 부대끼면서도 숨이 죽어 엎디어 있는 거세(去勢)된
존재에게도 존경과 동정을 느끼시나요?
하도 못생겼으면 가엾다가도 화가 나고 미운증이 나는 법입넨다.
혹은 연민의 정이 있을지 모르나, 연민은 아무것도 구하는 길은
못 됩니다…… 이제 구주(歐洲)의 천지는 그 참혹한 살육의 피비린내가
걷히고 휴전조약이 성립되었다 하지 않습니까.
부질없는 총칼을 거두고 제법 인류의 신생(新生)을 생각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소학교 교원의 허리에서 그 장난감칼을
떼어 놓을 날은 언제일지? 숨이 막힙니다.
우리 문학의 도(徒)는 자유롭고 진실된 생활을 찾아가고,
이것을 세우는 것이 그 본령인가 합니다. 우리의 교유, 우리의 우정이
이것으로 맺어지지 않는다면 거짓말입니다. 이 나라 백성의,
그리고 당신의 동포의, 진실된 생활을 찾아 나가는 자각과 발분을
위하여 싸우는 신념 없이는 우리의 우정도 헛소리입니다.
나는 형님이 떠날 제 초상에 쓰고 남은 것이라고,
동경 갈 노자와 함께 책값이며 용돈으로 내놓고 간 삼백 원 속에서
백 원을 이 편지와 함께 부쳐 주었다. 혹시는 다른 의미나 있는 줄로
오해할 것이 성가시기도 하나, 동경에서 떠날 제 선사받은 것도
있으려니와, 정자의 새출발을 축하하는 의미라고 한마디 쓰고,
다소 부조가 될까 하여 보낸 것이다.
실상은 동경 가는 길에 들르지 않겠다는 결심을 다시 하였기 때문에,
아주 이것으로 마감을 하여 버리고,
나도 이 기회에 가뜬한 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한 열흘 더 있다가 졸업 논문도 있고 아무래도 학교 일이
걱정이 되어서 떠나고 말았다.
정거장에는 큰집 형님, 병화 내외, 을라 들이 나왔다.
을라는 입도 벌리지 않고 오도카니 섰고, 병화 내외도 플랫폼의
보꾹에 매달린 시계만 쳐다보며 선하품을 하고 섰었다.
그러나 병화의 얼굴에는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모든 오해를 풀고,
인제는 안심하였다는 듯이 화평한 기색이 도는 것 같았다.
차가 떠나려 할 제 큰집 형님은
승강대에 섰는 나에게로 가까이 다가서며,
“내년 봄에 나오면 어떻게 속현(續絃)할 도리를
차려야 하지 않겠나?”
하고 난데없는 소리를 하기에, 나는,
“겨우 무덤 속에서 빠져나가는데요? 따뜻한 봄이나 만나서
별장이나 하나 장만하고 거드럭거릴 때가 되거든요……!”
하며 웃어 버렸다.
- 끝 -
(만세전, 수선사, 1948)
'한국단편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레디메이드 인생 - 채만식 - (1) | 2023.05.23 |
---|---|
낙동강 - 조명희 - (1) | 2023.05.16 |
만세전(萬歲前, 상 ) - 염상섭 - (1) | 2023.04.24 |
치숙(痴叔) - 채만식 - (1) | 2023.04.17 |
혈의누(血─淚, 하 2/2) - 이인직 - (0) | 2023.0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