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단편문학 83

만세전(萬歲前, 하 ) - 염상섭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만세전(萬歲前) - 하 - - 염상섭 - 6 기차가 김천역에 도착하니까, 지금쯤은 으레 서울집에 있으려니 하였던 형님이 금테모자에다 망토를 두르고 마중을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혹시 아는 사람이나 있을까 하고 유리창 바깥을 내다보며 앉았던 나는 깜짝 놀라 일어나서 창을 올리고 인사를 하려니까, 형님은 웃으며 창 밑으로 가까이 오더니 어떻든 내리라고 재촉을 한다. 어찌할까 하고 잠깐 망설이다가 형님이 그 동안에 내려와서 있는 것을 보든지 웃는 낯을 보든지 병인이 그리 급하지는 않은 모양이기에, 나는 허둥지둥 짐을 수습하여 가방을 창 밖으로 내주고 내려왔다. 뒤미처서 양복쟁이 하나도 창황히 따라 내리었다. 형님은 짐을 들려 가지고 가려고 심부름꾼 아이까지 데리고 나왔었다. 출구..

한국단편문학 2023.05.02

만세전(萬歲前, 상 ) - 염상섭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만세전(萬歲前) - 상 - - 염상섭 - 1 조선에 ‘만세’가 일어나던 전해 겨울이다. 세계대전이 막 끝나고 휴전조약이 성립되어서 세상은 비로소 번해진 듯싶고, 세계개조의 소리가 동양 천지에도 떠들썩한 때이다. 일본은 참전국이라 하여도 이번 전쟁 덕에 단단히 한밑천 잡아서, 소위 나리킨(成金), 나리킨 하고 졸부가 된 터이라, 전쟁이 끝났다고 별로 어깻바람이 날 일도 없지마는, 그래도 또 한몫 보겠다고 발버둥질을 치는 판이다. 동경 W대학 문과에 재학 중인 나는 때마침 반쯤이나 보던 연종시험(年終試驗)을 중도에 내던지고 급작스레 귀국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생겼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해 가을부터 해산 후더침으로 시름시름 앓던 아내가 위독하다는 급전(急電)을 받았기 때문..

한국단편문학 2023.04.24

치숙(痴叔) - 채만식 -

사진을 클릭 하시면 크고 선명하게 보십니다. 치숙(痴叔) - 채만식 - 우리 아저씨 말이지요? 아따 저 거시키, 한참 당년에 무엇이냐 그놈의 것, 사회주의라더냐 막덕이라더냐, 그걸 하다 징역 살고 나와서 폐병으로 시방 앓고 누웠는 우리 오촌 고모부(姑母夫) 그 양반……. 뭐, 말도 마시오. 대체 사람이 어쩌면 글쎄…… 내 원! 신세 간데없지요. 자, 십 년 적공, 대학교까지 공부한 것 풀어 먹지도 못했지요. 좋은 청춘 어영부영 다 보냈지요, 신분에는 전과자(前科者)라는 붉은 도장 찍혔지요. 몸에는 몹쓸 병까지 들었지요. 이 신세를 해가지골랑은 굴속 같은 오두막집 단칸 셋방 구석에서 사시장철 밤이나 낮이나 눈 따악 감고 드러누웠군요. 재산이 어디 집터전인들 있을 턱이 있나요. 서발막대 내저어야 짚검불 하나..

한국단편문학 2023.04.17

혈의누(血─淚, 하) - 이인직 -

혈의누(血─淚, 하) - 이인직 - "아씨 아씨, 작은아씨가 어디 갔읍니까?" "응 무엇이야, 나는 한잠에 내쳐 자고 이제야 깨었네. 옥련이가 어디로 가. 뒷간에 갔는지 불러 보게." "내가 지금 뒷간에 다녀오는 길이올시다. 안으로 걸었던 대문이 열렸으니, 밖으로 나간 것이올시다." 하는 소리에 옥련이가 들어갈 수 없어서 도로 돌쳐서서 갈 곳이 없는지라. 정한 마음 없이 정거장으로 나가니, 그때 일번(一番) 기차에 떠나려 하는 행인들이 정거장으로 모여드는지라. 옥련의 마음에 동경이나 가고 싶으나 동경까지 갈 기차표 살 돈은 없고 다만 이십 전이 있는지라. 옥련이가 대판만 떠나서 어디든지 가면 남의 집에 봉공(奉公)하고 있을 터이라 결심하고 자목 정거장까지 가는 기차표를 사서 일번 기차를 타니, 삼등차에 ..

한국단편문학 2023.04.07

혈의누(血─淚, 상) - 이인직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혈의누(血─淚, 상) - 이인직 - 일청전쟁(日淸戰爭)의 총소리는 평양 일경이 떠나가는 듯하더니, 그 총소리가 그치매 사람의 자취는 끊어지고 산과 들에 비린 티끌뿐이라. 평양성의 모란봉에 떨어지는 저녁볕은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저 햇빛을 붙들어 매고 싶은 마음에 붙들어 매지는 못하고, 숨이 턱에 닿은 듯이 갈팡질팡하는 한 부인이 나이 삼십이 될락 말락하고, 얼굴은 분을 따고 넣은 듯이 흰 얼굴이나 인정 없이 뜨겁게 내리쪼이는 가을볕에 얼굴이 익어서 선앵둣빛이 되고, 걸음걸이는 허둥지둥하는데 옷은 흘러내려서 젖가슴이 다 드러나고, 치맛자락은 땅에 질질 끌려서 걸음을 걷는 대로 치마가 밟히니, 그 부인은 아무리 급한 걸음걸이를 하더라도 멀리 가지도 못하고 허둥거리기만 한다. 남..

한국단편문학 2023.03.30

월사금(月謝金) - 강경애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월사금(月謝金) - 강경애 - 어느 날 아침. 이천여 호나 되는 C읍에 다만 하나의 교육기관인 C보통학교 운동장에는 언제나 어린 학생들이 귀엽게 뛰놀고 있었다. 금년 열 살 나는 셋째는 아직 커텐도 걷지 않은 컴컴한 교실에 남아 있어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난로에 불은 이글이글 타오른다. 그리고 난로 위에 놓인 주전자에서는 물 끓는 소리가 설설한다. 밖에서는 여전히 애들의 떠드는 소리 싸움하는 소리가 뚜렷이 들려온다. 마침 손뼉 치는 소리와 함께 “하하” 웃는 소리에 셋째는 얼핏 창문 켠으로 가서 커튼을 들쳤다. 눈허리가 시큼해졌다. 밖에는 함박꽃 같은 눈이 소리없이 푹푹 쏟아진다. 그리고 저켠 울타리로 돌아가며 심은 다방솔 포기며 아카시아 나무엔 꽃이 하얗게 송이송이 피었다..

한국단편문학 2023.03.22

어머니와 딸 (하) - 강경애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어머니와 딸 (하) - 강경애 - 4. 세 친구 재일은 늦게 일어났다. 하여 세수도 하기 전에 원선의 하숙을 찾았다. 그는 새로 깐 다다미 위에 비스듬히 책상켠을 의지하여 책을 보고 있었다. 아침 산뜻한 햇빛에 그의 얼굴은 한층 더 윤택해 보였다. “여보게, 벌써 책인가?” 그는 빙긋이 웃으며 아까보다도 줄을 빨리 타내려갔다. “그만두게, 밤낮 책만 들고……” 책을 뺏으려 하였다. 그는 책 든 손을 물리며, “마자 보아야겠네. 잠깐만 기다리게.” 재일은 후다닥 일어났다. “가겠네.” 그제야 책을 놓고 눈을 부비치고 바라보았다. “놀다 가게나.” “아니, 나 밥 안 먹었어. 봉준 군과 놀러오게나. 재미있는 일이 있어.” 어차피 잘되었다 하고 책을 들었다. 예정한 페이지까지 보..

한국단편문학 2023.03.15

어머니와 딸 (상) - 강경애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어머니와 딸 (상) - 강경애 - 1. 번민 부엌 뒷대문을 활짝 열고 나오는 옥의 얼굴은 푸석푸석하니 부었다. 그는 사면으로 기웃기웃하여 호미를 찾아들고 울바자 뒤로 돌아가며 기적거린 후 박, 호박, 강냉이 씨를 심는다. 그리고 가볍게 밟는다. 눈동이 따끈따끈하자 콧잔등에 땀이 방울방울 맺힌다. 누구인지 옆구리를 톡톡 친다. 휘끈 돌아보니 복술이가 꼬리를 치면 그에게로 달려든다. 까만눈을 껌벅이면서…… 옥은 호미를 던지고, “복술이 왔니!” 복술의 잔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멍하니 뒷산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과 마주 띄는 이끼 돋은 바위 틈에는 파래진 이름 모를 풀포기가 따뜻한 볕과 맑은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다. 그 옆으로 돌아가며 봄맞이 아이들의 손에 다 꺾인 나뭇가지에..

한국단편문학 2023.03.08

독백 - 이효석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독백 - 이효석 - 아침에 세수할 때 어디서 날아왔는지 버들잎새 한 잎 대야물 위에 떨어진 것을 움켜드니 물도 차거니와 누렇게 물든 버들잎의 싸늘한 감각! 가을이 전신에 흐름을 느끼자 뜰 저편의 여윈 화단이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장승같이 민출한 해바라기와 코스모스 ⎯ 모르는 결에 가을이 짙었구나. 제비초와 애스터와 도라지꽃 ⎯ 하늘같이 차고 푸르다. 금어초, 카카리아, 샐비어의 붉은빛은 가을의 마지막 열정인가. 로탄제 ⎯ 종이꽃같이 꺼슬꺼슬하고 생명 없고 마치 맥이 끊어진 처녀의 살빛과도 같은 이 꽃이야말로 바로 가을의 상징이 아닐까. 반쯤 썩어져 버린 홍초와 글라디올러스, 양귀비의 썩은 육체와도 같은 지저분한 진홍빛 열정의 뒤꼴, 가을 화초로는 추접하고 부적당하다 ⎯..

한국단편문학 2023.02.22

태평천하 (太平天下) 하 - 채만식 -

사진을 클릭해서 크게 보세요. " 태평천하 (太平天下) " -- 하 -- - 채만식 - 11. 人間滯貨[인간체화]와 동시에 品不足[품부족] 問題[문제], 기타 시방 사랑에서는 일흔두 살 먹은(가칭 예순다섯 살 먹은) 증조할아버지가, 열다섯 살 먹은 애인과 더불어 그러처럼 구수우하니 연애 흥정이 얼려가고 있겠다요. 그리고 안에서는…… 경손이는 아까 안방에서 열다섯 살 동갑짜리 대부 태식이와 같이 싸우며 놀리며 저녁을 먹고 나서는 아랫목에 가 버얼떡 드러누워 딩굴고 있었읍니다. 다른 식구는 죄다 물러가고, 야속히 배짱 안 맞는 대고모 서울아씨와 지지리 보기 싫은 대부 태식이와, 그 둘이만 본전꾼으로 달랑 남아 있는 안방에, 가뜩이나 서울아씨는 추월색으로 아닌 이를 앓고, 태식은 조선어독본 권지일로 귀신이 씨..

한국단편문학 2023.02.15

태평천하 (太平天下) 중 - 채만식 -

사진을 클릭해서 크게 보세요. 태평천하 (太平天下) - 중 - - 채만식 - 6. 觀 戰 記[관전기] 고씨는 그리하여 그처럼 오랫동안 생수절을 하고 살아오다가 마침내 단산(斷産)할 나이에 이르렀읍니다. 여자 아닌 여자로 변하는 때지요. 이때를 당하면 항용 의좋은 부부생활을 해오던 여자라도 히스테리라든지 하는 이상야릇한 병증이 생기는 수가 많답니다. 그런 걸 고씨로 말하면, 25년 청춘을 호올로 늙히다가, 이제 바야흐로 여자로서의 인생을 오늘내일이면 작별하게 되었은즉, 가령 히스테리를 젖혀놓고 보더라도 마음이 안존할리가 없을 건 당연한 노릇이겠지요. 윤직원 영감의 걸찍한 입잣대로 하면, 오두가 나는 것도 그러므로 무리가 아닐 겝니다. 그러한데다가, 자 집안 살림을 맡아서 하니 그 재미를 봅니까. 자식들이라..

한국단편문학 2023.02.08

태평천하 (太平天下) 상 - 채만식 -

사진을 클릭해서 크게 보세요. " 태평천하 (太平天下) " - 상 - - 채만식 - 1. 尹直員[윤직원] 영감 歸宅之圖[귀택지도] 추석을 지나 이윽고 짙어가는 가을해가 저물기 쉬운 어느날 석양. 저 계동(桂洞)의 이름난 장자(富者[부자]) 윤직원(尹直員) 영감이 마침 어디 출입을 했다가 방금 인력거를 처억 잡숫고 돌아와 마악 댁의 대문 앞에서 내리는 참입니다. 간밤에 꿈을 잘못 꾸었던지, 오늘 아침에 마누라하고 다툼질을 하고 나왔던지, 아뭏든 엔간히 일수 좋지 못한 인력거꾼입니다. 여느 평탄한 길로 끌고오기도 무던히 힘이 들었는데 골목쟁이로 들어서서는 빗밋이 경사가 진 20여 칸을 끌어올리기야, 엄살이 아니라 정말 혀가 나올 뻔했읍니다. 28관, 하고도 6백 몸메!…… 윤직원 영감의 이 체중은, 그저께 ..

한국단편문학 2023.02.01

이단자 - 이무영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이단자(異端者) - 이무영 - 3 네로의 포악성에 준은 걷잡을 수 없는 흥분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폈다 하고 있었다. 섰다앉았다 한 것도 몇 번인지 모른다. 일어서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그는 자기 뒤에 수백 명 관중이 앉아 있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양쪽 팔꿈받이를 짚고 엉거주춤 선 채였었다. 뒤에서 앉으라고 소리를 친다. 그는 그 소리를 듣고야 주저앉던 것이었다. 그러나 잘못했다는 의식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앉으라는 고함소리가 나니까 무섭게 찔금해서 주저앉는 것을 보면, 그가 자기의 행동에 대한 판단력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았다. 그러나 인식한 것은 아닌 것이 네로의 포악성이 도를 더할 적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또 궁둥이..

한국단편문학 2023.01.25

만무방 - 김유정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 김유정 -- 산골에, 가을은 무르녹았다. 아름드리 노송은 삑삑히 늘어박혔다. 무거운 송낙을 머리에 쓰고 건들건들. 새새이 끼인 도토리, 벚, 돌배, 갈잎 들은 울긋불긋. 잔디를 적시며 맑은 샘이 쫄쫄거린다. 산토끼 두 놈은 한가로이 마주 앉아 그 물을 할짝거리고. 이따금 정신이 나는 듯 가랑잎은 부수수 하고 떨린다. 산산한 산들바람. 귀여운 들국화는 그 품에 새뜩새뜩 넘논다. 흙내와 함께 향긋한 땅김이 코를 찌른다. 요놈은 싸리버섯, 요놈은 잎 썩은 내, 또 요놈은 송이―--- 아니, 아니, 가시넝쿨 속에 숨은 박하풀 냄새로군. 응칠이는 뒷짐을 딱 지고 어정어정 노닌다. 유유히 다리를 옮겨 놓으며 이나무 저나무 사이로 호아든다. 코는 공중에서 벌렸다 오므렸다 연신 이러..

한국단편문학 2023.01.17

다시 읽는 명수필 - 인연,두부장수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인연' - 피천득 -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여자대학에 가보고 싶었다. 그 학교에 어느 가을 학기, 매주 한 번씩 출강한 일이 있다. 힘드는 출강을 하게 된 것은, 주 수녀님과 김 수녀님이 내 집에 오신 것에 대한 예의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수십 년 전에 내가 열 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동경에 간 일이 있다. 어떤 분의 소개로 사회 교육가 미우라 선생댁에 유숙을 하게 되었다. 시바쿠 시로가네에 있는 그 집에는 주인 내외와 어린 딸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하녀도 서생도 없었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하는 아사코는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고 아사코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하였다. 그 집 뜰에는 큰 ..

한국단편문학 2023.01.08

달밤 - 이태준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달밤 - 이태준 - 성북동으로 이사 나와서 한 대엿새 되었을까, 그날 밤 나는 보던 신문을 머리맡에 밀어 던지고 누워 새삼스럽게, "여기도 정말 시골이로군!" 하였다. 무어 바깥이 컴컴한 걸 처음 보고 시냇물 소리와 쏴― 하는 솔바람 소리를 처음 들어서가 아니라 황수건이라는 사람을 이날 저녁에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말 몇 마디 사귀지 않아서 곧 못난이란 것이 드러났다. 이 못난이는 성북동의 산들보다 물들보다, 조그만 지름길들보다 더 나에게 성북동이 시골이란 느낌을 풍겨 주었다. 서울이라고 못난이가 없을 리야 없겠지만 대처에서는 못난이들이 거리에 나와 행세를 하지 못하고, 시골에선 아무리 못난이라도 마음 놓고 나와 다니는 때문인지, 못난이는 시골에만 있는 것처럼 흔히 ..

한국단편문학 2023.01.02

도시와 유령 - 이효석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도시와 유령 - 이효석 - 어슴푸레한 저녁, 몇 리를 걸어도 사람의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무인지경인 산골짝 비탈길, 여우의 밥이 다 되어 버린 해골덩이가 똘똘 구르는 무덤 옆, 혹은 비가 축축이 뿌리는 버덩의 다 쓰러져 가는 물레방앗간, 또 혹은 몇백 년이나 묵은 듯한 우중충한 늪가 ! 거기에는 흔히 도깨비나 귀신이 나타난다 한다. 그럴 것이다. 고요하고, 축축하고, 우중충하고. 그리고 그것이 정칙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런 곳에서 그런 것을 본 적은 없다. 따라서 그런 것에 관하여서는 아무 지식도 가지지 못하였다. 하나 나는―자랑이 아니라―더 놀라운 유령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적어도 문명의 도시인 서울이니 놀랍단 말이다. 나는 그래도 문명을 자랑하는 서..

한국단편문학 2022.12.26

광염 소나타 - 김동인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광염 소나타 - 김동인 - 독자는 이제 내가 쓰려는 이야기를, 유럽의 어떤 곳에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여도 좋다. 혹은 사십 오십 년 뒤에 조선을 무대로 생겨날 이야기라고 생각하여도 좋다. 다만, 이 지구상의 어떠한 곳에 이러한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능성뿐은 있다―--- 이만치 알아두면 그만이다. 그런지라, 내가 여기 쓰려는 이야기의 주인공 되는 백성수(白性洙)를 혹은 알벨트라 생각하여도 좋을 것이요 짐이라 생각하여도 좋을 것이요 또는 호모(胡某)나 기무라모(木村某)로 생각하여도 괜찮다. 다만 사람이라 하는 동물을 주인공삼아 가지고 사람의 세상에서 생겨난 일인 줄만 알면……. 이러한 전제로써, 자 그러면 내 이야기를 시작하자..

한국단편문학 2022.12.19

안해(아내) - 김유정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안 해 (아내) - 김유정 - 우리 마누라는 누가 보던지 뭐 이쁘다고는 안할 것이다. 바루 게집에 환장된 놈이 있다면 모르거니와. 나도 일상 같이 지내긴하나 아무리 잘 고처보아도 요만치도 이쁘지 않다. 허지만 게집이 낯짝이 이뻐 맛이냐. 제기할 황소같은 아들만 줄대 잘 빠처 놓으면 고만이지. 사실 우리 같은 놈은 늙어서 자식까지 없다면 꼭 굶어죽을 밖에 별도리 없다. 가진 땅 없어, 몸 못써 일 못하여, 이걸 누가 열첫다고 그냥 먹여줄테냐. 하니까 내 말이 이왕 젊어서 되는 대로 자꾸 자식이나 쌓두자 하는 것이지. 그리고 에미가 낯짝 글럿다고 그 자식까지 더러운 법은 없으렸다. 아 바루 우리 똘똘이를 보아도 알겟지만 즈 에미년은 쥐였다 논 개떡 같에도 좀 똑똑하고 낄끗이 생..

한국단편문학 2022.12.12

물레방아 - 나도향 -

사진을 클릭하여 크게 보세요. " 물레방아 - 나 도 향 - 1 덜컹덜컹 홈통에 들었다가 다시 쏟아져 흐르는 물이, 육중한 물레방아를 번쩍 쳐들었다가 쿵 하고 확 속으로 내던질 제, 머슴들의 콧소리는 허연 겻가루가 켜켜 앉은 방앗간 속에서 청승스럽게 들려 나온다. 솰 솰 솰, 구슬이 되었다가 은가루가 되고 댓줄기같이 뻗치었다가 다시 쾅 쾅 쏟아져 청룡이 되고 백룡이 되어, 용솟음쳐 흐르는 물이 저쪽 산모퉁이를 십 리나 두고 돌고, 다시 이쪽 들 복판을 오 리쯤 꿰뚫은 뒤에 이 방원(芳源)이가 사는 동네 앞 기슭을 스쳐 지나가는데, 그 위에 물레방아 하나가 놓여 있다. 물레방아에서 들여다보면, 동북간으로 큼직한 마을이 있으니 이 마을의 가장 부자요, 가장 세력이 있는 사람으로 이름을 신치규(申治圭)라고 부..

한국단편문학 2022.12.06